동문산 꼭대기가 구름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비를 머금은 무거운 구름은, 남서쪽에서 백두대간 백봉령을 넘고 동해바다로 뻗은 산자락이 옥녀봉에서 솓아오르고, 묵호항을 감싸고 있는 초록봉을 점령하고 사문재를 지나 드디어 악착같이 동해바다 끝까지 내뻗어 있는 동문산 마저 사라지게 만들었다.
노인과 나는, 노인의 산비탈 농토가 내려다 보이는 정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정자 천정에는 장마가 지기 전에 수확해 놓은 노인이 경작한 마늘과 양파가 매달려 있다.
노인은 불편한 몸을 하고도 기를 쓰고 산비탈에서 마늘과 양파를 캐고 짊어지고 올라왔다.
" 제가 와서 도와드려야 하는데......."
"괜찮네, 이런 정도 쯤이야 고향에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세"
노인은 아직 의기양양하다.
그렇지만 노인의 목줄기는 앙상하게 주름이 져 있고, 어깨와 가슴의 근육은 지칠대로 지쳐 축 늘어져 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가지 못했지. 그래도 반에서 10 등 안에 들었는데.......소 몰고 가다 중학교 동창녀석들을 만나면, 소 등 뒤로 숨곤했지.....그러다 옆 동네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어.....품 삯이 일 년에 쌀 한 가마였는데, 일 년이 지나 상 일꾼이 되면 세 가마를 주었는데...... 안지어 본 농사가 없었지. 그러다 군대에 갔지"
노인은 농부였다!
게다가 상일꾼 머슴이었다.
"군대 제대해서 남의 농사 짓기 싫어서 태백 탄광 동원탄좌에 들어갔는데, 거기는 더 했지. 제일 힘든 막장에서 일해도 제일 돈을 적게 받았지.
나중에 알고 보니 공고 출신 놈들이 사측과 붙어 먹고 우리 같이 무지렁이 촌놈들을 가지고 논 거야.“
”그래서, 친구와 둘이서 공고 놈 사무원 한 놈 두둘겨 패고 이곳 묵호항으로 도망을 왔지"
"다행히 잡히진 않았네요."
"잡히긴, 그 당시 묵호항이나, 탄광에는 수 도 없는 범죄자들이 득실거렸지“
"그리고 나서, 몇 년 후에 사북사태가 터진거야. 그 동안 곪아 있던 광부들의 불만이 터진거지. 빨갱이는 무슨 빨갱이. 다 지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돕이지."
노인은 광부였다!
게다가 사북사태 그 이전에 이미 사고를 쳤다.
"오징어 배를 탔는데, 난생 처음 바다를 보고 파도라는 것이 그렇게 어마어마 한지 몰랐어. 작업은 고사하고 똥물까지 토해내다가 선장에게 죽도록 터지고 배를 내렸지"
"그리고는 다시 배를 타지 않았어요?"
"안 탔어. 대신, 어판장에서 리어카를 끓었어.....겨우 먹고 살았지"
노인은 어부였다!
그런데, 배를 탈 수 없었다.
노인의 고향은 경상도 영천이었다.
노인의 형제들은 그 곳에서 돈을 벌기 위해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형 한 명은 6.25 때 행방불명 되었다.
다행히 이곳 묵호항에서 리어카를 끌다가 군대에서 배운 운전으로 오징어 배달 용달차로 기반을 잡아 고향의 어머니를 모셔 올 수 있었고, 어머니는 이곳 묵호에서 돌아가셨다.
해방과 6.25 전쟁은 우리 민족의 거대한 이동을 가져왔다.
고향을 어쩔 수 없이 버리고 타국과 타향을 전전해야 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은 농토 없는 소작인들의 이동을 야기시켰고, 전쟁은 일부 북쪽의 중산층 마저 고향을 버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겨우 고향에서 연명하고 있던 가난한 농부들 마저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정책과 새마을 운동으로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다.
마치 잡초를 뽑아내듯 쑥 쑥 뽑아서 서을의 산동네로 그들을 움직였다.
새마을 운동은, 자본주의 효시가 된 영국의 엔클로져 운동과 몹시도 닮아있다.
신대륙에서 노략질한 스페인의 금을 뽑아오기 위해 프랑스는 모든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 중 하나가 프로렌스 지방의 모직 산업이었는데, 영국의 약삭 빠른 시골 영주들은 그들의 장원의 농토에 말뚝을 박고 양을 치기 시작했고, 억울 하나마 겨우 장원에서 굶어 죽지 않고 살았던 농도들이 거지떼가 되어 영국전역으로 흩어졌다.
그 거지떼들이 영국 산업혁명의 상품생산을 위한 노동력이 되었다. 플로레타리아의 탄생이었다!
칼 맑스는 그 지점에서 눈독을 들이고 자본론을 저술했다.
사실 플로레타리아의 탄생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새로운 한국형 플로레타리아가 200 년 후에 묵호 동문산에서 탄생했다.
노인은 진정한 한국형 플로레타리아였다!
노인과 마주 앉아 노인의 과거를 듣고 이야기 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구름이 점점 동문산 자락에서 내려 앉았다.
장마비는 추적추적 내렸다.
노인과 내 술잔은 말라갔다.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자고 나니, 온통 구름 속에 갇혀버렸다.
노인은 벌써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