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 시집 『이상한 밥집의 밑그림』 해설
* 이영 시인
1994 『한국시』를 통해 신인상 등단
시집 『하늘속살』 『돈의 정거장』 『길위의 날들』 『봄은 봄이 아니었고 봄이었다』 『이상한 밥집의 밑그림』
한국시인협회 회원 강북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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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함의(含意)한 긍정
마경덕 (시인)
이미 약속된 문법으로 우리는 언어를 배우고 사용한다. 예외적인 시 쓰기에서는 정해진 문법을 자신만의 언어로 변형시켜 이해 가능한 언어가 되었을 때 언어는 시적 기능을 발휘한다. 이처럼 시 쓰기에는 언어이자 시로써 필연인 중요한 기능이 있다. 개별적인 작품의 특성을 위해 새로움을 갈구하는 시인들은 익숙함과 안일함을 피해 모험도 불사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느낌과 감각을 확장시켜 작품성을 획득한다.
“내가 읽은 책들은 나의 도끼였다. 나의 얼어붙은 감성을 깨트리고 잠자던 세포를 깨우는 도끼. 도끼 자국들은 내 머릿속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어찌 잊겠는가?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쩌렁쩌렁 울리던, 그 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얼어붙은 감성과 잠자던 세포를 깨우는 책을 날카로운 도끼에 비유한 『책은 도끼다』 의 저자이며 광고인 박웅현 작가는 책을 통해 얻은 예민해진 촉수가 자신의 생업을 도왔다고 한다. 창의력의 전장(戰場)인 광고계에서 30여 년간 광고를 만들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인문학이 있었고, 그 중심에는 ‘책’이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예술평론가인 수잔손탁의 말대로 독자에게 지적인 충족과 희열을 주는 그런 책이 날카로운 도끼일 것이다.
새롭다는 것은 충동적이고 도발적인 것만이 아니다. 어느 시인은 “언어로써 읽히지 않는 시를 주의하여야 할 것은 그렇게 쓰인 시가 새롭고 신기해 보일 수 있으며 그래서 매혹일 수도 있다는 것인데 설령 매혹이기는 해도 고작 매혹일 뿐”이라고 하였다. ‘매혹’에서 끝난다면 시로써, 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시인의 사명은 무엇일까.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상징을 찾아내어 정신세계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을 밝혀내어 독자들에게 그것을 이해시킬 의무가 있다고 한다.
‘매혹’, 그 이상의 깊이를 갖기 위해 이 영 시인은 골몰한다. 시의 면면에 내재된 시적 시그널은 명랑하고 쾌활하다. 그러나 그 틈으로 비집고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시적 서정은 다저녁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곧 저물어버릴, 그래서 그 어둠 속에 가려질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 서정은 어둠과 이어지고 노출된 긴장은 잠잠히 입을 다물어버린다. 가벼움 속에 잠재한 어둠, 그리고 그 무거움을 지그시 누르는 방법이다. 이때 행간과 여백은 독자의 몫이어서 독자는 여백에 자기만의 언어로 슬픔이라는 여운을 기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뭇잎 흩날리던 늦가을
사망신고 하러 갔었지요
이제 아주머니가 세대주가 되셨습니다
주민센터 담당자의 깍듯한 친절에
허술하게 꿰맨 실밥이 터져
십자성 마을이 캄캄했지요
털어낼 수 없는 낯선 세대주는
이토록 여리고 어리게 자라는지요
철없음이 키를 훌쩍 넘어
마스크 한 장으로는 터진 봇물
막을 수가 없었어요
기일 맞은
양평 새하늘공원 봉분 앞에서
세대주 훈장 받아
부러울 게 없다고 자랑했지요
― 「세대주」 전문
배우자의 ‘사망신고’를 손수 해야 하는 아내의 심정은 어떨까. 한 사람의 부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순간 십자성처럼 길잡이가 되어 세상의 풍파를 다 막아주던 남편을 잃고 철없는 아내는 눈앞이 캄캄하다. 뒤편에 서서 늘 의지하고 기대던 그 자리가 세대주의 위치였다. 맨 앞자리에 서서 세대주라는 이름으로 온갖 바람을 맞아야 하기에 허술히 꿰맨 자리가 실밥이 터지듯 쓰라리다. 비상사태에 대처할 그 무엇도 없이 맞닥뜨린 이 사건은 마스크 한 장으로는 도무지 막을 수 없다. 이 막막함을 이 영 시인은 어떻게 견디어냈을까. 그동안 시인이 삶에서 채집한 “삶의 기호들”은 긍정이며 그 힘은 “시의 골격”을 이루며 슬픔을 위무한다.
“기일 맞은 양평 새하늘공원 봉분 앞에서/세대주 훈장 받아/부러울 게 없다고 자랑했지요”에서 보여주듯이 이 영 시인은 반어법으로 슬픔을 환치시킨다. 내면적으로 새로운 진실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짐짓 세대주는 ‘훈장’이라고 무덤 앞에서 자랑을 하고 있지만 이면에 숨겨둔 아픔을 꾹꾹 눌러 삼키는 모습에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깊이를 알 수가 있다. 전해수 평론가는 ‘슬픔’에 대해 “내 안에 간직하기엔 그 크기가 너무 커서 일순간 분노로 바뀌어 나를 둘러싼 세계를 향해 돌을 쥐게 하는 슬픔, 설혹 돌을 던져도 결코 내 안에서는 깨어지지 않는 절대적 슬픔, 혹은 돌을 던져 그 대상을 깨뜨리기에는 더욱이 어려운 바람 같은 슬픔, 그러다가 결국 후회로 남아 뒤돌아보는 처연한 슬픔”을 ‘세계의 슬픔’으로 확대하였다.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상실감’은 사라진 그 빈자리를 들여다보며 오래 앓아야 하기에 “처연한 슬픔”으로 읽힌다. 시의 기제(機制)로 작용하는 슬픔은 제자리로 되돌아와 “마음의 웅덩이”를 만들고 어두운 기억을 향해 불쑥불쑥 발을 걸어 넘어뜨릴 것이다.
잠 속에 나타난 쥐 한 마리
왜 나에게 왔는지요
내 꿈을 갉아먹다가
딱 들켰어요
각목 하나 들고 따라가는데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어요
내 골다골증 어떻게 알았을까요
오늘은 기어이 내 몸의 구멍을 막아야겠습니다
드디어 쥐구멍을 막았습니다
오늘 나는
칼슘 한 알 먹었습니다
― 「한바탕 새벽녘」 전문
쫓기던 쥐가 숨기 좋은 곳은 ‘구멍’이다. 사람의 몸에도 ‘구멍’이 있다. 뼈에 ‘구멍’이 생기는 골다공증은 무기질과 단백질이 줄어들어 뼈 조직이 엉성해지는 증상이다. 골밀도가 낮아져 뼈가 노화되고 있다는 신호이기에 결코 유쾌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이 영 시인은 “내 꿈을 갉아먹다가/딱 들켰어요/각목 하나 들고 따라가는데/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어요” 라고 능청스러움을 보여준다.
「한바탕 새벽녘」 은 마치 새벽에 쥐가 나타나 한바탕 소란을 치르는 광경을 연상하게 한다.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 각목을 들고 잠을 설치던 그 먼 한때가 불쑥 떠오르는 것이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그때는 쥐와 사람이 한집에 살았다. 틈만 보이면 집으로 기어들던 쥐와 쥐를 쫓던 사람과의 관계를 구멍 하나로 연결시킨 재치와 해학(諧謔)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동안 방치한 “몸의 구멍”을 죄다 막아버리겠다는 의지가 “시의 저변”에 깔려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약을 삼키는 행위에서 하릴없이 저물어가는 것들의 애틋함을 느낄 수가 있다. 뚫린 ‘구멍’으로 드나드는 것이 어찌 쥐뿐이겠는가. 삶의 허무와 떠나보낸 것들과 돌아오지 않는 시간과 잊고 싶은 기억도 “몸의 구멍” 속에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슬픔을 덤덤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주인과 이별 후 서랍 속에서 잠자는 도장
외제차 구입하는 조카 보증 섰다가
할부값 체불로 날아온 압류통보
저지를 줄은 알아도 수습은 뒷전
남을 의심할 줄도 거절도 못하는 그 사람 떠나자
앞이 캄캄한 도장도 뒤따라 떠났다
월세에서 내 집 마련, 서너 평씩 넓혀가는 계약서에
도장 찍는 일이란 차 타고 하늘 여행 떠나는 기분
번복, 파기도 안되는 붉은 약속 쿡쿡 눌러 찍던 위풍당당 어디로 가고
몸값 떨어지니 도장밥도 쉰밥 신세다
주인과 도장 도장밥의 삼각관계는
불변의 백수다
― 「도장」 전문
한때 위풍당당하던 ‘도장’은 주인이 떠나고 할 일을 잃었다. ‘도장’이 지닌 권리만큼 책임도 뒤따른다. 문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 그 ‘도장’은 증거가 되어 법적 효력이 발생한다. 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림을 늘려갈 때도 ‘도장’이 등장한다. 월세에서 내 집 마련하고 서너 평씩 넓혀가는 계약서에 ‘도장’ 찍는 일이란 하늘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분수에 넘치는 조카의 허세를 믿고 보증을 선 ‘도장’은 고스란히 부채로 돌아왔다. 남편은 저지를 줄은 알아도 수습은 뒷전이었다. 과시욕으로 비싼 외제차를 구입한 조카의 책임을 떠맡은 것은 아내의 몫이었을 것이다.
독일의 화학자 ‘리비히’의 “최소율의 법칙”에서 “나무통의 법칙”이 있다. 나무판자를 세워 잇대어 만든 나무통에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은 가장 긴 나무판자가 아니라 가장 짧은 나무판자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이다. 식물의 필수영양소 중 성장을 좌우하는 것은 넘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부족한 요소라는 “최소량의 법칙”처럼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에서 짧은 판자 하나의 영향력이 긴 판자 수십 개로 만든 나무통을 좌우하는 것이다. 이 짧은 판자들이 잇대고 잇대어 큰 나무통(사회)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조건이 어긋나면 언제고 파기될 수 있는 약속에 신용은 하락하고 사람과의 관계에 금이 간다. 몸값 떨어지니 도장밥도 쉰밥 신세다. 조카의 말을 믿고 보증을 선 ‘도장’은 가장 “짧은 나무판자”였던 것이다.
으하하하!
대구에서 무선을 타고 다짜고짜 올라온
고모 웃음보따리 받을라치면
덩달아 파안대소 하게 된다
으하하하...
언니 전에는 안 그랬는데 오빠 없음께
그키 좋아여 으하하하
동시다발성 소나기웃음 한바탕 쏟고 나면
체증도 뻥 뚫리고
우중충하던 기압골도 환하게 바뀌었다
주사 한 대에 웃음보가 팡팡 터지는
그런 백신 없을까
― 「웃음보시」 전문
고모와 나누는 대화가 수상하다. “언니 전에는 안 그랬는데 오빠 없음께 그키 좋아여 으하하하”에서 오빠란 누구일까. 분명 그동안 고모에게 심적 부담을 준 인물일 것이다. 까다로운 고모의 친오빠일 수도 있고, 고집 센 고모의 남편일 수도 있다. 고모를 언니라 부르는 조카의 입장에서 보면 고모의 남편은 오빠인 것이다. 촌수를 벗어나 그만큼 친밀도를 나타내는 호칭일 것이다. 한 사람의 부재에 옭아맨 끈이 확 풀리고 드디어 숨통이 트여 동시에 파안대소를 주고 받는 여인들, 한 가정의 행복을 좌우하는 인물은 자신의 뜻대로 권력을 휘두른 사람이며 그 절대적 통제 아래 숨을 죽이고 살던 여자는 “억압의 휘하”에서 벗어나 한껏 자유롭다. 그 빈자리가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일 수도 있고 잠시 비워둔 여백의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한 사람의 빈자리가 이렇게 즐겁다니,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웃음보시」 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웃음은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공감이다. 그 생각에 합류할 때 분위기는 쾌활해진다. 한 사람이 없음으로 이렇게 빈자리가 차고 넘칠 수 있다니 왠지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 슬퍼할 이유가 기쁨의 현장으로 바뀌고 가쁜 숨통이 헐렁해졌다. 드디어 해방이라는 교묘한 심리를 이 영 시인은 허심탄회 주고받는 짧은 대화로 보여주고 있다. 부재중인 시간을 추적하며 거대한 세상도 삶의 한 픽셀이며 면과 모서리가 닳아버린 사소한 것들의 집합 속에 “고통도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경우에도 밝고 명랑한 “긍정의 힘”은 이 영 시인의 시그니처이다. 아래 예시한 「동거」 에서도 이와 같이 유기적인 맥락을 볼 수가 있다.
암(癌)은 입이 많다
위암 4기 수술 이후
통증 없는 중증을 앓고 있다
숫자로 열세한 하나의 입구와
똘똘 뭉쳐 조직화 된 세 개의 입을 가진 암이
장에 기생해서 남의 몫을 야금야금
빼앗는 너를 빗대어
오죽하면 암적인 존재라는 직격탄을 던질까
아귀아귀 포식으로 동거인 목을 죄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의좋게 지내자꾸나
그래 적당히
적당히
― 「동거」 전문
이 영 시인은 위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에도 한번도 어두운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늦은 나이에도 열심히 시를 쓰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며 누구보다 부지런히 건강을 지키며 살아왔다. 어느 날 드러난 ‘암’, 뜻밖에 뿌리가 깊었다. 이 영 시인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목을 조이는 ‘암’을 동거인으로 보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의좋게 지내자고 한다. ‘적당하다’는 말은 ‘정도에 알맞다’는 말이다. ‘알맞음’으로 함께 공존하자는 말인데, 그 ‘알맞음’이 암에게는 통하지 않아 적당히, 적당히, 애원하고 있다.
투병은 병을 이기려고 병과 싸운다는 것인데 그 어디에도 투병이란 말이 없다. 적당히,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함께 살자고 살살 어르며 달래고 있다. 자신보다 먼저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긍정의 힘”이다. 시인은 “현실의 모순”과 맞서면서도 어느 날 들이닥친 “불행”에 흔들리지 않는다. 연습할 시간도 리허설도 허용되지 않는 생, 곳곳에 누적된 통증을 누르며 막막한 절망을 ‘백지 한 장’에 쏟아놓기까지 운명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연극 같은 불편한 진실 앞에 시인의 배역은 결코 악역이 아니었다. 시인이 작품 속에 텍스트로 차용한 이미지는 “온화와 긍정”이다. 시인은 “투병의 지점”에서 긍정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조율하며 운명을 이해하는 중이다. 「동거」 는 “넘어야 할” “넘지 못한” 벽을 통해 삶의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는 세상의 슬픔을 함의(含意)한 작품이다.
잘 있었지?
그럴 리가
재미 좋지
그럴 리가
시 농사는 잘 되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난 왜 그럴 리만 있는 거지
그럴 리를 당연하지로 바꾸기 위해
백지 한 장 펼쳐놓고
멀리 떨어진 시를 기다린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백지를 지나가는 찰나에
잽싸게 시 뒤꿈치를 낚아챈다
시 농부 입가에 번지는 미소
그럴 리가
당연하지로 바뀌는 순간이다
― 「근황」 전문
‘뜻밖’임을 나타내는 ‘그럴 리가’는 “부정의 의미”를 강조하는 말이다. “한 언어가 다른 언어와 대면할 때 그 말의 결을 깨뜨리는 균열을 경험하게 되지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도 함께 만나게 된다”고 한다. 정해진 틀에 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 용기로 언어는 힘을 가진다. 누군가 “시 농사는 잘 되느냐”는 근황을 물어오고 시인은 ‘그럴 리가’로 대답한다. 시를 심어놓은 시의 두둑에 “시의 싹”이 없다는 말이다. 그동안의 시의 작황이 별로 좋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한 시 농사는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부정의 어조(語調)가 가볍고 경쾌하다. 시를 키우는 농부는 수확이 없는 농사에도 실망하지 않고 ‘그럴 리’를 ‘당연하지’로 바꾸기 위해 백지 한 장 펼쳐놓는다. 이러한 적극적인 행위로 인해 반짝이는 시 한 조각을 찾아낸다. 서정이 깃든 보드라운 결에 문득 ‘리넨’처럼 거친 결을 지닌 질감이 문장의 힘으로 작용한다. 시인은 “사물을 작은 단위로 분해하는” 전문가이다. 한계와 무기력을 넘을 수 있는 열정으로 ‘그럴 리가’는 ‘당연하지’로 바뀌게 된다.
어느 화가는 캔버스 위에 무엇인가 시도하고, 물감으로 덮어버리거나 긁어내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며 작업을 지속하는 동력을 얻는다고 한다. 이처럼 시인도 상처를 건드려 번져가는 파장을 기록하며 동력을 얻어낸다. 시인은 시 쓰기를 통해 시와 시인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절실했던 방 하나
따로 가져 보지 못하고 떠나온 고향
고향 지키며 저 혼자 늙어 가는 빈집은
알아야 할 역사와 몰라도 될 비밀을 꿰찬 독거노인이다
옹색할수록 자식 농사 오진 영자네 식솔들 다독여 키워준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 양푼의 정을 나누던 삼남육녀
과거로의 타임머신은 연보라 꽃대궁 한들거리는 마비의 무도장
무장다리 밭에 머물다가 타향에 둥지 튼 혈연들을 그려본다
상주읍 남성동 57번지, 이자 덕자 영자 아버지 문패 걸린
있으나 마나한 대문이, 이름값은 하겠다는 야무진 각오의 대문이
구남매를 반듯하게 지켜주었지
서울 충주 인천 더러는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빈집이었다가
흔적조차 없어진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낮은 그림자 하나
가진 것 보다 없는 것이 풍성함을 되돌아본다
두드리지 않아도 딩딩 울리는 여기
공명음이 가득한
내가 빈집이다
― 「빈집」 전문
시골에 가면 도시로 떠나버린 빈집을 자주 볼 수 있다. 지붕과 마당에 떨어져 뒹구는 감들이 낡아가는 빈집을 지키고 있다. 한때 기억의 서식처였을 폐가들, 요긴한 먹거리였던 홍시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 썩어가고 음습한 기운이 그 집의 주인이 되어간다.
이 영 시인의 고향집은 상주읍 남성동 57번지, 이자 덕자 영자 아버지의 문패가 걸린 집이다. 초라한 대문과 두레밥상에 둘러앉아 양푼 밥을 먹는 삼남육녀가 등장한다. 시인에게 가장 필요한 건 자신만의 방이었다. 크도록 방 한칸 가져보지 못한 가난한 살림에도 구남매는 반듯하게 자랐다. 좁은 방에 발을 포개며 잠들어도 웃음이 그치지 않는 집, 왁자하고 시끌시끌하고 들썩거리던 그 집은 서울 충주 인천 더러는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빈집이 되었다. 그리움은 천천히 가라앉은 ‘앙금’ 같은 것이어서 고향 풍경은 독자의 상상 속에서 다시 일어선다. 의식 저편에 남아있는 가난마저 즐거움으로 환치되고 빈집은 그리움으로 가득 찬다. 변모된 집의 나이를 짐작해보면 시인의 몸도 낡아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하여 “공명음이 가득한/내가 빈집이다”이라고 고백한다. “상처의 목록”으로 기록된 과거의 장소에서 유년을 만날 때 무의식의 내면에 잠복한 통증마저 아름답다. ‘결핍’에서 발화된 시의 다양한 결은 “슬픔을 넘어서는 힘”으로 작용한다. 삶을 견디기 위한 추억을 빈집에 남겨두고 고통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시인은 상처와 반목하지 않고 희망을 조율하고 있다.
지퍼 고장난 배낭
반짇고리 가족에게 일감을 안겨준다
자를 건 자르되
그냥 둬도 용서되는 성형을 맡긴다
안으로 감춰질 솔기는 감치고
드러날 맨살은 긍정의 검정색
장점을 살려 박음지로 돌아가는 수고로움을 택한다
배낭을 의지하던 등허리와 임무 교대
어깨에 걸치거나
사선으로 목에 거는 안정을 꾀한다
새하얀 지퍼가 짙은 눈썹처럼 꿈틀거리는
흑백의 조화로움이
비 온 뒤의 앞산 이마 같다
날개가 잘린 빈 가방의
겨드랑이가 간지러워 외출을 서두른다
감자분처럼 파근파근한 유월의
뭉게구름 한 자락 뚝 떼어
가방에 챙긴다
― 「긍정의 힘」 전문
독자는 한 문장의 끝을, 다음에 올 문장을, 다음에 계속될 페이지를 예측하고 자기의 예측에 들어맞거나 혹은 어긋나는 것을 기대한다고 한다. 어긋난 예측을 보여주는 「긍정의 힘」 은 지퍼가 고장난 배낭을 수리하는 수고로움이 즐거운 놀이로 읽힌다는 것이다. “안으로 감춰질 솔기는 감치고/드러날 맨살은 긍정의 검정색/장점을 살려 박음지로 돌아가는 수고로움을 택한다”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 수선하는 즐거움은 ‘완성’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지퍼를 갈아 끼우는 일은 만만치가 않은 일이어서 대부분 수선집에 맡기게 되지만 이 영 시인은 손수 수선한 가방이 “비 온 뒤의 앞산 이마 같다”고 한다. 존재감을 상실한 것들이 시인의 손끝에서 다시 뿌듯하게 살아난다. 낡고 병들고 버려지는 우리의 삶, 이 영 시인은 한계에 묶인 일상을 털어내고 재생 가능한 생의 “한때”를 보여준다. 수선이라는 명제로 각박한 “삶의 품”을 넓히며 낡은 삶도 새롭게 편집하고 있다.
변기에 앉아 물을 네 번 내렸다
불량한 배변에 놀라
오늘 이전
무얼 먹었던가를 곰곰이 더듬어 본다
먹는 만큼 배설한다는 장기와 항문
정직성을 의심하며
위암4기 수술 이후
넉 달 째 덤으로 살고 있다 걸핏하면
덤, 덤 하지만
덤은 공짜가 아니다
무통 무증상을 비웃듯 죈 목줄
무덤덤 헐렁하게 풀어놓지 못해
바짝 움켜쥐고 따라다니는,
시한부의 무임승차 같은 덤은
서른 배의 서른 번을 곱한 과태료를
지불하고 있다는 나름의 계산이
환자이자 주치의인 내가 뽑은 데이터다
0과 1로 짜여진 수학적 공식이 아닌
또에 목숨을 거는 환자와
무면허 의사의 진단은
돌팔이를 키운 이중성이
치유를 방해하고 있다는
회진의 결론이다
― 「변기에 앉아」 전문
시 쓰기는 타락한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그 세계를 지탱하는 “타락한 언어에 대한 싸움”이라고 하였다. “언어의 도취를 위해 시를 쓰지 않고 그 언어의 도취를 깨우기 위해” 시를 쓴다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일상의 틈에서 마주친 사소한 일을 수집하고 그 내면의 파동을 기록하는 이 영 시인은 언어의 도취를 깨우기 위한 시를 쓴다. 의심하고 의심하여 의심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하는 ‘방법적 회의’가 모든 학문의 시작이라고 믿었던 데카르트처럼 시인도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다가가 질문을 쏟아놓는다. 그 누가 예기치 못한 운명에게 관대할 수 있을까. 이 영 시인이 앉아있는 장소는 변기가 있는 화장실이다. 예측이 불가한 목숨줄을 앞에 놓고 나약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대해 자신에게 묻고 있다.
“시한부의 무임승차 같은 덤은/서른 배의 서른 번을 곱한 과태료를/지불하고 있다는 나름의 계산이/환자이자 주치의인 내가 뽑은 데이터다/0과 1로 짜여진 수학적 공식이 아닌”에서 짐작하듯이 죽음이라는 “명시적 기억”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공식”과 “신의 공식”이 다를 것인데 누가 자신의 운명을 미리 계산할 수 있으랴.
‘소크라테스’는 문학이 가진 기능에 대해 자신을 “소등에 붙은 등에”라고 했다. ‘등에’는 소한테 붙어 ‘소의 피’를 빨며 소를 괴롭힌다. 이렇듯 문학의 기능은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문학은 그 인식의 대상 중에서 특히 인간의 내면을 다룰 때 다른 장르와 첨예하게 달라져 가장 훌륭한 깊이에 도달한다”고 한다. 시인의 “시적 궤적”을 읽어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대변하는 진지한 “삶의 형식”에 있을 것이다. 이 영 시인의 진정성이 돋보이는 시편들은 내면에 응축된 상처들,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는 좌절을 통해 삶의 가치와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며 리얼리티 방식으로 전개되는 「변기에 앉아」 는 개인의 서사를 뛰어넘어 인간의 근원적인 비애를 보여준다. 냉정한 “현실”을 허물고 극복하려는 아픔도 결국 “삶의 일부”인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 “시를 밥”이라고 믿고 살아온 시인의 ‘밑그림’ 속에는 내면에 잠재한 “긍정의 힘”이 곳곳에서 “방어기제” 역할을 하고 있다. 비애와 슬픔, 스러져가는 존재의 허무함을 기록할 때 그 힘은 기폭제가 되어 암울한 기운을 환기시키고 “슬픔을 함의한 긍정”은 삶의 의욕을 제공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