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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선암사 측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4호). 절집에서는 가랑잎을 모아두었다가 똥 위에 덮는데, 선암사처럼 뒷간이 깊은 데서는 다락 아래로 들어가 덮는다. ⓒ두피디아
<집을 읽다>
한국의 뒷간
‘뒷간’은‘뒤에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더러운데다가 냄새도 나는 까닭에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데 둔 것이다.
이름
된소리 ‘편’이 ‘변’으로 바뀐 것이다. 똥을 누면 ‘크게 편하고(大便)’, 오줌을 싸면 ‘작게 편하다(小便)’는 말이다. 요즘 부쩍 눈에 띄는 ‘근심 더는 데(解憂所)’는 한 스님의 창작품이라 한다. 급할 때로 말하면 이보다 더 큰 근심도 없으니 참으로 그럴듯하다. 서구의 ‘Rest Room’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일본사람들이 쓰다버린‘ 화장실’이 주인자리를 차지한 것은 씁쓸한 일이다.
절집의 이름은 정랑淨廊이다. ‘깨끗하다’는 뜻의 ‘정’ 은 부처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를테면 걱정근심이 없는 극락을 정토淨土, 절집을 정원淨院이라 하는 것이 좋은 보기이다. ‘낭’은 복도, 행랑의 뜻으로 좌우에 남녀 칸을 두므로 복도가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선종禪宗에서는 공양을 들고, 잠을 자고, 몸을 씻고, 똥오줌 누는 일까지도 수행과정으로 삼아 엄격한 규범을 지킨다.뒷간에 적어두는 입측오주入厠五呪는 곧 세정洗淨· 세수洗手· 거예去濊· 정신淨身· 무병수無甁水다섯 가지이다.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부여 낙화암 절벽의 고란사에서는 우리말로 풀었다. 제목(뒤볼 때 마음) 다음에 ‘내 몸에 있는 모든 병과 근심 걱정이 대소변과 함께 빠져지이다’ 하는 머리글과 입측오주에 이어 ‘대소변을 바로 보되 밑을 보지 말고 입을 다물고 글 쓴 종이는 삼가라’ 는 주의도 곁들였다.
02. 03. 영월 보덕사 해우소(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2호). 앞뒤 2열로 나누어 각각 6칸씩의 대변소를 배치하여 남녀의 사용을 구분하면서 12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문화재청
휴대용 변기
궁중 뒷간도 너무 멀리 떨어져서, 나인들은 둘씩 셋씩 짝을 지어 드나들었다. 이처럼 안팎 뒷간을 멀리 둔 것은 요강 덕분이다. 본디‘작은 일’을 위한 것이지만 ‘큰 일’도 보았다. 상류층은 물론 서민들에게도 요강은 필수품이어서, 혼수품 가운데 놋요강과 놋대야를 첫손에 꼽았다. 18세기 초에 나온『산림경제』에도 ‘살림이 어려우면 대야 대신 요강 둘을 가져간다’는 기사가 있다. 말탄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가마 탄 색시나 마나님도 작은 ‘길요강’을 썼다.
가장 오래 된 요강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군수리軍守里의 백제 말기 절터에서 남녀용 두 개가 나왔다. 남성용은 궁둥이를 뒤로 빼고 쭈그려 앉은 범이, 입을 크게 벌려 으르렁거리는 모습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어린 범으로, 말방울 같은 눈과 가는 코를 해학적으로 나타내었고 등에 손잡이를 붙였다. 높이는 25.2cm로, 무릎을 바닥에 대고 오줌을 누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같은 요강을 널리 썼다. 여성용의 크기는 높이 19.6cm, 너 비 26cm이다. 삐죽한 주둥이가 달린 쪽은 조금 낮고, 반대쪽의 운두는 이보다 높다. 형태로 보면 밭에 거름을 줄 때 쓰는 귀때동이 그대로이다. 손잡이의 위치나 크기도 요강에 걸맞지 않는다. 요강이 아니라 귀때동이의 한 가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04.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호자(虎子). 가장 오래 된 요강으로, 궁둥이를 뒤로 빼고 쭈그려 앉은 범이 입을 크게 벌려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문화콘텐츠닷컴
05. 순천 선암사(사적 제507호)의 해우소.‘근심 더는 데’라는 뜻의 해우소는 한 스님의 창작품이라 한다. 급할 때로 말하면 이보다 더 큰 근심도 없으니 참으로 그럴듯하다. ⓒ연합콘텐츠
06. 예천 삼강주막(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4호)의 뒷간. ⓒ연합콘텐츠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재료의 요강이 나왔다. 도기나 자기 그리고 유기 외에 오동나무에 옻칠을 하거나 쇠가죽에 기름을 먹인 것도 나돌았다. 큰 집에는 요강 닦는 일을 도맡아 하는 어린 ‘요강 담사리’를 따로 두었다.
임금 것은 침전과 편전 그리고 정사를 보는 세 곳에 두었고, 마칠 때까지 내시나 지밀상궁이 곁에 서 있었다. 따라서 매우틀있는 곳이 뒷간인 셈이다. ‘매우梅雨’는 똥오줌을 이르는 한자로, 매梅는 ‘큰 것’을, 우雨는 ‘작은 것’을 나타내는 향기로운 이름이다. 본디 순수한 우리말을 한자로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매화틀’로 더 알려졌다. ‘뒤보는 일’을 매화타령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으로,‘매우’는 실상‘ 매화’로 들리기 쉽다. 일반에서도 뒷간을 매화간이라 이르기도 한다.
07.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에서 출토된 백제토기(변기형 토기). ⓒ연합콘텐츠
08.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가 사용한 이동식 화장실인 매우틀. ⓒ연합콘텐츠
밑씻개
뒷간지기
따라서 뒷간에 다가가면 반드시 헛기침을 세 번 해야 탈이 없다. 이 귀신은 6월 16일과 26일 등 6자가 든 날에만 머문다.
글. 김광언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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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무가 중 <문전본풀이> 아들이 많아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배를 마련하여 쌀장사를 하기 위해 오동 나라 오동 고을을 찾아갔다. 거기에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간악하기로 소문난 그녀는 남선비를 집으로 불러들여 내기 장기를 두어, 남선비의 배와 곡식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오갈데 없이 가련한 신세가 된 그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을 첩으로 삼아, 그녀의 집에서 끼니를 얻어먹게 되었다. 간악한 첩이 남편을 잘 모실 리가 없었다. 그녀가 끓여다 주는 겨죽으로 몇 해를 연명하는 사이에 남선비는 눈까지 어두워졌다.
하지만 눈이 어두운 남편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녀가 밥을 해 올리자, 남선비는 그녀가 자기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 만단 정화를 나누었다. 그 때에 집에 돌아온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여산 부인에게 예까지 오느라고 고생을 했다고 하면서 목욕을 가자고 권하였다. 그 말을 순진하게 받아들인 여산 부인은 귀일의 딸 뒤를 따라 주천강 연못가로 목욕을 나갔다. 귀일의 딸은 등을 밀어주는 체하다가 여산 부인을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부모가 돌아올 것을 예상한 아들 일곱 형제는 선창가로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기들 어머니가 아닌 것 같아, 집에 돌아가는 길을 아는 지와 밥상을 차리는 것을 보기로 하였다. 과연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자기들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 날부터 일곱 형제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귀일의 딸은 여섯 개의 간을 먹는 체하며 자리 밑에 묻어두고 피만 입에 바르는 척 마는 척하였다. 녹디성인은 귀일의 딸 머리채를 잡아 엎질렀다. 그러고는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형들을 불렀다. 형들이 동서에서 달려들자, 귀일의 딸은 도망을 치다가 막대기에 목이 걸려 죽었다. 그래서 주목지신(株木之神)·정살지신이 되었다.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변소로 도망을 쳐서 목을 매어 죽었다. 변소의 신인 측도부인(厠道婦人)이 된 것이다.
머리털은 끊어 던지니 바다에 가 해초가 되었고, 입을 끊어 던지니 바다의 솔치가 되었다. 또 손톱·발톱은 쇠굼벗·돌굼벗(딱지 조개의 일종)이 되고, 배꼽은 굼벵이가 되었으며, 항문은 대전복·소전복이 되었다. 그리고 육신은 빻아서 바람에 날리니 각다귀·모기가 되었다.
그렇게 하여 어머니를 살려내어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춘하추동 사시절을 물속에서 지냈으니 몸인들 안 추울 리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루 세 번 더운 불을 쬐면서 조왕할망으로 앉아 얻어먹기 마련하십시오.”라고하면서 조왕신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일곱 형제는 제각기 자기의 직분을 차지하여 신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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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의 제사에 관한 자료에 측신(厠神)은 없다. 예기(禮記)에 나오는 오사(五祀)는 戶 ? ? ? 中? ? 門 ? 井 이고, 七祀는 사명(司命)· 호(戶)· 조(?) · 문(門)· 여(?)· 행(行)· 중류(中?) 이다.
부엌신, 즉 조왕(?王)신은 "여름[火旺之節]에 부뚜막(?)에 제사 지내는 것은, 부뚜막이 불의 주인으로 만물을 장성하게 기르기 때문이며, " 하여 지내왔고 측신은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민속신앙으로 보인다. <夏祭?, ?者火之主 人所以自養也 夏亦火王, 長養萬物 (四書全書: 經部, 五禮通考, 卷五十三)>
禪家龜鑑(선가귀감)
배움이 도에 이르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한갓 교묘한 말재주로써 돋보이려고 하는 것은 측간에 울긋불긋 색을 칠하는 것과 같다.266)
學未至於道, 衒耀見聞, 徒以口舌辯利相勝者, 如厠屋塗丹?.
그래서 뒤깐에 단청을 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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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