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자유 게시판 스크랩 한국의 뒷간 <집을 읽다>
이장희 추천 0 조회 76 16.01.14 23: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01. 선암사 측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4호). 절집에서는 가랑잎을 모아두었다가 똥 위에 덮는데, 선암사처럼 뒷간이 깊은 데서는 다락 아래로 들어가 덮는다. ⓒ두피디아

 

<집을 읽다>

 

 

한국의 뒷간

 

‘뒷간’은‘뒤에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더러운데다가 냄새도 나는 까닭에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데 둔 것이다.
우리 겨레는 시베리아의 찬바람을 등지고‘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다.
따라서 앞은 ‘남’, 뒤는 ‘북’ 이었다.


『용비어천가』에서 북천동北泉洞을 뒷샘골, 『훈몽자회』에서‘ 북北’ 을 ‘뒤 북’이라 새긴 것이 그것이다.
뒷물하는 공간도 북수간北水間이었으며 근래까지도 똥 누는 것을 ‘뒤 보기’, 밑 닦는 종이를 ‘뒤 지’라 불렀다.

 

 

이름


신라시대 이전은 알 수 없고, 고려 때는 중국 이름 ‘측厠’으로 적었으며 조선시대 상류층은 측간厠間, 서민은‘ 변소便所’라 불렀다. 중국에서 온 변소의‘ 변’ 은 본디 ‘편’으로 ‘편안한 곳’을 가리킨다.

된소리 ‘편’이 ‘변’으로 바뀐 것이다. 똥을 누면 ‘크게 편하고(大便)’, 오줌을 싸면 ‘작게 편하다(小便)’는 말이다. 요즘 부쩍 눈에 띄는 ‘근심 더는 데(解憂所)’는 한 스님의 창작품이라 한다. 급할 때로 말하면 이보다 더 큰 근심도 없으니 참으로 그럴듯하다.

서구의 ‘Rest Room’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일본사람들이 쓰다버린‘ 화장실’이 주인자리를 차지한 것은 씁쓸한 일이다.

 

절집의 이름은 정랑淨廊이다. ‘깨끗하다’는 뜻의 ‘정’ 은 부처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를테면 걱정근심이 없는 극락을 정토淨土, 절집을 정원淨院이라 하는 것이 좋은 보기이다.

‘낭’은 복도, 행랑의 뜻으로 좌우에 남녀 칸을 두므로 복도가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선종禪宗에서는 공양을 들고, 잠을 자고, 몸을 씻고, 똥오줌 누는 일까지도 수행과정으로 삼아 엄격한 규범을 지킨다.뒷간에 적어두는 입측오주入厠五呪는 곧 세정洗淨· 세수洗手· 거예去濊· 정신淨身· 무병수無甁水다섯 가지이다.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부여 낙화암 절벽의 고란사에서는 우리말로 풀었다.

제목(뒤볼 때 마음) 다음에 ‘내 몸에 있는 모든 병과 근심 걱정이 대소변과 함께 빠져지이다’  하는 머리글과 입측오주에 이어 ‘대소변을 바로 보되 밑을 보지 말고 입을 다물고 글 쓴 종이는 삼가라’ 는 주의도 곁들였다.

 

 

 

02. 03. 영월 보덕사 해우소(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2호). 앞뒤 2열로 나누어 각각 6칸씩의 대변소를 배치하여 남녀의 사용을 구분하면서 12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문화재청

 

 

휴대용 변기


조선시대 상류가옥에는 아낙의 안뒷간과, 남정네의 바깥뒷간이 따로 있었다. ‘사돈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는 속담처럼, 이들은 멀리 떨어진 구석에 두었다. 경주 양동의 손씨집과 안동 하회의 충효당(보물 제414호)이
대표적으로 바깥뒷간을 아예 담밖에 두었으며 안뒷간을 담 밖에 세운 것도 더러 보인다.

궁중 뒷간도 너무 멀리 떨어져서, 나인들은 둘씩 셋씩 짝을 지어 드나들었다. 이처럼 안팎 뒷간을 멀리 둔 것은 요강 덕분이다. 본디‘작은 일’을 위한 것이지만 ‘큰 일’도 보았다. 상류층은 물론 서민들에게도 요강은 필수품이어서, 혼수품 가운데 놋요강과 놋대야를 첫손에 꼽았다.

18세기 초에 나온『산림경제』에도 ‘살림이 어려우면 대야 대신 요강 둘을 가져간다’는 기사가 있다. 말탄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가마 탄 색시나 마나님도 작은 ‘길요강’을 썼다.

 

가장 오래 된 요강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군수리軍守里의 백제 말기 절터에서 남녀용 두 개가 나왔다. 남성용은 궁둥이를 뒤로 빼고 쭈그려 앉은 범이, 입을 크게 벌려 으르렁거리는 모습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어린 범으로, 말방울 같은 눈과 가는 코를 해학적으로 나타내었고 등에 손잡이를 붙였다. 높이는 25.2cm로, 무릎을 바닥에 대고 오줌을 누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같은 요강을 널리 썼다. 여성용의 크기는 높이 19.6cm, 너 비 26cm이다. 삐죽한 주둥이가 달린 쪽은 조금 낮고, 반대쪽의 운두는 이보다 높다. 형태로 보면 밭에 거름을 줄 때 쓰는 귀때동이 그대로이다. 손잡이의 위치나 크기도 요강에 걸맞지 않는다. 요강이 아니라 귀때동이의 한 가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04.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호자(虎子). 가장 오래 된 요강으로, 궁둥이를 뒤로 빼고 쭈그려 앉은 범이 입을 크게 벌려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문화콘텐츠닷컴

 

05. 순천 선암사(사적 제507호)의 해우소.‘근심 더는 데’라는 뜻의 해우소는 한 스님의 창작품이라 한다. 급할 때로 말하면 이보다 더 큰 근심도 없으니 참으로 그럴듯하다. ⓒ연합콘텐츠

 

06. 예천 삼강주막(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4호)의 뒷간. ⓒ연합콘텐츠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재료의 요강이 나왔다. 도기나 자기 그리고 유기 외에 오동나무에 옻칠을 하거나 쇠가죽에 기름을 먹인 것도 나돌았다. 큰 집에는 요강 닦는 일을 도맡아 하는 어린 ‘요강 담사리’를 따로 두었다.


궁중의 왕과 왕비가 쓴 매우틀도 빼놓을 수 없다. 창덕궁(사적 제122호)에 있던 매우틀(가로 39.5cm, 세로 22.5cm, 높이 21cm)은 겉에 우단을 씌웠으며 뒤는 터지고 앞은 막혔으며 위에 긴 네모꼴 구멍이 있다. 걸터앉아 일 볼 때는 틀 아래 쪽 좌우 양쪽에 붙인 턱에 다리를 올려 놓는다. 또 전면 안쪽의 긴 네모꼴 구멍에 얇은 널로 짠 가리개를 세운다. 이를 담당한 복이나인은 잘게 썬 여물이 깔린 그릇을 틀안에 넣었다가 귀인이 일을 마치면 그 위에 여물을 다시 뿌려 덮는다.

 

임금 것은 침전과 편전 그리고 정사를 보는 세 곳에 두었고, 마칠 때까지 내시나 지밀상궁이 곁에 서 있었다. 따라서 매우틀있는 곳이 뒷간인 셈이다. ‘매우梅雨’는 똥오줌을 이르는 한자로, 매梅는 ‘큰 것’을, 우雨는 ‘작은 것’을 나타내는 향기로운 이름이다. 본디 순수한 우리말을 한자로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매화틀’로 더 알려졌다. ‘뒤보는 일’을 매화타령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으로,‘매우’는 실상‘ 매화’로 들리기 쉽다. 일반에서도 뒷간을 매화간이라 이르기도 한다.

 

 

07.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에서 출토된 백제토기(변기형 토기). ⓒ연합콘텐츠

 

08.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가 사용한 이동식 화장실인 매우틀. ⓒ연합콘텐츠

 

 

밑씻개


절집에서는 가랑잎을 모아 두었다가 똥 위에 자주 덮는다.
냄새도 줄고 가랑잎과 함께 썩으면 좋은 거름도 되기 때문이다. 선암사처럼 뒷간이 워낙 깊은 데서는 다락 아래로 들어가 덮지만 흔히 뒤를 본 사람이 위에서 뿌린다. 따라서 이러한 곳에는 가랑잎이 담긴 자루를 입구에 놓는다.


옛 적 상류 가옥에서는 뒷간 앞쪽에 겨를 쌓아 두었다가 몽당비로 쓸어 덮었다. 이로써 냄새를 막는 동시에 뒤에 거름이 되어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농촌의 밑씻개는 나뭇잎이나 채소 잎 또는 옥수수수염 따위였으며, 이것이 없는 철에는 짚으로 대신하였다. 한쪽에 세워둔 짚단에서 서 너 개를 뽑아 들고, 두세 번 꺾어 손에 쥐면 그런대로 쓸만하였다. 그러나 이마저 귀한 집에서는 뒷간 앞뒤에 박은 말뚝에 걸어놓은 새끼줄을 이용하였다. 항문에 대고 서 너 걸음 걸어서 닦았고 똥이 말라붙으면 털고 다시 걸었다.


중국의 진晉나라 때 나온 대나무 주걱(厠籌 측주)이나 긴 나무 조각은 우리 절집에도 들어왔다. ‘뒷나무’가 그것으로 길이 20cm에 너비 5cm 쯤으로 항문에 바짝 대고 한쪽으로 밀면 그런대로 문제가 없었다. 조선의 임금이 뒤지 대신 명주 세 필을 썼다는 말은 우스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뒷간지기


우리는 예부터 뒷간지기를 모셨다. 이름도 ‘뒷간 귀신’, ‘부출 각시’, ‘측도 부인’, ‘측신 각시’, ‘치귀’,‘ 정낭 귀신’ 따위이다. 귀신은 젊은 색시로 노여움을 잘 타고 성질도 사납다고 한다. 뒷간에서 갑자기 죽거나 병을 얻는 것은 모두 그네 장난 탓이다.


강원도의 측신 각시는 언제나 발밑의 긴 머리카락을 헤아리다가 사람이 갑자기 들어오면, 놀란 나머지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뒤어 씌운다. 이때 얻은 병은 무당의 굿발도 듣지 않아 마침내 죽는다.

따라서 뒷간에 다가가면 반드시 헛기침을 세 번 해야 탈이 없다. 이 귀신은 6월 16일과 26일 등 6자가 든 날에만 머문다.


제주도 무당노래「(문전본풀이)에 남씨의 첩(노일제대귀일의딸)이 본처를 죽이고 일곱 아들까지 없애려다가 뒷간으로 쫓긴 끝에 ‘측도부인’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써 남씨 아내 조왕신과 원수가 되었고, 부엌과 뒷간을 멀 리 떨어진 곳에 두는 까닭도 이것이라 한다.


시월 상달 고사 때 뒷간에도 반드시 떡을 바친다. 강원도에서 뒷간을 지으면 날을 받아 음식을 차리고 불을 밝히고 ‘탈 없도록 도우소서’ 읊조린다. 제주도에서는 돼지의 돌림병이 퍼지면 이같이 한다.
16세기말 영국에서 나온 수세식변기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인류가 만든 가장 뛰어난 발명품의 하나라는 말까지 돌았지만, 물이 하루가 다르게 모자라는 오늘날 사정을 생각하면 재앙을 불러온 최악의 발명품이라는 악평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글. 김광언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

 

 

 

제주도 무가 중 <문전본풀이>

(1) 줄거리
우리나라에 있어서 측간귀신의 내력 이야기는 제주도의 심방들 사이에서 불려지고 있는 제주도 무가 중 <문전본풀이>에 그 유래가 나타난다.
집안의 각철로 관장하고 있는 신들의 형성유래담인 이 신화에 의하면, 노일제대귀의 딸은 남(南)선비의 첩이다. 그가 본부인을 죽이고 그의 일곱 아들까지 죽이려다 흉계가 드러나 전처소생의 아들에게 쫓겨 측간으로 도망가 55자나 되는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목을 매어 죽어 변소귀신이 되었다 한다.

<문전본풀이> 중 측간부인 설화 본문

옛날에 남선 고을의 남선비는 여산 고을의 여산 부인과 부부가 되어 아들 7형제를 두었다.

아들이 많아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배를 마련하여 쌀장사를 하기 위해 오동 나라 오동 고을을 찾아갔다. 거기에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간악하기로 소문난 그녀는 남선비를 집으로 불러들여 내기 장기를 두어, 남선비의 배와 곡식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오갈데 없이 가련한 신세가 된 그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을 첩으로 삼아, 그녀의 집에서 끼니를 얻어먹게 되었다. 간악한 첩이 남편을 잘 모실 리가 없었다. 그녀가 끓여다 주는 겨죽으로 몇 해를 연명하는 사이에 남선비는 눈까지 어두워졌다.


한편, 여산 부인은 3년 동안을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아들네가 준비해준 배를 타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오동 고을에 닿은 그녀는 남편의 개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를 찾아갔다.

하지만 눈이 어두운 남편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녀가 밥을 해 올리자, 남선비는 그녀가 자기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 만단 정화를 나누었다. 그 때에 집에 돌아온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여산 부인에게 예까지 오느라고 고생을 했다고 하면서 목욕을 가자고 권하였다.

그 말을 순진하게 받아들인 여산 부인은 귀일의 딸 뒤를 따라 주천강 연못가로 목욕을 나갔다. 귀일의 딸은 등을 밀어주는 체하다가 여산 부인을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여산 부인의 옷을 벗겨서 입고는 남선비에게 돌아가 큰 부인 행세를 하면서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행세가 나빠 주천강 연못가에 데리고 가 죽였다.”고 하였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남선비는 자기 원수를 갚아주었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남선 고을을 향해 떠났다.

부모가 돌아올 것을 예상한 아들 일곱 형제는 선창가로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기들 어머니가 아닌 것 같아, 집에 돌아가는 길을 아는 지와 밥상을 차리는 것을 보기로 하였다. 과연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자기들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 날부터 일곱 형제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이 사실을 안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꾀병을 부리며 일곱 형제의 생간을 먹어야 하겠다고 하였다. 막내 동생 녹디성인은 청태산 마구 할망의 도움을 받아 산돼지의 간을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 형들의 간이라고 하였다.

귀일의 딸은 여섯 개의 간을 먹는 체하며 자리 밑에 묻어두고 피만 입에 바르는 척 마는 척하였다. 녹디성인은 귀일의 딸 머리채를 잡아 엎질렀다. 그러고는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형들을 불렀다.

형들이 동서에서 달려들자, 귀일의 딸은 도망을 치다가 막대기에 목이 걸려 죽었다. 그래서 주목지신(株木之神)·정살지신이 되었다.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변소로 도망을 쳐서 목을 매어 죽었다. 변소의 신인 측도부인(厠道婦人)이 된 것이다.


일곱 형제가 달려들어 죽은 위에 다시 복수를 하려고 두 다리를 찢어발겨 드딜팡(용변을 볼 때에 디디고 앉는 납작한 돌)을 마련하고, 대가리는 끊어 돝도고리(돼지먹이통)를 마련하였다.

머리털은 끊어 던지니 바다에 가 해초가 되었고, 입을 끊어 던지니 바다의 솔치가 되었다. 또 손톱·발톱은 쇠굼벗·돌굼벗(딱지 조개의 일종)이 되고, 배꼽은 굼벵이가 되었으며, 항문은 대전복·소전복이 되었다. 그리고 육신은 빻아서 바람에 날리니 각다귀·모기가 되었다.


일곱 형제는 황세곤간이 관리하고 있는 서천꽃밭으로 가서 도환생꽃을 얻어와 오동 나라 오동 고을의 주천강 연못가로 달려갔다. 하느님께 축수를 드려 연못물을 마르게 한 다음, 뼈만 남은 시체에 도환생꽃을 올려놓고 금붕체로 후리쳤다.

그렇게 하여 어머니를 살려내어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춘하추동 사시절을 물속에서 지냈으니 몸인들 안 추울 리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루 세 번 더운 불을 쬐면서 조왕할망으로 앉아 얻어먹기 마련하십시오.”라고하면서 조왕신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일곱 형제는 제각기 자기의 직분을 차지하여 신들이 되었다.」

 

문화콘텐츠 닷컴

 

 

=================

 

 

 

 

고대 중국의 제사에 관한 자료에 측신(厠神)은 없다.

예기(禮記)에 나오는 오사(五祀)는 戶 ? ? ? 中? ? 門 ? 井 이고, 七祀는 사명(司命)· 호(戶)· 조(?) · 문(門)· 여(?)· 행(行)· 중류(中?) 이다.

 

부엌신, 즉 조왕(?王)신은 "여름[火旺之節]에 부뚜막(?)에 제사 지내는 것은, 부뚜막이 불의 주인으로 만물을 장성하게 기르기 때문이며, " 하여 지내왔고 측신은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민속신앙으로 보인다.

<夏祭?, ?者火之主 人所以自養也 夏亦火王, 長養萬物 (四書全書: 經部, 五禮通考, 卷五十三)>

 

 

 

 

禪家龜鑑(선가귀감)

 

배움이 도에 이르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한갓 교묘한 말재주로써 돋보이려고 하는 것은 측간에 울긋불긋 색을 칠하는 것과 같다.266)

 

學未至於道, 衒耀見聞,

徒以口舌辯利相勝者, 如厠屋塗丹?.

 

 

그래서 뒤깐에 단청을 안하나?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