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 나타난 이단 유형
(1) 혼합적 유형
한국에 발생한 이단들의 유형 중에 가장 특징적인 것은 혼합적 유형을 들 수 있다. 모든 이단들이 혼합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 중에도 대표적인 것이 통일교다. 이른바 문선명의 통일교 집단을 해부해 보면 완전히 잡탕이다. 그들이 경전처럼 생각하고 있는 '원리강론'을 보면 이것이 현저히 드러난다. 김경재는 '원리강론은 잡탕이며 비빔밥이며 모자이크식 종교혼합주의이다. 동서철학 종교사상史를 어느 정도 섭렵한 사람들의 눈에는 원리 강론이 논리적으로도 자가당착이며 원리를 말하면서도 모순상충되는 원리들을 종교적 영감과 계시의 이름으로 위장하여 사람들을 현혹시켜 끌고 있는 것이다'(기독교사상 1989년 2월호 p.28)라고 했다.
한국에 발효하고 있는 그리스도적 이단을 살펴보면 이교적인 요소가 매우 짙게 혼합되어 있다. 물론 어떤 종교가 타 문화권 안에 종교와 접촉될 때는 혼합현상이 일어날수 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종교의 기본교리나 그 종교만이 가지고 있는 절대진리 체계가 혼합되거나 희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종교의 어떤 외적인 형식이나 의식의 틀을 달리할 수는 있어도 그 종교의 핵심이 되는 내용마저 혼합된다고 하면 종교 자체의 변질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귀신론도 성서적 귀신론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한국 무속신앙에서 귀신은 사람이 죽은 혼이 귀신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베뢰아 아카데미의 김기동은 마귀를 죽은 자의 영으로 보고 있으며, 또 신령한 체험을 기초로 하여 귀신의 정체를 파헤친 것이라고 하여 자기의 주관적 체험을 근거로 하여 마귀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성서적 마귀론을 무속적 마귀론과 혼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는 세계 모든 종교가 들어와 다종교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동시에 종교혼합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사이비 신앙이나 이단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이로 인한 피해는 크다.
(2) 현세·구복적 유형
구복형의 신앙은 현세에 부귀영화를 달성하고 질병이나 재앙을 피해버려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역사적 의식이 결여되고 이웃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식이 있을 수 없다. 기복신앙은 미래적이고 영적인 가치추구가 희박하다. 그리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현세의 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종교의 저급화를 이루고 우상숭배와 미신화를 조장하게 된다.
여기서 극단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기복사상이 나타나게 되고, 남이야 어떻든 자기만 복받으면 된다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이러한 기복신앙으로 인해서 신흥종교나 사이비 신앙운동이나 이단에 빠지는 근본요인이 종교적 계율이나 숭고한 가르침에 있지 않고 현세적이고 이기적인 기복심성에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의 종교적 기복심성이 종교문화를 형성하는데 부정적인 요인만 되는 것은 아니다. 구복심성이 인간의 현세적 생존 동기의 원동력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번창하게 하는 동기도 되고, 신을 찾는 열심도 갖게 한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교회가 부흥 발전하는 근저에는 기복신앙이 깔려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복을 바라는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복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기복심성이 한국교회에 긍정적으로 끼친 영향은 접어두고 다만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보면 다분히 기복적 신앙으로 감염되어 있음을 보게된다.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나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여 기도하는 내용이나 십일조나 헌금하는 이유가 축복의 조건이나 보장으로 하는 일이 없잖아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복을 많이 받아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같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교회가 지향해야할 가치관과 세속적인 가치관이 혼돈되고 있다. 좋으신 하나님께 잘 보이면 삼박자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사이비운동이나 이단은 복을 남발하고 있다. 즉 교인들의 기복적인 신앙을 이용해서 복을 바겐세일 하듯 한다.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 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말을 너무 남용하고 있다.
(3) 신비·광신적 유형
사이비 신앙운동이나 이단과 신비현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이비 신앙을 주도하는 자들은 신비를 무기로 하여 사람들을 미혹한다. 많은 교주들이 투시, 예언, 안찰, 안수, 방언, 통역, 진동, 축귀, 환상, 치병, 몽시, 입신 등의 신비 능력을 자랑한다. 이것을 무기삼아 신도를 유인한다.
특히 신비현상 중 치병능력처럼 대중에게 매력적인 것은 없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능력으로 병을 고쳐준다는 말처럼 기쁜 소식은 없을 것이다. 치병의 방법은 그리스도계통에서는 금식기도, 안수, 안찰, 생수, 성수, 단식, 주문을, 단군계에서는 안수, 진동, 면접, 주문을, 불교계에서는 청수귀성, 주문을 쓴다고 한다.(서울계룡산,p.74) 이들은 병이 나도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서 치료하는 것을 금하기도 한다.
각종 예언도 호기심과 신비심성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한국교회 주변에는 예언기도 제단들이 횡행하고 있다. 그 중에는 상담을 통해 바른 신앙 지도를 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빗나간 예언기도로 교인들을 당황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들은 각종 명목으로 금품을 요구하기도 한다.
감정에 치우친 광신적 신비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몰아지경에 빠지게 하여 무인격, 무의식, 탈사회 현상를 초래한다. 한 개인을 황홀경에 도취하게 하고 황당한 처신을 하게 한다. 이러한 사이비 신앙을 교회와 사회에 많은 피해를 주고 있다
(4) 국수주의 및 자유주의형
한국의 기독교 이단 중에 일찍이 민족적 주체의식을 내세우면서 반선교사적인 사상을 내 비치면서 '자유교회'를 설립하여 분파작용을 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한민족의 영혼구제사업은 한민족 자신들의 능력과 책임 아래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서양선교사들이 전해준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고 과학이 증거하는 종교롸 과학이 뒷받침하는 신학을 영유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치선언을 하며 '예수교회'를 세웠는데 이 모든 운동들의 성격은 반선교사, 반교권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적 경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최초로 전북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최중진 목사가 반선교사적인 성향으로 나아가면서
자기가 건의한 선교회에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기가 목회하던 전북지방 목회자를 규합하여 '자유교회'를 설립하여 최초로 장로교회에서 분립하여 나갔다.
그리고 김장호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적 성격을 띠고 활동하다가 황해노회로부터 총대권을 박탈당하고 1918년 이단으로 단죄되고 노회로부터 제명당했다. 대구지방에서 목회하던 이만집도 반선교적 성향으로 '예수교회'를 세워 분파작용을 일으켰고 마침내 사이비집단으로 기울어지고만 것이다.
김교신은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우찌무라간조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교회주의자가 되었고 동조하는 함석헌, 송두영, 유동석 등과 함께 <성서조선>이란 잡지를 발간하였고 '성경사랑', '조선사랑'등으로 긍정적인 영향도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교회를 거부한 점에서 정통교리와는 거리가 먼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외 최태용의 복음교회, 변성옥의 조선기독회, YMCA총무 신흥우 등의 적극신앙운동, 모세5경 저자와 여권문제, 아빙돈 단권성경주석사건, 조선혁신교단파동 등 수많은 대소사건들이 한국기독교회사 중에 점철되어 있는데 이 모든 운동들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의 입장과는 다른 노선을 걷기 때문에 그 당시에 교회들의 외면을 당하게 되고 결국 이단을 낙인찍히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5) 시한부 종말론형
한국 기독교 이단들 중에는 타계적 신앙이 한 요인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불교의 미륵불 사상이나 극락사상이 기독교의 종말론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외침과 내란 그리고 병폐적 사회제도에서 오는 갈등과 억압 속에서 그것을 정면으로 맞서서 극복하려는 의지보다는 도피하고 탈출하려는 경향이 짙었다. 이런 배경하에 한국기독교의 신앙형태는 도피적이요, 타계적인 신앙을 갖게되었다. 여기에서 종말에 댄한 관심이 증대했고 시한부 좀말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시대별로 출현하였다. 최초로 2세기에 몬타누스를 들 수 있고 그 후 뮨처(Thomas Muntzer)나 밀러(W.Miller)나 러셀(C.T.Russell 1852-1916)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의 시한부 종말론도 선교 초기부터 대두되었다.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에 초기 선교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자는 길선주 목사였다. 그는 세대주의적 종말론 주창자로서 1974년 혹은 2002년(영계 길선주 선집)이 주님께서 재림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 와서 조용기 목사는 정확한 연월일을 말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시대적 징조로 보아 주님 재림의 마지막 시대에 진입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특히 다미선교회를 중심으로 1992년 10월 28일 0시에 주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시게 되고 잘 믿는 성도는 휴거한다고 주장함으로 교계와 일반 사회에 크게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1999년을 맞아 종말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92년도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던 자들이 '당시 예수의 영적 재림을 이루어졌으나 신앙부족으로 휴거가 일어나지 않았다'며 '날짜를 지적할 수 없지만 종말과 휴거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성경, 밀레니엄의 마지막 해라는 시기성, 기상이변과 재난사고, 힘든 경제상황을 활용한다. 그리고 노스트라다무스의 '99년 7월 종말론, 미국 스캘리언의 1998-2001년 재난설 등을 시한부 종말론에 또한 적용하고 있다.
새문안교회 이수영목사의 '철없는 대통령' 설교, 뒤
극동방송, '철없는 대통령' 설교, 뒤늦게 방송
새문안교회 설교 2주만에 내보내...의도적 방송 의혹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북한은 범죄국가가 아니라 협상대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지해주고 도와준 우방국가들을 배신하며 분노하게 하고 우리 나라를 국제적으로 우스개거리로 만드는 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신 나간 발언을 하는 철없는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있을 5년간이 너무나 불안하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극동방송은 지난 3월 16일 오후 3시 <주일강단 순례>를 통해 지난 2일에 있었던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의 주일 예배 설교(<전쟁을 없이하시는 하나님> 시편 76:1-10)를 40분간 내보냈다. 정치적인 오해의 소지가 담긴 내용을 방송에 내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주일강단순례>는 극동방송에 정규적으로 30분 주일 예배 설교 방송 계약을 하지 않은 교회의 설교 실황을 내보내는 방송으로, 방송사의 편성 재량권(편집)이 확고하게 보장돼 있다. 내용이 부적절해 공공의 전파에 싣기 어려운 내용이라면 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더라도 굳이 내지 않아도 된다. 반드시 담당 PD의 사전 내용 검토와 편성국장의 재가를 통해서 송출하도록 돼 있다.
특히 현직 대통령의 통치 발언에 대해 '정신나가고 철없다'라고 표현한 내용의 설교를 내보낸 경우 편성국장은 최소한 전무나 사장 등의 고위층과의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함은 관례상으로 볼 때 당연하다.
문제는 이 설교가 시급하게 녹음돼 어쩔 수 없이 송출돼야 하는 설교였던가 하는 점이다. 이 설교는 두 주전인 3월 2일에 행한 설교로, CBS 라디오 등에서 '문제가 있는 내용'이라며 시간을 통해 지난 15일 비판받은 내용이다. 또한 새문안교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서도 이 목사의 설교를 놓고 논쟁이 가열되던 차였다. 그런 와중에 극동방송이 이 설교가 논란에 휩싸여있는 상황에서 전혀 전후사정을 모르고 실황을 받아다가 그대로 틀었다는 것은 정황상 맞지 않다.
따라서 이 설교 방송은 평소 극우성 시국 집회를 주도한 김장환 목사가 은밀한 배후에 서 있지 않는가 하는 의혹이 든다. 아니면 일부 간부들이 김 목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충성 경쟁 차원에서 행한 일이 아닐까 하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극동방송의 한 편성책임자는 "조선일보 기사를 보고 이 설교 내용을 처음 알게 됐다"고 말하고 "설교 방송과 관련 사전에 김장환 사장과 논의한 사실은 전혀 없으며 단지 이 설교를 통해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방송하게 됐다"고 밝혔다.
독일인 교회출석 전쟁이후 크게 늘어
이라크전을 전후해 교회나 성당을 찾는 독일 국민이 크게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신교 뉴스통신사 EPD에 따르면 이라크전 발발을 전후해 독일인들의 평화를 위한 기도회 참석률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많은 교회가 시민들이 기도하거나 평화적 항의를 할 수 있도록 평일에도 ‘정오 기도회’나 ‘묵상의 시간’ 같은 특별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뮌헨 성 마태교회의 디터 쿨러 목사는 “이라크전 발발 이후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면서 “교회에 나갈 시간이 없는 바쁜 노동자들은 주로 정오 기도회를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크리스마스 때에나 교회에 나온다고 시인했으나 전쟁이 터진 이후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예배에 참석하는 것 같다고 쿨러 목사는 설명했다.
슈투트가르트시의 한 성직자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늘었다”면서도 “전쟁이 일어날 때면 우리는 늘 평화기도회를 열었으며 전쟁 때 예배 참석자가 느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새로운 교회임대 사이트 개설 안내
그동안 많은 목회자 여러분의 건의에 따라서
별도 교회 임대/매매 사이트를 개설하였사오니
많이 이용하여 주셔서 활성화 되도록 부탁드림니다
자료는 점차 확대해 나갈것입니다
여성 노출 교회서는 더 안된다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어깨와 등이 드러나 보이는 란제리 상의, 배꼽티, 그리고 짙은 화장 등 보기에 민망할 정도의 차림새로 교회를 찾아오는 여성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대담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성들의 `반누드'모습이 올여름 교회안에서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지난 주일 부인과 함께 예배를 드리던 정구일지사는 옆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던 초미니스커트의 아가씨 때문에 신령스런 예배를 못드렸다고 호소한다.
정집사 얘기대로 라면 "도대체 신경이 쓰여서 말씀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것이다.
정집사는 이에대해 "자유로운 의복선택은 좋으나 좀 지나친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었는데 무슨 상관이며 왜 신경쓰냐고 반문할 여성들도 있을 듯하다. 특별히 성경은 예배드릴 때의 복장에 대해서 정확히 언급한 곳은 없다. 다만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마음과 육신이 온전하고 깨끗해야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예배분위기를 흐트려 놓는 `불건전한 의상'은 회피하는 것이 믿음있는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의견들이 모아지고 있다.
이처럼 더운 여름철을 맞아 기독 여성들도 대담한 노출로 사회 흐름에 민가하게 반응하고 있다. 거리에서의 심한 노출이 이제 낯설치 않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만큼은 예외라는 것에 모두 생각해 볼 문제다.
얼마전 지방의 모국립대학에서 스크트길이가 짧다는 이유하나로 도서관 출입을 금했다는 기사가 보도된적 있다.
알고 있듯이 서구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여성들의 노출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유교적 풍토속에서 성장한 우리가 보기에 이상한 그 모습과 치장들이 그들에게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문화의 차이점을 이해해야 한다.
의상이 선택이 개인의 자유이긴 하지만 교회안에서 예배드릴때 만큼은 의상이 경건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기독교의 정신은 철저한 신앙으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때문에 의복을 단정히 하고서 드리는 예배가 신체의 일부를 노출시키고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아름답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는 대담한 노출을 하는 기독 여성은 극히 제한된 인원이라는 점이다. 제한된 이들이 전체 기독여성을 매도하지는 못한다. 단 일부 젊은 기독여성들의 과감한 노출에 영향을 받은 중장년 여성들도 덩달아 `노출'하려는 움직임은 방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처럼 대사회적으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여성들의 노출현상에 대해 한국교회는 너그럽게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직까지는 부정적인 시각이 더 많다.
윤종모교수는 "예배의미에 맞는 단정하고 정숙된 의복을 입어야 하다"며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에 옷을 갖춰 입고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총신대에 다닌다는 김영희양은 "요새 교회안에서도 여자친구들의 노출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며 "평상시에는 개성의 표현이어서 좋다고 생각됐는데 교회에서도 그러니까 거부감이 생겼다"며 교회에서의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운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요즈음, 거리 어디에서나 대담한 노출을 한 여성들을 많이 본다. 때로 남성들조차 `나도 저렇게 시원하게 입어봤으면...'하는 부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다.
그러나 교회안에서 여성들은 지나친 노출을 삼가해야 한다. "교회가 너무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주의적이다"라고 하기 전에 교회를 찾는 목적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데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나친 노출은 오히려 신령해야 할 예배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형식만 가득한 교회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꼭 찾고 싶어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입니다. 오래 전에 이 사원을 방문했던 방문객들의 입에서부터 이런 흥미있는 일화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방문객들이 이 유명한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인도해주던 안내자가 있었습니다.
이 안내자는 사원에 대한 역사적인 내력과,그리고 무덤에 묻혀 있는 지나간 세기의 찬란한 영웅들의 삶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또 현재 그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가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이 끝난 후에 안내자는 방문객들을 향해서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아이오아 주에서 이곳을 방문했던 어느 여신도 한 사람이 안내자를 향해서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이 유명한 일화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과 내력에 관해서 훌륭한 설명을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을 한가지만 하겠습니다. 최근에 이 사원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이 뜻밖의 질문 앞에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안내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오늘의 우리는 종교나 혹은 교회의 이름으로 수없이 교회 안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 모임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와 내용은 무엇이며, 오늘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 모든 형식과 허상은 그 내용과 어떤 관련이 되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뒤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사의 별들
국립 묘지에 가면 무명 용사들의 묘비가 있다. 교회사에도 밀알처럼 묻혀 버린 씨앗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숨겨질 수 없는 뭇 별들도 있다. 그분들은 죽어서 더욱 빛나는 우리 모두의 사표들이다. 주님을 열애하다 평생을 나환자 위해 바치고, 6.25 때도 양들을 지키다 순교하신,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아들 삼았던 사랑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 일제 귀신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 무명옷 한복만 입고 예수를 민족 속에 화육시킨 한국의 간디 조만식 장로님, 칼빈주의 신앙 진리의 파수꾼 박형룡 목사님, 성경 속에서 금방 뛰어나온 것 같은 P목사님, 흙과 일과 실천과 생활 속에 예수를 사는 농군왕 K 장로님, 말년에는 전도 할머니로 알려졌던 이화의 상징 김활란 박사님, 애국 삼일 여성의 상징 박현숙 장로님, 교부 같은 영원한 청교도 H목사ㅣㅁ, 맨발의 거지 성자 이현필 선생, 상록수의 테레사 최용신 여사, 부흥사의 상징 이성봉 목사님, 사회 정의와 양심의 상징 김재준 목사님... 하나씩 별들이 역사의 밤에 빛을 발하고 있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
월요일 아침, 한 고등학생 소녀가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어제 너희 교회에 갔었어. 비록 네가 나를 단 한 번 초대했지만 너는 내가 교회에 나오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네 옆에 앉으려고 너를 찾았지만 너는 없었어. 그래서 나는 맨 뒷줄에 앉으려 했는데 그 줄은 꽉 차서 앉을 수가 없었단다. 그때 안내하시는 분이 오셔서 나를 맨 앞으로 인도해주셨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나는 마치 행진하고 있는 것 같았어. 곧 예배는 시작되었고 성도들은 내가 모르는 찬송가를 불렀어. 나는 따라서 흉내내려고 노력했고 노래하는 척했지만 결국은 그 찬송을 하지 못했지 뭐야. 그런데 나는 성도들 중에 몇몇 사람들이 찬송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어. 한숨과 하품을 하면서 그들은 단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내가 학교에서 좋다고 여기던 3명의 아이들은 서로 속삭이고 있었으며, 또 어떤 사람은 킥킥대며 웃고 있었어. 나는 너희 교회가 그러리라고는 생각치 못했어. 목사님의 설교는 재미있었지만 성가대원 몇 명은 그런 것 같지가 않았어. 피곤해보였고 지겨운 표정이었으며,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계속 미소짓고 있었어. 목사님은 신앙의 확신에 대해 설교하셨는데, 그 말씀이 내게 와 닿았기에 예배가 끝나면 이것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하지만 축도가 끝남과 동시에 이 모든 생각은 사라졌어. 나는 옆에 있던 사람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했으나 그들은 진심으로 답례하는 것 같지 않았어. 나는 그 말씀에 대해서 토론할 친구를 찾았지만 그들은 새로운 화제를 이야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어. 한 소녀와 잠시 이야기를 했으나 곧 인파에 휩쓸려 우리들의 대화는 중단되었어. 우리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시지 않지만 나는 사랑이 있는 모임에 가입하려고 어제 혼자 교회에 갔던거야. 그곳을 떠날 때 교회 입구에 있는 게시판을 보니 "사랑이 넘치는 교회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씌어 있었어. 그러나 나는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을거야. 미안해."
이 편지에서 처럼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가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가르치고 있지만 실제로 초대교회 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교회에 교인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리고 그 교회 목사가 천사의 말로 설교를 하더라도 사랑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거나 잠자는 교회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인도의 캘커터에서 빈민들을 헌신적으로 돌볼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녀가 어느날 길거리에서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듯 깡마른 소년의 행색이 너무나 더럽고, 초라하고 불쌍했습니다. 이런 소년을 데려다가 손수 목욕을 시키고 옷을 빨아 입히고, 따뜻한 국물을 먹이고, 그리고 그녀가 운영하는 어린이의 집 침대에 뉘였습니다. 소년은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소년은 어린이 집에서 도망가고 없는 것이었습니다. 빈 침대만이 있을 뿐입니다. 깜짝 놀라서 수소문해서 찾아보았습니다. 이전에 배회하던 거리에 그 소년이 다시 가 있었습니다. 또 데려다가 씻겨서 재웠습니다. 또 도망을 갔습니다. 여러 차례 이렇게 되는 것을 보고 테레사 수녀는 그를 시중하는 젊은 수녀에게 일렀습니다. 잘 지켜보다가 아이가 도망갈 때에 어디로 가는지 뒤를 좀 밟아보라고 했습니다. 역시 소년은 새벽에 일어나서 어린이의 집을 뛰쳐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를 따라가보니 커다란 나무 밑에 이르러서 발을 멈추고, 그 밑의 웅덩이같은 움막집에 들어갑니다. 한 여인이 그 움막에서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것 같은 온갖 음식 찌꺼기를 질그릇에 담아 끓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면서 이 아이는 기쁜 얼굴로 음식이 다 마련되기를 기다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수녀는 이 아이를 불러내어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왜 어린이 집에서 도망해 나왔느냐? 뭐 불편한 것이 있더냐? 거기에 친구들도 많은데..." 이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내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내 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좋은 음식, 좋은 침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함께하고, 거기서 사랑을 느끼고, 거기서 자유를 느끼고, 거기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쳐다볼 때에 기쁘고, 교회 들어갈 때에 행복하고, 이 세상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 같은 것이, 교회에서 느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그리고 교회의 온 식구들을 자기의 가족처럼 형제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12세 때에 성전에 올라가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성전안에서 말씀을 듣고, 가르치는 교훈을 받고, 서로 성경을 토론하고...너무나 재미가 있고 행복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있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고, 아버지의 품안에 있는 행복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체온을 느끼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며 사랑이 넘치는 교회를 이룩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
교회 문을 닫았더니
1917년 레닌은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을 일으키고 1000년이 넘도록 지속돼 오던 러시아 교회의 문을 모두 닫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곳을 공산당 당사와 노동자 숙소, 심지어 스케이트장 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자들이었던 그 사람들이 지금 와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문을 닫았더니 모든 문이 닫혀 버렸다." 교회 문을 닫으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문을 다 닫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 축복의 문, 은혜의 문이 닫혀 버립니다.
북한을 보십시오. 저들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던 평양을 비롯하여 북한 전역의 교회를 다 폐쇄하고 얻은 결과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시 궁휼을 베푸셔서 북한에도 교회의 문이 열리게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교회 분열 10가지 지름길
미국 종교 월간지 [무디] 2월호는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 10가지 지름길]이란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 [무디]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소를 열거함으로써 역으로 교회가 분열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다음은 [무디]가 제시한 교회를 분열시키는 10가지 대표적인 사례이다.
1)교회 내 특정 개인의 요구사항에만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라.
2)교회안에 떠도는 모든 소문과 비평을 다 귀담아 들어라.
3)목회자의 약점만 찾아내 이야기하라.
4)사랑 안에서 결코 참된 것을 말하지 말라.
5)불평 불만의 씨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해두라.
6)남을 용서하되 오직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자만 용서하라.
7)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위선으로 가장하라.
8)공중기도 시간을 통해 교회에 대한 불만을 다 토해내라.
9)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항상 이기기에 힘써라.
10)하나님이 당신에게 [교회를 분열시키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믿고 행하라.
다른 교회로 가십시요
부천시 원미구에 있는 어느 교회 4월 3일자 주보를 어쩌다 보게 되었습니다.그런데 주보 한쪽에 실려 있는 글 하나가 눈길을 끌었는데 그 글을 열번도 더 읽었습니다. 다음은 그 글 입니다.
<부천 교구권 밖에 거주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이 지납니다.온 가족이 편안히 예배 드릴수 있는 길을 택하십시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작은 교회중 진리적 교회를 선택 하십시오.단번에 등록하지 말고 여러번 참석한 후 기도 가운데 선택하셔야 합니다.그런후 연락 주십시요.이명증서(移名證書)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간 어려운 발걸음으로 교회를 섬겨 도우신 사랑을 감사하여 잊지 않고 기도하며,아울러 지속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겠습니다.
저희 남은 믿음의 어린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로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간 섬기시던 본 교회가 진리안에서 든든히 서 가기를 바라와서 믿음으로 기도해 주신다면 남은 교우들은 힘을 얻어 선배 신앙인 여러분들의 뜻을 이어갈 것입니다.
새로 정한 교회에서 부담없는 신앙생활을 하려는 마음을 처음부터 갖지 마시고 항상 십자가 지려는 마음으로 여기서 보다 더욱 잘 섬겨야 합니다.
이제는 거리,시간적으로 능히 더 잘 감당할수 있는 여건이 되었습니다.불평없이 범사에 늘 감사하는 믿음으로 오로지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요.
항상 하나님 편에서,진리편에서,교회 편에서,목사님 편에서 생각 하십시요.절때 무리(群)편에서 결단하지 마십시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쫓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이 글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이글의 의미를 깨닫고 참으로 많이 놀랐습니다.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뜻을 세밀히 헤아려 보며 더욱 많이 놀랐습니다.
이 그은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서 너무 먼 거리에서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부활절을 기해서 집에서 가까운 교회로 적을 옮겨서 그 교회로 출석하며 그 교회를 더욱더 잘 섬겨 주십사하고 요철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게 당연하지 뭐가 놀랄 일이냐구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대꾸 할 말이 없습니다.옳습니다 그게 당연한 일입니다.교인들에게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출석하라고 권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일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공식적으로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치며 그 귀한 성도들을 떠나 보내는 교회가 과연 얼마나 되는가요?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단을 내린 부천 W 교회.
문자 그대로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 입니다.
교회 참석의 동기
에머슨 파스틱이라는 설교가는 미국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데는 4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생활 습성이나 관습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 때문에 그 설교를 듣기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란 좋은 곳이라 교회에 나가서 활동하면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기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일시적인 위안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기들은 교회에 나가는 주체적인 동기가 될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은혜를 받는 곳입니다.
당신은 왜, 그무엇 때문에 교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입니까?
참된 하나님의 교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한 후 방황하다가 창녀인 소냐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기가 살인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때 소냐는 자기 방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하라고 권합니다. 십자가는 성스러운 교회당의 꼭대기에나 아니면 믿는 사람의 목걸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냐같은 창녀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십자가는 너무 성스러운 것이므로 창녀나 살인자에게는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것을 목걸이로 걸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기 가슴을 치며 죄를 슬퍼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2000여 년 전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던 것처럼,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가난하고 죄인이라고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으려고 나올 때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교회입니다
교회성장은 자기 반성부터
1907년 평양 대부흥회가 길선주 목사의 인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장대현교회에 모인 1500여명은 길목사의 설교에도 변화가 없었다. 기도도 터지지 못했고 성령의 은사도 임하지 않았다.그때 길목사는 은혜의 단절은 자신의 탓이라 깨닫고 외치기 시작했다.
“저는 아간과 같은 놈이외다. 저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받지 못했습네다.언젠가 제 친구 한 사람이 임종하면서 제게 부탁하기를 ‘나는 이제 죽지만 내 재산을 잘 처리해주게.내 아내는 무식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꼭 부탁하네’라며 세상을 떠났습네다. 저는 그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1백원을 잘라 먹었습네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네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네다” 길목사의 우렁찬 공개 자복이 터지자 회중석에선 통회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저 유명한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성장을 가로막고 민족공동체를 분열,파괴시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책임을 떠넘기기 때문이다.“네 탓이다.네가 책임져라”라는 파행이 계속되는 한 회생의 처방은 없다.그러나 “나 때문입니다.내 탓입니다”라는 회개운동이 일어난다면 제3의 부흥운동은 활화산처럼 일어나게 될 것이다.
배세라부인
일제시대 공주지방 외성교회에 배세라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경상도 출신으로 충남 논산군 부적면 외성리에도 오랫동안 살았다. 그런데 배 부인은 40세가 지나도록 자녀가 없어서 하루는 계룡산 신원사로 불공을 드리러 가던 길에 전도인을 만나 그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부인은 집에서 30리나 되는 경천교회를 1년 동안 열심히 다녔다. 그러나 남편이 부인을 그냥 두지 않고 핍박하였다.
부인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힘을 내어 자기 집에다 예배소를 정하여 남녀 10여명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으며, 얼마 후에는 함석으로 된 22평의 예배당을 신축하여 신자100여 명이 모이게 되었다.
한편 배 부인은 박원태 권사를 양자로 입적하였는데, 그도 역시 모범적인 신앙인이었다. 또한 부인은 근방에 사는 이웃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3년 계획을 세우고 매일 뒷산 성태봉에 올라가 기도를 시작한 것이 8년이나 계속 되었다.
그러나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77세의 나이로 예배당에서 철야기도를 하던 중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교회 안의 실업자
어느날 나는 꽤 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친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자네 교회의 교인수는 얼마나 되나.”“5,000명쯤 되지”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교회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 성가대에서, 교회 학교에서.
또는 안내위원으로, 성경공부 인도자 등 교회의 기타 부서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가 말이네.” “음, 대략 1,500명 정도 되지.”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소위 실업자가 3,500명이나 되는구나.' 다른 기회에, 목회를 하고 있는 또한 친구에게 그 교회 교인수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래더니 한 800명쯤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자네 교회에서 무슨 일이든 맡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지.”하고 물었습니다. “글쎄. 지금까지 거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아마 300명 가량 될 것 같네”하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 “교회 일”이 있고. “교회의 일”이 있습니다. “교회일”이란 교회의 공적인 자리에서 일하는 것이요. “교회의 일”이란 그 이외에도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일을 말합니다. 교회의 공적인 자리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평범한 교인들은 바로 이 “교회의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3,500명 또는 500명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교인들이 스스로를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 본다면, 모든 교인을 위한 충분한 일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각각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영적으로 자격을 갖춘 무장된 일꾼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의 장본인이었던 독일의 폐허는 너무나 비참했다고 합니다. 여러가족들이 한 집에서 살아야 했으며 퀀센트에서 집단생활을 했다고 합니다.COLOGNE라고하는 도시에는 커다란 교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는 새고 아치는 무너지고 창문은 다 깨어지고 기둥은 기우뚱해 있었습니다. 전후독일 백성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 방법을 잃은채 절망과 어려움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어느 한 사람이 쓰러져가는 그 교회의 창립 700주년을 기념하는 계획을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퍼져 나갔습니다. 700주년을 기념하는 그날 폐허된 교회에는 30,000명의 실망한 독일인들이 모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700주년 기념예배가 시작되자 오랜 실망과 눈물속에 가슴과 믿음은 산산 조각이 났던 그들의 눈에서는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드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힘차게 울려 나오기사작한 찬양과 함께 오랫동안 막혔던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과 가슴은 감사와 찬양으로 열리기 사작했습니다. 그래도 700년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그들이 용기만 내어도 그 교회를 다시 세우려면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그들은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 드디어 페허가 되었던 700년된 교회는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얘기의 핵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복구하는 동안 절망했던 독일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은 이상스럽게도 뜨거움과 감사로 되살아났으며 그 새마음은 새독일 건설이라는 다음단계로 불붙어 갔습니다. 그 다음 그들은 집을 지었으며, 교장을 짓고, 회사를 지어 갔습니다. 결국 그 도시는 위대한 기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교회가 아름답다
7명의 교인들로 교회를 시작했을때, 우리는 우리 교회가 신약성서의 교회처럼 되기를 원했다.
우리의 원래의 취지는 여러 개의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교회가 어느정도 규모를 갖춘다면 교인의 얼마를 내보내 새로운 교회를 세우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몇몇 교회성장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거기에서 배운 것들로 인해 흥분하게 되었다. 실제로 거기서 배운 많은 것들이 우리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7명의 교인들은 6백명으로 성장했다. 그것은 우리같은 작은 마을에서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같은 성장은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성공과 존경이라는 황홀한 감정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대형교회에 대한 꿈과 함께 새로운 교회들을 개척하겠다던 비전은 급속히 사라져갔다. 6명의 풀타임 교역자들을 둘 만큼 성장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웃 마을로 사역자들을 보내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또 교회성장이 가져다 준 변화를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 귀에는 교인들의 불평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교회가 예전같지 않아, 교회가 작았을 때 우리가 가졌던 사랑과 친밀함이 없어." 그래서 우리는 교회 내 소그룹이라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이런 예기치 않았던 `성장의 고통'을 해소해보려고 했다. 이런 소그룹들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인중 단지30% 정도만이 소그룹에 참여했다.
그무렵 우리교회는 주변의 여러지역으로부터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교회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30마일 정도 차를 몰고 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교회의 한 젊은이가 내게로 와 조언을 구했다. 그 청년의 고민은 교회 안에서 자신이 봉사할 곳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내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나는 `우리가 처음의 비전을 실천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 잘못된 것이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러교회를 개척하겠다는 최초의 꿈을 떠올리고는 당황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우리가 우리의 처음의 꿈을 실천했었다면 우리 지역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생겨났을까를 생각하고 있다. 아마 6백명이 모이는 교회 대신, 1백명이나 3백여명이 모이는 교회가 6개 정도는 생겨났을 것이다.
나는 비록 내 자신이 교회성장 욕구 뒤에 있는 기만적인 동기들을 인정하지만 대형교회들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가 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교회를 성장시키는 동안 몇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얻었다.
첫째, 교회성장보다는 교회의 건강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릭 워겐은 "21세기의 교회의 중심 주제는 성장이 아니라 건강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교회성장이란 말은 보다 깊은 영적 성숙에 대한 비전을 포함한다. 언젠가 반스 하브너가 말했듯이, 이제는 양의 숫자를 셀때가 아니라 양들을 가치 있게 해야 할 때인것이다.
둘째, 당신의 교회를 다른 교회와 비교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장성한 분량은 다른 교회의 성장 가능성과는 다를 수가 있다. 다 자란 건강한 치와와는 병든 덴마크산 큰 개만큼 크지 않을 거이다. 당신의 목표는 다른 교회의 성과나 크기 등과 겨루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의 충분한 가능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셋째, 성장을 위한 성장보다는 회심과 제자화에 집중해야 한다. 현재 미국 교회의 80%는 성장의 정점에 이르렀거나 혹은 감소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5% 미만의 교회들은 잃어버린 양들을 얻는 일을 통해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만약 당신의 교회의 성장이 이처럼 다른 교회로부터 불안에 찬 교인들을 끌어들이느데 기초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순환은 참된 의미의 교회성장이 결코 아니다.
넷째, 당신의 교회 너머를 보아야 한다. 질투심이나 자만심을 버리고 당신네 지역의 다른 목회자나 교회를 향해 바른 태도를 지녀야 한다. 작은 교회 목사들은 큰 교회를 향해 존경심을 지닐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큰 교회 목사들은 작은 교회들이 행하는 생생한 역할들을 평가해주어야 한다. 세상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한 몸만이 존재할 뿐이며, 우리 모두는 함께 그 안에 있는 것이다.
큰 것은 나쁘지 않다. 그리고 작은 것은 슬픈 일이 될 수 있다. 오순절때는 3천명이 한꺼번에 회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약시대 교회 생활에서 보다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가정교회였다. 작은 교회는 열등하고 큰 교회는 우월하다는 식의 세속적인 생각을 경계하라.
하나님은 작은 교회를 반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마음을 가진 자들을 물리치신다. 하나님은 크건 작건 당신의 교회에 은혜를 내리시고 그 나름의 독특한 특성들을 세워나가기를 원하신다.
교회란 무엇인가
장로의 책임은 무엇인가.
교회와 장로는 우선 행정적 책임을 진다. 교회를 다스리는 책임이다.
감독이라는 단어가 그 의무를 나타내 준다.오랜 경험을 통해서 교회의 움직임을
잘 아는 장로가 앞장서서 자신의 성숙한 생각과 언어와 태도와 행동으로 직접 본을 보여주면서 성도들을 이끌며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다.
때때로 직분의 권위로 마치 회사의 사장인 것처럼 성도들을 대해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이 없지도 않다 (벧전 5:2~3,살전 5:12~13,히 13:7^17
^24).조심할 일이다. 교회는 사회의 회사가 아니다. 영적 공동체다.
세속적 사회생활에 익숙한 장로님들이 교회에 와서도 같은 사고와 방법으로 교회를 움직이려 할 때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잘 성장하던 교회에서 바로 이와같은 문제 때문에 법정에서 까지 교회의 명예를 떨어 뜨리고 있는 경우가 있다.
둘째,목회적 책임이다.교회를 이끄는데는 목자가 목양하듯이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모아놓고 교회가 마치 양떼인양 "교회를 먹이라"(행 20:28)고 했고 또 베드로 사도도 "양떼를 먹이라"(벧전 5:2)고 표현했다.예수님의 동생 유다도 양떼를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유익만을 챙기고 있는 교회지도자들에게 경고를 한적이 있다(유다 12절).
셋째,교육적 책임이다.성도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장로의 자격속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딤전 3:2). 이 일은 주로 말씀훈련을 받은 목회자가 하지만 일반 장로들도 다른 성도들 보다 더 잘 배워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말과 본으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장로를 "말씀과 교리안에서 수고하는 자"(딤전 5:17)라고 불렀다.성도들이 말씀에서 어긋나 잘못가면 고쳐주고 또 오른 길을 가도록 권고해 주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딛 1:9).
또 에베소서 4:11에는 목회적 역할과 가르치는 역할이 하나로 고려되고 있다.
장로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나 일단 장로가 된 다음에는 배우는데 소홀히 함으로써 성도들의 많은 지탄을 받는 경우가 자주 있다.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지속적으로 배워야 한다.
넷째,지도자적 책임이 있다.교회의 여러가지 활동들을 앞장서서 이끌어 간 다. 야고보는 아픈 사람이 있어도 먼저 장로들을 부르라고 했다(약 5:14).병 자를 위해 기도해주는데도 장로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장로들만 이 이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신자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이지만 그 일을 하도록 만드는데는 장로들이 앞장 서야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장로직분에 모든 일에 앞장서는 역할을 부여하셨다.그러나 교회가 장로들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표자의 책임이 있다.필요할 때에 교회를 대표한다. 사도바울도 에베소교회의 방향을 제시하려 했을때 장로들을 모아서 지시했다(행 20:17).디모데전서 5:17에서는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를 구분하기도 한다. 가르치는 장로는 주로 목사를 뜻하고 다스리는 장로는 평신도로서 장로로 선택된 분들을 말한다. 그 역할과 책임에는 차이가 있으나 자격에 있어서는 목사나 장로가 전혀 차이가 없다.한사람은 소명을 받아 신학교를 거쳐 목회자가 되고 한사람은 오랜 기간동안 평신도로 섬김을 통해 교회와 성령의 인정을 받아 장로라는 목회자가 되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
동물원에 처음 구경나온 시골 어린이처럼 인터넷 홈페이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미국 장로교회에서 제공하는 뉴스란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 미 연합감리교회 뉴스서비스 제공이라는 단서가 붙은 기사가 제일 먼저 보였는데, `교회와 성직자는 이제 더 이상 가장 신뢰받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갤럽여론조사 결과였다.
기사 자체보다도 먼저 눈길을 끌었던 점은, 장로교회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감리교가 제공한 뉴스를 중요한 비중으로 게재한 사실에서 느끼는 미국 교회들의 보이지 않는 성숙함과 개방성, 일치정신이었다. 이런 느낌 속에 읽어 내려간 내용은 대강 이런 것이다. `최근 권위있는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 조사한 결과 미국 내에서 목사의 정직 및 윤리성에 대한 신뢰도가 56 %로 나타났으며 약사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는 미국인 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여전히 목사를 깊이 신뢰 하고 있다는 수치이지만, 과거에 줄곧 신뢰도 1위였던 데 반해서는 조금 낮아진 것이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1위의 자리를 내주었다는 점이 무척 아쉽기는 했지만, 출석 교인이 급격히 줄어드는 등 미국 내에서 상당한 탈교회 현상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목사에 대한 신뢰는 나름대로 뿌리 깊다는 느낌과 함께 이것이 미국 교회의 저력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까지 흘러가던 생각의 실마리가 문득 우리나라의 목사에 대한 신뢰도는 어떨까 하는 데 이르렀다. 서둘러 인터넷에서 빠져나와 찾아보니 한국갤럽에서도 `직업인 윤리수준 평가'라는 제목으로 똑같은 조사를 한 자료가 있었다. 작년 11월에 전국의 성인1,5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였는데, 결과는 신부가 1위로 62.6%였다. 2위는 교수, 3위는 불교 승려, 그리고 4위인 방송기자 및 아나운서에 이어 우리 개신교 목사는 41.6%로 5위였다.
우리나라 신부의 경우는 미국의 80년대 후반까지의 목사에 대한 신뢰도와 비슷하게 나타난 반면, 목사의 경우는 국내 3대 종교 성직자 가운데 부끄럽게도 제일 낮은 신뢰도를 기록한 것이다.
쇠락해 간다는 미국교회의 성직자보다도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우리의 목사님들, 새삼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이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오버랩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아마도 난립된 군소 신학교에서 양산된 목회자들이 한국교회 목회자 전체의 신뢰도를 많이 저하시켰으리라고 짐작해 보지만 한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점점 믿는 사람들만의 울타리, 게토가 되어가는 현실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5단계 척도 조사결과 목사의 윤리수준이 아주 높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불과 6.9%였고 약간 높다가 24.0%, 보통이다가 38.3%인 반면 약간 낮다가 22.3%, 아주 낮다가 6.5%로, 긍정적 응답과 부정적 응답의 비율이 별로 차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미국의 같은 조사 결과는 아주 높다와 높다가 56%, 낮다는 응답은 10%미만이었다)
통계 수치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는 없지만, 국민들이 우리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염두에 두면서 스스로 새로워지는 자극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때로 보여주는 성숙하지 못한 모습,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전체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인끼리만 섬기는 것 같은 모습을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너무도 분명할 것 아닌가?
하나 더 강조하자면, 평신도들도 강 건너 불인 양 생각할 계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정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주제로 조사를 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평소 삶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지 못하고 `선데이 크리스천'신세인 우리 대다수 평신도들로서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보통교회, 보통교인
"나는 한국에서 모모교회에 다닌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굉장히 뻐기는 것 같다. 지나쳐서 신앙의 교만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몇 번 물어봐도 자신이 다니던 교회 이름을 대지 않는 사람이 있다."시골에서 다녔습니다. 목사님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자기가 다니던 교회는 이름도 없고 작은 교회이니 말해봤자 알지 못할 것이라는 단정아래 아예 답변을 회피해버리는 것이라고 이해는 가지만 이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만일 "당신 부친의 성함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아무개입니다."하고 분명히 대답을 해주는 것이 상례인데, 자기 아버지는 이름도 빛도 없이 산골짝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해서 그 자식들이 답변하기를 "잘 모르실 겁니다." 하고 우물쭈물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무명의 작은 교회라고 하더라도 그 교회에서 말씀의 은혜를 받아 살았고 그 제단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으면 그 이상 귀하고 소중한 교회가 어디 있겠는가.
교회가 크다고 내가 잘난 것이 아니고 교회가 작다고 내가 작은 교인이 아닌 것이다. 유대 고을 중 가장 작을지라도 베들레헴에 주님이 탄생하실 때 가장 귀한 고을이 된 것처럼, 누가 진정 주님을 바르게 모시고 사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개인과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에 관한 금언
0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0 교회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28:17)
0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
0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
0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막11:17)
0 교회가 망하면 구원받을 사람이 없어진다.(요한 웨슬레)
0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곳에서만 진정한 교회를 찾아볼 수 있다.
0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사무엘 죤슨)
0 나는 어떤 설교보다 예배가 있기 전의 조용한 교회를 더 좋아한다.(에머슨)
0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터가 되었다.(터툴리안)
0 신학은 교회 봉사의 학문이다. 따라서 신학은 교회가 예배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도록 공헌해야 한다.(칼 바르트)
0 오늘날 전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위기는 가톨릭과 신교 사이에 있지 않고, 교회생활의 전통적 양식과 경험적 양식 사이에 있다.(H. 콕스)
0 우리 교회는 '오래된 길'을 가고 있다. 우리는 교인들을 끌어당기는 데 세속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높으시다면 자신이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다고 믿지 말라
0 신은 교회와 종교의 폐허 위에 마음의 성당을 짓는다.(랄프 왈도 에머슨)
0 현대생활에 적합한 종교는 각자 뜻대로 교회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임어당)
0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그의 순결을 보존하는 것이다.(매튜 헨리)
0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회의 소망이요, 평화의 약속이다.(더글라스 헤이그 경)
0 교회에 간다는 것은 자동차가 차고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그대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않는다.(울리엄 선데이)
0 종교는 그대의 해골을 성막으로 들어가게 하는 과정이지 일년에 한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오스틴 오말리)
0 교회는 천국 가는 나그네가 잠시 묵는 주막집이다.(김경선)
0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과 같다.
0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듯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반사한다.
0 달이 밤에만 세상에 빛을 주듯 교회도 세상이 어두웠을 때 그리스도의 빛을 뚜렷하게 비춰준다.
0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0 교회는 인간의 육체와 같아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고 많은 지체가 있다.
0 반석 위에 세운 집은 폭풍우가 몰려와도 무너지지 않듯이 반석되시는 그리스도의 진리 위에 세운 교회는 어떤 핍박이나 모진 박해 속에도 튼튼히 서 있다.(김경선)
0 천주교회는 순교자가 피를 흘린 곳에 세워졌다.
0 교회는 포도원과 같아서 특별히 선택된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인 곳이요, 들짐승이나 침입자를 막기 위하여 울타리를 쳤으며, 농부가 물을 주고, 전정을 하며 쉬지 않고 가꾸듯, 울타리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께서 지키시며 기르신다.
0 교회는 어머니와 같아서 한 남편인 그리스도의 아내며, 어머니처럼(자녀를 낳기 위하여 산고를 겪고) 자녀들을 낳아 기르고 자녀를 훈계한다.
0 선장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듯 교회에 주인이 많으면 그 교회는 고통의 산으로 올라간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님이시다.(김경선)
0 교회는 마치 주유소와 같아서 연료가 떨어진 차가 와서 계속 충진하고 가듯 성도들이 주일마다 혹은 수요일마다 교회에 와서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충진받고 가야 세상 인생행로를 달린다.(김광웅)
0 아무리 잘 타는 장작불도 하나하나 헤쳐 놓으면 불이 꺼지듯 교회도 성도들이 많이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해야 힘이 생긴다.
참 좋은 교회
이십대 초반이던 어느 날부터 이런 기도를 했었다. `하나님 사십을 전후해서 담임목회를 하게 해 주세요'. 그러면서 빠르면 설흔 아홉 그리고 늦어도 마흔 하나를 넘기기 전부터 담임목회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준비를 했다. 너무 젊은 나이에 담임목회를 하면서 힘들어 하는 분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설흔 여덟살이 되던 해 여름 휴가를 마치면서 우리 부부는 기도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다. `어떤 교회든 제일 먼저 청빙하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는 교회인줄 알고 간다' 이런 기도 제목을 정하면서 우리 부부는 너무 작은 시골교회에서 연락이 올까봐 약간의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기도를 시작한지 두어 주가 지났을 때 양정중앙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한번 내려 오면 좋겠다'고 했다. 달리 이야기하면 `선'을 보러 오라는 말이었다. 그때 `목사는 나이가 들었든지 젊든지 교회에서 모셔가는 것이지 오라가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고맙게도 장로님들이 오셔서 만났다. 양정중앙교회는 이렇게 교회 구경도 한번 못하고 내려온 교회다. 그런데 정말 참 좋은 교회다.
우리 교회는 원로목사님이 계신다. 모시고 있던 목사님께서 `원로목사님을 모시는 것은 부목사가 담임목사를 모시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고 하던데 그래도 가겠어요?' 하셨다.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교회에서 자란 청년의 결혼이 있었다. 나에게 주례를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그들에게 원로목사님을 찾아 뵙고 부탁드리라고 했다. 그런데 다시 와서 원로목사님께서는 절대로 안하시겠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래서는 안된다고 다시 찾아 뵈라고 했다. 그랬더니 원로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손 목사님, 한 교회에 목사가 두 명이 되면 안됩니다'. 그래서 그 주례를 내가 하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본 교회 출신 청년들의 결혼이 있어 꼭 원로 목사님께서 해주시면 좋겠다고 부탁을 드리면 기쁘게 허락을 하시기도 한다. 정말 점잖은 어른이시다. 어떻게 하든지 젊은 후임 목사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모습에 눈물겨울 때가 많다. `하나님, 목사님의 노년을 더욱 풍요롭게 해 주옵소서'
장로님들에 대해서도 많이 쓰고 싶지만 지면이 모자라 안타깝다. 모이는 성도들이 많아져 방이 모자라 장로님들의 방이 없다. 그런데 나 혼자 `넓은 목양실'을 쓰려니 이만저만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장로님들은 `우리야 잠시 왔다 가는데 뭐 방이 꼭 있어야 합니까?' 하신다. 그러면서 `다른 교회 목사님들 방에 들어가보니까 잠시 잠시 쉴 수 있는 공간도 있던데, 목사님 방도 그래야 할텐데' 하시면서 더 넓은 방을 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신다. 이런 장로님들이 어디 또 계실까? `하나님, 장로님들에게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 주옵소서'(시92:15)
교회내 난치병 6제
1. 습관성 주보 탐닉증: 설교가 시작되면 으례히 주보를 뒤적이는...
어쩌다 낸 헌금 때문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찾거나 설교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타나는 증상
2. 습관성 찬송 추월증: 찬송중 망상의 나래를 펴고 이곳 저곳 헤매는 사람이 주로 이병에 걸린다.
3. 습관성 예배 지각증: 모든 예배에 5분씩 늦게 오는 병이다.
4. 습관성 안면 철판증: 성가 연습 없이 성가대 가운을 입는 증상.
5. 습관성 제발 저림증: 찔리는 설교를 들으면 "나를 씹는군"하고 생각하는 증상. 어디에 내놔도 말이 꿀리지 않는 사람에게 주로 나타난다.
6. 만사 삐딱증: 모든 일을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증상. 면이 고르지 않은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모든 것이 굽어 보인다
이상한 교회
전도사님 월급이 목사님보다 많은 교회
참으로 이상한 교회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월 사례가 40만원인데 전도사님 월 사례비가 50 만원이랍니다. 무슨 교회가 그런 교회가 다 있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라면 담임목사님은 100만원, 부목 사님은 60만원, 전도사님은 30만원, 신출내기(?) 전도사님 사례는 15만원.... 뭐 그런 식의 [사례 지급방 식]이 마땅한 것 같지 않습니까?
"어머머! 아니 누가 그렇게 지급하는 거예요? 장로님들이 그렇게 결정했다구요? 무슨 감정이 있었나 보죠? 보복인 셈인가요?" "아유- 그게 아니래요.
목사님께서 그렇게 우기셨대요." "아니?.... 목사님 스 스로요? 그 목사님 자존심도 없으시
나? 도대체 왜요?" ───────
{당연한 일을 가지고 왜들 이렇게 기이하게 생각하고 야단입니까? 아니 나야 집사람하고 아이들 둘 하고 네 식구밖에 없지만 우리 전도사님은 노모도 모시고 있고 애기들도 있고 돌봐야 하는 여동생도 있고... 아무래도 나보다 생활비가 더 필요할 것 아닙니까?
나야 아이들 이미 웬만큼 자랐고... 또 40만 원 가지고도 먹고 자고 입는데 부족함 없으니 굳이 더 받을 이유가 없지요.
허나 전도사님은 지금 한 창 필요한 자료나 서적도 많이 사야할테고...!
더 필요한 사람에게 더 나누어주는게 주님의 방법아닙니까?
담임목사라고 최고 많이 받고, 부목사는 그 다음이고, 전도사는 제일 적게 받아야 되...! 누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주님이십니까? 아닙니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방식이예
요. 계급사회의 산물이지요. 목사, 부목사, 전도사는 계급이 아닙 니다.
경력의 년수에 따라 사례가 차등나는 건 주님의 방법이 절대 아니잖습니까?
그렇다고 알고 있다 면 그대로 행해야지요. 그거야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요.
예? 더 많이 받고.... 남으면 헌금하면 되지 않느냐구요?.... 아니 무엇때문에 그런 이중적인 일을 하나 요? 목사가 헌금
많이 했다고 주님께 칭찬받습니까?
그렇게 할 것이라면 아얘 애초부터 교회가 그 재 정으로 선교든 구제든 하는게 낫지요.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오려내야
할 부분이 있는데... 목사 사례 비를 얼마나 많이 받느냐로 목사를 평가하고 목사월급을 얼마나 많이 주느냐로 교인들의
수준을 평가 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가치관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가치관이지요. 썩은 부분입니다....}
고개가 수그러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이상하다고 여겼던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부끄러워지 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이 당연한 일을 기이하게 여기고 희귀한 일로 여기게 된 우리는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주님....
예수는 좋으나 교회는 싫습니다
저 유명한 인도의 정신적, 민족적 지도자였던 간디는 독실한 예수 숭배자이면서도 정작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숭배하면서 왜 전형적인 교인
이 되지 않고,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까?" 그는 그때마다 입버릇처럼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좋으나 교회는 싫습니다." 깊이 새겨 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가 교회에 안나가는 이유 가운데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 중에 안두루스라고 하는 영국 선교사가 있었는데 간디는 그와 인간적으로 매우 친했고, 그에게 전도를 받고, 설교도 듣고, 성경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간
디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예배당 문지기가 유색인종이라고 해서 그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 후로 그는 교회에 다시 나가지 않았답니다.
세가지의 유혹
첫째, 시대사건과 교회와는 관계가 없다는 유혹이다.
종교와 정치는 무관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즉 이 시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세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교회는 관계가 없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둘째, 시대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유혹이다.
하나님이 계셔서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관점을 아예 무시해버리는, 베일로 가리는 유혹에 빠질 수도 없다.
셋째, 거짓된 경배, 혹은 거짓신에게 시대사 속에서 인간이 만든 허상을 하나님의 것과 혼돈하는 우상의 유혹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교회뿐만 아니라 세속 역사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예언자적 사명을 다할 수 있다.
교회를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전 11:22.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사 26:8,9.
당신은 당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교회를 판단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완벽한 곳이어야 한다는 확고부동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모두가 불완전하고, 아직도 배울 것이 많고, 잘 잊어버리고, 문제덩어리이고, 구원받기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나쁜 습관들을 아직도 가지 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이라는
선물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완벽을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이상이자 욕심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기보다는 서로가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세워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 교회를 판단하려고 하는 교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지하여 모이게 된 지체들을 겸손하게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당신 역시 당신이 판단하고 비판하는 그 교회의 일부라는 것을 잊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
아무리 잘 타는 장작불도 하나 하나 헤쳐 놓으면 불이 꺼져 버리는 것처럼 교회도 하나가 되지 않으면 그 빛과 열기를 잃는다. ///
교회의 보물
초대 교회사에 나오는 위대한 순교사화입니다. 로마교회의 식스투스 감독은 경건하고 인자하여 그의 목회에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 그는 빈민 구제와 사랑을 실천하여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그를 처형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히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식스투스 감독이 사형장에 끌려갈 때 라우렌티우스 집사가 식스투스의 뒤를 따라가면서 “아버지여, 당신께서 제단으로 나아가실 때 늘 저에게 도움을 청하시지 솥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지금은 저를 데려가지 솥으쁠니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때 식스투스는 “사랑하는 아들아, 긁도 며칠 후면 나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당시에 식스투스 감독의 교회 수석 집사로 거대한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막대한 재산을 알게 된 로마시장은 교회의 모든 재산을 상납토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 재산을 정리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상납일을 연기하도록 허락받고 교회당의 모든 보물을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의존하고 있는 수천의 민중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그 사람들을 모집하였습니다. 약속한 날 시장이 교회당으로 올라오면서 “보물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문을 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때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당 문을 활짝 열고 소경, 벙어리, 걸인, 병자, 고아, 과부의 무리를 가리키며 “교회의 보물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타락한 교회상의 두 나라
중국에 있는 교회들이 잘못된 것 가운데 하나는 아편장사로 돈 모은 사람들이 교회의 중요한 자리에 앉았던 데에 있다
. 중국에서 돈을 모으는 방법은 아편과 관계없는 것이 없다. 중국의 부자는 거의 모두가 아편과 관계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교회 장로로 앉아있고, 아편으로 사람 죽인 돈으로 교회를 섬겼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셨던 것이다.
러시아 교회는 러시아 제국 안에 있던 재산의 2/3가 교회의 것이었다.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타락한다는 것을 의미했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러시아교회의 타락상을 지적한 소설책이 「모나키」이다. 이 책을 보면 정말 구역질 날 정도로 교회가 타락했다. 귀족의 여자와 신부의 타락, 신부와 귀족의 야합...등등.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다 없이하셨다. 70년 동안 문을 닫으셨다. 하나님은 공산당을 도구로 쓰신 것이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적인 규모로 그리고 생활의 각 분야에 걸 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혁명적 변화의 밑바탕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배반되는 어려운 문제가 많이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속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자면 결국 신자는 신앙과 생활 두가지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딜레머에 빠지게 됩니다. 즉 자기 직장과 가정에 충실하자면 하나님의 진정한 뜻 즉 전심의 신앙생활은 버려야 되고, 진정한 신앙 생활을 하자면 사회 속에서 부적응증을 일으키게 되어 소외를 당하고 맙니다. 특히 직업적인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현대는 점점 고도화되고 분업화됨에 따라 자기 직분에 대한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생존 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나가기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즉 전문가가 되어야 하며 전문가가 되려면 남보다 곱절 수고하고 노력하며 전심을 기울여야 하는 세대가 된 것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계율을 버려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수양삼아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에 얼굴이나 비치고 헌금이나 몇푼하면 다 되는 줄로 생각해서는 결코 바른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행위는 외식자의 행위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되겠습니까?
일부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충성을 강요하면서 아울러 세상일도 충성을 다 하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순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두가지 다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두 마음을 품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있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살아야만 될까요? 그래서 전세계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연구하였으나 올바른 해답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그 해답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귀있는 자는 듣고 눈있는 자는 보라고 지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히10:24) 하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이러므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루아침에 모든 믿는 자가 다 이와같이 행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외로운 나그네 같은 독신으로 믿는 자가 먼저 주님의 장막 가운데로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족과 생활에 얽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주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딤후2:4)
오래전에 다윗은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자를 복있다 했으며,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노래하였습니다.(시133:1)
"우는 자들과 같이 울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마가의 다락방의 오순절 역사 등은 함께 모여 같이 사는 공동생활의 기초적 삶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마음을 같이 하고 열심히 모여 떡을 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한국 교회가 우리의 현실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남남이 아닙니다. 한 형제는 부모의 보호 아래서 지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아래 함께 동거동락하며 살아야 할 줄 압니다. 이스라엘의 기브츠나 김용기 장로의 가나안 농군학교, 김진홍목사의 두레마을 그리고 대천덕 신부의 예수원 등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힘은 연합에 있습니다. 제각기 분리된 몸은 시체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즉 몸의 지체가 각자 자기를 주장한다면 어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공동체를 이루여 연합하여 동거하는 길만이 구원 의 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께 열심있는 자에게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전심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이 연합하여 동거하지 않더라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전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오순절 다락방 초대교회에서 처럼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도록 모든 믿는 형제가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과 강구를 다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모든 지혜 또 힘을 모아서 주님의 교회를 하나로 만들지 못하나, 주 예수님 말씀 따라 주안에 있으면 우리 다 하나 되어서 한 몸을 이룰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나눔과 교제가 풍성한 교회, 주님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마22:37-39, 신6:5, 요15:12, 롬13:10)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25일 만에 개척된 교회
동대문 시장에 위치하고 있는 하나로 교회는 500원으로 시작되었다.
평화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몇몇 성도들은 평화 믿음선교회를 구성하고 한 선교회원의 점포에 딸려 있는 창고에다 기도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너무 장소가 비좁았다. 열 명만 들어서도 더 들어갈 여유가 없었다.
천정이 낮아 일어설 수도 없었다. 어렵게 2년 동안은 버틸 수 있었으나 회원이 늘어 그것도 어려웠다. 이웃 건물에 15평과 18평 공간이 임대로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장소를 임대하기 위해서 합심 기도에 나섰다. 그러나 도무지 응답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서야 “더 크게”라는 응답을 받았다. 그 건물에는 12층과 13층(모두 200평)이 비어 있었다. 회원들은 아침 장사에 들어가기 전에 그곳에 찾아가서 함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아무도 헌금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워낙 엄청난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회 시간이었다. 함께 참석했던 한 학생이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이것이 제가 가진 것 전부입니다. 건축헌금으로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으로도 가능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하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본 그 학생의 어머니가 크게 감화를 받아 통곡을 하면서, 지갑을 뒤져서 가지고 있던 80만원을 모두 헌금하였다. 그리고 추후에 더할 것을 약속하였다. 또 다른 회원은 여름 장사를 위해 빌려온 500만원을 모두 바쳤다.
그 순간 기도회는 회개의 장으로 바뀌었다. 서로가 마음만 있고 행함이 없었음을 회개했다. 그리고 다투어 서로 헌금을 했다. 그리하여 하나로 교회는 불과 25일 만에 7,000만원을 모아서 교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칭찬 받을 만한 교회
1) 그리스도를 기초로 삼는 교회(엡2:19,20)
2) 열매 맺는 교회(롬7:4)
3) 사랑 안에서 참된 행실을 보이는 교회(엡4:15)
4) 그리스도를 구주와 머리로 삼는 교회(엡5:23)
5) 그리스도로부터 힘과 능력을 공급받는 교회(골1:29)
6) 하나님의 뜻대로 자라나는 교회(골2:19)
7) 정결하게 자신을 지킨 교회(고후11:2)
8) 이단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교회(딤전6:3-5)
9) 진리를 사수하는 교회(살후3:6, 살후3:14)
10) 규모와 질서가 유지되는 교회(살후3:7-9)
11) 분쟁과 불화가 일어나지 않는 교회(롬16:17, 고전1:10, 고전3:3, 고전5:1-13)
12) 영혼 구원의 사명을 힘써 실행하는 교회(마18:15, 살후3:14)
13)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교회(히10:25)
14) 연약한 자의 약점을 함께 담당하는 교회(롬15:1-3)
15) 책망과 징계의 권위가 서는 교회(고전11:34, 고후13:1,2, 딛2:15)
16)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는 교회(행11:24)
17) 성례가 경건하게 실행되는 교회(고전10:16,17)
18)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교회(행6:7, 행17:11)
19) 박해를 받으나 이겨내는 교회(계2:2, 계2:9, 계2:13)
20)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교회(계2:17)
21) 신앙 사수를 위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계2:10)
교회는 목욕탕
일본의 하천풍언 선생은 말하기를 '교회는 청결통과 같다'고 하였다. 청결통은 모든 쓰레기를 내버리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어떤 죄인이든지 다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교회를 목욕탕이라 하겠다. 목욕탕에는 누구든지 다 들어와서 목욕할 수 있다. 교회에는 어떤 죄인이든지 또 누구든지 들어와 그리스도의 피로 그 더러워진 심령을 깨끗이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능력을 상실하는 교회
내가 알고 있는 시골 교회의 발전과정을 보면서 나는 가끔 요즈음의 교회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그 교회가 세워진 것은 6.25전쟁을 어수선하던 때이고, 교회를 세운 주역들도 전쟁통에 피난온 피난민들이었다. 그들의 처지와 교회의 모습은 서로 비슷했다. 그때에 그 교회는 찬송 곡조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전도사님이 시무했다. 그의 설교는 자장가와 비슷했고 설교의 격식도, 내용도 빈약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바로 이 교회의 능력이었다.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교인들은 정말 어리석을 정도로 단순한 십자가의 신앙을 붙들고 있었다. 토담 초가집에 멍석을 깐 예배당에 무릎을 꿇고 소리치며 기도하는 소리가 40년 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제 그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을 세우고, 격식에 맞는 설교와 예배가 있고, 그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그 마을의 유지가 되었지만 지금 그곳에 가면 그 때의 힘이 없다. 그때의 능력을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의 입은 성공 사례와 교회의 부흥과 거대한 예배당 건물을 이야기하지만 기도의 소리는 죽었고 그들의 눈은 생기를 잃었다. 나는 텅빈 예배당 구석에 앉아서 하나의 대답을 얻었다.
그들은 이제 유대인의 종교성도 찾았고, 헬라인의 지혜도 찾았으나, 그 대신 오직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만을 알기로 하던 그 신앙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교인들은 이제 격식에 맞는 설교와 예배와 거대한 예배당과 수많은 잘난 교인들에 가리워 예수님을 볼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잃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잃어 가는 어리석은 한국 교회는 차라리 발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진정 성령의 능력을 되찾기 위해 예수님만
을 외치는 교회로 다시 서야 하지 않겠는가?
신나는 교회 생활
어떤 사람은 주일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주일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서 분주하게 하루 종일 지내면서도 별로 피곤해하지 않고 밝은 얼굴로 보낸다. 어떤 사람은 주말이 되면 또 어느새 일요일이 돌아왔는가 하면서 짜증스러워 하기도 한다. 예배가 시작된 예배당에 걸어들어와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털썩 자리에 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성경책을 들고 오지도 않고 멍청하게 앉아서 찬송을 부를 때에는 다 죽어가는 것처럼 개미 소리만하게 따라 부르고, 헌금하는 시간에는 주머니에서 부시럭거리면서 구겨진 돈을 꺼내서 언짢다는 듯이 헌금 주머니에 넣는다. 설교가 시작되면 영락없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설교가 끝나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축도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교회 문을 나서는 것이다.
신나는 교회생활을 하고 싶은가? 우선 "내가 정말 예수님을 바로 믿고 있는가?"부터 다시 검토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 축쳐진 어깨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가겠는가? 시간에 늦을까봐 부리나케 달리고 서둘지 않겠는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정직한 마음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마음으로 나의 믿음을 재확인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교회의 세 가지 형태
콜린 윌리엄스는 교회의 모습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 아브라함적 동기의 교회가 있다. 이런 교회는 미지의 세계를 믿음으로 순복한다.
둘째, 모세적 동기의 교회가 있다. 이런 교회는 조직제도를 상징하며 신앙상으로 조금 위험하다.
셋째, 바울적 동기의 교회가 있다. 영적 회심을 바탕으로 한 교제가 넘치는 교회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는 모든 사람의 공동체다. 위에 열거한 교회 형태 중 세 번째 형태를 근거로 해서 교회를 활성화해야 한다.
교회의 염려
오늘날 교회는 애처롭게도 숫자에 대해 매우 근심한다.
"그가 많은 사람을 끌어올 수 있을까?" 라는 것이 목회위원회의 첫째 질문이다. "그가 헌금 바구니를 채울 수 있을까?"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둘째 질문이 되곤 한다.
예수는 양이 아니라 질을 염려하신다.
행함이 없는 한국교회
지난 한주간 필자는 국민일보의 "역경의 열매"에 나오는 보드만여사의 이야기 때문에 깊은 감동에 젖어서 지냈다. 35년간 다섯 명의 한국인 자녀를 입양하여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중의 하나는 심장병을 앓는 아이였고 또 하나는 뇌성마비에 간질의 장애를 가진 소녀여서 25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밥먹는 것과 화장실 가는 것을 돌보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입버릇처럼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성장과 세계선교를 위한 한국의 사명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나라를 마지막 제사장 나라라고 자랑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가. 지금 한국의 크리스천가정에 뇌성마비소녀를 입양해 달라고 공문을 보낸다면 과연 몇가정에서 그것에 동의할 것인가. 가수가 무대 위에서 테이프를 틀어놓고 입만 벙긋벙긋 하는 것을 립싱크라고 한다. 주로 격렬한 춤을 추는 댄스그룹가수들이 립싱크를 사용하는데 외국에서 립싱크는 관객을 우롱하는 용서받지 못할 사기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더구나 요즈음 컴퓨터 녹음기술로 잘된 부분만 짜집기를 하고 음색과 음정까지도 다듬어서 완성해 낸 한 개의 테이프를 공연 때마다 틀어놓고 입만 벙긋거리는 불공정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강대국의 압제와 전쟁의 고난을 기도로 극복해 가면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 가보아도 한국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지금에 와서 한국교회는 말로만 사랑하는 립싱크의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마지막시대의 제사장 나라보다는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의 나라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실 것임에 틀림없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세계 50대 교회에 들어간 한국의 24개 교회
조용기 목사 형제가 시무하는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안양 남부순복음교회가 신 자수에서 세계 1,2위를 기록했다.
또 세계 50대 대형 교회 중 23개가 한국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 한국 교회의 급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종교 전문잡지인 크리스천 월드가 최근 조사 발표한 세계 50대 교회를 보면 신자수가 10만 명이 넘는 교회는 1위인 여의도 순복음교회(60만)와 2위인 안양 남부순복음교회(10만5천) 두 곳 뿐으로 밝혀졌다.
출석 교인을 기준으로 조사한 교회 순위에 따르면 한국은 서울 금란감리교회(담임목사 김홍도, 신자수 5만 6천)가 7위 인천 숭의 감리교회(이호문, 4만 8천)가 9위, 인천 주안장로교회(나겸일, 4만 2천)가 10위로 10위권 내에 한국교회가 5개나 올랐다.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지역에서도 두드러져 인구 5만 6만 명의 한인사회에 2백 18개의 한인교회가 있고 기도원이 6개나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세계 50대 교회에 들어간 나머지 한국교회는 다음과 같다 (괄호안은 순위, 출석교인, 소재지, 담임목사 순).
성락침례교회(11위, 3만, 서울, 김기동) 광림감리교회(12위, 3만, 서울, 김선도), 영락장로교회(13위, 2만8 천, 서울, 임영수), 혜성장로교회(15위, 2만3천, 서울, 유복종), 소망장로교회(16위, 2만2천, 서울, 곽선희), 명성장로교회(21위, 1만9천, 서울, 김삼환), 강남순복음교회 (22위, 1만 7천, 서울, 김성광), 수영장로교회(27위, 1만3천, 부산, 정필도), 마산 부흥교회(28위, 1만 2천, 마산, 이태화), 산해원부흥교회(31위, 1만2천, 경남, 이태화), 한국예루살렘교회(32위, 1만2천, 인천, 이초석), 강남 중앙침례교회(36위, 1만, 서울, 김충기), 인천순복음교회(40위, 1만, 인천, 최성규), 서부장로교회(41위, 1만, 부산, 이재순), 사랑의 교회(44위, 9천, 서울, 옥한흠),갈보리 교회(46위, 9천, 서울, 박조준), 대구 순복음교회(47위, 9천, 대구, 고석환).
교회 공동체의 힘
어떤 시골 교회 목사가 교인 중 한 사람이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예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낙심한 그 교인이 내세우고 있는 것은 들판의 자연환경 속에서도 예배당에서 만큼이나 수월하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겨울 저녁, 목사는 그 고집 센 교인의 집을 심방 차 방문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벽난로 앞에 앉아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교회출석 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만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목사가 벽난로 옆에 있던 부젓가락을 집어들더니 불 속에서 반쯤 타고 있는 석탄 덩어리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난로 밖에 따로 놓았다.
그러자 그 석탄 덩어리의 불은 이내 꺼져버리고 회색빛 덩어리만 남았다. 그러나 벽난로 속에 있는 석탄 덩어리는 여전히 활활 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교인이 입을 열었다.
"목사님, 다음 주일에는 예배에 꼭 참석하겠습니다."
교회의 흔들의자
몇 해 전 어느 신문의 헤드라인에 오늘날 기독교가 잃어버리고 있는 복음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제목이 나온 적이 있었다.
"교회의 딱딱한 의자를 흔들의자로 바꾸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 있는 어느 교회는 앉아 있는 사람이 조금 움직여도 최대한 흔들리도록 고안된 넓고 푹신푹신한 흔들의자를 설치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지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곳
교회는 설교자들이 단체나 교육단체 혹은 선교단체 이상의 것이다. 교회는 사람들을 초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교회가 증거하는 새로운 생활 속으로 끌어들인다.
교회는 전적으로 선교공동체며, 교회의 선교 영역은 전 세계다. 교회의 선교활동 목적은 단순히 사람들에게로 어떤 신념이나 사상을 전달해 준다든지 그들에게 어떤 특정한 원리나 생활 규칙을 주입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주고,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사람들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도록 해야 한다. 이 말씀의 사역은 성례전(Mom's Disorder and God's Design)의 사역 속에서 완성된다.
에머슨 파스틱이라는 설교가는 미국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데는 4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생활 습성이나 관습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 때문에 그 설교를 듣기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란 좋은 곳이라 교회에 나가서 활동하면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기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일시적인 위안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기들은 교회에 나가는 주체적인 동기가 될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은혜를 받는 곳입니다.
당신은 왜, 그무엇 때문에 교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입니까?
"한국 선교 뿌리는 개척교회였습니다”
“큰 교회 목사님들이 보기에는 늘 도움을 구하기만 하는데 익숙해진 우리 모습이 ‘거지근성’을 가진 목회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을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것이라면 거지근성이라도 가지고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옳지 않은가요? 한두번 도움을 받다보면 정말 거기 익숙해지는 거지근성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러지 않으려고 늘 깨어서 기도합니다”
수도권 재개발지역에서 4년째 교회를 개척하고 있는 K목사는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지난 여름엔 자다가 바닥이 축축해 깨어보니 빗물이 들어와 방바닥이 흥건히 젖어 있었습니다. 물천지에서 백일도 되지 않은 아기가 아무 것도 모른채 물장구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상가건물 한쪽을 얻어 목회를 하고 있는 Y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성도들이 모인다 싶으면 떠나고 모인다 싶으면 또 떠납니다. 변두리에 있다가 신도시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 우리 형편에 차를 몰고가서 데려오기도 힘들죠. 몇 번 나오다가 성도들도 지쳐서 못 나오더라구요.아예 서울에서 다디던 큰 교회로 가는 사람들도 많구요.”
어느 개척교회 목회자는 예배시간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차라리 이 성도들이 다른 교회로 모두 흩어져 가면 내가 교회 문을 닫고 다른 길을 찾아볼 수 있을텐데’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목자들이 필요한 양들이 있기 때문.
“교회가 너무 많다고 하지만 아직 더 파고 들어가야 할 곳이 많습니다. 청빙받아가는 편한 길을 기다리기보다 교회 개척이라는 험한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진 않습니다. 부교역자로 있는 친구 목회자들이 교회 어른들을 비판하는 얘길 할 때가 있어요.그런 친구들에게는 ‘그럼 거기 있지 말고 나와서 개척해라. 네가 꿈꾸는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어봐라’고 말해줍니다. 교회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개척을 마다하는 사람들이 많아요.고생하기 싫다는거죠.이해합니다.저도 한때는 그랬으니까요”“직접 개척을 해보니 지금 큰 교회를 일궈낸 목회자들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저도 몇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지만 내년부터 지원을 그만둔다고 해도 솔직히 할 말이 없습니다. 몇년째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큰 교회들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지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지요”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왜 이런 고생을 사서하는 것일까.
“개척교회야말로 교회 전체가 하나의 신앙공동체입니다.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함께 예배드리고, 둘러앉아 밥먹고 설거지하고…서로의 형편을 잘 알고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드릴 수 있죠. 큰 교회에 가서 예배만 살짝 참여하고 오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경험입니다.”
상가 건물 하나에도 교회가 몇 개씩 들어서 있다고 비난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교단간의 무분별한 경쟁, 남아도는 신학생 등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그래도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대부분 거지 취급을 받더라도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고 신앙 공동체를 지켜가기 위해 삶을 바친 이들이다.세상을 향한 교회의 최전선에 서있는 ‘돌격대장’들이다. 교회 성장이 정체됐다고 한탄만 할 게 아니라 한국교회가 힘을 모아 이 돌격대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체계적인 지원방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 공동체 의식을 높이자!
애굽의 궁정에서 학문을 연구한 모세가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쳐죽인 일(출 2:11-12)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의식을 일깨워 이스라엘 민족의 존재 의미를 되찾으려고 한 것으로 그로선 대단한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모세의 의도를 받아들일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민족을 구원해 보겠다는 모세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 하더라도 대중을 이루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준이 저급하다면 그 백성은 여전히 무지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피신하여 40여 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이전보다도 훨씬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고통이 심해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소 바로 밑에서 압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 자신들의 정상한 위치가 아님을 인식하기 시작했다.(출 2:23-25).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곧바로 구원하지 않고 오랫동안 바로의 손에 남겨두신 것은 최소한 자기들이 바로에게 속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속해 있어야 함을 고백할 정도의 수준까지는 도달해야 할 것을 기다리시기 위함이었다. 모세와 같이 몇몇 개인의 각성만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민족적 경향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도탄에서 건져내는 원칙이다. 적어도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근거하여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역사관을 가지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을 펴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면 마치 애굽이라는 흑암 속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교회마다 돌아보면 무엇을 위해 사는지조차도 모르는 성도들이 적지 않다. 또한 왜 예배에 참여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아무런 의식 없이 그저 교회당에만 들락거릴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개교회 우선주의와 대형화 지상주의에 빠져 있다면 얼마나 큰 일이겠는가?
한국 교회가 지금의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성도 각자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고 신학에 관련된 서적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 신학은 결코 목사나 신학생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성도라면 모두 개혁교회가 지향하는 신학이 무엇인가 하는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최소한 이 정도의 지식을 가질 때 성도들의 의식도 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의 의식이 깨어 질 때 우리가 목적하는 바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며 비로소 하나님은 한국 교회에 구원의 손길을 펴실 것이다. 성도들이여, 이제라도 신학 공부를 시작하자!
아파하는 교회안의 청소년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 : 1)
횃불선교센터 성경연구소가 횃불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실시한 "기독 청소년의 가치관 및 종교 생활"에 대한 설문을 서울시내 사랑의교회를 비롯, 온누리 교회, 할렐루야 교회 등 9개 교회 중,고등학생 1천 25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는 신앙생활과 가치태도, 매체 접촉,생활태도 등에 대해 물었다.
조사 결과 신앙생활에서는 대테로 성실한 태도를 보였으니 교회 출석 이유를 하나님과의 만남(13%)보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28%)이라고 하였고, 진리를 발견하는데 가장 큰 권위를 갖는 것을 성경(39%) 보다는 개인 경험(45%)에 두고 있었다.
또 응답자의 41%가 음란 비디오를 시청했으며, 음란 잡지나 만화도 45%가 접한 경험이 있고, 응답자의 2%는 성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흡연은 16%가 있있다고 응답했다. 음주도 전체의 56%가 해봤다고 답했다.
적 용 이 시대에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행한 기성세대의 우려와 걱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였다. 이들의 탈선 현장에 대한 고발을 보도하는 언론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놀라운 것이 못되어 버린 실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교회 안의 청소년들도 심각하게 병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먼저 이들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들의 문화와 처한 고민들을 포용해 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바른 가치관이 형성될 수 있도록 교회에서 기독 청소년들을 향한 보다 적극적인 교육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교회의 책임
1806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독일은 치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했다.그 사건 이후 독일에서는 민족적 자각과 사회적 각성운동이 시작되었다. 농민해방 행정개혁 군제개혁 등이 진행되는가 하면 민족주체성 확립을 위한 자성운동 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베를린대학 교수였던 피히테는 나폴레옹 점령 하의 베를린 학사원에서 1807년 12월부터 매주 한 차례씩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을 했다. 피히테가 강조한 것은 독일재건의 길은 무엇보다 국민정신의 개혁에 있다는 것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당면한 현실의 개혁과 발전은 국민정신의 거듭남으로 시작된다.우리나라 교육이 심각한 위기국면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돌이켜보면 그것은 교사 학생 학부모,그리고 교육정책 담당자들이 어우러져 엮어낸 실패작이다.
교회의 책임은 국민 정신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는 일이다.전인적 구원사건이 우리 속에서 구현될 때 개혁과 갱신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교회성장은 자기반성부터
1907년 평양 대부흥회가 길선주 목사의 인도로 진행되고 있었다.장대현교회에 모인 1500여명은 길목사의 설교에도 변화 가 없었다.기도도 터지지 못했고 성령의 은사도 임하지 않았다.그때 길목사는 은혜의 단절은 자신의 탓이라 깨닫고 외 치기 시작했다.
“저는 아간과 같은 놈이외다.저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받지 못했습네다.언젠가 제 친구 한 사람이 임종하면서 제게 부탁 하기를 ‘나는 이제 죽지만 내 재산을 잘 처리해주게.내 아내는 무식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꼭 부탁하네’라며 세상을 떠났습네다.저는 그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1백원을 잘라 먹었습네다.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네다.저는 내일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네다” 길목사의 우렁찬 공개 자복이 터지자 회중석에선 통회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저 유명한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성장을 가로막고 민족공동체를 분열,파괴시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책임을 떠넘기기 때문이다.“네 탓이다.네가 책임져라”라는 파행이 계속되는 한 회생의 처방은 없다.그러나 “나 때문입니다.내 탓입니다”라는 회개운동이 일어난다면 제3의 부흥운동은 활화산처럼 일어나게 될 것이다.
교회 떠나고 싶었다. 천주교신자 10명중 4명 꼴
" 너희는 유혹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엡 4 : 22 - 23)
천주교 신자 10명중 4명 정도가 한때 교회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 가톨릭 신문사가 창간 71주년을 맞아 우리 신학연구소에 의뢰 지난 2월부터 한 달간 전국의 신자 1천4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톨릭 신장의 종교 의식과 신앙 생활' 조사결과 밝혀졌다.
교회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신자 가운데 14.8%는 어느 정도, 혹은 자주 그런 생각을 품었던 것으로 조사됐으며, 그 이유로 신자들의 생활방식에 대한 실망, 자신에 대한 죄책감, 미사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감등을 꼽았다.
또 10명중 3.5명 꼴로 동료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신앙인 다운 모습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반면에 가톨릭 신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응답자 96.5%가 그렇다고 답 해 교회에 대한 불안감과 자부심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입교 동기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태중 교우신자들의 모범적 생활을 보고, 가톨릭의 전례 분위기 때문에 등 이었다.
적 용 교회 안에는 언제나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상처와 실망으로 교회를 등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 같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공감대를 이룰 것이라 생각한다. 교회는 무엇인가? 섬김이 있는 곳이다. 교제가 있는 곳이다. 말씀의 선포가 있는 곳이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등대의 역할을 한 교회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 (마가복음 10 : 45)
구리의 목앙교회는 임대해 사용하는 교육관의 일부에 'YMCA녹색가게'를 개설했다. 목양교회의 올해 표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인데, 주변 사람들은 세상을 변화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지역사회는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경제난이 시작되면서 사용하던 물건을 나눠 쓰자는 녹색가게가 개설할 곳을 찾지 못하자 흔쾌히 교육관을 무상으로 빌려주었으며, 교인들 10여명은 아예 녹색가게의 자원 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다.
또한 이 교회의 봉사는 단순히 교회 건물 개방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리시의 혼자 사는 노인 후원사업을 펼치고 있는 신도들은 올해도 38세대에 1천 8백만원을 지원하기로 약정을 맺었다.
"지난해 교육관을 마련한 후 교인들의 동의를 구해 작은 공간을 빌려주고 있을 뿐"이라는 황규현(54) 담임목사는 "신앙인 이라면 당연히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해야 하는 것 아니냐?" 고 반문했다
건실한 교회의 특징
1) 적극적 지도력 2) 일치된 교회
3) 영감있는 예배 4) 지역 사회에 적응하는 교회
5) 활기있는 세포 확장 6) 철저한 훈련
7) 생활로 증거하는 교회 9) 선교 계획이 서있는 교회
10) 적절한 기구와 조직 11) 기도 많이 하는 교회
12) 생활로 연결된 성서 연구
미국 교회가 쇠퇴해 가는 원인
미국의 신학자 칼 두들(Carl Dudly)의 조사에 따르면 1940년부터 1960년까지 20년동안 미국교회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라고 한다. 1940년대 미국의 주요 개신교, 장로교,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인이 미국 전 인구의 49%였다고 한다. 그 뒤 20년동안 전 인구의 15%가 증가했다고 한다.
이토록 왕성하게 성장하는 기간 동안 미국교회가 한 일과 그 당시 선포된 메시지의 내용을 일반적으로 총괄하여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미국 교회가 한 일》
첫째, 미국교회는 가장 왕성하게 성장할 때에 예배당을 크게 지었다.
교회가 성장하는 기간 동안에 가장 중요하게 한 일이다. 지금 도심 가운데 비어있는 교회들이 그때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둘째, 미국교회는 가장 왕성하게 성장할 때에 신학교를 많이 세웠다. 각 교단 신학교들이 미국 곳곳에 세워졌다.
셋째, 미국교회는 가장 왕성하게 성장할 때에 깊은 산 속을 찾아다니며 캠프장이나 기도원을 세웠다.
《선포된 메시지》
첫째, 예수를 믿은 것과 중산층이 되는 것을 강조한 내용이었다.
즉, 예수를 믿으면 잘 살게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둘째, 예수를 믿으면 좋은 사회적 지위를 얻는다고 강단에서 선포했다.
셋째, 예수를 믿으면 좋은 가정을 갖는다고 하는 아메리칸 드림과 일치하는 메시지였다.
1960년부터 이런 소망이 실제로 실현되면서부터 미국인들은 교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가정이 안정되고, 지위가 안정되면서 교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1964년 이후부터 1974년까지 감리교인이 1백만명 줄었다고 한다. 그리고 1984년까지 920만명이 줄었다고 한다.
종교개혁과 21세기 한국교회
루터는 세상 떠나기 얼마전 시간이 있으면 "시험"에 대해서 글을 썼으면 했다. 이 "시험"이란 단순히 돈과 명예와 여자 문제와 같은 윤리적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엄습해 오는 회의, 영적인 혼란, 마음의 고민, 공포, 비참과 절망과 같은 사탄의 시험이었다. 본래 루터는 이 "시험" 때문에 수도원에 들어갔다. 루터가 에르푸르트 법과대학에서 첫 학기를 끝내고 귀가하던 중,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은 것을 목격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루터는 수도원에서 수도원적인 삶의 이상(사도적 청빈, 순결, 순종)을 따른 삶을 살았지만, 그의 "시험"은 극복될 수 없었다. 루터는 훗날 과거 자신의 수도원적인 삶을 통해서 결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루터가 모범된 수도승으로서 수도원적인 삶의 이상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양심은 죄책감에 눌려있었다. "샘 솟는 기쁨이"이 없었다. 루터는 수도원적 삶을 모범 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그리고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 존전에서 항상 자신이 죄인임을 느꼈고,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는 종종 예수 그리스도를 무서운 심판주로 느껴, 그분 앞에서 피할래야 피할 수조차 없었다고 하며, 심지어 이 그리스도를 진로에 찬 심판주, 사형 집행인, 아니 마귀로 체험하였다고 한다. 루터는 감추어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을 경험했던 것이다.
루터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의 객관적인 복음에 대한 주관적인 구원론적 체험에서 그를 고민에 빠트렸던 "시험"을 극복해 냈다. 그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 : 17 ; 참고: 롬 3 : 21-27)라고 고백하였다. 유대교적 율법주의로 고민하던 바울이 체험적으로 복음을 수용했던 것처럼 중세기적 율법주의로 고민하던 루터 역시 체험적으로 복음을 수용하였다. 향후 루터는 이와 같은 복음체험에 입각해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 신약성경과 나아가서 구약성경을 해석한다. 복음과 복음에 대한 구원론적 경험이 그의 성경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였다.
그리하여 향후 루터의 모든 신학적인 주제들은 이와 같은 이신칭의의 복음이해에 의해서 조건 지워져 있다. "성경이해"(경전 안의 경전), "율법과 복음", "두 종류의 의",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 "만인제사장직론", "하나님의 소명에 입각한 직업윤리", "두 왕국론", "노예의지론", 등이 그러하다. 이 중에서 우리는 1. "복음의 재발견과 오직 성경"(sola Scriptura), 2. "만인제사장직론", 3."하나님의 소명에 따른 직업윤리"만을 논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주제들이 21세기 한국 교회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루터는 말씀을 통한 성령 역사로 교회를 개혁하였다. 그의 개혁은 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글과 강의와 공개 토론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질적인 개혁원리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인간을 위해서 성육신하셨고, 십자가를 지셨다가 부활하셨다고 하는 복음이었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는 종교개혁의 형식적인 원리였다. "오직 성경으로만"이라고 하는 모토는 루터가 복음을 체험적으로 받아들인 이후, 즉 1519년 라이프찌히 토론에서 등장하는 바, 그것의 삶의 자리는 오직 성경이 교황의 교도권과 교회 공의회의 권위에 의해서 결정된 교리나 교회 법 등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루터는 니케아 공의회(325)의 삼위일체론, 콘스탄티노플의 성령론(381), 에베소 공의회(431)의 구원론 및 칼세돈 공의회(451)의 정통 기독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칼빈은 루터처럼 "복음"을 성경의 중심으로 보면서도 루터 보다 기록된 말씀을 강조하였고, 칼 바르트의 바르멘 신학선언(1934) 이후의 장로교 혹은 개혁교회 전통은 루터 식으로 복음을 성경의 중심으로 보면서도, 기독교적 삶(성화)과 교회 직제를 위한 성경사용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1520년 루터의 세 저서(교회의 바벨론 포로, 기독자의 자유, 독일귀족에게 주는 글)는 그의 복음이해(이신칭의)에 따른 만인제사장직론을 밑에 깔고 있다. 만인제사장직(the universal priesthood of all the believers)이란 세례 받은 모든 기독교 평신도들은 원칙적으로 복음을 설교할 수 있고, 형제자매의 죄를 용서할 수 있으며, 중보기도를 올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들 모든 평신도들은 성령을 통해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작은 그리스도들(little christs)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는 다만 이와 같은 만인제사장직론에만 머물러 있으면, 교회가 화평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회중에서 선출된 안수례받은 직제를 주장하였다.
칼빈은 루터보다 교회론를 강조하고, 성화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4중직을 주장하였다. 칼빈은 만인제사장을 밑에 깔면서도 목사, 장로, 집사와 같은 안수례 받은 직제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1524년 농민전쟁 이전까지 회중교회주의를 지향하다가, 1926년 이후 감독교회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소명에 따른 직업윤리 루터는 세례 받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 존전 에서 그 신분(status)이 동등하다고 본다. 예컨대, 목사와 기독교인 농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존전 에서 그 신분이 동등하고, 그 맡은 바 일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진실로 루터는 그의 복음이해에 따른 기독교인의 기본적인 정체성에 입각하여 성직 계층과 평신도 계층을 하늘과 땅 사이처럼 나누던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이분법적 가치관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다. 중세기는 성직자들만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것으로 보았지만 루터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수행하는 모든 직업활동이 하나님의 소명(vocatio = Beruf)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의 직업윤리는 중세기에서 근대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비록 그것이 자본주의에 공헌하는 과정에서 그의 직업윤리의 역기능적인 면도 나타났지만 말이다.
그런데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은 두 왕국론 에서 하나님의 모든 보편사와 창조세계 전체에 대한 주권을 강조하는 바, 이것이 직업윤리에도 영향을 준다. 즉,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모든 세속적인 삶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서양문화와 직업활동에 좋은 영향을 준 개혁교회의 역사가 이를 증명할 것이다.
복음의 재발견과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만인제사장직론, 하나님의 소명에 따른 직업윤리와 같은 루터의 신학적 주제들은 여전히 오늘날 21세기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좋은 길잡이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오직 성경으로만"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형식적인 원리만을 받아들여, 성경의 명제적 진리들에 비중을 두다가, 실질적으로 루터 종교개혁의 추진력이었던 복음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또한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 직제의 계층 질서화와 경직화에 따라서 루터와 칼빈의 만인제사장직론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끝으로 우리는 성직자의 직분은 거룩하고, 기타 모든 기독교인들의 직업활동은 속되다고 하는 중세기적 이분법을 오늘날에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하지만 종교개혁은 어디까지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에 초점을 맞춘 것이어서 정의, 평화, 창조세계의 보전과 같은 교회의 사회참여나 복음전도 및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입각한 교회의 세계선교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전혀 개념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가 하나되어 복음을 선교하고(요 17 : 21), 역사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사명(골 1 : 20; 엡 1 : 10)과 같은 거시적인 교회의 비전에 관하여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흐름(신앙과 직제, 삶과 봉사, 세계선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에 초점을 맞춘 것이어서 교회의 사회참여나 세계선교에 대해서는 전혀 개념이 없었다. 교회가 하나되어 복음을 전하고 역사와 자연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거시적인 교회의 비전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공동 묘지화된 교회당
구라파 도처에 궁전 같은 교회들이 있고 교회 경내에는 대개는 공동 묘지가 있다. 구라파인들은 98%가 크리스찬이라고 등록이 되어 있으나 결혼식과 장례식, 평생 두 번 교회에 가는 교인이 대부분이고 그나마도 주로 노인들이 교회에 참석하는데 평균 3%가 출석 교인이어서 공동 묘지화된 교회를 보는 느낌이다. 미국 교회를 빌려서 예배 드리던 한국 교인들이 점점 주객이 전도되어 미국 교인수가 줄어들자 많은 교회들을 한국 교회가 접수하는 중이다. 미국 교회도 최후의 몸부림을 다하지만 미국의 영성의 시간은 오후 6시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의 기류가 태평양 시대 기류를 타고 한국에 그 중심이 머물고 있다. 이 부흥을 잘 감당하면 영광스런 통일 복음 민족이 될 수 있으나(겔39장, 신28장) 잘못 감당하면 지금 짓는 거대한 교회들이 공동화하고 공동 묘지 같이 텅 비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하군요
“얘야, 우연히 용한 집에서 점을 보게 되었는데, 글쎄 3개월 후에 네가 죽는다니 어떻게 하니?” 서울에 사는 어머니가 집안 결혼식에서 만난 부산 사는 딸에게 족집게 점쟁이의 점괘를 전달해주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딸의 남편은 버럭 성질을 부렸다. “아니, 왜 부산에 사는 사람이 서울에서 점을 보나? 부산에서 봐야지.” 그러나 이 어찌된 일인가! 부산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점쟁이 왈, 3개월 후면 죽을 사주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당황하던 여자는 신들의 화를 풀어드리기 위해 굿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점쟁이의 말에 당시 200만 원짜리, 아마 지금으로 얘기하면 2,000만 원쯤의 굿을 하기로 하였다.
굿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그런데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그 가게에 평소 안면이 있는 노인이 라면을 사러 왔다. “색시도 이제 예수님 믿어요.” 그 전에도 많이 들었던 얘기였는데, 오늘 따라 가슴에 비수가 박히듯이 와닿는 것이 아닌가! “예수 믿으면 어떻게 되나요?” “구원받지.” “구원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아, 어떻게 되기는? 하나님의 딸 되지.” “할머니, 자세히 좀 얘기해주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가 죽을 팔자라는 것과 내일 굿을 한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노인은 교회 권사님이신데, 예수 믿으면 팔자가 달라지니 당장에 예수 믿고 굿을 하지 말라고 얘기해주셨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되, 내일 굿은 한 번 하고 믿으면 안될까요?” “그러면 안돼요. 오늘 믿으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굿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 뒤로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온 그 여자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예수 믿고 영접하고 나니 이렇게 편안한 걸. 이제는 죽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래서 교회가 필요한 것이군요.”
▧ 기도: 아무도 고치지 못했던 저의 아픔과 질병을 아시는 주님, 저를 묶고 있었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고 낫게 할 권세가 있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손이 오늘도 저를 다스리고 계심을 믿고 생활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성장하는 교회의 설교자 분석
1. 소명감이 투철하다.
2. 확신에 차 있다.
3. 열정에 차 있다.
4. 영적인 비젼으로 가득차 있다.
5. 심오한 진리를 쉽게 전하다.
6. 머리 보다는 영혼을 파고 든다.
7. 감동적이다. 눈물이 난다. 기쁨을 일으킨다. 기분이 상쾌해 진다.
8. 회개하고 싶어진다. 가슴이 뜻끔하다.
9. 결단과 헌신을 요구한다.
10. 사람이 변한다. 자신의 변화를 의식한다. 성숙해진다.
11. 재미있다. 유모어가 있다.
12. 또 듣고 싶고 또 먹고 싶다.
13. 교인들을 대단히 존중한다.
14.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다. 몸의 치유가 나타날 때도 있다.
15. 혼자 듣기 아깝다. 남에게 들려주고 싶다.
16. 설교자를 감히 범할 수 없다.
17. 마음이 편해 진다. 안점감과 평화를 안겨준다.
18. 지식의 전달이 아니고 영혼의 메세지임을 느낀다.
19. 순종하면 잘 될 것 같다.
20. 강한 공감을 일으킨다. 가슴에 와 닿는다.
21. 자신을 비하시키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22. 설교하는 것을 즐긴다.
23. 목소리 마저도 듣기에 즐겁다. "듣기에 거슬리는 말은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
24. 밝고 진지한 표정이 말보다 더 중요하다.
25. 야단치는 목소리는 은혜가 않된다. 죄는 책망하나 용서의 강조로 해방감을 준다.
26. "우리"란 표현을 더 많이 쓴다.
27. 다른사람의 흉내를 내지 말라.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가장 효과적이다.
28. 설교자의 태도가 좋아야 설교가 좋다.
29. 아내에게 연습하라.
30. 설교를 읽지 말라.
31. 암송한 설교를 하지 말라.
32. 예를 자주 사용한다.
33. 설교를 쓰되 요약된 노트를 갖고 설교하라.
34. 평범한 진리가 보편성이 있다.
35. 언제나 노트할 것을 갖고 다니라.
36. 서론에서 청중과 연결되어야 듣는다.
37. 언제나 듣는 이들을 일으켜 세운다.
38. 언제나 믿음, 희망, 사랑을 일으킨다.
죽어 있는 교회들
미국 오클라흐마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화입니다.
이 마을에 새로 목사님이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도착하자마자 매우 의욕적으로 집집마다 심방을 다니며 오는 첫 주일에 자기의 설교를 들으러 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주일이 되자 이 목사님은 흥분된 가운데 마을 사람들을 기다렸지만 막상 예배가 끝났을 때까지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불과 두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습니다.
다음날 목사님은 지방 신문의 광고란에 조그만 안내문을 실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교회가 죽었습니다. 따라서 담임목사로서 장례식을 치르려 하오니 모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례식은 오는 주일에 교회에서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신문을 보고 모두 놀라고 의아해 하다가는 주일이 되자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교회의 강대상 위에는 관이 있고 그 위에는 아름다운 꽃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의식에 따라 장례식을 거행하였고, 그는 마지막으로 떠나시는 분에게 조의를 표하라고 하였습니다. 조객들은 차례로 앞으로 나와 관을 들여다 보고는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물러나곤 하였습니다.
그 관속에는 정확한 각도에 큰 거울이 들어 있어서, 그 관을 들여다 보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각자가 본 죽은 교회는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높이자!
애굽의 궁정에서 학문을 연구한 모세가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쳐죽인 일(출 2:11-12)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의식을 일깨워 이스라엘 민족의 존재 의미를 되찾으려고 한 것으로 그로선 대단한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모세의 의도를 받아들일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민족을 구원해 보겠다는 모세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 하더라도 대중을 이루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준이 저급하다면 그 백성은 여전히 무지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피신하여 40여 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이전보다도 훨씬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고통이 심해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소 바로 밑에서 압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 자신들의 정상한 위치가 아님을 인식하기 시작했다.(출 2:23-25).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곧바로 구원하지 않고 오랫동안 바로의 손에 남겨두신 것은 최소한 자기들이 바로에게 속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속해 있어야 함을 고백할 정도의 수준까지는 도달해야 할 것을 기다리시기 위함이었다. 모세와 같이 몇몇 개인의 각성만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민족적 경향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도탄에서 건져내는 원칙이다. 적어도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근거하여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역사관을 가지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을 펴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면 마치 애굽이라는 흑암 속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교회마다 돌아보면 무엇을 위해 사는지조차도 모르는 성도들이 적지 않다. 또한 왜 예배에 참여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아무런 의식 없이 그저 교회당에만 들락거릴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개교회 우선주의와 대형화 지상주의에 빠져 있다면 얼마나 큰 일이겠는가?
한국 교회가 지금의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성도 각자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고 신학에 관련된 서적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 신학은 결코 목사나 신학생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성도라면 모두 개혁교회가 지향하는 신학이 무엇인가 하는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최소한 이 정도의 지식을 가질 때 성도들의 의식도 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의 의식이 깨어 질 때 우리가 목적하는 바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며 비로소 하나님은 한국 교회에 구원의 손길을 펴실 것이다. 성도들이여, 이제라도 신학 공부를 시작하자!
“교회는 어머니이다”
경북 영주시 평은면 천본2리에 내매골이라는 18가구가 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강재원이라는 분이 처음으로 시작한 내매교회는 한국교회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훌륭한 인물들을 40여명이나 배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고 한경직 목사와 함께 한국교회의 주역으로 큰일을 감당했으며,새문안교회를 담임하였고,숭실대 총장을 지냈으며,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한 강신명 목사를 비롯하여 대구 계명대학 설립자 강인구 목사 등 목사와 박사 30여명,그리고 삼성반도체 강진구 회장 등 10여명의 기업인 모두가 이 마을 출신이요,이 내매교회가 배출한 인물들입니다. 그 옛날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할 때마다 교회를 보려면 내매교회를 가라고 했을 정도로 바른 신앙인을 길러내는 곳으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현재까지도 18가구 가운데 15가구 40여명이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니까 90%에 육박하는 출석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3대에 걸친 장로 집안으로 마을과 교회를 지켜오고 있는 강록구 장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마을의 자랑이라면 어릴 때부터 자녀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하여 사회에 나가서도 믿음의 흐트러짐 없이 봉사하는 사람이 된 것인데 이것은 내매교회가 우리 모두의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여러분!오늘 본문에도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교회는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구원의 어머니입니다.루터,칼뱅,그리고 그 외에 많은 명사가 교회를 ‘어머니’, 또는 ‘구원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그렇다면 그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자녀를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어머니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를 낳고 배출하는 곳입니다. 어느 장로님은 유교 집안에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서 교회의 복음과는 아예 담을 쌓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교회 구역장이라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처음엔 뭣모르고 문을 열어주었으나 전도를 당하고 난 후에는 계속 문전박대를 했겠지요. 그러나 그 구역장이라는 사람은 무시를 당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끈질기게 찾아와 복음을 전합니다. 얼마나 적극적으로 전도를 하는지 나중에는 너무 귀찮아서 교회에 한번 나가준 것이 계기가 되어 장로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으로 자식을 낳은 것입니다.
둘째,자녀를 양육한다는 의미에서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낳은 어린 신자들을 꼭 부모의 심정으로 양육하며 돌보았습니다.“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 2:7∼8).복음으로 낳은 것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자녀를 낳기만 한 것으로 어머니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젖도 먹이고 그 아이가 자라도록 부모 노릇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낳은 그 자녀가 예수를 닮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영이 이미 그에게 임하였음을 뜻합니다. 그의 안에 내재한 이러한 예수의 영을 깨워 계속해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도 그저 전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3년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의 삶을 그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훈련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는 영적으로 베드로의 아들입니다(벧전 5:13). 디모데 역시 영적으로 바울의 아들이었습니다(딤전 1:2).
셋째,자녀를 보호한다는 뜻에서 어머니입니다.
지난해 4월30일에 88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었는데 사고를 당한 그 택시 안에는 어머니와 두 명의 자녀가 타고 있었습니다.두 명의 아이는 다행히도 목숨을 건졌지만 어머니는 숨져 있었습니다.두 자녀를 보호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이렇듯 어머니는 자기 자녀를 지키고 보호합니다.그것은 본능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어머니처럼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를 보호하고 안아주시며 눈동자같이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너는 베드로라.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노아가 방주 안에 있었기에 안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교회 역시 믿음의 자녀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믿음의 방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교회생활 성공 비결 10가지
1.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자 (출14:11-12).
2. 주의 종을 비난하지 말자 (민12:1).
3. 하나님의 교회를 악평하지 말고 호평하자
(민13:26-14:10).
4. 주의 종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고 복종하여 복 받고
살자(민 16:1-25).
5. 우상 숭배하지 말자 (점 치지 말고, 무당을 찾아가지
말자, 출 20:2-3).
6. 성령 충만을 받아 지혜롭게 일 하자 (출35:30-36:2).
7. 주의 일에 소홀하지 말고 방심하지 말자 (레10:1-19).
8. 음행을 피하고 간음하지 말자 (고전10:9, 민25:1-9).
9. 주의 종과 협력하여 승리하며 삽시다 (출35:8-13).
10.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삽시다 (민14:24, 수14:9).
김구와 교회
해방 후 김구 선생은 해외에서 귀국하자마자 이런 말을 하였다.
"경찰서 1백 개를 세우는 것보다는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더 낫다. 오늘날 한 경찰서 경내에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도 수십 억씩 들여서 짓지마는 그 속에서 신음하는 그리스도는 점점 죽어만 가고 교회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은 그리스도를 밟고 자신들이 잘나서 이 웅장한 교회를 지었다고 헌당식을 한다, 위임식을 한다, 장로 장립식을 한다고 떠들어대면서 막상 도와야 할 이웃을 외면한 교회들이 되고 말았다."
교회에 관한 성경 연구
1. 교회의 명칭
가. 구약의 명칭
1) 건물, 및 장소로서의 명칭
가) 뜰, 궁정, 마당(시65:4, 시84:2, 시84:10, 시92:13, 시96:8, 시100:4)
나) 성소(레6:16, 레10:17, 레16:24, 수5:15, 대상23:32, 대하35:5,6)
다) 성전(시5:7, 시11:4, 시65:4, 시79:1, 시138:2, 사6:1, 욘2:4, 욘2:7)
라) 하나님의 집(창28:17, 창28:22, 수9:23, 삿18:31, 대상9:11)
마) 여호와의 전(출23:19, 출34:26, 신23:18, 왕상6:37, 왕하20:8)
바) 여호와의 집(수6:24, 삼상1:24, 대상6:31, 시23:6, 시122:1)
사) 성막 또는 장막(출26:1, 레26:11, 민10:21, 수22:19, 시15:1)
아) 전(스4:1, 시27:4, 시29:9, 시48:9, 시68:29, 말3:1)
자) 시온(왕하19:31, 시9:11, 시48:2, 시74:2, 시132:13, 시137:1)
2)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명칭
가) 회중 또는 이스라엘의 회중(출12:3, 출12:6, 출16:22, 레10:17)
나) 시온, 시온의 딸(왕하19:21, 시9:11, 사49:14,, 사51:16, 사52:1,2)
나. 신약의 명칭
1) 교회(마16:18, 마18:17, 행7:38, 행8:1, 행20:28, 롬16:1, 롬16:23)
2) 하나님의 집(고전3:9, 딤전3:15, 히10:21, 벧전4:17)
3) 성소(히8:2, 히8:5, 히9:2, 히9:11, 계21:3)
다. 비유적 명칭
1) 거룩한 자의 회중(시89:7)
2) 정직한 자의 회(시111:1)
3) 그리스도의 몸(롬12:4,5, 고전12:12,13, 고전12:20, 골3:15, 엡4:16)
4) 가지(요15:1-16)
5) 하나님이 심은 가지(사60:21)
6)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계19:7, 계21:2, 계21:9)
7) 장자들의 총회(히12:23)
8)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히12:22)
9) 성도의 회중(시149:1)
10) 주의 가난한 자(시74:19)
11) 비둘기(아2:14, 아5:2)
12) 하나님의 양(겔34:15, 벧전5:2)
13) 양(마26:31, 요10:1-18, 요10:26,27, 요21:17, 히13:20)
14) 내 어린 양(요21:15)
15) 금 촛대(계1:20)
16) 하나님의 발(고전3:9)
17) 하나님의 기업(욜3:2)
18)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엡2:22)
19) 하늘의 예루살렘(갈4:26, 히12:22)
20) 거룩한 성(계21:2)
21) 성산(슥8:3, 시2:6,시15:1)
22) 신령한 집(벧전2:5)
23) 하나님의 권속(엡2:19)
24) 주의 산업(시28:9, 시19:25)
25) 하나님의 이스라엘(갈6:16)
26)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
27) 하나님의 성전(고전3:16,17)
28) 포도원(마21:41)
2. 교회의 특징에 따른 유형별 구분
가. 보편교회
보편교회(마16:18, 마18:17, 행5:11, 롬16:16, 고전11:16, 엡1:22)
나. 지역교회
1) 예루살렘(행2:44,45, 행3:12, 행4:5, 행4:33, 행6:1-6, 행8:14)
2) 시리아 안디옥 교회(행11:19, 행11:21, 행11:22,23,26, 갈2:11)
3)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행13:14, 행13:16, 행13:43,46,47)
4) 루스드라 교회(행14:6, 행14:10, 행14:11, 행14:19, 딤후3:11)
5) 더베 교회(행14:21,22)
6) 이고니온 교회(행14:3, 행14:5)
7) 빌립보 교회(행16:14,15, 행16:40, 빌1:1, 빌2:25, 빌4:1-3)
8) 데살로니가 교회(행17:1-3, 살후1:1, 살전2:14, 살전3:1,2)
9) 베뢰아 교회(행17:11)
10) 아덴의 교회(행17:34)
11) 고린도 교회(행18:1,2,8, 고전5:9, 고후10:9, 10, 고전7:1-16)
12) 에배소 교회(행18:19, 행19:1, 계2:3, 계2:4, 계2:6)
13) 드로아 교회(행16:7-10, 고후2:12,13, 행20:7-12)
14) 로마 교회(롬16:3-5, 롬1:8, 롬16:17)
15) 갈라디아 교회(행16:1-3, 갈1:6-9, 고전16:1)
16) 골로새 교회(골1:7, 골4:9, 몬1:1,2)
17) 본도, 갈라디아, 비두니아에 있는 교회(벧전1:6, 벧전4:15-17)
18) 서머나 교회(계2:9)
19) 버가모 교회(계2:13, 계2:14, 계2:15)
20) 빌라델비아 교회(계3:8, 계3:10,11)
21) 사데 교회(계3:1, 계3:2, 계3:5)
22) 두아디라 교회(계2:19, 계2:20)
23) 라오디게아 교회(계3:15-20)
24) 마게도냐 교회들(고후8:1)
25) 갈릴리 교회(행9:31)
26) 사마리아 교회(행9:31)
27) 욥바 교회(행9:42)
28) 겐그레아 교회(행15:41)
29) 길리기아(행15:41)
30) 아시아의 교회들(고전16:19)
참된 하나님의 교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한 후 방황하다가 창녀인 소녀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기가 살인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때 소냐는 자기 방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하라고 권합니다. 십자가는 성스러운 교회당의 꼭대기에나 아니면 믿는 사람의 목걸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냐 같은 창녀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십자가는 너무 성스러운 것이므로 창녀나 살인자에게는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것을 목걸이로 걸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기 가슴을 치며 죄를 슬퍼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2000여 년 전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던 것처럼,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가난하고 죄인이라고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으려고 나올 때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교회입니다.
기도: 오 사랑의 예수님, 사랑 없는 세상 가운데 빛의 자녀로 부르심에 감사 드립니다. 사랑 없어 헤매며, 사랑을 요구하는 멸시받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나로 그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 지 가르쳐주옵소서.
교회와 질병
홉킨스 대학의 보건학과 공중위생학 교수인 죠지 컴스톡 박사가 병과 사회 경제적 요인과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워싱톤 주의 인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규칙적으로 교회를 나가고, 술 담배를 하지 않고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심장질환, 간경변, 결핵, 목암, 고질적인 기관지염,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와 자살 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중요한 사실은 정규적으로 교회를 나가는 사람은 동맥경화증세의 심장질환에 거의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연중 그런 병으로서의 사망률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10만 명 중 900명이 넘었으나,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10만 명 중 50명이 되지 않았다.
기관지염에 걸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찬송가가 기관지를 깨끗하게 해주는 것 같다.
협동하는 교회
사람은 때때로 외롭거나 쓸쓸할 때가 있습니다. 친구도 형제도 귀찮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때는 화목이니, 우애니, 친절이니 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인 것같이 여겨집니다.
"0"이라는 수의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0"은 그 자신이 외롭고 초라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같이 있어 줄 친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0"은 1, 2, 3... 모든 숫자를 만나 보았지만 그들은 모두 작고 가진 것이 없는 "0"의 친구가 되기를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0"은 좌절감에 빠지고 맙니다.
"1"도 "0"와 마찬가지로 친구를 찾아 헤맸지만 거만한 숫자들에게 거절당하고 만 것입니다. 여기서 "1"과 "0"은 친구가 되어 "10"을 이루게 되자 이제까지 무시하고 멸시했던 숫자들이 모여들어 친구가 되기를 간청했습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작고 미약한 존재일지라도 뭉치고 합하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1"이나 "0"은 분명히 "8"이나 "9" 보다 작고 초라한 숫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10"이라는 수는 확실히 "8"이나 "9"보다 크고 우월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힘없고 작은 사람들이 협동하여 큰 일을 이루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11명의 힘없고 낮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늘의 기독교를 이루었듯이 말입니다.
복된 교회
세상 사람들이 교인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나 신자들이 처음 교회에 대해 언급할 때 '난 교회가 그럴 줄 몰랐어'라고 하면서 실망과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과 조건이 구비되어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로 부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거기에 갈 훈련을 여기서 해야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훈련 장소이지 궁극적인 도착지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말썽부리는 사람이 없으면 망합니다. 전부 좋은 사람들로만 꽉 차 있으면 금방 부패합니다. 가을꽃은 더우면 시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국화와 코스모스는 바람이 차야 싱싱합니다. 냉장고는 따뜻하면 음식이 다 썩는다는 것도 잘 아시죠?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대로 뭐든지 다 잘되고, 모두 성공하고, 돈 벌어서 모인 신자들만 있으면 그 교회는 곧 망합니다.
늘 울며 회개하는 기도가 넘치는 교회가 복된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상처받은 자, 소외당한 자, 그리고 절박한 상황에 있는 자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하며 참된 회복이 있고, 생명이 힘있게 자라는 곳이어야 합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나로 주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다른 지체가 아파할 때 같이 아파하게 하시고, 기뻐할 때 그 기쁨에 동참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나를 통해 교회가 밝아지게 하옵소서.
만일 교회가 없었더라면
교회의 친교,
주일학교,
기도회,
크리스천의 가정,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죄인에게 설교할 복음,
외국 땅에 보낼 선교사,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
교회가 바라고 있는 환희의 결혼날,
우리나라의 청년들을 위한 종교교육 과정,
가정의 제단,
외롭고 슬픔을 당한 가정을 심방할 목사,
죄인을 위한 기도,
소년 소녀들에게 주는 도덕적 훈련,
크리스천 대학,
죄인을 위한 사랑,
이런 것들이 없을 것이다.
참조: 시11:4, 시79:1, 마12:6, 마27:40
왜 교회에 가십니까
1) 그 주간의 책임을 잘 감당하도록 준비시켜 주기 때문에
2) 우리 영의 등불을 다시 켜 주기 때문에
3) 감사를 표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4) 다른 신자들과 거룩한 교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5) 우리의 생활로 우리의 신앙을 증거해 주기 때문에
6) 우리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참조: 행2:46, 고후6:16
한국 교회가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거대한 변화가 일고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는 급변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기업이나 모든 조직들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시대의 필연적인 요청 때문이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교회도 변화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해나가야 한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뿐만 아니라 많은 기관들과 조직체들이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거대한 사회적 변화가 학교 병원 대학 봉사기관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아직도 교파간의 경쟁과 대립, 성장과 업적주의의 옛 패러다임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새 술은 마련돼 있는데 새 술을 담을 그릇이 준비돼 있지 않다. 우리가 주로 고백하는 예수님은 낡은 패러다임을 바꾸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왔던 혁명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패러다임 변혁운동은 성전체제의 정화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는 바리새, 에세네, 열심당 운동 등과는 달리 세계변혁운동의 목표를 권력구조의 개혁이나 사회경제구조의 변혁에 두지 않고 성전체제의 정화에 두었다. 이 같은 예수의 개혁운동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살롬이 파괴된 근본적인 원인을 하나님을 섬겨야 할 성전이 장사하는 사람들의 소굴로 변질된 데서 보았던 것 같다.때문에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를 혁파하는 것이 참된 정의와 자유를 보장하는 평화를 이루는 첩경이라고 여겼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서 유대를 통치하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을 완공하기 위해 헤롯에게 온갖 아첨을 다 떨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의 물질공세를 통한 정치목적과 종교목적이 혼합된 타락의 온상이었다.
이 곳을 중심으로 극에 달한 대제사장 세습과 유대교의 교권주의는 잘못된 권력구조와 상업주의로 나아간 나머지 진정한 예배는 온데 간데 없고 형식주의에 빠졌던 것이다.
예수의 성전정화운동은 종국에는 정치·경제·종교·사회를 움직이는 특권층의 기득권을 근본적으로 위협했다. 또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이어진 이스라엘 민중들의 대변혁운동으로 발전돼 낡은 권력구조와 사회체제의 붕괴를 가져왔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의 탄생을 가져온 것이다.
오늘 한국사회가 이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할 교회들이 이 세속 세계의 권력과 결탁하고 상업주의의 온상이 돼 버린 데 있지 않나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키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님께서 회복하신 진정한 교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교회에 침투한 세상 가치와 맘몬의 지배를 물리치고 성장주의와 공적주의로 얼룩진 과거의 낡은 모습을 청산해야 한다.
종교 개혁은 부패한 교회, 경직된 종교, 변질된 신앙을 썩지 않고 부드럽게 열린 종교, 영원토록 변치 않는 신앙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구조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첫째, 교권주의의 틀을 지양하고 전문영역과 전문성을 중심하는 선교구조로 개혁돼야 한다. 둘째, 목회자나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개혁 운동을 통해 딱딱하게 굳어진 구조를 열린 구조로 바꿔 가야 한다. 셋째, 성직자에게 편중된 교회구조를 평신도 중심의 분산된 구조로 재편해야 한다. 넷째 성장에서 사회 섬김으로 교회구조를 바꿔가야 한다. 다섯째,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연합기구 탄생을 통해 화해와 일치를 이루고 기독교의 위상을 높여가야 한다.
추운 겨울밤 넓고 큰그릇에 고슴도치 떼를 담아 밖에 내어놓았다. 영하 20도 혹한 속에 찬바람이 불어오자 부들부들 떨던 고슴도치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몰려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따뜻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마다의 침이 상대방을 찌르자 아파오기 시작한다. 피를 흘린다. 고슴도치들은 아파서 흩어지기 시작한다. 흩어지면 춥다. 추워서 부들부들 떨다가 견딜 수 없어 다시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고... 날이 밝아왔다. 아침에 나가 보았더니 다 죽어 있었다. 절반은 얼어서 죽었고 절반은 피를 흘리고 죽어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공동체들이 급속히 깨어져 가고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저마다 혼자 살아가겠다고 한다. 내가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그립다. 용서와 용납의 자리가 그립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교제의 자리가 그립기만 하다.
우리는 무엇인가 아쉽고 외로워서 모여 본다. 서로들 의지해 본다. 그런데 공동체가 연습이 안되어 있기에 갈등을 느끼고 문제를 일으킨다. 문제를 극복할 줄 모른다. 나는 너에게 상처를 받고 너는 나에게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흩어져간다. 흩어지면 다시 외로움을 느낀다. 춥다. 추위에 떨어 본다. 세상이 혹독하기만 하다. 공동체가 그립다. 은혜의 자리가 그립다. 다시 몰려온다. 그러나, 몰려와서는 또 상처를 주고받는다. 증오심만 키워간다.
주님 오시는 마지막 날 교회 문을 열고 보았더니 절반은 피를 너무 흘려 죽어있고 절반은 추위에 얼어서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사랑받고 사랑 나눌 공동체가 없어서, 상처가 치유되고 쓰러진 자아가 회복될 삶의 자리가 없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벅찬 감격과 은혜를 경험할 자리가 없어서 부둥켜안고 씨름하다 죽어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면류관 쓰는 아름다운 교회를 건설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프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받은 은혜와 감격을 나누기 위해, 받은 상처와 약점을 내어놓고 회복하며 치유받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수고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음을 인해 아프기만 하다. 오히려 저마다 썩을 세상만을 위하여 일하고 살았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웠던 영광스러운 성도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저마다 가슴속에 상처를 안고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추위에 떨고만 있는 것이다.
참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주님이 그토록 세우기를 원했던 그 거룩하고 아름답고 능력 있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바로 한가족이요 함께 삶을 나눈 하나된 공동체였다. 로마의 창칼과 핍박, 콜로세움과 십자가에서의 순교 앞에서도 성도들은 매일 카타콤에서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대그룹으로 함께 모여 주님의 피와 살을 나누며 감격하고 사랑을 나누고 상처를 치유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에 불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였다’고 말씀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세우신 공동체, 주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교회. 바로 이것이 오늘날 주님께서 보고 싶어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 시대에도 이 일을 감당할 동역자들, 성도들, 교회를 찾고 계신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전통적인 방법을 지키는 교회
여름 몇 달 동안 어느 도시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주일 저녁예배를 드리지 않았는데 유독 한 교회만이 그 기간 중에도 저녁예배를 드렸다. 이 소문을 듣고 어느 신문사의 젊은 여기자가 이 교회의 목사를 찾아왔다. 그 여기자는 담임목사가 매우 솔직하고 겸손한 인물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여기자는 목사에게 왜 이 교회만 한 여름 내내 주일 저녁예배 때마다 그렇게 많은 신도들이 모일 수 있었는지를 물어 보았다. 그리고 다른 교회들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데 왜 이 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리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여기자의 물음에 목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신도를 모으기 위해 이 세상에서 쓰는 방법을 이용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저 우리는 예수께서 실제로 우리를 들어올리셔서 당신께로 데려가실 것을 믿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만한 능력을 지금도 여전히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갖고 전했을 뿐입니다."(눅1:6, 눅4:16, 행17:2)
글래드스턴이 교회에 오는 이유
어느 날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나오고 있을 때 어떤 신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귀하처럼 학식을 갖추신 분께서 저런 어눌한 설교를 들으러 오시다니 저로서는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자 글래드스턴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영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에 옵니다."
이 대답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대답은 이런 것이 아닐까.
"저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에 옵니다. 그곳에서 저는 십자가를 지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는 율법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교인들이 있을 때 교회는 영광스럽게 변할 것이다.
교회는 병원
교회는 훌륭한 기독교인들을 보여 주는 전시장이 아니다. 반대로 교회는 불완전한 기독교인들을 교육시켜 주는 학교다. 그리고 아픈 환자를 돌보아 주는 간호사며 세심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치료해 주는 병원이다.
교회 부흥의 전제조건
평신도 설교가며 유명한 노동 지도자가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회개하기에 충분할 만큼 커질 때까지는 성공적인 대규모 부흥은 결코 없을 것이다."
토트, 티하메르의 교회론
교회의 2천년 역사 안에 이따금 있었던 어느 약점을 보고 그대는 놀라는가? 교회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립하셨다. 그러나 인간으로써 구성된 단체이므로 인간의 약점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교회의 찬란한 역사의 빛에 비한다면 그 같은 조그마한 그림자는 대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시라!
어느 날, 한 구둣방 주인이 이탈리아의 베니스의 화가 티찌아노(1490- 1576)가 그린 "베니스의 총독 그리마니"의 초상화를 감상하였다. 유심히 보고 있던 그가 하는 말이, " 이 그림은 잘못되어있다. 구두의 솔기가 틀려있질 않는가?"하였다.
그대가 이 구둣방 주인을 닮아가서는 아니 된다. 작품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는 옥의 티에 구애받아서는 아니된다.
마르틴 루터의 교회론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다. 교회는 피 흘림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 까닭은 교회의 원수인 사탄이 기만자이고,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언제나 나의 피를 흘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이 세상에 완전히 순결하고, 정화된 교회를 바라는 사람들과는 고별하라. 이들에게서 확실한 것은 그들이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의 형태와 외모는 낙원과 같으나, 참 교회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누추하고, 모양 없고, 거리낌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애호 받고, 높이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 나타날 때에, 장식품과 부유한 자태를 가지고,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교회 부수는데 드는 비용
미국 어느 시골에 있는 교회가 너무 낡아서 수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 부인들이 거리로 나가 모금 운동을 벌이던 중 한 유대인 가게에 들였다.
그러나 가게 주인은 유대인인지라 유대 교회가 아닌 교회를 수리하는데 선뜻 돈을 내 놓을 수는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찾아온 부인들이 모두 단골손님들인데 빈손으로 보낼 수도 없어 머리를 긁적이다가, 문득 한 가지 묘안을 떠 올렸다.
"저어, 교회 건물은 수리하기 전에 낡은 부분을 먼저 부수어야겠지요?"
"물론이죠."
"그렇다면 그 비용도 꽤 들겠군요."
"아마 3백 달러는 들거라 하던데요."
"좋아요. 부수는데 드는 비용은 제가 부담하기로 하지요."
교회 먼저 세우다!
서기 1623년, 자유로운 신앙을 찾아 박해받던 조국을 등지고 신대륙, 미국땅에 도착한 영국의 퓨리던(청교도)들은 목적지에 닿아 짐을 풀자마자 제일먼저 세운 건물이 교회였다 한다.
믿음이 없는 삶은 지옥생활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세운 건물은 학교였다. 2세들에게 참된 교육을 함으로써 바른 역사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세 번째 가서야 그들은 자기네들이 거처할 집을 한 채씩 지었다 한다.
그리고 집을 지을 때는, 누구나 교회를 중심으로 세웠고, 앞 창문을 열면 반드시 교회가 보이도록 하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을길을 닦을 때도 사방에서 교회로 통하도록 계획을 짰다고 하니, 하나님의 축복을 아니 받고는 못 배겼으리라. 그들이 바로 오늘날 미국 사람들의 조상이다.
교회 건물은 불타버리지만…
1871년 시카고의 대화재때 부흥사 무디(1837∼1899)가 섬기는 교회와 그의 집도 다 타버리고 말았다. 그때 어떤 신문기자가 그에게 와서는 짓궂게 물었다. “선생님,몽땅 다 타버렸네요.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무디는 이렇게 대답했다.“아니오.내 속에 있는 하나님은 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아름답고 큰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화재를 통해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과연 무디는 그의 믿음대로 영국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켜서 모아진 헌금으로 그 자리에 더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을 수 있었다. 시험을 만났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자. 우리는 무엇을 잃었다고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을 주셨다. 또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빛나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위기상황
예수를 따른다는 신자가 길에서 서로 눈을 흘기고, 지도자끼리 서로 원수가 되고, 교회끼리 서로 담을 쌓고 신성해야 할 예배당은 노래와 춤으로 극장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교회와 사회를 짊어지고 나갈 청년들이 허무한 사상을 품고 물질주의에 빠져 허영과 방탕과 주색에 정신 못 차리더니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달아나고 몸을 마굴에 던지고, 혹은 자살을 꾀하고, 거의가 사회적 도덕적 발광상태에 들어갔으니 어이된 일인가?
예수의 도가 힘이 없음인가? 인간이 악함인가?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함인가? 과거 우리의 문화운동에는 힘 있는 도덕적 근거가 부족하였고 기독교운동이 선교사업과 교회운동을 하였지만 뿌리 깊은 신앙적 기초가 부족하였다.
돈과 세력과 조직을 가지고 선교사의 보고거리를 만들었고 교회의 세력 확장에 힘썼으나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근본으로 삼고 예수의 피에 근거한 생명운동과 형제적 사회적 사랑의 실행운동이 부족하였던 까닭에 한때는 예수를 경험하고 믿음이 생겼으나 바람이 한번 불고 비가 와서 부딪히니 경제적 압박과 과학과 사상적인 핍박에 눌리고 가시에 찔리게 되니 그 뿌리가 깊지 못하였다.
돈의 세력과 개인주의, 독재주의로 기운이 얽히고 생명이 소멸되어 마침내 교회가 병적인 상태에 빠지고 사망과 지옥의 그림자 밑에서 헤매게 된 것이다
교회에 가기 싫은 이유
교회에 싫증이 안나면 그것은 교회의 설교가 어떠한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만일 당신이 흥미가 없거나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설교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 때문이다. 만일 "내가 예배에 열중할 수 있도록 목사님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면서 교회에 간다면 당신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사람들은 종종 예배장소에 있으면서도 거룩하지 않은가?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골방에 들어가는것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밀을 좋아하지만 그 밀을 빻지는 않는다. 그들은 옥수수를 얻게 될텐데도 그것을 모으러 들판에 나가지는 않는다. 과일이 나무에 달려 있어도 그들은 그것을 따지는 않을 것이다. 물이 그들의 발 밑에 흘러도 그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굽히지는 않을 것이다." 예배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고를 들여야만 하는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성가를 듣고 축복을 받고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 교회에 간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교회에 가야한다. 그리고 예배는 얻는것이 아니라 드림으로써 행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 기도 : 언제나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 내게 주시는 말씀들을 잘 지켜 행하기 원합니다. 특히 예배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보게 하셔서 제가 더욱 예배를 사모하고 삶을 거룩하게 드리는 자 되게 하소서
교회를 취미로 다니나요
어느 중등부 교사가 저녁식사 후 찌는 듯한 더위를 식히고자 잠시 밖에 나갔다.
동네 골목을 걷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을 만나게 되었다. 꽤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았던 중등부 학생이었다.
몹시 궁금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였지만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저 학생이 무안해 하지 않고 다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끝에 "요즘 교회에 취미가 없어졌니?" 하고 나름대로 가볍게 인사했다.
그러나 그 학생의 대답은 그의 신중하지 못했던 인사말을 질책이라도 하듯이 "교회를 취미로 다니나요?" 하고 되묻는 것이었다. 신중하지 못한 인사말에 역시 신중하지 못한 대답의 한 장면이었다.
텃세 없는 교회
어려서 자랐던 서울의 후암동은 남산의 완만한 경사가 시작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강을 향해 있던 우리집보다 앞집이 좀 낮았고 또 뒷집은 우리집보다 더높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저희 집의 마당을 따라 집 뒤쪽으로 가면 높은 축대가 있는데 그 축대 위로 뒷집이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 오래된 축대이고 또 군데군데 금이 간 것도 보이는 터라 혹 비라도 많이 오면 “무너지지 않을까?”
저는 어린 마음에 내심 걱정을 하며 자랐는데 그럴때마다 할아버지는 그 축대에 대해서 늘 똑 같은 말씀을 하시고는 장마철에도 편히 주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축대는 일본사람들이 만든 것이라 튼튼하단다”
아, 일본과의 인연은 그 때부터 시작 된 것인가? 어린 나이에 집안 어른들의 영향으로 “일본사람들이 만든 축대는 튼튼하다”라는 것을 마치 불변하는 진리인양 제 머리에 입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일본에서 생활할때 일본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축대에 대해서 유난히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려서 입력된 그 “튼튼함”을 확인하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역시 그랬었구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어려서 학습된 내용의 확인작업이 잘 끝난 셈입니다.
東京의 皇居(코쿄)나 京都(쿄또)의 二條城(니조조)등을 가 보고 제가 놀란 것은 지진이 많은 이 나라에서 축대를 쌓을 때 어떻게 접착역할을 하는 그 무엇도 없이 그냥 돌만으로 저렇게 견고한 축대를 쌓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1998년 봄 京都를 갔을 때 그런 축대를 보고 감탄을 하고 있던 저에게 일본서 자라고 大阪(오오사카)에서 토목공부를 하신 어느 강도사님이 차근차근 설명을 해벌린 제 입을 다물게 해주셨습니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서 축대를 쌓을 때는 비슷한 크기의 돌들을 갖다 놓고 그 돌의 원형을 가능한 한 보존하면서, 옆에 있는 것과 맞물리는 자리만 정확히 다듬어 갖다 놓는 것이 기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돌을 놓을 때는 옆에 있는 것과 밑에 있는 것을 보아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깎아 다듬는데, 올려 놓은 돌을 다시 꺼내 새로 다듬는 그 작업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냥 대충 넘어가지만 일본인들은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하며 그것이 축대가 튼튼하게 되는 가장 큰 비결이라 말해 주셨습니다. 꼭 새 돌을 깍는 것이 아니라 정 깍을 수 없는 모양이
되면 이미 놓은 돌을 깍아 맞추어 나간다는 얘기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는 새로 들어오는 새신자들이 여러가지로 모양을 갖추고 들어오게 되며 교회는 또 그것을 많이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심각한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미 있는 기존의 신자들도 모양을 조금씩 바꾸는 수고를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교회는 더욱 튼튼한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문제 중 하나는 먼저된 신자들이 깍이지 않으려는 것에서 야기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새신자는 새신자대로 잘 다듬어 주고, 또 기존의 신자들은 그들대로 자신들의 “깍임”을 기꺼이 감수하며 교회를 만들어 나갈 때 교회는 교회다와지고 또 늘 새로와질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1절은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되어가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깎이지 않음으로 인해 서로 연결되어야하고 함께 맞물려 지어져야 할 새로운 형제 자매들이 교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정성껏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튼튼한 교회를 위해 말입니다.
주님을 잃은 교회
어떤 흑인 한 사람이 백인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흑인은 목욕을 깨끗이 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은 다음 성경과 찬송을 소중히 들고 백인교회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받아 줄 리가 없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지만 허락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백인이 아니고 흑인인 것에 뼈져린 아픔을 느끼면서 그 교회의 바깥뜰 계단에 엎드려 대성통고을 하며 기도했다.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으로 보이는 분이 흰 옷을 입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반가와서 부르짖었다.
"오! 주님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님의 교회에 들어갈 수가 없나요?" 주님이 말씀으로 위로하셨다.
"형제여! 나도 이교회에 들어가 본적이 없다네."
사랑이 없는 곳에 주님이 계실리가 없지 않겠는가. 종교적 의식과 경건의 모양이 있다하더라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복음을 가리우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 감사하노라..
전 상원의원 샘 넌은 냉전은 "핵의 지옥불이 아니라 동유럽 교회의 촛불로" 끝났다고 말했다. 언론에는 잘 나오지 않았지만 동독의 촛불행진은 지구의 얼굴을 바꾸어 놓았다. 라이프치히 철야 촛불 행진에 모여든 사람은 처음에는 몇 백 명이던 것이 차츰 천 명, 오천명, 오만명으로 늘어나 급기야 오십만 명 - 거의 도시 인구 전체 - 에 달했다
성니콜라이 교회에서 기도회를 가진 후 평화의 시위 행렬은 찬송가를 부르며 어두운 밤거리를 행진했다.
무장한 경찰과 군인도 그 힘 앞에서는 무력해 보였다.
그 날 밤 동베들린의 비슷한 행진에 백만 명이 가담해서 결국 그 흉물스런 베들린 벽은 총 한방 쏘지 않고도 무너져 내렸다.
라이프치히 시가에 거대한 현수막이 걸렸다.
교회의 사명
스위스의 알프스 산에 한 오두막집이 있었다. 이 집은 종치는 집이라고 불리웠는데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집이었다. 이 깊은 골짜기에는 겨울이 찾아오면 눈이 바람에 날려 앞을 볼 수가 없고, 사방이 흰눈으로 덮여버 리므로 등산하는 사람들이 길을 잃기 쉬웠다. 그래서 바람부는 날이면 누구든지 이 집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곧 종을 치기 시작한다. 그래서 길을 잃은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고 구조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교회는 종치는 집이다. 길을 잃고 죄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에게 종을 울려 구원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종치는 사람이 되는 책임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교회 분열 10가지 지름길
미국 종교 월간지 [무디] 2월호는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 10가지 지름길]이란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 [무디]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소를 열거함으로써 역으로 교회가 분열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다음은 [무디]가 제시한 교회를 분열시키는 10가지 대표적인 사례이다.
1)교회 내 특정 개인의 요구사항에만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라.
2)교회안에 떠도는 모든 소문과 비평을 다 귀담아 들어라.
3)목회자의 약점만 찾아내 이야기하라.
4)사랑 안에서 결코 참된 것을 말하지 말라.
5)불평 불만의 씨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해두라.
6)남을 용서하되 오직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자만 용서하라.
7)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위선으로 가장하라.
8)공중기도 시간을 통해 교회에 대한 불만을 다 토해내라.
9)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항상 이기기에 힘써라.
10)하나님이 당신에게 [교회를 분열시키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믿고 행하라.
한 사람의 모자 밑에서 시작된 교회
부드는 "구세군은 한 사람의 모자 밑에서 시작되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1844년 회심을 체험한 지 2년 뒤에 부흥 설교가가 되었으며 1861년 감리교를 떠나 '기독교선교회'라는 단체를 독자적으로 설립했다. 그것이 1878년에는 구세군으로 발전했다.
1990년에는 동구권 선교가 회복되어 세계 94개국에서 '피와 불' 성부(청색), 성자(보라색), 성령(황색)의 3 색깔의 깃발 아래에 구령사업과 사회사업을 하며 그리스도의 군병으로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자비석과 회개석
부드는 1852년 4월 10일, 스물 세살 때 전도자가 되어 스폴딩 교구에서 15개월간 일하면서 30마일 지역을 진동시켰다.
그 때 그는 연단 앞에 마련된 '회개석'으로 결신자들을 초청하여 꿇어 엎드려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사죄와 중생으로 구원의 축복을 간구하게 하였다.
성결의 은혜를 갈망하는 자를 위해서는 같은 뜻으로 '자비석'을 베풀었다. 구세군 강단 밑에는 구원, 성결, 화평, 능력이라는 표어 아래 구도의 상설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교회의 세 가지 형태
콜린 윌리엄스는 교회의 모습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 아브라함적 동기가 교회가 있다. 이런 교회는 미지의 세계를 믿음으로 순복한다.
둘째, 모세적 동기의 교회가 있다. 이런 교회는 조직제도를 상징하며 신앙심으로 조금 위험하다.
셋째, 바울적 동기의 교회가 있다. 영적 회심을 바탕으로 한 교제가 넘치는 교회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는 모든 사람의 공동체다. 위에 열거한 교회 형태 중 세 번째 형태를 근거로 해서 교회를 활성화해야 한다.
교회 참석의 동기
에머슨 파스틱이라는 설교가는 미국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데는 4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생활 습성이나 관습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 때문에 그 설교를 듣기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란 좋은 곳이라 교회에 나가서 활동하면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기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일시적인 위안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기들은 교회에 나가는 주체적인 동기가 될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은혜를 받는 곳입니다. 당신은 왜, 그무엇 때문에 교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입니까?
참된 하나님의 교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한 후 방황하다가 창녀인 소냐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기가 살인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때 소냐는 자기 방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하라고 권합니다. 십자가는 성스러운 교회당의 꼭대기에나 아니면 믿는 사람의 목걸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냐같은 창녀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십자가는 너무 성스러운 것이므로 창녀나 살인자에게는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것을 목걸이로 걸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기 가슴을 치며 죄를 슬퍼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2000여 년 전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던 것처럼,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가난하고 죄인이라고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으려고 나올 때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교회입니다.
교회 건물은 불타버리지만…
1871년 시카고의 대화재때 부흥사 무디(1837∼1899)가 섬기는 교회와 그의 집도 다 타버리고 말았다. 그때 어떤 신문기자가 그에게 와서는 짓궂게 물었다. “선생님,몽땅 다 타버렸네요.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무디는 이렇게 대답했다.“아니오.내 속에 있는 하나님은 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아름답고 큰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화재를 통해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과연 무디는 그의 믿음대로 영국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켜서 모아진 헌금으로 그 자리에 더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을 수 있었다. 시험을 만났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자. 우리는 무엇을 잃었다고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을 주셨다. 또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빛나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교회의 오해
일반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몇 가지로 큰 오해가 있다. 에밀 브루너의 <교회의 오해>라는 책에서도 여러 번 지적하고 있듯이,
첫째, 교회를 학교(institute)로 오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그룹별로 여러 가지 성경 공부를 가르치고 배우지만 그것 자체를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경 공부와 교회는 별개이다. 진리를 가르치고 배운다고 해서 교회를 학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헬라식의 판단이다.
둘째, 친교(koinonia, fellowship)하는 곳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모여서 차를 마시며 친교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은 망상이다.
물론 성도의 교제가 있지만, 이것이 결코 교회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세째, 교회를 자선사업 단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교회를 향하여 "도대체 교회가 무엇하고 있느냐 ?"고, 교회가 돈을 내놓지 않는다고 야단을 한다. 자신들은 한푼도 내지 않으면서 교회가 돈을 쓰지 않고 무엇하느냐고 원망인 것이다.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교회는 구제할 뿐이지 구제를 위한 기관은 아니다.
네째, 불의에 항거하는 어떤 저항단체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양공주와 교회
십수년전 동두천 근방의 기지촌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한창한 봄 주일아침, 그곳 교회의 주일예배시간이었다.
찬송과 기도에 이어 목사의 설교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교회문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안내를 맡고 있던 성도와 기지촌의 한 양공주 사이에서 벌여진 다툼 때문이었다.
얘긴 즉슨 술취한 양공주가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그 안내인이 그녀를 막은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작은 소리로 시작된 말다툼이 점점 커지더니 그 여자가 "나 같이 죄 많은 여자를 예수 못믿게 하면 누가 예수를 믿느냐? 위선자들아!" 하면서 울부짖는 소리에 이르러서는 예배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주일아침 종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고향을 문득 생각했고 고향에서는 교회생활을 생각해 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래서 그녀는 한잔 두 잔술을 마셨는데 취하기는커녕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그녀는 교회로 달려갔던 것이다.
하지만 예배당 문턱에서 술 취한 양공주를 교회안에 들여놓을 수 없다고 판단한 안내인의 완강한 만류에 의해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되었던 것이다.
정동교회 탄생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한 아펜셀라 선교사는 점차 늘어나는 교인들을 위하여 일정한 예배장소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교육사업을 목표하여 교육선교사로 목사 안수를 받았는고로 1885년 8월 배재학당을 창설하였으며 한국인을 위한 신교육을 시행하면서 그러던 중, 1887년 6월 24일에 배지학당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한 학생이게 세례를베풀어주었다.
아직 기독교종교가 국법으로 허락되어 있지 않은 사정하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신자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한채의 건물을 사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오늘의 정동교회가 있는 그 자리, 정동 34번지에 소재한 초가집이었다.
아펜셀라 목사는 이 교회를 베델교회(Bethel Chapel) 라고 불렀으며 세례받은 여인은 아펜셀라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였고 교회관리책임자로 있은 권서인의 아내였으며, 김 바울 (Parline KiM)의 조모가 된다.
1년이 지난 다음에 아펜셀라 목사가 미국 감리교 선교본부에 보낸 또한번의 정동교회 보고문서에 의거하여 정동제일교회 창설의 날은 1887년10월 9일로 확정되었다. 정동제일교회 구십년사 ; 62)
[금년 5월에 국왕의 명령에 의하여 예배가 중단되었다]는 내용은 천주교에서 강행한 명동성당 건축문제로 정부의 금교령이 선포되어, 이 문제로 인하여 1888년 5월부터 9월까지 예배와 종교행사를 당분간 중단하였던 사례를 말하고 있다.
집회 수가 날로 늘어나 몇주일 후에는 교회당이 비좁아 옆집을 사들여 두 칸을 터서 한방으로 만들었고 약 3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하는 기쁨을 만났던 것이다.
2개월을 지난 크리스마스 예배 때에는 아펜셀라 선교사며, 설교 후에퍽이나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나는 스크랜튼 박사와 힘을 합하여 한국어로 설교 전문을 준비하였습니다. 설교문의 줄 사이에는 나혼자 읽을 수 있게 영어로 써 넣었습니다.
나는 이 원고를 가지고 설교하였습니다. 설교가 잘 되었는지 잘못되었는지는 알지못하지만 그때 한국교인들이 열심히 들은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옆집을 사들여 확장하기는 하였으나 불어나는 교인을 수용하기에는 불편하고 협소하였다. 그러다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건축되어 이 두 학교의 건물을 사용하게 되었음은 큰 다행이었다.
정동교회 최초의 교인들은 이 두 학교기관에 관련된 사람들과 또한 그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정동교회와 두 교육기관은 상호 유기적인 관련속에서 초기시대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펜셀라 목사를 서울 한곳에서의 베델교회 집회로만 만족할 수 없어 전주 어디에나 동분서주하면서 순회 전도를 속행하였다. 1888년 10월과 11월은 황해도 해주로 갔고 이듬해 2월에는 남쪽으로 공주지방을 다녀왔고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에까지 원정하고 돌아왔다. 이때 아펜셀라목사를 도와 순회전도에 동역한 사람은 뒤에 정동제일교회 제2대 담임목사가 된 저명한 한학자인 최병헌전도사였다.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방관적이거나 수동적이 아니었다.
[우리 형제들은 참을성이 있었고 열심을 다하여 전도하였다 그드른 지방으로 여행하며 집회를 가졌고 장터에서나 서울의 거리에서 전도문서를파는데 봉급을 받지 않고 일들을 하였다] 이는 아펜셀라 목사가 한 말로써 교인들은 믿기 시작하면 곧 그 신앙을 타인에게 증거하기에 바빳고 권서 인드른 보수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자발적으로 전도에 헌신하였다. 친구들과 가까운 이웃에게 전도하였고 그 어디에서든지, 산간벽지에도 찾아가 전도하였다.
서울의 교인들은 아주 먼곳으로 평안도, 한만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전도의 영역을 확대하였다. 특히 그지방의 사람들은 만주로부터 들어온 복음서를 손에들고 있었으므로 피차 악수한 상황하에 복음의 전파는 더 급속도적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성장하는 교회
뉴욕시 중심가에 있는 교회들은 거의 숫자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교회들이다. 흑인들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백인들은 교외의 경치 좋은 지역으로 계속 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주일이 되면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고 거리는 다른 날에 비해 한산하다.
그러나 노만 필(Norman Peale) 목사가 목회하는 마블교회(Marble Church)는 다르다. 주일 아침 예배에 참석하려면 일찍부터 나가서 줄을 서 기다려야 한다. 좀 늦게 도착하면 다음 2부 예배에 들어가는 기회를 얻기 위해 길가에 줄을 서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 필 목사의 교회가차고 넘치는 교회로 바뀌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기도를 통해 우리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인생은 변화되어 질 수 있는 유연한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이 변화를 얻게됩니다
(Life is fragile, handle with prayer)." 그렇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해준다.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는 곳에 차고 넘치는 은혜가 있게도 하신다. 우리 교회를 따뜻하고 생명력 넘치는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도 기도이다.
기쁨 없는 교회
무신론 철학자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배경인데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비판하였다.
슈바이처 박사는 현대 크리스찬을 이렇게 비유하였다.
"아프리카에는 물없는 강이 많다. 모래 언덕 사이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흘러가는 강뭉을 보면 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초라하고 비참하다. 오늘날 크리스찬들도 물없는 강처럼 억지로 흘러가는 신앙생활, 메마른 정신, 형식과 전통만 겨우 유지하는 교회를 많이 본다."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2월은 졸업의 계절이기도 하다. 졸업(卒業)은 마지막이면서 새로운 출발점이다. 이처럼 학교는 우리들에게 있어 소중한 것들을 얻게 하는 반드시 있어야 할 과정이다.
16세기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교회는 우리가 일생동안 다녀야 할 학교이다”라고 말했다.
교회는 우리에게 있어서 단순한 정기적인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받아 누리는 통로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우리의 거룩한 삶과,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 바탕을 둔 성도들과의 사랑의 연합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이 제정하시고 가르쳐 주신 수단에 의해 세워져야 하고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가르치고 순종하는 터전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우리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은혜의 수단인 세례와 성만찬의 유익을 온전히 누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우리들은 교회를 통해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수단으로 이 연합을 더 굳게 하게 하고 그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있다. 현대는 매스 미디어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들의 이목은 매스컴의 조작에 따라서 저울질 되고 있다. 이에 따라 목회자와 교회의 고민도 이들의 욕구에 부응하여 복음을 값싸게 사고 파는 기복신앙을 부채질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세워지지 않고 상업적인 수단과 방법이 활용될 수 있는 장소에 교회가 세워지는 무분별한 교회개척이 좋은 실례들이다. 순수한 복음 전도보다는 특별한 행사를 통해서 명예를 얻고, 각종 성장 프로그램을 통해서 영향력과 부를 획득하려는 상업성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시대가 앓고 있는 상업주의의 중병을 지적해주고, 치료해 주어야 하는데 교회가 나설 때이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고 그리스도의 지체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고 반영하는 것, 이것이 신자의 삶의 최종적이고도 최고의 목표인 것이다.
최근에는 교회의 갱신과 예배의 갱신을 위한 많은 연구들과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신자들의 신앙을 세우기 위한 의도에서 올바른 성경적인 방법으로 행해진다면 우리는 이것을 두 손을 들어 환영하고 또한 적극적으로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노력들이 세상의 방법에 의한 것이고 하나님이 가르치신 성경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배워서도 안되고 적극적으로 막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은 화려하지도 않고 세인들의 조명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만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으로 우리가 해야 할 본분을 게을리 하고 스스로를 위안해서는 더욱 아니될 것이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공허한 이론적 작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교회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총에 참여하는 가시적인 증거이며 보이지 않는 연합이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우리와의 연합을 더욱 증진하고 강화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만일 바른 동기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러한 유익을 가져오게 되리라 믿는다. 교회의 회복과 갱신은 곧 우리 자신의 회복과 갱신이다. 교회가 교회의 참 모습을 상실하고 세상을 닮아갈 때 그 안에 속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참 모습을 상실하고 세상 가운데 파묻혀 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와 우리 자신의 회복을 위해 전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여 교회의 참 모습을 다시 확인할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그러한 참된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는 교회는 아무리 마지막 때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시고 보호하실 줄 믿는다.
요즘교회의 모습
한국의 목회자들이여, 이대로는 안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 환경은 목사의 공해(公害)로 오염되고 있다. 목사라는 자들이 내뿜는 독한 가스로 인해 교회는 질식할 것 같은 상태이다. 언제부터인지 큰 봉급, 큰 대우, 큰 자리, 큰 칭찬에 연연하는 자로 전락하고 있다. 한국의 목회자들이여, 이대로는 안 된다. '오늘 주님이 오신다면 무서운 책망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욕망의 신발을 벗고 강단에 엎드려 반성하고 회개하자.
부끄러운 일이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한국교회 도처에서 목회자 때문에 상처받은 평신도들의 신음이 들린다. 이것을 어찌 '음모'요, '모략'이라고 단편화할 수 있으랴. 죄 없이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보다 더 무결(無缺)하다는 말인가. 필자는 요즘 이런 저런 이유로 지탄을 받고 있는 목회자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기성 목회자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독자 앞에 부끄러운 마음을 나누고자 한다. 자기를 부인하려고 할 때 정녕 살 수 있다는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 환경은 목사의 공해(公害)로 오염되고 있다. 목사라는 자들이 내뿜는 독한 가스로 인해 교회는 질식할 것 같은 상태가 되고 있다. 고장난 차량들이 용케도 들썩거리며, 아니 울리는 꽹과리 꼴이 되어 요란한 소음과 매연을 풍기며 돌아다니므로 이제 그 위험도가 넘어선 지 오래다. 고장난 목사들이 너무 많이, 날뛴다.
「서울 예수」라는 책자에는 1983년 7월7일 <중앙일보>에 게재한 김윤숙씨의 글이 소개되고 있다.
'건강하면서도 인삼 녹용을 복용하는 목사, 사우나탕의 안마가 취미인 목사, 교회 사택을 마다하고 맨션 아파트를 찾는 목사, 사채놀이를 즐기는 사모, 성지 순례라는 명목으로 부부 동반 해외 여행을 즐기는 목사, 자가용·전화·주택 유지비를 교회 재정에 떠미는 목사, 성경 본문 전체는 생각하지 않고 한 구절만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인간성까지 율법에 묶어 버리는 목사, 신앙의 척도를 돈의 액수에 비례시키며 부정한 돈이라도 많이만 내면 믿음이 강한 양 광고 시간에 누누이 치켜세우는 목사, 교인들이 입만 뻥끗하면 종을 핍박하고 눈물 흘리게 한다고 강대상 에서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는 목사, 돈 봉투 없으면 안수기도를 해주지 않는 목사, 기도원 곳곳에 매표소를 두고 입장료를 받는 목사들도 있다. 주님께서는 돈 받고 치료해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믿지 않는 이를 전도해보면 첫 마디가 돈이 없어서 교회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는 것이다. 누가 한국 교회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앞의 글은 가정주부인 평신도가 쓴 것이다. 그 글을 읽으면 내게 해당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혹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어 보이는 것도 다만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초장부터 이러한 글을 쓸 의욕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투의 글일수록 자신은 세례 요한의 위치쯤 있고, 독자는 '독사의 자식들'의 위치에 있어야 조자룡 칼춤 추듯이 신이 나는 법인데, 먼저 자신부터 꿀리는 구석이 많으니 글 쓸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너 살고, 나 살기 위해 여리고 도상의 바디메오나 열 문둥이처럼 외치기는 해야 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어느 날 비판 의식이 높아진 평신도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목회자 '무용론(無用論)'을 들고 나와 본격적으로 배척운동을 하고, 자기들이 무보수로 설교하고 행정까지 하겠다고 나서기 전에 목회자 스스로가 자기를 매질해 보는 것이 훨씬 속 편하지 않겠는가.
목사는 다섯 달란트의 중책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의 책임은 커녕, 한 달란트의 효과도 못 내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목사 때문이다. 이렇게 회칠한 무덤 꼴이 되어 버린 책임의 대부분이 목사 너, 목사 나 때문이다.
예수께서 처음 유리하는 자기 백성들 앞에 섰을 때, 누구를 향해 제일 먼저 '화 있을진저'라고 꾸짖으셨는가. 몸을 파는 창기였는가. 로마의 앞잡이 세리였는가. 38년 동안 지지리 못나게 누워 있던 무기력한 중풍병자였는가. 아니다. 내로라 하던 종교가들을 공박하셨다. 항상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율법을 지키노라 힘쓰고 구제와 금식에 애쓰던 종교인들이었다. 왜인가. 뻔하지 않은가. 백성들이 유리 방황하게 하던 근본 이유가 압제자(壓制者)들에 의한 것보다 종교가들 때문이었다. 자기들이 제조한 율법의 사슬에 묶인 채 위선의 손으로, 거룩을 씌운 토색하던 손으로 백성들의 목을 졸라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잠시 창칼로 위협하는 로마 압제자들과 싸우기보다 영원을 가로막고 있던 종교가들의 위선으로부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싸우셨고 고난을 당하셨다. 문제의 책임은 정치가 아니다. 경제의 부강(富强)도 아니다.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공해도 아니다. 영원한 정신을 책임진 종교인들 바로 너, 목사에게 있다. 여기 바로 나에게 있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너나 없이 욕심에 매여 지내는 것 같다. 목회자들의 모임에 가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대화 내용이 참으로 비 성경적이다. 큰 교회 만들기, 목회자 권위 세우기, 사례금, 자가용, 박사 학위 취득, 해외 여행, 건강, 사우나와 볼링, 노회와 총회의 정치, 정부에 대한 비판 등 물질욕과 명예욕으로 압축되기 일쑤다. 경건과 영성(靈性)을 향상하기 위한 이야기는 드물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자는 배를 내밀고, 그렇지 못한 자는 전전긍긍하며 부러움과 불만으로 흥분을 나타내기 일쑤다.
이 시대의 훌륭한 목사의 표준은 어디에 있는가. 부끄럽게도 많은 교인들과 큰 교회를 세우고 예산이 풍부한 데 표준을 두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교인 수가 500명이 넘어서야 겨우 대접을 받기 시작하고, 1천명이 넘어서면 목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3천명이 넘으면 신흥 재벌 흉내쯤 내는지 교만의 배를 내밀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
이 시대에 훌륭한 목사는 있는가
'야, 이놈아, 교인이 많은 것은 그만큼 달란트를 많이 남겼다는 증거로 칭찬 받을 일이지, 왜 비난의 조건이 되는가'라고 멱살을 잡을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옳은 말이다. 도시 교회에서 몇 년 가도 교인의 수가 그 모양, 그 꼴이라면 분명 그것은 책망 받을 일이요,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땀 흘려 충성했다는 결과라면 칭찬 받을 일이다. 그러나 큰 교회를 이룩한 후에 거들먹거리는 자세에 대해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전력투구하여 큰 교회를 이룩했다고 할지라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하는 것은 바른 자세임에도 말끝마다 자기 공과를 내세우고, 툭하면 작은 교회 목회자나 농촌 교회의 목회자를 하대(下待)하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무슨 노회나 총회 모임에서 위원 한 자리라도 주면 그것을 과시하고 싶어지고, 누가 별 노력 없이 박사 학위라도 취득한 것을 보면 은근히 비판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나도 어디 가서 적당히 받을 길 없을까' 하는 바람이 웅크리고 있음을 보고 혼자 낯을 붉힌다. 언제부터 나는 큰 봉급, 큰 대우, 큰 자리, 큰 칭찬에 연연하는 자로 전락하고 있는가.
한국의 목회자들이여, 이대로는 안 된다. '오늘 주님이 오신다면 무서운 책망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욕망의 신발을 벗고 각자의 강단에 엎드려 반성하고 회개하자. 젊은 목회자들이여, 영적 공해가 너무 심해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풍토 속에서도 오직 좁은 길을 따라 담대히 가주기를 바란다.
교회갱신, 시급한 과제다
교회갱신은 교회의 원래 모습을 찾자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이 때 갱신되어야 할 교회가 비본래적 실체라면 원래의 교회는 본래적 실체가 된다. 다시 새롭게 한다는 것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물질을 제거하는 문화재 복원 작업과 비슷하다. 그래서 존 스토트도 갱신을 본래회귀로 보았다. 그것은 사실 종교개혁자 칼빈이 자신들의 신앙을 사도신경에 근거한 기독교 본래의 것이라고 <기독교강요>를 통해 설명할 때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갱신은 두 가지 질문을 수반하고 있다. 하나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어떻게 엇나갔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적기에 갱신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갱신은 ‘현실적 필요’와 맞닿아 있고 ‘내적 생명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교회갱신은 교회 자체의 역기능성과 교회가 해야 할 시대의 요청에 대한 시급한 답변이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드디어 자기 나름대로의 모습과 시늉을 하기에 이르렀다. 쉽게 말하여 한국교회 하면 어떠어떠한 것이라고 떠오르는 게 있다. 그것이 순기능적인 것이든 역기능적인 것이든 엄연한 실상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어느덧 마이너스 성장기에 접어든 한국교회는 시급히 자기 점검을 해야 한다. 한 세기의 자취를 돌아보고 새로운 몸짓을 위해 자기 자신을 철저히 살펴보아야 한다. 신학적으로, 행정적으로, 교정(敎政)적으로, 교육적으로, 사회변혁을 위한 각종 작업의 면에서 검토할 것들이 즐비하다.
이에 더하여 헌신도가 떨어지는 목사·장로들의 신앙에 있어서, 일반교인들의 급속한 세속화를 두고, 여전히 기복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슴 아픈 현실을 보면서, 대형교회의 번영신학적 일탈 내지는 목사 대물림 때문에 내부 단속이 그 어느 때보다 급박한 시점에 이르렀다. 이것의 해결이 늦으면 늦을수록 국민적 관심과 신뢰가 떨어질 것이다. 신뢰(trust) 획득은 우리의 최고 재산이다.
한국교회는 또한 급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시대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정보의 급속한 흐름으로 가정과 직장, 학원과 사회가 쇼킹하게 달라지고 있다. 변화의 폭은 갈수록 커지고 사이클은 자꾸만 짧아지고 있다. 그 여파로 가정과 학교가 무너져 어린이 노약자 청소년이 거리로 내몰리며 장년의 방황이 심도를 더해가고 있다. 해체와 상대성이 판을 쳐서 기준의 선명성은 찾아볼 길이 없고 혼미가 대안으로 행세하고 있다.
그런데다 남북문제를 비롯한 주변국 문제가 간단치 않고 국민의식의 더딘 정립은 변화수용의 난맥상을 노정 시키고 있다. 따라서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신속히 갱신의 기치를 올려야 한다. 정말 교회갱신의 시급성은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다함이 없다.
교회가 먼저 개혁되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는 개혁돼야 하며 항상 개혁돼야 한다”고 말했습니
다. 교회는 늘 자신을 새롭게 개혁해야 합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힘으
로 영혼구원은 물론 사회개혁에 앞장서야 합니다.
16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청교도 운동과 경건주의 운동은 ‘도대체 기
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습니다. 공교회가 가르
치는 교리를 듣고 공교회가 베푸는 성례전에 참여하면서 그 안에 있으면 그
저 구원이 보장된다는 식의 중세적인 틀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
었던 겁니다. 개인적으로 깊이 와 닿는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구호와 교리에
그치는 신앙이 아니라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신앙이 필요했습니다. 청교도
운동과 경건주의 운동은 이런 위기의식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신앙의 개혁운동이 필요합니다. 광복 이후 줄곧 계속돼
온 정치권력의 부정부패, 법과 도덕을 지키면서 살기보다 한탕을 노리고 편
법을 일삼아야 능력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풍조 만연, 사회지도층에 대한
불신,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배금주의 때문에 온 국민이 도덕적으로 무
감각해졌습니다.
이런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한국판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제
할 일이나 잘 하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 병리현상과 한
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도덕 교과서에서 배우는
윤리가 현실에서 무용지물로 취급되는 것처럼 신앙의 바른 정신이 성도들의
삶 속에서 실천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계의 청소년 중 우리 청소년들이 어른들을 가장 존경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현재 전통윤리가 급속히 무너지고 서양의 근대적
가치관은 아직 한국 현실에 들어맞지 않아 윤리부재 현상에 빠져있습니다.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의 삶에서 자신들이 따라야 할 삶의 모범을 찾지 못하
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로고스(말씀)와 함께 파토스(삶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가
있어야 하는데 신앙인들은 파토스적인 실천이 없는 절름발이 신앙을 갖고
있고 이 사회는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살아가는 방향 없는 파
토스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새롭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사회를 개혁
하는 것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교회를 제일 먼저 세우고 첫 수확으로 감사예
배를 드리는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정치 경제 사법 교육 등 사회의 총체적
인 기능이 신앙의 정신으로 구현되는 ‘시온성’과 같은 사회를 세우는 꿈
을 갖고 이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교회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갱신하는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책임과 실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인사제’의 정신으로 이 부르심에 응답
해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신앙적인 가치관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는 사회의 여러 이익집단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서로 갈등하는 사회 집
단들 모두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안아야 합니다. 한국 사회를 바로 세
우고 한국을 존경받는 나라로 만드는 일에 한국교회가 앞장서야 합니다. 실
천하는 신앙, 개혁하는 신앙을 가집시다.
한국교회의 개혁과 디아코니아(2)
2. 사랑이 넘치는 교회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가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가르치고 있지만 실제로 초대교회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교회에 교인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리고 그 교회 목사가 천사의 말로 설교를 하더라도 사랑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거나 잠자는 교회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인도의 캘커터에서 빈민들을 헌신적으로 돌볼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녀가 어느 날 길거리에서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듯 깡마른 소년의 행색이 너무나 더럽고, 초라하고 불쌍했습니다. 이런 소년을 데려다가 손수 목욕을 시키고 옷을 빨아 입히고, 따뜻한 국물을 먹이고, 그리고 그녀가 운영하는 어린이의 집 침대에 뉘였습니다. 소년은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소년은 어린이집에서 도망가고 없는 것이었습니다. 빈 침대만이 있을 뿐입니다. 깜짝 놀라서 수소문해서 찾아보았습니다. 이전에 배회하던 거리에 그 소년이 다시 가 있었습니다. 또 데려다가 씻겨서 재웠습니다.
또 도망을 갔습니다. 여러 차례 이렇게 되는 것을 보고 테레사 수녀는 그를 시중하는 젊은 수녀에게 일렀습니다. 잘 지켜보다가 아이가 도망갈 때에 어디로 가는지 뒤를 좀 밟아
보라고 했습니다. 역시 소년은 새벽에 일어나서 어린이의 집을 뛰쳐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를 따라가보니 커다란 나무 밑에 이르러서 발을 멈추고, 그 밑의 웅덩이 같은 움막집에 들어갑니다. 한 여인이 그 움막에서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것 같은 온갖 음식 찌꺼기를 질그릇에 담아 끓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면서 이 아이는 기쁜 얼굴로 음식이 다 마련되기를 기다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수녀는 이 아이를 불러내어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왜 어린이집에서 도망해 나왔느냐? 뭐 불편한 것이 있더냐? 거기에 친구들도 많은데..." 이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내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내 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좋은 음식, 좋은 침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
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함께하고, 거기서 사랑을 느끼고, 거기서 자유를 느끼고, 거기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쳐다볼 때에 기쁘고, 교회 들어갈 때에 행복하고, 이 세상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 같은 것이, 교회에서 느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그리고 교회의 온 식구들을 자기의 가족처럼 형제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12세 때에 성전에 올라가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성전 안에서 말씀을 듣고, 가르치는 교훈을 받고, 서로 성경을 토론하고...너무나 재미가 있고 행복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있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고, 아버지의 품안에 있는 행복을 맛보았던 것입니
다.
우리도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체온을 느끼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며 사랑이 넘치는 교회를 이룩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
3. 교회와 디아코니아
하나님 나라운동이란 몸으로 이웃을 섬기는 운동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바르게 파악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봉사와 참여에 대한 입장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초의 기독교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사건을 통하여 탄생한 예루살렘교회이다. 이 최초의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보여주었다. 그 특징은 1)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 2) 교제하는 공동체 3) 떡을 떼는 공동체 4) 기도하는 공동체 5)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된 공동체 6) 소유를 서로 통용하는 공동체 7) 모이기를 힘쓰는 공동체 8) 함께 음식을 먹는 공동체 9)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 10) 모든 사람에게 칭송
을 받는 공동체 11) 날로 부흥하는 공동체(행2:42-47)이었다.
초대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여러 가지 섬김을 위하여 집사 제도를 두었던 것이다. 초대교회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디아코니아 운동이 있었으며 특히 한국 초기 교회사에 나타난 선교사업은 민중계몽, 현대식 학교교회의 보급, 맹아학교, 고아원, 양로원, 병원 등의 설립과 민족정신의 함양, 서양의 과학적 연구방법의 소개 등 많은 사회봉사 활동으로 한국 사회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에 비해 최근의 교회활동과 업적은 매우 미약하다.
맺음말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려면 교회 안에서는 신자인데 교회 밖에서는 신자가 아닌 이중적인 생활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신앙과 생활이 일치해야 하겠으며 특히 목회자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회개운동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섬김의 나라이다. 그리고 교회는 섬기기 위해서 오신 예수의 몸이다. 따라서 섬김의 종으로 오신 예수의 몸 된 교회는 마땅히 섬기기 위해서 존재한다. 섬김을 거부하는 교회는 스스로의 존재의 의미를 부정하는 교회요 예수의 정신에서 떠난 것이다. 성령이 떠난 교회는 영혼이 떠난 몸과 같다. 교회는 섬김의 운동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가장 시급히 갱신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보다도 초대교회와 같이 섬김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모든 목회자와 성도가 기독교 사회봉사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앞장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