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만 목사 (울진평화교회)
나는 부산 동래에서 자랐으며 베다니교회(현 동부교회)에서 교회학교 시절을 보냈다. 교회안에서 너무 이기적인 것을 본 나는 학창시절에 신앙은 별로없이 곁길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의 고등학교시절은 그야말로 방황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나는 동인고등학교 제1기 학도호국단 소속의 규율부장 이었다.
그림자가 없다는 무영자라는 7인조 클럽을 조직하였고, 사춘기를 이렇게 방황하며 보냈다. 고3때 일이다.
사직동파와의 패싸움에서 나는 큰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합의가 되지 않는 사건 이었다.
친구들은 잡혀서 영장을 청구받았다.
당시 박성진 전도사님이 유숙희 집사님과 위로해주기 위해 급히 오셨다.
그리고 나에게 기도를 해주시고 위로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그 말씀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는 말씀이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성만이를 보살펴 주실꺼야, 힘내라”고 위로해 주셨다.
구치소로 수감되어 가기 전 나는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그러나 조융제 장로님이 형사들에게 선처를 부탁하셔서 사직파출소로 이송되어 왔지만 파출소장은
이 사건에 손을 떼기로 약속하고 날 보고 피신하라고 지시 했다. 나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결국 하란으로 피신한 야곱처럼 나는 초읍에 사는 사촌 형집에서 숨어서 지냈다. 아침 일찍 산을 넘어서 기슴을 조아리며 학교를 다녔다. 방학후 곧바로 송정해수욕장으로 피신했다.
바닷가에서 형들을 도와주며 일을 했다. 또다른 세상에서 나는 여러가지일을 많이 배웠다.
그후 나는 대학2년때 군 제대후 부산 성가병원에서 근무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신학을 하게되었다. 그리고 나는 1985년 12월16일 신학교 2학년때에 한얼산 기도원에 가서 사명자로서의 결단을 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강사의 말씀은 나의 신앙에 성령의 폭포수 같은 큰 은혜를 맛보게 해 주었다. 하나님은 나를 강하게 훈련시키시려고 울진 오지 어촌 마을에 복음의 특파원으로 보내셨다.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때 이곳은 그야말로 복음의 불모지 그 자체였다. 이곳의 환경을 보면 실망할수 밖에 없는 열악한 현실에서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목회에 임하였다.
마을에서 큰 굿을 할때면 작정 기도에 들어간다. 그리고 굿판에 무당들이 굿을 할 때면 “주여~!!이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리고 카메라로 절정에 오른 굿 판에서 사진을 찍으며 “이굿판이 이 마을에 마지막 굿판이 되게 하소서!”하며 기도 했다. 하나님은 역사 하셨다. 오랜 세월동안 굿을 해오던 곳을 매립하여 교회진입로를 만들게 하셨다. 물론 굿도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곳 어촌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그리고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는 그 말씀을 붙잡고 최선을 다하여 목회하고 있다.
이곳에서 목회한지가 벌써 15년의 세월이 하루같이 지나갔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셨으며 푸른 동해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 봉헌하게 하셨다.
인생사 살다보면 일이 꼬일때가 있으면 풀릴때가 있음을 믿으며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이 말씀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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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2014.년
이글을 쓰신 목사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오지인 울진에서
앞바다물을 성도삼아 목회하고 계십니다,
목사님말씀이 꼬일때와 풀릴때,,
저역시 너무도 지금은 꼬일떄라
언제가는 풀릴때 주시기를..간절히..간절히....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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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령을 꼭 찾기를 빕니다. 사고도 하느님의 역사이니 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 하십니다. 나는 조금 밖에 없어야 합니다.
누구나 사는게 힘들때가 있죠 기운내세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