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색소폰
중절모자를 쓰고 정장을 한 남자가 공원에서 은은한 불빛을 받으며 색소폰을 연주한다. 밤의 적막한 고요를 깨는 그 소리가 너무 감미로워 색소폰을 좋아 하게 되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한 두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멋스럽다는 말을 선배나 지인들로부터 자주 들어 왔다. 그러든 차에 우연히 나와 10년 년 하의 지인이 색소폰을 배우라고 권해왔다. 난 업무가 만만치 않아 좋은 제안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2여년의 시간이 그냥 흘렀다.
2009년 어느 날 지인이 또 나에게 색소폰이 어울리니 꼭 배우라는 말을 한다. 그것도 여러 번 권했다. 그래, 나이도 있으니 미리 어떤 악기를 배우면 좋을지 악기연주의 달인인 초등학교 동기에게 전화로 상의해서 결정하기로 했다.
“ 친구야! 내가 색소폰이나 아코디언을 배우려는데 어느 악기가 나에게 맞겠나?”
“ 넌 색소폰이 맞을 것 같다. 아코디언은 화음과 반주를 함께 하려면 어렵다”는 답을 얻었다.
내가 악기를 배우려면 색소폰이 좋겠다는 결정을 하면서 배울 학원을 찾아보니, 우리 집 근처에 색소폰을 가르치는 곳이 있었다. 난 퇴근해서 그 학원을 찾아가서 상의를 하니 기타나 드럼도 괜찮겠지만, 색소폰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색소폰을 주문했다. 일본에서 만든 야마하62 은색 색소폰 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학교에서 근무가 끝나면 얼른 집으로 와서 식사를 하고 바로학원으로 갔다. 처음에는 색소폰의 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낮에 근무로 지친데다 색소폰을 목에 걸고 배우니 목도 아프고 입안이 부풀고 입술이 부풀어 텄다. 그리고 용을 쓰다 보니 몸살이 나 결국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운지법을 배우느라 갖은 고생을 다 했다. 그렇게 배운지 3개월 쯤 되었을 때 곡을 한곡 받았다. “등대지기”였다. 나도 이제 음악을 연주 할 수 있다는 기쁨과 자신감에 젖어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 와 열심히 연습을 했다. 혹시 소리가 아파트 밖으로 세어 나가 이웃에 피해를 줄까 봐 옷장을 열고 바지가랑이속에 색소폰을 넣고 연습을 했다. 그런데 가끔은 ‘삑’하는 소리가 나자 아내는 “잠을 못 자겠다. 이웃이 들으면 싫어한다. 연습을 하지 말라고 말렸다.” 그래서 나는 다시 화장실에 가서 연습을 했다. 그곳에서도 못하도록 해서 어느 날은 아내와 함께 야외로 나가서 마음껏 연습하려고 우리학교로 갔다. 교정 숲속에서 연주하는데 운지법이 잘 맞지 않아 이상한 소리가 나니까 운동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듣고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 아닌가! 또 어떤 때는 내 연구실에서 연주를 하다 보면 주위 동료들로 부터 시끄럽기 때문에 지하실 체력단련 장에 가서 연주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체력단련 장으로 가서 양해를 구하고 연습을 하니 학생들이 깔깔 그리며 웃었다. 그래서 다시 내 차로 가 차 안에서 연습을 했다. 그러자 청소부들이 구경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저런 고생 끝에 겨우 ‘등대지기’를 연주하자, 다시 ‘행복이란’ 곡을 받았고, 그다음은 ‘낙화유수’를 받아 연주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3곡을 겨우 연주 할 수 있어 나로서는 감개무량 했다.
색소폰을 배우면서 잊지 못할 일 다섯 가지 추억이 생각난다.
첫 번째는 어느 동호인의 집에서 연주회를 할 때였다. 나는 그 당시 등대지기를 배우고 있을 때 여서 나 때문에 4명의 선배가 초보자가 연주하는 ‘등대지기’를 합주하게 되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난생 처음 무대에 서는 일이라, 내 순서가 돌아 올 때 까지 기다리는 동안 온몸에 두려움의 전율 때문에 가슴이 뛰고 목이 말랐다. 이윽고 차례가 되어 무대에 올랐다. 앞이 캄캄 했다. 리더가 시작을 알리는 눈짓을 하자 연주를 시작했다. 혼자 연주 할 때는 겨우 연주를 할 수 있었지만, 무대에 서서 청중을 보니 그만 처음부터 정신이 혼비백산하여 손이 떨리어 다른 사람들과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그러다 중간 쯤 지나자 겨우 따라 했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어 함께 연주한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연주가 끝나자 연주하는 동안 허둥대던 나를 보고 웃는 사람, 격려의 박수를 치는 사람, 저 연주 실력으로 어떻게 연주회에 나갈 수 있을까?, 용기가 대단하다는 눈으로 의아하게 처다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림을 느낀다.
두 번째는 10개국 외국인 새마을 연수단을 맞아 교육을 시킬 때 일이다. “이번 달에 생일이 있는 교육생에게는 색소폰으로 생일 축하곡을 연주하며 축하 파티도 마련해 주겠다.” 며 물었다. 그러자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온 24살 처녀가 “금주에 생일”이라고 한다. 난 한명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는데, 의외로 금요일이 생일이라니 너무 만용을 부린 것 같아 후회서러움과 혹시 실수를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생일이 되자 떡과 작은 선물과 음료수로 생일상을 차린 후 생일 축하곡을 연주하니 모두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심지어는 괴성을 지르는 외국인 연수생도 있었다. 그리고 앙코르를 받아 ‘행복이란’ 곡을 연주하자 도미니카공화국 처녀는 “아버지 같다면서 앞으로 아버지로 부르겠다.”고 해서 그럼 나도 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졸지에 색소폰으로 인해 딸이 한 명 생긴 것이다. 이 딸이 귀국 후 메일을 보내 왔다. “ 이국땅 한국에서 생일을 맞아 생일상을 받고 색소폰으로 축하 연주를 해주시니 너무 고마웠습니다. 앞으로 좋은 딸이 되겠으니, 혹시 도미니카공화국에 올 기회가 있으면 꼭 연락을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 사연은 함께 색소폰을 배우는 지인이 자신의 집에서 마련한 작은 연주회에 출연 하게 되었다. 50여명의 관중 앞에서 ‘행복이란’곡을 연주했다. 무대 경험이 거의 없는 나는 순서가 되자 정신이 혼미해 졌다. 무대 위에 올라서자 눈앞이 캄캄했고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렸다. 첫 번째 연주 때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연주에 임했다. 다행스럽게도 작은 경험이 그래도 도움이 되어 첫 번째 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았다. 지인들의 격려를 받으며 색소폰연주는 많은 무대 경험과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연습하는 것이 좋은 연주자가 되는 길임을 알 수 있었다.
네 번째 사연은 색소폰을 배운지 한 3개월 쯤 되자 가르치는 선생이 여울연주단 음악봉사후원회회장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나는 너무 뜻밖의 얘기라 “재력과 시간이 없는 사람이 후원회를 맡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약 후원회가 필요하다면 개인 보다는 회원들을 모집해서 여울연주단음악봉사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 같다”고 제안을 하자, “좋은 안이라며 후원회를 만들어 장애인, 환우, 노인 등을 위한 무료 음악회를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난 “그것은 너무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라 나보다도 더 능력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면서 정중히 거절을 했다. 그러나 여울연주단 임원들이 5개월간 계속 간청을 하기에 그럼 한번 해보자는 반승낙을 하고 후원회 회칙을 만들고, 후원회원을 모집하기 시작 했다. 월 3만원의 회비를 내는 후원회원모집은 매우 힘이 들었다. 몇몇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3개월간 모집한 결과 100여명이 후원회원으로 참여를 했다. 하룻저녁에 3백 만 원 어치의 술은 먹을 수 있어도 월 3만원의 회비를 내는 것은 아까워하는가 하면, 비록 가난 하지만 기꺼이 참여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어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울연주단음악봉사후원회는 여러 차례 장애인과 환우, 노인을 위한 음악회를 할 때 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색소폰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어 작은 보람을 느끼곤 한다.
다섯 번째는 색소폰을 처음 배운 그 해 년 말에 같이 배우는 문하생들이 발표회를 가졌다. 그 때 나는 한곡을 준비하면서 앙코르곡까지 연습을 했다. 드디어 발표회 당일 문하생들이 모여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들어봐도 멋진 연주를 하여 모든 가족들의 열 열한 환호와 앙코르를 받았다. 그러나 내 차례가 되었다. 두 번의 경험은 있지만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이 두려워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먹고 음악에 맞춰 ‘낙화유수’를 연주했다. 충분히 연습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나타났다. 연주도중 ‘삑’하는 소리가 나자 가족들이 웃으면서 박수로 격려를 해주었다. 연주가 끝나자 앙코르 곡을 준비한 것을 안 지인이 앙코르를 소리치며 청했다. 난 부끄러워 당장 무대에서 내려가고 싶었지만 앙코르를 받아드렸다. ‘행복이란’곡을 연주했다. 첫 번째 보다는 조금 마음이 안정되어 연주는 그런대로 마쳤다. 연주회가 끝나자 가족들이 준비해온 음식을 먹으면서 색소폰에 얽힌 저마다의 예기를 나누는 가운데 '한곡을 완전히 마스터 하려면 천 번은 연습해 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너무 게으른 초보 연주자임을 알았다. 나는 직장일 때문에 이 무대가 나에게는 색소폰 연주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색소폰과 아쉬운 이별을 한지 어느덧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가끔 신천을 거닐다 보면 색소폰을 연주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 순간 잊고 지냈던 색소폰을 떠 올리며 다시 연주를 하고 싶은 욕망이 가슴을 자극 한다. 그럴 때 마다 서제에서 잠자고 있는 색소폰을 들려다 본다. 좋은 주인을 만났으면 멋진 연주를 하는 악기가 되었을 텐데 주인을 잘못 만나 매일 잠자고 있는 색소폰을 볼 때면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든다. '비록 하잘 것 없는 것이 라도 애정을 쏟으면 쏟은 만큼 빛이 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갈고 딱지 않으면 제 값을 못한다.' 는 것을 색소폰과의 인연으로 알 수 있었다.
나에게 갖가지 색다른 추억을 안겨준 색소폰을 다시 시작 하고 싶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