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사협갈(驅使脅喝 : 위협과 공갈로 광포한 이중 전략을 구사한다)
(서기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1375년 5월 왜장(倭將. 왜국[倭]의 장수[將] - 옮긴이) ‘후지 쓰네미츠(藤 經光[등 경광 – 옮긴이])’는 부하들을 인솔해 ([왕건이 세운 나라인] 후기 고리[高麗]로 – 옮긴이) 쳐들어가겠다고 공갈하며 식량을 요구한다. 이에 고려(후기 고리 – 옮긴이) 정부는 이들을 회유해 식량을 주고 순천과 연기 등지에서 살게 했다. 그런데 이 일은 결과적으로 왜구가 더욱 포악해지는 원인(까닭 – 옮긴이)이 된다.
그 원인을 『 고려사 』 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밀직부사(密直副使. 후기 고리 시대의 정 3품 벼슬. 왕명의 출납이나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을 맡아보던 관직이다 – 옮긴이) ‘김세우’의 명령으로 ‘김선치(金先致)’가 일본(왜국[倭國] - 옮긴이) 해적 쓰네미츠 무리를 유인해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난 뒤부터 왜구들이 사람과 가축(집짐승/길짐승 – 옮긴이)을 살해하고, 침구시마다 더욱 광폭하고 잔악하게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도 살상했다( 『 고려사 』 권 104, 열전 권 27, 「 김선치전 」 ). 왜구는 한번 침구하면 인명(人命. 사람[人]의 목숨[命] - 옮긴이)을 남김없이 살해해, 전라도와 충청도 연해의 주군(州郡)은 텅 빈 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 고려사 』 「 김선치전 」 ).
고려의 불철저한 대응이 왜구의 잔학성을 더 부추긴 꼴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수에 그친 이 사건 하나로 왜구가 극악무도하게 흉포해진 것은 아니다. 이 기록이 있기 전에도 왜구가 사람을 살상한 예는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다만, 이 사건 이후 어떤 원인으로 왜구가 더욱 난폭해지고 잔인해 진 것만은 분명하다.
왜구가 취한 위협과 공갈이라는 이중 전략은 임진왜란(올바른 이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세조선 침략전쟁’/‘6년 전쟁’/‘아시아의 7년 전쟁’ - 옮긴이) 이후 국가간 강화 교섭에서도 수차례 나타난다. 조선(근세조선 – 옮긴이) 전기에는 왜구 근절을 위해 막부와 규슈 중심의 수호 다이묘와 다원적 대일관계를 전개했다면, 조선 후기에는 대마도를 통한 일원적 대일 관계를 취한다.
임진왜란 직후 1602년 조선과 국교 재개 협상 테이블에 앉은 대마도측은 통신사를 (에도 막부를 세운 장군[將軍]인 – 옮긴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파견하지(보내지 – 옮긴이) 않으면 “목전(目前. 눈[目] 앞[前]/당장 : 옮긴이)의 화를 재촉할 것이다.” / “조선이 일본의 화를 입게 될 것이다.”라며 위협을 가했다. 국교 재개를 위한 협상 자리에서 나온 발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험악하였다.(근세조선의 수군이 서기 1598년에 대마도까지 쳐들어가서 그 섬을 쑥밭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섬을 확실하게 근세조선의 직할지로 삼았어야 했다. 그렇게 했더라면 대마도가 이런 식으로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 옮긴이)
이에 대해 조선 측의 협상 담당자였던 ‘전계신(全繼信. 근세조선의 무관[무신] - 옮긴이)’은 다음과 같이 당당히 꾸짖고 있다.
“임진왜란 때 가족(식구 – 옮긴이)을 잃은 많은 조선인들이 원한을 품고 복수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일본(왜국 – 옮긴이)은 이러한 사실이 두렵지 않은가?”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등청정 – 옮긴이])’도 “조선이 (‘일본’의 – 옮긴이) 화호(和好 : 여기서는 ‘화해와 우호를 제안함’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에 불응하면 이는 예(禮)가 아니므로 재침(‘재침략’을 줄인 말 → 다시 쳐들어감 : 옮긴이)하고 말겠다.”고 협박했다(친일국가들에게 묻겠다. 친일국가 출신 사냥개들에게 묻겠다. 한국 안의 종일[從日]세력에게 묻겠다. 그리고 대다수 왜인[倭人]들에게 묻겠다. 가토의 이런 말을 들은 근세조선 사람들이 왜국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가토의 이런 말이 적힌 글을 읽은,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왜국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나아가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가토의 이런 말을 듣고도 이른바 ‘한/일 우호’나 ‘한국과 일본[왜국]의 동맹’에 찬성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 옮긴이).
일본의 이런 극단적인 ‘조선재출병론(朝鮮再出兵論[왜군을 근세조선에 다시 보내야 한다는 주장 – 옮긴이])’은 실은 도요토미 정권의 잔여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도쿠가와 정권(에도 막부 – 옮긴이)이 한계를 만회하고자 한 술책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 내부 문제를 풀기 위한 고육지책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화의(和議. 화해[和]하는 의논[議] - 옮긴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임란 이후 양국(兩國. 두[兩] 나라[國]. 여기서는 근세조선과 에도 막부 – 옮긴이)은 국내/외 정치 부담감을 덜기 위해 협상에 임하지만, 조선이 원한(바란 – 옮긴이) 바처럼 일본이 본질적으로 ‘개심혁면(改心革面)’한 것은 아니었다. 즉, (일본이 – 옮긴이) 전쟁의 참화에 대해 반성하고, 양국 간의 진정한(참된 – 옮긴이) 선린(善隣. 이웃[隣]과 좋게[善] 지냄 – 옮긴이)을 모색하고자 한 자세는 아니었다. 이후로도 일본의 왜구 근성은 바뀐 적이 없으며, 이 같은 광포함은 끝내 근대 일본 제국주의로 이어져 오늘날에까지 이른다.
( → 4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