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겨울답게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가운데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일이 바빠서 조금 늦은 시간이 되고 보니 어둠이 짙게 드리울수록 인적은 한산한 거리가 된 것이다. 날씨는 춥고 해서 저녁이나 먹고 가려고 공단 주변을 배회하다가 작은 도로변의 “기사 식당”에서 발길을 멈추게 한다. 영등포역을 눈앞에 둔 이곳엔 식당 앞에 큰 가마솥 여러 개가 보이는데 예전에 부모님이 부엌에서 쓰시던 물건과 흡사하다. “기사 식당”이란 문자 그대로 차량 운전하는 기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이라 도로 앞에 차량들이 많았다. 영업용 택시뿐이 아니라 크고 작은 화물차도 보이는데 지방에서도 올라온 차량이 여러 대가 보였다.
식당에 들어가니 열 개도 넘을 것 같은 둥근 테이블을 보니 김치찌개에 흰 쌀밥을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리밥에 나물을 넣고 비벼먹는 사람도 있었다. 차림표를 보니 보리밥이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도 그렇지만 옆 테이블에서 나물에다 보리밥 먹는 게 부러워 나도 시켰다. 잠시 식사가 나오기 전에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제각기 다르듯 직업도 서로 달라 시간과 다투며 살아가는 현실이 말해준다. 어느 화물차 기사 분은 지방에서 올라온 부부(夫婦) 같은데 마주보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어보니 전라도 사투리가 귀에 들어온 다. 그 아내 되는 분은 길고 긴 시간을 남편 혼자 운전을 하면 외로울 것 같아 이야기 상대가 되려고 같이 올라온 모양이다.
다른 테이블을 보니 마치 기름칠을 한 것 같은 시커먼 복장에 더부룩한 수염이 많은 중년의 남자가 식사를 하는데 역시 화물차 기사 같아 보인다. 영업용 택시 기사들은 그들만의 깨끗한 복장이 정해져 표시가 나는데 주변만을 맴도는지 여러 명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며 화물차 기사들과 사뭇 다르다. 나는 밖이 훤하게 보이는 창문 쪽 테이블에 혼자앉아 있는데 보리밥과 나물 그리고 고추장이 나온다. 예전 같으면 봄철과 여름철이나 볼 수 있었던 야채들이 겨울에도 나와 음식의 입맛을 돋우게 하니 좋은 세상이 아닐 수 없다. 보리밥이 담긴 큼지막한 국그릇에 나물과 고추장을 넣고 숟가락으로 비비는 순간 빛깔이 너무나 좋아 먹음직스러웠다. 보리밥 한 숟가락을 퍼서 입에 넣어 씹으며 창문 밖을 바라보니 겨울이 아닌 여름철 초가지붕의 툇마루에 걸터앉은 기분이 든다. 추녀 끝에 보리밥 소쿠리가 여름밤을 지새 던 시절 찬물에 밥을 말아 된장에 고추를 찍어먹던 그때의 별미를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아무리 가마솥에 지은 보리밥이라 해도 예전보다 맛은 덜하지만 추억을 되살리는 기분에 찾는 손님이 많은가보다. 그래서 12월이 되면 후회와 반성도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무엇보다 추억을 되살리는 한 달이 되는 듯하다. 나이는 먹어가도 추억은 영원토록 남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세월이다. 시계를 보니 아홉시가 넘은 시간에 전철을 타기위해 신도림역 부근에 오니 어묵과 떡볶이를 파는 포장마차엔 추운 날씨 탓인지 뜨거운 국물에서 김만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뿐 너무나 한산하다. 옆의 호두과자 빵을 굽는 아저씨도 혼자서 열심히 구워서 낼뿐 찾는 이 없으니 썰렁한 날씨만큼이나 지나치는 사람들도 차가워 보인다. 전철을 타고 보니 집안에 들어온 것처럼 따뜻한 기분이 들고 주변을 바라보니 그 시간에도 승객이 많았다. 전철 안에 소주 한잔을 한 승객이 많은 것 같은데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로를 풀게 해준 냄새가 마치 구수한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게 만든 다
독산역에 도착하여 출구를 빠져나와 계단에 내려오니 오늘따라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과일 판매하는 리어카 주인은 담배만 입에 물고 있다.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그 사람이 너무나 안쓰러운데다 오늘따라 지나치기 미안스러워 과일은 매일 마다 먹는 것이어서 고구마 한소쿠리를 골랐다. 도와주는 셈치고 그만 두 소쿠리를 봉지에 담아 돈을 건네고 빨리 발걸음을 옮겨 집에 도착했다. 예전에 고향에서 겨울철이면 안방구석을 차지했던 고구마 통가리가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도 하기 전에 부엌칼로 고구마를 깎아 배를 채우던 일이 있었다. 추억으로 돌아가는 기분으로 거실에서 고구마 하나를 칼로깎아서 먹으니 맛을 전혀 모르겠다. 날씨가 차가운 12월이 되면 서민들의 일상이 그대로 드러나 살아가는 자체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화물차 운전기사 그리고 포장마차, 노점상에서 깊어가는 밤도 잊은 채 애환을 겪으며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추운 날씨에 고생하는 만큼이나 행복도 그만큼 따뜻한 수면위로 떠오르리라 생각 든다. ... 南 周 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