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다시세우기 유기성목사의 예수동행을 이해하면서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기초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원칙의 발견이다.
중국을 비롯한 공산국가에는 정부가 세운 종교지도자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북한이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평양의 봉수대교회는 외국 관광객을 위한 종교시설이다보니 교회의 직원과 심지어는 교인들까지도 반드시 열성 공산당원이어야지만 된다고 알려져 있다.
알다시피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 공산주의는 종교를 유물론으로 규정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제교회의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 이단 사이비 종교에서 목사라는 칭호를 사용한다면 이 역시 정통교회의 목사가 아니다.
목사는 신학전공 이전에 중생의 경험이 우선돼어야 한다. 중생을 경험한 자라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부활을 믿을 수 있다. 소위 진보교단이라 말하는 집단에 소속된 목회자중에 부활을 믿지 않는 종교인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목사는 중생에서 한단계 발전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자 이어야 한다. 중생이 출생이라면 자기가 죽는 경험과 24시간 온전히 예수와 동행하는 자는 기독교의 언어를 터득하고 발전을 향해 전진하는 자이다.
최근 유기성목사의 칼럼에 최상훈목사의 "기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저서에 대한 추천이 있었다. 즉시 주문하고 틈틈이 읽는 중이다. 시력의 문제로 시원하게 정독하지 못함이 아쉽다. 하지만 그분의 강의를 유투브 검색으로 들으며 그가 강조하는 중심내용을 분석할 수 있었다.
유기성목사가 최상훈목사의 기도책을 추천한 이유는 예수동행과 최목사의 기도운동이 상호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최상훈목사의 논리는 이미 한국교회에 익히 알려진 이론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실천하는 분들도 적지않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성공담을 들려주는 강사는 표현에 장점이 있다. 자신감이 넘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듣는이를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하지만 자신은 경험한바가 없으면서도 마치 실제로 경험을 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사기꾼이라고 말한다.
다단계에 빠지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의 말을 듣다보면 "언어의 위력"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능력을 우리는 카리스마라고 통칭한다. 카리스마는 지도자의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이단 교주들이 그토록 외형적인 성공을 거두는 요인은 바로 넘치는 카리스마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아는 목사 한분은 지금 인천지역에서 매우 잘나가는 목사라고 알려져 있다. 설립 10년만에 최근 3천여석의 대형예배당을 건축하고 입당했다. 나는 그의 설교를 최하 100편이상 듣고 분석을 해봤다.
매일 저녁마다 드려지는 예배에는 적어도 수백명의 신자들이 참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설교는 실시간 방송된다. 불과 10여년 전까지 시골교회를 목회하다가 인천의 어느 유수한 교회의 3대목사로 청빙을 받았으나 서로간의 대립으로 수백명의 신자를 데리고 나와 새롭게 교회를 설립했다.
시골에서 목회를 할 때 그는 재정난으로 엄청난 가난과 싸워야 했다고 하였다. 마치 유기성목사가 240억의 교회채무와 싸우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의 원리를 터득하듯이 이분역시 극한 고난을 통해 영적인 원리를 터득하는데 성공했다.
자신이 체험한 바탕은 힘이 있다. 그는 설교할 때 자신이 이룩한 성공을 힘주어 강조한다. 신자들로서는 목사의 강조가 마음에 이끌림을 당할 수 밖에 없고, 저 목사를 통하면 자기 자신도 성공에 이를 것만 같은 소망을 갖게 된다..그래서 사람들은 몰려들게 된다.
하지만 그분의 이면에는 잊지 말아야할 부분들이 있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이 시골지역에서 인천시내로 전입하게된 동기를 밝히지 않는다. 적어도 수백명의 신자를 분립해 나왔다는 이력이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교를 강조한다. 신자들은 선교에 관심없는 목사보다는 선교를 강조하는 목사를 훌륭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그가 집중적으로 선교한다는 대상은 자신의 장녀부부이다. 옥의티이다. 혈육에게 지원하는 것도 선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순수성은 인정받을 수 없다. 소위 세습이라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한교회에 담임목사가 두명이라는 사실이다. 신학을 전공하고 부목사로 있던 자신의 아들을 담임목사로 세운 것이다. 외관상 구분을 하기 위해 본인은 당회장, 아들은 위임목사라고 표기를 한다. 이는 세상 어느 교단에도 없는 해괴망칙한 눈속임이다..
듣는 이를 감동시키는 설교의 능력은 거짓이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는데 사용한다면 이는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사는 삶"이 아니다. 지나치게 표현하면 "눈속임"이다.
신자는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현혹을 당하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섬기는 목사가 누구와 동행하는 자 인지를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