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제27장(第二十七章) 인도 우우(優優)히 크다. 예의(禮儀)가 3백 가지요, 위의(威儀)가 3천 가지이다
大哉라 聖人之道여
위대하다, 성인(聖人)의 도(道)여.
包下文兩節而言이라
아래 글의 두 절(節)을 포함하여 말씀한 것이다.
洋洋乎發育萬物하여 峻極于天이로다
양양(洋洋)히 만물(萬物)을 발육(發育)하여 높음이 하늘에 다하였다.
峻은 高大也라 此는 言道之極於至大而無外也라
준(峻)은 고대(高大)함이다. 이는 도(道)가 지극히 큼을 다하여 밖이 없음을 말씀한 것이다.
優優大哉라 禮儀三百이요 威儀三千이로다
우우(優優)히 크다. 예의(禮儀)가 3백 가지요, 위의(威儀)가 3천 가지이다.
優優는 充足有餘之意라 禮儀는 經禮也요 威儀는 曲禮也라 此는 言道之入於至小而無間也라
우우(優優)는 충족(充足)하여 남음이 있는 뜻이다. 예의(禮儀)는 경례(經禮)[큰 예(禮)]요, 위의(威儀)는 곡례(曲禮)[자잘한 예(禮)]이다. 이는 도(道)가 지극히 작음에 들어가 틈이 없음을 말씀한 것이다.
待其人而後에 行이니라
그 사람[훌륭한 사람]을 기다린 뒤에 행해진다.
總結上兩節이라
위의 두 절(節)을 모두 맺은 것이다.
故로 曰 苟不至德이면 至道不凝焉이라하니라
그러므로 ‘만일 지극한 덕(德)이 아니면 지극한 도(道)가 모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至德은 謂其人이요 至道는 指上兩節而言이라 凝은 聚也며 成也라
지덕(至德)은 그 사람을 이르고, 지도(至道)는 위의 두 절(節)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응(凝)은 모임이며 이룸이다.
故로 君子는 尊德性而道問學이니 致廣大而盡精微하며 極高明而道中庸하며 溫故而知新하며 敦厚以崇禮니라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덕성(德性)을 높이고 문학(問學)[학문(學問)]을 말미암으니, 광대(廣大)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하며, 고명(高明)을 다하고 중용(中庸)을 따르며, 옛 것을 잊지 않고 새로운 것을 알며, 후(厚)함을 도타이[돈독히]하고 예(禮)를 높이는 것이다.
尊者는 恭敬奉持之意요 德性者는 吾所受於天之正理라 道는 由也라 溫은 猶燖溫之溫이니 謂故學之矣요 復時習之也라 敦은 加厚也라 尊德性은 所以存心而極乎道體之大也요 道問學은 所以致知而盡乎道體之細也니 二者는 修德凝道之大端也라 不以一毫私意自蔽하고 不以一毫私欲自累하며 涵泳乎其所已知하고 敦篤乎其所已能은 此皆存心之屬也요 析理則不使有毫釐之差하고 處事則不使有過不及之謬하며 理義則日知其所未知하고 節文則日謹其所未謹은 此皆致知之屬也라 蓋非存心이면 無以致知요 而存心者는 又不可以不致知라 故로 此五句는 大小相資하고 首尾相應하니 聖賢所示入德之方이 莫詳於此하니 學者宜盡心焉이니라
존(尊)은 공경(恭敬)하고 받들어 잡는 뜻이요, 덕성(德性)은 내가 하늘에게 받은 바의 정리(正理)이다. 도(道)는 말미암음이다. 온(溫)은 심온(燖溫)[따뜻하게 데움]의 온(溫)과 같으니, 예전에 이것을 배우고 다시 때때로 익힘을 이른다. 돈(敦)은 더욱 도타이 함이다. 존덕성(尊德性)은 마음을 보존하여 도체(道體)의 큼을 다하는 것이요, 도문학(道問學)은 지식을 지극히 하여 도체(道體)의 세세함을 다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덕(德)을 닦고 도(道)를 모으는 큰 단서이다. 일호(一毫)의 사의(私意)[사심(私心)]로써 스스로 가리우지 아니하고[치광대(致廣大)], 일호(一毫)의 사욕(私慾)으로써 스스로 얽매이지 아니하며[극고명(極高明)], 그 이미 아는 바를 함영(涵泳)하고[온고(溫故)], 그 이미 능한 바를 돈독히 함은[돈후(敦厚)] 이는 모두 존심(存心)의 등속이요, 이치를 분석함에는 털끝만한 차이가 있지 않게 하고[진정미(盡精微)], 일을 처리함에는 과(過)·불급(不及)의 잘못이 있지 않게 하며[도중용(道中庸)], 의리(義理)는 날마다 알지 못하던 것을 알고[지신(知新)], 절문(節文)[예(禮)]은 날마다 삼가지 못하던 것을 삼감[숭례(崇禮)]은 이는 모두 치지(致知)의 등속이다. 존심(存心)이 아니면 치지(致知)할 수가 없고, 존심(存心)한 자는 또 치지(致知)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 다섯 구(句)는 큼과 작음이 서로 자뢰하고, 머리와 끝이 서로 응하여, 성현(聖賢)이 덕(德)에 들어가는 방법을 보여 준 것이 이보다 자세함이 없으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是故로 居上不驕하며 爲下不倍라 國有道에 其言이 足以興이요 國無道에 其默이 足以容이니 詩曰 旣明且哲하여 以保其身이라하니 其此之謂與인저
그러므로 윗자리에 거해서는 교만하지 않고, 아랫사람이 되어서는 배반하지 않는다. 나라가 도(道)가 있을 때에는 그 말이 족히 흥기(興起)시킬 수 있고,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에는 그 침묵이 족히 몸을 용납할 수 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이미 밝고 또 밝아 그 몸을 보전한다.” 하였으니, 이것을 말함일 것이다.
興은 謂興起在位也라 詩는 大雅烝民之篇이라
흥(興)은 흥기(興起)하여 지위에 있음을 이른다. 시(詩)는 <대아(大雅) 증민편(烝民篇)>이다.
右는 第二十七章이라 言人道也라
우(右)는 제27장(第二十七章)이다. 인도(人道)를 말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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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27장)
大哉聖人之道!
洋洋乎發育萬物,峻極于天。
優優大哉,禮儀三百威儀三千。待其人而後行。
故曰:「茍不至德,至道不凝焉。」
대재성인지도
양양호발육만물 준극우천
우우대재 례의삼백위의삼천 대기인이후행
고왈 구부지덕 지도불응언
<직역>
크도다(大哉) 성인의 도여(聖人之道)
넓고도 넘실거리(洋洋)도다(乎) 만물을 발육시키네(發育萬物) 하늘(天)에(于) 높아(峻) 극에 달했네(極)
온화함(優優)이 크도다(大哉) 예의(禮儀)는 삼백(三百)이고 위의(威儀)는 삼천(三千)이다. 그 사람(其人)을 기다리(待)고(而) 후에 행동하네(後行)
그래서(故) 말한다(曰) 진실로(茍) 지극한 덕(至德)이 아니면(不) 지극한 도(至道)는 모이지 않는다(不凝焉)
<번역>
크도다 성인의 도여
넓고도 넓게 만물을 만들고 키우고 하늘 끝까지 높이 도달했다.
부드럽고 넉넉함이 크도다, 예의는 삼백이오 작은 예의는 삼천에 달하도다. 그 성인을 기다린 이후에야 행해지리라.
그래서 말한다. 진실로 지극한 덕을 가진 성인이 아니면 지극한 도는 모여 형성되지 않는다.
<해석>
크구나 성인의 도여
넓고도 넓어 만물을 만들고 키우며 하늘 끝까지 달할만큼 높다.
온화하고 온화하네. 예의는 삼백 가지이고 작은 예의인 위의는 삼천에 달한다. 이 예는 이 성인이 오기를 기다린 후에야 행해질 수 있다.
그래서 말한다. 진실로 지극한 지덕이 아니라면 지극한 도 역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해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성(誠)이 만물을 만들고 완성시킨다는 주장까지 열심히 따라왔다.
誠者,物之終始。不誠無物 (성은 사물의 끝과 시작이다. 성이 없으면 사물도 없다.)
誠者,非自成己而已也。所以成物也(성이란 것은 자신을 완성시킬뿐만 아니라 사물도 완성시키는 바다) - 중용 22 참고
그런데 이제 성인의 도나 성인(聖人)이 사물을 발육시킨다고 한다. 성인(聖人)을 무슨 조물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공자가 설정하고 있던 성인(聖人)은 사물을 발육시키기 까지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공자가 성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요임금, 순임금, 문왕, 주공 이런 완전한 인격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국가를 만들고 문명을 발육시켰다. 그러나 사물을 직접 발육시킨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 지점이 논어의 세계와 중용의 세계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공자의 학문과 그 후계자들의 학문 특히 성리학은 별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무리수를 두지 않았던 공선생님이 그립다.
성인이 있고야 예의와 위의가 존재하게 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의 지덕(至德)은 분명히 그 성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 성인의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가 형성되지 않는다고 한다. 논리적으로 사람을 설득해가던 공자의 가르침은 서서히 변질되고 논리적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종교화가 진행되고 있다. 완전 신약성서를 만들고 있다. 예수가 아니면 여호와를 만날 수 없다는 예수교와 너무 닮아간다. 누가 예수가 아니면 여호와를 만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그 합리성을 토론하겠는가?
중용은 고대 중세 아시아의 생각을 알기위해 이해 하고 공부하는 수준에서 그쳐야지 논어처럼 공감을 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한자>
哉(어조사 재) : ~일것인가?, ~리오, ~도다, ~로구나
洋洋(양양) : 바다가 한없이 넓음
優(넉넉하다) : 넉넉하다, 뛰어나다, 온화하다, 부드럽다
威儀(위의) : 격식을 갖춘 태도나 차림새
威(위엄 위) : 위엄, 존엄, 세력
茍(빠를 극/진실로 구) : 극/ 빠르다, 긴급하다, 심하다 구/진실로, 다만, 겨우, 구차하게
凝(엉길 응) : 엉기다, 모으다, 굳다, 집중하다
<영역>
How great is the path proper to the Sage!
Like overflowing water, it sends forth and nourishes all things, and rises up to the height of heaven.
All-complete is its greatness! It embraces the three hundred rules of ceremony, and the three thousand rules of demeanor.
It waits for the proper man, and then it is trodden.
Hence it is said, "Only by perfect virtue can the perfect path, in all its courses, be made a fact."
故君子尊德性而道問學,致廣大而盡精微,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敦厚以崇禮。
是故居上不驕,爲下不倍。
國有道,其言足以興;國無道,其默足以容。
詩曰:「既明且哲,以保其身。」其此之謂與
고군자존덕성이도문학 치광대이진정미 극고명이도중용
온고이지신 돈후이숭례
시고거상불교 위하불배
국유도 기언족이흥 국무도 기묵족이용
시왈 기명차철 이보기신 기차지위여
<직역>
그러므로(故) 군자(君子)는 덕성(德性)을 존중(尊)하고(而) 묻고 배움(問學)을 길로 삼는다(道)
광대함(廣大)에 도달(致)하고(而) 정미함(精微)을 다하고(盡) 높고 밝음(高明)에 끝까지 이르(極)고(而) 중용(中庸)을 길로 삼는다(道)
옛것(故)을 따뜻이 하(溫)고(而) 새것을 안다(知新) 후덕함(厚)을 돈독히(敦) 하고(以) 예를 숭상한다(崇禮)
그러므로(是故) 위에 거처하면서(居上) 교만하지 않고(不驕) 아랫일 하면서(爲下) 배반하지 않는다(不倍)
나라에 도가 있으면(國有道) 그 말(其言)을 일으킴(興)에(以) 충분(足)하다. 나라에 도가 없으면(國無道) 그 침묵(其默)이 용납됨(容)에(以) 충분하다(足)
시에 말하기를(詩曰) 이미(旣) 밝(明)고 또(且) 현명하다(哲) 그리고(以) 그 몸(其身)을 보전(保)하네 아마(其) 이것(此)의(之) 이름(謂) 인가(與)
숭례문
<번역>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고 묻고 배우는 것을 도로 삼는다.
광대함에도 도달하고 작고 정미한 것에도 진력하고 높고 밝음을 끝까지 추구하고 중용을 도로 삼는다.
옛것을 복습해 새것을 알고 후덕함을 돈독히 하고 예를 숭상한다.
그러므로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 자리에 있으면서도 배반하지 않는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자신의 신념을 말하는 것이 충분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충분히 용인된다.
시경에 "이미 밝고 현명하도다. 그리고는 그몸을 보전하네."라는 구절은 아마 이런 군자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해설>
열받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해야한다. 이곳 만만치 않은 곳이다. 이곳을 잘 알아두면 유용하다. 숭례문의 숭례가 이 구절에서 따 온 것이며 존덕성(尊德性)이 중요한가 도문학(道問學)이 중요한가를 놓고 성리학과 양명학이 서로 갈라지기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군자가 추구해야할 절대 실천강령 두가지가 덕성을 키움과 학문을 함이다. 학문과 덕성중에 덕성은 내적으로 거경(居敬)으로 수양하고 학문은 외적으로 궁리(窮理)로 공부하면 된다는 것이 성리학인데 도문학이 더 중시된다. 반면 두가지를 나누면 안되고 한꺼번에 치양지(致良知)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양명학의 주장인데 존덕성을 더 강조하는 입장이다.
중용이 성리학자들에게는 역시 파워풀한 책이다. 공문에서 가장 종교적인 책이니 가장 종교적인 송나라 유학자들과 조선의 골수 성리학자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溫故而知新에서 온(溫)은 '따뜻할 온'이다. 그 뜻을 알기 위해서는 온(溫)이 '따뜻하게 데우다'란 뜻임을 알아야 이야기가 풀린다. 식은 술을 따뜻하게 데우듯 식은 옛것을 붙잡고 다시 읽고 익혀 복습함을 말한다. 온고이지신은 논어 위정편(이 블로그의 논어 14)에 나왔던 말이다. 공자의 말이다.(子曰: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 - 공자 말했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면 가히 스승이 될 수 있다)
인용된 시경구절은 시경 대아(大雅)의 증민(蒸民)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증민은 상당히 긴 시인데 위의 구절은 중간부분에 나온다. 중산보(仲山甫)라는 주나라 선왕(宣王)때의 현명한 대부를 칭송하는 시이다. 읽어보면 그리 잘 들어맞는 시도 역시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서에서 인용하는 시들은 정말 겉으로 비슷하기만 하면 맥락이 잘 맞지 않아도 아무렇게나 가지고 온다.
<한자>
倍(곱 배) : 곱, 갑절, 더하다, 배가하다, 모시다, 등지다, 배반하다, 위배하다
足以(족이) : ~하기에 족하다,
以(써 이) : ~로써, ~에게, ~에, ~때문에, ~위하여, 하고(접속사)
其(그 기) : 그, 그것, 아마도, 만약, 어찌, 이미, 이에
與(줄 여) : 주다, 함께하다, 참여하다, ~와, ~인가? ~이구나, ~라면
<영역>
Therefore, the superior man honors his virtuous nature, and maintains constant inquiry and study, seeking to carry it out to its breadth and greatness, so as to omit none of the more exquisite and minute points which it embraces, and to raise it to its greatest height and brilliancy, so as to pursue the course of the Mean. He cherishes his old knowledge, and is continually acquiring new. He exerts an honest, generous earnestness, in the esteem and practice of all propriety.
Thus, when occupying a high situation he is not proud, and in a low situation he is not insubordinate. When the kingdom is well governed, he is sure by his words to rise; and when it is ill governed, he is sure by his silence to command forbearance to himself. Is not this what we find in the Book of Poetry,-"Intelligent is he and prudent, and so preserves his per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