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애국가 원조를 찾을 수 있는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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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7. 03:53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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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애국가
원조를 찾을 수 있는 '애국가'
요약 1895년 창덕궁에서 '국가의 주권을 굳건히 하자'는 취지의 원유회에서 불린 것이 최초의 애국가.
유길준이 작사, 곡조는 창가조. 현재 가사는 12절까지 알려져 있음.
이후 무수하게 보이는 애국가는 다양하지만 주제는 오로지 한 가지, 애국.
열강의 간섭으로 나라가 위기일 때부터 지금까지 애국가의 맥이 이어지고 있음.
우리가 지금 국가로 부르고 있는 노래의 제목 '애국가'는 원래 국가로 지정되면서 붙여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같은 제목으로 불려지고 알려진 수많은 '애국가'들 중 하나이며, 안익태도 그렇게 알려진 가사에 곡을 붙임으로써 지금 국가로 불려지고 있는 '애국가' 곡조가 된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애국가'를 불렀다는 기록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독립신문>이나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는 누가 또는 어느 단체에서, 무슨 일이 있을 때 '애국가'를 불렀다는 기사와 함게 그 가사까지 실려 있다.
열강의 간섭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여론을 주도했던 이런 신문들이 '애국가'에 이토록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그것이 단합을 이루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제목부터 신문이 강조하고 있던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애국가'는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에 의해 불려지기도 했고, 시위연대 군악대에서도 공식행사에서 '애국가'를 연주했다. 간도에 있던 독립군 간부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에서도 조례식 때마다 '애국가'를 제창했다. 일본에 있던 유학생들, 하와이 교포들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단체 등에서도 행사가 있으면 '애국가'를 불렀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창간하면서부터 독자가 보내온 '애국가' 가사를 실었다. 가사 앞에는 반드시 어디 사는 누가 보낸 것이라고 밝혔는데, 예를 들면 '인천 제물포 전경택 애국가'라 한 것이 그것이다. '애국가'는 기독교의 찬송가집 속에서도 발견되었고, 일본측의 기밀문서 속에서도 발견되었다.
'애국가'는 무수한 종류로 불려진 것이다. 그런 '애국가' 중에서 최초로 불려진 것으로 알려진 것은 1895년 창덕궁에서 있었던 원유회에서 불려진 창가이다. 이해 5월 14일 창덕궁 연경당에서 당시 내부협판이었던 구당 유길준이 주도한 모임이 있었다. 때는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이 세력 확장을 위해 치열하게 다투고 있을 때였다. 연경당에서의 원유회는 그런 시기에 국가의 주권을 굳건히 하자는 의도로 열린 것이었다. 그래서 그 명칭도 '독립 경축 원유회'라 했다. 그런데 이 모임에서 '애국가'라는 명칭이 붙은 기념가라 불려진 것이었다. 유길준이 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때 '애국가'의 곡조는 당시 노래가 다 그랬듯이 창가조였을 것이다. 현재 그 가사는 12절까지 알려져 있는데 몇 절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받들어라 받들어라 우리 황제를 받들어라
2. 빛내어라 빛내어라 우리 나라를 빛내어라
5. 만세 만세 만만세 우리 대한 만만세
6. 장백산 높다 한들 비교를 해보라
우리 국민의 기개와 비교해보면 낮기만 한 저 산
7. 동해물 깊다 한들 비교해보라
우리 국민의 마음과 비교해보면 얕기만 한 저 물
이후 무수하게 보이는 '애국가'는 내용도 다양하고 곡도 여러 종류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그들의 애국심을 '애국가'라는 제목으로 표현하여 신문에도 싣고, 잡지에도 실었으며, 외국의 곡을 빌려 부르기도 한 것이다.
주제는 오로지 한 가지, 애국이었다. 그래서 제목이 '애국가'였으며, 작자와 내용이 달라도 주제만은 어디에서나 같았다. 그 전통을 창덕궁에서의 '애국가'는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최초의 '애국가'에서 지금의 '애국가'에 이르기까지 그 가사에 하나의 맥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다름아닌 주제를 살리기 위해 자주 사용된 어휘이다. 백두산·동해·만세·대한·무궁화·하느님 등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어휘들이다. 거기에 보우·보전·길이·하세 등이 일관된 맥으로서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이는 '애국가'의 가사를 누가 지었느냐 하는 점을 생각케 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애국가'는 초기에는 작자가 분명했지만 일제시대로 오면서 작자 표기가 없어진 채 불려지다가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50년대 초 브리태니커에서 우리 정부에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냐고 문의해온 적이 있다. 그때 광범위하게 그 작사자를 찾은 적이 있는데 거명된 사람은 안창호·윤치호·민영환 등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애국가'의 작사자는 찾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애국가'는 질곡의 세월을 견뎌오면서 누군가 덧붙이고 고치고 바꾸다가 지금의 '애국가'로 정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그곳에는 미중이라는 작사자가 분명히 보이는 것이다.
이렇듯 창덕궁에서의 '애국가'가 지금의 '애국가'로 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애국가 - 원조를 찾을 수 있는 '애국가' (한국 최초 101장면, 1998. 9. 10., 김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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