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1326DD504F76622D02)
손상기 자화상
![](https://t1.daumcdn.net/cfile/cafe/13648B504F76622E3D)
항구도시 어시장 / 121*121 캔버스에 유채 1977
<항구도시(어시장)>(1977)은 그가 대학교 4학년 때 제작한 작품으로 전국적 규모의 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수상함으로써 작업의 자신감을 가졌던 시기이다. 미묘한 색채의 조화를 바탕으로 그가 보았던 항구의 풍경과 사물을 인상주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감을 중첩하였음에도 투명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그가 초기에 몰두했던 수채화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한편 여수는 한국근대사에 있어 이념적으로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충돌의 현장으로, 그가 직·간접적으로 이러한 역사적 비극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역사적 고통과 신체적 굴레의 공간을 풍부한 햇살과 맑은 대기를 가진 아름다운 풍경으로 승화시켜 표현한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725A504F76622E32)
족보(사람들) / 145*112 캔버스에 유채 1978
![](https://t1.daumcdn.net/cfile/cafe/122798504F76622F01)
고뇌하는 나무(향곡) / 145*112 면 캔버스에 유채 1979
<고뇌하는 나무(향곡)>(1979)은 <자라지 않는 나무>(1976)와 함께 나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과도 같은 작품이다. 어린 시절 사고로 인해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작가의 신체적 불구는 그의 인생을 크게 좌우하는 중요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불구의 숙명을 그는 작품을 통해 극복하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나무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음산한 도시 속에 누구도 돌보지 않은 채, 홀로 서 있는 나무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정진하기 위한 인고의 작업을 반영하고 있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나무가 삶의 비극 혹은 슬픔을 떨치고 일어나려는 고뇌의 시간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손상기는 표현하는 모든 대상 속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무> 연작은 작가에 대한 연구에 있어 중요한 주제이다. 이후 그는 도시 풍경 속에 나무가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공작도시>와 <나무> 연작이 자연스럽게 결합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6D26504F76622F30)
공작도시-길Ⅳ / 145*112 면 캔버스에 유채 1980
![](https://t1.daumcdn.net/cfile/cafe/1324E8504F76623004)
난지도 / 181.5*226 캔버스에 유채, 콜라쥬 1982
난지도는 도시로부터 배출되어 현실과 격리된 존재들이 가득 찬 공간으로써 뿌리 뽑힌 존재들의 척박한 삶의 현장이자 가난의 굴레를 의미하는 공간이다.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초라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인간이 배제되고 무계획적으로 조성된 엉성하고 초라한, 얼기설기 들어선 판자집들처럼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쓰레기처럼, 구체적인 형상을 띠지 않는 화면이 더욱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면의 분할로 이루어진 화면은 다양한 시점을 도입하여 속도감 넘친 필치만큼이나 자유롭게 구성되었다. 또한 <난지도>는 속도감 있는 붓질과 나이프로 물감을 덧칠하고 긁어내기를 반복한 결과 독특한 마티에르(Matière)를 얻게 되었으며 이는 화면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화면 상단 오른편에 보이는 글자는 신문지를 콜라주(Collage)하여 새로운 표현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난지도>를 통해 나타나는 삶에 대한 진솔한 시각은 그의 작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것으로 당초 고향 여수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서울로 상경한 이후 도시 주변부의 삶으로 전환되었다가 점차 사회 전체의 문제로까지 확대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작가는 단지 개인의 불행을 그림으로 치유, 극복한 것을 뛰어넘어 우리 사회의 불구를 증언하고 있는 한 시대의 증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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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사후 삼일 / 73*61 캔버스에 유채 1980
![](https://t1.daumcdn.net/cfile/cafe/132D0A384F7662313D)
공작도시(쇼윈도) / 145*112 캔버스에 유채 1981
손상기(孫祥基 1949∼1988)의 예술혼을 기리는 인터넷 홈페이지(www.sonsangki.com) 개설을 축하한다. 스승의 높은 은혜에 보답하려는 제자 심향진 님의 따뜻한 마음이 손상기 화백의 숨결에 성큼 다가설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활짝 열어놓았다. 심향진 님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손상기 화백의 영혼 앞에 서고 보니, 불현듯 그와 맺은 짧은 인연의 순간순간, 그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나는 1980년 대학시절, 서울 아현동에서 화가 손상기를 처음 만났다. 그 시절 아현동과 이화여대 입구에 이르는 지역은 미대생들과 젊은 작가들의 아틀리에가 밀집해 있었던 이른바 ‘화실촌(畵室村)’. 이 화실은 주인의 작업 공간이자 생활 공간이어서 취미생이나 알음알음의 수강생들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곳이다. 관인 입시학원과 달리 어딘가 인간미가 흐르던 곳. 손상기는 아현동 굴레방 다리 바로 밑에서 ‘서울화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 역시 아현동에서 누나와 함께 ‘꾸꾸 화실’이라는 살림집 겸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동네 마산식당에서 식당 주인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워낙 눈에 띠는 신체 특성(척추만곡)…, 손상기는 당시 30을 갓 넘긴 청년작가였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일류대학에 다닌답시고 10년 위 정도는 아예 경쟁자로 취급하려는 ‘용기’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손상기 예술의 광채는 그때부터 이미 빛나고 있었다.
손상기의 존재는 대학 선생님을 제외하고 내가 만났던 가장 본격적인 화가였다. 그에 대한 나의 경쟁 의식은 손상기 화실을 방문하고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굴레방 다리 밑, 삐거덕 소리나는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면 손상기의 화실이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 그곳에서 보았던 자화상 연필 스케치, ‘공작 도시’시리즈, 수채화로 그린 고향 여수의 항구 풍경….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흰 피부의 젊고 예쁜 부인…, 알 수 없는 어떤 불안감…. 그러나 80년 서울의 봄에 이은 정치 군인의 민중 압살, 그리고 5월 광주의 피의 항쟁, 오랜 휴교령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 나의 아현동 시절도 1년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이듬해 1981년 나는 손상기 화백의 첫 개인전 소식을 신문지상의 큰 기사로 대면했다. 그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거 봐! 내 눈이 정확하잖아!' 나는 몇 번이나 혼자말로 외쳐댔다. 화가 손상기는 바야흐로 화단의 ‘문제작가'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나는 대학졸업 후 손상기를 다시 만났다. 이젠 미술기자가 되었다. 그림을 그만 둔 나에게 손상기와의‘경쟁’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이 무렵 손상기는 화랑가에 진입하기 시작한다. 상업적 예술적 성공의 길을 차곡차곡 쌓아 가면 갈수록 그의 몸과 마음은 더욱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나와 꽤나 친하게 지내면서도 작품에 대한 고민은 토로할지언정 그 흔한 청탁 한번 해 본적 없었다. 키가 140cm를 겨우 넘었으니 보통 사람의 가슴팍에도 미치지 않는 자신의 눈높이대로 욕심 없이 담담하게 살아가려 했으리라.
내가 마포 작업실을 찾았던 것은 손상기가 죽음을 몇 개월 남겨두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말년의 손상기 작품은 초기에 비해 색채가 매우 밝았다. 그 날 손상기는 평소와 다른 말을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나도 이제 40을 앞두고 있다. 《계간미술》 같은 잡지에서 내 예술세계를 조명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 역시 손상기 화백이 충분히 그럴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며 기회를 마련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손상기의 숨소리는 더욱 거칠고 빨라져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불혹(不惑)에도 이르지 못한 참으로 안타까운 나이였다.
나는 손상기의 조그만 판화 한 점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판화와 드로잉 전시를 동시에 열었을 때, 부담 없는 선물이라고 건네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 판화 작품엔 작가의 사인이 들어 있지 않다. 그가 왜 사인을 안 해 주었는지 알 수 없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잡지에 실으려고 받아둔 손상기의 미발표 원고도 어느 박스엔가 잘 보관하고 있다. 꽤나 슬픈 글이다. 손상기 화백은 생전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표현하는 것은/꼭 그리지 않으면 안될 필연적인 나의 모습이고/즉 상실이 빚은 어둠 속에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며/어떤 것에서 헤어나기 위해 고함지르는/나의 모습인 것이다.
인터넷 화면에 올라 있는 손상기 화백의 얼굴 사진을 보고는 뭔가 가슴에 끓어오르는 감정이 있어 이 글을 시작했다. 자칫 고인에게 폐가 되는 일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나보다 훨씬 가깝게 지내던 분들이 많을 텐데, 그 분들의 시선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나는 손상기 화백을 두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손상기의 강렬한 눈빛에서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았다. 손상기의 따뜻한 미소 속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한 예술가의 맑은 마음을 읽었다. 그리고 손상기의 튀어나온 가슴과 등에서 불구의 몸을 숙명으로 견뎌온 예술가의 한의 응어리를 엿보았다.
김복기 / art in culture 발행인 겸 편집인
첫댓글 한국의 로트렉...작품들을 많이 보진 못했지만 천재 화가죠~
자화상이 강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