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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ild a Dream Nest
‘코리안 탱크’, 최경주의 리얼 성공 스토리
최경주와의 인연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박2일간의 동행 취재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프로골프협회 KPGA투어 3승을 거둔 최경주는 이듬해 미국 진출을 앞두고 박만용 회장의 주최로 후원의 밤 행사를 가졌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그때 받은 씨앗을 ‘최경주재단(이사장 피홍배, 최경주)’이라는 커다란 나무로 키웠고, 재단은 더 큰 숲을 가꾸기 위해 ‘꿈의 둥지 프로젝트 Build A Dream Nest’라는 기치를 높이 들었다. 지난 10월8일 <코리안 탱크, 최경주>라는 타이틀의 자서전을 출간한 그를 만나 그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얘기를 들어보았다.
인터뷰_장수진
<골프 다이제스트> : 40대 중반인데, 자서전을 내겠다고 결심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최경주 : 2006년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와의 대담 중 자서전 출간을 제안 받았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왔다. 개인적으로는 메이저 대회 우승에 대한 꿈을 실현한 후 출간하고 싶었기에 차일피일 미루다 하 목사가 돌아가셨다. 작년 플레이어스챔피언십 우승 후 골똘히 생각한 결과 이제는 정리해서 약속을 지켜야겠구나 싶었다.
추천의 글을 잭 니클러스에게서 받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나는 그의 책 <골프 마이 웨이 Golf My Way>를 읽고, 비디오를 보면서 골프를 배웠다. 그리고 그가 주최한 메모리얼토너먼트와는 인연이 깊다. 미국PGA투어 첫 출전 대회도 99년 메모리얼토너먼트였고, 2007년엔 우승하기도 했다. 책 출간을 앞두고 연락했더니 흔쾌히 추천사를 주셨다.
책을 출간한 시기가 의외다. 올해는 PGA투어 우승 이슈도 없고, 조금은 흥행과 거리가 먼 시점 아닌가?
우승 후 책을 냈다면 더 반향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올해는 작년에 비해 성적이 안 나온 것이 사실이다. 심리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 책을 쓰면서 느낀 것은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되었으면 하면 바람에서 책을 썼다.
책의 주요 내용은 무엇인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내 얘기를 담았다. 어찌보면 내 자랑 같기도 하지만(웃음), 현실이기에 썼다. 어떤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경지에 도달할 만큼 해야 하는데, 나는 훈련을 통해 느낀 것이 있다. 극도의 훈련을 하며 치열한 시간을 보냈던 미국 진출 초기, 나를 위로해주거나 인도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루 8시간 연습량을 채우며 아무도 봐주지 않는 외로운 시간을 버텨내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지만, 그런 훈련 단계를 극복하도록 지켜주는 분이 하나님이었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밑바닥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이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를 했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필요한데, 그런 근성이 부족하지 않나? 자질과 실력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지, 타고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몸을 가졌다 하더라도 연습 단계에서 훈련으로 가지 않으면 내 것으로 만들 수 없고 나중에 즐길 수 없다. 나의 그런 모든 과정을 책에 담았다.
골프를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이해가 될 만큼 얘기가 조리 있다. 평소 독서 습관이 영향을 준 것인가?
내 얘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니 참 다행이다. 미국투어를 준비할 때 5년 계획을 세웠었다. 아내와 대화를 하면서 알고 있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을 구분했고, 둘이서 합동해 생각을 많이 정리했다. 시골 출신이고, 운동을 하다 보니 책을 접할 기회는 많이 없었다. 하지만 2년 전에 책을 읽기 시작해 2주에 한 권씩, 50주 동안 25권을 읽자고 마음 먹었다. 책 한 권 당 한 장씩만 내 것으로 만들자는 심정으로 읽었는데 아내가 글 솜씨가 좋고 인터뷰 모니터링을 통해 반복 수정하다보니 조리 있게 들린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다보니 해야 할 얘기와 하지 말아야 할 얘기를 잘 구분하는 것도 말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책을 통해 얻은 지식과 완도에서 살면서 느낀 것을 솔직하게 얘기하니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우승(CJ인비테이셔널) 했다.
본의 아니게 내 이름을 건 대회에서 연속 2회 모두 우승했다. 내 이름의 대회였지만 나 역시 출전자로서 대회를 즐겼다. 우승을 하겠다고 달려든 것이 아니라 그동안 훈련했던 것을 마음 속으로 정리하면서 한 샷 한 샷 정리해갔다. 배상문이 2타 앞섰을 때 ‘이번 주는 후배가 우승하겠구나’ 싶었고, 나는 내 골프만 했다.
이번 책은 그동안 최경주를 있게 한 많은 이들에 대한 헌정서 같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후원해주셨던 많은 분들, 캐디 앤디 프로저, IMG 임만성 매니저와 이정한 사장, 스폰서 등에 대한 에피소드와 감사가 꼼꼼히 잘 적혀 있다. 원고가 완성되었을 때 기분은 어떠했고 가장 먼저 보여준 이는 누구이며, 어떤 평가를 받았나?
먼저 얘기할 것이 있다. 이 책은 나만의 책이 아니다. 실제로 내 생활을 얘기한 것을 작가들이 전체적인 뼈대를 세웠고, 아내가 중간중간에 점검해주었다. 혼자만의 책이 아니라는 것은 이 책을 쓰면서 알았다. 자서전이라는 표현보다는 인간 최경주가 그동안 걸어왔던 것을 정리하고 전달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인생을 종합해서 펴낸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것이 책의 목적이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 정말 뿌듯했다. 하 목사님이 계시지 않아 아쉬웠지만, 울지는 않았다. 제일 처음 나온 책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아내에게 선물했다.
자질과 실력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지, 타고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몸을 가졌다 하더라도 연습 단계에서 훈련으로 가지 않으면
내 것으로 만들 수 없고 나중에 즐길 수 없다.
나의 그런 모든 과정을 책에 담았다.
<실패가 나를 키운다, 코리안 탱크 최경주>에서 발췌한 그의 말말말
골프클럽으로 볼을 때리면 볼이 빨랫줄처럼 쭉 뻗어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뱅그르르’ 돌면서 날아간다. 좋은 성적을 내려면 회전에 따라 휘어지는 걸 감안해서 칠 줄 알아야 한다.
볼은 절대로 똑바로 날아가지 않는다. 이것이 볼의 진실이다. 그러니까 볼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다고 해서 실패라고 단정지을 필요가 없다. 실수를 하더라도 위기관리 능력을 배우는 기회로 삼는다면 오히려 뭔가를 얻게 된다. 마침내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은 내 마음대로 날아가 주지 않는 볼과 어처구니없는 실수에서 나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슬럼프라는 표현은 절대로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슬럼프라는 딱지를 갖다 붙여 줄 뿐이다. 스스로 슬럼프를 만드는 운동 선수는 없다. 주변에서 차려 주는 슬럼프라는 밥상을 위로인 줄 알고 넙죽 받아먹는 게 문제다. 그러고는 ‘그래, 슬럼프라잖아. 어쩔 수 없는 거지’라는 생각에 빠져서 탈이 나는 것이다. 어떻게 늘 최고를 달릴 수 있겠는가? 계속 정점만 찍을 수는 없다. 인생은 점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신체 조건에 있어서 타이거 우즈는 내가 ‘오르지 못할 나무’다.
하지만 나한테는 그에게 없는 것이 있다. 미국의 어느 기자가 “신이 타이거 우즈를 선택했다면 최경주는 신을 감동시켰다”면서 내가 타이거 우즈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극찬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이다. 그래서 우리는 1대1이다.
엄청난 연습량 덕에 골프를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78타를 기록했다.
골프는 스코어다. 18홀 성적을 모두 합한 숫자로 평가된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곧 18홀을 다 마치기 전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볼을 아무리 멀리 쳐도 그것이 스코어카드에 올라가지는 않는다. 첫 타를 실수해도 꼭 보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한 타 한 타 정성을 다해 마지막 홀인까지 해야 비로소 스코어가 정해진다. 그러니 들뜰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이 끝까지 꾸준하게 해야 하고, 실수를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솔직히 나쁜 남자에 속하는 편 아닌가?
맞다. 연애시절 연습할 때 방해가 된다 싶으면 찾아오지도 못하게 했다. 결혼 후에도 철저히 내 위주로 생활했고 산후 조리조차 혼자 하게 했다. 하지만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는 내 곁에서 나를 돕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믿고 결혼했다고 했다. 신혼 초 잠자리에 든 내 발 밑에서 두 엄지 발가락을 붙잡고 기도했다. 누워 기도 받으려니 민망했고 다음 날에는 다리를 펴고 앉아 기도를 받았다. 아내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여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내가 뭐라고 이 사람이 날 위해 이렇게 기도하나?’ 싶었다. 그래서 다음날 발가락 대신 손을 내밀었고 마주 보고 앉아 손을 잡고 기도하게 됐다. 그것이 내 진정한 신앙의 시작이다.
아내와 함께 지금의 최경주를 있게 한 또 다른 힘으로 피홍배 회장을 꼽는다고 들었다.
나를 후원해주신 88컨트리클럽 운영위원회 회장으로 인연이 되었고 벽에 부딪힌 것처럼 답답한 마음이 들 때는 내 손에 장대를 쥐어주고 “네 힘으로 뛰어넘어라”라고 채찍질하셨고, 장대를 쥘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막막할 때는 “내가 붙잡아 줄 테니 어서 넘어가거라”하고 등을 떠미셨다. 07년 노무현 전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에 피 회장님을 모시고 간 적이 있는데 “부자지간에 왜 성이 다르냐?”고 물으셨다. 나는 주저 없이 “저를 낳아 길러 주신 아버지는 완도에 계시고, 이분은 지금의 제가 되기까지 키워주신 분이니 제 아버지입니다”라고 소개했다.
후원 덕분에 미국으로 갔고, 98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 라노에서 열린 퀄리파잉 Q스쿨에 도전장을 냈다. 1차 예선전에서 탈락했을 때의 심경은?
충격이었다. 철저하게 준비한 만큼 잘 해낼 자신이 있었는데 결과가 참담했다. 하지만 원인부터 분석했다. 먼저, 터프한 러프가 문제였다. 빠지면 한 타만에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빠지지 않으려면 샷의 정확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결국 연습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다음은 한국과 다른 미국의 코스 길이가 문제다. 당시 290야드를 날리는 장타자인 나였지만 매 라운드, 매 홀 장타를 유지하려면 체력을 보강해서 비거리를 늘리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국보다 빠른 그린 스피드가 문제였다. 5배는 빨랐다. 역시 빠른 그린에 적응하는 연습을 더 많이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비제이 싱도 인정한 연습벌레 최경주의 연습 루틴을 알려준다면?
대회에 참가하지 않을 때 나의 훈련 루틴을 소개하면, 먼저 연습장에 도착해서 가장 짧은 클럽인 로브웨지부터 시작해서 20개 정도 풀 스윙으로 치고 똑같이 샌드웨지 풀 스윙을 하고 9번, 8번 아이언 순으로 드라이버까지 순차적으로 친다. 끝나면 다시 드라이버로부터 로브웨지까지 같은 방식으로 풀 스윙을 반복한다. 이렇게 하고 나면 볼을 480개 정도 치는 셈인데 여기까지가 기본 루틴이다. 대회에 출전했을 때는 같은 방법으로 치되, 치는 볼의 개수를 클럽 당 5개에서 10개 사이로 대폭 줄인다. 그리고 훈련에 돌입하는데 각 클럽마다 스윙 동작이 근육에 다 입력될 때까지 한다. 그래서 하루 종일 벙커 샷만 할 때가 있고, 또 10야드부터 120야드 칩 샷 훈련만 할 때도 있다. 아이언과 우드로 하는 샷은 9가지 기술 훈련이 있다. 즉 볼을 스트레이트로, 훅으로, 슬라이스로 날려 보내면서 각각 낮게, 보통으로, 높게 탄도 조절을 하는 훈련인데 클럽 한 개로 각 기술 샷을 30번씩만 훈련해도 볼을 270개나 치게 된다. 샷 훈련은 방법이 무궁무진하고 그 양도 어마어마해질 수 있다. 그래서 훈련에는 끈기가 필요하다.
연습뿐 아니라 음식 조절에도 탁월하다고 들었다. 아마추어 골퍼에게 건강 관리 노하우를 전수해달라.
캐슈 너트, 아몬드, 호두, 당근, 피망, 아보카도, 양배추, 케윌, 흰 브로콜리, 딸기, 바나나, 산딸기, 블루베리 등을 생으로 넣고 우유와 함께 믹서에 간다. 여기에 콩 10가지 이상을 섞어 만든 선식을 한 스푼 넣고, 아마씨 가루 한 스푼과 채소 5~6가지를 말려서 빻아 만든 식이섬유 분말 한 스푼을 넣어 잘 섞는다. 만들어 놓고 보면 색이며 농도가 꼭 말똥 같은데 냉면 사발로 3분의 2 정도 되는 양을 늘 먹는다. 또한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99년 한국인 최초로 Q스쿨에 합격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Q스쿨 통과 후 잠시 귀국했다가 맨 처음 간 곳은 TPC소우그라스였다. 꼭 한 달 전 ‘NO’라는 소리를 들었던 곳이다. 헤드 프로를 찾아가 당당히 ‘PGA투어 프로’라고 말하고 ‘연습하고 싶다’고 했더니 ‘YES’라고 했다. 세계 20대 코스라며, 직접 시설을 안내하고 이용 방법과 규칙을 상세히 설명해줬다. 플레이어스챔피언십 대회장인 메인 코스와 PGA투어 선수 전용 연습장을 둘러보면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2000년 상금 랭킹 134위로 다시 지옥의 레이스인 Q스쿨에 도전해야만 했었다.
호랑이 굴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됐다. 당시 참가자 169명 중 PGA투어 우승 경험이 있는 선수가 무려 17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2승 이상 올린 프로도 있었다. 호랑이 굴에서 살아나지 못하면 다시 Q스쿨이라는 지옥 문으로 쫓겨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호랑이 굴에서 살아남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호랑이 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타이거 우즈와 서로 욕설을 나누는 사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굿모닝, KJ, XXX!”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면 내가 “한국 사람들이 싫어하니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른다. 타이거는 정말 한국 욕을 잘한다. 스탠퍼드 재학 시절 한국 친구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곧잘 장난 삼아 하는데, 나를 만나면 일부러 더 한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으며 ‘개XX’ 욕을 내뱉는 타이거를 보면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솔직히 친근하게 느껴진다. 타이거는 손이 커서 골프 볼에 사인하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내가 부탁하면 군소리 없이 해주곤 하는데 다들 부러워한다.
타이거 우즈와 한국 속어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진 계기는?
03년 프레지던츠컵에 출전하면서부터다. 팀 대항이기 때문에 같은 팀 선수끼리는 대회 기간 동안에 친해질 수밖에 없었고, 상태 팀 선수와도 농담을 하면서 가까워진다. ‘탱크’라는 별명도 그때 얻었다. 남아공에서 열린 03년 대회 때 게리 플레이어가 내가 속한 인터내셔널 팀의 주장이었고 이안 베이커 핀치가 부 주장이었다. 하루는 이안이 방송 중에 이런 말을 했다. ‘KJ는 탱크처럼 밀어붙이는 저력이 있어서 한번 리드를 잡으면 지는 법이 없다. 이런 동양인 선수는 처음 본다.’ 그때부터 언론이 나를 ‘탱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CBS> 해설가인 닉 팔도는 ‘KJ는 드라이버 샷도 아이언 샷도 그저 그런 선수다. 그렇다고 숏 게임에 강한 것도 아니고, 퍼팅을 잘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우승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가장 잊지 못할 한 해를 꼽는다면?
07년이다. 골프계의 두 황제 잭 니클러스와 타이거 우즈에게서 약 한 달 간격으로 우승 트로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이 주최한 메모리얼토너먼트와 AT&T내셔널은 단순히 최경주의 5승과 6승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이전까지는 나는 ‘우승 몇 번 해본 선수’였지만 황제가 주최해서 팬이 더욱 주목했던 그 대회를 계기로 ‘언제든 우승이 가능한, KJ CHOI’로 인정받게 됐다. 07년 두 번의 우승으로 상금 랭킹 5위까지 상승하고 분위기가 좋았고, 08년 1월 소니오픈에서 7승째를 거두자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3년 동안 우승이 없었다. 원인이 무엇이었나?
몸통이 지나치게 돌아갔다. 적당히 꼬였다가 반동으로 풀어지면서 임팩트에 힘이 실려야 하는데 도대체 끝이 어딘지 모르게 몸이 돌아갔다. 균형을 잃고 힘이 떨어지면서 허리에 통증이 생겼다. 그때 자생한방병원의 척추 클리닉의 도움을 받았고, 1년이 지나자 몸은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클럽이었다. 나는 1그램의 무게도 예민한데, 08년 받은 클럽은 내게 잘 맞지 않았다. 요즘은 아예 집에 장비를 갖추고 직접 클럽을 수리하며 그립도 바꿔 끼운다. 클럽을 연구하는 일이 재미있다. 아무튼 나는 스폰서와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스폰서가 바뀌기 전까지는 장비에 대해서는 덮어두었다. 프로로서 스폰서와의 신의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적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타이거는 정말 한국 욕을 잘한다.
스탠퍼드 재학 시절 한국 친구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곧잘 장난 삼아 하는데, 나를 만나면 일부러 더 한다.
솔직히 친근하게 느껴진다.
긴 공백을 깨고 2011년 플레이어스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했다.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은 대화라고 보는데.
그렇다. 제5의 메이저 대회로 불리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상금 규모가 가장 크고, 미국PGA투어가 직접 주관하는 대회다. 마스터즈는 오거스타내셔널, US오픈은 미국골프협회 USGA, 디오픈은 영국골프협회 R&A, PGA챔피언은 미국프로골프협회 PGA of America가 주관한다. 토너먼트 참가가 직업인 투어 선수에게는 미국골프협회가 아닌, PGA투어가 자신의 소속사인 셈이다. 대회장인 폰테베드라비치의 TPC소우그라스는 미국PGA투어의 본부가 있는 곳이기에 집안 잔치다. 그래서 선수들은 이 대회에서 꼭 우승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대회 우승 후 19억원이라는 상금을 받았다. 미국 토네이도 피해 복구에 상금의 일부를 기부했고 미국인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게 됐다. 당시 나의 기부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희망을 갖는 것을 보며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이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골프 꿈나무를 미국으로 데려와 훈련을 시키고 있다. 무엇이 목표인가?
골프 꿈나무들이 미국 훈련을 오면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오늘 훈련한 내용과 느낌을 A4용지에 적어 봐라.” 순간 아이들이 당황한다. 왜 왔냐고 물으면 “골프를 잘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그냥 가라”고 한다. 나는 그들이 단순히 볼을 잘 치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불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잘 생각하고 생활하고 잘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
삶의 계획을 잘 하는 것 같은데, 어렸을 때부터 목표에 대한 계획이 뚜렷한 편인가?
3년, 5년 단위로 내 목표를 세우고 이를 어겨본 적이 없다. 어쩌면 생각보다 좋은 기록을 가진 것같다. 미국 갈 때 선배들이 ‘가면 죽는다’, ‘시기상조다’ 말렸지만 그런 상황에서 무작정 갔다. 2번의 Q스쿨로 바닥을 쳤고 뜻을 이뤘다. 후배들이 트리플이나 더블 보기를 하면 막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장갑을 벗기 전에 절대 포기해본 적 없다. 그게 태도이고 습관이다. 덕을 보는 경우가 많다. 좋은 습관 들이기는 어려운데 나쁜 습관은 쉽게 밴다.
마흔 중반을 넘어간다.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의 상념은?
나 스스로 나약해지려는 순간에는 마흔이 넘은 나이 탓인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게리 플레이어, 아놀드 파머, 잭 니클러스와 같은 PGA투어 선배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기 때문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본인의 의지가 있고, 체력이 허락하는 한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으며, 정규 투어에서 벌어들인 상금에 시니어투어 상금을 더해 가며 생애 통산 상금을 늘려갈 수 있다. 나는 이제 책임져야 할 식구들이 많아졌다. 가족 뿐 아니라 후원하는 청소년, 재단의 꿈나무, 그리고 세계 곳곳의 팬…. 그들에게 성적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주고 싶고, 그래서 그들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책 인세를 전부 기부한다고 들었다.
‘꿈의 둥지 프로젝트’를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 회사를 미국에 가지고 있지만, 모든 수익이 미국에 왔다 가면 40퍼센트가 세금으로 날아가 버린다. 아예 그런 절차 없이 재단에 순수하게 기부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꿈의 둥지 센터는 러닝 센터와 같다. 몸과 마음 둘 곳이 없어 방황하는 청소년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고, 그 곳에서 내일의 희망을 맘껏 키워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싶다. 우리 재단 많이 가난하다. 많이 도와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