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4일 (화) 촬영.
수원화성박물관.
이곳에서 사도세자의 부마 흥은위 정재화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기간 2021. 12. 14 ~ 2022. 3. 27)
전시를 개최하며.
흥은위 정재화(1754~1790)는 1766년(영조 42)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둘째 딸인 청선공주와 혼인하여
정조의 매제가 되었습니다. 영조의 선택에 의해 조선왕실의 부마가 된 것입니다.
명문대가 영일정씨 출신이며 가사문학의 일인자로 좌의정을 지낸 송강 정철의 8세손입니다.
아들 정의는 수원판관과 화령전령을 지내 수원과의 특별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후손들은 대대로 비장해 오던 흥은위 초상화와 왕실 하사품을 포함한 1천여점의 유물 일체를
2019년 수원시에 기꺼이 기증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정재화 후손들의 아름다운 뜻과 수원시에 기증한 왕실 유물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마련되었습니다. 현존 유일의 왕실부마 전신 초상화와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하고 진귀한 왕실 하사 유물들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임금의 사위, 부마
부마(駙馬)란 임금의 사위를 말한다. 부마는 공주나 옹주와 혼인함에 따라 왕실 인사로서 임금의 최측근이
될 수 있었으나 정작 정치에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부마는 신분은 높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고 벼슬길에도 나아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왕비, 후궁, 종친에 못지않게 부마와 그 가문은 왕실 인척으로서 조선시대 정치, 문화사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부마는 왕실 문화르 주도하기도 했으며, 부마 가문은 정치 실세로서 왕의 후견인 역할도 하였다.
흥은위 정재화 초상, 興恩尉 鄭在和 肖像 / 1780년대, 전체 194.3 x 85.1cm, 화면 135.7 x 69.9cm.
청선공주와 혼례를 올려 부마가 된 흥은위 정재화의 초상이다. 오사모(烏紗帽)에 단령(團領)을 입고 교의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이다. 가슴에는 용문양 바탕에 수 놓은 단학(單鶴) 흉배가 부착되어 있으며, 허리에는
삽금대(鈒金帶)를 두르고 있고, 두 손은 길게 내려뜨려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있다.
둥근 손잡이가 달린 의자에는 호피가 깔려 있고,
발받침대(足座) 위에는 호랑이 얼굴 부분의 호피가 팔자형으로 벌린 신발(양화,兩靴) 사이로 보인다.
안면은 약간 어두운 살색을 기조로 이목구비를 선묘(線描)로 규정하였으며, 골상에서 움푹 들어간 부위에
어두운 색의 음영을 집어넣는 18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묘사법이 보인다.
또한 아랫 입술 밑으로 옅은 살색 선을 한번 더 그려내어 입술 자체의 질감을 표현한 것은 18세기 후반 이후
19세기에 들어 일부에서 유행하는 기법이다.
이 초상화와 유사한 양식을 보여 주는 초상화로는 <신응주 초상,18세기 후반,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채제공 65세 초상, 1784년,미천서원 구장>, <강세황 71세 초상, 1783년, 개인소장>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초상화 모두 족좌대 위 양화(兩靴) 사이에 호랑이 얼굴 부분의 호피가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런 특징적 요소는 1780년대의 일부 초상화에서만 잠깐 나타났다가 1790년대 이후에는 교의에만
호피가 나타날 뿐 발받침대에서는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이 초상화는 178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화가는 미상이다.
하지만 정치하고 섬세한 붓질로 그려진 안면묘사, 실제 자수를 보듯 입체적으로 처리된 흉배와 비단 문양,
호피의 생생한 질감 표현 등은 이 초상화를 그려낸 화가가 단연 초상화의 고수(高手)인 궁중화원으로 판단된다.
명문대가 출신의 흥은위 정재화
선조대의 정승이자 가사문학의 일인자인 송강 정처의 8세손 흥은위 정재화(1754~1790)는 1766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막내딸이자 정조대왕의 여동생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1802)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조선왕실의 백년손님 흥은위 정재화의 출신 가문과 부마 간택 및 혼례 과정을 통해 조선시대의 부마제도를
이해한다.
또한 왕실 부마의 신분을 상징하는 귀중한 유물과
임금이 내린 하사품을 통하여 왕실의 일원으로서 흥은위 정재화의 위상을 살펴본다.
흥은위 정재화(1754~1790.7.10)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의 부마이다. 송강 정철의 8세손으로 아명(兒名)은 정갑대이다.
13세가 되던 1766년(영조 42) 정조의 친여동생 청선군주와 혼인하여 흥은부위(興恩副尉)의 작위를 얻었다.
용모가 준수하고 처신이 신중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1790년(정조 14) 7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홍은위로 추봉되었다.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9.28~1802.7.20)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막내딸이자 정조의 누이동생이다.
세자의 딸이어서 원래 군주(郡主)였으나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공주로 추봉되었다.
1766년(영조42, 영조 73세) 11세에 정재화와 혼례를 올렸으며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1795년(정조 19)
아들 정의(鄭漪)와 함께 수원 화성 행궁에서 펼쳐진 혜경궁홍씨 회갑잔치인 봉수당 진찬연에 참석하였다.
청선군주방 사패교지 / 18세기, 109.5 x 80cm.
청선군주방에 노비를 하사하면서 발급한 문서의 일부이다. 하사한 노비 가운데 청도군에 등록된 노비 12명의
이름이 확인된다. 문서에 찍힌 어보는 '시명지보'이며, 문서의 뒷부분이 멸실되어 있어 정확한 발급 시기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사패교지가 2점이 더 있는데, 모두 청선군주방에 노비를 내려주는 내용이다.
1760년(영조 36) 발급된 시기가 기록된 사패교지도 전하고 있다.
궁방(宮房)은 왕실의 일부였던 궁실(宮室)과 왕실에서 분가한 왕자와 공주 등의 궁가(宮家)를 의미한다.
왕실에서는 왕족의 생활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궁방에 토지와 노비를 비롯한 각종 재물을 지급하였다.
이때 발급된 문서가 사패교지이다. 이처럼 왕실에서 궁방에 내린 사패교지의 실례는 매우 희귀하다.
왕실에서 청선군주를 보살피고자 한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정재화 고신, 鄭在和 告身 / 1767년, 120.1 x 87cm.
1767년(영조 4) 7월 3일 정재화를 순의대부 흥은부위에 임명하는 교지이다.
순의대부는 조선시대 왕녀나 왕세자녀와 혼인한 부마에게 주던 관계(官階)인 의빈계(儀賓階)의 종2품이며,
부위(副尉)는 정3품에 해당한다. 부마는 과거시험 응시와 정치 참여가 법적으로 불가하였기에 부마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관서인 의빈부를 따로 두어 그들에 대한 예우와 생계 등을 관리해 주었다.
기증유물 중 부마에게 내린 이와 같은 문서는 모두 8점이며 부마와 관련된 교지는 그 실례가 매우 드물어
주목되는 유물이다. 흥은위 정재화는 1784년 6월 의빈계 정1품 수록대부에 임명되어 부마에게 주어지는 가장
높은 품계에까지 이르렀음을 기증된 교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마에게 내린 교지나 녹패 등의 문서는 보통의 고문서와 크기와 비교가 안 될 만큼 크다.
정재화 녹패,鄭在和 祿牌 / 1767년, 19.5 x 84.5cm.
1767년(영조 43) 이조에서 임금의 하교를 받들어 순의대부 흥은부위 정재화에게 정해년의 녹봉(祿俸)을
내린다는 내용의 녹패이다. 녹패는 이조나 병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종친 혹은 관원에게 녹과(祿科)를 제정하여
내리는 증서를 말하는 것으로 보수 급여에 관한 문서이다.
해당 녹패에는 1766년 12월 20일과 1767년 1월에서 7월까지 매달 25일 작성된 반록첨지(頒祿籤紙) 8장이 첨부
돼 있다. 지급 날짜 및 지급 물품 수량이 기재돼 있으며 사헌부 감찰 및 광흥창 관원의 확인을 거쳐 발급되었다.
청선군주와 혼인한 정재화는
부마로서 품위 유지와 생계를 위해 국가에서 매년 정해준 녹봉을 정기적으로 지급받았다.
이 문서를 통해 언제 어느 정도의 녹봉이 부마에게 지급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기증된 흥은부위 정재화 녹패는 모두 10점인데.
이와 같이 부마에게 발급된 녹패는 그 사례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사급(賜給)된 녹패에
광흥창에서 녹봉을 지급하는 절차가 확인되는 반록첨지가 붙어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상아홀과 홀 주머니 / 조선후기, 홀 23.3 x 3.9 x 0.8cm.
전체적으로 약간 굽은 상아홀과 홀을 보관하던 누비 비단 주머니다.
홀의 상태도 양호하지만, 홀을 보관하던 주머니의 실례는 극히 드물어 그 가치가 높다. <경국대전> <예전>에
따르면 1품부터 4품 관원은 조복(朝服)에 상아홀, 5품부터 9품 관원은 조복에 목홀(木笏)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홀의 재질로만 보아도 이 집안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정인환, 정재화의 호패 / 1766, 정인환 10.2 x 2.9 x 1cm, 정재화 각패 9.3 x 2.7 x 0.9, 아패 9.7 x 2.7 x 0.8cm
흥은위 정재화의 각패와 아패 2종의 호패이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 재질과 기재 내용이 달랐는데
2품 이상은 상아로 만든 아패, 3품 이하 및 잡과 등제자는 각패, 생원과 진사는 황양목패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각패의 앞면에는 성명과 갑술생(甲戌生)이라는 탄생시기(1754년)만 표기되어 있으나,
아패는 성명 아래 갑술생 병술부직(丙戌付職)이 새겨 있고 그 아래에 낙인이 찍혀있다. 호패를 제작한 병술년은
1766년으로부마가 되면서 제작한 호패임을 알 수 있다. 이들 호패를 보관하던 비단 주머니까지 전하고 있다.
호패는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한 것으로 오늘날 주민등록증과 유사한 신분증이다.
앞면에는 성명과 출생년도 및 과거 합격시기 혹은 관직에 오른 시기가 새겨져 있고, 뒷면은 호패의 발급 시기가
새겨져 있다. 한편 흥은위 정재화와 아버지 정인환의 호패는 짐승의 뿔이나 뼈로 만든 각패이다.
앞면 성명 아래 갑진생, 병술입사 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병술이 새겨져 있다.
갑진은 1724년으로 탄생 년도이고, 병술 곧 1766년 관직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청선군주와 흥은부위 정재화의 혼례 때 선공감 감역에 임명되면서 제작한 호패이다.
영우원 표석 탑본 / 1776년, 전면 215.7 x 78.3cm, 음기 215.2 x 78.1cm.
사도세자의 무덤이었던 영우원 표석 탑본이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생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사도세자의 사당을 경모궁으로, 무덤인 수은묘는 영우원으로 격상시켰다.
정조는 영우원 표석의 글을 친히 짓고 썼다. 표석 전면에는 '조선국 사도 장헌세자 영우원'이라는 큰 전서를,
음기는 해서를 직접 써서 건립하였다.
표석에는 사도세자의 일생과 시호의 추상, 정조 본인을 포함한 가족 관계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고
그중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차녀인 청선군주가 흥은부위 정재화와 혼인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조의 휘(諱,이름)인 '성'자에 피휘지(避諱紙)가 부착되어 있어 주목된다.
영우원 표석은 현존하지 않지만 탑본은 비단으로 꾸민 왕실 장황(표구)으로 된 족자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사도세자의 부마.
사도세자는 혜경궁홍씨와의 사이에서 정조, 청연군주, 청선군주를 두었다. 1762년 28세의 젊은 나이로 짧은
삶을 마감하였으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마자 양주 태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정비하여 영우원이라 하였고, 자신이 직접
짓고 쓴 글을 새겨 표석도 새로 세웠다.
영우원은 재위 13년만인 1789년에 천하명당인 수원부 화산으로 옮겨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로 조성하여
현릉원이라 고쳐 불렀다. 정조는 영우원의 정비와 현륭원 조성 등 사도세자 명예회복 사업에 흥은위 정재화를
사도세자의 자손으로서 적극 참여시켰다.
수원 화산 용주사 /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수원박물관.
현륭원 조성 1년 후 사도세자의 제사를 모시는 왕실원찰 용주사가 창건되었다. 홍살문과 외삼문에 딸린 행랑채
그리고 대웅보전과 호성전 지붕의 양성마루 등 궁궐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특징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진입로부터 용주사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창건 당시 왕실 원찰로서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흥은위 가문과 왕실의 교류.
흥은위 정재화와 청선공주의 장남인 정의(1781~1832)는 1795년 을묘년에 수원 행궁에서 펼쳐진 혜경궁홍씨의
회갑잔치에 어머니 청선공주를 모시고 참석하였다. 또한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관리하는 현륭원령을
지냈고, 수원판관으로 임명되어서는 정조의 영정을 모신 화령전을 관리하는 화령전령도 겸하며 수원과 남다른
인연을 맺었다.
정의는 왕실과 관련된 종척집사(宗戚執事) 등을 지내며 왕실 일워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였고 또한 혜경궁홍씨의
안부를 챙기는 일종의 승후관(承候官) 역할도 톡톡히 하였다. 특히 혜경궁홍씨와 정조 등을 포함한 왕실
인물들과 주고받은 특별한 한글편지를 통해 왕실 가족의 일상과 왕실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정의 호패, 鄭漪 戶牌 / 조선후기, 각패 10.3 x 2.7 x 1.1, 아패 10.9 x 3.0 x 1.3cm,
정의의 호패 중 각패(角牌) 앞면에는 성명과 신축생이라는 탄생시기(1781년)와 갑인입사(甲寅入仕)라는 관직에
오른 시기(1794년)가 표기되어 있다. 아패(牙牌)도 동일한 기록이다. 또한 각패(角牌)의 뒷면에는 '갑인'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낙인이 찍혀 있어 호패의 제작 시기가 1794년임을 알 수 있다.
아패(牙牌)는 뒷면에 '계미'가 새겨져 있어 1823년(순조 23)에 제작한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정의는 정조 말에
돈녕부 직장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순조 초에 수원판관, 동부승지를 거쳐 형조참판까지 지냈다.
그의 이력은 홍직필의 문집인 <매산집> <형조참판정공묘지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의鄭漪 (1781.1.14.~1832. 윤9.3) - 정재화의 아들.
초명은 진명(鎭命)이었으나 정조가 의,漪라는 이름을 내렸고, 자는 순조가 청부(淸夫)라고 지어 주었다.
송강 정철의 9세손으로 아버지는 흥은위 정재화이며, 어머니는 청서농주이다. 15세때 연안김씨 김재상의 딸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음보(蔭補)로 벼슬릴에 올라 순조 초에 감찰을 거쳐 1805년 현륭원령을 지냈다.
이후 1814년(순조 14) 수원판관, 1822년 동부승지, 그 뒤 여주목사를 거쳐 형조참판에 올랐다. 시문과 서화에
뛰어났으며 전고(典故)에 밝았다. 1795년 혜경궁홍씨의 회갑잔치인 봉수당진찬연에 어머니 청선공주와 함께
참석하였고, 현륭원령과 수원판관 겸 화령전령 등을 지내며 수원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정의를 수원판관에 임명하는 고신 / 1814년, 57.8 x 80cm.
1814년(순조 14) 6월 24일 정의를 정3품 통훈대부 행 수원부판관(水原府判官)에 임명하는 교지이다.
뒷면에는 문서작성자인 이리.吏吏 오광흡,吳光洽이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수원판관은 수원유수부에 소속된 종5품 관직이다. 장용외사와 행궁정리사를 겸하는 정2품의 수원유수를 도와
수원유수부의 일반적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벼슬이다.
정의를 수원판관 겸 화령전령으로 임명하는 고신 / 1814년, 57.7 x 77.4cm.
1814년(순조 14) 6월 24일 정의를 정3품 통훈대부 행 수원부판관 겸 화령전령(華寧殿令)에 임명하는 교지이다.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영전影殿으로 1801년(순조1)에 세워졌다.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수원의 현륭원 권역에 건릉이 조성되어 안장되었고,
다음해에 화성행궁 옆에 정조를 기리는 사당인 화령전이 건립되었다.
순조는 정조의 조카인 정의를 수원판관으로 임명하면서 특별히 화령전을 관리 하는 벼슬도 겸하도록 하였다.
건릉 조성의 공로를 인정해 정의를 승급시키는 고신/ 1821년, 67.2 x 88.9cm.
1821년(순조 21) 9월 20일 정의를 정3품 통정대부 행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에 임명하는 교지이다.
도호부사는 종3품 관직이다. 좌측 연호 왼쪽에는 왕의 무덤을 옮길 당시 종척집사를 담당하였으므로
가자,加資(승급)한다는 내용이 기재 되어있다.
1821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1800년 처음 현륭원 권역 동쪽 언덕에 조성된 정조의 건릉을 서쪽으로 옮겨 함께 합장릉을 조성하였다.
왕실의 인척으로서 정의는 이 일에 참여하였고, 그 공로로 품계를 올려 받았다.
정의 교첩 / 1795년, 52.3 x 72.2cm.
1795년(정조19) 1월 이조에서 발급한 것으로 정의(1781~1832)를 무공랑務功郞 행 돈녕부敦寧不 직장直長으로
임명하는 교첩이다. 무공량은 정7품이고, 직장은 종7품 관직이다.
돈녕부는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을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경모궁(사도세자)에 존호를 추가로 올릴 때 정의가 욕석집사褥席執事를 수행했기 때문에 그 보상에 따라
자급을 올려 준다는 발급 사유가 문서 말미에 기록되어 있다.
정조는 1795년 윤2월에 있을 혜경궁홍씨의 회갑연과 현륭원 참배를 위한 수원행차에 앞서 1월 17일에 살아
있다면 회갑을 맞이하였을 사도세자에 대한 존호를 올리면서 경사스러운 해의 첫 기념행사를 시작하였다.
이때 사도세자의 외손자인 정의를 욕석집사로 참여시켰다.
정의 교첩,鄭漪 敎牒 / 1767년, 19.5 x 84.5cm.
1805년(순조5) 4월 28일 이조에서 사헌부 감찰이던 정의를 종5품 봉직랑奉直郞 현륭원령에 임명하는 교첩이다.
'현륭원'은 수원 화산에 조성된 사도세자의 무덤이고, '령令'은 그 소속 관원으로 종5품 관직이다.
그리고 정의와 사도세자는 외손자와 외할아버지 관계이다. 뒷면에는 이 문서를 쓴 이리 오중창이 기재되어 있다.
정의는 1805년4월 28일부터 10월 28일까지 현륭원령을 지냈다.
기증유물 중 현륭원령으로 임명된 교첩은 이 문서를 포함하여 모두 4점이 있다.
령令은 역대 왕과 왕후의 능실陵室 및 진전眞殿 등에 설치되었다.
특히 경기전, 선원전, 영희전 등의 여러 전과 건원릉 등의 능, 현륭원, 휘경원 등의 원에 속한 령은
종9품 참봉을 지휘하면서 궁, 묘, 전, 능, 원의 관리를 맡아 보았다.
사도세자의 외손자 정의는 현륭원령을 맡으며 수원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흥은위 정재화 가문의 한글편지
기증된 한글편지는 모두 151편인데 이중 혜경궁홍씨, 정조, 효의왕후, 청연군주 등의 왕실 인물과 주고받은
편지는 140여통이 넘는다. 왕실 가족들의 일상과 왕실 문화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또한 부마의 아들 정의와 혜경궁홍씨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는 55편이다.
대부분 외손자 정의가 외할머니 혜경궁홍씨에게 보낸 문안 편지다.
혜경궁홍씨는 정의가 보낸 편지의 여백에 답장을 써 보냈다. 이러한 사례는 극히 드문 경우로 특히 주목된다.
외손자와 외할머니 사이의 훈훈한 사연에서부터
궁궐의 웃어른과 궁궐 밖의 신하로서의 공적인 사연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어 매우 흥미롭다.
특히 외손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손자가 태어난 시간에 맞춰 일어나
축원하는 마음을 담아 직접 쓴 편지는 외할머니의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져 감동적이다.
혜경궁홍씨가 정의에게 생일을 축하하며 보낸 편지 / 1790년, 11.5 x 37.1cm.
1790년 1월 14일 혜경궁홍씨가 외손자 정의의 열살 생일에 보낸 축하 편지이다.
외손자가 건강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남부끄럽지 않게 성장하여 어머니인 청선공주에게 효도하고
가문의 자랑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축원을 전하고 있다.
외할머니로 혜경궁홍씨의 사랑은 외손자가 태어나던 시간에 맞춰 일어나 편지를 쓰는 행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외손자에게 주는 생일선물마다
그 의미를 전하고 있는데, 외할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
해석.
하루 사이 잘 지내느냐? 오늘은 네 생일이니 어느새 열살을 넘었으니 어른이 다 된듯 다행하기 이를 것 없다.
오직 너를 위하여 축원하기는, 무병장수하고 학문이 진취하고 덕행이 탁월하여 금옥의 견고함과 큰 선비의
이름을 얻어 입신성취에 남부끄럽지 아니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네 어미의 귀에 들려 효도를 이루어,
착한 아들을 낳은 어진 어머니의 이름을 네 어미에게 들리게 하고, 모자가 백세 장수하여
어머니는 아들을 의지하여 온갖 복을 받고 아들은 어머니를 우러러 지극한 효도로 공양하여 태평 안락에
자손이 면면히 이어져 정송강(정철) 가문을 일으켜 세운다고 하니 기쁘다.
오늘날 너를 생각하고 축원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밤새 잠을 이루지못하고 네가 태어나던 시간에 앉아
이 편지를 쓰니 늙은 외조모의 지극한 축원을 네 몸에 간직하여라.
섭섭하여 면포 1필, 명주 1필, 솜 5근 보낸다. 솜은 꽃이니 네 몸에 입어 만복이 오게 하려는 덕담이고,
필묵과 편지지가 가니 갈수록 글 잘하고, 대나무 그릇에 담아주니 대나무는 군자의 높은 절개로 비기니
그처럼 높고 굳은 사람이 되어라. 찬합 탕 한그릇 보내니 즉시 먹고,
국수는 길게 장수하라는 뜻으로 먹게 보내니 즉시 먹어라. 할미가 말 많은 것을 웃어라.
정의가 혜경궁홍씨의 생신을 축하드리며 주고받은 편지 / 1804년, 20.7 x 36.8cm.
정의가 외할머니 혜경궁홍씨의 생신을 축하드리며 주고받은 편지이다.
"오늘은 할마마마의 탄일이시고 대전의 탄일이시니"라는 구절은
혜경궁홍씨와 순조의 생일이 6월 18일로 같은 날이라서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이다.
이어 정의는 어머니 청선공주의 상중이라 지난 2년간 혜경궁홍씨에게 친히 문안을 드리지 못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혜경궁홍씨가 답신에서 "기쁘고 다행스럽고 경사로우나 내 마음 어떻다 하리"라고 쓴 것도,
자신과 순조의 탄생일을 맞아 기쁘면서도
딸 청선공주의 삼년상으로 인하여 슬픈 심정의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해석
어제 내려보내신 답서는 축수하고 축수해 하오며 밤사이 옥후와 주무시는 일과 기거동작이 두루 평안하신
문안 알고자 바라오며, 오늘은 할마마마의 탄일이시고 대전大殿(순조)의 탄일이시니
이때 할마마마의 마음이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우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심이 얼마나 측량 없으시랴.
저의 마음도 손을 모아 기뻐하며 축하함을 어찌 더 형용하여 아뢰겠습니까마는, 요즈음 두 해에 연하여 문안을
친히 드리지 못하고 그리워할 정도로 정이 맺어진 저의 마음이 오늘날 더욱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지낼 뿐이
오며, 원동園洞에서는 시위하여 지내시니 든든하고 가득한 것이 우러러 뵙는 듯해 하오며, 밤사이
문안 자세히 알고자 축수하고 축수해 하고 아뢸 말씀 하감하심(수고로이 보실 일) 황공하여 이만 아룁니다.
소인 정의 올림.
편지 반기며 오늘이 대전(임금,순조)의 탄일이시니 기쁘고 다행스럽고 경사로우나 내 마음 어떻다하리.
나는 한결같이 지낸다. 너도 못 보니 더 어떠하리. 수수하여 이만 적는다. (우측 혜경궁홍씨의 답서)
정조가 청선공주에게 보낸 편지 / 1790년대, 32.5 x 50cm.
그사이 계속 잘 지내느냐? 본 지 오래니 섭섭하다.
나는 더위 기운으로 인해 앓고 지낸다.
안부 알고자 잠깐 적는다.
효의왕후가 연안김씨에게 보낸 편지 / 1809년, 22.7 x 36.0cm.
1809년 11월 22일 정조의 비 효의왕후가 시외조카며느리인 정의의 아내 연안김씨에게 보낸 편지이다.
문안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추위에 평안하다니 다행이라는 인사와 함께 대궐 소식을 전하면서 특히 원자인
효명세자의 백일에 대한 사연을 전하고 있다. 작성 시기는 "눈내린 추위""추위가 심하니"라 한 표현에서
겨울임을 알 수 있으며, "어제가 원자의 백일"이라 하였으므로 이 편지는 1809년 8월 9일에 태어난 효명세자의
백일 다음날, 즉 1809년 11월 22일 정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순조실록>에 실린 효의왕후의 행장에 따르면, 효의왕후는 정조의 누이들인 청연, 청선 두 공주와도 우애가
매우 두터웠으며 청선공주의 초상 때 그지없이 애통해하였고
조카들을 보살피는 것도 공주가 생존해 있을 때보다 한층 더하였다고 한다.
해석.
적은 것 보고 든든한 중 엄동설한에 계속 평안한가 싶으니 든든하며, 여기(대궐)에서는 대전 문안 태평하시고
어제는 원자의 백일이 되니 기특하고 다행하기 측량없고, 날이 갈수록 자궁慈宮(혜경궁홍씨)께서 기뻐하시니
더욱 경축하며, 추위가 심하니 계속 평안하기 믿네.
흥은위 가문의 생활문화
흥은위 정재화 후손들과 관련된 유물을 통해 부마 가문의 가계와 그 전승을 살펴본다. 또한 혼례와 장례 등을
비롯한 사대부가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며, 조선왕실 일원으로서의 위상을 지닌 부마 가문의 문화를 조명한다.
특히 대대로 전승되던 한글로 기록된
각종 문서와 한글 서책은 지체 높은 가문의 여성문화를 대변해 주는 규방 유물로서 주목된다.
정의의 아들로 정해상을 입양하는 계후입안 / 1823년, 116.0 x 84.5cm.
1823년(순조 23) 11월 예조에서 발급한 계후입안이다. 입안은 조선시대 관청에서 개인의 청원에 따라
매매, 양도, 결송決訟, 입후立後 등의 사실을 확인하고 인증해 주기 위해 발급하는 문서이다. 그 내용은 정의의
18촌 형 정응현의 둘째 아들인 정세증을 양자로 삼는 것을 <경국대전> 입후조立後條에 따라 승인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문중 어른인 정교환을 증인으로 삼아 정의의 후사를 세우는 일을 증빙하였다.
영일정씨 족보에 의하면 정의의 아들은 정해상으로,
정해상의 생부는 정렴으로 되어있는데, 정렴의 초명이 정응현이었다.
따라서 정세증도 입후 무렵 정해상으로 개명한 듯하다.
정운석의 과거시험 답안지 시권 / 1884년. 64.9 x 156.2cm.
1884년(고종 21) 정운석이 과거에 응시하여 7언시七言詩 한편을 지언낸 시권試券이다.
시권이란 과거 응시자들이 제출한 답안지 혹은 채점지를 가리킨다. 가장 우측 상단에는 응시자인 정운석의
직역織役, 본관, 나이, 거주지, 부父, 조祖, 증조曾祖, 외조外祖의 관직 등이 기재되어 있다.
시제詩題는 '사대부가 윗사람이 훌륭한 정치를 이루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서 즐겁게 서로 경하한다
<士大夫知上有致治之意翁然相慶>'이다. 붉은 글씨로 된 '차하次下'는성적을 가리키고, 검은 글씨로 된
'십시十詩'라는 것은 시詩(천자문 197번째 글자)자 축軸의 열번째 시권이라는 표시이다. 일종의 수험번호이다.
흥은위 정재화의 고손자인 정운석은 정이원의 장남으로 1885년(고종 22) 16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양근군수를 거쳐 곡성군수와 삼척군수 등을 지냈다. 진사시에 합격했을 때 고종이 청선군주의 종손이라며
풍악(잔치)을 내려 주어 부마 가문의 자손으로서 특별 대우를 받았다.
<시권 상단 우측 기록>
유학幼學 정운석은 16세로 본관은 영일이고 옥천沃川에 거주한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전행태인현감 겸 전주진관병마절제도위 정이원이다.
할아버지는 가의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정해상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가의대부 형조참판 오위도총부부총관 정의이다.
외할아버지는 통정대부 형조참의 이준재로 본관은 한산이다.
정해상의 아들로 정이원을 입양하는 계후입안 / 1853년, 115.0 x 83.0cm.
1853년(철종 4) 5월 예조에서 발급한 계후입안繼後立案이다. 그 내용은 청도군수 정해상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그의 14촌 동생 정해안의 둘째 아들인 정민현을 양자로 삼는 것을 승인한다는 것이다.
계후를 위한 제반 조건들을 확인하기 위해 당사자인 정해상과 정해안 그리고 이들의 문중 어른인 정용환을
증인으로 조사하였다. 영일정씨 족보에 의하면 정해상의 아들은 정이원으로 되어 있는데,
입양되면서 개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정이원(1843~1899)은
흥은부위 정재화의 증손자로서 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부마 집안의 가계를 계승하였다.
화조도 자수병풍 / 조선후기, 97.0 x 306.4cm.
다양한 꽃과 암수 한쌍의 새를 곱게 자수한 수준 높은 8폭 병풍이다. 혼례를 치르고 나서 일반적으로 신방에는
화조도 병풍을 놓았는데 암수 새들의 모습을 다정하게 표현하여 부부간의 화목과 행복을 기원했다.
화조도는 꽃과 새를 소재로 자연 친화적이면서 복을 가져다 준다는 길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꽃과 새는 가정의 평안과 화목, 부부간의 애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모란은 부귀, 매화는 절개와 다산, 석류는 다산, 연꽃은 다남과 행복을 의미한다.
2폭의 일부.
3폭의 일부.
4폭의 일부.
5폭의 일부.
6폭의 일부,
7폭의 일부.
8폭의 일부.
기증으로 빛낸 가문의 역사
흥은위 정재화와 청선공주의 혼인으로 왕실의 부마 가문이 된 영일정씨 가문의 유물은 대를 이어 보전되어왔다.
소중히 간직한 선조의 유품을 흥은위 정재화의 후손들은 2019년 초봄 수원화성박물관의 문을 두드려 기꺼이
기증하였다. 선조의 유품 1천여점을 전문적인 관리와 문화재적 가치를 규명할 수 있는 수원화성박물관으로
보내 가문의 역사와 위상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기증이 곧 부마 가문의 후손으로서 선조를 추모하고 빛내는 일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서간지와 책함 / 조선후기 서간지 37.4 x 23.3cm. 책함 58.2 x 6.0 x 14.3cm.
흥은위 가문에 전승된 편지지인데, 서간지 혹은 시전지라고도 한다. 태지苔紙를 포함하여 금박이나 은박을 뿌려
장식한 고급지까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사용하지 않은 묶음 상태의 서간지가 대량 보존되어 있다.
특히 묶음 상태의 서간지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것으로 봉투와 함께 묶음 단위 상태로 전승되어 주목된다.
각양각색의 종이와 크기 그리고 무엇보다 묶음 상태로 편지, 문서, 책, 옷 등 여러 물건을 보관하는 목가구를
함이라 한다. 흥은위 후손들은 이 흑칠함에 <송강집>과 <장암집> 등 선조의 문집을 보관하였다.
연상硯床과 연적硯滴 / 근대, 연상 31.1 x 23.0 x 17.7cm. 연적 8.3 x 7.4 x 2.9cm 등.
연상은 벼루, 먹, 연적 등을 한곳에 모아 정리하는 문방가구로 서안書案 옆에 두었다. 벼루는 먹을 가는 문방구
이며 연적은 적당량의 물을 담아 먹을 갈거나 채색할 때 부어 주는 도구로 수적水滴이라고도 한다. 벼루와
연적은 사대부가 글을 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로 글과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놋그릇 / 조선후기 근대, 높이 12.9, 지름 14.6 등.
흥은위 정재화 집안에서 대대로 사용했던 놋그릇이다. 놋그릇의 종류는 크게 식기류, 혼사용구, 제사용구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기증유물은 여러 용도의 놋그릇이 포함되어 있다.
목그릇木器과 목쟁반木錚盤 / 조선후기, 목그릇 대 25.9 x 26.7cm, 소 15.2 x 16.0cm.
흥은위 정재화 집안에서 대대로 음식을 담는데 사용했던 목그릇과 목쟁반이다.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크기도
다양하며 뒷면에 한글이 기록되어 있다.
흥은위 정재화의 아들 정의 때부터 대대로 승지를 지내 온 집안이므로 정승지댁이라는 표현이 쓰여있다.
윤용구 서병 / 20세기, 164.4 x 372.0cm.
윤용구(1853~1939)는 구한말의 서화가로 본관은 해평이고 자는 주빈周賓이며 호는 석촌石村이다.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서울의 장위산 아래에 은거하며 '장위산인獐位山人'을 자처하였다.
서화에 뛰어났는데 글씨는 중국 소동파(1036~1101)의 서체를 토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필법을 창안하였고
그림은 대나무, 난초, 괴석 등을 즐겨 그렸다.
이 글씨 병풍 10폭은 청나라 금란선생 금영이 편찬한 <격언연벽>의 일부와 당나라 백거이가 지은 시 <자영>의
일부 등을 석촌 특유의 필체로 썼다. 내용은 대체로 선비가 갖추어야 할 삶의 올바른 자세 등을 말한 것이다.
병풍의 2면, 4면, 6면, 8면 10면의 끝 부분에 석촌의 인장을 2방씩 찍었다.
화령전 / 일제강점기, 유리건판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을 모셔놓고 매해 제사를 지내던 영전이다.
정조가 돌아가신 다음해인 1801년(순조 1) 화성행궁에 인접하여 화령전이 건립되었다.
순조는 현릉원 재실에 있던 정조 어진을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으로 모셨다.
순조를 비롯한 모든 후대 왕들은 수원으로 행차할 때마다 화령전에서 제향을 지냈다.
1920년 일제에 의해 정조 어진은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졌고 제향은 중단되었다.
흥은위 정재화와 청선공주의 묘,興恩尉 鄭在和.淸璿公主 墓 / 양평군 소재, 2021년 촬영, 김인규.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흥은위 정재화와 청선공주의 합장묘이다. 묘의 좌우에는 높이 1m 내외의 곡장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그리고 좌우에는 문인석, 석수, 망주석 등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묘역에는 본래 재실 등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1986년 5월 30일에 경기도 양평군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축문祝文 / 1925년, 22.9 x 24.0cm.
1925년 12월 24일 정운석이 심한 물난리 때문에 지평에 있던 묘소를 양주 노원으로 옮긴다는 내용으로
돌아가신 고조부모로부터 부모 등에게 고하는 축문이다. 정운석의 고조부는 흥은위 정재화이다.
누구의 묘소를 옮기는지 알 수 없으나, 이때 을축년 대홍수의 피해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기증된 유물들에도 대홍수 피해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고유문告由文 / 1944년, 22.9 x 30.8cm.
1944년 윤4월 6일 정구택이 사판祠版(위패)을 지협砥峽(지평)의 병사丙舍(묘막)로 옮겨 모신다는 내용으로
고하는 고유문이다. 해당 문서의 가장 좌측에 사판을 다른 곳에 모셨다가 다시 지협의 묘막으로 도로 모신다고
고하는 내용이 있는데, 내용으로 봐서는 이후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정구택은 정운석의 아들이자 흥은위 정재화의 5세손이다.
제문祭文 / 1935년, 23.5 x 62.2cm.
1935년 4월 29이 척질戚姪 김영한이 정운석의 소기小朞를 맞아 그에게 올리는 제문이다.
죽은 뒤 1년이 되는 날에 지내는 제사를 소상小祥 혹은 소기라고 한다.
삼척군수를 지낸 정운석은 1934년 갑술년에 사망하였다. 영일정씨 족보에는 그의 사망일을
임오년(1942년) 4월 28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제적등본을 확인한 결과 소화 9년 곧 1934년에 사망하였다.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인근에 사니 시간나는되로
한번 꼭 가서 보겠습니다.
불교방의 보배이신 칠복이거사님
정성과 열성으로 올리신 사도세자의 부마 흥은위 정재화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어제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승려 장인을 관람하며
얼마나 감사가 넘치던지요
불교방에 우리 카페에 오래 오래 인연되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도세자의 부마 흥은위 정재화
특별기획전 가 볼 수 는 없지만 이렇게
거사님께서 사진과함께 상세한 설명 자료를
올려주시니 감사하게 잘 봣습니다
거사님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