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야기 [1. 첫눈에 반하기] | ||||
번호: 73327 |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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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66 | 날짜: 2004/12/15 16:22 | |
내 나이 서른 셋 스물 아홉부터 5년간 어머니께서는 "내가 너 때문에 잠을 못잔다" "내가 너 때문에 피가 마른다" 는 말로 나의 결혼을 재촉하셨다. 스물 아홉부터인건 친적이 많은 우리 집안 언니들이 적어도 스물 아홉엔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스물 아홉까진 누군가 나타나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 지만 한해, 두해 가고 또 가도 결혼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당시 내가 마음에 품고 있던 내 사랑은 1. 이과 계열을 전공한 사람일 것. 2. 대학때 학생운동을 한 사람일 것. 3. 내 가정만을 생각지 않는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일 것. 4. 봉사활동을 하고 있거나 할 의사가 있는 사람일 것. 5.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일 것. 6. 함께 리어카를 끄는 상상을 해도 좋아지는 사람일 것. 위와 같은 사람이라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그 무엇도 따지지 않고 결혼하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맏아들인것도, 돈이 없는것도.. 그 무엇도 따지지 않고 위의 기준만 들이댔었다. 이렇게 확실한 기준을 들이대고 상대방을 대하니 다른 사람들처럼 '누가 너무 따라 다녀서 그냥 결혼했어' '회사 다니기 싫어서 그냥저냥 결혼했어' 라는 말도 해당하지 않고 나는 너무도 꿋꿋하게 노처녀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산행과 문학기행으로 애인 없는 외로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던 중 결혼 후에도 할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생각던 중에 '독서지도사' 공부를 하러 서울로 일주일에 두번 다녔었다. 그때 함께 공부하던 언니가 전철을 같이 타고 다니면서 나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대학 동창이 있는데 소개해 줄까?했다. 그 얘기가 나온게 98년 8월.. 언니도 얘기는 꺼냈지만 바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나도 그 동창생도 성격이 너무 강해서 많이 부딛칠 것 같다는 것이었고 나도 상대가 평범한 회사원이라는게 선듯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 흐지부지 시간이 흐르다가 99년. 내 나이 33세가 되었다. 32세보다 33세라는 나이가 주는 중압감은 생각보다 큰 것이었고 어머니께서 하루 하루 심약해 가시는게 그때부터 눈에 들어왔다. 더군다나 여섯살 위의 둘째오빠도 결혼 안한 상태여서 어머닌 동네 사람 부끄럽다 고 외출도 거의 삼가시고, 친척들 만나는 자리에도 안나가셨다. --------------------------------------------------------------------- 99년 1월 23일. 며칠전 언니 집에서 한번의 전화통화로 만날 장소를 얘기 했었고 내가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나 있는 곳으로 먼길을 와주어서 내가 먼저 나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전화 통화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참 좋았다. 짧은 대화였지만, 맑은 목소리와 유모 감각이 있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구나..라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일부러 출입문이 보이는 쪽으로 앉아있던 나.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어머나~~~~~~~~~~~' 나는 그 순간 생각했다. 그가 큰 웃음을 머금고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그 순간. '나 이 사람이랑 결혼하게 되나 봐' 아직 첫 인사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결혼이야기 [2. 술 좋아하세요? ] | ||||
번호: 73378 |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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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18 | 날짜: 2004/12/15 16:35 | |
며칠전 전화로 만날 장소를 얘기하면서 내가 말했다. 나 : "카운터에서 이름 부르거나 하지 마세요. 그거 너무 싫으니까 알아서 찾아오세요" 그 : "그럼, 특이한 복장을 하면 되겠네요. 두루마기를 입던가 모자 를 쓰던가" 나 : "하하, 인연이 된다면 특이한 복장 아니어도 알아볼 수 있어요" 그 : "그러니까 인연을 만들어야조" ---------------------------------------------------------- 와우~~~~~~~ 이 사람 '우리옷'(개량한복) 차림으로 나타난 것이다. 근데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 한 사람이나 입던 그 옷을 사실 나도 즐겨 입었었다. 어머닌 "결혼한 새댁처럼 그게 뭐냐, 결혼이나 하고 입어라, 결혼한줄 알고 따라 올 사람도 안오겠다......" 하지만 난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내 한평생 살면서 최소한의것만 소비할 것- -나의 소비가 환경을 오염시킨다- 우리옷은 편하기도 하거니와 결혼후에도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입고 다녔었다. 그때만해도(혹은 지금도) 우리옷을 입는 사람들은 하는 일이거나, 생각 에 있어 남과 다른 점이 있고, 그것이 혼자만의 이익이 아닌, 다같이 잘 살아보자는 의미로 통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옷 입는 내 또래의 남성 들을 보면 좋아보였었다. 그런데 그가 우리옷 차림으로 나타난데다가, 내가 위에 언급한것중 벌써 두가지는 맞는것이고(기계공학 전공에, 학생운동하다 제적당해서 거의 10 년만에 졸업했다고 언니에게 들었다) 3번 4번은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이니 당연히 그럴거야' 라고 미루어 짐작 하게 되었다. 나머지 5번 -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일 것 꼭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늘 가까이 하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단 시일내에 파악이 안되었다. 하지만 문학서적은 아니어도 운동권에 머물면서 그 계통 의 책은 많이 읽은것으로 파악되어 통과. '책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 없다'는게 나의 작은 생각이었다. 마지막 6번 : 함께 리어카를 끄는 상상을 해도 좋아지는 사람일 것. 이것이 제일 나중에 내리는 나의 결정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오면 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채 며칠 지내면서 위의 5번에 대한 상상을 해본다. 그 사람과 리어카를 끄는 상황이 온다면. 근데, 참 신기하게도 상대방이 장사나 개인사업을 해서 경제적으로 좀 부유 하다는 사람은 5번에서 고개를 가로젖게 되는 것이다. 상대가 지금 가진것을 모두 잃은 채 리어카를 끄는 상황이 오면 싫은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지는 않았지만, 좋은게 좋은거야 라는 생각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을 선택했을 때 그럭저럭 살아지기는 하겠지만 그 사람의 상황이 달라졌을 때 함께 극복해 갈 힘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라면 6번의 상황이라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과 계열 전공에 학생운동 한 사람을 찾았다해서 굳이 정규 대학 나온 사람을 고 집한건 아니었다. 대학 졸업장과 상관없이 항상 무엇이든 배우고, 노력하는 자세라면 학벌은 중요 하지 않았고 내가 수학을 너무 못해서 나중에 2세를 위해 이과 계열이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었다. 그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 후 2시간쯤 흘러 자리를 옮겼다. 그 - 술 좀 하세요? 나 - 예, 끝까지 자리 지킬 정도는 됩니다. 그 - 그래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요 나 - 사실 전 대답을 잘못했는데요. 이런 자리에선 술을 못마신다거나 맥주 한잔 정도라고 말해야 한다는데 제가 내숭을 못떨어서요. 뭐, 내숭 떨어서 사귀게 되봐야 얼마나 가겠어요. 그 - 아니예요. 저도 내숭 떠는 여자는 신경쓰여서 못사귀지요. 제가 이과 출신인데 공부만 그런게 아니고 사고방식도 단순명료한게 좋거든요 미묘한 감정의 흐름 같은거 잘 몰라요. 일도 책상에서 하는 서류작업보다는 현 장에서 기계 만지는게 좋구요. 그의 얘기를 들으니 진심으로 내숭과 보다는 단순형을 좋아하는 것 같았고 나는 안심하고 쏘주를 마실 수 있었다.. "크~ 이 맛이야" 어머니께선 주사가 심하셨던 아버지 때문에 술 마시는 사위는 보기 싫다고 하셨지만 또 오빠 둘과 언니는 술을 아예 안마시게 되었지만 유독 나는 술을 좋아하고 즐겨했다. 산행 후의 술 한잔. 비오는 날의 술 한잔. 여행길 버스에서의 술 한잔. 어찌 그 술 한잔의 맛을 모르고 인생을 논하며, 사랑을 논한단 말인가? 사실 3년 전쯤 친언니 소개로 만난 사람에게 내가 먼저 "술 한잔 할까요?"라고 말했다가 툇자 맞은적이 있어서 엄니께서 절대로 처음 만나서 술 마시지 말라고 신신 당부 하셨던 것이다. 그때 나도 그 사람을 더 만날 생각도 없었고, 뭐 딱히 할 얘기도 없고 시간이나 떼우자는 생각에 술 한잔 하자고 했더니 이사람 돌아가서는 나를 '잘 노는 이상한 여자'로 얘기한 것이다. 그런데도 정신 못차리고 처음 만난 사람과 쏘주를 부어라 마셔라 했으니 이 사람 혹시 돌아가서 나를 술꾼으로 취급하는거 아냐? ---비단 꿈--- |
결혼이야기 [3. 짐이 많은가요?] | ||||
번호: 73522 |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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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00 | 날짜: 2004/12/16 16:50 | |
그날 술이 적당히 오른 그는 소개해준 언니 부부를 불러냈다. 그 - 따질게 있으니까 빨리 나와 봐 (전화로 언니에게) 나 - 왜요? 그 - 있다 와 보면 알아요. 미옥이가 아주 괘씸해요. ------------------------------------------------------ 술 마신 그 대신 운전을 할 요량으로 언니 부부가 택시를 타고 바로 왔다. 언니 - 둘이 재밌는 시간 보내지 왜 불러. 소개하는 사람 같이 나오는거 얘가 싫다고 그래서 안나온건데. 그 - 야, 너는 나를 완전히 물로 봤냐? 언니 - 뭔 소리야? 그 - 이런 아가씨가 있으면서 왜 이제야 소개해주냐고. 좋은 사람 소개해 달라고 진즉부터 얘기했는데 말야. 언니 - 사람 소개 하는게 그리 쉽냐. 너네 둘다 성격이 강해서 이리저리 생각 좀 해 보느라고 그랬다. 그나저나 싸우지 않을래나 몰라. 내 보기엔 둘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똑같은데. 그 - 그건 당사자가 만나서 해결할 문제고... 분명 인연은 인연인 듯 했다. 지금까지 이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남성들이 내게 하는 말은 '가까이 가기 좀 그래' '무슨 말 꺼냈다가 무안당할 거 같아' '여자가 좀 내숭이 있어야지, 그게 뭐야' 이렇게 동료 또는 친한 사람으로 지내는건 좋지만 정작 자신의 베필로 생각해보기엔 너무 버겁다는 얘기들이 많았었다. 그런 얘기 들을때마다 친구나 지인들은 '나를 좀 더 부드럽고 낮추라'로 충고했지만 내가 택한 방법은 '나 보다 더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나를 결코 강하게 보지않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날 그는 동창생 언니 집으로 가서 자고 일요일날 만나서 민속촌에 갔었다. 겨울이었지만 따듯한 햇볕 아래서 그의 팔짱을 끼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걷는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한 그것이었다. 그는, 학생운동 하던 때 학교 제적 당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자동차 정비를 배우던 얘기 노동운동 간사로 있던 얘기 늦은 나이에 학교에 복학해 도서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부한 얘기 취업후의 이야기 등등 지난 삶을 진실된 언어로 쏟아냈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내가 사랑하는 감정과 함께 중요시 여기던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 할 수 있었다. 순간, 순간, 매 시간마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볼 때 이 사람과 남은 생을 함께 해도 되겠구나 내심 마지막 확신을 내렸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신호 대기중에 그가 내게 물었다. 그 - 집에 짐이 많아요? 나 - 내 물건이요? 책이 좀 있고 다른건 별로 없어요. 그 - 그럼 이 차에 경아씨 짐 싣고 나랑 같이가요. 그리고는 그날 우리집 근처로 와서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는 동안 몇번 더 "지금 집에 가서 경아씨 짐 챙기면 안돼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하~~ 이것이 소위 말하는 프로포즈? 나는 프로포즈도 못받고 결혼했으니까 지금이라도 좀 해보라고 종종 농담으로 말한다. 토요일 처음 만나, 일요일 두번째, 그 다음주 수요일날 내가 그의 회사 근처로 가서 만나면서 그는 집에 인사 드리러 갈것 을 제안했고 나도 '너무빠른거 아닌가?' 라는 의구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 주 일요일은 그가 회사 직원들 모두 가는 산행이 있어 그날 저녁에 종로에서 만나고 그 다음주, 그러니까 만난지 14일째 되는 토요일에 그의 집. 강원도 원주로 인사 드리러 갔다. 아마 회사에서의 산행이 없었다면 1주일만에 인사 드리러 갔을 것이다. 후~~~~~ 부모님과 형님, 남동생 부부, 여동생 부부가 와 있었다. 두살 밑인 남동생이 2년 전에 먼저 결혼한 상태였다. 가족들은 모두 따스하고 식구들 마다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들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우리집은 명절때마다 모이면 윷놀이를 하는데 오늘도 한번 해보자'시며 아버님께서 윷놀이를 제안 하셨고 부부끼리 편을 먹고 했는데, 그날 따라 그와 내가 '모'가 많이 나오는 것이다. 식구들은 '사랑의 기'가 모아져서 잘 되나부다 하며 우스개 소리를 하였다. 이렇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분명 자신의 가정도 화목하게 만들 수 있을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말까지 하는게 친정 부모님께 누가 되겠지만 이해해 주실거라 믿고 말하자면... 나는 '화목한 가정'이라는게 뭔지 모르고 성장했었다. 평소에는 똑똑한 양반으로 알아주는 내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주사가 심하셔서 집안과 작은 시골동네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곤 했었다. 대여섯살 무렵 나를 떠올리면 아버지께서 방에 계시면 툇마루로 나가고, 나오시면 어머니 찾아 부엌으로 가고... 늦은밤 동네 어귀에서 아버지의 큰 기침 소리가 나면 그때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나이 스물이 되도록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라고 정확히 호칭한게 내 기억엔 서른번도 안될 것 같다. 스물 다섯 넘어서야 아버지께서도 연약해 지시고, 다행히 지난날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기억보다는 현재의 측은한 모습이 가슴에 와 닿아 될 수 있으면 '아버지'란 호칭을 많이 써드려야지 했지만 아버지는 그리 오래 기다려주진 않으셨다. 결혼 후 3년째 되던 내 나이 35세때 돌아가셨으니... 아무튼 나의 개인적인 상황 때문에 [ 나는 화목한 가정을 만들것이다.] [ 그러려면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라는 생각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의 기준은 주관적인 관점 보다는 객관적인 관점으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의 단점을 내가 보완해주고, 이해해 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단점이 아니므로 주위 사람들이 말하는 '결혼의 조건' 따위를 그들에게 맞출것이 아니라 철저히 나를 분석하여 내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찾을것. 이것이 내가 나에게 내린 '결혼 상대자에 관한 명령'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가난하게 살아왔으므로 결혼 후의 가난이 결코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난하게 시작하는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해 흥청망청 돈을 쓰거나 생활이 문란하거나, 도덕적으로 어긋난 행동을 하거나 이런것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낼 것이라는 판단. 그러므로 내가 찾아야 할 남편감은 가난하지만 똑똑하여 자기 앞가림 잘하며 자기 절제력이 있어 이런저런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사람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곳 게시판 글을 읽거나, 주위 아기 엄마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스물 갓넘어 별다른 판단력을 갖지 못한 채 결혼하여 하루하루 힘들게, 혹은 자기 목소리 하나 없이 살아가는 여성들을 대할 때이다. 결혼을 빨리 했다고 모두 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혹은 늦게 했다고 해서 모두 올바른 판단을 내려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혼을 '나 좋다는 사람 만나면 하는 것' '회사 다니기 싫으면 하는 것' 으로 치부하지 말고, 20대 초반에 이런저런 경험을 쌓으면서 나름대로 자기 자신의 스타일을 분석한 후에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맞을 것인 가를 고민해 본 후에 내리는 결정이 '후회'를 조금은 감소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내가 결혼 상대에 관해 이토록 고민하고, 조금은 과정하여 나와 맞을 것인지 '분석'까지 했던것은 나는 결혼 후에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자 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상대방을 내 방식대로 고치려 하지 말것. 그대로 받아들일 것. ---비단. 꿈--- |
결혼 이야기 [4. 결혼자금 70만원?] | ||||
번호: 73589 |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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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69 | 날짜: 2004/12/16 20:54 | |
그 해 2월 설날 그가 우리 가족에게 인사하러 다녀갔다. 그가 떠난 후 친정 아버지 말씀 아버지 - 너 큰일 났다. 네가 꼼짝도 못하겠다 나 - 저도 만만치 않은데요 뭘. 괜찮아요 어머니 - 괜찮긴 뭘 괜찮어, 한쪽이라도 나긋나긋 해야지. 어쨌든 결혼 생활은 둘 다 공평할 수는 없어 한 사람이 좀 더 참아야 되는거지. 나 - 내가 참으면 되지 뭐. 아버지 때문에 참는거 이력이 났잖아요 어머니 - 네가 잘도 참겠다. 잘못된 거 있으면 푸르르~ 떨면서... ---------------------------------------------------------------------------- 함들이 하면서 그의 친구들이 말하기를... "제수씨 어떻게 얘를 선택했어요? 미옥아 너는 00 성질 뻔히 알면서 소개해주면 어쩌냐? 사실 이런말 안해야 되는건데 하도 걱정되서요. 각오 단단히 하셔야 될 겁니다" 아무튼 가족들과 친구들의 걱정을 뒤로 한 채 그해 4월 25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시부모님의 청으로 원주에서 했다. 아주버님께서 전통혼례에 관한 일을 하셔서 장소는 예식장에서 식순은 전통혼례 식으로 복장은 미색 한복에 날개옷을 달고, 면사포를 쓴 차림이었다. 남편은 분홍 한복에 옅은 하늘색 두루마기 장소가 일반 예식장으로 잡힌것은. 그는 내가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고 싶어할 거라는 지레짐작으로 예식장에서의 결혼식을 알아보고 나도 별다른 생각없이 (뭔가 달랐으면 좋겠다 생각은 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에 동의해서 예식장 계약금을 치른 후에... 그의 형님 집에 가서 결혼식 사진을 보니 색다른 복장이었다. "나도 이렇게 해주시면 안돼요?" -어, 제수씨가 그렇게 하고싶으면 할 수 있조- (아주버님) "그럼 형님 입으셨던 한복 그대로 주세요. 똑같이 하게" 형님 입으셨던 한복을 누가 빌려가서 받지 못했다고, 한복만 새로 하고 날개옷과 면사포는 형님것을 이용했다. 그의 지나온 삶 그리고 내가 추구해왔던 삶의 색깔이 웨딩드레서 차림보다는 전통혼례쪽이었고, 우리들 결혼식을 지켜봐 주시는 친지와 지인 들도 모두 우리 두사람에게 어울리는 결혼식이라고 칭찬해 주셨다. ----------------------------------------------------------------------- 그 전에 그가 회사를 그만둘 상황이 돼서 오히려 잘됐다 싶어 내가 있는 지역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그는 경기북쪽, 나는 경기 남쪽이었다. 3월초에 그가 직장을 옮기면서 집을 구하게 될 상황이었고, 어차피 신혼집으로 쓰게 될 집을 구해야 했다. 지금까지는 회사 기숙사에 있었다. 갑자기 회사를 옮기게 되고 집은 구해야 되고.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내가 직장생활 한지 얼마 안되서 모아 놓은 돈이 없는데... 그리고 조금 모아 놓은거 작년에 차사고가 좀 나서 합의금으로 쓰고..." 그러면서 가만히 내놓은 통장에 잔액이 100여만원 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를 다독였다. 그리고 통장정리를 해보니 차 할부금등 자동이체 되는게 빠져나가고 남은 잔액 70만원. 나도 그때 얼마간 모아 놓은것을 자영업 하는 큰오빠에게 빌려주고 수중엔 몇백도 없었다. 결혼 전년도가 IMF였던 98년이었으니 그때 큰오빠가 힘든 상황이어서 빌려주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나도 큰오빠 사무실에서 일을 봐주고, 독서지도 하고 두가지 일을 겸하고 있었다. 가까이 살던 친언니에게 상황을 얘기하니 언니 - 그렇다고 하나도 없데? 조금은 있을거 아니야...아니면 부모님께서도 안해주신데? 나 - 계산해 보니까 직장생활 한지 얼마 안되고, 차사고 합의금 썼다 하고 하나도 없는 것 같애. 부모님도 연금으로 겨우 생활 하시는것 같은데... 언니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나처럼 시작하지 마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왜 그렇게 가난한 사람이야. **씨는 3천만원으로 집 알아보러 다니더만. 이 동네에 얻는다고. 언니는 거의 울먹이며 속상해 했다. (**씨는 큰오빠가 필요할 때 간간히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고 나이도 남편 또래여서 아무래도 비교가 되긴 했다. 하필 같은 시기에 결혼하게 되어서) 나 - 그러지 말고. 알아봐. 이동네에 오래 살아서 싸고 괜찮은 집 알거 아냐. 언니 - 내일 얘기하자. 알아볼테니까. 그렇게 언니가 알아봐 준 집이 보증금 50에 월 15만원. 언니가 아는 분이 살던 집인데 집이 안빠져서 당장 필요한 짐만 옮겨가고 나머지는 작 은방에 들여놔서, 큰방과 거실을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니는 당장 전세 구할 돈은 안되고, 월세를 2년 계약으로 하면 너무 기니까 임시로 살다가 대출이라도 알아봐서 전세로 옮기라는 거였고 내가 생각해도 그 당시로서는 다른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집을 구해 그가 이사왔다. 이사랄 것도 없었다. 전에 나에게 짐이 많냐고 물어보더니, 이 사람 짐이라고 해봐야 여행가 방 하나도 차지 않았다. 나도 결혼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독립해 보겠다고 따로 집을 얻어 98년 1월부터 6월까지 생활했던 터라 그때 사용하던 살림도구 있던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때도 새로 산것보다는 어머니 살던 집에 올캐언니의 짐이 합해지면서 두개씩 있는것들 안쓰는 것들.. 등등 모아 주신 살림살이였다. 어머닌 뭐도 사야 하는데, 뭐도 사야하는데... 하고 마음 급해 하셨지만 나는 만사 태평이었다. 장농 사야지? - 장농 필요없어. 언니가 준거 있잖아 그대로 쓰면되고 사실 그것도 필요없는데 헹거에다 놓으면 돼. 서랍장 하나라도 있어야지? - 박스로 나오는 정리함 있으면 돼 세탁기 사야지? - 엄마 쓰던 짤순이나 줘. 아직 애기 없는데 뭐 빨래가 그렇게 많겠어? 냉장고 사야지? - 그건 있어야겠네.. 중고로 살까? 이불 사야지? - 전에 내가 쓰던거 있잖아. 그거면 돼. 이렇게 나의 신혼집은 반쪽짜리 집에서 쓰던 물건으로 시작되었다. ---비단 꿈--- |
결혼 이야기 [4. 그로부터 6년 후~] | ||||
번호: 73717 |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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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40 | 날짜: 2004/12/17 22:57 | |
남편의 통장잔액 70만원과 나를 만난 후의 99년 2월은 직장 알아보느라 쉬고,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 받은 3,4월분 월급 120만원 x 2 = 240만원중 할부금등 그의 생활비 용돈을 제한 100여만원 그리고 큰오빠가 내게 빌려간 돈중 일부 마련해준 500만원. 총 670여만원으로 결혼에 필요한 모든것이 준비 되었다. 물론 보증금 50에 월세 15만원인 집까지 포함해서. 시댁의 예단비, 신혼여행비.. 등등 모든 경비가 포함된 것이다. 시댁에선 그쪽에서도 해줄 형편이 못되니 받을수도 없다며 양쪽 모두 예단 오가는것을 생략하자고 하셨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 그런게 아니라시며 친정어머니께서 보내신 봉투를 아버님 께서 굳이 돌려주셨다. 진심으로 마음이 편치 않아서라고... 그래서 시부모님께서 보시는 TV 가 리모콘도 없는 구형 작은것이기에 TV만 큰것으로 바꾸어드렸다. 어머니께선 물건에도 혼이 있는 것이니 누가 쓴것인지도 모르는 물건으 로 신혼살림을 시작하면 안된다시며, 어머니나 올캐언니, 친언니가 쓰던 물건은 쓰고 다른건 저렴한것으로 구입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다. 냉장고는 어머니께서 사주시고, 세탁기는 친언니가 사주고. 이렇게 적어놓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니 참 초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땐 정말 '초라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이 본래 천성이 촌스러워서 '물건'에 있어 질이 좋은것인지, 나쁜것인지, 비싼것인지, 싼것인지... 등등의 감정에 무감각하다. 결혼 3년후 이사하면서 친언니가 장농을 구입한다고 너도 이사하는김에 하나 장만해서 깨끗이 정리해놓고 살으라 해서 애들 짐도 많아져서 하나 구입했다. 근데 지금 10.5자짜리 장농을 보고 있노라면 (거짓말 좀 보태서) 숨이 탁 막힌다. 나 - 언니 꼬임에 빠져서 내가 저걸 샀으니 도대체 나무 몇 그루를 잡아먹은거야? 언니 - 야, 세일가로 사서 싸게 샀는데 뭐가 걱정이야- 나 - 비싸고 싼게 문제가 아니라, 필요치 않은걸 소비했단 말이지 친정어머니 - 어이구, 어떻게 저것이 내 뱃속에서 나왔을꼬. 나는 젊어서 다른집에 들어 가보면 장농만 보이고, 나는 언제 저런거 사놓고 사나..부럽던데. 아직도 살림에 취미가 없어서 그런다. 언제 살림에 취미를 붙일꼬- 나에게 있어 '물질'은 살아가는데 있어 내 손을 불편하지 않게 해주는 물건이면 된다. 어느정도 여유있는 친구들이 집에 갖추어진 물건이 다만 자신의 '마음'이나 '눈'을 불편 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것을 본다. 친구 - "이웃집에 가구를 바꾸었는데 그거 보다 내거 보니까 안이쁜거야. 그래서 바꿨지 뭐" 나 - "야, 그렇게 자꾸 바꾸면 습관 돼. 두번째 물건은 더 빨리 실증날걸" 친구 - 그래도 안바꾸면 잠이 안오는데 어떻게 하냐. 내가 문제가 아니라 너가 문제야- 사실은 나 전에 너네집 가보고 놀랬잖아. 뭐 신혼집이 그러냐? 돈이 정말 없는것도 아니고. 일,이백 투자해서 바꿀 정도는 되면서도 그런거 아냐 나 - 글쎄, 내 생각은 결혼 초엔 남편 하나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그 다음엔 아이들 때문에 행복하고...그래서 집안에 가구 따윈 신경도 안쓰이는데 뭐. 다만, 살아가다가 남편이나 아이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면, 그때 하나씩 장만하면서 기뻐할 수도 있겠지. 근데 난 계속 행복해서 말이야... 히히~~~ 이번 달 초에 친구를 만났을때 나눈 대화의 일부분이다. 그 친구가 거실장을 바꿨다는 말이 나와서 위의 말들이 나온 것이었다. ------------------------------------------------------------------------- 얘기가 갓길로 샌것 같다. 그렇게 남들이 보기에 초라한 시작을 한지 벌써 6년이 지났다. 더군다나 내나이 33. 남편 35세의 늦은 나이였으니 상대적으로 더 초라해 보였을 것이고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저 나이 먹도록 모아 놓은 돈도 없이 저렇게 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나는 행복하기만 했고, 99년 6월초 큰 아이를 임신했다. 지금 돌이켜보건데 임신기간 만 9개월 동안 나는 늘 행복감에 취해 있었다. 아이 태교 일기를 쓰면서 자주 쓰게 되는 말이 "앙팡아~ 엄만 아빠를 만나 너무 행복하단다. 아빠랑 우리 앙팡이도 엄마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올해 1월 둘째아이 두돌과, 큰아이 네돌을 맞아 손발도장을 동판으로 찍어주면서 해주고 싶은 말을 새겨준다고 해서 내가 택한 말은. 큰아이 앙팡이에겐 [앙팡아 건강하게 성장해서 아빠같은 신랑을 만나거라] 둘째아이 앙증이에겐 [앙증아 건강하게 성장하여 아빠같은 남편이 되거라] * 앙팡이와 앙증이는 집에서 부르는 예명이다. 남편은 감사하게도 처음의 그때처럼 변함없이 성실하고, 나를 존중해 준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나는 오늘도 두 아이에게 "엄마 여보 보고 싶어~~" -내가 전화 해주께. 아빠 빨리 오세요- 35개월의 앙증이가 안되는 발음으로 전화기에 대고 진지하게 말한다. -엄만 맨날 여보 보고 싶다고 해. 우리 아빤데 그치 00야- 5세 앙팡이가 시셈하며 한마디 한다. 남편은 99년 3월 월급 120만원에서 2001년까지 2년간은 150정도의 월급. 2002년은 자영업을 시작하여 처음부터 너무 큰일을 시작하더니 실패하여 그해에는 1년 수입이 600만원 정도. 2003년에는 큰일은 맡지 않고 자잘한 일만 해서 연봉 5000정도. 올해는 작년만큼은 안되고 연봉 4000정도 될 것 같다. 그 사이 몇 달 쉬어보기도 하고, 월급쟁이 그만두고 어떤 일을 해야 할까 함께 고민도 해보고. 무엇이든 함께 얘기하고, 함께 결정하는 그런 생활이었다. 나도 결혼후 2년 6개월정도 맞벌이를 했고 둘째 임신하면서 전업 주부가 되었다. 지금은 두아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년에 따라 나도 함께 공부하며 소수정예의 학생들에게 질적으로 풍요로운 독서지도를 해주겠다는 생각인데 세상이 하 수상하여 큰아이를 맘놓고 문밖으로 못내보내는게 문제다. "앙팡이 학교들어가면 교문밖에서 기다렸다 데리고 와야 하니까 나 아무일도 못할것 같아" 며칠전 남편에게 얘기했던 말이다. 남편은 -당신 좋을대로-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한다. 내 남편을 만나게 해준 그 모든 인연의 끈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행복에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내 남편이 100% 완벽한 것은 아니다. ---비단. 꿈--- |
결혼 이야기 [ 5. 나도 불만이 있다] | ||||
번호: 73729 |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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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65 | 날짜: 2004/12/17 18:52 | |
올캐 언니는 딸이 둘이 있는데 조카들에게 하는 말이 "나중에 고모부 같은 신랑 만나라" 고 얘기한다. 나는 얘기한다. -언니는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00씨 같은 사람 나타나도 선택을 안할텐데- 조카들에게 "00야~ 치과의사가 돈 많이 벌고 그나마 스트레스 덜받으니까 그거해라" 라고 말하는데 내 남편같은 가난한 사람을 과연 사위감으로 맞을 수 있을까? 하는 의 구심이 드는 것이다. 올캐언니를 폄하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에게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좋을 수 있을까? 는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인것 같다. 나는 결혼전,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내심 다짐했던 '결혼 후 남편을 내 방식대로 고치려하지 말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라는 다짐을 90%이상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남편이라고 해서 '신'이 아닌 이상, 아니 혹여 '신'이라 해도 어떻게 항상 좋을 수 있고, 모든게 완벽할 수 있겠는가? 내 남편도 여느 남편들처럼 시댁에 대해선 맹목적으로 도와주고 싶어 하고 심지어 아주버님의 형편이 우리보다 어렵다는 이유로 항상 염려하고 그쪽에서 아쉬운 소리만 나오면 물,불 안가리고 해줄 자세가 되어 있다. 실제로 얼마간 도움도 주었고. 다행히 형님 내외분께서 어려운 중에도 '자족'하시며 폐 안끼치시려 생각하시는게 감사하지만, 나는 친정 형제는 고사하고 혼자되신 친정어머니께 뭐하나 해드리고 싶어도 못해주고, 설사 해드린다 해도 "너도 대출금 남아있는데 안받는다'시며 거절하시는 상황에서 남편의 맹목적인 형제 사랑은 부담이 될 때가 있다. 지난 4월 25일 결혼5주년 기념일에도 아주버님께서 무슨 공연이 있다고 오라는 한마디에 쪼르라니 달려간 남편이다. 대외적인 공연이 아니라, 아주버님 집에 아주버님이 관여하는 주말농장 가족들을 초대해 작은 음악회 같은것을 여는 자리였다. 아주버님 댁에 가서라도 나 몰래 케익이라도 사와서 가족끼리 축하해 준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넘어간 것이다. 나는 너무 서운해서 집으로 돌아온 후 "그 대신 선물로 금 열돈 해줘요" 했더니 흔쾌히 허락하더니 이튿날 퇴근길에 -어디가서 사면 되는데 지금 사러가려고- 한다. 나는 금은 놔두고 현금 30만원만 내가 쓰고 싶은데 쓸게요 했다. 그렇게 말은 했어도 내가 뭐 별달리 쓸 일이 있겠는가 10만원을 북한 어린이 돕기 성금 내고 "여보 나 전에 북한 어린이 돕기 성금 내다가 결혼하고 중단했는데 지금부터 월급에 1%정도 후원금으로 내면 안될까?"라고 말했더니 -그럴 돈 있으면 형을 돕겠다- 고 그야말로 '간단명료'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때의 나의 기분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막막함~~ 이랄까? '그래, 내가 벌어서 후원금 낸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그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나는 진정으로, 늦어도 내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때는 통일이 되어서 좀 더 넓은 국토를 밟을 수 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단지 소망으로 그치지 않고 뭔가 작은일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당장 몸을 움직 이는 일은 할 수 없으니 후원금이나마 보내주려는 생각인데 남편이 반대했던 것이다. ---------------------------------------------------------------------- 남편과 나는 결혼전 지인들이 많이 염려했던 것처럼 성격은 좋은데 성깔이 못된 커플이다. 성격 - 본래의 성질. 평상시 좋을때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 성깔 - 마음깊이 내제 되어있는 것. 안좋은 일이 있을때 가슴을 박차고 뛰쳐나오는 것. 이것은 내 나름대로의 웃기는 해석이다. 우리 둘다 성깔이 못됐다는것을 인정하기에 서로 '역지사지'의 마음이 잘 되는 것 같다. 남편이 나의 어떤 행동이나 말로 기분이 안좋을때 나는 그것을 따지기보다 '그래, 나도 저 상황에선 기분이 안좋을거야'라는 생각으로 조용히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남편은 눈치보는 나를 보며 울그락불그락 했던 마음을 안정시킨다. 반대로 내가 성깔을 부릴때 남편은 '저런 성깔도 없으면 사람 맛이 안나지' 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것은 남편이 제 앞가림을 스스로 잘해서 그다지 부딛칠 일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 이런저런 잔심부름 시키지 않고 스스로 한다. 집안에 고칠것이 있으면 성격상 미루지 않고 바로 처리한다. 이런저런 고민을 얘기하면 "뭐가 그리 복잡해. 서로 한발씩 양보해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겠네. 우리 단순하게 살자고" 그 한마디면 나도 신경 곤두서게 염려했던 일들이 어느새 별것 아닌것으로 되어버린다. 나는 남편에게 화나거나, 서운한 일을 바로 그자리에서 말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 시간을 두고 정말 내가 그 일에 대해 참을 수 없을 정도인가?를 생각해 보는 사이 이미 마음이 누그려져 있을때가 많고,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으면 남편에게 얘기한다. 그때는 남편도 마음이 평온해진 상태라 이런저런 설명으로 나를 이해시킨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당신이 알아서 뭐해"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야" 라고 피하지 않고 무엇이든 설명하고, 얘기하고, 의논한다. 지난 2002년 초 남편이 새로이 일을 시작하면서 (환경시설 쪽) 일요일도 쉬지 못하고 일할 무렵 남편은 양말을 거꾸로 벗어놓기 시작했다. '힘들어서 그렇지, 내가 뒤집으면 되지'하고 3년 가까이 그냥 있다가 며칠전에야 남편에게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네요" 라고 말했더니 -어, 내가 그랬어? 진즉 말하지- 하고는 그 후부터는 칼같이 똑바로 벗어놓는다. 혹여 남편이 한두달 지난 후 양말을 다시 뒤집어 벗어 놓는다해도 나는 다시는 남편에게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남편이 신경쓰는데도 잘 안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려고 잔소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남편 또한 나에 대해서 관대하다. 나는 물건 정리를 잘 못한다. 금방 쓴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놓지 못하고, 새로운 자리에 갖다놓고는 나중에 찾는 일이 많다. 그때마다 남편은 "물건좀 제자리에 갖다놔" "정리좀 잘해" 라고 말하는 대신 "급한거 아니니까 천천히 찾아봐. 못찾으면 내일 해도 되고" 라고 말해준다. 남편에게 서운할 때 나는 그 서운함을 증폭시키기 보다는 '이 사람도 나에게 서운한게 많겠지 나라고 다 잘하는건 아닌데'라는 생각으로 내 마음을 다스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맨 첫글에 썼던 것처럼 남편이 하루밤 술값으로 카드를 몇십만원 긁고 온다거나 술에 취해 주정을 한다거나 등등의 일이 있다면 나 또한 여느 아내들처럼 참지 못하고 언쟁을 높이게 될것이다. 다행히 내가 맨처음 남편을 선택할 때 느꼈던 '절제력 있는 사람'의 기대를 남편이 저버리지 않고 지켜주고 있다. 후원금을 못내게 해서 좀....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후~~ *두서없이 적은 저의 글에 관심을 보내주신 님들 감사합니다. 나디야님, 쭈야mom님, 드림88님, 작은들꽃님, 마법반지님, 김정은2님, 날개뺏긴 천사님. 윤택한 구슬님..감사합니다. 내일 모레면 나이 40이 되는 아줌마인데도(지금 38세입니다.) 님들의 관심이 고맙고, 감사하고, 기분좋고, 그러네요. 저는 사람을 잘 사귀지는 못해도, 작은 인연이라도 소중히 여기는데 이 공간에서의 인연 또한 저에겐 소중한 것입니다. 이 곳을 통해 간간히 살아가는 이야기 나누도록 해요. ---비단. 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