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농구선수를 꼽으라면 여러분의 선택은 누구인가요?
아마도 신동파, 이충희, 허재, 서장훈 등이 떠오르시겠죠? 여자농구 선수로선 박찬숙? 정은순?
그러나 남녀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수이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한민국 농구 전설은 명실공히 박신자입니다.
1941년 12월 26일에 출생한 박신자는 숙명여중, 숙명여고를 거쳐 실업창단팀인 상업은행에 합류했습니다. 50년대 한국 여자농구는 여자고등학교 농구였습니다. 고등학교 선수들 중에서 국가대표가 뽑히던 시절이죠. 그러다가 1957년에 한국은행팀이, 1958년에 상업은행팀이 출범을 한 것입니다. 박신자는 숙명여중 2학년 때 농구선수로 기용돼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196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국기는 단연 여자농구였습니다. 여자농구의 높은 인기에 그나마 근접한 운동종목은 프로레슬링 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한국 여자농구는 아마추어지만 프로와도 같은 마인드로 연습과 경기에 임하는 수준높은 구기종목이었고, 박신자는 이러한 국민 스포츠의 최고봉에 있던 선수입니다.
박신자는 당시로선 초대형 장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요즘으로 치면 190 센티 이상) 176센티의 키에 긴 팔다리와 유연함까지 갖춘... 농구를 위해 태어난 선수였습니다. 게다가 기본기까지 탄탄해 센터이면서도 가드 못지 않은 드리블 실력과 패스워크를 자랑했죠.
박신자 선수의 플레이 영상을 구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5~60년대 '대한 늬우스' 영상들을 닥치는대로 모으고 다운받아 그나마 남아있는 박신자 선수의 플레이 영상 몇 개를 찾아냈습니다. 완전 노가다로 만들어낸 GIF 영상들이니 어디로 퍼가실 때 출처 정도는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1. 옥외경기
1963년에 장충체육관이 만들어지기 전, 여자 농구대회는 이렇게 옥외 경기장에서 벌어졌습니다. 여름이나 겨울엔 경기하기가 쉽지 않아, 농구는 봄.가을 스포츠였고요. 이 경기는 당시 최대의 라이벌전, 한국은행 대 상업은행 간의 대결이었으며, 경기장은 서울 시립 운동장이었습니다. 1961년 모습입니다.
마지막에 오른손 점프 훅으로 득점하는 선수가 박신자입니다.
2. 일본 니까미싱 팀과의 경기
일본엔 절대로 진 적이 없는 박신자가 이끈 상업은행팀. 이 경기는 당시 일본 최고의 실업농구팀인 니까미싱 팀과 상업은행 간의 경기입니다. 공을 스틸해 전방으로 찔러주는 패스를 한 선수가 한국팀의 대들보 박신자입니다.
3. 박신자의 돌파
아시아 정상인 상업은행팀과 일본 리그 우승팀인 도쿄팀과의 경기입니다. 드디어 3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장충체육관에서 국제경기가 벌어졌습니다.
센터서클에서 공을 잡아 돌파해 들어가는 박신자의 모습입니다.
4. 박신자의 패싱
단신 센터로서 70~80년대를 주름잡았던 신선우 같았다고나 할까요? 센터이면서도 속공을 이끌다가 킬 패스를 넣어주고 하이포스트에서 컷인해 들어가는 동료에게 바운드 패스를 찔러주는 센터. 60년대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앞서나간, 그리고 세련된 플레이였습니다.
5. 박신자의 드리블과 골밑슛
센터이고 장신이면서도 드리블이 좋아서 상대팀 가드가 공을 스틸하기 위해 달려들질 못합니다. 한국팀, 상업은행팀은 박신자 덕분에 리딩가드가 2~3명 있는 셈이었습니다.
6. 한국팀 속공의 시작 - 박신자
박신자 선수는 빌 러셀을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 러셀처럼, 골밑 수비를 그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겼으며, 수비 리바운드와 블락샷은 속공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고수했던 분입니다. 이 영상에서도 그녀가 잡은 수비 리바운드는 신속한 아울렛 패스와 함께 속공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영상은 대통령배 쟁탈 한일 실업팀 초청 농구대회의 한 장면입니다.
7. 일본 상대로 보드 장악하는 박신자
유니버시아드 대회 결승전에서 홈팀 일본을 상대로 공격 리바운드를 장악하는 박신자의 활약상입니다. 정확한 스탯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저 당시 박신자는 20-20을 밥먹듯이 했다고 합니다. 20득점, 20리바운드...
8. 유로스텝(?) 밟는 박신자
일본 실업팀과의 경기, 속공 상황에서 공을 몰고 들어가 수비수 앞에서 살짝 유로스텝 밟으며 골을 성공시키는 박신자 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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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박신자라는 전설의 업적을 짧게 정리해보겠습니다.
(1) 1964년 페루 세계 선수권에는 국가대표팀이 아니라 상업은행 팀이 출전했는데, 대회 전체 성적은 8위에 그쳤음에도 박신자는 대회 베스트 5에 뽑힐 정도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경기당 20.6점으로 대회 득점왕 차지. 예선리그에서도 3경기 동안 혼자서 67점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을 '최우수' 팀으로 이끌었습니다.
(2) 1965년 제 1회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 대회(ABC) - 상업은행과 제일은행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대표팀이 일본을 두 번(87-85, 95-85)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두 경기에서 60점을 넣은 박신자는 대회 MVP.
(3) 1967년 체코 세계선수권 - 심각한 동서냉전시대였던지라 온갖 차별과 텃세를 다 견뎌야만 했던 한국대표팀은 당시 강호였던 동독, 체코, 일본, 유고를 모두 격파하고 결승에서 소련에 패해 준우승을 거뒀습니다. 대회 MVP는 매우 이례적으로 준우승팀인 한국의 박신자에게 돌아갔습니다. 박신자는 이 대회에서도 평균 19.2점으로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1967년 월드 베스트 5에 선정.
홈팀 체코를 접전 끝에 이기고 결승에 올라간 한국.
체코 상대로 그녀의 클러치 롱슛이 들어가는 순간!
여담이지만, 이 영상을 찾느라 너무 힘들었습니다.
세계선수권 준우승이란 금자탑을 세우고
공항에서부터 청와대까지 카퍼레이드 !!
(4) 1967년 일본 유니버시아드 대회 - 박신자의 맹활약에 힘입어 한국팀 금메달 획득. 홈그라운드의 텃세에도 불구하고 홈팀 일본을 64 대 43으로 제압하며 4전 전승으로 우승. 이는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여자 대표팀이 세계대회에서 따낸 유일한 금메달입니다.
(5) 1967년 세계 대회를 끝으로 박신자는 현역에서 은퇴했습니다. 이 은퇴 경기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7000명의 관중이 몰렸습니다. 장충체육관 수용인원이 3000명인데, 7000명이 몰렸다는 사실이 그녀의 인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대변해줍니다.
(6) 박신자는 1999년에 설립된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에 건립된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초대 헌액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동양인으로는 유일했습니다. 그녀의 국제적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2015년에는 대한체육회 선정 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습니다.
(7) 2015년부터 WKBL에서 그녀의 이름을 건 서머리그가 개최됐습니다. 우승팀과 MVP의 트로피는 특이하게도 과거 여자농구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을 입은 현재 그녀의 모습을 딴 피규어가 수여되는데, 여느 트로피에 비해 독특한 모양인지라 이에 대한 호평까지 더해지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국가대표 슈터로 명성을 떨쳤던 박정은(43) WKBL 경기운영본부장이 박씨의 조카입니다.
이상으로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전설, '영원한 백넘버 14번' 박신자 씨를 소개하는 짧은 글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와 귀한 자료 잘 봤습니다 옛날이라 포지션이 센터에 묶여있지만 다재다능한 모습이 르브론 같네요
와!! 엄청난 자료네요!!! 늘 소중한 자료 감사히 잘 보고있습니다^^
와 너무 재밌네요.
소중한 자료네요. 잘 봤습니다.
명성만 들었던 분의 플레이와 업적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갑자기 생긴 궁금증인데요, 70년대 한국여자농구는 어느선수들이 활약했었나요? 80년대 중후반 부터는
귀에 익은 이름이 많은데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어떤 선수들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60년대 - 박신자, 최윤자, 김명자, 김추자, 임순화 (67년 세계선수권 준우승)
70년대 - 강현숙, 정미라, 홍혜란, 조영란, 박찬숙 (79년 세계선수권 준우승, 미국을 꺾기도 했던 팀)
80년대 - 김화순, 성정아, 박양계, 이형숙, 최애영 (84년 LA 올림픽 은메달)
이 외에도 많지만, 시대별로 베스트 5를 뽑으라면 이 정도로 추려집니다.
@Doctor J 감사합니다!
@Doctor J 제 기억이 좀 잘못된것 같습니다. 정미라 누님은 80년대까지 활약했고 박양계 누님이 오히려 80년대 초반 이후에는 연차가 되어 은퇴하신게 아닌가요? 예전 정미경누님하고 헷갈린건가...
@라떼 아닙니다. 정미라 선수는 70년대 중후반이 전성기였고, 박양계 선수는 82-83년부터 대표팀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신참이었어요.
@Doctor J 역시 정미경선수 인것 같습니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은.. 이름이 맞나? 전주원 입단으로 현대가 서울은행과 드디어 해볼만하다. 라고 당시 평가된걸로 기억나는데
그리고 80년대는 이형숙누님도 대단했지만 그래도 베스트로 꼽자면 최경희누님이 들어가야하지 않나요? 이 누님도 시대가 조금 뒤로 봐야하나..
소중한 자료 감사히 잘 봤습니다 ^^
와 이건 오랜만에 보는 대박자료인거 같은데요 ㅎㅎㄷㄷㄷ 감사합니다
와 체육관 만원인걸보며 당시 여자농구의 인기를 실감해봅니다
와 레전드그자체군요
플레이 스타일은 다르지만 단신 센터로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건 웨스 언셀드랑 닮았네요
이분은 차치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박찬숙 성정아 정은순 보다는 정선민이 좀더 위라고 생각합니다^^
와~~ 박사님 덕분에 대한민국 최고의 레전드 선수임을 다시 알게되었습니다.
소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대박자료네요. 우리나라 농구에도 월드클래스가 있었다니. ㄷㄷㄷㄷㄷ
빌러셀을 존경했다는게 대단히 인상깊습니다.
지금에야 흔한일이지만, 당시에 미국 선진농구에 관심을 갖고 특정 선수를 연구할 수 있다는 건 보통의 열정과 의지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 같아요.
거기에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 드넓은 시야를 그 시대에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존경스럽네요.
오히려 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진 NBA 농구중계를 AFKN을 통해 보는 농구인들도 많았고, 스포츠 주간지나 신문에서도 NBA를 기사화해서 많이 다뤄줬었어요. 아마도 박신자, 신동파 옹들을 통해 농구의 인기가 너무 높아서였기 때문일 겁니다. 축구가 아닌 농구가 국기였던 시절이니까요.
여자농구의 역대 빅쓰리 = 三朴
박신자 - 박찬숙 - 박지수
와 잘 봤습니다 박사님~^^
와 ... 대단하시네요. 이런 분이 계셨다니
이거 박물관 아닙니까 ㅋㅋ 잘봤습니다
박신자씨, 직접 뵌적이 있는데 손이 정말 큽니다!
자료 모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너무 잘봤습니다.. 항상 박신자컵 이라할때 궁금했는데 이런 엄청난분이셨군요
귀한 자료와 멋진 글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박정은이 박신자 조카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네요...
정말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너무 잘봤습니다 !
와~처음 알았네요! 위대한 선수를 알게 되어 영광입니다
박사님, 감사합니다!!
와 정말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박사님 정말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밌고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알게되서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국기라니...와...
제가 미쿡에서 리틀리그 야구 코치를 하는데 저희 팀에 만 11살 짜리 한국 애인데 덩치가 저보다 큰 아이가 있어서 흥미롭게 생각했는데 할머님께서 오셔서 언니가 유명한 농구 선수셨고 본인도 농구 선수 셨다고 하셨습니다. 우연치 않게 Doctor J님께서 쓰신 글과 얼마전에 손대범씨가 쓴 기사가 생각나서 혹시나 해서 저희팀 선수의 어머님께 여쭤 봤더니 그 할머님의 유명한 농구선수 언니가 박신자님이시더군요...
저희 팀 선수의 어머님과 이모 조카 관계이신거죠.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한번 여쭤보려고 합니다 박신자 선수님에 대해서...제 세대의 농구 선수는 아니셔서 제가 아는 정보는 별로 없지만 Doctor J님의 글과 손대범씨의
기사를 토대로 대화를 이끌어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인연 가지시길 바랍니다. 호주 시드니에 박신자 님을 엄청 존경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고 대신 좀 전해주시고요.
저 영상들을 찾기 위해 수백 개의 대한뉴스 영상들을 찾아봤다고도 전해주세요.
@Doctor J Doctor J님 글 링크를 어머님께 보내드렸습니다~
이런 자료 첨 보내요. 귀한 영상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전 그래서 종목을 불문한 우리나라 여자 운동선수 탑 5에 이분을 빼 놓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토론 함 해볼까요. 제가 생각하는 탑 5는 박신자 현정화 박세리 김연경 김연아 입니다. ㅋㅋㅋㅋ
현정화가 사알짝 밀리는데. 나머지 넷은 거의 분명한 빅 4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