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산책 31일 - 양병모 목사님과 떠나는 신약산책 /주님이 열어주시는 새 언약으로 안으로 임하는 천국을 경험하세요 !
세례요한하면 터프한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띠를 질끈 동이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광야의 사나이...모습이 베드로보다 더 터프하다. 지난주에 어느 한 분이 묻는다.
메뚜기를 먹었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
그렇다, 메뚜기가 우리 옛날에 도시락 반찬 먹듯이 농약 뿌리기 전에 논에서 메뚜기 나오듯이
메뚜기가 많아서 먹고 있을까? 우선 있으니까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뜻이 있다.
그래서 오늘, 과연 그가 입었던 옷 먹었던 음식이 무슨 뜻인가?
그것을 기록하는 기자들이 하나 하나 표현을 세부적으로 한 것은 의미가 다 있는 것이다.
말씀드렸다. 성경순서가 의미가 있고 마태복음 1장부터 28장까지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것은 곧 믿음의 족보요, 말씀의 족보요 여인의 족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여인의 족보를 통해 오신 예수님은 말씀이신 베들레헴, 그 곳에 오실 수 밖에 없었고
그 베들레헴 떡집을 사모하는 동방박사들, 즉 우리를 뜻한다. 언젠가 우리가 동방박사의 모습으로
베들레헴 그곳에 머물렀을 때 밖의 하늘의 나의 별이 아니라,
그 별은 점점 내 안에 들어오는 은하수가 된다.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께 동방박사들이 그 보배의 3가지 보물들이 이제, 언젠가 내가 저분 앞에 갔을 때
내가 드려야 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되는 것을 우리가 알았다.
자 그런데, 예수님께서 드닷 없이 애굽으로 피신을 가신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도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인간의 여정을 그대로 밟게 하시는
것이다. 그럼 인간의 여정이 처음에 어디서부터 출발이 된다? 애굽에서 출발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야곱을 통하여 애굽으로 보내시지 않나? 애굽에서 광야를 거처서 어디로 가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다. 인생의 여정을 보여 준 것이다.
사도행전을 나눈 분들은 아브라함의 여정도 똑같은 것을 알 것이다.
그는 앗수르에서 부터 저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가서 머무른 곳이 어디었다? 하란에서 머문다.
하란에서 머물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 아브라함의 여정도 갈대아 우르, 그 이방의 도시에서,
즉 이것은 애굽을 뜻하는 것이다. 하란으로 간다. 하란은 광야를 뜻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묻어 버리는 것이다. 나의 옛 사람을 내려놓는 그 광야에서 아브라함이 누구를 묻어버리고
가나? 아버지가 죽는다. 나의 세상에서 나를 가르쳤던 내 스승이라고 믿었던
세상의 아비를 묻어버리고 가는 곳이 광야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 가셨던 것이다.
그럼 우리가 마태복음 3장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나? 광야이야기가 있을 것으로
알 수 있다. 광야로 사람들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인생은 광야를 거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세례요한 당신 이들은 가나안에 있었지만 그들의 속성은 애굽속성이다.
그들이 지금 가나안에 살지만 광야를 거쳤던 사람인가? 애굽에 있었던 사람들인가?
아니다 그냥 가나안에서 난 후손들이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삶은 애굽의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애굽을 거치도록 했고 그리고 주님 스스로가 애굽에서 출발을 하시며
이제 그 다음에 그들을 광야로 불러내서 광야를 거치게 한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역할은 사람들을 광야로 불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광야의 세례요한이다.
그리고나서 4장에 가면 누가 또 그 광야로 가나? 예수님이 광야로 가신다.
애굽으로 내려 가셨던 예수님 당신 스스로가 광야로 가서 체험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생여정은 이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애굽에서 광야로 그리고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인생여정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끊임없이 묻고 있는 것이다.
“너는 지금 애굽사람이냐? 너는 지금 광야사람이냐? 너는 지금 가나안 사람이냐?”를 묻고 있다.
사도행전 7전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 중에서 광야를 교회라 한다.
즉 광야는 나의 옛 사람의 속성을 벗어버리는 곳, 모래톱에 묻어버리는 곳, 그것이 교회다.
그럼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는 목적은 바로 이거다. 나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기 위하여 말씀의 칼로
나를 수술하는 것, 그래서 이 시간은 이 테이블에 올라가서 옷 다 벗고 누워야 되는 것이다.
“오늘 저를 말씀의 칼로 수술하여 주소서.
나를 세부적으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갈라내서 그 곳에 있는 죄악들...
나의 정과 욕심들을 좀 드러내 주소서”이 시간이 예배시간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광야의 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이고 어떤 대가와 회피와 어떤 목적 하에 와 있다고 하면 그것은 광야에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 사람은 애굽에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최소한 광야에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가나안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신다. “너는 이제 가나안 사람으로 살수 있다. 족하다”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나는 세례요한을 계속 묵상하면서 그의 복장과 그가 먹는 것 그것이 어떻게 세례로 연결이 되고
그것이 어떻게 회개로 연결되는 것은 같이 더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은 세례요한이 왜 이 땅에 와야 겠고 어떤 역할을 하고 떠났는가를 알게 되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세례요한, 그에 대해
오늘 3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1. 시대적 사명을 안은 사람
사명이라는 것은, 대사 라 하여 명령을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사명이라는 것은 그 사람을 보내면서 어떠어떠한 일을 하라고 임무를 주는 것이다.
그럼 사명을 받았다 하면 그 사명은 누가 주는 것인가? 보낸 사람이다. 대사의 사명은 파견하는 나라에서
준다.소명, 이라하면 부를 소, 라 하여 불러서 소명을 준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Colling, 소명이 있느냐?
그렇게 묻는다. 소명은 부른 사람이 준다. 모두 비젼에 대해 좋아하고 이야기 한다. 양희은의 노래에 보면
“네 꿈을 펼쳐라..” 모두 네 비젼을 펼치라 한다. 내 비젼이다. 많은 비젼에 관한 책들이 있는데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누구의 꿈과 비젼이더라? 자기의 꿈과 비젼이더라...
한번 물어본다. 요셉이 꿈을 가졌었는가? 비젼을 가져었는가? 가졌다.
2가지를 보여 주었다. 볏단들이 절하는 것과 별과 해와 달들이 절하는...
이것은 요셉의 꿈과 비젼이었나? 하나님의 꿈과 비젼이었나? 하나님의 꿈과 비젼이었다.
요셉과 상관이 없었다.
볏단들이 절하는 것은 정말 가물 때에 너가 많은 나라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준다는 것이고
별과 해와 달들이 절하는 것은 이제 열두지파가 와서 네게 그 중에 그들에게 존경받는 위치에 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젼이다.
세례요한 그는 사명을 알았던 콜링을 가졌던 사람이다.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는 제사장이었다.
제사장이면 먹을 것 걱정 안하고 괜찮게 대접받는 사람이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몫을 주게 되어 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로 대접받게 되어 있고 그럴듯한 옷 입고 다니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광야로 간다.
그는 괜찮게 살 수 있는 지위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광야로 간다. 그는 가문있는 집안으로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주변에서 인정하게 되어 있다. 기본적인 제 몫만 하면...
그런데 그는 그런 것 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광야로 간다. 광야는 기쁨보다 아픔과 슬픔이 많은 장소다.
그 곳을 스스로 선택하여 가는 것이다. 왜 그랬는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외치는 자의 소리이기 때문, 곧 말씀을 전하는 자다. 광야에서 외치는 나는 말씀이다.
그가 외쳤던 주 메시지는 주를 예비하라는 것, 준비하는 것, 즉 그는 도로포장 하러 간 것이다.
그는 시대적 사명을 받았던 사람이다.
우리에게도 시대적 역사적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아 가고 그것을 알아가는 사람을 시대적
소명이 있다는 사람이다. 세례요한 그는 그 분이 오시는 길,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을 예비하러 가야 돼..
이것을 알았던 사람이다.
내가 이 땅에 왜 태어 난 것을 깨닫는 것은 참 중요하다. 사명을 아는 사람은 가치 있는 인생이다.
세례요한은 그것을 알았다. 자기가 이 땅에 온 그 사명을 위하여 올인한 인생, 아름다운 인생이다.
지금 세례요한처럼 지금 있는 직업을 내려놓고 광야로 가라거나 목회자 되라는 것 아니다.
우리에게 공통 된 사명 하나는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은 것이다. 여러분 몇 십년 전보다 경제가 부흥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지만
그럴수록 왜 마음속에 더 텅빈 공간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때로는 새벽종이 울렸네...하며
새 마을 운동하던 그 때가 더 행복지수에서 높았던 것을 여러분 아는가? 뭔가 물질적인 충만감은
수준이 좋아졌는데 재래식 변소에서 전부 수세식 변소로 옮겨졌는데 왜 자살률은 더 놓아지고
왜 삶의 텅빈 공간은 더 커지는가? 인생의 광야는 삶의 외적인 질과는 무관하다.
분명, 이 땅의 삶이 혼돈과 무질서, 그 두 가지로 표현하기 적절하다. 자기의 유익에 상관되면 나라에
이익없다.엊그제 같은 행사에도 야당은 이쪽에서 여당은 저쪽에서 서로 자신들의 구호를 외치면서
경축행사를 하고 있다. 진보는 이쪽에서 보수는 이쪽에서...의견이 다르면 갈라지고 나라도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것이 혼돈과 무질서다. 이 가운데서 질서 있는 삶, 정말 하나 된 삶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 직장에서 있는 그 곳이 광야이다.
여러분 가정이 있는 그 곳이 광야다.
여러분 교회, 광야교회라 했다. 목사인 저만 외치는 자의 소리인가?
여러분이 가정에 있다면 자녀들에게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이 외치는 자의 소리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여러분 직책을 떠나서 남녀를 떠나서 문제를 떠나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 이것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정말 저 분이 오시는 그 날, 그 날을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이 시대적 소명을 가슴에 새기는 시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2.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겸손한 사람
보라, 세례요한은 잘 나가고 있다. 그가 입은 옷과 음식만으로도 사람들의 기를 제압해 버린다.
상상이 안 되나 광야의 세례요한의 모습이...가문도 확실한 제사장 가문이고 그가 외치는 메시지도
분명하다.아주 멋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다. 인산인해를 이루며 몰려 가고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이런 사람을 요즘말로는 뭐라 하나? 영웅, 바로 광야의 스타다.
정말 떳다. 사람들이 그를 향해 몰려 간다. 음식점도 사람들이 몰려가면 그 지역에서 스타인데,
인산인해로 그에게 몰려 가는 것이다.
자 이럴 때에 기적과 이적도 나타나고 사람들이 와서 고침 받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지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이제 그것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에게 사람들이 와서 “네가 정말 기다리는 그냐? 네가 우리가 바라던 그 사람 아니냐?” 그러면
이렇게 확 뜰 때 뭐라고 하겠나? 대답안하고 입만 가리고 있어도 되는 것이다. 그럼 사람들은
그 사람이다. 라고 생각할 것 아닌가? 그러면 멋있게 더 뜨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을 보자,
19-23절,“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계속 묻는 말에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도 엘리야도 선지자도 아니라 한다. 이때 제자들은 어떠했겠나
그냥 스승님이 가만 계시면 되는데...처참한 것이다. 그렇지 않겠나?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 이제 십자가
지러 가야돼, 그러니까 베드로가 이리와 보쇼, 하며 목 잡아 끌고 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예루살렘의 스타인데, 영웅인데 죽다니...
그들이 따르면 스승이 죽으면 그들은 쫄딱 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발 좀 그 얘기 좀 하지 마시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쌍수를 들고 로마병사하고 좀 붙여 보아야 되겠다. 그럼 뭔가 능력을 발휘할 것 아닌가?
그런 생각에서 갔던 것이다.
요한복음 3장 26-30절,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자 보라, 세례요한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저 쪽으로 다 갑니다. 하니
세례요한이 저 쪽이 바로 왕스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왕스타 쪽으로 몰려가는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저 쪽으로 다 갑니다. 큰일났습니다. 우리 집에 파리 날리겠습니다.
저 쪽집이 더 맛있다고 소문이 나가지고 다 가는데 아 잘 되던 이쪽 집 식당주인이 저쪽이 맛있어,
이야기 할 수 있나? 저 쪽이 더 맛있어 내가 가서 먹고 왔는데 정말 맛있어,
그러니 사람들이 저 쪽으로 갈까 안 갈까?
아마 마음이 한량없이 넓으신 분은 야, 그래도 내가 여기 남아있는 것이 시대적 사명인가 보다.
하고 앉아서 먹을 사람 있겠지만 그 쪽으로 간다.
27절에 보니 나는 그의 길을 닦는 자니 너희가 그것을 소문내라고 한다.
우리 집 보다 저 쪽집이 맛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소문내라는 것이다....
내가 말씀전하며 괜찮은 줄 알았는데 저기 교회가 생겼는데 그 교회가 진짜더라. 여러분 그리고 가시오,
여러분들이 오늘 미참한 사람들에게도 소문내서 다 그리고 가시오. 난 못해, 절대 못해, 난 끝까지 진짜야...내가 더 확실해...
요즘 원조집 한 군데 찾아가면 그 주변에 원조집이 수십군데 있더라. 그리고 그 앞에 뭐를 붙이더라?
더 원조, 진짜 원조, 원조의 원조...얼마나 가짜가 많으면 참기름 하면 되는데 진짜 참기름이라...
그것도 부족해 순 진짜 참기름...어떻하면 내가 진짜일까? 어떻하면 내가 정말일까?
교회는 간단하다. 사람들이 몰려가면 저거 이단이야. 그러는 것이다. 순복음교회가 부흥이 일어나니
주변 대형교회들이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니 이..야..그러는 것이다. 그 다음 말은 알아서 단이야 ..
하는데 ...그러고는 난 이..라고만 했어. 그런데 진짜 크니까 다 발뺌하고 난 그런 적 없어,
난 이라고만 했어, 난 단이라고만 했어, 지금 순복음 교회를 이단으로 보는 데 없다.
어떻하면 내가 진짜로 보일까? 이것이 오늘날의 세태다. 명함에도 뭐했고...가득 써가지고 다닌다.
가짜 속에 자신이 없으니까.
세례요한은 자신의 한계를 안 사람이다. 내 역할이 여기까지라는 한계를 안 사람이다.
나는 그 분과 견줄 수 없어, 나는 도로 까는 사람이야, 저는 세례요한을 생각하면서 또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 이름은 엄청나 입에 올리기도 부담스러운 분, 모세다.
그는 떠나야 될 시간을 알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 나의 역할은 가나안 입구까지다.
가나안 땅을 넘어가면 누가 지도자로 선다? 여호수아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교만한 사람은 뭔가? 자신의 한계를 모른다. 겸손이라는 것은 점점 성숙되어 갈수록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I can do anything 이것은 자기 지식가지고 자기 돈 가지고 자기의 연계된
친구들, 사람의 끈 가지고, 그런데 점점 깨닫게 되며 나는 못하는 것도 있네.
부분적으로만 할 수 있네 I can do something, 이것이 조금 자신을 알게 된 사람,
더 알게 되는 사람은 I can't do anything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창조주 앞에서 이렇게 고백할 때 그를 들어 올리신다.
그러면 능력 주시는 그 분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세례요한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평가는 그는 여자가 낳은 자중에서
마태복음 11장 11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낮아진 사람, 겸손한 사람, 하나님이 들어 쓰신다. 우리는 끝없이 크려고 하고 끝없이 높아지려고 한다.
많아 지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커질까? 어떻하면 많아질까? 인간적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고
그와 함께 군림하려 하고 대접받으려 한다.
세례요한,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던 사람이다. 내게 주신 한계가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바닥에서 올리신다. 예수님이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으시지 않았나?
3. 떠날 때를 아는 사람
요한복음 3장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알았고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알았기에 겸손한 가운데 일했고 마침내
그는 자신이 떠날 때를 안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떠나는가?
마태복음 14장에 그가 죽는 장면이 나온다. 4절에 보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세례요한은 알았다. 그 말이 헤롯을 얼마나 거스르게 할 것인가를..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는다.
왜? 그는 시대적 사명을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예 라면 예라하고 아니라면 아니라고
선포한 사람이다. 사람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다.
세례요한은 이 말로 인해서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그 정도는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떠날 시간을 알았다. 그러자 마침내 헤로디아의 요청에 의해서 헤롯이 세례요한의 목을 치지
않나? 12절,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세례요한, 그는 마침내 죽는다.
괜찮은 가정의 집안에 태어나서 그냥 편히 안주하며 살 수 있을텐데 그는 광야에 가서 자신의 사명이
이것이라고 이야기 하며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된다. 궂이 다른 사람 미움 받을 필요 없었는데
그래도 그는 겸손한 인생을 살아간다. 는 마침내 떠날 시간을 알고 떠나준다.
천박한 인생은 무엇인가? 떠날 때를 모르는 인생이다. 천박한 정치는 무엇인가? 떠날 때를 모르는
정치인이다. 그 자리에 더 눌러 있으려고 할 때에 이제,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크면 목소리가 커질 때가
있다. 그런데 그 때도 내 목소리를 주장하려 하고 할 때는 뭔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점점 내 목소리를 낮추어 가는 것, 이것이 떠남의 연습이다.
직장에서도 후계자에게 빨리 넘겨 줄 때를 알면, 그 시기를 맞추어 잘 물려 주어야 그것이
아름다운 퇴장이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시기에, 언젠가 떠나야할 그 시기라
생각 할 때 떠나는 것이 아름다운 퇴장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의 다음의 곳에서 이미
맞이하고 계시는 것이다.가장 아름다운 떠남의 자리는 이제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것, 그 때를 정말 가뿐하게 넘어가는 것이
이 땅의 아름다운 퇴장이다.세례요한은 이런 인생을 산 것이다. 아름다운 퇴장을 한 세례요한
이후에 예수님께서 더 드러내서 활동하시게 되는 것이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빌리그래함 목사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여의도 광장에서 100만명이 모여서 집회했던 분, 이제 이분이 89세이다. 이 시대의 영적지도자며 거장이다.
아마 이분의 이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이 분을 한국에 있는 목사님 몇 분이
가서 방문했다. 방문하고 인터뷰한 내용이 어제 나왔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올해 89세인 빌리그래함 목사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들을 안고 있어
성경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을....“
89세의 이 분의 아쉬움은 먹고 싶은 것 제대로 소화 못 시켜서 못 먹는 것이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준비되자는 것이다. 저 분의 편지 되자는 것이다. 그 때를 대비해서 읽을 수 없을 때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때 그 때를 대비해서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자는 것이다.
성경이 없어도 눈에 보이는 것, 들려 지는 것 없어도, 내 안에 성경이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
놓자는 것이다. 말씀을 준비한 사람은 그 시간이 그렇게 힘들고 지루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분은 준비안 된 것 보다 더 좀 보고 싶다는 그런 말씀이리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천국으로 데려 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날을 열망하며 고대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섯가지 중요한 질문을 남겨 놓겠다 하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죽은 후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 인생의 마무리를 눈 앞에 두신 영적 거장인 이 분이 이 다섯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저는 이 질문과 세례요한과 어떤 관계가 있냐를 마무리 짓고 마치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양.., 나는 목사..이것이 내가 아니다. 절대자와 관계하지 않은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저 분과의 사이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왜 여기에 와 있는가?
나는 죽은 후 어디로 가는가? 과연 인생은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인가?
나를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오늘 세례요한을 말씀드리며 저는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는 시대적 사명을 안 사람이다. 그는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 알았던 사람이다.
세례요한은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를 알았던 사람이다. 그는 겸손하게 살아야 됨을 안 사람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것 싫어하신다. 겸손한 인생, 피조물인 것을 깨달은 인생,
나의 직책과 내가 해야 될 역할을 아는 인생, 나의 한계를 아는 인생, 한계를 모르는 인생은 짐승과 같은
인생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나는 죽을 후에 어디로 가는가?
떠날 줄 아는 사람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안다. 어디로 가는 지를 아는 사람은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이다. 세례요한이 그런 사람이다. 세례요한이 이런 삶을 살 때
나는 누구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갔던 사람이다.
오늘 세례요한의 삶을 통하여 빌리그레함 목사님의 질문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나가야 되고
오늘 이 자리에서 내 자신의 삶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그런 복된 자리 아름다운 자리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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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광명 남부교회 사랑하는 님들~ 이곳은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이었습니다~ 감사중에서도 좋은 말씀을 대면하는 은혜에 감사의 마음 여기 두고 갑니다~ 한 주간도 모두 환경을 넘는 평강 누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