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자(單子) 시초면 태성리 이장이 서천향교에게 올린 단자 (1962년)
장성(長城) 서씨인 서희진은 선조(宣祖) 임진왜란(壬辰倭亂) 정난원종공신(靖難願從功臣) 서연복(徐連福)의 13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서영규(徐泳奎) 셋째 아들로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지냈으며 그는 학문(學文)이 뛰어나고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서천군 시초면 태성리에 정려비각(旌閭碑閣)이 있다.
서희진의 아들 호 송학정(松鶴亭) 서열한은 효(孝)를 세습(世襲)한 효자로서 부친의 병환에 5년 동안 백방(百方)으로 살피었으며 위급할 시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수명(壽命)을 연장(延長)하기도 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였을 때에는 풀하나 나지 않은 자연(自然) 도로(道路)가 생길정도로 3년 동안 조석(朝夕)으로 끊임없이 성묘(省墓)를 다니는 지극한 효심을 가졌다.
모친(母親)이 질환(疾患)에 걸렸을 때는 하늘에 기도하며 사방(四方)으로 약초를 구하기에 몰두(沒頭)하다가 기력(氣力)이 쇠약(衰弱)해져 산에서 졸도(卒倒) 하였으나 홀연 꿈에 노인(老人)이 나타나 약초를 가리켜 지시(指示)하기에 이를 구(求)하여 어머니께 드려 81세에 이르는 장수를 하였으며 약초의 이름은 황매초(黃梅草), 즉 전언(傳言)에 의하면 고의새양풀 이었다.
또한 그의 처(妻)인 유인(孺人) 김씨는 시어머니의 5년간 지속된 와병(臥病)에 대소변을 받아 내는 간병(看病)을 하면서도 군자와 같은 마음으로 조금도 불평불만 없는 효심을 가지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송(稱誦)이 자자하자 부부(夫婦)의 정신을 사람들이 이어받고 기릴수 있도록 하자며 이장(里長) 고세규외 14인이 서천향교 유림(儒林)들에게 올린 단자(單子)이다.
이장 고세규를 비롯한 강상옥, 노승목, 이경래, 육정근, 고광표, 백홍기, 구우환, 고광준, 백신출, 김석규, 서열주, 최갑귀, 황의동, 송신석 14인이 올린 단자를 서천향교 유림(儒林)들은 심의한 후 부부간의 효심이 가상하여 모두가 칭송하며 전할 수 있는 비를 세워 칭송하자는 결론을 1963년 2월 1일에 내고 승인까지 하였으나 사실상 비는 세워지지 않은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