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저우 여행16 - 사자림을 보고 나와 외성하 운하를 보고는 민가 골목을 구경하다!
2023년 10월 26일 유(遊 ) 1 버스를 타고 북사탑 (北寺塔) 을 보고는 7~8분을 걸어서
쑤저우의 비단 박물관인 소주사조박물관 Suzhou Silk Museum 을 구경합니다.
15분을 걸어 북사탑을 지나 쑤저우 역사박물관 (苏州 歷史博物馆) 과 태평천국의난 때 충왕부 를 지나
졸정원 을 보고는 나와 걸어서..... 다시 스쯔린 狮子林(사자림) Lion Grove Garden 을 구경합니다.
스쯔린 狮子林(사자림) 을 나와서는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걸어서 운하
외성하 (外城河) 에서 동양의 베네치아 라고 불리는 수로를 구경합니다.
이런 운하가 그물망 처럼 퍼져서 태호(太湖) 호수에 이르고 더 흘러서 양자강(장강)
으로 연결되니...... 사람들은 쑤저우(소주) 를 "물의 도시" 라고 불렀나 보네요?
여기 작은 운하에는 서양풍으로 생긴게 카페 도 있고 또 운하변에는 벤치 도 많으니 젊은
남녀들 이 앉아서 오후 한때를 즐기는데 이런 곳을 소위 “핫한 곳” 이라고 하나 봅니다?
젊은 연인들을 보니 문득 김기용 베이징 특파원이 동아일보에 올린 “남아선호 中, 신부 모자라 원치않은
독신男 3000만 치열한 ‘신부 모시기’ 경쟁 내몰려” 라는 기사가 떠오르는데.... 과도한 지참금 지급
사회문제로, 비자발 독신 증가로 사회불안 우려, 올해 출생인구 800만명 밑돌수도 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최근 중국 저장성 타이저우시 에서 결혼식이 열리는 식장 앞에 현금 998만 위안(18억1000만 원)
을 실은 수송차가 멈춰 섰다. 무장한 보안요원들은 현금을 수레에 싣고 들어와
신부 앞에 쌓아 놓았다. 중국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지급하는 이른바 ‘차이리(彩禮· 지참금)’ 이다.
이 사건이 중국 매체에 보도되면서 과도한 신랑 지참금 문제가 부각됐다. 당시에는 일부 졸부들이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려는 잘못된 사례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남녀 성비 (性比) 불균형 이 초래한 구조적인 문제가 불거진 것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12일 징지관차(經濟觀察)보를 비롯한 중국 매체에 따르면 중국인구학회 부회장 위안신 (原新) 난카이대
교수는 “남아선호 사상 영향으로 장기간 남녀 성비 불균형을 겪은 중국에서 3000만 명 넘는 남성 이
배우자를 구하지 못한다” 면서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동적 독신’ 이 되고 있다” 고 밝혔다.
‘수동적 독신’ 은 최근 리오프닝 (경제 활동 재개) 이후 예상 보다 더딘 경기 회복과
부동산발(發) 경제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예식비, 주거비 등을 감당하기
힘든 젊은이들이 능동적, 자발적으로 독신 이 되는 현상과 구별하기 위한 용어다.
위안 교수에 따르면 1982년 중국 출생 성비(여성 100명당 남성 수)는 108.5 로, 적정 성비 상한선
으로 간주하는 107 을 넘어섰다. 2004년 121.2 까지 치솟았다가 한 자녀만 허용하는 산아
제한 정책과 남아 선호 사상 퇴조로 2021년 108.3 까지 떨어졌지만 성비 불균형은 여전한 상황이다.
그는 “1980년 부터 2021년까지 평균 출생 성비는 114.4” 라면서 “이 기간 태어난 인구가 7억
9900만명 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 42년 동안 남성은 여성 보다 3400만∼3500만명
더 많게 된다” 고 설명했다. 이어 “이 기간 태어난 남성 중 3000만명 이상이 중국
에서는 배우자를 찾지 못해 원치 않는 독신 으로 지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남성들은 치열한 ‘신부 모시기’ 경쟁에 내몰리게 되고 이 과정에서 지참금
액수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중국
공산당과 국무원은 올해 최우선 추진 과제로 ‘결혼 지참금 풍습 금지’ 를 포함시켰다.
수동적 독신이 늘어나면서 다른 사회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배우자나
자녀가 없는 이들의 불안정한 노후 생활이 사회 불안 을 야기하는 요인이 될 것
이라는 지적이 있다. 중국은 2020년 기준 60세 이상 수입 구조에서 가족 부양이
27%, 노동이 25% 를 차지하며 연금은 22% 수준에 그칠 정도로 노후 대비 수단이 부족하다.
중국에서 혼인 건수도 급격히 줄고 있다. 2019년 1,000만건 아래로 떨어진 이후 지난해 683만건으로 전년
보다 80만 건, 2013년(1346만 건) 보다 절반가량 급감 했다. 결혼이 줄어 자녀도 줄자 지난해 출생
인구는 956만명으로, 중국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1949년 이후 73년만에 처음으로 1,000만 명을 밑돌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절은 연인들로 가득한 운하 를 실컷 구경하고는 옛날에 처음 소주에
왔을 때 여기에서 멀지않은 남쪽에 관첸제 (관전가) 거리를 구경한게 떠오르는데....
알록 달록한 우산이며 접시등 골동품 흉내를 낼만한 상품들이 많았던게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동쪽으로 걸어서 동원(东园) 을 먼저 보려고 하는데.... 행인에게 물어
가며 걷노라니 길은 금새 좁아져서 오래된 아주 좁은 달동네 같은 골목길 로 이어집니다.
쑤저우(소주) 는 춘추전국시대 까지만 해도 개발이 더디고 생산력이 낮은 곳으로 주(周) 영왕
12년 (기원전 560년), 수몽의 아들 제번 대에 이르러 성벽을 쌓기 시작했는데....
주경왕 6년(기원전 514년), 합려가 즉위하면서 고소성 을 새롭게 고쳐 쌓았으며
주원왕 3년(BC 473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그곳을 차지해 월나라의 영역이 됩니다.
주현왕 35년(기원전 334년), 초위왕(楚威王) 이 월나라를 멸하고 옛 오나라와 월나라 땅을 모두 초나라
가 차지해 초나라가 망할 때까지 초나라의 영역이 되었으며.... 초고열왕 원년 (기원전 262년),
초나라의 재상인 춘신군 황헐(黃歇)의 봉토가 되었고 진시황 24년(기원전 223년), 진(秦)나라의
노장 왕전(王翦)이 초왕 부추를 사로잡고, 창평군과 항연이 끝까지 저항했으나 끝내 패해 모두 죽었습니다.
통일후 진시황이 초군(楚郡) 을 설치해 군현제가 실시되었으며 초군은 훗날 구강군, 장군 (鄣郡), 회계군으로
분할되었는데... 진시황 21년(기원전 221년) 천하통일을 이룩해 전국을 36개 군과 그 하위의 현으로
분할해 다스렸으니.... 여기 고소 땅은 회계군 에 속하게 되었고, 훗날 고소 땅에는 오현(吳縣) 이 설치됩니다.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항연의 아들과 손자 항량과 항우 숙질은 여기서 진(秦) 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거병했고... 진나라를 멸한 뒤 초한쟁패기에 항우의 봉토인 서초 에 속했으며,
한고조 유방이 초나라를 멸하고 장수 관영 (灌嬰) 을 파견해 차지했는데 그 뒤 한 고조가
한신(韓信) 을 초왕 에 봉했다가 회음후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사촌형 유가를 형왕에 봉합니다.
기원전 196년 반란을 일으킨 회남왕 경포가 유가를 죽이고 고소(소주) 를 차지하였으나 곧 진압 되었으며
한고조 11년(기원전 196년), 옛 서초 땅을 아들인 유비(劉濞) 를 보내 오왕에 봉하고는 고소 를
도읍으로 삼게 했으며 한문제때 장군이 회계 군에 편입되니 장군으로 옮겨졌다가 7년 뒤 오현이 되었습니다.
한경제 대에 유비가 반란을 일으키고 죽자 오나라가 폐지되고 다시 회계군 이 되었으며 한무제
대에는 양주를 설치해 양주 회계군 오현이 되었고 서기 9년, 왕망이 전한을 멸하고
신(新)나라를 세우면서 태덕현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서기 25년, 후한의 시조
광무제가 태덕현에서 오현으로 복구시켰고 한순제때 회계군에서 오군 소속으로 바뀌었습니다.
한헌제 흥평 2년(195년), 손책(孫策)이 엄백호(嚴白虎)를 쳐서 쫓아낸 뒤 주치(朱治)에게 오군을 다스리게
해 손책의 영토 가 되었으며 그 뒤 후한이 망하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손권이 오나라 를 세우면서
강남이 개발되었고 쑤저우의 경제도 발전하였는데.... 특히 양쯔강 일대의 비옥한 환경, 동서남북
모두 수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벼농사에 유리했으니 손권의 손자인 손호 대에는 오흥군 소속이 됩니다.
서진(西晋) 의 황제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한 뒤 단양군 소속이 되었고 그 자리에 해우현을 설치했으며
동진 대에 사마연이 사마악을 오왕으로 삼아 그 봉지가 되었고, 이후 낭야왕으로
옮겨져 동진의 영토 가 되었으며.... 송나라 때에는 다시 오군 이 되었고, 교주(僑州) 소속이 되었습니다.
그후 교주에서 남서주 소속으로 옮겨졌고, 다시 양주 소속이 되었으며 양(梁)나라 대에는 신의군이 설치
되고 거기에 신현을 두었으며 훗날 오주가 되었는데.... 진(陳)나라 대에는 오주 오군 오현 이
되었고 하는데..... 문득 국제신문에 실린 “중국, 함께 오래 살아가야 할 이웃” 이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한 책상에 의자 두개 를 배치하고, 두 학생이 책상을 반반씩 나누어 사용하면서, 짝지
간에 책상 사용 면적을 두고 끊임없는 갈등과 다툼 이 있었다. 그럼에도 세월이 지나면 초등학교
짝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기도 한다. 짝지와의 갈등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듯이,
우리나라와 수천년을 함께한 가까운 이웃, 중국과 갈등과 다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느낌이 든다.
지난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양국의 인적·물적 교류와 협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중국은 G2 로,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가 되는 기반을 다졌다. 더욱이 중국의 풍부한
농수산물은 마늘과 배추 등 각종 파동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중국산 공산품
은 전 세계 소비자의 만족도를 높이고, 글로벌 물가 안정 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더욱이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으로 매년 수백억 달러의 대중 무역수지
흑자가 최근에는 빠르게 적자로 전환되면서 한중 양국의 경제적인 교류와 협력의
축소와 함께 사회전반적으로 반한, 반중 정서 가 확산되면서 한중 양국의 불편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한중수교 이후 중국 칭다오에 부산 공단 을 조성할 정도로 대중 교류에 적극적이었던 부산이 대중국
경제교류와 협력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오랜 기간 구축된 인적·물적 네트워크가 삐걱
거리면서 부산의 상공인이 고민에 차 있다. 이미 일부 기업은 중국을 벗어나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는등 대중국 투자를 축소하면서 한중 관계가 개선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고는 후지고 좁은.... 중국 서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인 골목 을 빠져 나와 큰 도로를 건너가니 여기는
조금 전에 본 것 보다 훨씬 큰 운하가 흐르고 있으니 가히 쑤저우(소주)는 운하의 도시 임을 알겠습니다.
여긴 그래도 운하라 할만한데.... 쑤저우는 옛날에는 거미줄 같이 많은 운하 가 있었으나 도시 현대화
로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그나마 쑤저우 근교에는 좀 더 원형을 보존한 퉁리(동리),
저우좡(주장) 등 운하도시들이 남아 있어 옛 정취를 찾아보려는 사람들은 근교로 찾아가기도 한답니다.
이제 동원 으로 가야 하는데 걸어갈까 하다가 마침 버스가 오기로 2위안을 내고 타고 두정거장을 가서 내려
도로를 건너서 동원으로 들어가는데.... 이게 입구에서 공원 까지가 얼마나 먼지 한참을 걸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