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공동체
롬 12 : 17~21
어둠의 세력의 지배를 받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악과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그 악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고 절망하며 포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정사와 권세들을 정복하셨을 뿐 아니라, 그 승리를 우리와 함께 나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악과 대항해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정사와 권세를 정복하셨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동기와 능력과 기쁨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기시켜 주고, 매일의 삶과 일상 속에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도록 격려해 주는 지체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늑대들이 사냥을 하는 모습을 보면 일단 사냥 대상이 되는 동물들을 흩트려 놓는 것으로 사냥을 시작합니다.
흐트러져 달리기 시작하면 부상당한 녀석들이 드러납니다. 조금 오래 달리다보면 늙은 녀석들이 쳐지기 시작합니다.
또 강한 녀석의 경우도 자신의 강함을 믿고 무리로부터 이탈하여 고립되면 그 역시 손쉬운 사냥감이 됩니다.
이러한 늑대들의 사냥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교회들을 향한 세상의 방법들이 생각나게합니다.
교회들이 갈라지면 사단의 손쉬운 먹잇감이 됩니다. 물론 먼저 부상이 있거나 늙은 동물과 같은 약한 교회들이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강한 대형교회라도 고립되는 순간 사단의 공격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믿고 모든 교회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지체가 되기 위해 복음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하는 하나님 백성 개개인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감정을 가지고 있고,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간적으로 상황에 반응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복수하는 일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가장 바르게 모든 것을 고려하여 완벽하게 각자의 행위에 대해 보응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권면하고 있는 내용들이 기독교 공동체의 범위를 넘어 세상으로 확대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스스로 복수하려 하지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오늘의 권면을 세상으로 확대한 내용입니다.
첫째 : 화목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8절)
바울이 주는 권고의 주안점은 거듭해서 화해를 시도해 보라는 도전입니다. 도저히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확신하기 전까지는 관계회복을 위한 노력을 거듭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최선을 다한 뒤에도 도리가 없는 상황이라면 그때는 '가능하다면'이라는 구절이 인간 현실의 어쩔 수 없는 벽을 인정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상황 개선을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때임을 분명히 인식할 때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도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평화를 창조해나갈 때 인간적 합리성을 뛰어넘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썼듯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상대방의 마음도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적인 동기만으로 평화를 창조하는 것은 역부족이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인간적 원리들에 종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모든 행동 밑에서 마치 트램폴린 스프링처럼 우리를 받쳐줄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높이 뛰어오르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평화를 찾고 추구하는 우리의 능력을 뒷받침해주는 자원이 됩니다.
바울은 위에서 예로 살펴보았던 요한 마가와 영원한 관계단절 속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디모데데후서 4장 11절을 보면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하고 있고 벨레몬서에서는 "나의 동역자 마가"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능하다면'이라는 첫 구절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분에게 달린 일이라면'이라는 구절을 충실히 추구하였기에 마침내 화해의 때가 찾아왔을 때 요한 마가와도 화해를 하였던 것입니다.
둘째 : 진노는 하나님께 맡겨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9절)
'결코 스스로 복수하려 하지 말고'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원수를 갚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이 정의를 추구하는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바울은 그런 태도나 그런 행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 역시 인간의 보복 욕구를 거스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가 이 지점에서 독자들을 향해 '사랑하는 여러분'이라는 애정 어린 호칭을 삽입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호칭은 로마서에서는 흔치 않은 호칭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바울은 로마 교회에 그다지 친분이 깊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서에는 친한 사이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갑자기 독자들에게 '내 사랑하는자들아'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호칭은 감옥에 갇힌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절친한 친구들에게 보낸 애정 어린 편지에 등장하는 것(빌4:1)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로 신자들을 묘사할 때(롬1:7) 그가 자주 사용했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기쁨의 원천인 그 사랑받음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제까지의 다른 권고들과 달리 명령형 형태의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요점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도 유사한 명령법을 사용한 경우가 있는데 그 역시 원수들에게 선을 베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바울은 느닷없이 그런 명령형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취해야 할 그 행동이 단 한 번 이루어지며 영원히 지속되는 결정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 악을 이겨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21절)
본문에 사용된 선과 악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들은 17절에서 사용한 단어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단어들에 차이점을 면밀히 살펴볼 때 본문에 담긴 더욱 큰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명령은 직설적입니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악에 의해 계속 정복당하고 있지 말라."입니다.
이 동사의 현재계속 명령 형태는 악에 의해 정복당하지 않으려면 지속적인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악은 그저 막연한 모습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특정한 유혹, 특정한 시련, 특정한 어려움이나 사람이나 사물의 형태로 각자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악의 개별적 형태 중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정복당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곧 이어 바울은 반대되는 명령을 우리에게 줍니다. 단지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서 멈춘다면 우리는 소극적인 사람들로 두려움에 가득 찬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 말한 후에 곧바로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줍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자유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의 상황에 맞는 창조적인 삶으로 초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하고 살아있는 제물며, 자신의 고유한 은사를 청지기로서 사용하며, 공동체 안에서 지체에게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기등으로 악에 대해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이 존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악에 굴복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악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동사 '니카오'는 '극복하다', '정복하다'로 번역되어 신양성경에서 스물여덟 번 사용되었고, 그중 열일곱 번이 요한계시록에 사용되었습니다.
종말에는 마침내 악에 승리한다는 확신 가운데 우리는 참된 소망을 발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