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詩를 말하다
- 언어로 만든 집
최지안(제4회 수상자)
남쪽을 바라보는 창에 바다가 들어온다. 하늘도, 산도, 마을의 지붕도, 네모지게 그어놓은 논밭도 기웃거리며 들어온다. 가까이에 있는 노도는 한걸음에, 멀리 여수의 산 능선은 느긋하게 걸어와 창에 걸터앉는다. 이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은 수평선 너머 그리운 먼 곳으로 치닫는다. 이 창이 시인인 내게는 바로 시가 된다. 말로 하지 않고 보여주는 시.
직업을 말할 때 보통 ○○사, 혹은 ○○가, ○○원 이라고 한다. 대체로 ‘사’가 붙는 직업은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요구한다. 변호사, 변리사, 건축사, 검사가 그렇다. ‘가’가 붙는 직업은 그 분야에 있어 한 세계를 이루는 일이다. 작가, 소설가, 화가, 건축가, 사상가, 혁명가 등. 그런데 같은 문학을 해도 시를 만드는 이에게는 사람‘人’을 붙인다. 왜 다른 직업은 모두 그럴 듯하게 무슨무슨 ‘사’ 어디어디 ‘가’라고 하는데 유독 시인만 굳이 사람 ‘人’을 붙여 놓았을까. 필시 시를 쓰는 일은 신의 영역이지만 사람이 하니까 ‘인’이라는 말을 집어넣어 격상 시킨 것이 아닐까. 그래서 시인 이병률은 ‘신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릴케는 카루스에게 보낸 편지에 ‘꿀벌들이 꿀을 모으듯 우리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달콤한 것을 모아서 신을 짓습니다. 또한 심지어 하찮은 것으로부터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우리는 신을 시작합니다.’라고 썼다. 이는 곧 시 쓰는 일이 신을 시작하는 일 중 하나라는 뜻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시를 쓰는 일은 참 어마어마한 일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일이 시인의 일이니 시인이란 명함 하나가 내게 주는 중압감은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백지 한 장을 바라보는 심정은 이 중압감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발자국 하나 찍는 것이 시인에게는 두렵고 힘든 일이다. 나도 백지 앞에 서면 움츠러들고 작아지고 초라해진다. 그렇다 하더러도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처럼 시인은 하얀 테두리 안에 언어를 가져다 놓고 시를 짓는다.
시를 쓰는 일은 집을 짓는 일과 유사하다. 대상을 정하고 서사를 세우고 은유와 환유 혹은 아이러니로 작업을 한다. 그런 일련의 작업은 마치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설계사가 집을 설계 하듯 시인은 시를 구상한다. 건축 실무를 맡은 사람이 재료를 구하고 목수를 구하여 집을 짓듯 언어를 고르고 어떻게 텍스트를 짤 것인가를 고민한다. 조적 기술자가 블록을 쌓듯 어렵게 한 줄 한 줄 쌓다가 부수고 다시 쌓아올리기를 반복하며 시인은 시의 집을 짓는다. 엉성하게 쌓은 집은 쉬 무너지고 공을 들인 집은 누가 보아도 견고하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게 지어도 시의 수명은 저마다 다르다. 언어로 만든 집은 콘크리트나 나무로 지은 집과 달리 쓰면 쓸수록 견고해진다. 많은 사람이 드나들수록 수명이 늘어난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집은 금방 금이 가고 낡아서 결국엔 무너지고 멸실되고 만다.
쉽게 무너지지 않을 시의 집을 짓고 싶다. 단단하고 오래가는 집. 사람들이 드나드는 집. 현학적으로 기교를 부리거나 화려한 말재주로 장식을 하지 않은 집. 언어적 정서를 무시하고 최첨단이라며 미래를 앞세우는 양식이 아닌, 필요한 공간에 적절하게 자리한 내 나라의 말로 지은 집. 그런 집을 짓고 싶다. 이 집을 이루는 재료는 비싸고 귀한 것이 아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흔하고 흔해서 소중한 줄을 모르는 것, 작은 것, 남루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적재적소에 들어와 바닥이 되고 벽이 되고 문이 된다. 이 집에는 지친 새도 다녀가고 나비도 머물다 가고 한숨도 쉬었다 갈 것이다. 오래전 죽은 할머니도, 시를 갈구하는 눈 먼 여인도 여기 들어와 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집에 사는 나의 시적 주체 또한 삶의 뒤쪽으로 밀려난 것들이 많다. 뿌리 깊게 파고들지 못한 것들이다. 근본 모르고 태어난 내 시적 주체는 뒤꼍에서 곱은 손을 비비거나 가난한 아비의 딸이거나 삼류인생으로 굴러먹은 삼겹살집 주인인 것처럼 날개 없는 것들이다. 이런 얄팍한 발목을 가진 것들이 내 시를 이루는 근본이고 모체다. 이렇게 작고 약한 것들의 눈으로 시를 쓰고 싶은데 내 시의 근육은 아직 빈약하여 갈 길이 멀다.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매일 절망한다. 시로 인해 즐거운 날보다 낙담하는 날이 더 많다. 내 시를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고개를 숙이게 된다. 영글지 못한 시가 떫은 내를 풍기니 내놓기 낯부끄러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말이지 시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겠다. 시인이란 이름을 아껴가며 마지막까지 시인으로 알뜰하게 발라먹고 시 쓰는 일에 나를 소진하며 늙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