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6.8.토 오전 10시에, 새성교회에서 <성령사관학교>가 열립니다. 강사:배종부 목사
*내일 6.9.주일. 오후 2시에 도봉구 <새생명교회> 예수사랑큰잔치가 있습니다. 강사:배종부 목사
*이번 주 6.10.월 오후 1시에 제45회기 <총회부흥단> 정기총회가 서울 종로구 <백주년기념관> 소강당에서 열립니다. 대표회장 배동호 목사, 사무총장 배종부 목사 취임
*이번 주 6.10. 월 저녁 7:30분부터 포항 <벧엘기도원>에서 방성용 성령의군대 지도목사님의 총 7회 부흥성회가 열립니다. 참석하시고, 중보기도 당부합니다. 강사:방성용 목사
*이번 주 <성령축복대성회>는 없습니다.
♥ ‘말’과 ‘신앙 인격’의 涵養(함양) (34P)
(골4:6) 너희 말을 항상(恒常) 은혜(恩惠)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各)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對答)할 것을 알리라.
벧전3:10-12절
(10)그러므로 생명(生命)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願)하는 자(者)는
혀를 금(禁)하여 악(惡)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詭譎)을 말하지 말고,
(11)악(惡)에서 떠나 선(善)을 행(行)하고, 화평(和平)을 구(求)하여 이를 좇으라.
(12)주(主)의 눈은 의인(義人)을 향(向)하시고,(눈은 도움과 자애의 형용)
그의 귀는 저의 간구(懇求)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惡行)하는 자(者)들을 향(向)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음)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다.
(요셉-말한 대로 이루어짐,
사무엘-하나님이 함께 계심,
엘리야, 다니엘-진실한 의인)
(삼상 3: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왕하 10:10) 그런즉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고, ‘말씀’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면, 곧 ‘말씀’이 된다.
벧전4:11절 - 만일(萬一)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奉事)하려면 하나님의 공급(供給)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凡事)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榮光)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榮光)과 권능(權能)이 세세(世世)에 무궁(無窮)토록 있느니라. 아멘.
새사람의 삶에는, 반드시 새로운 말의 은혜가 따른다.
에베소서 4:21-31절
(21)진리(眞理)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果然)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誘惑)의 욕심(慾心)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심령(心靈)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義)와 진리(眞理)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各各)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肢體)가 됨이니라.
(26)분을 내어도 죄(罪)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魔鬼)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도적(盜賊)질하는 자(者)는 다시 도적(盜賊)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者)에게 구제(救濟)할 것이 있기 위(爲)하여 제 손으로 수고(受苦)하여 선(善)한 일을 하라.
(29)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德)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善)한 말을 하여, 듣는 자(者)들에게 은혜(恩惠)를 끼치게 하라.
(30)하나님의 성령(聖靈)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印)치심을 받았느니라.
(31)너희는 모든 악독(惡毒)과 노(怒)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毁謗)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서로 인자(仁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容恕)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容恕)하심과 같이 하라.
야고보서 1:19-20절,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잠언 12:18절,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우리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 남의 가슴을 칼로 찌르는 것 같이 고통을 주는 생활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양약처럼 아픈 사람의 마음을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 2021.8.14.토. 거침없는 과격하고 원색적인 표현의 말과 인격은 큰 문제점이 있다.
지성소인 ‘새예루살렘성 (새성교회)’ 에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된다.
당신의 교회를 반드시 ‘지성소’ 로 만들어라.
나의 가장 중요한 제목을 간구하라.
♥ ‘말’ 에 대한 우리의 기도 제목 :
1>.무익한 말을 버리라.
2>.주절 주절 끝없이 늘어놓는 말을 버리라.
3>.필요없는 말을 버리라.
4>.공격하는 말을 버리라.
5>.비난하는 말을 버리라.
6>.쓸데없는 말을 버리라.
7>.淫談悖說(음담패설)을 버리라.
8>.수다스러운 말을 버리라.
9>.시간을 낭비하는 말을 버리라.
0>.육적인 말을 버리라.
11>.세상적인 말을 버리라.
12>.정치적인 말을 버리라.
13>.욕심의 말을 버리라.
14>.상처를 주는 말을 버리라.
15>.날카로운 말을 버리라.
16>.인상쓰고 하는 말을 버리라.
17>.헛소리를 버리라.
18>.고함소리를 버리라.
19>.화가 나면 말하지 않는 더 악함을 버리라.
20>.화가 나면, 기도하라.
21>.말 실수하는 자를 중보기도 하라.
22>.放恣(방자)한 말을 버리라.
23>.공경함으로 말하라.
24>.존중함으로 말하라.
25>.아내의 화, 남편의 화, 깔아 뭉개는 말, 무시하는 말, 요구를 들어 주지 않는 말을 버리라.
26>.걱정, 근심, 염려하는 말을 버리라.
27>.내안의 화와 분노와 상처에서 나오는 말을 버리라.
28>.혈기의 말을 버리라.
29>.폭력의 말을 버리라.
30>.‘성령, 성령’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며, 성령을 잘 알지 못하는 상대방을 매도하는 버리라.
31>.급한 마음과 감정의 말을 버리라.
32>.말에 대한 소심함을 버리라. - “나는 입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말 하기가 두렵고, 말을 못한다.”
33>.웃으며 말하라.
34>.분명히 말하라. 우물 우물 얼버무리며 말하지 말라.
35>.판단, 불평, 논평하는 말을 하지 말라.
36>.가능한 한 말하지 말라.
37>.남에게 남편(아내)의 말을 하지 말라.
38>.마구 쏘아대는 말을 버리라.
39>.말은 능력이 있다, 말씀이 창조했다, 자기도, 남들도 다들 말한대로 행한다, 말을 신중하라.
40>.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말라.
41>.빨리 말하지 말라.
42>.복음 전하는 말을 하라.
43>. ‘듣기 싫어!’ 라는 말을 하지 말라.
44>.답답하게 말하지 말라.
45>.가까운 사람이 충분히 말하게 하라.
46>.다 말하려 하지 말고, 기도하라.
47>.말을 오해하지 말라.
48>.말 전달을 조심하라.
49>.심술부리는 말을 버리라.
50>.아들, 딸, 아내, 남편의 말을 잘 들으라.
51>.지적하는 말을 하지 말라...
♥ 남이 나처럼,
나를 다 이해해 주고,
받아주기를 바라지 말고...
스스로 남이 이해하고, 받아 주도록
말하고, 처신하고,
그에 걸맞는 인격을 갖추라.
상황 따라 처신하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규범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처신하라.
욕설, 거친 말, 숙고 없는 충동성의 말들...
이러한 비인격적인 요소 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어느 누가 동역을 하며,
처음 만나는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왔다가 실망하여 바로 가 버리지 않겠느냐?
그 말과 인격을 볼 때에 동역할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누가 자기의 선생으로 삼고,
인생을 걸 것인가?
그래! 배목사야.
정치인들이 舌禍(설화)에 휘말리는 것을 보지?
목사는 말로 먹고 사는데, 말 실수가 있으면 절대 안된다.
오직 은혜와 감화를 끼칠 수 있는 자가 되라.
사람은 그 말과 인격에 감동받아 동역하게 되고,
그 말과 인격에 실망하여 訣別(결별)하는 것이다.
아니, 본 받을 게 없는 사람에게
왜 붙어 있을 것인가?
내가 충격을 받을 부분이 이것이다.
“말과 인격이 안되면, 사람들은 떠난다.”
나는 정말 남은 짧은 세월 18년은
말과 인격이 가장 온유하게, 부드럽게 나가야 한다.
절대 남을 지적하지 말라.
꾸중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정히 꾸중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면,
아래 스텝진에게 맡기라.
나의 말과 글이 여전히 너무 과격하다.
원색적이다.
숙고함이 부족하다.
절제가 부족하다.
나의 ‘진실함’, ‘솔직함’, ‘성실함’, ‘순수함’... 이란 영성을
잘못 표현하는 것이다.
마구 원색적으로 자기의 허물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해서
그게 곧 진실하고, 솔직한 게 아닌데, 말이다.
사실은 그게 나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이는 곧 우물 안 개구리의 매력이지!
스스로 한계를 넘어가지 못하면 안되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그 말과 인격을 다듬어야 큰 인물, 큰 사역을 하지.
리더쉽의 가장 기본 원리가 말과 인품이야!
말을 부드럽게 표현해!
인상을 웃으며 부드럽게 지어!
항상 인격적으로 처신해!
글도 부드럽게 쓰도록 애를 써!
나는 진정 온유하고, 부드러워야 해...
말과 인상, 대화, 처신 등에서 말이야!
난 너무 극단적이야.
내 속에 얼마나 큰 사랑함과 자상함이 넘치는가?
그걸 드러 내!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정치 얘기 하지 마...
망할 놈의 정치,
그게 날 늘 울분에 차게 하고, 과격하게 만들어,
나를 망쳐 놓은 원인이야...
처음 온 사람에게
인상과 말과 인격에 대하여 온전히 본이 되어야 한다.
내가 나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가지 못하면,
개척교회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딤전4: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나의 한계를 넘어 가야 한다.
자기를 스스로 작은 자로 만들지 말라.
그토록 놀라운 기도의 삶과 성령의 권능과 은사를 갖고서...
왜 옥을 돌맹이로 만들어?
珠玉(주옥)을 찬란히 빛나게 해야지...
*각자가 자기의 인격적, 처신적인 短點(단점)과 문제점을 스스로 발표하고,
통성기도 하며,
고치는 시간을 갖자.
♥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서 자기의 ‘말과 인격’ 을 말하고,
다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 어렵고, 힘들고, 아프고, 상처가 많고, 고난이 많고, 가난하고, 말이 많은 사람들이... (3P)
주로 남을 씹고‥
비판하고‥
비난하고‥
선의를 바르게 받지 못하고 오해를 하고‥
그리고 자기주장만 한다‥
사실 그들은 자기를 알아주고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을 챙기려면
평생을 쏟아부어야 하니‥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나도 오랜 세월을 남을 씹어왔다‥
나보다 더 판단의 명수가 있으랴‥
나보다 더 예리하게 분석 잘하고‥
난도질 잘 하는 사람이 또 있으랴‥
나는 나의 말씀을 ‘회심의 말씀’ 이라 한다‥
그런데 그 실상은 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이었다‥
수년 간 부흥성회를 인도하면서‥
정말 교인들을 시원하게 내리치고 후려쳐 왔다‥
그런데 내린 결론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칭찬해도‥
후려쳐도
도무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악한 사람은 대적하지 말아야 하고‥
선한 사람은 언제나 선하다‥
남을 씹는 그 사람이
언제까지나 남을 씹는다‥
사람은 성령 받고, 은혜 받아야, 비로소 변한다‥
사람이 은혜 받지 못해 변하지 않고 성령만 받으면,
희한한 괴물 인간이 된다‥
무슨 사역이랍시고
무당 푸닥거리나 하는‥
삶과 생활과 윤리는 엉망진창인 채로‥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
깊이 깊이 받아야 한다‥
자기는 온전히 부인되고‥
오직 주님으로만 살도록‥
그렇게 은혜를 깊이 받아야 한다‥
말씀‥ 기도‥ 은혜‥ 믿음‥ 성령이다‥
나는 이제 남을 씹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내 축복을 다 갉아 먹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남을 씹음으로
자기 복을 스스로 걷어차는
수많은 불쌍한 목사들을 본다‥
특히 성령의 종을 씹으면
그것이 바로 성령훼방죄가 됨을 모르는
저 어리석은 목사들을 본다‥
반대로 자가당착에 빠진
수 많은 성령사역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웃기는 작태를 본다‥
남들이 보면
자가당착에 빠져
진짜 자기 혼자 만의 세계에서 웃기고 있는데‥
자기는 그게 성령의 길이란다‥
지성과 폭 넓은 영적 독서가 없는 영성은
그래서 위험하다‥
나는 수많은 어려운 교회들을 섬기면서
영적 실상의 바닥 판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나의 소원은 성령이 없는 한국 주류 교회들과‥
성령이 왜곡된 바닥 교회들에‥
성령의 이정표를 세우고 주님 앞에 가고 싶다‥
그것이 지금 집필하는 <성령대전> 이다‥
학적 바탕이 충실하면서
오직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과
기도 골방에서, 깊은 묵상 속에 만든 성령 체계이다‥
앞으로 5년 내에 나의 지성이 쇄락하기 전에‥
집필을 끝내려 한다‥
사람은 다 알지 못한다‥
자기가 걸어 온 길‥
자기 만의 영성을 말할 뿐이다‥
그래서 나의 영성은 오늘도 완성되지 못한
길 가는 영성이다‥
‘途上(도상)의 영성’ 이다‥
언제 나의 길이 끝날까‥
난 내 삶으로‥
내가 경험하여 아는‥
좁은 것만 말할 뿐이다‥
나는 한 작은 목사일 뿐이니‥
🔥 소중하신 심재선 대선배님의 정도의 길은
언제나 저의 사표가 됩니다.
알 수 없는 인생의 길에,
먼저 가신 심대선배님의 바른 지침이 항상 길이 됩니다.
저는 심대선배님의 곧으심,
정도를 걸으심,
교훈하심,
공평하심을 항상 존경합니다.
늘 우리 곁에 계셔서 너무 힘이 되고 감사합니다.
언제까지나 이끌어 주십시오.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아멘.
후학 배종부 목사 드림
♥ 72. 인격, 인품, 성격, 성품 - 네 입의 더럽고 악한 말들을 버리라 (4P)
링컨은
"사람의 성품은 역경을 이겨 낼 때가 아니라,
권력이 주어졌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 라고 했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위치에 올랐을 때,
오직 나의 자유의지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가장 성품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권력을 쥐게 되면,
성품이 좋은 사람은
그 권력을 약자를 보호하는데 쓰는 반면,
성품이 좋지 않은 사람은 남들을 학대하고
자기 지위를 누리는데 쓴다는 것이다.
과거 주사파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의 작태가 바로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주사파’ 가 무엇인가?
‘김일성 주체 사상을 따르는 이들!!!’
한 마디로 이들은 가장 큰 귀신 덩어리들인 것이다.
이 잡것들이 오직 하나님의 기적으로 제거된 것은
정말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살리심이요,
한국교회를 보호하심이다.
타락하고 배교한 한국교회에 그래도 은총을 베푸사
한번 더 기회를 주심이다.
그런데도 목사들이 아직도 속고 있고,
교인들이 속고 있으니,
기가 찰 일이다.
요체는, 저 타락한 정치가들을 믿을 게 하니라,
한국교회가 진리에 바로 서고,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을 쥐어주면,
그 본래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얘기이다.
물가에 서 있던 전갈이 개구리에게
자신을 업고 강 건너 편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개구리가 물었다.
네가 나를 독침으로 찌르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믿지?"
전갈이 말했다.
너를 찌르면 나도 익사할 텐데, 내가 왜 그렇게 하겠어?"
전갈의 말이 옳다고 판단한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 중간 쯤에서
마침내 전갈이 개구리의 등에 독침을 박았다.
둘 다 물 속으로 가라앉아 죽어가는 와중에
개구리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왜 나를 찔렀지?
너도 죽을 텐데..."
*전갈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그것이 내 본능이니까..."
타고 난 성품, 인성을 천성이라 부르고,
타고 난 직종이나 직업 등을 천직이라 부른다.
사람은 무엇보다
타고 난 성품이 좋아야 한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이렇게 말했다.
“인재를 논할 때, 반드시 덕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짐은 사람을 볼 때,
반드시 심보를 본 다음, 그 학식을 본다.
심보가 선량하지 않으면, 학식과 재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학식, 경력, 학벌, 지위, 환경 등 그 어느 것도
타고 난 성품을 대신할 수 없다.
나라나, 어느 단체나, 조직의 지도자는
일단 성품이 진실하고, 곧고, 바르고, 좋아야 한다.
리더의 제일 품격은 역시 진실과 성실이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용한 위의 글은 틀린 글이다.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간과한 글이다.
사람은 절대 선할 수 없다.
근본이 타락하여, 원죄(죄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아
그 성품이 일생의 성령 훈련으로 날마다 계속하여 거듭나야,
겨우 죄성을 막을 수 있다.
그것 역시 불완전하다.
설교하다가 ‘씨팔...’ 이란 욕이 튀어 나왔다.
세상에... 정말 욕을 할 일이 어디 한 두가지라야 말이지!
나는 설교의 말투가 적나라 하고, 험하다.
너무 거칠다.
원색적이다.
내 안에 숨어 있는 詬辱(후욕)의 귀신이 느닷없이 튀어나온 것이다.
내가 그래서 유튜브 설교를 못한다...
“주님! 부디 부디 내 안의 이 더럽 추악한 詬辱(후욕)의 귀신들이 다 떠나가게 하소서.”
모든 사람은 특정 상황 속에서, 그에 해당하는 내속에 숨어있는 귀신들이 튀어 나온다.
1>. 남자에게 배신 당한 여자는, 남자의 배신이나 性的(성적)인 문제에 치를 떤다.
2>. 남에게 돈을 떼인 사람은, 사기군을 만나면 죽이고 싶어 한다.
3>. 남을 늘 가르치고, 리더로 자처하는 사람은, 항상 표정이나 말이 거만하고, 가르치려 들고, 교만하다.
정말 웃긴다.
아니, 요즘 세상에 스승이 어디 있나?
최고 스승이 인터넷인데...
4>. 좌우 정치적 논리에 빠진 사람은, 무조건 상대방을 매도한다.
5>. 큰 교회 목사는 자기가 목사 위의 목사이며, 경건지수도 최고봉에 올라 있는 줄 안다.
똘마니들이 노회, 총회 단위로 줄을 선다.
나는 토하고 싶다.
내 속의 숨은 귀신들은 내 마음의 상처와 아픔들과 모든 부정적인 것들과 죄악들을 뜯어 먹고 산다. 성령의 사람은 그래서 영 혼 육의 신유가 가장 중요하며, 성결이 가장 중요해진다. 내 안에서 계속 신유가 일어나고 성결이 일어나면, 귀신들을 저절로 떠나가고, 능력은 저절로 우러나온다.
김0애 집사의 딸이 10년 넘도록 오랫 동안 임신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서 기도를 몇 번 받고서 임신이 되었다. 어느 사모님의 아들은 취업이 되었다. <성령의군대> 장군 목사님들에게는 큰 물권들이 터지기 시작한다.
주님! 내 안에 아직도 더러운 말,
다른 여자, 남자를 쳐다 보는 음란함,
돈 욕심으로 인한 헌금 떼먹기, 선교비 안보내기, 헌금 설교에 시험 들기, 돈에 인색하기...
괜히 남이 잘 되면 배 아프기,
옳은 말인데도 괜히 냉소하고 비난하기,
기도 훈련, 말씀 훈련, 경건 훈련, 성령 동행...의 본질적인 일들을 제대로 하지 않고, 어디 모임에 가고, 밥 먹으러 가고, 놀러 가고, 소일하고, 교회 정치나 하고...
사람을 영적으로 챙기지 않고 이용해 먹고,
사람을 볼 때 사랑과 섬김의 눈이 아니라, 미움 다툼 시기 질투하고...
나로 하여금,
이러한 모든 악행과 악습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내 안에 교묘히 숨어있는 귀신들을 전부 다 추방하소서.
온전히 ‘성령님의 侍從(시종)’이 되게 하소서.
오직 성령 주목, 성령 복종, 성령 충만함으로
‘성령의 삶’, ‘성령의 길’ 만을 일심으로 걸어가게 하소서. 아멘.
쓸데없는 자리에 죽치고 앉아서,
남의 더러운 말들을 듣고 있지 말아야 한다.
누가 더러운 말들을 중지하지 않으면, 당장 결별하고, 쫓아내라.
폭력적이고, 협박적이고, 두려움을 주고, 들레고, 더럽고, 악하고, 설치고, 남을 무시하고, 자기를 정당화 하고, 끝없이 떠드는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떠나가라.
그럴 때에는 즉시 함께 찬송을 하기 시작하라.
통성기도를 하라.
그러한 말들을 더 이상 들어주지를 말라.
그 악하고 더러운 입을 다물게 하라.
앞으로 불러내어, 축사기도를 하라.
성령의 원음으로 선포하라.
사랑하는 나의 종 배목사야!
영혼들을 심히 불쌍히 여겨라.
절대 사람을 두려워하며, 그 속의 악한 귀신의 역사에 장단을 맞추어 주지 말라.
절대 악하고 더러운 자들의 말을 듣고 있지를 말라.
귀신이 나타나거든 바로 찬양하고, 기도하고, 축사를 해 주라.
진정으로 사람 속에 숨은 귀신을 극복하고, 넘어가야 하느니라.
사람속에 숨은 귀신들을 피하지 말고, 을르고 달래지 말고,
반드시 축사하고 고쳐서,
그 영혼을 살려 내야 하느니라.
귀신을 쫓아 내고 꺾으면, 전무후무한 권능이 네게 임하리라.
하나님이 네게 도전하시느니라.
♥ 경기도의 산
시121: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나는 영성과 힐링, 건강을 등산과 산상기도로 채운다.
경기도의 큰 산들 대부분을 다 등산해 보았다.
전국의 큰 산들 대부분은 다 등산해 보았다.
참 감사한 일이다.
올해 가을 11월 중에, 설악산을 한번 더 갈 생각이다.
https://www.google.com/url?sa=t&source=web&rct=j&url=http://www.kormt.co.kr/ky1.html&ved=2ahUKEwjM0tLMj-v6AhU9TmwGHUgLBGgQFnoECA4QAQ&usg=AOvVaw0Mc1OmyxGgU0Vz1qzxnMBD
(산 높이, 주소 명기)
♥ 2022.10.22.토. 진정한 幸福(행복)과 사랑하는 사람 (15P)
신명기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두 달에 한 번 이발하러 을지로로 나간다.
머리 깎는 일이 정말 귀찮다.
이발사가 말하기를
큰 기업체의 회장을 20년 동안 머리를 깎았는데,
부자는 아무 소용 없단다.
하루에 주식이 수억씩 들락거리고,
잠시도 쉴 틈이 없더란다.
그렇게 인생을 살 이유가 전혀 없단다.
60대가 넘으면, 그냥 마음 편한 게 최고란다.
등산이나 다니고...
사람이 제일 잘 속는 게 큰 것, 많은 것, 높은 것에 대한 욕심이다.
비우고 내려 놓으면
진정 행복한 것을...
딤전6:6그러나 自足(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 2022.10.23.주일. 우리는 늘 죽겠다, 가난하다, 힘들다, 못 살겠다... 난리이다 (3P)
징징거리지 말라.
한숨 쉬지 말라.
죽겠다, 살겠다 하지 말라...
아니, 뭐가 그리 힘든가?
좀 버리고, 살아라.
좀 포기하고, 살아라.
아프거든, 좀 참아 봐라.
오늘 하루만 살아라.
생각을 좀 바꾸어 봐라.
뭔 난리람?
아니, 사는 날 동안 온갖 비바람 풍상이 지나 가는 것 아니냐?
하루의 날씨만 보아도, 계속 변덕스럽지 아니한가?
기온이 아침 저녁으로, 계속 바뀌지 아니하는가?
이렇게 한번 생각을 바꾸어 해 보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옳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은 다 좋은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이 하루를 살리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결과적으로 다 좋은 것이다.
주시는 대로, 그냥 받으라.
죽게 되거든, 그냥 죽으라.
뭘 더 살려고,
더 행복하려고 아둥 바둥이냐?
죽는 사람을 억지로 붙들어,
수개월 간 더 지긋지긋한 고통을 줄 일이 뭐가 있는가?
그냥 보내 드려라.
어차피 천국 갈 것 아닌가?
그냥 내게 삶이 닥쳐 오는 대로, 오늘 만을 살아 가라.
오늘을 걱정, 근심, 염려로 눌리지 말고,
늘 最高(최고), 最善(최선), 最上(최상)으로 살아라.
아니, 자녀가 꼭 올해 대학에 合格(합격)을 해야 하나?
再修(재수)하면 어때?
아니, 대학 안 가면 어때?
앞으로는 대학 졸업장은 아무 쓸모 없어...
그런데 왜 자녀를 성적 몇 점으로 압박하여, 자살하게 만들어?
정신이 빠진 부모 아냐?
나는 오늘도 대학 4년을 마치고, 졸업하는 아들에게 말한다.
취업이 안되면, 그냥 한 10년 놀아!
세계 여행을 다니면서, 견문을 넓혀...
인생은 길고 긴 거야.
정말 네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살아 가!
생활비는 내가 대 줄게...
왜 너의 틀대로, 하나님이 다 장단을 맞추어 주어야 하는데?
네가 주인이냐?
하나님이 너의 인생의 주인이시잖아?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맞춰야 하는 거 아냐?
내 아들은 20대 10년을 강원대 컴퓨터과를 자퇴해 버리고,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만 했다.
40세인 지금 교육회사 본부장이 되어,
15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월 수입이 3,000만이다.
내 며느리는 내가 일년 간 3,000만 학비를 대어 교사 임용고시에 걸리기를 바랬으나,
그만 떨어짐으로 할 일이 없어
시집이나 가서,
내 며느리가 되고,
그리고 복덩이 인생이 되었다.
내 품에 손자 하건이, 손녀 하연이를 턱- 안겨 주었다.
안되는 게, 지나고 나면 휠씬 좋은 게 얼마나 많는데...
그냥 오늘 하루를 오직 성령으로 살아라.
오직 성령님 만을 따라 가라.
디 이상 하나님께 뭘 要求(요구)하지를 말아라.
왜 자꾸 네 생각대로 인생이 풀리기를 바라느냐?
사실은 그게 망하는 인생의 지름길이다.
난 오직 오늘 하루만 그렇게 사니,
아무 염려, 근심, 걱정이 없고,
오직 행복하기만 하더라.
그리고, 오로지 ‘섬김과 나눔의 삶’ 을 사니,
자꾸 빚만 늘어 가더라.
빚이 늘면 느는 거지, 뭐 난리야!
나의 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겠지...
뭐가 그리 걱정이며,
뭐가 그리 아둥 바둥이냐?
밥 못 먹으면, 라면 먹어!
그러면 날씬해 지겠지...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삶을 누리라.
오늘을 그냥 너의 에덴동산에서 살아라.
감사하라.
기뻐하라.
하나님께 다 맡겨라.
기도를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즐겁게 하라.
오늘도 나는
사랑하는 형님 김0읍 목사님이 선물로 주신 멋진 그렌저 뒷 좌석에서,
특급 전용기사인 아내가 운전하는 차 안에
최고의 회장님 폼으로 앉아서
길을 가며, 이 글을 쓴다.
주일 아침, 교회 가는 차 안에서...
♥ 내게 잘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늘 긍정적으로 나를 대하고,
나에게 밝게,
따뜻하게,
희망을 주고,
사랑해 주고,
격려해 주고,
용기를 주는...
그 사람이 진짜 내 사람이다.
어려울 때 도움을 요청하면,
선뜻 응해 주는 그 사람이 내 사람이다.
자기의 감당할 한도 내에서,
돈도 선뜻 빌려 주는 그 사람이 내 사람이다.
나는 사랑을 돈으로 표현한다.
내가 돈을 주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이번 주간은 의정부 큰무리교회의 정반석 목사님이 그 주인공이다.
나는 돈이 늘 없음으로,
언제나 최선을 다 할 뿐이다.
내가 돈을 주지 않는 사람은 남이다.
부디 나에게서 많은 돈들을 뜯어 가시기를 당부한다.
돈을 쓰는 원칙:
1>. 돈은 기본적으로 빌려 주지 말라.
2>. 절대 보증 같은 것을 서면 안된다.
3>. 큰 돈을 빌려 주면, 절대 안된다. 큰 일 난다.
4>. 받지 않을 생각하고, 빌려 주라.
나의 경우 그 돈은 3,000만 정도 선이다.
나는 누구든 내가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계속하여 3,000만 정도는 밀어 넣을 수 있다. 만일 돌려 받지 못해도 시험 들지 않으리라.
나는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서 감사 문자 하나도 바라지 않는다.
스스로 시험 드니까!
♥ 신앙 인격의 함양 (15P)
디모데후서 3:10-17절
(10)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13)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신앙 인격’의 정수는 ‘성령의 열매’ 입니다.
‘성령의 열매’ 는 가장 강력한 능력이요 은사입니다. 내 속의 모든 악한 사탄, 마귀, 귀신의 역사를 완전히 분쇄하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불철주야 자기를 부인하는 몸부림을 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당부합니다. 오직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은사로 자랑하거나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잘 맺은 사람입니다.
사탄, 마귀, 귀신의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 비교:
갈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디모데후서 3:1절 이하에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 들을 다음과 같이 나열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 서라.”
이 ‘19가지 현상’ 의 말씀은 이 시대의 뚜렷한 풍조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비인간화, 비인격화 되어 가는 이 시대에 참된 신앙인은 성령 안에서 온전한 신앙 인격을 함양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훌륭한 신앙이란 성령으로 그 신앙 인격이 잘 구비된 신앙을 말합니다. 당신에게는 ‘성령의 열매’ 가 얼마나 잘 맺혀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진정 잘 사는 것입니까?
세상에는 추구해야 할 것도 많고, 필요한 것들도 많이 있지만, 자칫 잘못 생각하면 내면의 본질이 아닌, 수단적인 것에 삶의 목표를 두고 착각하며 살기 쉬운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과정이나 수단, 또는 주변의 것들에 홀려 삶의 본질적인 것을 잃어 버리기 쉽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누구나 똑 같은 자격과 빈 손으로 태어 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각각 다른 가치와 운명과 자격으로 죽어 갑니다. 이것은 오로지 그 사람이 살아 온 생애에 의해 결정 되어지는 문제입니다. 사람의 생애에 진실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외형적인 소유나 지위나 화려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참된 삶에서 나오는 인격의 완전함입니다.
“행복한 돼지 보다는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행복한 돼지로 살아 가려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래 전에 불교의 대선승 성철 승려가 열반에 들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승려(중)’ 란 말을 쓰지, ‘스님(큰 스승)’ 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불교의 진리는 참된 진리가 아니며, ‘승려’는 결코 ‘스님(큰 스승)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불자는 “스산한 겨울이 다가 오는 문턱에서, 4일 아침 한국 불교 최고의 선승 성철 큰 스님은 예의 그 누더기 장삼을 걸치고 낙엽 가득한 사바 세계를 떠나 갔습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성철 승려의 생애 기록을 읽어 보면서 “기독교는 과연 이만한 큰 인물을 배출할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사로서 가는 길은 다르지만, 역시 구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진정으로 거듭난 자의 삶, 성별된 성화의 길을 걷지 못하는 자신의 가련한 영성을 바라 보면서,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한 위대한 철인의 생애 앞에 옷깃을 여밀 때, 깊은 슬픔과 서글픔이 배여 남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철 승려의 진리의 구도를 향한 큰 걸음은 마치 태산처럼 저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 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 승려의 이 <열반송>의 전반부는 생에 대한 처절한 참회와 회개의 정신으로 차고 넘칩니다. 평생을 중생을 위한 법을 설파했건만, 중생이 알아 듣지 못하고 행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중생을 속이는 큰 죄업을 짓고 말았다는, 천년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한 달마대사 이후의 대선승의 제도 중생에의 길에 대한 참회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후반부 단 한 절의 ‘一喝(일갈)’ 은 “붉은 태양이 청산에 걸린 것과 같이, 자신의 불성의 밝음과 청정무구한 참 성품의 당당한 기개를 넘치는 기품으로” 내뿜고 있습니다.
성철 승려는 예전 1980년 10월 27일 법난으로 온 불교가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에, “중들의 밥 싸움은 꼴도 보기 싫다.” 면서 해인사 백련암에 칩거해 버렸습니다.
다음 해 81년에 온 불교계가 그를 종정으로 추대했을 때에도 두문 불출한 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그 유명한 법어 만을 종정 취임식에 보냈을 뿐입니다. 이 법어는 “세속의 티끌이 눈에 낀 사람은 산이 산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철 승려에게는 삶의 5가지 철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1.잠을 적게 잔다. 3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2.무슨 말이든, 말하지 않는다.
3.참선은 정신으로 하지, 문자로 하지 않는다.
4.과식하지 않고, 간식하지 않는다.
5.돌아 다니지 않는다.
너무나 간단 하면서도, 가슴 저리는 감동을 주는 삶의 모습입니다.
또 성철 승려에게는 의식주에 대한 3가지 철칙이 있었습니다.
1.최저의 생활에서, 최고의 노력을 한다.
그래서, “도를 닦으려면, 가난부터 배워야 한다.” 고 말씀했습니다. 그 분은 친히 겨울에는 광목 옷 한 벌, 여름에는 삼베 옷 한 벌, 그것도 기우고 또 기운 누더기 한 벌 만을 입고 살았습니다.
2.음식은 적게 먹고, 맛있는 것은 먹지 않고, 깨소금, 고춧가루, 간, 소금 등을 일체 넣지 않은 맨 음식 만을 먹는다.
3.화려한 곳에서 살지 않는다.
성철 승려는 평생 3평 되는 선방에서만 살았습니다.
성철 승려의 위대한 한 생애는 비록 다른 구도의 길을 걸었지만, 우리가 흠모하고 또 흠모할 만한 위대한 현자의 흔적입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을 섬기기에 불교를 옹호할 수는 없지만, 한 인간으로의 성철 승려는 정말 “스님”이란 단어의 뜻 그대로 “인생의 대 스승” 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한결같이 원만한 신앙 인격을 갖추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그러나 모든 신앙인이 다 같이 훌륭한 생각과 좋은 품성, 원만한 인격을 갖춘 것은 아닙니다. “성격 대로 믿는다.” 는 말을 우리가 종종 쓰는데, 이 말 속에는 “모든 신앙인은 그 성격과 인격이 천차 만별이며, 자신의 본래 성품을 버리지 못하고 믿는다.” 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있으나, 성령으로 거듭남이 없이 예수를 믿습니다. 신앙인의 행세는 하나, 내면의 삶과 인격의 변화는 전혀 없습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께 부딪쳐 깨진 경험이 없습니다. 회개가 없습니다. 자아와 자존심, 고집, 교만, 옛 습관, 자기 이론과 생각, 가치관, 인생관, 판단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고쳐야 할 자각과 깨달음이 없습니다. 대화를 나누어 보면 너무 너무 자신을 부인하는 정신이 없습니다. 옛날의 생 사람 그대로입니다. 성령 받고 그 인격이 성령으로 만져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요3:5절) 하셨는데, 이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첫 걸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의 첫 출발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너무 많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자기를 부인한다.” 는 이 대명제를 저는 성령 충만함을 받은 이후에야 실제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너무나 놀랐습니다. 제가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을 자기를 부인치 못하고 살아 왔는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제 진정으로 제 자신으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 자신으로서는 절대 거듭난 자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46년 간의 제 인생 전체를 검증하고, 또 검증한 나의 실패의 간증입니다.
저는 이제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으로 살려고 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나를 죽이고, 주님의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 하에 살려고 애씁니다.
나 자신으로 무엇을 제대로 하거나,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능히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오직 쓰레기일 뿐입니다. 배설물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제 속에서는 절대 선한 것이나 거룩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제 존재 자체가 썩은 실존인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절대 자기로 살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저의 고백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자기를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했던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신앙의 출발은 각자 하였고, 그 때문에 신앙을 가진 우리들의 성격도, 취향도, 인격도 다 틀립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성이란 한 목표를 향하여 똑 같이 달려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열심히 이 길을 달려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답게 성화의 길을 쉬지 말고 달려 가야 합니다. 그러나 공히 공통된 것은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남을 이루지 못하고서는, 누구든지 참 신자의 반열에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교회가 큰 물 위에 앉은 음녀가 됩니다. 교회가 타락합니다. 성도들이 타락합니다. 구원 없는, 성령 없는 껍데기 예수를 믿습니다. 악세사리 예수를 믿습니다. 거짓 것에 속아 살게 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계 17: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타락한 세속교회)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계 17: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 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계 17: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 들이니라.
(계 17: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계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우리의 선한 의지로 선을 행하는 것은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기 의의 길일 뿐입니다. 우리는 윤리 도덕, 선행을 좇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 가는 자들입니다.
(갈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聖靈)을 좇아 행(行)하라. 그리하면 육체(肉體)의 욕심(慾心)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肉體)의 소욕(所慾)은 성령(聖靈)을 거스리고 성령(聖靈)의 소욕(所慾)은 육체(肉體)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對敵)함으로 너희의 원(願)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萬一) 성령(聖靈)의 인도(引導)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律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육체(肉體)의 일은 현저(顯著)하니 곧 음행(淫行)과 더러운 것과 호색(好色)과 (20)우상(偶像) 숭배(崇拜)와 술수(術數)와 원수(怨讐)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猜忌)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異端)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前)에 너희에게 경계(警戒)한 것 같이 경계(警戒)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者)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遺業)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오직 성령(聖靈)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喜樂)과 화평(和平)과 오래 참음과 자비(慈悲)와 양선(良善)과 충성(忠誠)과 (23)온유(溫柔)와 절제(節制)니 이 같은 것을 금지(禁止)할 법(法)이 없느니라.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肉體)와 함께 그 정과 욕심(慾心)을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았느니라. (25)만일(萬一) 우리가 성령(聖靈)으로 살면 또한 성령(聖靈)으로 행(行)할지니, (26)헛된 영광(榮光)을 구(求)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여러분이여! 정신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진정 성령으로 믿고,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과거적 구원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성령으로 거룩해지고, 온전한 신앙 인격을 구비하여 삶으로 실천하며 나아 가는 일은 현재적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일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 만이 이렇게 온전히 거듭난 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원래 성품이 좋아 어질게, 착하게 사는 사람이라 하여, 거듭난 자라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으로 사는 자 만이 거듭난 자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자는 성령이 맺게 하시는 열매 가운데 삽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 훌륭한 신앙 인격을 함양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상 목표입니다. 마땅히 누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훌륭한 신앙 인격을 갖추었느냐에 따라서, 그 신앙의 척도가 판단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고,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선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하며, 그 분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야 합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 가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나 온전한 신앙 인격을 함양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에 보니, 신앙 인격을 훌륭히 갖추어야 할 우리들에게 금언이 될 만한 지침이 있습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 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을 보니,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생활, 나의 생활 목표와 믿음, 나의 참을성과 사랑, 나의 인내를 본받아 살아 왔으며...”
한 마디로, 이것은 “우리의 배움과 생활, 나의 삶의 목표와 믿음, 나의 참을성과 사랑, 나의 인내가 예수님의 인격에 이르기까지 온전해져야 한다.” 고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1.온전한 신앙 인격을 함양하려면 오늘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일상생활이 일치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고의 신앙 인격은 성경 속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13)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신앙의 길은 알고만 그치는 길이 아니라, 하나를 알면 하나를 행함으로 실천하는 길입니다. 하나 하나에 은혜 받아, 하나 하나 실천해 가게 됩니다. 앎의 실천이요, 삶의 실천이 신앙의 길입니다. 실천하는 생활 훈련이 필요합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어느 사이엔가 훌륭한 신앙인이란 신앙적 지식이 많은 사람, 교회에서 직분이 높은 사람, 종교적 경험이 많은 사람, 설교를 잘 하고 말을 잘 하는 사람, 큰 교회의 목사나 장로, 권사 등으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오류는 훌륭한 신앙인이란 신앙적 지식이 가장 많은 목사나 장로 등 교회 내에서 중요 직분을 맡은 사람으로 생각하게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그의 내면과 개인적 인격의 삶이야 어떻든 간에,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기도를 유창하게 잘 하고, 남 앞에서 똑 부러지게 신앙적 언변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만족할 만한 신앙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만이 넘는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사실은 이름 뿐이고 생명력이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잘못된 신앙관, 잘못된 착각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구도의 진실이 그 속에 없기 때문에, 삶의 실천력이 그 신앙 속에 없기 때문에 신앙이 형식적이요, 실상은 죽어 버린 것입니다.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신앙의 훈련 없이, 하나님과의 깊은 기도의 교제도 없이, 말씀을 준행하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진정한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의 충격도 없이, 스스로의 열심에 빠져, 또는 사람들의 인정함에 빠져 열심히 교회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실상 헛 일이며,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끝없는 공허의 길이며, 허무의 길입니다. 율법주의자의 길일 뿐입니다. 공허하고, 은혜가 없고, 성령의 기름 부음이 없는 자기의 내면의 양심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게 해 줍니다.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내가 헌신, 충성하는 일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성철 스님은 항상 비상을 그 품 속에 넣고 다니면서 곧잘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진정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살 것이 무에 있나? 이 비상을 입에 털어 넣고 말지.”
얼마나 비장한 삶의 각오인지 저절로 그 앞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방 종교를 섬기는 중도 그러하다면, 참 신이신 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마지막까지 강조하고,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일상생활이 일치되도록 살아 가는데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가 아니면, 불가능 합니다.
어느 유명한 스승의 사사를 받고 있던 한 제자가 있었는데, 불행히도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습니다. 바람이 몹씨 부는 날 밤에 스승의 집을 떠나려는 제자에게 스승이 손에 등을 들려 주었습니다.
“선생님! 제겐 등불이 필요 없습니다.”
“네겐 필요 없겠지만, 다른 사람이 그 불빛을 보고 피해 갈 것이다.”
스승의 말씀대로 등을 들고 얼마를 걸어 가던 장님 제자는 얼마 후 마주 오던 사람과 ‘꽝’ 하고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장님이 화를 벌컥 내며 상대방을 나무랐습니다.
“여보시오. 나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그래! 당신은 두 눈이 멀쩡한 사람이 앞에서 오는 등불도 보지 못한단 말이오?”
“아니! 당신이 등불은 무슨 등불을 들고 있단 말이오?”
사실은 장님 제자가 든 등불은 바람에 이미 꺼져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귀중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전혀 타인의 모범이 되지 못하면서도, 또 진리를 깨달아 알지 못하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착각하며 살아 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터무니 없이 화를 내고, 이성을 잃어 버린 채 자신을 괴로움 속에 빠뜨리며, 타인을 괴롭히고, 오해하는 일이 비일 비재합니다. 자신의 양심의 등불은 꺼져 버린 줄도 모르고, 타인을 향하여 무섭게 질타하고 꾸짖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한번 깊이 돌아 보아야 할 줄 압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신을 살피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내 눈 속의 대들보를 제거해야 비로소 형제 자매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등불을 밝혀야 합니다. 내 마음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는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며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아, 언제나 밝고 맑게 빛나는, 수정 같은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과 나의 일상 생활의 일치! 이것이 관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함양해야 할 신앙 인격의 첫번째 원리입니다.
날마다 말씀의 등불에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날로 날로 고쳐 나아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일의 말씀 묵상 생활은 그래서 참으로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2.우리의 신앙 인격이 온전하게 성숙하려면 믿음이 확고해야 합니다. 믿음이 깨어지면 신앙 인격이란 없습니다.
컴퓨터 내부에는 가장 기본이 되는 보드 판이 있습니다. 그 보드 판에 온갖 장치를 다 깨워 넣어 조립하여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음의 반석’ 위에 신앙 인격이란 꽃을 피웁니다. 믿음이 없으면 신앙 인격이란 없습니다.
‘신앙 인격’ 이 아닌 ‘세상의 인격’ 이란 결국 불에 타 버릴 인격입니다.
고전3: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 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는 단순한 윤리, 도덕의 차원에 살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살려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길을 걷는 사람 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을 걷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념이 확실해야 합니다. 심지가 굳지 못한 사람은 무슨 일이든 아무 일을 이루지 못하는 법입니다. 자신이 걸어 가는 길에 회의심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도중에 하차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성령으로 가르쳐 주신 신앙적 지식과 삶에 대한 결단입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실 것이라 믿고, 나아 가는 길이 믿음의 길입니다.
그냥 하루 하루를 무위 도식하면서, 신세 타령이나 하면서 소일하는 것은 신앙인의 삶이 못됩니다. 참 신앙의 모습을 견지한 사람의 삶은 그 삶의 목표가 뚜렷하고, 이를 뒷받침할 믿음의 결의가 확고한 사람입니다.
드와이트 칼슨 부부는 딸 수잔이 백혈병이라는 병원의 진단을 받았을 때 충격을 받아 몸을 가누기 조차 힘들었습니다. 딸을 격리 병실에 데려다 주고, 요기를 하려고 걸어 내려 갔습니다.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조잘거리고 있었습니다.
“모두 이렇게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데, 내 딸은 병원에서 지내야 하다니... 게다가 기껏해야 5년 밖에 살 수 없다니... 이건 너무 불공평해!”
그러나 고통 속에 기도하는 가운데 “왜?” 라는 질문은 정말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왜?” 가 아닌 “무슨 목적으로?” 라고 질문해야 함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 를 물어야 정확히 짚는 것입니다.
딸이 병에 걸려 죽어 가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끝까지 다스리신다는 것과, 선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모든 고통을 주관 하신다는 생각이 들자,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혜의 임금 솔로몬이 7년 간에 걸쳐 하나님의 성전을 장엄하게 건축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솔로몬 임금이 하루는 변장을 하고서 건축 현장을 방문하면서 한 일꾼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여기서 일합니까?”
“그야 뭐, 배운 것도 없고, 이럭 저럭 살아 가려니, 죽지 못해서 하지요.”
완전한 패배주의자의 삶입니다.
얼마 쯤 가다가 다시 한 일꾼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여기서 일하오?”
“아. 배운 게 이것 뿐인데, 어쩌겠오? 그냥 낙없이 하루 하루 일해 벌어 먹고 사는 거요.”
꿈이 없는 자의 삶입니다.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으나, 아무런 삶의 희망도, 비젼도, 보람도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왕은 헤진 옷을 걸친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당신은 어떤 심정으로 이 일을 하오?”
“어떤 심정이냐구요? 정말 난 기뻐서 죽을 지경이오. 자! 보세요. 지금 하나님의 성전이 하늘 높이 올라 가고 있질 않오? 나의 이 손으로 쌓은 벽돌 한 장 한 장이 이 위대한 성전의 일부분이오.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나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오. 나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하오.”
솔로몬 임금이 그를 높이 들어 썼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삶이 위의 세 사람 가운데 누구와 같다고 생각 하십니까?
바라옵기는 여러분 모두가, 성전을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건축하는 이 훌륭한 청년과 같은 삶의 자세를 견지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일전에 필리핀에 갔더니, 공항에서 입국을 하는데, 경찰과 공무원들이 버젖이 금품을 요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개탄스러웠는지...
우리 나라라고 해서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더욱 더 은밀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한 집사님은 서울 중구청의 식품과 과장인데, 자기가 관리하는 식당들만 2만 군데가 넘는답니다. 식당으로부터 매월 수천 만원의 상납금이 들어 와, 구청장부터 다 나누어 갖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청렴 운운하면 당장 목이 달아 나고, 전보 발령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입니다.
국가의 요직에 있는 공무원 들이나 국회의원 들을 일반 국민들이 과연 청렴한 나라를 위한 공복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숨은 도적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작금의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정치 작태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검찰들을 자르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 무법천지의 문재인 주사파 정권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진정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애써서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내 가슴 속에 자꾸만 분노와 미움, 파괴성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마음이 평온해야 함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자제합니다.
국가의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는 공무원이 국가의 장래와 발전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봉급과 진급만 생각하며, 부정 부패를 일삼고 있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나라의 경제를 살려야 할 대기업들이 생산적인 활동을 통하여 돈을 벌려고 하지 않고, 땅 투기나 하고, 정경 유착이나 하고, 중소기업을 착취하여 이권을 챙기고 있으니, 이 나라가 어찌 제대로 되어 가겠습니까?
언론이 진실과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이 사악한 정권의 협박에 사로잡혀 여론을 가짜로 조작하고, 국민을 우맹으로 몰아 가려 하니, 이 모든 진실이 공개되는 유튜브와 인터넷의 시대에 도대체 이것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가을 철만 되면 농촌에서 반복되는 일 중의 하나가 무, 배추가 값이 너무 싸서 아예 밭에서 그냥 갈아 엎어 버리는 일입니다.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몇 년 전 시골 부모님께 갔더니, 배추가 너무 비싸서, 김치를 담아 먹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배추 한 포기에 3,000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장에서 한 포기 3,000원 하는 배추가 밭에서는 600원에 출하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중간에서 돈을 다 챙기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나라가 이러니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79년 10월 26일의 궁정동 총성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10.26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철권 독재 정권이 하루 아침에 무너진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박대통령과 차지철, 김재규는 궁정동에서 가수까지 불러 놓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차지철이 한창 혼미를 거듭하던 부마 사태를 진압을 위해 이런 건의를 했다고 합니다.
“각하! 마산 시민 1-2백만 쯤 탱크로 깔아 뭉개면 어떻습니까? 필리핀에서는 300만명도 죽였는데...”
그러자 박정희가 눈을 껌벅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랍니다. 그 순간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의 머리를 쏘아 버렸습니다. 이 내용은 동아일보가 10.26 사건 당시 재판 녹음기록을 공개한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말을 한 차지철 씨가 모 교회 안수집사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 집에 기도실을 따로 마련할 정도로 철저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자기 나라 국민 1-200백 만명을 태연히 죽이자고 말할 수 있는 안수집사의 양심이라면, 도대체 그는 무엇을 신앙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성도의 삶이 이런 식으로, 방향이 없는 삶이 되어서는 결단코 아니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에 기초하여, 뚜렷한 삶의 소신과 목표를 갖고 나아 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필요하다면 손해도 감수하고, 더 필요하다면 핍박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희생도 필요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현장 속에서 이러한 믿음의 확신과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래 전, 성령을 받고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삶’ 을 누리기 전의, 나의 신앙적 의지로 바르게 살아 가려고 몸부림을 치던 과거 일의 한 토막 얘기입니다.
제게 가장 가까운 사람 중의 한 사람과 몇 시간 함께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불신자입니다. 곁에서 보는 그의 삶이 참 자유로와 보였습니다. 수입이 좋아서 돈을 마음대로 씁니다. 많이 배운 것도 아니요,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한 달에 몇 백만원의 수입이 고정적으로 들어 옵니다.
만원 한 장으로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어 쓰는 나의 삶을 생각할 때, “나는 왜 이리 피곤하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특별한 룰이 없습니다. 그저 편하게 삽니다. 하고 싶은 짓은 다 하고 삽니다. 그와 비교하면서, 저는 스스로 자신의 삶에 너무 많은 굴레를 지우고 산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 왜 나는 고정적인 레일 위의 삶 만을 살아야 하고, 그는 저토록 자유롭게 살아야 하는가? 양자의 삶의 결론은 무엇인가?”
일순 회의감이 밀려 왔습니다. 신앙으로 살아 가는 나의 삶이 굴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론은 “나의 삶이 옳다.” 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의롭다.” 는 뜻이 아니라, “삶은 이렇게 살려고 애써야 한다.” 는 결론 만큼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 가는 이 길이 비록 힘들고 고달플지라도, 참 삶의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체험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3.온전한 신앙 인격을 함양하려면 참을성을 갖고, 우리의 신앙 인격을 성숙시켜 나아 가야 합니다.
“인내” 란 3가지인데 오래 참고, 오래 견디고, 오래 품는 것입니다. 여기 1절의 “오래 참음” 이 영어 성경에는 “long suffering” 이라고 번역 되었습니다. “지속적인 고통을 견디고 있는 상태” 를 말합니다.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서,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 다음, 인내는 “patience”입니다. “끈기를 갖고서 때를 기다리는 자세” 를 말합니다. 참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신앙의 이름으로 고통을 견디며,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인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인내는 Bear, 품는 것입니다.
인내는 endure, 견디는 것입니다.
개정 개역 성경과 NIV, KJV 영어 성경 대조: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4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does not envy, it does not boast, it is not proud.
4. Charity suffereth long, [and] is kind; charity envieth not; charity vaunteth not itself, is not puffed up,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5It is not rude, it is not self-seeking, it is not easily angered, it keeps no record of wrongs.
5. Doth not behave itself unseemly, seeketh not her own, is not easily provoked, thinketh no evil;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6Love does not delight in evil but rejoices with the truth.
6. Rejoiceth not in iniquity, but rejoiceth in the truth;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7It always protects, always trusts, always hopes, always perseveres.
7. Beareth all things, believeth all things, hopeth all things, endureth all things.
월터 카이저의 신앙 고백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몇 년 전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던 한 본토인은 그 전도하는 일 때문에 계속적으로 투옥을 당했습니다. 14년째 감옥생활을 하는 그의 나이는 86세였는데 그 때까지도 지치지 않고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를 격리 감방에 수용했고, 감방의 변소 오물을 수거하여 처리하는 가장 더러운 일을 시켰습니다. 악취가 너무 심해서 그의 작업 현장에는 간수들이 접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힘든 일을 하면서 그의 입에서는 늘 찬송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즐겨 부른 찬송이 499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이었습니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너무나 주님을 사랑했기에 그 극한 길고 긴 고통과 고난의 와중 속에서도 찬송을 잃지 않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화가 나면 웃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정말 두려워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땅히 화를 낼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한계점에 도달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기 때문에, 신앙의 이름으로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을 우리는 두려워 해야 합니다.
성도로서,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은 매사에서 이 오래 참음과 인내가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과 피곤함과 고난과 고통과 박해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의 가장 효과적인 단련의 방법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살아 가면서 그 삶이 어렵고, 피곤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불의와 불법과 가시밭 길과 악의 유혹이 횡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편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적당히 타협하며, 남을 속여 가면서, 자신도 더러 속아 가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의 행동을 가로 막을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가책이란 것도 습관적으로 반복되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기에 담대합니다.
(벧후2:10)육체(肉體)를 따라 더러운 정욕(情慾) 가운데서 행(行)하며, 주관(主管)하는 이를 멸시(蔑視)하는 자(者)들에게 특별(特別)히 형벌(刑罰)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膽大)하고, 고집(固執)하여 떨지 않고, 영광(榮光) 있는 자(者)를 훼방(毁謗)하거니와,
그러나 우리는 배워서, 굳게 믿고 있는 진리를 끝까지 붙들고 나아 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웃에게 불평해서는 아니됩니다. 한 가지 불평이 100가지의 감사를 잃어 버리게 합니다. 원망과 불평은 너무 편해서 생긴 병입니다. 진정한 고통과 시련을 몰라서 생긴 병입니다. 악한 습관이 물들면 아니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크나 큰 고통을 이를 악물고 버텨 가며 하나님을 믿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하옥자 집사님의 간증처럼, 이 사회에는 양로원, 고아원, 복지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정말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내하며, 고통을 참으며, 오직 성령으로 전진하여 성숙한 신앙 인격의 산에 올라야 합니다. 시험을 당했을 때 시험이 가져다 줄 유익을 생각하며, 기대 속에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 들을 꾸준히 고쳐 가며, 신앙 인격을 수련해야 합니다.
목표를 이루기까지 정직과 성실로 인내하며, 인격적인 삶의 길을 걸어 가야 합니다.
4.온전한 신앙 인격을 함양하려면 주님이 주신 사랑을 배우고, 실천함으로 하루 하루 나아 가야 합니다.
6.25 사변이 일어난 직후, 나환자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침 미국의 로타리 클럽 회원들이 수용소를 방문하고 있었는데, 한 미국인 간호사가 나병 환자의 고름이 흐르는 상처를 입으로 빨아 내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사업가가 사진에 그 장면을 담으면서, “내 평생에 이보다 더 값진 사진은 찍지 못할 것이다. 누가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간호사 아가씨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도 이 일을 할 수 없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지요.”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예배 시간 마다 항상 저쪽 벽에 앉아 있던 자매님을 기억하세요? 한 쪽 눈이 잘 안보이는 자매님 말이예요.”
“아! 기억 나지. 그런데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던데...”
“우리가 그녀를 잃어 버린 거예요.”
우리는 교회에서 지체 들을 얼마나 쉽게 잃어 버리는지 모릅니다. 많이 받아 들이기도 하지만, 내쫓는 일도 너무 쉽게 합니다. 내 이웃에 있는 성도를 챙기는 일은 목사님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사랑 없고, 무관심한 성도의 그릇된 관행입니까?
큰 교회 들에는 일년에 수 백명씩 등록을 하는데, 언제나 교세는 그대로입니다. 그 만큼 다시 빠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뭔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지체는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관계 회복을 선언해야 합니다. 관계의 수준을 상승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5.온전한 신앙 인격은 주의 길을 걸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고난 받음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딤후3:10-12절에, 사도 바울이 주님과 함께 걸어 온 인생 길을 보십시오.
(10)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주의 길을 끝까지 걸어 가십시오.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로 인해 다가 오는 고난이라면 언제라도 기꺼이 받으십시오. 이 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을까요?
그 고난의 여정이 당신을 정말 성숙 시킬 것입니다.
6.성령 충만함과 그로 인한 성령의 열매를 맺음이 온전한 신앙 인격의 정수입니다.
(갈5:22)오직 성령(聖靈)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喜樂)과 화평(和平)과 오래 참음과 자비(慈悲)와 양선(良善)과 충성(忠誠)과 (23)온유(溫柔)와 절제(節制)니 이 같은 것을 금지(禁止)할 법(法)이 없느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의 일치, 우리의 확고한 믿음, 우리의 오래 참음과 인내, 우리의 신앙에서 우러 나는 진정한 사랑은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믿고,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 갈 뿐입니다.
이제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나아 가는 삶의 여정 속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데 유일한 지침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최선을 다하여 성숙한 신앙 인격의 경지에 도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온전한 신앙 인격을 함양하려면, 오늘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일상생활이 일치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고의 신앙 인격은 성경 말씀 속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2.우리의 신앙 인격이 온전하게 성숙하려면, 믿음이 확고해야 합니다. 믿음이 깨어지면 신앙 인격이란 없습니다.
3.온전한 신앙 인격을 함양하려면, 참을성과 인내를 갖고 우리의 신앙 인격을 성숙시켜 나아 가야 합니다.
4.온전한 신앙 인격을 함양하려면, 주님이 주신 사랑을 배우고 실천함으로 하루 하루 나아 가야 합니다.
5.온전한 신앙 인격은, 주의 길을 걸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고난 받음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6.성령 충만함과 그로 인한 성령의 열매를 맺음이 온전한 신앙 인격의 정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