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장 소림대살계, 거성 떨어지다
-1
①
소실봉 서쪽의 암벽(岩壁). 그곳에는 소림의 금지인 한 비동(秘
洞)이 있었다.
휙! 휙! 휙......!
어둠을 가르고 백여 개의 흑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바로 흑영마후 단혜령과 백여 명의 마종지문 고수들이었
다.
비동의 입구는 열려 있었고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이곳이다. 들어가자!"
단혜령의 외침과 함께 그들은 비동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갔다. 비
동은 상상보다 넓고 반듯한 석동(石洞)이었다.
잠시 후 십 장(十丈) 가량 전진하자 그들은 하나의 석문이 가로막
는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 석문에는 불존(佛尊)의 좌상이 음각으
로 새겨져 있었다.
<함부로 들어오면 불존의 뜻에 따라 초열지옥(焦熱地獄)으로 떨
어지리라.>
단혜령은 석문에 새겨진 이같은 글귀를 보자 싸늘하게 냉소하며
말했다.
"흥, 웃기는 소리! 구우령. 문을 부숴라!"
"네. 냉좌상!"
오독비마 구우령은 대뜸 석문을 향해 그의 절기인 오독절령장(五
毒絶靈掌)을 날렸다.
꽈르릉... 꽝!
오색의 장력이 작렬하자 석문은 무력하게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뜻밖의 사태를 유발시켰다.
"으아악!"
석문 안 쪽에서 시뻘건 불덩이가 확 쏟아져 나오더니 구우령을 덮
친 것이었다.
"헉! 저... 저럴 수가!"
단혜령은 대경하여 뒤로 후퇴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우령은 잿
더미가 되고 말았고 경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꽈르르... 르... 릉!
엄청난 진동음과 함께 갑자기 그들이 서 있던 밑바닥 전체가 꺼져
버렸다.
"으... 아... 아......!"
밑바닥의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의 무저갱으로 마종지문 고수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고 말았다.
단혜령은 간신히 절정의 경공술을 펼쳐 무저갱을 벗어날 수 있었
으나 주위를 둘러보니 살아남은 자는 불과 사십여 명뿐이었다.
그녀는 전신에 온통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과... 과연 소림은 무서운 곳이구나!'
그러나 그녀는 이를 바드득 갈며 다시 전진했다. 석문을 지나 그
로부터 십장쯤 나아갔을까?
꽝!
하는 느닷없는 굉음과 함께 눈앞에 거대한 석문이 떨어졌다.
"아니?"
놀랄 겨를도 없이 굉음과 함께 등 뒤에서 또 하나의 석문이 떨어
졌다.
"으아악!"
미처 피하지 못한 서너 명이 석문에 깔려 비참하게 즉사하고 말았
다.
"이, 이럴 수가? 나갈 곳은?"
살아있는 자들마저 우왕좌왕할 찰나였다.
철커덩! 크르르르.......
괴이한 금속음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동시에 사방의 석벽에 구멍이
뚫리며 사람의 입상(立像) 크기 만한 철동인(鐵銅人)들이 나타나
는 것이 아닌가.
크르르... 릉! 퍽!
"크악!"
십이 명의 철동인들은 기계적으로 종횡무진 움직이며 마구 마종지
문 고수들을 쳐죽였는데 철동인의 주먹 하나가 대여섯 명의 머리
통을 여지없이 박살내 버렸다.
그들은 전후좌우로 어지럽게 움직이며 육탄과 주먹으로 닥치는 대
로 마종지문 고수들을 격살시켰다.
"아!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흑영마후 단혜령의 안색이 잿빛이 되었으나 이때 한 철동인이 그
녀에게 부딪쳐 왔다.
불사지존 백리극과 마애천불 천뢰선사는 이미 삼천 초(三千招)의
대격전을 벌였다. 그것은 실로 하늘도 땅도 경악할 공전절후의 대
혈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은 실로 막상막하였다.
내공에 있어서는 불사지존이 단연 한 수 위였으나 반야밀다대승신
공은 천뢰의 몸을 이미 금강불괴지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
여 천고의 마검(魔劍)인 불사마검은 수없이 천지를 갈랐지만 천뢰
의 몸에서 만큼은 모두 튕겨나가고 말았다.
불사지존은 싸우면 싸울 수록 놀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천뢰에게
서 쏟아져 나오는 소림칠십이종의 절예는 대해(大海)처럼 끊일 줄
모르고 펼쳐나와 그를 당황케 했던 것이었다.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
이는 명실공히 소림 최고의 비전진법이었다. 소림에는 원래 두 개
의 나한대진이 있었으나 특히 백팔나한진은 노소(老少)가 총망라
된 나한승려들로 이루어져 가히 태산(泰山)에 비견되는 절세의 대
진(大陳)이었다.
지난 날 천마봉 수라궁의 개파대전 때 출동했던 소(小) 나한진만
해도 정자(丁字) 항렬의 십팔나한승을 통해 가공할 위력을 과시하
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현재 나타난 백팔나한진의 위력은 당시와 비할 바가 아
니었다. 벽안마희의 무공과 석기량의 지략, 그리고 혈황백마의 기
세를 다 합쳐도 백팔나한진에는 통하지 않았다.
위--- 이---잉! 펑- 퍼-- 엉!
"크--- 악!"
혈왕백마는 처철한 비명을 지르며 하나 둘 쓰러져 갔다. 뿐만 아
니라 벽안마희 냉소군의 이백 년이 넘는 내공이 소림 고승들 사이
를 좌충우돌 했으나 나한대진은 요지부동, 끄덕도 하지 않았다.
냉소군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과... 과연 나한대진의 위력은 가공하구나! 이... 이렇게 강할
줄이야.......'
흑영마후 단혜령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조사동의 통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하들은 이제 일곱 명에 불과했다. 그
것은 가공할 철동인들에게 모두 처참한 죽음을 당한 때문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도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단혜령은 두 눈에 무서운 살기를 뿜으며 계속 그들을 이끌
고 앞으로 나갔으며 이윽고 그들은 하나의 커다란 지하광장에 도
달했다.
"아......!"
단혜령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광장은 온통 향연이 자욱히 깔려 있어 엄숙하고 신비스런 분위기
였다. 그 바람에 그녀는 다소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정면에는 백팔 개의 황금으로 조각된 크고 작은 불상(佛像)이 갖
가지 동작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앞에는 사람 키 만한 향로가
아홉 개 놓여져 뭉클뭉클 푸른 연기를 뽑고 있었다.
또한 그 앞에 수백 개의 항아리가 질서정연하게 놓여져 있었다.
단혜령은 대뜸 그 항아리들이 소림고승들의 유골을 담은 것임을
알아내었다.
그것은 항아리마다 고승의 법호들이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앗!"
단혜령은 항아리들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뾰죽한 경악성을 터뜨렸
다. 그것은 수백 개의 항아리 맨 마지막에 마치 생생히 살아있는
듯한 한 노승이 입정(入定)하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우 청수하며 인자한 백발노승의 아미 중간에는 붉은 홍점이 나
있었다. 매우 특이한 이 노승의 얼굴을 본 순간 단혜령은 전신을
경련했다.
"곡... 곡무현!"
그녀는 격동을 일으키며 노승에게 다가갔다. 그는 바로 현오(玄
悟), 즉 지난 날 단혜령이 부러진 비수로 찔러 죽인 현오대사였던
것이다. 단혜령은 그의 앞에 가더니 곧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
다.
"호호호...! 곡무현, 너는 결국 이곳에 죽어 있구나. 호호
호......!"
그녀는 만면에 처절한 원한의 표정을 지으며 이를 갈았다.
"평생 나 단혜령으로 하여금 불행하게 살게 만든 자! 좋다, 이제
시신을 본 이상 시신마저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녀는 말이 끝나기도 전 일 장을 현오의 머리에 내리쳤다. 푸른
빛이 번뜩이며 가공할 벽옥사라공(碧玉邪羅功)이 펼쳐졌다.
그러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 그녀의 일 장이 머
리에 떨어지기 직전, 현오의 굳게 감겼던 눈이 번쩍 뜨여지는 게
아닌가?
그와 동시에 합장했던 그의 두 손이 번개처럼 뻗더니 단혜령의 양
쪽 젖가슴 밑의 급소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아악---!"
단혜령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그녀의 양 쪽 가
슴 밑에 구멍이 뻥 뚫리며 피가 분수같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찢어질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곡, 곡무현... 네... 네가 살아 있었다니......."
현오는 탄식하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정해(情海)는 억겁(憶劫)이다. 여시주, 이제 마성
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소."
"네... 네가... 크... 으... 윽!"
흑영마후 단혜령의 차가우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던 얼굴이 갑자
기 변하기 시작했다. 빙결같은 피부가 점차 쭈글쭈글 해지더니 온
통 주름살투성이로 변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머리도 완전 백발이 되어 그녀는 순식간에 노파가 되
고 말았는데 그것도 백 살이 훨씬 넘은 노파였다.
"크... 악!"
그녀의 등 뒤에서 연달아 비명이 터졌다. 돌아다 보니 어느새 열
두 명의 젊은 승려가 나타나 일곱 명의 마종문도를 격살시키고 있
었다. 그들은 정혜(丁慧)와 범천승(梵天僧)들이었다.
단혜령은 아직도 자신의 모습이 변한 것을 몰랐던지 갑자기 처량
한 표정을 지으며 현오에게 말했다.
"무현.... 다...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하다니......."
현오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가며 탄식했다.
"혜령(慧令). 용서하시오."
단혜령의 늙은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나... 나는 당신을 그토록 사랑... 했는데......."
현오는 비감하게 말했다.
"나도 그대를 사랑했소."
"그런데... 왜......?"
"아미타불......."
현오는 괴로운 듯 합장불호를 했다. 단혜령은 눈을 감으며 말했
다.
"당신은 기억하나요? 백 년 전 그 날 달빛 아래 맹세했던 말
을......."
"기억하오."
"그때... 우리는... 한 날에 태어나지는 못했어도 죽을 때는 동시
에 죽자고 맹세했지요."
단혜령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덮였다.
"조... 졸립군요......."
"혜령."
단혜령은 눈을 힘겹게 떴다.
"무현.... 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시겠어요? 마지막......."
"으음......."
"가까이, 가까이... 그리고 저를... 안아 줘요... 제발......."
현오의 눈에 괴로움이 스쳤으나 결국 탄식하며 그는 단혜령의 곁
으로 다가갔다. 단혜령의 꺼져가던 눈에서 번쩍 살기가 스친 것은
이때였다.
②
현오가 그녀의 몸을 안은 순간이었다.
"으윽!"
현오는 섬뜩한 하나의 칼날이 마치 다정한 정인(情人)의 혀처럼
부드럽게 자신의 심장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한 자루 비수가 그의 심장을 찢고 등까지 관통한 것이었다.
"호호호...! 결국... 결국... 당신과 한 날 동시에... 죽는군
요... 호호호......!"
단혜령은 그렇게 죽었다.
"사백님!"
정혜는 현오의 등 뒤로 튀어나온 칼을 뒤늦게 보고 대경하여 외쳤
다. 그러나 현오는 오히려 담담했으며 단혜령의 싸늘히 식어가는
시신을 굳게 끌어안았다.
"물러가라."
그는 이제 불존의 제자도 현오도 아니었다. 오직 곡무현(曲武玄),
바로 그 자신의 본연으로 돌아가 있었다.
곡무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넘쳐 흘렀고 그 눈물은 아직도 악
독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단혜령의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에 떨어
졌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단혜령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혜령.... 우리의 사랑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소. 당신은 사도
출신... 그리고 훗날 벽안마희의 제자가 되었을 때... 나는 우리
가 합쳐질 수 없음을 느꼈소......."
곡무현은 단혜령의 싸늘한 시신을 굳게 끌어안았다.
"그때 당신이 소림으로 날 찾아왔을 때 물었지. 단심검(丹心劍)의
조각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느냐고....... 아아... 그때 실은...
그것을 나는 손에 쥐고 있었소......."
곡무현의 얼굴에 회색 그늘이 덮였다. 그에게도 죽음이 찾아온 것
이었다.
"혜령... 약속대로 당신과 함께 가겠소......."
그는 심장에 꽂힌 비수를 뽑았다.
"아미타불... 불존이시여, 이 못난 제자를 용서하소서... 윽!"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같은 피가 단혜령과 그를 한꺼
번에 적셨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꼭 끌어안은 채 서서히 앞으
로 고꾸라졌다.
"사백님... 사... 사백님......."
범천승들의 비통한 외침이 조사동을 울렸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고 공(空)에서 기(氣)가 발해진다!
이는 진정한 무(武)의 진리(眞理)다!"
꽈-- 르르--- 릉!
"크-- 악---!"
혈황백마는 추풍낙엽처럼 어지럽게 공중으로 날아가며 피를 뿌렸
고 소림 백팔나한진으로 인해 이제 그들 중 살아남은 자는 불과
삼십 명 안팎이었다.
나한승들은 노란 승포를 펄럭이며 흡사 물의 흐름인 듯, 때로는
태산인 듯 장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를 보며 벽안마희 냉소군
은 치를 떨었다.
"이백 년 전 천하를 주름잡던 육대천마의 하나인 나 벽안마희가
이까짓 진법에 걸려 고전하다니!"
냉소군은 터질 듯한 분노를 억제치 못하여 불쑥 허공으로 몸을 솟
구쳤고 수라혈신 석기량은 대경하며 외쳤다.
"안 됩니다, 주모(主母)! 위험합니다!"
석기량은 어느 정도 나한대진을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벽
안마희가 몸을 솟구친 방향이 바로 백팔나한대진 중 가장 무서운
방위인 사공절문위(死空絶門位)인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벽안마희 냉소군이 허공 오 장 높
이로 뜬 순간 나한승들은 합장하듯 부르짖었다.
"허(虛)는 곧 실(實)이요, 실은 곧 허다! 허허실실(虛虛實實)속에
진정한 살(殺)이 있으니 천하의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하리라!"
백팔 명의 나한승들은 일제히 한 곳으로 몰리더니 쌍장을 쳤고 그
것은 백팔 명의 내공(內功)이 완전히 합일된 것이었다.
꽝-- 꽈르릉----!
벽안마희 냉소군의 내공이 아무리 높고 무공이 하늘을 가린다지만
어찌 백팔 승려들의 전 내공을 받을 수 있으랴? 그녀는 피를 뿌리
며 하늘 높이 튕겨져 올라갔다.
희대의 마녀도 자신의 능력을 모르는 한낱 어리석은 여인일 뿐이
었다. 냉소군은 허공 십 장 높이까지 솟았다가 줄 끊어진 연처럼
떨어져 내렸다.
쿵---!
그녀는 바닥에 피를 뿌리며 떨어졌으나 역시 대마녀다왔다. 죽기
전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서... 석기량, 마지막 명령이다! 나... 나한대진을 없애라!"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전신을 폭발시켜 버렸다. 숨이 멎는 순간
그녀의 가공할 내공이 흐뜨러지며 사방으로 그녀의 육신을 분산시
킨 것이었다.
"주모---!“
석기량은 크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한 번 죽은 인간은 그 어떤 방
법으로도 회생이 불가능한 법이다.
석기량은 문득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좋다, 백팔나한진! 천 년 이래 그 누구도 깨지 못
했다지만 내가, 이 석기량이 부수어 주겠다!"
그의 발악적인 말에도 백팔 승인들은 초연했으며 그저 담담히 불
호를 외운 채 진형을 움직일 뿐이었다.
석기량은 품 속에서 하나의 자루를 꺼냈다.
"자, 보아라! 이것은 벽력천마(霹靂天魔)가 만든 백팔 개의 벽력
뇌화탄(霹靂雷火彈)이다! 모두 함께 날려 버리겠다!"
그의 몸에서 불길이 확 일었다. 그는 스스로 기폭제가 되기 위해
삼매진화로 자신의 몸을 태운 것이었다.
"피, 피해라!"
백팔 승인들은 대경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갔으나 그것은 이미 너
무나도 늦은 일이었다.
꽝--- 꽈-- 르- 르- 릉---!
엄청난 대폭발음과 함께 주위 삼백 장은 완전히 화염으로 휩싸이
고 말았다. 동시에 전각이, 불당이, 탑(塔)이 대웅전이 모두 거대
한 화염폭풍에 날아갔다.
모든 것이 끝장나고 있었다.
여명(黎明).
소림사의 불타는 성지에도 여명은 밝아오기 시작했다.
불사지존 백리극과 마애천불 천뢰선사는 어느덧 일만 초(一萬招)
를 싸우고 있었다.
실로 무림사상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공전의 대격전으로 인해 그들
주위 백여 장은 완전히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마침내 불사지존은 내심 탄식했다.
'아! 과연 소림은 소림이다. 이 자의 무공은 실로 상상도 할 수
없이 강하다!'
그는 벌써 불사마검으로 천뢰의 수십 군데 사혈(死血)을 찔렀다.
그러나 불사마검은 그에게 약간의 상처만 입혔을 뿐 모두 튕겨나
오고 말았다.
"좋다, 천뢰! 과연 대단하다. 노부는 진정으로 감탄하는 바이다.
그러나 너만 없으면 이 소림도 끝이 아니냐? 노부가 비록 한 팔을
잃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널 제거해야겠다!"
불사지존 백리극은 이렇게 외치며 오른팔을 앞으로 뻗었다.
"아미타불... 불사지존이여! 소림의 웅혼함은 사공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공연한 수작이다!"
백리극은 으스스한 노성을 터뜨렸다.
"천뢰! 천하의 칠십이 가지 마공(魔功)을 모두 합친 이 공격에도
네가 죽지 않는가 두고 보겠다!"
다음 순간 실로 통천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우우... 웅.......
괴이한 진동음과 함께 백리극의 온 몸에서 시커먼 기류가 발산되
더니 동시에 검은 기류는 오 장 가량 퍼졌다가 다시 좁혀갔다.
묵인(墨人). 그는 완전히 시커먼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곧
그 검은색은 그의 앞으로 내민 오른팔로 집중되더니 섬전 일순,
그의 팔은 엄청난 폭음과 함께 쑥 뻗히며 천뢰의 가슴으로 박혀버
렸다.
"크윽!"
천뢰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미 그의 합장했던 쌍수도 반야밀
다대승신공을 쏟은 뒤였다.
꽈--- 쾅---!
"으아악!"
불사지존 백리극 또한 전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끼며 뒤로
붕 떠 십 장 밖까지 날아갔다.
이는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엄청난 결과로 천뢰선사의 가
슴에는 백리극의 마공이 응집된 마수(魔手)가 깊숙히 박혀 있었
다.
반면 십 장 밖에 떨어진 백리극은 땅 속으로 한 자 빠졌다가 튕
겨 나왔으며 그의 가슴은 시뻘겋게 피로 젖어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전 내공이 반 이상 소실된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크... 크윽! 천뢰, 네 놈이......."
그는 안면에 무시무시한 살기를 띄우며 다시 걸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아미타불......!"
슈슈슈--- 슈슉---!
펑---!
"크윽!"
어디선가 우박같은 암기가 쏘아져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백리극
의 전신에 박혀버렸다. 그의 몸은 다시 오 장 밖으로 날아갔다.
장내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천기선사가 사륜거를 밀고 있었는데
암기는 바로 그의 사륜거에서 발출된 것이었다.
"끄... 윽! 너... 너는 누구냐?"
백리극은 다시 일어나며 물었다.
"아미타불... 천기(天機) 외다."
백리극의 안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소림 삼성승... 과...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투... 투... 투... 툭!
놀랍게도 그의 전신에 박혀있던 수백 종의 암기가 모두 빠져 나왔
다. 그러나 그가 이미 치명적인 상처들을 입은 것을 그의 백납같
이 굳어진 안색이 입증해 주고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엄청난 대폭발음이 대웅전 쪽으로부터 울려왔다.
동시에 무시무시한 화광(火光)이 소림 전체를 집어 삼킬 듯 일어
났다.
쾅--- 꽈--- 르릉---!
"아, 아니!“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 안색이 대변하고 말았다. 백리극도 몹시 충
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급히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더니 사방을
향해 외쳤다.
"철수하라! 퇴각하라---!"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던 마종지문의 고수들은 모
두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때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던 백리극이
불사마검을 던졌다.
"으윽!"
사륜거에 앉아 있던 천기선사는 불사마검이 빛살 같이 날아와 자
신의 가슴에 박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고개가 앞으로 뚝 꺾어졌
다.
백리극의 외침이 불타는 소림사를 진동시켰다.
"듣거라! 비록 나 불사지존의 목숨은 얼마남지 않았으나 앞으로
진정한 천혈성(天血星)을 타고난 마종문주(魔宗門主)가 나타나 전
무림을 피로 쓸어버릴 것이다! 크하하하......."
처절한 광소는 밝아오는 여명을 온통 으스스하게 뒤흔들었고 뒤이
어 소림사는 고요한 정적에 싸였다. 수천 명에 달했던 마종지문의
고수들은 모두 철수한 것이었다.
장내에 문득 피투성이가 된 천심선사(天心禪師)가 나타났다.
"천기사제!"
그는 가장 먼저 사륜거로 날아갔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천기
선사는 싸늘히 식어 있었다. 불사마검이 그를 뚫고 사륜거 등의자
뒤까지 비어져 나와 있었다.
"아아!"
천심선사는 이번에는 가슴에 백리극이 날린 검은 마수(魔手)가 박
힌 채 고목처럼 서 있는 천뢰선사에게 몸을 날렸다.
"천뢰사제!"
그러나 천뢰는 꺼져드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 사형. 건드리지 마시오. 건드리면 죽소. 나... 나를 조사
동(祖師洞)으로... 조사동으로 옮겨 주시오."
천뢰는 안간힘을 쓰며 한 마디를 더 뱉았다.
"혀, 현수(玄修)... 그 아이를... 기다려야... 합니다."
천심선사는 눈물을 지으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③
중양회(重陽會).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나 사파의 일회(一會)를 기억했다. 지난 백
년 간 사파무림은 남맹북단(南盟北檀), 일교(一敎), 일회(一會),
이곡(二谷) 등이 지배해 왔는데 이들 중에서도 가장 신비스런 단
체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일회(一會)였다.
왜 이런 괴이한 이름이 붙었는가?
그것은 그들이 백 년 동안 오직 매년 중양절(重陽節)에만 모이기
때문이었고 중양회에 속한 고수들의 이름과 숫자는 물론, 그 총단
이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는 회주(會主)가 누구인지조차 온통 비
밀이었으므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었다.
단지 그들은 매년 중양절만 되면 모였다가 사라졌고 따라서 중양
절을 제외하고 백 년 동안 강호상의 활약은 전혀 없었다.
악양루(岳陽褸).
열흘 전 중양절에 악양의 악양루 현판에 한 개의 검은 화살이 꽂
혔다. 그것은 한 뼘 정도의 크기로 아무도 그것에 주의하는 자는
없었다.
또한 그것은 바로 높은 현판의 글씨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웬만큼
안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발견하기가 불가능했다.
악양루에서 멀지 않은 한 객점의 동쪽의 객방에서 백의 청년서생
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백화미가 남장으로 변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금 열린
창문을 통해 빨갛게 불타오르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만면에는 긴장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성랑의 말에 의하면 열흘 안으로 누군가 찾아온다고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 밤이건만 어째서.......'
이때 그녀의 바로 등 뒤에서 한 줄기 음산한 음성이 들렸다.
"현천령을 꽂은 사람이 바로 그대인가?"
백화미의 몸이 일시에 싸늘하게 굳어졌다.
'이... 이럴 수가... 바로 등 뒤까지 오도록 내가 눈치를 챌 수
없었다니.......'
그녀는 아연하여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중(僧), 바로 한 명의 붉
은 가사를 입은 중이 서 있었다. 그런데 왼손에 핏빛의 옥불장(玉
佛杖)을 들고 있는 그의 두 눈은 온통 검은 동자뿐이어서 실로 섬
뜩한 느낌을 주는 혈의중이었다.
그를 보자 백화미의 뇌리에는 한 인물이 떠올랐다.
'호... 혹시 이 자는 백 오십 년 전 일대혈풍을 일으켰던 현천교
(玄天敎)의 혈마불(血魔佛)이 아닐까?'
그러는 사이 어디선가 낄낄거리는 까마귀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
다.
"컬컬컬... 혈마불, 그가 현천령을 꽂았으니 현천령주인 것은 당
연하지 않은가?"
방 안에 다시 한 흑영이 날아 들어왔다.
그는 전신에 흑색의 헐렁한 도포(道袍)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창백했으며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의 왼쪽 어깨에는 징그럽게도 한 마리의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백화미는 그를 보자 가슴이 식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어디선가 소름끼치는 괴소가 들려왔다.
"크흐흐흐흐흐... 흑오존자(黑烏尊子)! 그러나 그의 모습은 천존
의 말씀과는 다르다."
'흐... 흑오존자!'
백화미는 안색이 변했다.
백 오십 년 전. 마오(魔烏)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황하가 혈하(血
河)로 변한다는 무서운 대혈마가 존재했었다. 그는 현천교의 절정
고수로 흑오존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그 이름은 곧 죽
음의 상징이었다.
까마귀를 대동한 흑오존자는 낄낄거렸다.
"낄낄... 혈영마인(血影魔人)! 그대도 벌써 와 있었군."
"크흐흐... 제일 먼저 왔지!"
스스스스.......
방 안에 붉은 안개가 모이는 듯 하더니 뭉쳐져 하나의 핏빛 인간
이 형성되었다. 전신의 피부나 눈동자, 옷마저 온통 핏빛의 괴인
이었다.
혈영마인.
그도 역시 백 오십 년 전 현천교의 절정고수로 무림을 피바다로
만든 위인이었고 그의 혈영만겁장(血影萬劫掌)은 사도 최고의 악
랄한 마장(魔掌)이었다.
백화미는 방 안에 세 명의 대마두가 나타나자 전신에 소름이 끼치
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다시 이번에는 천진난만하기 그지 없는
어린 소년의 익살맞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헤헤헤헤...! 혈영마인. 네가 제일 먼저 왔다고? 천만에, 나는
이미 삼 일 전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러자 흑오존자는 욕설을 퍼부었다.
"제기랄! 마동(魔童), 어디에 있느냐? 썩 나와라!"
"낄낄낄낄......!"
괴이한 웃음소리가 울린 순간이었다.
"아악!"
백화미는 그만 혼비백산한 채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벽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희
한하게도 귀여운 소년(少年)으로 그 소년은 벽 속에 박힌 채 태연
하게 웃고 있었다.
흑오존자가 거칠게 외쳤다.
"징그럽다! 어서 당장 나와라!"
그 말에 소년이 미소 지으며 벽에서 빠져 나왔으나 놀랍게도 벽
에는 아무런 손상도 없었다.
백화미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아! 이들의 무공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이 높구나. 그런데 마동
(魔童)이라면.......'
마동(魔童).
오래 전부터 강호에 전해지는 두 가지 노래가 있었다.
- 경소자(驚笑者) 소중살(笑中殺),
- 경소년(驚少年) 암중살(暗中殺).
웃는 자를 조심하라, 웃음 속에 살(殺)이 있다.
어린 아이를 조심하라, 보이지 않게 죽음(死)의 살수를 전개한다.
이 노래는 전대의 대마두인 불면소살(佛面笑殺) 호천광과 바로 이
마동(魔童)을 일컫는 것으로써 불면소살은 항상 웃으면서 살인을
하기 때문에 웃는 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런 면에서
마동(魔童)의 무서움은 불면소살을 십 배 능가했다.
- 웃는 자를 만날지언정 어린 소년(少年)은 만나지 마라. 그의 손
에 걸리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황천으로 간다.
비록 불면소살과 같은 서열에 있지만 마동은 그보다 훨씬 잔혹한
인물로 그 역시 현천교의 절정고수였다.
백화미는 객방에 나타난 네 괴인들을 바라보며 놀라면서도 한편
의아스러웠다.
'이들은 모두 과거의 현천교 사대살신(四大煞神)들이다. 이들이
중양절 날 꽂은 현천령을 보고 달려오다니... 그럼 혹시 이들이
바로 중양회(重陽會)라는 이름이 붙은 일교의 인물이 아닐까?'
그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과연 중양회란 이들 현천교의 잔당
들을 가리키는 말로써 과거 백 년 전 현천교주 적비천존이 실종된
후 이들은 일 년에 한 번 중양절 날 모여 현천교의 재건을 다짐했
던 것이다. 단지 무림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도 없었다.
이윽고 흑오존자가 백화미에게 흉칙하게 웃으며 물었다.
"꼬마야, 네가 어찌 현천령을 갖고 있느냐?"
백화미가 비로소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을 때 갑자기 어
디에선가 웅혼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령(四靈). 너희들은 본 천존의 말을 잊었느냐? 현천령은 곧 나
와 같다는 것을."
휘... 이... 잉!
방 안에 한 줄기 음풍이 부는가 싶자 어느 틈에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 중 우측에 선 자는 바로 현천교의 교주인 적미천존
(赤尾天尊) 여적성으로 지난 날 하후성이 승불폭에서 만났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 곁의 흑의를 입은 청수한 노인(老人)은 머리도 수염도 검은가
하면 손에도 검은 색의 섭선(攝扇)을 들고 있었으며 두 눈에는 무
한한 지혜(智慧)가 어려 있었다.
적미천존은 검은 장포에 금룡(金龍)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관을 썼으며 수염은 교룡처럼 꼬았다.
그의 신광은 마치 번갯불같았으되 지난 날과 많이 달라진 모습이
었다. 그가 나타나자 네 괴인, 즉 사령은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
었다.
"사령, 천존을 뵙습니다!"
그러나 적미천존이 손을 흔들자 사령은 튕기듯 모두 일어났다. 무
형의 강기가 그들을 일으킨 것이었다.
적미천존은 곧 고개를 돌려 백화미를 바라보았다.
"아이야, 현천령을 네가 어찌 얻었느냐?"
"노... 노선배님......."
백화미는 이미 그가 백 년 전 현천교의 교주인 적미천존 여적성임
을 알아보고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소녀 백화미, 노선배를 뵈옵니다."
적미천존은 담담히 물었다.
"노부는 현천령을 하후성이란 아이에게 주었다. 그런데 어찌 네가
갖고 있느냐?"
백화미는 그에게 단번에 죄다 설명했다. 하후성이 마종지문에 의
해 무회곡에 갇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부탁으로 현천령을
꽂은 일 등과 그 와중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모두 전했다.
듣고 있던 적미천존은 안색이 굳어졌으나 곧 하늘을 우러러 보더
니 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백리극, 그 놈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구나! 으하
하하......!"
그는 차갑게 불렀다.
"사령!"
"넷!"
사령은 모두 복명했다.
"무회곡으로 가자!"
그 순간 백화미는 자신의 몸이 어느새 혈마불에 의해 나꿔채져서
는 순식간에 밤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
백화미는 그저 탄성을 내지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귀청을 찢는 듯한 바람소리가 그녀로 하여금 눈을 질끈 감게 했기
때문이었다.
④
무회곡(無回谷).
방 안에 세 명의 인물이 심각하게 마주보고 있었다. 하후성은 탁
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고 그 앞에 천로와 지로가 얼굴이 굳
어진 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천로가 음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후공자. 백화미가 벌써 백 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는데 어찌된
일이오?"
하후성은 차를 마신 후 담담히 말했다.
"그녀는 몸이 안 좋아 요양 중이오."
"그렇다면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않소?"
하후성은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노성을 질렀다.
"닥치시오. 그녀는 이제 마종문의 사람이 아니라 나 하후성의 내
자요. 내가 아무리 내공이 흩어졌다고는 하지만 나를 무시하는 말
은 도저히 용납지 못하겠소."
그 말에 천로의 안색이 무섭게 변했으며 특히 그의 두 눈에는 가
증스럽다는 듯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으... 으......."
그는 무섭게 하후성을 노려보았고 반면에 하후성은 추호도 동요하
지 않고 천로를 마주 보았다. 그의 고요한 눈은 눈 앞에서 태산이
무너진들 깜빡도 하지 않을 듯했다.
천로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노부가... 이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이토록 큰 모욕은 받아보
지 못했다."
"후후......."
"한 번 발을 구르면 태산조차 떤다는 우리 천지쌍군(天地雙君)을
네가......."
그러나 하후성은 여전히 담담했다.
"소종사님의 명만 아니었다면 너는 죽어도 만 번은 더 죽었을 것
이다!"
하후성이 무겁게 그 말을 받았다.
"나의 무공이 상실되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내 앞에 감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오."
"우욱!"
지로가 막 발작을 하려는 듯 두 주먹을 움켜 쥐었으나 천로가 간
신히 그를 붙잡았다.
"아우, 나가세!"
그는 노화를 최대한의 인내로 참는 한편 천로에게 이끌려 방을 나
가며 기어이 한 마디를 남겼다.
"기억해라! 이 무회곡은 한 번 들어오면 영원히 나가지 못한다.
우리 천지쌍군 외에도 소종사가 특별히 배치시킨 구구팔십일로의
고수들이 있다. 섣불리 행동한다면 소종사 앞에서 자결하는 한이
있어도 네 놈을 때려 죽이리라!"
하후성은 그들이 사라지자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그의 웃음은 고독한 영웅의 처절한 비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는
성좌가 흐르고 있었다.
'서쪽의 성군(星群)이 이곳으로 흐르고 있다. 삼 일(三日).... 삼
일이면 모든 것이 판가름 난다. 황, 나는 반드시 이곳을 나갈 것이
다!'
하후성의 얼굴에는 무서운 결단의 빛이 어렸다.
궁등이 따스한 빛을 밝히는 방 안.
하후성과 호연연(胡姸姸), 매교랑, 그리고 하후성과 매교랑 사이
에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
매교랑은 침상에 걸터 앉아 귀여운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고
호연연은 그 광경을 바닥에 앉아 턱을 고인 채 물끄러미 평화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후성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탁
자에 앉아 기다란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가 혼자서 먹을 갈고 붓을 들자 그 광경을 본 호연연의 안색이
싹 변했다. 하후성은 두루마리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
은 바로 인체의 도형으로 도형의 옆에는 깨알같은 주석이 새겨져
있었다.
'.......'
호연연의 가슴은 점차 무거워졌다. 비록 지금은 평범한 아낙이 되
었지만 역시 천하제일재녀가 아닌가? 그녀는 이미 하후성이 무엇
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있었다.
이윽고 하후성은 붓을 놓더니 두루마리를 말아 품 속에 집어 넣었
다.
"으앙!"
이때 매교랑의 젖을 빨고 있던 아기가 불현듯 크게 울어댔다. 매
교랑은 깜짝 놀라 급히 아기를 달랬다.
"아가야. 울지 마라......."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꽈르르-- 릉-- 꽈-- 릉---!
무회곡 전체가 울리는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더니 무서운 내공(內
功)이 담긴 앙천광소가 무회곡을 뒤흔드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하하하하......!"
그 웃음이 채 그치기도 전에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으... 아... 악!"
하후성은 그 갑작스러운 음향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드디어 왔구나.'
호연연과 매교랑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고 아기도 놀라서인지 울
음을 뚝 그쳤으나 처절한 비명은 계속 울려왔다.
콰-- 쾅-- 꽈르릉---!
"크... 아... 악!"
지옥 아수라계를 방불케 하는 처절한 괴음향이 무회곡 전체를 폭
풍처럼 휩쓸고 있었다.
꽝---!
문득 방문이 박살나며 피투성이의 한 흑의노인이 뛰쳐 들어왔다.
그는 가슴에 금룡이 수놓아져 있었고 머리에는 관을, 그리고 수염
은 교룡 형태로 꼬아져 있었다.
그는 바로 적미천존 여적성이었다. 그의 왼팔은 어깨서부터 잘려
져 반신이 완전히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방 안에서 하후성을 발견하자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크하하하...! 하후성. 널 드디어 찾아냈구나!"
그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히 떠올라 있었다. 하후성도 그를 대뜸
알아볼 수 있었다.
하후성은 마음이 크게 진탕하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노선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동을 일으키며 굳게 끌어 안
았다.
"하후성! 이게 얼마 만이냐?"
적미천존의 음성은 팔이 잘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고통이 섞
여 있지 않았으며 되려 호탕하기만 했다.
그는 껄껄 웃더니 방 안의 두 여인과 어린 아이를 둘러보았다.
"그것 보아라! 내 예상이 어디 틀린 적이 있느냐? 핫핫핫...! 너
는 영원히 불제자가 될 수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다 문득 그는 기이한 시선으로 하후성을 응시했다.
"너는... 내력(內力)을 상실했느냐?"
"네, 그것은......."
하후성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고 적미천존도 짐작되는 바가 있
는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날카로
운 안광을 빛내며 잠시 하후성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하후성은 적미천존의 피투성이 어깨를 바라보며 오히려 걱
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노선배님, 그 팔은......."
"팔? 하하하...! 천지쌍군 그 놈들의 무공은 정말 상상 외로 높았
다. 팔 하나 잃은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
적미천존의 입가에는 특유의 오만한 웃음이 흘렀다.
"흐흐흐... 대신 놈들은 목숨을 바쳤지. 나 적미천존의 팔이 그렇
게 값어치 없는 것만은 아니야."
적미천존은 여전히 껄껄 웃었으나 그의 그런 의지는 오래가지 못
하였다.
"우욱!"
그는 비명을 발하더니 피를 토하며 순식간에 안색이 잿빛이 되었
다.
"노선배님!"
"크으! 천로 그 놈의 천멸광한장(天滅廣寒掌)이 이렇게 지독할 줄
은 몰랐구나."
이때에도 밖에서는 계속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고 적미천존이 다급
하게 말했다.
"하후성, 시간이 없다. 어서 정좌해라."
하후성은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서! 이것은 너와 노부의 운명이다."
무슨 뜻인가? 하후성은 의아했으나 적미천존의 재촉에 할 수 없이
바닥에 정좌하고 앉았고 적미천존은 즉시 그의 백회혈에 손바닥을
붙였다.
곧 무서운 진기(眞氣)가 장강대하처럼 하후성의 체내로 뜨겁게 흘
러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삽시에 그의 본신 내력으로 화해 전신
사지백해를 힘차게 치달리고 있었다.
이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하후성의 귓전에 적
미천존의 웅후하면서도 엄숙한 말이 울렸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노부의 생명은 앞으로 한 시진도
남지 않았다."
하후성은 대경했으나 진기의 유입으로 인해 몸을 움직이지 못함은
물론 입조차 열 수가 없었다. 적미천존은 계속 말했다.
"백 년 전 노부의 혈천교는 천하를 장악하고 있었고 누구도 그 힘
을 당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불사지존 백리극이 노부를
찾아왔다......."
적미천존의 말은 하후성의 뇌리로 계속 들어왔다.
불사지존 백리극. 그는 백 년 전에도 강호제패의 야심을 품고 있
었으며 그때 벌써 은밀히 마종지문을 세우고는 알게 모르게 세력
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백리극은 당시 사파무림을 장악하고 있던 현천교의 교
주 적미천존을 찾아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것은 적미천존에게
마종지문의 부문주 자리를 줄테니 손을 잡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사파의 종주인 적미천존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
가 없었다. 의당 그는 단호히 거절했고 백리극은 그런 그에게 결
투를 신청했다.
백리극은 천 초(天招)를 한정 지으며 말하기를 그 싸움에서 지는
쪽은 자신의 문파를 해체하고 백 년 동안 무림에서 물러나자는 것
이었다.
두 사람은 드디어 공전의 대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
터 백리극의 교활한 암계로써 그는 미리 적미천존의 무공 내력을
환히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천 초의 대결이라는 그 싸움은 결국 광대놀음에 불과했고 겨우 한
초 반 식(一招半式)의 패배로 인해 적미천존은 현천교의 해체는
물론, 그 후 백 년 간이나 암흑을 헤매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적미천존 여적성은 백리극의 간악한 술수에 휘말렸던 자신을 후회
하는 한편 백 년 후 반드시 복수하겠노라고 다짐하며 그 길로 무
공 고련을 위해 심산에 숨어 들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어느새 백리극은 그의 몸에 한 가지 금제의 암수를 써 놓았었다.
그로 인해 여적성은 소양경(小陽經), 태양경(太陽經), 소양맥(小
陽脈), 태양맥(太陽脈)에 무서운 화기(火氣)가 생겨나는 바람에
혈맥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상태로라면 무공 연마는 고사하고 목숨조차 채 일 년을 부지하
기가 어려웠다. 적미천존은 크게 분노했으나 그때는 이미 백리극
이 깊이 잠적하여 찾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천고의 성약(聖藥)인 소
림대환단(少林大環丹)만 있다면 그는 금제에서 거뜬히 풀려나올
수가 있었다.
적미천존은 그 즉시 소림사로 달려가 당시의 소림장문인이던 천심
선사(天心禪師)를 만났다.
그러나 대환단은 불문(佛門)의 성약이므로 인연이 닿지 않는 대마
두에게는 줄 수 없노라는 게 천심의 대답이었다. 결국 적미천존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천심선사는 대신 한 가지 문제를 제시하며 그것을 맞추면 대
환단을 주겠노라고 말했다. 그로 인해 적미천존은 그 날부터 승불
폭에 있는 동굴 속에 주저앉아 천심이 제시한 문제를 풀기 시작했
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바로 천심의 깊은 혜안에서 나온 것이었으
니, 적미천존은 승불폭에서 몇 년이 지나면서 차츰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의 양경양맥(陽經陽脈)에 입은 상처는 오직 화(火)의 반대인 수
(水), 즉 음기(陰氣)만이 억제할 수가 있었다.
애초에 천심이 낸 문제에는 해답이 없었다. 그는 다만 승불폭의
수성(水性)에 적미천존을 맡긴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적미천존은
승불폭에서 백 년을 머무는 동안 스스로 상처가 치유되기에 이르
렀다.
적미천존의 긴 말이 끝났다.
그 동안에도 그의 진기는 끊임없이 하후성의 백회혈로 흘러 들어
갔고 하후성의 귀에는 그의 말이 꿈결처럼 들려왔다.
"천심, 그 자는 진정 존경할 만한 화상이었다. 결국 그는 나를 구
한 셈이다."
그러나 하후성은 갑자기 적미천존으로부터 흘러드는 진기가 순행
(順行)을 거부한 채 마구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적미천존의 음성
에도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천지쌍군과 오백 초의 격전을 벌이는 사이에 가라
앉았던 상처가 재발되었다. 다시 그 금제가 작용하기 시작하여 양
경양맥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가라앉아 가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대로 두면 나 스스로의 진력이 나 자신을 태우게 된다. 그래서
너의 몸에 진력을 이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노부에 의
해 다시 태어났노라......."
말이 끝나자마자 하후성은 진기의 유입이 그치는 것을 느꼈다. 백
회혈에 놓여졌던 적미천존의 손도 떨어졌고 비로소 하후성은 자유
의 몸이 되어 급히 몸을 돌렸다.
"아!"
그는 탄식을 발했다.
적미천존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백발
로 변했으며, 그 멋진 적미(赤眉)조차 하얗게 세어 버렸는가 하면
얼굴은 온통 주름살로 뒤덮여 있었다.
무회곡 밖에서 들리던 폭음과 비명소리는 어느새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하후성은 멍하니 백발노인이 된 적미천존을 바라보며 넋
을 잃었다.
휙! 휙......!
방 안에 여섯 명의 인영이 피비린내와 함께 날아들었다.
앞장 선 자는 흑의와 흑발흑염의 검은 부채를 든 노인이었고 그
뒤를 이어 혈마불, 흑오존자, 혈영마인, 마동, 백화미가 따라 들
어왔다.
적미천존은 그들 중 흑의노인에게 힘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귀곡자. 밖은......?"
흑의노인은 바로 만사(萬事)와 함께 무림을 떨어울리는 지사(智
士) 귀곡자였으되 그는 바로 백 년 전 혈천교의 군사(軍師)이자
총호법이기도 했다.
귀곡자는 변해버린 적미천존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짐작
한 듯 탄식했다.
"아... 교주... 결국은......."
적미천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러나 노부의 모든 것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이... 소형제에게 넘겨주었다."
귀곡자는 다시금 탄식을 금치 못했다.
"교주......."
"무회곡의 상황은?"
"안심하십시오, 교주. 모두 전멸시켰습니다."
적미천존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미 안색이 잿빛이었
다.
"교주님!"
사령은 무릎을 털썩 꿇었고 귀곡자는 얼굴이 암담하게 변했다. 그
들을 향해 적미천존은 꺼져드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 너희들... 잘 들어라......."
그는 품 속에서 검은 화살을 꺼내더니 그것을 멍하니 서 있는 하
후성에게 주었다.
"오늘부터... 이 현천령의 주인(主人)은 ... 이 소형제다......."
"교주님!"
"천존......."
"너... 너희들이 진정으로... 나를 따른다면... 목숨을 바쳐...
소형제를... 따르라......."
"노선배님!"
하후성은 격동하여 무릎을 꿇으며 적미천존을 끌어 안았고 적미천
존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백 년 동안의... 외로웠던 ... 마음을 달래려고... 너를... 소형
제... 너를... 아! 그러나 아쉽구나......."
무림의 거성(巨星) 적미천존 여적성은 이렇게 숨지고 말았다.
무림의 하늘에서 신성(新星)의 재탄생(再誕生)과 함께 또 하나의
거성이 이렇게 떨어져간 것이었다.
"노선배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