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제 1장 비(雨), 피(血), 여인(女人)
낙양(洛陽) 칠월(七月) 이 일(二日).
낙양은 모든 점에서 거대한 도시이다. 그리고 낙양성의 주민들은 낙양의
장구한 역사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세우(細雨)가 낙양을 적시고 있다. 황하(黃河)를 범람시켰던 폭우의 빗줄
기가 가늘어지기 시작하며 세우로 화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낙양에 오고 말았군."
흑삼을 걸친 청년이 낙양성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뉘엿뉘엿 지는 노을과 더불어 빗줄기가 흘러내리는 낙양 시내로 느
릿느릿 접어들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흑삼은 본래 흰 옷이되, 너무나도 오랫동안 빨지를 않
아 검어진 것이다.
거리는 한산했다. 며칠째 퍼부어진 비로 인해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거리
에 인적이 뜸해진 것이다.
그는 공자묘(孔子廟)를 지나서 남가로(南街路) 쪽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낙양의 지리에 익숙한 것 같았다.그는 바로 백무영이었다. 그는 낙
양쾌화림 쪽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추슬거리는 비에 젖은 남가로 끝에는 중원에서 가장 술 마시기 좋은 술
집이 세워져 있다.
일컬어 낙양쾌화림(洛陽快花林).
환락이 넘쳐 나는 곳이되, 불야궁처럼 음사스럽지 않는 곳이다.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면, 쾌화림의 운치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다.
한데, 쾌화림의 분위기가 며칠 전부터 판이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괴인들이 쾌화림 근처를 얼씬거리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주당들이 쾌화림
근처로 다가설 때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기가 발사되는 사태가 여러
번 벌어졌다.
어떤 공자대부(公子大夫)는 말을 타고 가다가 말이 암기에 맞아 나뒹구는
바람에, 석교(石橋)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한 일이 닷새에 걸쳐 거듭되는 통에, 쾌화림은 개점 휴업하는 상태였
다.
솔직히 쾌화림 둘레에는 수백여 명의 무림고수들이 머물러 있는 바, 그들
은 쾌화림으로 접어드는 모든 길을 지키며 쾌화림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의 발걸음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쾌화림은 귀가(鬼家)처럼 을씨년스러워졌다.
하나, 쾌화림의 주인은 그런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업을 계속하고 있
었다.
비가 추적추적 뿌려 댄다.
길을 돌아들면 백 장 밖으로 쾌화림이 보이는 곳이다.
백무영은 흠뻑 젖은 옷자락을 나부끼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보행은 기이하기 이를 데 없다.
흐느적거리는 듯, 미끄러지는 듯, 빗물에 젖은 풀잎을 디디고 가는 데에
도 풀잎이 눕혀지지 않는다.
그의 몸뚱이는 풀잎 위에 선다 하더라도, 풀잎에 무게를 거의 전하지 않
는 것이다.
'마기(魔氣)가 짙다!'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도처에서 음사한 기운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 곳까지 은잠해 오는 가운데, 괴무사들이 떼를 지어 숨어 있는 걸
여러 차례 발견했다.
그들은 묘수환궁(妙手幻宮) 쪽 사람들이 아니다. 묘수환궁은 율법에 따라
남자 제자를 거느리지 않는다.
괴무사들은 대부분 복면을 하고 있는 바, 그들의 옷차림은 중원무사들의
일반적인 복장과 상이했다.
그들은 우직(羽織)이라 불리우는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병장기를 지니고
있는 자세도 독특했다.
무사들의 숫자는 오백여, 그들은 쾌화림을 두 개의 동심원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저들은 신풍인자(神風忍者)들!'
퍼부어지는 빗속, 갑자기 뇌음(雷音)이 터져 나왔다.
우르릉- 쾅-!
요란한 폭음과 함께 비명 소리가 뒤따랐다.
처절한 비명 소리가 세 번에 걸쳐 적요를 깨뜨리는 동시에, 수십 군데에
서 흑의인영이 치솟아 올랐다.
급박한 호흡 소리, 그리고 도(刀)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또 한 번의 폭음이 터져 나오며 아름드리 나무 십여 그루가 뽑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나뭇잎이 폭설 오듯 뿌려지는 가운데, 흑의무사 네 명의 몸뚱이가 갈기갈
기 찢겨져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크아아악……!"
"케에엑……!"
고막을 찢는 비명 소리와 함께 혈무가 자욱이 번졌다.
숲 속, 팔과 다리가 난무하는 혈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명의 흑의노인이 좌충우돌 치달리고 있는 바, 그의 둘레에 오십여 명
의 도객(刀客)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흑의노인이 손을 휘둘러 댈 때마다 폭음이 터져 나오며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날아올랐다.
"우아아아……!"
흑의노인은 괴이한 포효성을 터뜨리며 손을 어지럽게 흔들어 댔으며, 폭
우 속으로 수백 개의 장영이 떠올랐다.
그의 권장술(拳掌術)은 변화막측하고 패도무비하다.
예도를 한 자루 내지 두 자루씩 차고 있는 자들은 이리저리 피하다가 권
장에 격타당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머리가 바스러지는 자, 가슴이 뭉개어지는 자, 정수리에서 사타구니 사이
가 나누어지며 처참하게 나뒹구는 자.
인간의 죽어 가는 모습은 각양각색이었다.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쉬지 않고 터져 나오는 가운데, 흑의노인의 옷자락
이 시뻘건 피에 후줄근히 뒤덮였다.
노인은 나이답지 않게 용맹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그의 몸 도처에는 생선의 아가미 마냥 쩌억 벌어진 자흔(刺痕)이 무수히
새기어지고 있었다.
흑의도객들은 동심원을 형성하며 차륜도진(車輪刀陣)으로 다가서고 있었
다.
하나가 쓰러지면 둘이 다가서고, 둘이 쓰러지면 넷이 동시에 다가선다.
"크아아……!"
흑의노인은 잇달아 네 군데에 깊은 도흔을 새기게 되었으며, 어깨 부위에
서 사발만한 살점이 베어졌다.
그러나 그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으며, 용형삼퇴(龍形三腿)로 두 명의 흑
의도객의 몸뚱이를 허공으로 차 올리며 연화십해(蓮花十解)를 발휘하여
네 명의 무사를 피떡으로 뭉개뜨렸다.
장작 뽀개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흑의도객들은 피범벅이 되어 나뒹굴
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흑의노인은 몸에 칼자국을 더하게 되었다.
"우……!"
흑의노인은 피투성이가 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역전노장으로 무수한 격전을 치루어 본 바 있으되, 오늘 같은 처절
한 싸움은 처음이었다.
그는 쉰여덟 명의 무사를 쳐죽였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숫자는 그보다 십
배 많다.
그리고 계속 나타나는 자들의 무공은 점점 더 강해졌다.
"크아아아……!"
노인은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도 기백을 잃지 않고 손발을 휘저어 댔다.
그의 손이 풍차처럼 휘둘러질 때, 쉬지 않고 덤벼들던 무사들이 일제히
뒤쪽으로 물러나면서 네 명의 회의무사가 다가서기 시작했다.
허리에 쌍도를 차고 있으며, 얼굴을 회색 천으로 칭칭 휘어 감고 있는 자
들.
이제까지 싸우던 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노련해 보이는 자들
이다.
네 명의 도객은 사상진(四象陣) 형태로 흑의노인을 포위하며 기이한 언어
로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어 네 자루의 장도(長刀)가 허공으로 떨치어졌으며, 무수한 칼꽃이 나
비 떼처럼 떠오르며 흑의노인의 전후좌우를 포위했다.
휘리리릭-!
무수한 환영이 떠오르며, 마치 천 명의 무사가 동시에 덤비는 것 같은 환
상이 일어났다.
흑의노인은 혼신 내공을 발휘해 쌍장을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콰콰쾅-!
요란한 파공성이 나며 또다시 거목이 뿌리째 뽑혀 올랐다.
그러나 노인의 생사십해공(生死十解功)은 허초로 돌아가고 말았다.
노인이 후려친 곳은 환영이 떠올랐던 곳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노인의 자세에 허점이 벌어질 때, 네 자루의 도가 노인의 등판, 가슴, 어
깨, 다리로 나누어져 다가섰다.
절대절명의 순간, 흑의노인은 탈진상태인지라 사상합벽도진을 피할 도리
가 없었다.
노인의 몸뚱이가 분시(分屍)되려는 찰나.
"동영(東瀛)의 쥐새끼들! 후훗, 너희들이 시전하는 잔광이도류(殘光二刀
流) 따윈 중원에서 통하지 않아!"
허공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헌칠한 청년이 허공에서 훌훌 날아 내렸다.
그는 적송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들고 있었으며, 네 명의 도객들이 시전
하는 도화(刀花)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잔광이도류와 신음류(神陰流), 백원류(白猿流), 그리고 인월류(忍月流)…
후훗, 그 따위는 신풍(神風) 따위를 믿는 섬개구리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거야."
그의 손이 천천히 떨치어진다.
그리고 허공에 원형 하나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몹시 기이한 일은, 허공에 은색 원호가 그려짐에 따라 네 명의 동영무사
가 시전한 도세가 일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또렷한 원이 형성되기 전, 네 군데에서 신음 소리 비슷한 비명 소리가 새
어 나오며 네 명의 회삼인의 허리가 작두에 베이는 수수깡처럼 싹둑싹둑
잘리어졌다.
모든 건 거의 찰나적으로 벌어졌다.
최고의 기세를 발휘하던 네 자루 신음장광도(神陰長光刀)가 적송 가지에
의해 베어지며 무사들의 허리마저 베어 버린 것이다.
"다른 자들에게는 인의를 베풀어도, 동영의 암살자들에게는 인의를 베풀
지 않는다."
청년은 적송 가지를 천천히 매만졌다.
가지에는 여전히 푸른 송침(松針)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적송 가지를 방금 전에 나무에서 잘라 냈던 것이다.
본시 생나무 가지는 유(柔)한 기운이 많아, 병기로 쓰기 곤란하다. 병기로
쓰기 위해서는 유한 기운보다 강한 기운이 많아야 하기에, 단단히 말라
버린 나뭇가지를 검이나 도 대신 쓰기 마련이다.
한데, 그는 아직 살아 있는 가지를 써서 네 명의 일급인자를 일거에 베어
버린 것이다.
"너희들의 최고 절기는 극인류(極忍流)와 일도류(一刀流). 후후후, 그리고
더 있다면 잔월류(殘月流). 모두 써 봐라!"
그는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아래턱만 볼 수 있었다. 그의 아래턱에는 하이얀 미소가
매달리고 있었다.
그 웃음은 죽음의 웃음이었다.
인자들이 눈치를 살피며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청년은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소나무 비늘을 간질였다.
그는 인자들이 접근하기를 기다렸으며, 열두 자루 도가 일제히 떠오를 때
에야 비로소 그의 손이 또다시 허공에 원형을 그려 나갔다.
반듯한 원이다. 단선이 이어지면 원이 된다.
점(點)은 검식이 되지 못하며 단선 또한 완벽한 검식이 될 수 없다. 더구
나 원형을 그려 나가는 검의 궤도야말로 검식이 되기 가장 힘든 것이다.
느릿느릿… 그리고 겉보기 우아할 정도로 아름답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검의 궤도가 원형을 그려 나가게 되자, 도처에서 피우박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크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 열두 개의 수급(首級)이 뎅강뎅강 잘리어 떠올랐으며
… 시체가 허공으로 잇달아 튀어오르며 피보라가 빗속에 뿌려졌다.
청년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언제 나뭇가지를 휘둘렀더냐 싶게 단아한 자
세이다.
"사륵의 떨거지들! 너희들의 복장으로 미루어, 너희들은 분명 신풍도(神
風島)에서 나왔다. 후후, 가서 사륵에게 전해라!"
그는 또렷한 일어로 말했다. 그는 최소한 다섯 개의 이국어를 능숙히 말
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인물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너의 가문이 진 빚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고, 곤륜(崑崙)의 아들이
신풍도를 철저히 붕괴시킬 것이라고! 후후, 가서 말해라. 대곤륜이 신풍
도를 붕괴시킬 날이 멀지 않았다고!"
그가 말하는 사이, 인자들은 공포에 질린 채 뒤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
다.
인자들이 도망치는 속도는 지극히 빨랐다.
그들은 시체를 들쳐업고 도망쳤기에, 그들이 모두 다 떠나고 난 후 숲에
남은 건 흥건한 핏자국과 너덜너덜한 팔과 다리뿐이었다.
청년은 적송 가지를 천천히 내던졌다.
그 때, 흑의노인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다가섰다.
"으으……!"
흑의노인은 뭐라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표정
이었다.
그는 목 부위를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
청년은 그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그리도 차디차던 시선이 어느
틈엔가 따뜻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으로 화했다.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아……?"
노인은 그의 입가를 바라봤다.
그는 귀머거리. 하나, 그는 입술을 읽는 재간을 지니고 있다.
일컬어 독순술.
그는 그것으로 정면에서 말을 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그 사람의 말을 거
의 다 이해하는 것이다.
"으으… 으으……!"
노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청년은 히죽 웃으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순간, 노인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고, 공자(公子)!"
노인이 포효를 터뜨릴 때.
"그렇습니다. 바로 접니다. 무영입니다, 흑노!"
천천히 죽립을 벗는 청년은 백무영이었다.
부상을 당한 채 죽음의 궁지에 몰렸던 노인은 바로 흑노였다.
그는 만박의 하인.
그와 백무영 사이의 정분은 남다르다. 흑노는 백무영이 미완성 무사이던
시절, 연일 밤을 새우며 무공 교두 노릇을 해 준 바 있다.
흑노는 백무영을 만났다는 기쁨에 몸에 가득한 상처의 아픔마저 잊고 있
었다. 그의 노안에서는 쉬임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백무영은 몹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육사부 쪽 사람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자 하였거늘……!'
그는 육사부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일 작정을 한 바 있다.
하나, 흑노마저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흑노는 백무영이 죽었다 여겼기에, 그를 보게 되자 감격이 더한 것이다.
"어서… 쾌화림 안으로!"
그가 조급히 말할 때, 백무영은 그가 자신의 입술을 판독할 수 있게끔 그
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흑노는 몹시 다쳤소. 푹 쉬어야 하오. 내가 흑노에게 단약을 주겠소. 태
을청령환(太乙淸靈丸)이라는 단약이오. 변황에서 알게 된 여인이 준 영약
을 이용해 만든 단약으로, 지혈(止血)의 효과가 좋소."
"으으, 어서 쾌화림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사륵의 수하들이 쾌화림을
접수하고자 대거 몰려들었고, 백봉소저는 쾌화림을 내줄 수 없다며 동귀
어진(同歸於盡)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단약을 드시오!"
백무영은 애써 흑노의 말을 듣지 못한 척했다.
흑노는 백무영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 느끼는 듯 그를 올려다봤다.
백무영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다른 곳을 보고 있었
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세는 가을 서리처럼 차갑기만 했다.
"어이해 이렇게 무정하십니까?"
흑노는 백무영이 야속하다는 표정이었다.
"흑노는 푹 쉬십시오!"
백무영은 흑노가 더 이상 뭐라 말 할 겨를도 없이 그의 혈도를 점했다.
흑노는 피하지도 못하고 점혈당하여 푹 쓰러지고 말았다.
백무영은 품에서 금갑을 꺼내었고, 금갑 안에서 태을청령환 세 알을 꺼냈
다.
그것은 물 없이도 복용할 수 있게 제조되어 있는 단약이었다.
비가 더욱 심해졌다. 백무영이 흑노의 상세를 치료해 주는 사이, 도처에
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백무영은 재차 포위되는 것이다.
그는 무수한 무사들이 겹겹이 동심원을 이룩하여 자신을 포위하고 있다
는 걸 모르는 듯, 흑노를 치료하는 데 전념할 뿐이다.
이백여 명의 무사가 백무영의 둘레로 다가섰다.
그들은 백무영의 실력을 아는 듯 감히 다가서지 못했다.
백무영은 결가부좌를 한 채 흑노의 천령개에 손바닥을 대었다.
"일원진기(一元眞氣)."
그의 입술 사이에서 많은 기류가 뿜어지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흰 구슬처
럼 뭉쳐지면서 흑노의 명문혈(命門穴)로 파고들었다.
흑노의 전신 뼈마디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진기 전수가 거듭될 때.
"카카… 지금이 기회다."
"흐흐… 진기를 전수하고 있는 한, 손을 쓰고자 해도 쓸 수 없지. 멍청한
놈!"
"네놈이 머리가 두 개에 팔이 네 개가 아닌 이상에야……."
잿빛 우직(羽織)을 걸친 십칠 인의 무사가 미끄러지듯 다가섰다.
무사들은 일도장광류(一刀長光流)를 시전하며 백무영을 향해 다가섰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신호하는 찰나 열일곱 자루의 검이 허공으로 떨
치어졌다.
"미간살흔도(眉間煞痕刀)!"
"신풍잔(神風殘)!"
열일곱 자루의 검이 새파란 도망을 퉁기어 올리며 백무영의 전신 혈도를
향해 다가섰다.
백무영이 진기를 타인에게 전수하고 있는 이상, 공격을 막아 내기 불가능
하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버러지들!"
백무영의 손이 슬쩍 쳐들려지지 않는가?
동영인자들은 하얀 손이 떨치어지자,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분심공(分心功)을 쓰고 있다!"
"흐으… 마음을 두 개로 나누는 자임을 모르다니!"
무사들이 자지러질 때, 백무영의 손은 팔뚝 부분까지 눈처럼 희어졌다.
"빙하신공(氷河神功)!"
천룡의 울부짖음 같은 목소리 가운데, 근처에 한기가 자욱이 퍼져 나갔
다.
그리고 허공에서 눈송이가 펄펄 날리기 시작했다.
백무영의 골수 속에는 백 년 간 빙굴 안에서 좌선하며 빙극지기를 쉬지
않고 흡수한 사람보다도 강한 빙극진기가 머물러 있다.
그것은 극천빙극단(極天氷極丹)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한기이다.
자욱한 안개가 퍼져 나가며 일대가 꽁꽁 얼어붙기 시작한다.
방원 십 장 안이 결빙되었으며, 장대비가 한순간 폭설로 화했다.
열일곱 명의 동영인자는 선 채 얼어 죽었는 바, 그들의 몸뚱이는 눈사람
처럼 변화되었다.
"죽기를 바라는 자에겐 죽음을 주겠다. 후후, 나는 손 아래 인정을 베푸
는 사람이 아니다."
백무영은 들으라는 듯 일본어로 소리쳤으며, 순간 근처로 몰려들었던 자
들은 썰물 빠지듯 모조리 도망쳐 갔다.
백무영은 눈을 반개한 채 진기주입을 계속했다.
'흑노는 날 이해하지 못할 것이오. 어쩌면 흑노는 훗날 나를 죽이려 할지
도… 그러나 나로서는 부모님의 원한을 씻을 수밖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빙하신공으로 인한 한무가 사라지며 장대비
가 숲을 유린하는 것이다.
쾌화림 깊은 곳.
밤이면 밤마다 불야성(不夜城)이었던 고루거각에는 냉기가 가득할 뿐이
다.
묘수환궁의 여제자들은 경장을 걸친 채 한 채의 누각을 호위하고 있었다.
여무사들 가운데 반 정도는 몸에 피를 묻히고 있었으며, 그 중에는 팔과
다리가 잘린 여인도 있었다.
누각으로 가는 모든 길은 포위되었으며, 도처에서 잔폭한 포효 소리가 터
져 나오고 있었다.
연환마교에서도 가장 포악하다고 불리우는 낭천사령(琅天邪令)이 이끄는
무사들이 사마백봉의 거처를 겹겹이 포위한 것이며, 이틀에 걸친 격전 가
운데 이백오십 명의 여걸이 시체로 누운 것이다.
"항복하지 않다니… 독한 계집들!"
낭천사령은 담장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사륵의 왼팔로 불리우는 자다. 사륵은 그에게 묘수환궁을 접수하고
사마백봉을 생포해 오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솔직히 생포하라는 명만 없었더라면, 이미 싸움은 마무리지어졌을 것이
다.
낭천사령은 사마백봉의 몸뚱이에 상처를 낼 수 없었기에, 우세한 세력을
이끌고도 이제까지 결판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그나저나 너무나도 아름다운 계집이란 말이야."
그는 회가 동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누각의 빠끔히 열린 창을 바라봤다.
창을 통해 늘씬한 그림자가 엿보인다.
비파를 안은 백의미녀, 그녀는 폭우에 잠기는 뜨락을 내려다보며 피눈물
을 흘리고 있었다.
"사부님이 떠나신 후, 내가 묘수환궁을 이끌게 되었는데… 아아, 내가 능
력이 부족하여 수많은 동문사형제들을 희생시키는구나."
비파에 닿은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비파는 흐느끼는 소리를 냈
다.
사마백봉(司馬白鳳)!
그녀의 유난히 커다란 눈 가득히 습막이 번졌다.
그녀는 반년째 묘수환궁을 이끌고 있었다.
최근 그녀는 여장부가 되기 위한 무공연마보다 요조숙녀가 되는 수업을
계속하였으며, 이전과는 달리 살기도 짙지 않았다.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아기를 낳아 기르고, 옷을 짓는 생활을 그
리워하고 있었는데… 연환마교의 후계자로 발돋움한 사륵의 덫에 걸려들
고 만 것이다.
사륵은 강호의 모든 미녀를 자신의 첩실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었으며,
녹림제일화(綠林第一花)로 불리우는 사마백봉을 점찍은 것이다.
사마백봉은 손바닥을 천천히 폈다. 손바닥에는 진홍색 단약이 쥐어져 있
었다.
'일보단장산! 먹기만 하면 오장육부가 녹아 버린다!'
그녀의 손바닥에 땀이 쥐어졌다.
단약은 극독이다. 그것은 자결용의 독단으로, 결백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
복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죽음이 겁나진 않아. 그러나…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것
이 통한스럽다.'
그녀가 일보단장산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여러 곳에서 휘파람 소
리가 터져 나왔다.
급박한 상황을 알리는 휘파람 소리.
"빌어먹을! 이 소리는……?"
낭천사령은 휘파람 소리가 잇달아 터져 나오자, 욕설을 터뜨렸다.
휘파람 소리는 위기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도저히 위기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칼자루를 쥔 쪽은 우리 쪽이다. 한데, 철수하라는 신호라니?"
그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 오는 숲 쪽을 바라봤다. 숲은 자욱한 우무(雨
霧)에 뒤덮여 있었다.
"어떠한 놈이 전후 사정을 알지도 못하고 위기를 알리는 휘파람 소리를
내느냐?"
낭천사령이 거칠게 외칠 때, 비에 잠긴 숲 사이의 길에서 한 사람이 천천
히 걸어 나왔다.
그는 우립(雨笠)을 걸치고 있었으며, 등에 흑의인 하나를 업고 있었다. 그
는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람들은 그의 하이얀 아래턱만 볼 수 있었다.
"약자를 골라서 괴롭히는 자들! 너희들은 무사(武士)로 취급받을 가치도
없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무사들이 떼지어 서 있는 곳으로 느릿느릿 다가
섰다.
"저 놈이 미쳤나 보군."
"카카카… 어떤 놈인지 모르나, 배짱 한 번 두둑하군."
"손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잘 됐다! 내가 저 놈의 목을 잘라 버리겠다.
크크, 껴안아 줄 가치가 있는 계집이라면 모를까… 시금털털한 사내 놈이
야 목숨을 아껴 줄 가치가 없지!"
십여 명의 무사들이 퉁기듯 몸을 날렸다.
그들이 병장기를 떨쳐 내려 할 때, 청년의 손가락이 먼저 퉁기어졌다.
"빙설천리지공(氷雪千里指功)!"
파파팟-!
잇달아 둔탁한 파공음이 터져 나오며 근처의 대기가 싸늘히 얼어붙었다.
허공으로 떠올랐던 자들은 비명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으며,
두 눈썹 가운데 동전만한 구멍이 하나씩 뚫렸고… 구멍 근처는 얼음에
뒤덮였다.
"후후… 난 자비를 베풀기에는 마음이 너무 차가운 사람이지."
미소지으며 다가서는 자는 백무영이었다.
그는 빙하신경 제삼편 십구절 무공인 빙설천리지공을 발휘하여 열다섯
명의 무사를 거의 동시에 참살해 버린 것이다.
"사, 사신(死神)!"
"으으, 저 자가 환술을 씀에 틀림이 없다."
"복수하자. 저 자가 형제들을 죽이다니……."
이번에는 더 많은 수의 무사들이 몸을 날렸다.
새카맣게 떠오르는 흑의무사들, 그들이 떨치어 내는 검이 거대한 우산처
럼 펼치어졌다.
"혈산도막(血傘刀幕)… 좋은 수법이지. 그러나……."
백무영은 진세가 완벽히 구축되기를 기다렸다가 유룡번천(遊龍蒜天)으로
허리를 뒤틀며 떠올랐다.
그는 가공한 안력을 지니고 있기에, 열아홉 자루의 도가 허공을 가르는
궤적을 모조리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신체를 향해 파고드는 도를 겁내지 않는 처지이기에, 날아드는 도
가운데 한 자루를 향해 빈 손을 내밀었다.
찰나 도가 그의 우회금룡수(迂廻擒龍手)에 걸려들었으며, 도를 쥐고 있던
자는 막대한 힘이 도를 잡아당기자 깜짝 놀라 도를 쳐들고자 했다.
순간 그의 손바닥 가죽이 쫘악 벗기어졌으며, 도는 그의 손을 벗어나 백
무영의 손에 쥐어졌다.
도를 빼앗기고 손바닥이 피범벅이 된 무사의 비명 소리가 근처를 쩌렁쩌
렁하게 울릴 때.
"이제 진짜 도를 가르쳐 주지!"
백무영은 허공 오 장 되는 곳에서 신형을 일단 멈추어 세웠다.
하얀 치열이 드러난다. 그리고 결코 즐거워 보이지 않는 웃음.
그건 바로 사신의 미소였다.
"만(滿)- 월(月)- 심(心)- 극(極)- 혜(慧)-!"
그는 승무(僧舞)를 추는 듯 몸을 뒤틀었다.
손이 쳐들렸으며, 도는 허공에 거대한 원호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원호는 무수한 은화(銀花)를 떨치기 시작했으며, 허공에 천 명의
백무영이 동시에 나타나는 듯한 환상이 만들어졌다.
"으으… 사, 사술이다!"
떼지어 다가서던 자들의 얼굴이 먹물처럼 시커매졌다.
원호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도세는 우주를 휘감아 버릴 듯 웅장하게 펼
쳐졌다.
도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팔다리가 잘려져 뜨락 곳곳에 떨어져 내린다.
우박처럼 퉁기어지는 살 조각, 비명 소리를 지를 짬도 없이 쓰러지는 무
사들. 잇달아 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쓰러졌으며, 백무영은 또다시 하나의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창궁법사시여! 내가 피보라를 뿌리는 걸 용서해 주십시오."
만월심극혜검은 거의 완성단계였다.
누구도 원호가 완전히 그려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 원호가 그려지기 전에
목숨을 빼앗길 수밖에 없기에.
백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쓰러질 때에야 자신들은 백무영의 적이 되지 못
함을 깨닫고 도망쳐 가기 시작했다.
낭천사령은 혼비백산해 뒤로 도망치기 시작하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저 놈의 아수라(阿修羅)로 인해 일을 실패하다니!"
그는 백무영이 유유히 떨어져 내리는 걸 바라보며 품에서 철통 하나를
꺼냈다.
'폭사시키자!'
그는 백무영의 등판을 보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는 백무영이 누각 쪽으로 걷는 걸 보며 철통을 힘껏 내던졌다.
그것은 굉천화뢰(宏天火雷)!
그것이 터지면 반경 오 장 안이 불기둥에 휘어 감기며 오십여 명이 동시
에 폭사된다.
낭천사령은 폭발을 피하기 위해 최고의 경공을 써서 치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나무로 된 울타리를 타 넘어가고자 할 때, 무엇인가가 등판을 향해
다가섰다.
"어엇?"
낭천사령은 누가 암기를 던지는가 여기며 신형을 슬쩍 틀었다.
그의 몸을 향해 날아드는 건 무게가 십이 근에 달하는 검은 철통이었다.
"아, 안 돼……."
낭천사령은 자지러지게 외치며 쌍장을 흔들어 건곤귀령수(乾坤鬼靈手)를
쳐 냈다.
철통은 바로 굉천화뢰.
그것은 백무영의 등판을 향해 날아가던 것인데, 백무영이 밀어 낸 대항마
진기(大降魔眞氣)로 인하여 반탄이 되어 낭천사령을 향해 다가선 것이다.
"네것을 네게 돌려주는 것뿐이야!"
먼 곳에서 백무영의 목소리가 들려 오며, 굉천화뢰는 보다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꽈르르릉-!
일순, 노한 폭뢰 소리가 터져 나오며 뜨락 귀퉁이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낭천사령의 몸뚱이는 불고기가 되다 못해 재로 바스라졌으며, 뜨락에는
일곱 자 깊이의 구덩이가 패였다.
모든 일은 거의 한순간에 벌어졌다.
비 오는 뜨락에서 백무영이 만들어 낸 한 줄기 혈풍(血風)은 강호 사상
유례가 없는 혈풍이었다.
사마백봉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의복을 단정히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옥비수를 쥐고 있었다.
'아무도 나의 정조를 건드리지 못한다!'
사마백봉은 안으로 막 접어드는 괴청년을 사나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귀하가 낭천사령을 죽이는 걸 다 봤어요. 엄청난 무공이군요. 귀하가 협
의심을 발휘해 묘수환궁을 구하기 위해 왔다면, 귀하를 일생의 은인으로
삼겠습니다. 그러나 이 곳의 기진이보, 그리고 나의 육체에 눈독을 들여
온 것이라면… 아무것도 갖고 가지 못할 겁니다."
"……!"
괴청년은 신형을 멈췄다. 그는 죽립 사이에서 맑은 눈빛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연환마교도들을 퇴치한 데 저의가 없기를 바랍니다. 저의가 있다면, 저
는 귀하를 사륵의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취급하겠습니다."
"……!"
"대체… 누군가요?"
사마백봉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녀의 얼굴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검은 면
사에 감추어져 있었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 것이다.
'모습이 낯익다!'
사마백봉의 숨결이 갑자기 멈추어졌다. 묵묵히 선 청년의 모든 게 낯익게
보이는 것이다.
'오오, 설마… 그분이?'
사마백봉은 한참 지난 후에야 상대가 누구인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숨기기 힘든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말이 있다.
백무영은 사마백봉의 눈빛이 흐트러지는 걸 보고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입술을 떼었다.
"사륵의 제자들은 모두 물러났소."
"으음… 살, 살아 계셨군요… 상공(相公)!"
면사 아래로 수정 같은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그 자들은 다시 쳐들어올 것이오. 그러니 조속히 이 곳을 떠나도
록 하오."
"어,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건 알 필요 없소. 어차피 우리 두 사람은 깊은 관계로 맺어질 사이는
아니니까."
"야, 야속하십니다. 제가 과거 한때 실수를 했다고… 저를 영원히 미워하
시다니……."
사마백봉은 서러운 나머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백봉을 미워하지는 않소!"
"그, 그럼……?"
"미워하는 건… 숙명이오."
"아……?"
"어차피 우리 두 사람은 부부로 맺어지지 못할 사이요. 그러니 날 단념해
주기 바라오."
백무영은 애써 무정히 말하며 신형을 틀고자 했다.
사마백봉은 몸이 난도질되는 것보다 더한 마음의 아픔을 느꼈다.
그녀는 백무영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무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왔는 데, 백
무영은 그녀를 볼 때마다 사갈시하고 있는 것이다.
"떠, 떠나시렵니까?"
"할 일이 많소. 그리고… 갈 데가 있소!"
백무영은 문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사마백봉은 사지를 떨다가 말했다.
"그리 바쁘시지 않으시다면, 차나 한 잔 마시고 떠나시지요."
"바쁘오. 여기 머물 시간이 없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후 육사부의 거
처 쪽으로 가지 말라는 것이오. 물론, 낭자가 거기 가기 전에 일이 끝날
테지만!"
백무영은 더 무정히 말했다.
그가 문을 벗어날 때,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그의 어깨가 파랗게 물들 때, 그의 고막 속으로 서러운 흐느낌 소리가 들
려 왔다.
'울지 마오. 난 여인의 눈물을 공양받을 가치가 없는 살인마에 불과하니
까.'
백무영은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아픔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입 밖으로 새
어 나오는 목소리는 모질기 짝이 없었다.
"난 낭자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 여기시오. 이제부턴 서로 잊어야 하
오!"
그는 더 큰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더 이상의 번민에 휘말리고 싶지 않기에, 그녀에게 물어 볼 말이 있
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떠나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쏴아아……!
뜨락은 장대비에 뒤덮였다. 빗소리가 요란한지라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가 다시 한 걸음 내디딜 때, 방 쪽에서 들려 오던 사마백봉의 흐느낌
소리가 기이한 신음 소리로 변했다.
"크으으윽……!"
"아, 이 소리는?"
백무영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사마백봉의 신음 소리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 소리는 죽어 가는 사람의
신음 소리였다.
'어리석게도…….'
백무영은 아차 하는 마음으로 재빨리 신형을 돌렸다.
잠깐 사이, 사마백봉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는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으며, 살색이 회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독을 먹다니!"
백무영은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백무영에게 거절당한 상처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독단을먹은 것
이다.
사마백봉은 백무영이 바로 앞으로 날아 내리는 걸 보며 고개를 저었다.
"가세요. 제게 연연하지 마세요."
혀가 굳어지기 때문인지,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리석은 여인! 내가 떠나간다고 독단을 먹다니……."
백무영은 재빨리 그녀의 맥문을 거머쥐었다.
맥이 점점 희박해져 간다.
보통 사람은 즉사했을 정도로 지독한 독을 먹었지만, 그녀의 내공은 삼화
취정(三花聚頂)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떠, 떠나세요. 전… 잊어도 좋을 계집이니까요!"
사마백봉은 그렇게 말하며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백무영은 그녀의 가는 손목을 움켜쥔 채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폭우는 쉬지 않고 내리고, 사마백봉의 숨소리는 점점 가늘어진다. 그리고
코끝으로 저미어 드는 비릿한 내음은 백무영이 뜨락에 내리게 한 혈우
(血雨)의 피비린내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