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혈
초대받지 않은 손님 1
절강성(浙江省) 항주(抗州)-!
술(酒)과 운하(運河)와 미녀(美女)로 이름 높은 예향(藝鄕) 항주는 하루 종일 궂은비로 젖어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삼월(三月)의 봄비는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있어 스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비가 그치면 피를 머금은 듯하던 철쭉도 모조리 떨어져 땅바닥을 붉은 원색의 음영(陰影)으로 물들일 것이다.
무림맹(武林盟) 감찰전(監察殿)의 부전주(副殿主)인 귀견수(鬼見手) 조중(組中)은 뒷짐을 진 채 차가운 한기를 머금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음울한 창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십여 세의 나이로 보이지 않는 건장한 체격을 지녔는데 혈색 좋은 동안(童顔)의 얼굴에는 언제나 훈훈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악의(惡意)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서글서글한 표정에다
전형적인 문사(文士)의 기질을 풍기는 그의 겉모습에는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귀견수(鬼見手)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는 누구보다도 치밀하고 냉철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일점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살인을 할수 있는 잔인한 독심(毒心)과 이에 걸맞은 고절한 무예를 지닌 고수가 바로 귀견수 조중인 것이다.
외견상 들어난 그의 현재 직위는 무림맹 절강성 지부(支部)의 관사(官士)였다.
하지만 실제 그가 하는 일은 전적으로 비밀에 싸여있었다.
자신을 모충(毛沖)이라고 이름을 밝힌 젊은이와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조중은 초췌한 이 청년의 표정에서 내면적인 혼란과 공포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모충이란 젊은이와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무림맹 절강 지부장(支部長)인 원이광(圓李廣)이었다.
모충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원이광을 만났는지는 지금으로서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조중은 다년간 쌓아온 경험에 의해서 이 청년의 출현으로부터 무엇인가 음습한 음모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모충은 수려한 용모와 훤칠한 체격을 지닌 미청년(美靑年)이었다.
여자들이 좋아할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였고 아마도 그 역시 그 같은 자신의 이점을 십분 활용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수려한 외양과는 달리 그의 몸에서는 은연중 냉혹한 기운과 팽팽한 긴장이 느껴졌다.
언제라도 감추어두었던 발톱을 들어낼 준비가 되어있는 모충의 자세에서 조중은 이 청년이 지극히 엄중한 수련을 거친 인물이라는 것을알 수 있었다.
특히 태양혈(太陽穴)이 우뚝 돌기한 것으로 보아 상승의 내공까지 겸비한 고수임이 분명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모충이란 청년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정리한 조중은 사람 좋은 웃음을 띄우며 돌아섰다.
{이 차가 비록 소주(蘇州)의 명차(名茶) 용정(龍井)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래도 정신을 맑게 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는데 그만이라오. 우선 한 잔 드시고 말씀을 들어보는 게 어떻겠소?}
모충의 앞자리에 앉은 조중은 자신의 찻잔을 들며 그에게도 차를 권했다.
상대방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모충은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처음 왔을 때보다 얼굴빛은 많이 풀어졌으나 아직도 턱 밑의 근육은 극도의 긴장으로 미미하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의 노력이 무용(無用)하다는 것을 느낀 조중은, 그러나 여전히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럼 나를 만나자고 한 용건이나 들어봅시다.}
조중의 온화한 말에도 모충의 회색빛 동공에는 일순 공포의 그늘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어 마음속의 두려움을 떨치며 말을 꺼냈다.
{나는 한 가지 거대한 음모를 알고 있소.}
모충은 속삭이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음모는 당신네 무림맹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소.}
{하하 처음부터 너무 겁을 주시는구려.}
조중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말했다.
그렇지만 내심으로는 이 젊은이를 진지하게 대해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암암리에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소협의 내력부터 알려 주시지 않으시겠소?}
차분한 조중의 목소리에 비로소 자신의 성급함을 느낀 모충은 목이 타는 듯 찻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마셨다.
조중은 젊은이의 표정을 주시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젊은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데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아무런 확실한 점이 없는 이상 성급함은 금물이었다.
조중은 서두르지 않고 모충이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나의 이름은 모충이요. 그 외의 것은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소.}
모충의 단호한 말에 조중은 짐짓 이마를 찌푸렸다.
{젊은이! 알고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일에는 무언가 믿음이 필요한 법이오.}
조중은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모충도 만만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소. 나는 애송이가 아니오.]
그의 음성은 단호하고도 절박했다.
[진행되고 있는 음모에 대해 알려 주는 대가로 안전한 은신처와 삼천 냥을 제공해 주시오. 물론 금화(金貨)로!}
(금화로 삼천 냥?)
조중은 모충의 요구에 절로 쓴웃음을 떠올렸다.
은신처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금화 삼천 냥이라는 돈은 실로 큰 액수였다.
금화 한 냥을 은자(銀子)로 치면 대략 삼십냥, 그리고 은자 열냥이면 한 가족이 한 달 정도는 걱정없이 살 수 있는 돈이 아닌가?
삼천냥의 금화, 즉 은자 구만 냥은 무림맹 내에서도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고 있는 조중에게 조차도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들릴 만큼 막대한 금액인 것이다.
그 정도의 대가를 요구하는 정보라면 어쩌면 조중 자신의 선에서 처리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선 음모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조중은 내심의 곤혹을 일절 내비치지 않고 온화하게 말했다.
협상에 있어서 조급함을 내비치는 것은 초보자나 저지르는 실수다.
과연 조중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응대에 모충은 불안한 표정 이 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무림맹의 요인(要人)을 암살하기 위하여 여러 명의 일급 자객들을 고용했소. 이번에 고용된 자객들 중 한 명은 비마영 (飛魔影)이라는 별호를 사용하고 있소.}
한 순간 조중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모충이 말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비마영(飛魔影)이란 이름이 그의 가슴 속에 섬뜩한 한기(寒氣)로 스쳐 지난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이것밖에 말해 줄 수 없소. 나머지는 거래가 성립된 연후에 이야기하겠소.}
속삭이듯 말을 마친 모충은 초조한 눈빛으로 다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사안이 그토록 막중하다면 우리 쪽에도 시간의 여유가 필요하오.
위의 재가도 받아야하고 또 금화 삼천 냥의 거금을 마련하는 것도 결코 수월한 일은 아니오. 이틀 후에 다시 만나면 어떻겠소?}
조중이 내심의 긴장을 숨기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모충은 펄쩍 뛰었다.
{이틀은 너무나 긴 시간이오!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당신의 목숨이 아니오. 매 시각이 나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건 모험이란 말이오.}
이어 모충은 협상을 끝내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기한은 십 이 시진이오. 그 이상은 안 되오! 내일 밤 초경 무렵 교외의 정운사(淨雲寺)에서 기다리겠소.}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충은 연자초운(燕子招雲)의 신법으로 방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라 창밖으로 쏘아나갔다.
[잠깐만!]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조중은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그가 황망히 창가로 달려갔을 때 모충의 모습은 이미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단한 경공조예로군.}
나직이 독백하는 조중의 눈빛이 다음 순간 차갑게 빛나기 시작했다.
-비마영(飛魔影)!
모충이 거론한 그 이름에 조중은 누구보다도 익숙해져 있었다.
이름이나 신분내력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비마영의 자객행(刺客行)에 수 년 동안 몇 명의 거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조중은 잘 알고 있었다.
비마영이 구사하는 수법의 치밀함과 교묘한 자객술은 지금껏 한점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행되어 왔다.
이렇듯 다년간 자객노릇을 하면서도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비마영의 무예와 수법이 얼마나 고명한 짐작할 수 있었다.
헌데 모충의 말을 빌자면 비마영 정도의 자객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이 이번 음모에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암시라도 조중의 결단을 도와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일단 결심을 한 조중의 행동은 무섭게 빨라졌다.
이경(二更)이 가까워질 무렵,
항주성 북동쪽에 자리잡은 홍등가(紅燈街)로 한 명의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들어섰다.
비록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주위를 살피는 그의 눈빛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룻밤의 욕망을 풀려고 온 여느 사내들과 다름없이 보였으나 간혹 싸늘히 빛나는 그의 눈초리는 긴장감과 초조가 가득 서려 있는 것이다.
서늘한 한기(寒氣)를 머금은 봄비가 그친 뒤였지만 원색으로 물든 홍등가의 거리에는 음습한 열기가 깔려있었다.
색향(色鄕)으로 유명한 항주인 만큼 이곳 홍등가는 규모도 크려니와 등급도 천차만별이었다.
동전(銅錢) 한 문에 하룻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싸구려 창녀(娼女)도 있는 반면, 비옥하고 화려한 장원(莊園) 하나쯤을 던질 각오를 해야 한 번 안아볼 수 있는 엄청난 가격의 기녀(妓女)도 있다.
금테를 두른 것 같은 그런 고가(高價)의 여자야 다른 세상의 이야기고, 보통의 사내들이라면 길가에 즐비한 싸구려 매음굴을 찾게 된다.
천박한 꾸밈새의 이 홍루(紅樓)들 마다마다에는 매춘(賣春)을 의미하는 붉은 홍등(紅燈)들이 내걸려있다.
홍등가(紅燈街)라는 이름은 바로 이 붉은 등에서 유래한 것이다.
[호호! 들렸다 가세요. 오빠!]
[싸게 해드릴 게요!]
붉은 등불이 야릇한 열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가운데 곳곳에서창기(娼妓)들이 거리를 지나가는 사내들을 붙잡고 흥정을 하고 있었다.
{어머 잘생긴 공자님이시네! 흐응! 소녀 앵화(櫻花)가 어때요? 잘해드릴 게요.}
홍등가를 지나가려는 예리한 눈빛의 청년에게도 분을 짙게 바른 창기 하나가 교태를 부리며 달라붙었다.
한껏 치장을 하긴 했으나 눈가의 주름과 거칠어진 피부가 이미 한창 때가 지났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앵화라는 그 창기의 탄력 잃은 젖가슴을 어루만지며 주접을 떨었다.
{흐흐흐 좋아! 오늘 밤은 너로 결정했다.}
청년은 축축한 웃음을 띄우며 창기를 끌어안고
홍루 안으로 들어갔다.
헌데 그들 한쌍의 남녀가 추잡한 소리를 내뱉으며
홍루 안으로 사라진 직후였다.
두 명의 건장한 장한이 어둠 속에서 재빠르게 뛰쳐나왔다.
칠흑같이 검은 흑의(黑衣)를 걸친 그들은 그 날렵한 동작에다가 등에 짊어진 검자루가 삐죽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무사들임이 분명했다.
소방원(少房院)이라는 간판이 붙은 홍루(紅樓)를 쳐다보는 두 흑의장한의 눈빛은 매섭게 빛났다.
두 흑의장한의 눈빛이 한차례 교차되고 그들은 곧 태연히 발걸음을 소방원 안으로 옮겼다.
{호호 나으리들! 어서 오세요.}
두 장한이 소방원으로 들어서자
분을 잔뜩 처바른 사십 세 가량의 살찐 포주가
간드러진 교소를 흘리며 두 사람을 맞았다.
{호호호! 저희 집은 처음이시죠?
제가 두 분에게 좋은 아이들을 추천해 드릴...!}
[조용히 해라.]
포주가 한껏 눈웃음을 치며 어울리지 않는 교태를 부렸지만
그들 흑의장한들은 싸늘한 신색으로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방금 들어온 청년은 어느 방으로 들어갔느냐?}
포주의 말을 막으며 내랭히 소리치는 흑의장한의 눈빛은
일순간 비수같이 빛이 났다.
상대의 살벌한 기세에 포주는 흠칫한 표정으로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이 바닥에서 수십 년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포주인지라
이들의 모습과 행동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도 결코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다.
{호호! 어떤 손님을 말씀하시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앉으시와요.
차라도 한잔 올리겠어요!}
수작을 부리면서 그녀는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우락부락한 사내에게 눈짓을 했다.
아마도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키는 손님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뒷 세계의 어깨쯤 되는 자인 듯했다.
헌데 포주의 눈짓을 받은 우락부락한 사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때였다.
스읏!
왼쪽에 서 있던 귀 밑에 사마귀가 있는 흑의장한이
오른손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보기에는 느릿하게 보였지만
그것은 상승(上乘)의 금나수(擒拿手)인
회룡박수(廻龍拍手)의 수법이었다.
우둑!
포주의 손목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흑의장한의 수중에 틀어쥐었다.
강철 같은 힘으로 포주의 맥문을 낚아챈 흑의장한은 냉랭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수작 따위는 하지도 마라.
죽고 싶다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포주는 갑자기 팔목을 통해 거대한 힘이 전신을 파고들자
참을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고통이 너무 커서 비명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한 마디라도 쓸데없는 소리를 내지른다면
심장에 구멍을 내주겠다.}
한 점의 온기도 실리지 않은 흑의장한의 스산한 목소리는
포주의 입을 막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포주의 신호로 다가서던 우락부락한 사내도
어느 새 삐적 마른 또 다른 흑의장한에게 점혈을 당했는지
나무조각처럼 멀뚱히 눈알만 굴린 채 서 있었다.
*
더러운 이불이 깔린 조잡한 나무침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초라한 기방 안에서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싸구려 지분내음이 코를 찔렀다.
나무침대 위에는 수혈(睡穴)이 점혈된 창기가
늘어진 젖가슴과 허여멀건 허벅지를 들어낸
방자한 자태로 널부러져 자고 있었다.
[염병할..!]
아무렇게나 가랑이를 벌린 채 코까지 골아 대며
잠이 든 창기를 내려다보는 두 흑의장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 더러운 포주년과 실랑이만 하지 않았더라도 놓치지 않았을 텐데...!}
비쩍 마른 몰골의 흑의장한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
그러자 귀밑에 사마귀가 난 다른 흑의장한이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책할 필요는 없네.
그자는 지부(支部)를 떠날 때부터
우리가자기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어.
비록 지금은 놓쳤지만
그 놈이 항주성 안에 있는 이상
결코 우리의 추적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네.}
{젠장할! 누가 그걸 모르나? 하지만 시간이 없단 말일세.
모충이란 그 작자는 고작 십이시진의 여유를 주었을 뿐이야!
그 안에 놈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알아내야만 하는 게야!}
비쩍 마른 장한은 투덜거리며 방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방원에서 귀견수 조중이 붙인 미행을 뿌리친 모충(毛沖)은
걸음을 빨리했다.
그는 곧 항주성의 서문(西門)을 빠져나갔다.
성문을 빠져나온 모충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본 뒤
경신술을 시전하여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숲 속의 오솔길을 따라 한동안 달려가자
이윽고 야트막한 구릉이 하나 나타났다.
아늑해 보이는 그 구릉을 끼고 황폐한 장원 한 채가
음산한 형상으로 서있었다.
잡초와 무너진 돌담, 한 점의 인적도 없는 것으로 봐서
오랫동안 버려진 폐장임이 분명했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리운 지금 장원은 귀기(鬼氣)마저 풍기고 있었다.
모충은 판석(板石) 사이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회랑(回廊)을 따라
폐장의 후원(後苑)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나타났다.
그 불빛은 비교적 온전한 형체를 갗추고 있는
한채의 전각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창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본 순간
땀방울이 비오듯 흘러내 리는 모충의 표정에
짙은 안도감이 스쳤다.
흐릿한 등잔 불빛 아래에는 이십여 세 가량의 여인이
초조한 기색으로 앉아있었다.
여인은 삼단 같은 긴 머리를 지닌 요염한 자태의 미녀였다.
특히흑요석같이 까만 눈망울에 배인 슬픔의 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모랑!]
모충이 주위를 경계하며 방안으로 들어서자
수심에 잠겨있던 여인은 문 열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어....어떻게 되었어요? 모랑!}
불안감이 잔뜩 배인 그녀의 목소리는
은방울이 구르는 듯듣기좋은 청아한 음성이었다.
이마의 땀을 훔친 모충은 미녀를 향해 따뜻하게 말했다.
{상매(霜妹)!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는 없소.
일은 잘 진행되고 있소!}
그는 말하면서 여인의 가녀린 두 손을 가만히 잡았다.
{흑흑... 모랑!}
여인은 억누를 수 없는 격동에
가냘픈 몸을 땀 내음이 물씬 풍기는 남자의 품에 던졌다.
모충은 힘주어 여인을 껴안았다.
{상매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소.
오늘만 지나면 우리는 안전한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오.}
모충은 불안에 떠는 여인을 달래며
그녀의 섬세한 얼굴을 눈부신 듯 바라보았다
. 눈물에 함초롬히 젖은 여인의 옥용은 너무도 해맑고 아름다웠다.
모충은 몸안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입술을 아래로 향했다.
며칠 동안 숨막히는 공포와 갈등 속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모충은
여인의 살내음을 맡자 참을 수 없는성욕을 느꼈던 것이다.
여인도 그의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녀린 두팔로 모충의 목을 휘감으며 열렬히 매달렸다.
입술과 입술, 혀와 혀가 뒤엉키고,
한덩어리가 된 두 남녀의 몸은
자연스럽게 한옆에 놓인 침대위로 쓰러졌다.
본능의 욕정으로 조급해진 모충은
허겁지겁 여인의 꺼풀을 벗겨 내렸다.
저고리 고름이 풀어지며 탐스럽고 뽀얀 젖가슴이 들어났다.
무르익은 수밀도 같은 그 한쌍의 융기 정상에는
이미 한껏 고추 선 유실(乳實)이 흥분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고리 고름과는 달리 단단히 옥조여맨 치마의 끈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속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모충은
여인의 치마를 벗기는 것은 포기하고 치마자락을 위로 걷어 올렸다.
치마가 허리 위로 걷혀지자
여인의 눈부신 하체가 흐릿한 등불아래 환상처럼 들어났다.
상아로 깍은 듯 매끄러운 피부의 다리는 시원하고도 미끈했다.
반면 나긋나긋한 허리 아래의 둔부는 풍만하기 이를 데없다.
은은한 분홍빛을 띈 여인의 속살은
모충의 숨을 막히게 하기에충분했다.
게다가 여체 중심부의 봉긋한 둔덕 일대는
손바닥만한천으로 간신히 가려져있을 뿐이었다.
[으음]
보드라운 체모까지 담뿍 가리고 있는 탓에
더욱 붕긋해 보이는 여체의 중심부를 보는 순간
모충은 열병을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곧 여인의 그 비역을 가린 고의가 뜯기다시피 거칠게 제거되었다.
무성하고 짙은 그늘 속에 숨어있는 여인의 중심부는
이미 뜨거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에 여인도 주저없이 모충의 의복을 벗겼다.
오랜 수련으로 단련된 탄탄한 상체가 들어나고
바지와 내의가 함께 아래로 밀려내려갔다.
이미 모충의 남성은 철주(鐵柱)가 되어있었다.
[흐윽!]
맨살이 서로 닿는 순간
여인은 자신의 비단같이 보드라운 허벅지 안쪽에 닿는
뜨겁고 맥동하는 살덩이를 느끼고 전율했다.
본능의 열기로 달아오른 그녀는 섬섬옥수를
두 개의 육체가 잇닿은 곳으로 밀어넣어
스스로의 비역을 한껏 개방하였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모충의 맥동하는 실체를 부여잡고
홍수가 진 자신의입구로 이끌어 들였다.
서로에게 너무도 익숙해져있는 탓인지
두 사람의 육체는 아무런 장애나 망설임도 없이 하나로 결합되었다.
여인은 자신의 손안 가득히 느껴지던 정인의 뜨거운 맥동을
곧더욱 예민하고 보드라운 부위로 느끼게 되었다.
자신이 생각해도흡사 열탕같은 그 깊은 동굴이
정인의 꿈틀대는 실체를 온통 휘감고 아우성을 쳐대었다.
사내도 사랑하는 여인의 점막의 동굴에서 느껴지는
그 미끈덩하고도 옥죄는 긴축감에
절로 짐승의 울음소리같은 신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더욱 큰 희열을 기대하며
자신의 욕망의 실체를 뿌리까지 여체의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하악!]
몸안에 그득히 들어차는 그 뜨거운 불덩이를 느끼며
여인은 그대로 광란(狂亂)상태가 되었다.
새침하고 도도해 보이는 인상과 달린 여인의 반응은 너무도 격렬했다.
모충의 몸을 휘감고 몸부림치는 그녀의 치태는
평소보다도 유독뜨거운 것이었다.
아마도 벼랑 끝에 몰린 듯한 극도의 불안과 초조가
오늘밤 그녀를 특별히 격정적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여인의 몸부림에 동화되어가는 자신을 느끼며
모충의 눈꼬리에경련이 일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그 여자가 떠오르다니...!)
자신에게 매달리며 오열하는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이
지금 이 순간 전혀 다른 어떤 여인을 그의 뇌리에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 여인은 모충보다 이십여 세나 연상이었고,
여자에 대해서는 숙맥이었던 자신에게
감미로운 성인의 세계를 맛보여주었던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촉망받던 자신의 인생을
진창에 던져넣은 그여인의 모습이
지금 모충의 뇌리에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모충은 원래 구대문파 중 공동파( 派)의 제자였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사 년 전, 출중한 기재로 추앙받던 그는
공동파의 장로 추성도(秋星刀)의 부인과
한 순간의 격정으로 불륜을 저지르고 말았다.
어느 더운 여름날
, 무공 밖에 모르는 남편 때문에 늘 독수공방을하던 그녀가
가끔 말상대가 되어주던 모충에게 몸을 던져온 것이다.
유난히도 무덥던 그날,
모충이 추성도의 부인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막 목욕을 마치고 알몸으로 나오던 길이었다.
나중에 생각하면 아마도 그녀는 일부러 그같은 상황을 만들었던 같았다.
물기에 젖은 터질 듯 무르익은 중년여인의 육체
, 게다가 그녀는
당황하여 도로 나가려는 모충에게 오히려 먼저 달려들어 안겼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터질 듯 무르익은 여체의 감촉은
한창 이성에 눈을 떠가던 모충에게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결국 모충은 문중의 장로인 추성도의 침대에서
그의 부인과 살을 섞고 말았고,
그 한 번의 쾌락으로 전도양양하던 모충의 인생은
어둠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가장 몸이 뜨거울 나이의 중년여인과
한창 양기가 솟구치는 젊은 청년이었다.
한 번 맛본 금단의 쾌락은
두 남녀를 걷잡을 수 없는 자멸의 길로 몰아넣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하물며 그들은 격정에 휩쌓여
주위의 이목을 완전히 차단할 분별력도 없었다.
만나기만 하면 두 사람 사이에는 불꽃이 튀었고
대충 주위를 물린 뒤 한 쌍의 짐승이 되어 뒤엉켰다.
공동파 문중 내에 그들 사이의 추문이 퍼지게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어느 날 그들이 한 몸이 되어 몸부림치는 현장에
여인의 남편인 추성도가 들이닦쳤다.
추성도는 문중 사람들이 모두 쉬쉬하는 바람에
가장 늦게 자신의 부인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었었다.
그래도 긴가민가하던 추성도는 자신의 침대에서
아내가 나이 어린 제자와 살을 섞고 있는 장면을 목도하는 순간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현장을 들킨 부인은 알몸으로 남편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지만
이미 추성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추성도의 부인은 목이 잘리고
모충은 간신히 화를 면하고 필사의 도주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비록 세상이 넓다지만
구대문파중 일파인 공동파의 추살령이 내려진 터라
그의 한 몸이 숨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쫓기고 쫓기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동문(同門)에게도 검을 겨루어야만 했고,
살기 위하여 한 마리의 이리가 되어야만 했다.
바로 그때 그에게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월화!
외견상 그녀는 항주성에서도 이름높은 기루(妓樓)
월화루(月花樓)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정체는 뭇 자객들에게 일감을 주고
의뢰를받는 대모(代母) 격의 여인이었다.
그녀 월화가 일년여동안 공동파 전체의 추격을 받고도 살아있는
모충에게 주목을 하고 접근해온 것이다.
그리고 요염하고도 능란한 이 여장부를 만남으로써
모충은 비로서 일년만에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한눈에 모충의 자질을 알아본 월화는
그에게 아낌없이 최고의향락을 제공했고,
그런 그녀를 위해
모충은 기꺼이 견마(犬馬)의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후로 삼 년 동안 모충은 자객들의 대모인 월화의 보호 아래
마음껏 향락을 맛보며
명문의 제자에서 밑바닥의 비정한 살수로변해갔다.
헌데 한 달 전 ,
우연히 보게 된 한 여인으로 인하여
모충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진여상(秦汝霜),
그녀는 본래 명문세도가(名門勢道家)의 여식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부친이 역모(逆謀)의 누명을 쓰면서
집안은 풍지박산되었고,
꿈많던 규중처자였던 그녀의 운명도
하루아침에 뭇 사내들의 노리개인 관기(官妓)로 전락하고 말았다.
원래 그런 곳에 손이 닿아 있는 월화의 행동은 빨랐다.
진여상의빼어난 미태(美態)에 대해 전해들은 월화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관기에서 자신의 월화루 소속의 기녀로
탈바꿈 시켰던 것이다.
옛말에도 돈이라면 귀신도 부린다는 말이 있다.
은자 일만 냥이란 엄청난 거금이 요로(要路)에 투입되어
월화루소속이 된 진여상의 미모는
월화루의 수입을 단번에 두 배로 껑충올려놓았다.
월화의 안력은 한 치의 틀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여상의 출현이
비록 월화에게 가볍지 않은 부(富)를 안겨다 주었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파멸까지 부르리라고는
그녀 자신도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진여상과 모충의 만남!
그것이 바로 파국의 발단이었다.
진여상을 본 그 날로부터 모충은 눈이 멀어버렸던 것이다.
수려한 자태와 미모, 게다가 명문가의 규중처자에서
뭇 사내들의노리개로 전락한 진여상의 비극적인 분위기는
이미 황폐해질대로황폐해진 모충의 가슴에도
열정의 불길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어떤 상황하에서도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꿈많은 소녀에서 한순간에 취객들의 희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진여상은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비참해질대로 비참해진 자신을
진심으로 동정하고 애모하는 모충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되었고,
사무치는 그의 사랑에 새로운 삶의 의욕을 품게 되었다.
가장 비참한 인생의 나락에서 만난 두 남녀는 쉽게 타올랐으며
그 열정의 강도는 실로 격렬한 것이었다.
비록 사문에 죄를 짓고 추격을 당해 할 수 없이 살수로 변신했지만,
모충은 그래도 한 때는 무림명문의 고제자였다.
갈데 없는 밑바닥 인생으로 타락한 그였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뭇사내들 품에서 술을 따를 때마다
피를 말리는 질투와 분노에 몸을떨었다.
거기에다가 그는 월화가 진여상조차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수로 만들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여상의 미모와 교태는 가장 무서운 암살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주목한 때문이었다.
결국 월화의 그같은 복안을 알게 된 모충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배반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진여상 역시
자신을 그저 욕정의 도구로만 여기는 다른 사내들과 달리
진심으로 대해주는 모충을 일점의 망설임 없이 따라나서게 되었고..!
[아아 모랑!]
[허억! 상매!]
방 안의 열기는 뜨거웠다.
공포에 쫓기는 두 남녀의 열정은 활화산 같았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모충은 거칠고 격렬하게 여체로 파고들었다.
사내의 구리빛 동체가 세차게 기복을 일으킬 때마다
그 밑에 깔린 여인의 입에서는 참을 수 없는 신음성이 비명처럼 터져나왔다.
개구리같은 자세로 벌려진 여인의 하체를
쉴 새 없이 압박해대는 사내의 등줄기로 땀방울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여인은 사내의 그것이 엄청난 힘과 속도로 출입함에 따라
하체의 중심부가 급격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그녀의 가녀린 우유빛의 지체가
무서운 기세로 사내의몸에 휘감겨들었다.
[죽...죽어요!]
잘익은 석류처럼 벌려진 붉은 입술 사이에서 터지는
격렬한 신음성,
눈앞에 명멸하는 불꽃들,
온몸을 훑고 지나는 짜릿한 전율의가닥들...!
여인은 드디어 정점(頂點)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콰창!
열풍이 몰아치고 있던 방의 방문이
돌연 부서질 듯 요란하게 활짝 열렸다.
[헉!]
[흐윽!]
너무나 갑작스런 일인지라 두 남녀는 몸을 가릴 새도 없었다.
부서지며 열린 문을 통해서 회색 단삼(短杉)을 걸친
세명의 젊고건장한 장한이 들어섰다.
짧은 소매 밖으로 들어난 팔다리가 강인해 보이고
얼굴과 팔뚝에 난 상처자욱이
한층 흉악한 인상을 더해주는 자들이었다.
그들 세 흉한(凶漢)들의 뒤를 이어 한명 청삼(靑衫)을 걸친
수려한 용모의 청년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삼청년의 정갈한 이목구비에는
한 점의 온기도 보이지 않는 무감정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언뜻 보기에 헌앙한 미장부였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어딘가 비정한 기운이감도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