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위대한 탄생(誕生)
(1)
서너 살쯤 되었을까?
어른의 손가락을 잡고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아기의 모습은 오뉴월 장마 끝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햇살처럼 싱그러웠다.
"녀석, 짐작은 했지만 이토록 불가사의한 성장속도라는 건 도대체 납득이 가질 않는군."
뇌파극의 목소리였다.
석비룡과 같이 현현교의 지하 총단에 잠입했다가 비천칩의 때문에 실종되었던……
그의 손가락은 아이의 배를 간지럽혔고 아이는 까르르 맑게 웃었다.
"음맥(陰脈)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음기를 갖고 있는 것이 천령음맥(天靈陰脈)……
그 천령음맥의 여인과 혈음신장을 수련한 자가 교합하면 그 사이에서 천지교태의 능력을 가진 아이가 탄생한다. ……
태어나면서부터 완벽한 혈음신장의 능력을 갖고 말이야……."
아기는 안아달라는 듯 뇌파극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아바바바……."
뇌파극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오냐! 내가 바로 네 아비 좌풍이다. 장차 이 천하의 주인이 될……."
뇌파극은 두 손으로 아이의 어깨를 잡고, 아이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했다.
"알겠느냐? 이후의 천하는 너와 나의 것이 되리라!"
그때, 휘장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뇌파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왔느냐?"
"예. 소교주님! 무몽, 방금 도착했습니다."
지아비 천서군을 귀검수 왕소우에게 잃은 여인. 복수에 실패하고 목숨만 챙겨 금황독존을 따라갔던 무몽의 목소리였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뇌파극은 아이를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럴 수가?
그의 얼굴은 어느새 금황독존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빈껍데기나 다름없던 단리확을 낚은 것 정도로 만족할 내가 아니야. 좌풍의 시대가 어떻게 열리는지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아기를 대할 때와 달리 그의 눈은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좌숙야…… 순우창…… 지금쯤이면 그 늙은 노마들도 단리확의 죽음을 알고 있을 터…… 이제 최후의 승부다!"
* * *
장강(長江) 하류……
날렵하게 생긴 쪽배 하나가 물살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뱃머리에는 금황독존이 검은 옷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멋들어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무몽이 선 채로 한 손으로 노를 젖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라 순식간에 범선 앞에 접근했다.
무몽은 범선 사오 장 앞에 이르러서야 휘익 뱃머리를 돌려 쪽배를 범선 옆에 갖다 댔다.
금황독존이 몸을 날리려 할 때 무몽이 소리를 질렀다.
"잠깐! 뭔가 이상합니다."
"응?"
금황독존이 돌아보자 무몽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바람 속에서 짙은 비린내가……."
금황독존은 눈을 내리 깔면서 딱딱한 자세로 말했다.
"그렇군…… 아주 기분 나쁜 냄새가 느껴져."
그는 고개를 들어 범선 위를 올려다봤다.
"직접 보면 무슨 냄새인지 확실히 알 수 있겠지……."
금황독존은 뱃전을 박차고 몸을 솟구쳐 단숨에 범선 위로 뛰어올랐다. 이어 그 옆에 무몽이 내려섰다.
배는 마치 해적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난 것처럼 적막했다.
'뭐야? 왜 이리 조용한 거지?'
무몽이 재빨리 앞으로 달려 나가 범선 곳곳을 살피고 돌아왔다.
"아무도 없습니다."
금황독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연락이 잘못 된 것이 아닌가?"
무몽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오늘 자시(子時)에 이곳으로 모두 집결하게 되어 있거늘……."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현현교를 떠난 일백여 명의 교도들과 함께 황산의 현현교 총단으로 총공격을 가하려 했는데……
무몽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백여 명이 한꺼번에 약속을 어길 리가 없습니다."
그때 금황독존은 바닥에서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 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들은 약속을 어기지 않았어."
무몽은 몹시 곤혹스런 얼굴로 금황독존을 돌아봤다.
"소교주님……."
금황독존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단지…… 다신 영원히 그들을 만날 수 없을 뿐이다."
'설마 죽음……?'
무몽은 경악했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비록 현현교를 떠난 지 백 년, 그 동안 무공을 연마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능히 일파의 장문인이 될 자격이 있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어느 누가 흔적도 없이 처치할 수 있단 말인가.
금황독존은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 허리를 굽히고 뭔가를 집어 들었다.
"이게 뭔지 아는가?"
무몽의 가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놀람의 탄성을 터뜨렸다.
"유풍객(柔風客)의 금지환……!"
금황독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금지환은 백수십 년 간 그의 손가락에서 빠진 적이 없어……."
치이익!
손을 꽉 쥐자 금지환이 손바닥 안에서 타며 손가락 사이로 검은 연기가 새어나왔다.
"금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걸 다 녹여버리는 독(毒)이 있지…… 살과 뼈는 물론이고 쇠까지도 한 줌의 물로 녹여버리는 죽음의 독이……."
무몽의 안색이 변하며 충격을 참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부골혈화산(腐骨血化酸)……?"
금황독존의 얼굴은 분노로 흐려졌다.
"모두 죽었어…… 독마 순우창, 그 늙은 놈이 이곳에 나타난 거야."
그때 금황독존의 귓속으로 한 줄기 전음이 파고들었다.
'흐흐흐! …… 맞아 애송이…… 정확히 짚었어!…….'
뽀글뽀글……!
배 아래 수면이 마치 불을 때듯 수포가 생기며 부글부글 끓었다.
촤아아아악!
거대한 물기둥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물기둥은 뱃전 위에서 촤악! 갈라지더니 방향을 틀어 금황독존과 무몽을 덮쳐갔다.
금황독존은 몸을 위로 휙 띄워 물기둥을 발 아래로 지나 보냈다.
그러나 무몽은 피하지 못했다.
"허억!"
황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물기둥은 그대로 그의 몸에 부딪쳤다.
"끄어억!"
무몽은 목을 움켜쥔 채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살갗과 뼈가 촛농처럼 녹아내리며 인간으로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다.
이윽고 무몽의 몸은 완전히 녹아 나무 바닥 아래로 스며들어갔다.
금황독존은 무심하게 무몽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동공 속에 순우창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우창은 차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헛허……! 악몽을 꾸는 기분일 거야. 허나 이게 바로 너의 한계인 걸 어쩌겠느냐?"
금황독존의 눈이 싸늘해지고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래…… 날 충분히 감탄시켰다는 건 인정해준다."
순우창은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말했다.
"좌현영이 죽은 후 넌 혼자였지…… 현현교의 패권을 잡겠다고 수많은 조력자들을 끌어 모으느라 애썼다만…… 이제 다시 혼자가 된 거야."
금황독존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아무리 당신의 독이 무섭다지만 그 많은 고수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제거하기란 불가능해.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나?"
순우창은 빙그레 웃었다.
"맞았어. 네 말대로야. 너의 가장 가까운 수하 하나가 배신을 하고 날 돕지 않았다면 힘든 일이었지."
'배신……?'
결국 또 내부의 문제였단 말인가.
외압에 의해 패망하는 경우란 좀처럼 없다. 대부분의 경우, 개인이나 나라나 내부의 문제 때문에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대체…… 대체 그놈이 누구냐?"
순우창의 입술이 경멸하듯 비뚤어졌다.
"헛허……! 굳이 알 필요 없어. 그놈도 한꺼번에 한줌의 물로 녹여버렸으니까."
그는 스윽!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네 녀석만 죽어주면 이번 일은 끝나는 거야."
크크크크!
금황독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가소롭군. 이 정도로 나의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나?"
후우우웅……
금황독존이 진기를 끌어올리자 그의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발산되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킬킬……! 당신의 그 어떤 독도 날 해칠 순 없어! 그 이유를 말해줄까?"
그는 쌍장을 앞으로 내밀어 번개같이 후려갈겼다.
"나의 혈음신장은 이미 구음(九陰)이 채워져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경지를 넘어섰어!"
콰우우우……!
순우창도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장력을 끌어올려 맞섰다.
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순우창은 비칠비칠 서너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설마 했더니 사실이구나! 저 나이에 벌써 혈음신장의 구성을 넘어섰다는 건 도대체가……?'
금황독존은 냉소를 뿌리며 다시 진기를 끌어올렸다.
"크크크……! 혈음신장에 대적할 수 있는 무공은 이 하늘 아래 존재하지 않아. 얄팍한 내공이나 독공 따위로 날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순우창의 기세는 결코 누그러들지 않았다.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
"정말 대단해……! 하지만 네 머리 위에 떠있는 거대한 만월(滿月)이라면 널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믿는 것이 만월이었던가?
순우창의 입에서 만월이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금황독존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무……무슨 헛소리냐?"
순우창은 비릿한 미소를 흘려내며 품 속에서 작은 금(琴)을 꺼냈다.
"그게 무슨 소린고 하면 보름달이 휘엉청 뜬 밤엔 음악과 벗을 하며 놀아야 한다는 뜻이야."
금황독존의 두 눈이 순우창의 손에 들린 금에 쏠렸다.
'서……설마 저것은 초마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순우창은 그의 시선이 뜻하는 바를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삼대신물 중 하나인 초마금이라는군. 이것을 내 손에 넣느라 애를 좀 먹었지…… 너의 몸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알게 된 건 불과 얼마 전이야. 몸은 하나이지만 영혼은 둘이라고 했던가?"
"가증스런 늙은이! 감히 내게 장난을 칠 셈이냐!"
금황독존은 맹수의 포효와 같은 소리를 지르며 순우창의 몸을 짓이기듯 돌진해 들어갔다.
순우창은 여유 있게 발을 움직여, 옆으로 피하며 껄껄 웃었다.
"너무 서둘지 마라 애송이! 초마금이 지닌 영능으로 네 몸속에 잠재된 또 하나의 영혼을 일깨우는 순간……."
그는 손가락을 튕겨 초마금의 줄 하나를 튕겨냈다.
띠잉!
금황독존의 신형이 휘청 흔들렸다.
"허억!"
찌잉!
머릿속을 후벼 파는 듯 엄청난 통증.
금황독존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캇캇캇!"
순우창은 통쾌한 마음에 보름달을 쳐다보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설마 싶었는데 좌숙야의 말이 조금도 어김없는 것이다.
"오늘이 바로 보름이라는 것도 재미있지 않나? 네 몸 속에 깃든 다른 영혼이 가장 요동칠 때니까!"
순우창의 손은 부드럽게 초마금을 쓸었다.
디리리링!
"어디 구경 좀 할까? 초마금의 소리에 네 몸 속에 잠재된 다른 영혼이 수백 배의 힘을 얻고 깨어나는 모습을 말이야!"
금황독존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아! 이 저주의 소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두 다리는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 끄아아아……! 안돼……!"
초마금의 소리가 높아가며 골이 두 쪽으로 쪼개져 수천 마리의 개미들이 일제히 안으로 달려들어 뇌수를 물어뜯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곰보처럼 변하는가 싶으면 뇌파극의 모습으로 변했고, 영봉의 모습으로 변하다가 다시 금황독존의 얼굴로 돌아왔다.
점점 허물어져가는 금황독존의 모습을 보자 순우창은 더욱 흥이 치솟는 듯 초마금의 소리를 높여갔다.
"크크크……! 이거 정말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땅!
그의 손가락에 걸린 초마금의 줄 하나가 끊어졌다.
순우창은 소스라치게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뭐……뭐야? 어떤 병기에도 손상되지 않는다는 초마금의 줄이 저절로 끊어져?'
허물어져가던 금황독존이 아수라와 같은 모습으로 순우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크아아아!"
순우창은 자신의 눈앞으로 엄청난 백광(白光)이 뻗어오는 것을 보았지만 몸이 밧줄에라도 묶인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퍼엉!
순우창의 몸은 공중으로 붕 떠올랐고,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머리부터 뱃전에 처박혔다.
"이럴 수가…… 좌숙야…… 이제 보니…… 그놈이……."
순우창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좌숙야, 그놈은 일시에 금황독존과 함께 자신까지 동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눈의 흰자위가 드러나며 순우창의 고개가 풀썩 아래로 꺾였다.
(2)
"어머, 이 꽃 좀 봐. 너무 예뻐……."
운가려는 섬섬옥수를 내밀어 산중에 핀 이름 없는 꽃송이를 살짝 뜯어 올렸다.
"아가씨, 제발! 이제 그만 노부인 곁으로 돌아가세요."
옆에서 큰 소리가 들렸지만 꽃잎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는 운가려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치는 소리가 들렸다.
파천나찰 장수옥은 신수궁의 금지옥엽 운가려 때문에 애간장이 다 녹을 지경이었다.
운가려는 석비룡이 신수궁에서 빠져나간 후 그를 찾아 강호에 몸을 던졌다. 벌써 일 년이 넘도록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이다.
어루어도 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운가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아가씨…… 제발! 연로하신 노부인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지금도 이렇게 사정을 하다시피 해보지만 운가려는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로 안가. 그 사람과 함께라면 몰라도……."
막무가내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리라.
장수옥은 방법을 찾지 못해 골치가 지끈지끈 쑤셔왔다.
"아가씨…… 다른 건 몰라도 사랑은 서로가 좋아야 이루어지는 거예요. 설령 그자와 아가씨가 한 순간 사랑을 나누었다고 해도…… 세상에는 그 보다 나은 사람들도 많답니다."
운가려는 어림없다는 듯 흥! 코웃음을 쳤다.
"난 석 공자가 아니면 죽어도 결혼 안해."
부스럭!
멀리서 덤불을 헤치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장수옥은 벌떡 일어서며 칼을 뽑아들었다.
"누……누구냐!"
부스럭 소리는 멀리서 들렸는데 인영은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장수옥과 운가려 앞에 나타난 자는 금방 지옥에서 빠져나온 듯 으스스한 아수라의 모습이었다.
"크으으……! 드디어 찾아냈어. 선천성 음맥을 지닌 계집을……."
순우창에게 극심한 부상을 입은 금황독존이었다.
그의 눈은 운가려에게 쏠려 있었으며, 장수옥은 보이지도 않는 듯 다가왔다.
운가려는 두려움에 질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고 장수옥이 금황독존의 앞을 막아섰다.
"웬 놈이 감히 수작을 부리느냐! 어서 물러나지 못할까!"
일갈을 하였지만 대답은 금황독존이 내뻗은 일장이었다.
"넌 꺼져!"
콰콰콰……!
가벼운 일장이지만 그 위세는 엄청났다.
장수옥은 칼을 내리쳐 바람을 갈랐지만 소용없었다.
땅!
칼이 부러졌고, 그녀의 몸은 뒤로 휙 날아갔다.
운가려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맙소사! 장 집사가 단 일격조차 못 받아 낼 정도라는 건……?'
금황독존은 어느새 그녀의 일장 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크크! 넌 나의 열 번째 여인이야…… 널 통해서 난 무한의 능력을 얻을 것이다……."
"아……안돼……!"
운가려는 계속 뒷걸음질을 쳤지만 바위에 가로막혀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흐흐…… 영광으로 알아라. 혈음신장의 완성을 위해 선택되었다는 걸…."
금황독존은 손을 뻗어 운가려의 어깨를 잡아갔다.
"아악!"
운가려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절체절명의 순간, 피우욱! 한 줄기 예리한 지풍이 공기를 찢었다.
팟!
금황독존의 손목을 관통했다.
뚫린 구멍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웬 놈이 감히……."
금황독존은 비시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다.
엄청난 크기였다.
'뭐……뭐야? 이 덩치는…….'
괴물!
누구라도 설고웅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이렇게밖에 얘기할 수 없으리라.
"시비를 걸은 건 그쪽이 아니냐. 금황독존 좌풍……."
왼쪽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
금황독존은 흠칫 얼굴이 굳어지며 고개를 돌렸다.
"천리무영……."
석비룡은 빙긋 웃었다. 언제 구출했는지 그의 옆구리에는 운가려가 들려져 있었다. 운가려는 조금 전 위기도 잊어버린 듯 황홀한 표정으로 석비룡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허어, 금황독존이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라니 뜻밖인데 그래……."
다시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한 둘이 아니었다. 벽소운과 임단하가 먼저 나타났고 이어 백면귀라, 만박신승, 귀검수 왕소우가 차례로 모습을 보였다.
금황독존은 불안한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이건 대체……?'
벽소운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리도 좀 뜻밖이야. 설고웅이 어딘가로 미친 듯이 질주하길래 뭔가 있을 것 같아 모두 불러 모았는데 널 보게 될 줄이야……."
진기를 끌어올리는 듯 금황독존의 머리끝이 고슴도치처럼 날카롭게 서고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놈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진기가 모이는 순간,
"으윽!"
금황독존은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꽉 부여잡았다.
'우우……! 영봉…… 이 계집이 벌써 옥구전의 아홉 단계를 이루어 몸속에서 나오려 하고 있어…….'
금황독존은 억지로 고개를 들어 석비룡을 쳐다봤다.
"비……비룡…… 그 계집을…… 내게 보내라…… 난……난…… 그 계집의 음기가 필요해…… 어서……."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석비룡은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이 친근한 목소리……
어디선가 무척 많이 들어왔던, 그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
"어서…… 내겐…… 내겐…… 시간이 없단 말이다!"
석비룡은 그때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뇌파극……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절대…… 절대로…….'
석비룡이 망연히 서 있을 때, 그 기회를 틈타 금황독존이 운가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운가려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쉬잇!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옆구리를 찢고 들어오는 예리한 검기(劍氣).
이대로 팔을 뻗는다면 운가려를 잡아채겠지만 치명상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금황독존은 허리를 비틀어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빨을 부드득! 갈며 자신을 공격했던 상대를 쳐다봤다.
"네놈은…… 귀검수 왕소우인가?"
왕소우는 검 끝을 금황독존의 가슴 쪽으로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일면식은 있잖은가."
금황독존은 크크크! 비웃었다.
"마누라 하나 지키지 못하는 놈이 다른 계집을 지키겠다고?"
왕소우는 한 순간 멍청해졌다.
"그게…… 무슨 뜻이냐?"
"혈음신장을 터득하기 위해 난 선천성 음맥을 지닌 계집들을 품어왔지. 그 중엔 네 마누라도 있어. 혼혈을 찍고 은밀하게 음기를 흡수했다면 알아듣겠나?"
"이……이제 보니 금아를 네놈이……?"
왕소우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킬킬…… 네 계집의 몸은 정말 훌륭했어! 살이 아주 나긋나긋 했지."
"죽여 버린다, 이놈!"
왕소우의 눈에서 쇠마저 녹일 불꽃이 이글거렸다.
그때 석비룡이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왕 대협!"
"비켜! 막는 놈은 누구든 불문하고 죽인다!"
석비룡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미리 말씀드렸지 않소? 놈은 어차피 죽을 것이지만 그 육체에는 따로 주인이 있소."
왕소우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이런 빌어먹을!'
석비룡은 몸을 돌려 금황독존과 마주 섰다.
"좌풍, 너와 난 같은 핏줄이다. 아느냐?"
자신을 부를 때, 그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던 것은 아마 자신과 핏줄을 나눈 때문이었으리라.
석비룡은 단순히 이렇게 단정을 내렸다.
금황독존은 그의 말에는 대답도 않고 운가려를 쳐다봤다.
"너…… 이리 와…… 어서! 넌…… 내게 몸을 바쳐야 할 운명이야…… 어서 오너라!"
운가려는 이 무서운 작자와 눈길이 마주친 순간 끝이 없는 바다를 보는 듯했다. 그 바다 속에서 맑은 종소리가 들려오고 어디선가 고요한 단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운가려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금황독존을 응시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크크크……! 그래 착하지……."
금황독존은 음산하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석비룡은 짐작되는 바가 있어 황급히 운가려의 혼혈을 찍었다.
'사신겁안(邪神劫眼)! 운가려의 영혼을 빨아들이고 있어!'
끝까지 석비룡이 방해하자 금황독존은 불끈 화가 치밀어 바락 소리를 지르며 쌍장을 내갈겼다.
"이놈! 비룡! 네가 나를 죽일 테냐?"
그 순간 석비룡은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뇌파극…… 설마 네가……?'
콰아아아……!
금황독존의 쌍장이 바로 지척에 이르도록 석비룡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순간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날쌘 동작으로 설고웅이 석비룡 앞을 막아섰다.
퍼퍽!
혈음신장이 그의 가슴에 정통으로 적중했지만 설고웅은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금황독존을 덮쳐갔다.
마치 거대한 태산이 산사태를 이루며 쏟아지는 것 같았다.
꽈악!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설고웅의 손이 금황독존의 몸을 끌어안았다.
콰콰콰콰쾅!
혈음신장이 소나기와 같이 설고웅의 가슴에 퍼부어졌다.
"위험해!"
벽소운이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을 만박신승이 제지했다.
"내버려두는 게 좋아. 천공대흡력을 연성한 이상 어느 누구도 설고웅의 내력을 감당할 수는 없어."
석비룡은 암울한 표정으로 금황독존의 모습을 쳐다봤다.
임단하가 소리를 질렀다.
"저……저것 봐요? 금황독존의 얼굴이 이상해지고 있어……."
놀랍게도 금황독존의 얼굴이 변하고 있었다.
"끄극…… 끄그그……!"
얼굴근육이 제멋대로 일그러지더니 두두둑! 두둑! 얼굴뼈가 이리저리 퉁겨지며 전혀 다른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다.
석비룡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외침이 터졌다.
"뇌파극! 정말 너였더냐?"
성큼, 석비룡은 그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런데 뇌파극의 얼굴이었던 것도 잠깐 다시 얼굴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떠오르는 영봉의 얼굴……
설고웅은 몸을 격렬하게 떨며 소리쳤다.
"드디어…… 선녀를 찾았어……드디어……나의 선녀를……."
그리고 그는 영봉을 안은 채 옆으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아무리 신력을 가진 인간이라도, 결국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 자신이 찾던 선녀를 확인하는 순간, 설고웅은 그대로 까무라쳐 버린 것이다.
(3)
이십 년 전 좌현영은 자신의 핏줄을 잇기 위해 천령음맥의 여인을 찾아 헤맸다.
결국 찾아내긴 했으나 그 여인은 바로 뇌파극의 어머니, 그러니까 황실의 중신이었던 뇌천염의 아내였다.
허나 당시 좌현영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순우창의 독으로 인해 오장육부가 녹아내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까……
결국 여인은 좌현영의 아기를 뱃속에 수태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바로 불행의 씨앗이었을 줄이야……
십 개월 후 그녀의 몸에서 아기를 받아 낸 종천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태어난 것은 등이 달라붙은 남녀쌍둥이.
종천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달라붙은 상태에선 두 아이가 일 년도 못 넘기고 모두 죽고 말 상황이었으므로……
결국 종천로는 사내놈 쪽을 혹 잘라내듯 도려내고 말았다.
헌데 괴변(怪變)이 일어났다.
자신의 죽음을 감지한 사내아이의 영혼이 처절한 생존의 념(念)으로 계집아이의 육체에 스며든 것이다. 즉 계집아이와 사내아이의 영혼이 하나의 육체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이는, 기상천외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혈음(血陰)이 만들어 낸 저주였다.
종천로가 보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계집인 영봉이 눈앞에서 졸지에 사내인 좌풍으로 변하는 모습을 봐야 했으니.
그러한 일은 보름달이 뜰 때마다 벌어졌다.
좌풍과 영봉은 서로를 밀어내어 육체를 차지하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벌였고, 결국 종천로는 그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좌풍은 혈음신장의 힘을 통해 하영봉을 없애려 했고, 하영봉은 그것을 막기 위해 토번의 마공인 옥구전을 수련했다.
서로를 제거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이던 그들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된 점은 있었다.
바로 뇌 대인의 아들로서 살아가는 것.
현현교를 재건하기 위한 재물과 황실을 감시하는 데 가장 적합한 위치이기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뇌파극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 낸 것이다.
"이제야 알겠군. 왜 뇌파극에게서 간혹 여자아이와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석비룡은 영봉의 얘기를 듣고 난 다음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길지만, 그 속에 담긴 아픔에 비하면 짧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휴우……!
영봉은 가슴 속에서 꽉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쓸쓸한 표정으로 석비룡을 쳐다봤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오라버니…… 죄송해요…… 설혜 언니의 일은……."
석비룡은 영봉의 어깨를 슬며시 끌어안으며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괜찮다. 아기가 돌아왔으니 설혜도 차츰 회복될 거야."
"전 그 외에도……."
영봉은 자신 아닌 또 다른 자신이 저지른 죄를 실토하려 했다.
"그만 이제 모든 건 끝났어."
석비룡은 그녀를 자신의 품속에 꼭 끌어안음으로써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앞으론 그 무엇도 우리 남매의 운명을 바꾸진 못할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한 거야."
이때 설고웅이 머리를 긁적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저어……."
그는 안으로 들어와서도 가까이 오지 못하고 옆에서 쭈뼛거리며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석비룡은 과거 수줍음을 잘 타던 설고웅 본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유쾌했다.
석비룡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거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이리와!"
그제서야 설고웅은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왔다.
석비룡은 그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 녀석이 생긴 건 이래도 사람 하나는 인정할 만하지. 만약 이 녀석이 없었다면 지금의 너도 없었어."
영봉은 설고웅을 슬쩍 쳐다보고는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두 볼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평생을 통해 당신에게 감사할 거예요. 그리고 한 가지 사과할 일이 있어요. 전에 함께 있으면서 은밀하게 당신의 몸에 토번의 영고술을 펼쳤다는 걸 고백해야겠군요. 정말 미안해요."
설고웅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영고술? 그게 뭡니까?"
석비룡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랬었군. 저 녀석이 뭔가에 홀린 듯 영봉에게 달려갔던 이유가……."
영봉은 설고웅을 힐끔 쳐다보고는 볼을 더욱 붉히며 말했다.
"영고술을 펼치면…… 평생 서로의 영혼이 연결되는 거예요. 당신이 날 좋아하는 걸 알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석비룡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하하! 통쾌하게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 너희들은 어쩔 수 없이 평생을 함께 해야겠구나!"
어리숙한 설고웅이지만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만큼은 알 수 있었다.
'펴……평생을 함께 한다고……?'
입이 귀 밑까지 헤벌쭉 찢어졌다.
석비룡은 고개를 들어 천정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남은 건 좌숙야와 순우창을 제거하는 일뿐인가."
영봉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순우창은 이미 금황독존의 혈음신장에 당해 죽었어요."
석비룡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그와 난 한 몸에 살았어요. 금황독존에게 벌어진 중요한 일들은 거의 다 기억해요."
그것을 말하는 순간 하영봉은 뭔가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쳤다.
"아……!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어요. 금황독존은 순우창과 싸우기 전에 다섯 명의 심복들을 북경 자금성으로 보냈어요."
석비룡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지금…… 북경이라고 했느냐?"
"황제를 죽이려는 거예요. 좌숙야와 황궁의 끈을 끊어 버리려고…… 금황독존이 보낸 자객들은 과거 현현교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이예요. 자금성에 아무리 많은 병사가 있다고 해도 그들을 막진 못할 거예요."
석비룡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비록 등룡황부를 무너뜨린 황제지만 어릴 적 자신을 귀여워 했던 그였다.
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하늘이 심판할 일…… 누가 이후에 벌어질 앞일을 알 수 있단 말인가?"
* * *
무림맹 맹주 서문화가 찾아온 것은 그날 오후였다.
한때 석비룡의 가슴에 칼을 겨누었던 무림맹이었지만 대의(大義)를 위해 모든 사사로운 감정은 버려야 마땅했다.
"흥! 그 뻔뻔스런 얼굴로 잘도 나타나셨군."
벽소운이 이렇게 쏘아붙였지만,
"그게 어디 제가 나쁜 맘을 먹고 그랬겠습니까? 다 강호의 안녕을 위해서……."
서문화는 헤죽헤죽 웃으며 위기를 넘겼다.
만박신승이 말했다.
"현현교에 대한 소식은……?"
서문화가 이곳에 나타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무림맹 총관 하을현이 앞으로 나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보름 후면 정식으로 현현교의 재출범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개파대전이 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전 무림의 흑백양도 중 현현교와 손을 잡은 무리는 거의 대부분 집결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서문화는 어깨를 우쭐하면서 덧붙였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그곳에 들어가기 쉽다는 얘기도 되지요, 핫핫……!"
석비룡이 물었다.
"들어간 다음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요?"
"예?"
서문화가 생각한 것이야 뻔했다. 죄숙야와 정면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석비룡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되도록 피를 적게 보는 선에서 쉽고 간단하게 갑시다."
석비룡은 좌중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의 목표는 좌숙야 한 사람이지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만들자는 건 아니잖습니까?"
* * *
황산, 현현교 총단에 밤이 깊었다.
좌숙야는 창틀에 걸터앉아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밤이 가고 아침이 오면 현현교의 개파대전이 열릴 것이다.
내일이면……
자신이 드디어 무림의 지존, 무황(武皇)의 자리라 할 수 있는 현현교의 교주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백 년 동안 벼르고 별러왔던 숙원이 이뤄지는 날이다.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넓은 광장은 지금은 고요하지만 몇 시진 전만 해도 개파대전을 준비하던 사람들로 몹시 북적거렸다.
긴 장대에 매단 흑백적청황(黑白赤靑黃), 다섯 색깔의 깃발들을 꽂고 수천 개의 의자를 마련하고 군웅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등…… 수만 군웅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좌숙야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이 시간까지 참가한 문파만도 일천여 개에다 충성을 맹세한 휘하 인원은 총 일만 명이 넘는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흑백쌍귀는 허리를 숙였다.
좌숙야는 고개를 돌려 흑백쌍귀 두 사람을 쳐다봤다.
"좋아, 그 정도면 그럭저럭 구색은 갖춰진 것 같군."
백의귀동 장우사가 말했다.
"구색정도가 아니라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대방파의 출현인 셈이죠. 그 정도면 사부님께서 새 시대의 주역이 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좌숙야는 새 시대의 주역이라는 말이 마음에 드는 듯 껄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하긴 순우창도 없고 단리확도 사라졌으니 싫든 좋든 주역은 내 차지가 될 수밖에 없을 테지! 껄껄껄……!"
웃음소리가 그치기 전, 좌숙야의 미간 사이가 좁혀졌다.
쉐에엑……!
창 밖에서 그의 몸을 노리고 덮쳐오는 검은 물체.
"뭐얏!"
좌숙야는 몸을 홱! 돌리며 날아오는 물체를 향해 벼락같이 손을 내리쳤다.
퍽!
물체가 부서지면서 피가 튀었다.
좌숙야의 잘 차려 입은 비단옷이 순식간에 붉은 핏물에 젖었다. 놀랍게도 그에게 날아온 물체는 죽은 사람의 시체였던 것이다. 시신은 좌숙야의 일장을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져 있었다.
'어떤 놈이 감히 현현교 안에 몰래 잠입을……?'
쉐쉐쉐……쉑!
넓은 창으로 시신들이 연달아 쏘아져 들어왔다.
대청 위에 켜켜 쌓이는 시신의 수는 순식간에 삼십여 구가 넘었다.
머리가 터지고, 배가 갈라지는 등 각기 사인(死因)이 다른 시신들.
흑의귀동 장우화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이건…… 혈의삼십육도(血衣三十六刀)!"
좌숙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떤 놈이 감히 본좌의 수족들을……!"
창 쪽으로 다가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쉬잇!
바람소리와 함께 창틀에 내려와 앉은 한 사람. 바로 천리무영 석비룡이었다.
"너는……."
백의귀동 장우사는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입술을 닫고 말았다.
다시 등 뒤에서 쾅! 소리가 나며 문이 박살나버린 것이다.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스스스! 모습을 드러내는 다섯 사람……
만박귀승과 귀검수 왕소우, 백면귀라, 설고웅, 벽소운, 임단하 등이었다.
흑백쌍귀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훼훼 돌리다가 좌숙야를 쳐다봤다.
"사부님!"
좌숙야의 얼굴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본교의 개파 대전은 분명 내일인데…… 무슨 급한 용무가 있어 이 밤에 찾아왔는지 모르겠군."
벽소운이 흥! 코웃음을 치켜 말했다.
"개파대전 같은 소리하고 있네. 현현교는 오늘로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어 있는 걸 혼자만 모르고 있군."
좌숙야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크크크! 너희들이 날 막아 보겠다, 이건가……?"
석비룡이 앞으로 나섰다.
"안됐지만 당신의 시대는 오늘로 끝났소!"
"글쎄…… 과연 그렇게 될까?"
얼굴을 마주 하고 선 두 사람.
터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일었다.
이 짧은 순간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좌숙야! 너는 분명 오늘 죽는다!"
석비룡은 몸을 가볍게 솟구치며 빙그르르 돌더니 일시에 진기를 돋구어 뻗어냈다.
"만공모사!"
일갈과 함께 그의 전신에서 뻗어나온 수만 가닥의 기류가 좌숙야의 몸으로 집중되었다.
취리리리리……!
좌숙야는 아연실색,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이건 도대체가……?!"
어떡할 사이도 없이 그물망처럼 촘촘히 좌숙야의 몸을 휘감는 만공모사의 기류.
석비룡은 만공모사를 발출시킨 다음, 멈추지 않고 재차 몸을 날렸다.
"현빙신공!"
그의 쌍장에서 눈부시게 흰 광채가 좌숙야를 향해 뻗어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이제 끝났어!"
그도 그럴 것이 만공모사와 현빙신공이 동시에 펼쳐졌으니 이를 받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허나 좌숙야의 능력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다.
"크크크……! 네놈들은 본좌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만공모사의 흰 기류 속에서 좌숙야의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번쩍!
선명한 핏빛 광채가 석비룡이 펼쳐 낸 만공모사와 현빙신공, 두 종류의 기류를 뒤덮었다.
만박신승의 입에서 놀람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혈음신장이닷!"
콰콰콰콰쾅!
수백 발의 벽력탄이 일시에 터지는 굉음과 함께 석비룡은 일장이나 쿵쿵쿵! 뒷걸음질을 쳤다.
임단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해! 금황독존의 혈음신장과는 어딘가 달라……."
좌숙야는 두 눈에서 소름 끼치는 붉은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크크크……! 제법 아는 체한다만 금황독존 그놈이 속성으로 수련한 혈음신장과 무려 백 년에 걸쳐 완성한 혈음신장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지……!"
그는 천천히 석비룡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네놈이 과연 이번에도 본좌의 백년지공(百年之功)을 막을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석비룡은 피식 웃었다.
"백 년에 걸쳐 쌓아올린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려니 가슴이 아프군. 허나 이건 운명이니 어쩔 수 없어."
그때 만박신승과 백면귀라, 벽소운, 임단하, 귀검수 왕소우, 설고웅 등이 좌숙야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좌숙야는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비겁한…… 모두 한꺼번에 덤빌 작정인가?"
임단하가 맞받아쳤다.
"네놈이 지금까지 자행한 살겁을 생각하면 사람의 숫자가 적은 게 한이 될 정도야!"
좌숙야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좋아…… 좋아…… 하지만 쉽게는 안 될 거야."
만박신승이 소리쳤다.
"자자……! 밤이 길면 꿈도 길어진다 하였으니 모두 시작하세!"
일시지간, 일곱 사람의 신형이 일곱 줄기 빛이 되어 좌숙야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콰콰콰……!
대기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몰아쳤고, 사방으로 무시무시한 빛이 뿌려졌다.
좌숙야는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자신의 모든 내공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허나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이 땅을 통틀어 가장 강한 일곱 명을 그 혼자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일곱 줄기의 공격 속에서 그의 몸은 피보라와 함께 분해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야망의 종식을 의미했다.
(4)
모든 은원이 정리되었다.
개파대전을 하루 앞두고 현현교는 잿더미가 되었다.
현현교 제거에 일념을 갖고 소림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각자 제 갈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 * *
말에서 내려 술 권하며 묻기를,
그대는 어디를 가려는고.
세상일 모두 뜻 같지 않아,
남산에 돌아가 누우련다고.
그러면 아무 말 말고 어서 가보게,
거기는 언제나 흰구름 일리니……
下馬飮君酒 問君何所之
君言不得意 歸臥南山睡
但去莫復問 白雲無盡時
모든 것이 덧없음이니……
석비룡은 산마루에 홀로 앉아 술 한 잔에 모든 시름을 털어버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만박신승은 다시 교세확장의 일념을 갖고 십만대산으로 돌아갔고, 귀검수 왕소우는 금아와 함께 장인 천일기가 있는 대초원을 향해 먼 길을 떠났다.
무림맹주 서문화는 석비룡에게 새로운 무림맹의 주인이 되기를 거듭 권했지만, 그가 한사코 거부함에 따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무림맹으로 돌아갔다.
다만 백면귀라가 어디로 떠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백면귀라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얼굴로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아가리라는 것뿐이다.
"설고웅과 영봉도 잘 살아갈 테지……."
석비룡은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은근한 취기가 오르며 스르르 잠이 몰려왔다.
그러나 일각도 지나지 않아 그의 잠을 깨우는 뾰족한 소리가 들려왔다.
"흥!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군요."
부스스 눈을 뜨니, 그 앞에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잔뜩 골난 표정을 짓는 벽소운이 서 있었다.
"왜 그래? 발정 난 암고양이처럼…… 자! 이리와 술이나 한 잔 하지."
그는 빙긋 웃으며 잔을 내밀었지만 벽소운은 매몰차게 탁 뿌리쳤다.
그녀는 석비룡 앞에 주저앉아 그를 다그치듯 말했다.
"이봐요, 색광서생! 그 잘난 입으로 얘기 좀 해봐요. 앞으로 어떡할 거죠?"
석비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뭘?"
"우리 말예요. 우리! 나와 임 소저, 거기다 운 소저까지…… 대체 어떡할 생각이예요?"
석비룡은 그제야 그녀가 화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벽소운과 임단하, 운가려 등이 모두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데 석비룡은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걱정은 한 가지뿐이다.
'설혜는 어떻게 하나? 설혜는…….'
설혜의 품속에 아기를 돌려주었으나 언제 제정신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그녀의 병이 깊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떠나면 그녀를 돌봐 줄 사람도 없는데……
설혜를 혼자 내버려두고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벽소운은 그의 코를 찌를 듯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뭐가 걱정이죠. 뭐가…… 우리 모두 설혜 아가씨를 큰 언니로 모시고 살기로 했는데……."
"뭐! 뭐라고……?"
석비룡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저길 좀 보라구요."
벽소운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에는 임단하와 운가려가 설혜를 양쪽에서 부축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석비룡은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얼굴을 드러낸 햇빛이 유난히 눈부셨다. 마치 그의 앞길을 축복이라도 해주듯....
大尾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