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의 특질>
‘불교(佛敎)’라고 하면,
출가, 삼매, 윤회, 해탈, 업, 과보, 수행, 해탈, … 이런 것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불교에만 있는 교리가 아니다.
힌두교든 자이나교든 인도 종교는 거의 모두 삼매를 훈련하고,
해탈을 추구하며, 업과 과보의 이치를 가르치고, 윤회를 당연시한다.
이들은 인도 종교 전체가 공유하는 교리들이다.
그러나 ‘무아(無我)’만은 불교 고유의 특질이다.
‘무아(無我)’는 인도는 물론이고 전 세계 어떤 종교나
사상, 철학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불교 특유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윤회와 해탈,
업과 과보,
번뇌와 수행에 대한 불교의 이론들은 모두 무아의 가르침과 얽혀 있다.
무아란 문자 그대로 “내가 없다.”는 뜻인데,
산스크리트어 안아트만(anātman)으로 ‘안(an)’은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이고,
‘아트만(ātman)’은 자아(自我) 또는 실체(實體)를 의미한다.
안아트만을 무아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내가 아니다.”라는 의미에서 비아(非我)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실체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몸과 마음은 있다. 그러나 이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상호의존적으로만 존재가 가능하다. 몸이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당장 공기가 없으면 죽는다. 또 음식이 없으면 죽는다. 땅이 없으면 서 있을 수조차 없다.
따라서 몸이 혼자서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바깥 것들과 같이 공존, 즉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은,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게 늙어가는 것이고, 죽는 현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봐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무아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이름 아래 설명되고,
무아의 생명은 무아행(無我行)이라는 실천면에서 살아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는 무아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이기 때문에 무아성을 자각해 수행하고
노력함에 따라 역경을 극복해 향상할 수 있음을 뜻한다.
열반(涅槃)은 무아성의 자각 아래
철저하게 무아행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경지이다.
초기불전을 보면 무아를 가르칠 때 으레 등장하는 정형구가 있다.
우리의 심신(心身)을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생각(意)’의 여섯으로 나눈 후
그 어디에도 자아가 없다는 점을 역설하는 다음과 같은 경구다.
“눈(眼)은 내가 아니다(非我).
눈과 별도로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非異我).
눈 속에 내가 있거나 내 속에 눈이 있는 것이 아니다(不相在).”
“몸(身)은 내가 아니다.
몸과 별도로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몸속에 내가 있거나 내 속에 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意)은 내가 아니다.
생각과 별도로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 속에 내가 있거나 내 속에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통찰이 완성되면 눈, 귀, 코, 혀, 몸, 생각, 여섯 가지 가운데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나’라든지 ‘나에게 속에 있는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게 되고 번뇌가 사라져서 열반을 얻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이제 나의 삶은 모두 끝났다(我生已盡).
고결하게 살았고(梵行已立),
할 일을 마쳤으니(所作已作),
다음 생을 받지 않을 것을 나 스스로 아노라(自知不受後有).”
이를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 부른다.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자각이다.
탐욕, 분노, 우치, 교만 등의 번뇌가 사라졌다는 자각이다.
번뇌가 사라지면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세상에 맺힌 한(恨)이 모두 풀렸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도 세상에 대해서 미련이 없고 지적(知的)으로도 미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뇌의 뿌리를 모두 뽑아버린 수행자를 아라한이라고 부른다.
아라한은 죽은 후 적멸에 든다. 열반을 성취한다. 따라서 윤회하지 않는다.
무아에 대한 통찰은 깨달음에 이르는 출발점이다.
무아는 도그마가 아니다.
사상이 아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얻어지는 조망(眺望=관조)이다.
누구나 다시 발견할 수 있는 생명의 진상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으며,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아야 “내가 존재한다.”거나 “자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검토해보면 단 하나도 영원한 것이 없다.
단 하나도 불변인 것이 없다. 모든 세포, 모든 장기는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변한다.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 그래서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 그 어디를 뒤져봐도 불변의 자아는 없다.
존재하는 것은 부단히 흘러가는 심신 현상의 흐름일 뿐이다.
이를 자각할 때 ‘내’가 증발하기에 ‘나’를 향해 당기는 마음인 탐욕이나,
‘나’로부터 밀치는 마음인 분노 역시 사라진다.
구심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탐ㆍ진ㆍ치 삼독의 뿌리는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번뇌다. 무아를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내가 있다,
내가 최고다,
내가 더 많이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나의 존재를 내세우는 마음이 곧 아상(我相)이다.
부처님은 내가 상(相)을 가지는 순간 ‘나’ 아닌 사람들은
모두가 나의 투쟁의 대상,
경쟁의 대상일 따름이 된다.
그래서 번뇌가 발생하고 고(苦)가 생긴다고 하셨다.
「‘철저한 자신’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대로의 나’가 아닌 ‘나를 떠난 나’이다.
이 세상 만물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관계라는 사실을 직시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분리돼 있는 ‘나’는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세포요, 큰 나무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일 뿐이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 엘리어트(Eliot)는
‘예술은 자기 것의 표현이 아니고 자기 것을 넘어선 세계의 표현이다.’라고 했다.
종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를 넘어선 세계를 인식한다면 어떤 언행을 하고,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답이 나온다.」 - 지광 스님
『그런데 이렇게 무아를 이해할 때 명심할 점이 있다.
무아가 “내가 아예 없다.”는 가르침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인 이쪽에서 체험되는 심신의 흐름조차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인 이쪽에서 일어나는 심신의 흐름을 ‘자상속(自相續)’이라고 부르고,
‘남’인 저쪽에서 일어나는 심신(心身)의 흐름을 ‘타상속(他相續)’이라고 부른다.
매 순간 변화하는 심신의 흐름 속에 ‘불변의 주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무아(無我)인 것이지 그런 흐름조차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다.
불변의 나는 없지만 자상속(自相續)의 흐름은 있고,
불변의 남은 없지만 타상속(他相續)의 흐름은 있다.
행위자는 없지만 행위는 있어서 제각각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윤회의 파노라마를 엮어낸다.』 - 김성철
‘무아(無我)’에서 한자 ‘무(無)’에 얽매여서
그냥 단순하게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내가 없다. 그럼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군인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누구인가?
그런데 여기서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은, 「무아 = "내가 없다"」가 아니다.
무아란 “고정불변 하는 ― 항상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내가 아니다”는 뜻이다.
대부분 불자들이,「무아=나가 없다」는 잘못된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무아를 ‘내가 없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잘못된 무아론에 빠져버린다.
무아란 덮어놓고 ‘나’라는 게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아(無我)에서 ‘아(我)’라는 것은, 영원성을 의미한다.
무아(無我)의 뜻은 ’나‘라는 게 없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고,
‘나‘라고 여기는 몸과 마음에 내재된 영원성을 유지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은 변화해갈 수밖에 없다.
변화한다는 것은 곧 그 안에 어떤 영원성이 내재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은 없다.
그러나 찰나적으로 생사를 거듭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흐름은 있다.
즉, 연기에 의한 오온의 집합체는 있다.
이 게 글을 쓰는 나요, 이 글을 읽는 당신이다. 따라서 무아를 ‘내가 없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나’의 실존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실체로서 ‘나가 아니다. 가아(假我)로서 나(我)는 있다. 비록 가아이지만 ‘나’는 존재한다.
아트만(atman)이란 실체를 뜻하고,
무아란 존재론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고정 불변의 자아(atman)를 인정하고,
그러한 자아를 터득하고, 그것과 절대자 브라흐만(Brahma)이 하나 되는 것,
― 범아일여(梵我一如)가 되는 것을 그들의 제일의 교의로 삼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자아사상을
단지 ‘자아가 있다는 인식’ 곧 아상(我相)일 뿐이라며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렇다고 불교의 무아사상은 공무(空無)의 사상이 아니다.
따라서 무아를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이 해석하지 말고
나의 ‘영원한 실체’가 없다와 같이 해석해야 한다.
영원한 실체가 없으니 변한다. 어린이가 자라고, 어른은 늙고 병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없고 대상으로서의 존재자도 없는 공무(空無)가 이 세계의 실상이라면,
종교도 필요 없고, 선행도 다 헛된 것에 불과 할 뿐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도 다 헛된 일일 뿐이다.
일체의 법들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이고,
자신뿐 아니라 일체유위법들이 ‘나’라고 내세울 것이 없음을 알면,
나에게 애착하지 않고,
남에게 애착하지 않고,
나를 미워하지 않고,
남을 증오하지 않고,
나를 해치려하지 않고,
남을 해치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아행을 하는 자는 일체의 행이 자비롭고,
번뇌가 없고, 집착이 없고, 걸림이 없다.
즉, 무아행을 이루면, 무아와 자아(自我)의 개념을 초월해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조화를 창출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