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2권 33 궁전宮殿 궁사宮詞 궁宮의 노래 3絶
1
동화이사옥계방桐花已謝玉階傍 오동 꽃 이미 떨어진 옥섬돌 옆에는
인정향소월전랑人靜香銷月轉廊 인적이 고요하고 향불 꺼졌는데 달은 행랑으로 돌았구나.
백척록로성정긴百尺轆轤聲正緊 백 척 되는 두레박 소리 한참 급한데
양거의과옥서상羊車疑過屋西廂 양거羊車는 서편 채로 갔는지 의심스럽네.
►녹로轆轤 ‘도르래 록(녹)轆’ ‘도르래 로(노)轤’
오지 그릇 따위를 만들 때 바로 돌리며 模型과 均衡 等을 잡는 데 쓰는 물레. 녹로대轆轤臺.
우산雨傘이나 양산洋傘대 위에 裝置하여 살을 한 곳에 모아서 폈다 닫았다 하는 데에 쓰이는 物件.
►양거羊車
한무제漢武帝가 넓은 궁중 안에 羊이 끄는 수레[車]를 타고 다니다가
그 수레가 가는 곳의 宮女와 同寢하였으므로
궁녀들이 길섶의 풀에 소금을 뿌려 놓아 양이 풀을 뜯어 먹느라고
그 길만을 따라가게 되었다고 한다.
2
불어맥맥도춘소不語脈脈度春宵 말없이 멀건이 서서 봄밤을 지나는데
비상수궁무일소臂上守宮無日銷 팔뚝 위의 처녀 표시[守宮] 어느 날에 없어질까?
동방심쇄금루영洞房深鎖禁漏永 뒷방이 깊이 잠겨 누수漏水만이 긴데
리화야우성소소梨花夜雨聲蕭蕭 배꽃에 밤비 소리가 쓸쓸하구나.
►맥맥眽眽 끊이지 않는 모양
형용사 문어 (눈길이나 행동으로) 말없이 은근한 정을 나타내는 모양.
►수궁守宮 처녀 표시.
남녀 관계를 겪지 않은 처녀는 팔뚝에 守宮이라는 붉은 점이 있다고 옛 사람들이 전한다.
<수궁사守宮砂는 무엇인가?>
진晋나라의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에 보면 수궁사의 제조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붉은 색의 주사朱砂를 도마뱀에게 먹이고
도마뱀의 온몸이 발갛게 되면 그걸 부숴서 붉은 진흙처럼 만든다.
이 붉은 진흙을 여자의 4지나 신체에 찍으면 그녀가 성관계를 맺기 전에는
물로 씻어도 없어지지 않고 다만 성관계를 맺으면 자동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은 '수궁守宮'이 무슨 신성한 곳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수궁은 도마뱀의 일종이다.
몸이 약간 가늘고 허리는 암회색이며 밤알 같은 돌기가 있고 배는 백황색이며 입은 크고
혀는 두터우며 4발에는 5개의 발가락이 있고 발가락의 안쪽에는 주름이 많아서
다른 물건에 잘 붙을 수 있고 벽을 직선으로 타고 오를 수 있다.
즉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도마뱀이다.
예로부터 전해지기를 항아리 같은 곳에 넣어서 도마뱀을 기르며 매일 단사丹砂를 먹이고
대략 7근 정도의 단사를 먹인 후에는 그것을 갈아서 여인의 팔에 점으로 찍어두면
성관계가 발생하지 않으면 평생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일단 성생활을 하게 되면 바로 사라져서 흔적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혼여자에게만 사용할 수 있고 이미 결혼한 여자에게는 써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수궁사를 처녀의 팔에 찍은 후 며칠간 씻지 않으면 피부 밑에 스며들게 되고
그때부터는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고 더 선명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성관계를 맺고 나면 스스로 색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중국,북경,장안가에서
►소소蕭蕭 바람이나 빗소리 따위가 쓸쓸함.
3
수념청행타앵아手拈靑杏打鶯兒 손으로 푸른 살구 따서 꾀꼬리에 던지니
교어천반수득지巧語千般誰得知 천 가지 묘한 소리를 그 누가 알아듣나?
쟁사안상금압전爭似案上金鴨篆 책상 위 금향로의 전향과 어찌 같아서
년년묵묵시단허年年默默侍丹墀 해마다 말없이 단지丹墀에 모시고 있네.
►단지丹墀 임금이 있는 대궐 뜰.
‘지대 뜰 지墀’ 지대 뜰(지대 위의 땅) 꾸민 마룻바닥
●궁사宮詞
중국시의 한 체體로서 궁정 내부의 비사秘事
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칠언절구의 형식으로 읊은 것.
당나라 왕건王建이 유명한 玄宗 황제의 궁정생활에 대해 古老들로부터 들은 것을
칠언절구의 형식으로 읊어 궁사 100수를 지은 것이 그 처음이라고 한다.
그 뒤 5대의 후촉시대後蜀時代에 촉왕蜀王 맹창孟昶의 왕비인 비씨費氏
즉 보통 화예부인花蘂夫人으로 알려진 부인이 왕건의 궁사체를 본떠서
스스로 경험한 궁정생활을 읊어 궁사 100수를 만들었다.
왕건과 화예부인의 이 작품이 말하자면 궁사의 정형이라 하겠다.
본래 왕건은 훌륭한 시인이었고 화예부인 또한 뛰어난 여류작가였으므로
이들은 다 같이 화려한 궁정생활의 숨은 이면을 훌륭하게 묘사했던 것이며
따라서 후세에 그들을 따르는 작가가 많아
드디어 중국시에 궁사라는 한 유형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송대宋代에는 왕규王珪의 궁사 100수가 유명한데
왕건·화예부인의 작품과 더불어 '삼三家宮詞'로 일컬어진다.
원대元代에는 양유정楊維禎의 궁사가 유명하고
명대明代에는 종실宗室의 영권왕寧權王이 지은 궁사 107수,
같은 종실의 주정왕周定王이 지은 <원궁사元宮詞> 100수,
그리고 진종陳悰이 지은 <천계궁중사天啓宮中詞> 100수 등이 뛰어나다.
진종의 궁사는 매 수마다 상세한 주석이 있어 시 속에 담긴 내용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한층 더 흥미가 있어서 청조淸朝에 이르러 오성란吳省蘭의 <十國宮詞> 등 이것을 모방한 것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고로들로부터 들었거나 스스로 경험한 일을 읊은 것이 아니고
사서史書나 수필 등에서 취재한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진다.
또한 고래의 뛰어난 궁사를 편집한 것으로
청나라 주이존朱彛尊의 <十家宮詞>가 있다.
●궁사宮詞 궁정의 생활을 읊다/왕건王建
금전당두자각중金殿當頭紫閣重
선인장상옥부용仙人掌上玉芙蓉
태평천자조원일太平天子朝元日
오색운거가륙룡五色雲車駕六龍
황금 궁전 앞에는 자각전紫閣殿이 겹을 이루었고
신선 동상의 손바닥 위에는 불로장생의 이슬 받는 연꽃 모양의 옥쟁반
태평한 세상의 천자는 정월 초하루 천제께 참배하시려
오색찬란한 구름무늬 수레 여섯 필 용마 수레에 오르셨네.
►궁사宮詞 궁정의 생활을 주제로 읊은 시를 말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 삼소三蕭의 궁체시宮體詩가 있었으며
그 뒤에 唐代에 왕창령王昌齡과 원진元稹 등이 이와 유사한 글을 지었으나
정식으로 <宮詞>라고 하는 제목은 왕건王建의 <宮詞> 100수가 최초이다.
►자각紫閣
전설상 道敎에서 天上의 자미원紫微垣에 천제天帝가 거처하는 궁궐로 神仙들의 거처.
여기에서는 唐代의 玄元皇帝로 떠받들던 老子를 모신 조원각朝元閣.
►옥부용玉芙蓉 옥으로 芙蓉의 형상을 조각한 쟁반.
여기에서는 선인장仙人掌의 모습으로 이슬을 받아 내는 노반露盤이나 옥반玉盤.
►조원일朝元日
당대唐代에 천자가 玄元皇帝로 떠받들던 老子의 생일날에
그곳을 찾아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의식을 행하는 날.
대개 정월 초하루에 시행하였다.
►육룡六龍 여섯 마리가 끄는 수레란 뜻으로 天子를 가리키는 말.
●영화청궁詠華淸宮 화청궁을 노래하다/왕건王建
항진강남삭십정行盡江南數十程 강남에서 오는 여행길이라 수십 일이 걸리고 나서
효풍잔월입화청曉風殘月入華淸 새벽바람 남은 달빛은 화청궁으로 들어가네.
조원각상서풍급朝元閣上西風急 조원각 지붕 위로 서쪽 바람 급하더니,
도입장양작우성都入長楊作雨聲 모두가 장양나루로 파고들어 빗소리를 내는구나.
●청평조사淸平調詞 고대의 악곡인 淸平調를 읊다/이백李白
1
운상의상화상용雲想衣裳花想容
춘풍불함로화농春風拂檻露華濃
약비군옥산두견若非羣玉山頭見
회향요대월하봉會向瑤臺月下逢
빛나는 구름 보며 그의 옷이라 생각하고 고운 꽃을 보며 그의 얼굴이라 생각하네.
봄바람이 난간에 불어오니 꽃에 맺힌 이슬이 더욱 선명하네.
서왕모西王母가 살던 군옥산의 정상에서 만나든지
요대의 달빛 아래서 만난다네.
2
일지홍염로응향一枝紅艶露凝香
운우무산왕단장雲雨巫山枉斷腸
차문한궁수득사借問漢宮誰得似
가련비연의신장可憐飛燕倚新妝
붉은 모란꽃에 맺힌 이슬에서 향기가 흩어지네.
楚王과 여신이 巫山에서 사랑했던 것을 떠올리니 부질없이 애가 타네.
한나라의 궁에서 누가 양귀비처럼 아름다웠었는지를 물어보니
조비연조차도 다시 정성들여 화장해야 한다 하네.
3
명화경국양상환名花傾國兩相歡
상득군왕대소간常得君王帶笑看
해득춘풍무한한解得春風無限恨
심향정북의란간沈香亭北倚闌干
이름난 모란꽃과 나라를 놀라게 한 미인이 만나니 서로가 기뻐하네.
현종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하네.
군왕의 무한한 애타는 마음을 이해하며
사람들이 심향정의 북쪽을 향해 난간에 기대고 있네.
►청평조淸平調 고대 악곡의 이름.
개원 연간에 궁실 안에 모란이 만발하자 현종이 楊貴妃와 함께 침향정沉香亭에서
이를 구경하며 李白을 불러 <淸平調>3章을 짓도록 하여 이를 궁중의 음악 연주단인
이원제자梨園弟子들에게 음악으로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군옥산群玉山
고대 신화 속의 仙山으로 西王母가 살던 곳이라고 하며 옥이 나오는 곳
이 작품은 盛唐 시기 天寶 2년 743년 혹은 천보 3년 744년에 나온 것으로
유미唯美의 풍격을 지닌 詩 또는 詞이다.
<청평조사>는
<淸平調><淸平詞><淸平調三首><淸平詞三首><淸平調詞三首>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의 형식은 詩와 詞의 혼재 형태이다.
이를 시라고 한다면 七言의 樂府詩로 볼 수 있고
사라고 한다면 사의 추형雛形(맹아 형태)인 初期文人詞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작품은 <全唐詩>에도 수록되어 있고 <全唐五代詞>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시라고 간주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작품의 제목에 해당하는
‘청평조사’는 악보에 해당하는 사패詞牌 또는 사조詞調로
작품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이것이 단지 음악성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청평조사>를 사로도 간주할 수 없는 이유는
이것이 唐代의 사패를 수록한 <교방기敎坊記>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백의 <청평조사>는 당시 새로운 문학 형식인 사가 흥기하는 과정 속에
문인들이 사의 창작을 시도하면서 시에 사의 형식이 도입되어
양자가 공존하는 점이적인 무대에서 탄생한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사는 음악에 따라 가창하는 신흥의 문학 형식으로 중국의 문학 형식 중
가장 그 서정성을 담보하고 있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시기의 악부樂府와는 내용·형식·풍격·기법에서 상이하다.
사는 隋唐 시기에 발생했으며 연악宴樂(燕樂)을 근간으로 한다.
연악은 연회 때 연주했던 음악이다.
연악은 당시 민간의 음악인 俗樂과 이민족의 음악인
胡樂이 합치된 것이지만 호악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호악은 북위北魏와 북주北周시기에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서역 음악으로 신강新彊과 감숙甘肅을 거쳐 中原 지방까지 유입되었다.
수당 시기에는 국제적으로 무역이 발달하고 문화의 교류가 활발하던 시기로
음악의 전입과 유행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와 같은 음악적인 연원을 가진 사는
이전의 古體詩와도 다르며 당대의 近體詩와도 같지 않다.
사는 모든 작품이 음악성을 표시하는 사패 또는 사조의 명칭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는 제목이 아니고
전사塡詞(가사를 채워 넣는다는 뜻으로 작사의 개념)할 때
의거한 曲調로 악보의 명칭이다.
이러한 사는 먼저 민간에서 창작되었으며 民間詞는
진솔한 감정 노출과 현장을 목도하는 것과 같은 핍진한 묘사가 그 특징이다.
민간에서 사가 유행하면서 문인들도 사의 창작에 동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