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후루카와정원(旧古河庭園)
구 후루카와 정원(旧古河庭園)은 도쿄도(東京都) 기타구(北区) 니시가하라(西ケ原)에 있는 도립 정원이며, 1919년 후루카와재벌(古河財閥)의 후루카와 토라노스케(古河虎之助, 1887-1940) 남작(男爵)이 지은 저택으로 양관(洋館), 서양정원(西洋庭園), 일본정원(日本庭園)으로 정비되어 있다. 현재는 국유재산으로 도쿄도에서 임대하여 일반공개중이며, 장미의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1956년 개원하였으며, 30,781 평방미터의 넓이에 도 명승으로 지정되었다가, 2006년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니시가하라(西ケ原) 일대는, 동쪽은 절벽으로 바다에 닿아있고, 서쪽은 야토(谷戸) 지형으로 해산물이 풍부하여 원시취락, 패총 등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중세 니시가하라(西ケ原) 일대를 장악한 것은, 헤이안(平安) 후기 칸토오를 지배했던 미나모토 가문(源家) 세력하에 있었던 토요시마 가문(豊島氏)으로 고산죠 (後三条, 1032-1073) 일왕 때인 1070년 토요타로치카요시(豊島太郎近義)가 히라츠카죠(平塚城)를 쌓았다.
1477년 오오타 도우칸(太田道灌, 1432-1486)이 나가오 카게하루(長尾景春, 1443-1514)의 대장으로, 코마고메묘기 신사(駒込妙義神社)에 진을 치고, 히라츠카죠(平塚城)의 토시마 야스아키(豊島泰明, ?-1477)를 공격했을 때, 샤쿠지이죠(石神井城)에서 구원하러 온 동생 토시마 야스츠네(豊島泰経)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바로 이 정원 인근에서 벌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전투 결과, 400년 간 이 지역을 지배했던 도시마 가문(豊島氏)는 몰락하였고, 이 지역은 오오타 도우칸(太田道灌)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 일대는 한동안 큰 전란 없는 평화로운 채소 밭이었고, 1603년 경의 기록에도 에도 막부에 의해 니혼바시(日本橋)를 기점으로 5개 가도를 정해 가와고에 가도(川越街道), 이와츠키 가도(岩槻街道) 등이 순차적으로 정비되었다.
키타쿠시(北区史)에 따르면, 에도시대에는 소메이(染井)부터 카미코마고메(上駒込) 일대는 나무를 많이 심어서, 이와츠키 가도(岩槻街道)를 따라 니시가하라 보탄엔(西ケ原牡丹園) 왕실용 정원이 있었다고 한다. 메이지 초기, 니시가하라에 기슈번사(紀州藩士) 다테 무네히로(伊達宗広,1802-1877)의 6남이자 정치가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 1844-1897)가 저택을 지었는데, 그와 친분이 있었던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1840-1931)도 1870년 경, 아스카야마(飛鳥山) 인근 니시가하라니쵸메(西ケ原二丁目)에 저택을 구입했다. 무네미츠(宗光)에게는 예전 교토(京都) 이즈츠야(井筒屋) 오노구미(小野組) 시절 때부터 친분이 있었던 후루카와 이치베이(古河市兵衛, 1832-1903, 훗날 후루카와 재벌(古河財閥)의 창업자)가 있었고, 자식이 없었던 이치베이(市兵衛) 차남인 쥰키치(潤吉)를 양자로 주기로 약속했었다고 한다. 쥰키치(潤吉, 1870-1905)는 1870년 도쿄에서 태어나, 14살때 후루카와 가문(古河家)에 입양되어, 18세에 유학해서 코넬대학교에 입학했고, 귀국 후 이치베이(市兵衛)의 가업을 이었다.
쥰키치(潤吉)는 일본 최초의 공해 사건인 아시오 광독사건(足尾鉱毒事件)을 일으킨 후루카와 광업(古河鉱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금조달을 성공하는 등 이치베이(市兵衛)의 신임을 얻었지만, 허약한 체질에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이치베이(市兵衛)가 만년에 얻은 친아들 토라노스케(虎之助,1887-1940)에게 가독(家督)을 넘겼고 35살 무렵 사장에서 물러나 니시가하라(西ケ原) 저택으로 물러나 요양에 힘쓰다 35세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1887년 이치베이(市兵衛)가 측실에서 얻은 친아들 토라노스케(虎之助)는 1903년 미국 콜럼비아 대학에 유학했다가, 쥰키치(潤吉)가 죽자 귀국하여 후루카와 광업(古河鉱業)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1915년 토라노스케(虎之助)는 약관의 나이에 남작 작위를 받고, 1차 세계대전으로 회사가 급성장하면서 대외 교역에도 크게 성공하였고, 1917년에는 후루카와 그룹을 발족시켜, 후루카와재벌(古河財閥) 총수로 제계에 진출했다.
1914년 당시엔 재벌마다 경쟁적으로 호화로운 대저택을 지었고, 토라노스케(虎之助) 또한 후루카와 가문(古河家)의 본가를 짓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수목이 무성한 소박한 집과 인근 토지를 추가로 매입하였는데, 가에이(嘉永) 연간(1848-1854)의 지도에서 토가와 하리마노카미(戸川播磨守)의 시모야시키(下屋敷)로 표시된 곳으로, 야토가와(谷戸川) 쪽 사면을 포함 1만평에 달했다. 건물의 설계는 당시 평판이 높았던 건축가 죠사이어 콘더에게 맡겼는데, 콘더는 그때까지 우에노박물관(上野博物館, 1882), 로쿠에이칸(鹿鳴館, 1883), 이와사키 저택(岩崎邸, 1896), 미츠이크럽(三井倶楽部, 1913) 등의 설계를 연이어 맡으며 유명해졌었다. 후루카와 저택( 古河邸)은 1917년 완공되어, 교토(京都)의 조경사로 당대 제일의 명성을 떨쳤던 우에지(植治) 오가와 지헤이(小川治兵衛, 1860-1933)에게 의뢰하여 정원을 조성하였는데, 건물 준공 이후에 2년 더 걸려 1919년에서야 완성되었다. 당대 저명한 콘더 설계의 본가와 나오지의 조경으로 완성된 정원은 당시 건축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온 귀중한 유산이다.
저택은 영국식 2층 건물로 연면적 450평에 1층 응접실, 식당, 서재는 양식으로 꾸며져 있고, 2층은 일본식으로 지어졌다. 후루카와 토라노스케(古河虎之助)의 전기에 의하면, '그대가 오랜 기간 많은 내외 귀빈을 초대해 교류를 해온 곳은 이 저택이었고, 칸토 대지진 때 구역 전체를 개방하여 피난자를 구호한 곳은 이 정원이었다. 중략.'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후, 경기가 안 좋아지고, 오시오 구리광산(押尾銅山)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났으며, 일본 경제에도 불황이 찾아왔다. 거기에 회사의 지원을 받아온 하라 다카시(原敬, 1856-1921)가 암살당하고, 양자 이치타로(市太郎)마저 6세 나이로 요절하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던 토라노스케(虎之助)는 요양하면서 몸을 추스려 1922년 재기하였고, 10년간 살았던 니시가하라(西ケ原)의 저택은 주로 영빈관(迎賓館)으로 활용하고, 주거는 신주쿠 와카마츠쵸(若松町) 쪽으로 옮겼다.
그 뒤 후루카와 가문(古河家)의 가업을 이은 것은 사이고 쥬우쥰(西郷従純, 1904-1967)로 원래는 1904년 사이고 쥬우토쿠(西郷従徳, 1878-1946)의 차남으로 도쿄 메구로(目黒)에서 태어나, 미국 하버드 대학에 유학하였고, 1929년 귀국하여 후루카와 합명회사(古河合名会社)에 입사했다. 1931년 28세 때, 후루카와 가문(古河家)의 양자가 되었는데, 사이고 쥬우도우(西郷従道,1843-1902)의 딸 후지코(不二子)가 토라노스케(虎之助)에게 시집갔기 때무에 두 사람은 모자 관계 이전에 이미 고모-조카 관계이기도 했다. 이후 쥬우쥰(従純)은 후루카와 광업(古河鉱業)의 부사장으로 취임했고, 1940년 토라노스케(虎之助)가 54세 나이로 죽자, 쥬우쥰(従純)은 37세에 후루카와 계열회사(古河系列会社)의 사장이 되었다. 하지만, 전황이 시시각각 악화되면서, 사원들 뿐 만 아니라 쥬우쥰(従純)도 징집대상이 되어, 1945년 2월 동부 제 17부대에 입대했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어 그 해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면서 2차대전은 막을 내렸다.
토라노스케(虎之助)가 니시가하라(西ケ原)에 머물었던 이래, 주로 고객 접대에 이용되었지만, 1939년 중일전쟁 무렵에는, 난징 신정부의 대표적인 친일파 정치가 왕징웨이(汪兆銘, 1883-1944)를 숨겨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후루카와 저택(古河邸)은 비상시 피난할 수 있는 닌자야시키(忍者屋敷)와도 같은 비밀구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전쟁말기에 이르면, 타키노가와 소학교(滝野川小学校)에 동부군관구 관할하의 규슈 9사단 일부가 주둔하면서 후루카와저택(古河邸)은 연대본부 장교숙소로 접수되었다. 종전의 혼란 중에 다행히 저택과 정원에 피해는 경미했지만, 재벌가족으로 관리되어 연합군 진주를 위해 저택이 접수되어 영국 대사관의 무관 독신숙소로 사용되었다가 1952년에 이르러서야 접수해제되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승국의 점령정책이 본격화하면서, 후루카와 가문(古河家)은 고난을 맞이했다. 1945년 쥬우쥰(従純)은 후루카와 광업(古河鉱業)의 사장에서 내려왔고, 1946년에는 재벌가족(財閥家族)으로 지정되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서 1951년 해제될 때까지 회사 경영에는 일체 간여하지 못했다. 1946년에는 저택이 진주군에 의해 접수되어, 1952년 해제될 때까지, 영국대사관 부속 무관독신숙소가 되었다. 1947년에는 재산세 추징, 토라노스케(虎之助)의 유산 상속세 미납에 따른 추징이 뒤따라, 결국 자산의 대부분을 처분하면서까지 납입해야 했다. 같은 해 7월 니시가하라(西ケ原邸) 저택을 물납으로 대장성에 수납하여, 이후 니시가하라저택은 관동 재무국(関東財務局)의 소관이 되었다. 1952년 접수 해제되면서 대장성에 반환되면서 후루카와 가문을 상대로 불하 절차에 들어가긴 했지만, 이미 후루카와 가문에서는 막대한 계약 보증금을 댈 자금이 없었고, 결국 1953년 불하 계약 진행은 중단되었다.
1952년, 키타구(北区) 구청장 타카기 소우키치(高木惣六, 1893-1979)와 지역 소년애호부인회 등 여러 지방유지들로 구성된 개방촉진기성회(開放促進期成会)가 결성되어, 녹음이 무성한 구 후루카와 저택(旧古河家) 1만평을 도시공원으로 개방해주기를 요청하였다. 1953년 도쿄도는 구 후루카와 저택(旧古河家)의 문화재적 가치로 인정하여 도시공원용지로서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대장성에 임대 요청하게 되었다. 동시에, 키타구(北区) 아스카야마 공원(飛鳥山公園)에서는 전 구민대회가 열려 도쿄도 뿐 만 아니라 대장성으로 하여금 도시공원으로 개방하는 데 나서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에 따라, 1955년, 대장성은 도쿄도에 임대를 결정하고 사용 대차 계약을 체결했다.
그때까지 양관(洋館)을 비롯한 건물들은 지난 30년간 방치되었던 탓에 귀신의 집(お化け屋敷)로 불렸을 정도로 황폐화되었었고, 1981년 간행되었던 키타무라 노부마사(北村信正, 1914-2010)의 '구 후루카와 정원(旧古河庭園)'에 따르면, 양관은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고 하였고, 실제로 담쟁이덩굴에 덮인 양옥 사진도 게재되어 있기도 하다. 1982년 도쿄도 도명승으로 지정되면서, 1989년까지 7년간 복구공사가 진행되어 현재의 상태로 복원되었고, 2006년에는, 다이쇼(大正) 시대 초기의 양식을 잘 간직한 정원을 포함하여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1917년 준공된 후루카와 저택은 연면적 414평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외관은 Scottish Baronial 양식을 지향하고 있으며, 후루카와 토라노스케(古河虎之助)가 콘더에 설계를 의뢰한 시점은 명확하지 않으나, 1914년 경에는 이미 양관의 설계가 진행되고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에 벽돌조 벽체를 검푸른 마나즈루산(真鶴産) 혼코마츠이시(本小松石, 일종의 안산암)로 쌓은 석단이 특징적이다.
남쪽의 정원에서 외관을 바라보면, 좌우대칭에 가깝고, 앙옆은 맞배지붕에, 중앙 1층엔 3개의 아치를 두었으며, 2층에는 난간을 두른 베란다가 설치되어 있고, 지붕에는 도머 창이 설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야성미와 중후함을 동시에 갖춘 스코틀랜드 산장 풍의 운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내부로 들어가면 현관 스테인드글라스 속에 후루카와가문(古河家)의 문장인 오니츠타(鬼蔦) 문양을 볼 수 있다.
1층에는 식당, 당구실, 흡연실 등 접객을 위한 시설이 주이며, 대식당의 벽면에는 진홍색 커튼이 있고, 거대한 난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천정에는 파인애플, 사과 등 과일 장식이 보이고, 응접실에는 장미 모티브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2층은 가족 거실 등 사적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홀과 침실 빼고는 모두 다다미 방이다. 각 다다미 방과 홀은 서양식 문으로 구분되어 있고, 그 사이는 마루가 있으며, 다시 장지문(障子)과 후스마(襖)를 거쳐 다다미 방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부츠마(仏間)과 전실(前室) 사이에 선사(禅寺)를 연상하게 하는 화등창풍(火灯窓風)의 출입구가 있다. 또한, 갸쿠마(客間)는 쇼인즈쿠리(書院造)로, 일본 양식과 서양 풍의 공존을 위한 콘더의 고심이 엿보인다. 같은 콘더 설계의 건출물인 구 이아사키 저택(旧岩崎邸)이 일본식 방은 일본관(和館)에, 양실의 양관(洋館)에 둔 병렬식 설계인 데 반해, 후루카와 저택은 양관 안에 일본식 방을 두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양식 정원 전체적으로는 이탈리아 풍의 경사면에 계단형 테라스, 계단, 수반 등을 조성하여 입체적인 이탈리아식 정원 형태로 조성되어 있지만, 테라스 내부는 기하학적인 구성이 평면 위에 배치되어 있는 프랑스 정원의 기법이 융합되어 있고, 2단부터 좌우대칭을 약간 벗어난 구성으로 설계되어, 일본정원과의 조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비대칭 요소를 일부 가미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정원은 양관, 양식정원의 완성이 이어서, 1919년에 완성되었다. 교토의 조경사 오가와지헤에(小川治兵衛)의 설계이며, 저택 바깥 공터의 경사면 가장 아래단에 위치한 지천회유식 정원이다. 울참한 수림 속에 흘려쓴 심(心) 자 형상의 신지이케(心字池)를 중심으로, 급경사를 이용한 대폭포, 고산수를 도입한 고폭포, 대형 유키미 등롱(雪見灯籠) 등이 배치되어 있다.
심(心) 자의 초서체 글씨를 본딴 신지이케(心字池)는, 쿠라마이시(鞍馬石)와 이요이시(伊予石) 등으로 만들었으며, 연못을 바라보는 후나츠키이시(舟付石), 정면에는 아라이소(荒磯), 유키미도로(雪見灯籠), 카레타키(枯滝), 이시구미(石組み), 뒤쪽으로 츠키야마(築山)가 놓여 있다. 카레타키(枯滝)는 계곡으로부터 신지이케(心字池)의 스하마(州浜) 뒤쪽으로 물이 흘러나옴을 형상화한 것이다. 오오타키(大滝)는 정원 내에서 가장 경사가 긒한 곳을 깎아 절벽로 삼아 십여미터의 낙차로 만든 것으로, 구불구불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로부터 유입된 폭포는 마침내 깊은 용소에 떨어진다. 신지이케(心字池)와 오오타키(大滝) 사이에는 팔작지붕의 다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