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jiyong.or.kr/html/jiyong/festival/festival_03_02.html
지용신인문학상, 권수진 시인의 놀이터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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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회 수상작
슬픔 / 이동열
무심천 둑길 발자국마다
화창이 구겨진다
할머니 머리카락이 날아온 꽃송이를 피한다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뒤
리어카 손잡이를 허리에 심는다.
차곡차곡 접은 종이 박스가 실렸다
날개 깨진 선풍기가 성기게 묶은 밧줄에 매달린다
머리 위를 지나간 꽃잎이 시간의 속도로 날아간다
물 따라 흘러간 꽃잎들은 어디에 있을까
짧은 치마를 입은 다리 긴 여자가 지나간다
파마머리 여자가 늘어진 가지를 잡고 할머니를 본다
할머니의 굽은 허리가 바퀴 주저앉은 리어카를 깊게 당긴다
분홍꽃잎이 멍든다
할머니는 걸음걸음 꽃잎을 그린다
28회 수상작
목어/이영미
헤엄쳐서라도 뭍 너머 섬과 섬 건널 만큼
눌러도 솟구치는 바람, 비늘로 덮을 만큼
거대해져라 주문을 걸었으나
제 살 태워 얻은 것이 겨우 나무 몸뚱이라
삼켜 채웠던 비릿한 한 살이, 게워낸 텅 빈속
뼈대 긁어 귀 열라 들려주는 붉은 속울음
티끌 걷어내려 아가미 시리도록 울어 보는 것인데
바당보름 불어 건져올린 심해의 말씀
눈 푸른 운수납자 깨워 풀어가는 님 앞에서
더 갖지 못해 속 끓이던 욕심 들킨 양
미안하오 미안하오, 오래된 기약만 되뇌며
늙었으나 견고한 결 주름 매 만지던 봄날
화암사 우화루 마당이 그토록 환했던 이유는
오색 옷 한 벌 걸치지 못했어도 잠 못 들며
꽃비 나긋이 바라보던 님의 그 눈빛 때문
27회 수상작
배웅 / 박청환
떨어지지 않겠다고 버팅기며 목놓아 울어대는 통에
십 리 오솔길 급기야 어미가 동행했다
장날 마실 가듯
어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풀 냄새 맡다가
나비 좇다가
어느 순간 흠칫 놀라 겅중겅중 뛰어와
마른 젖통 툭툭 치받던 길
아가, 주인 인상 좋아 뵈더라
외양간 북데기도 푸짐하더구나
말 잘 듣고... 잘 살거라
낯선 외양간에 울음 떼어 놓고
돌아선 울음
달빛 앞세워 새끼 발자국
되밟아 오는 길
큰 눈에 별 방울 뚝뚝
26회 수상작
아파트 인드라망/이선
차 한 잔 들고 창가로 가면
맞은편 101동이 성큼 다가온다
먼 나라에서 내려오신 함석지붕들
푸른 하늘 모래알 이야기를 받아 적느라
자글자글 삼매에 빠졌다
꼼꼼하게 써 내려간 경문들
구절구절 기왓장마다
흐르는 법문이 팔만이겠다
이렇게 우리 마주 보는 거울이듯
모든 동과 세대들
주고받는 선문답이 무량이겠다
구구절절 날아드는 비둘기들
벽에 갇힌 창문들도 틈틈이 귀를 열고
질서정연하게 밖으로 향해 있다
한 치 흔들림 없는 수평의 감각으로
층층이 견뎌내고 있을 천장들
모두 하나같이 바닥으로 존재할 터
내가 딛고 있는 이 자리
아래층에서 받쳐주듯
위층 이웃들 고단한 몸 뉠 수 있도록
내 생의 천장 높이 받드는 일
누겁의 업장을 녹이듯
하루하루 달게 받들어 모시는 일
삼키고 삼켜도 끓어오르는 솥단지 삼독을
식어 버린 한 모금의 찻물로 달래는 지금은
녹음이 독물처럼 퍼져나가는 상심의 계절
저 멀리 하늘가 햇살 비추이는 아파트들
수미산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다
25회 수상작
알츠하이머 / 김혜강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는
사철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이 하얀 마을에는
기억으로 가던 길들도
눈으로 덮이어
옛날마저
하얀색이다
눈이 소복
쌓이는 마을에서
온 몸으로 그림을
그리시는 어머니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그림을 지우고
지우고 그리신다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려
바구니에 담을 추억도
색연필 같은 미래도 없어
하얗게 어머니는
수시로
태어난다
24회 수상작
순한 골목 / 박한
골목은 왜 이리 얌전한지
자꾸만 쓰다듬고 싶어요
숨을 쉬는데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손가락 마디를 보면
내가 헤맸던 길목을 알 수 있죠
매일 걸어 다녀도
달이 지는 법은 배울 수가 없어요
사실 골목은 지붕들이 기르는 것이라서
부르는 이름들이 달라요
고장 난 컴퓨터였다가
산지 직송 고등어였다가
김숙자 씨였다가
지현이 엄마였다가
가끔은 현석아 놀자가 돼요
왜 골목이
밤이면 군데군데 멍이 드는지
술 취해 돌아오는 일용직
김기석씨를 보면 알죠
그래도 골목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쫓기는 사람들이
모두 골목으로 숨어드는지는
좁아야만 이해하는 습성
나도 쫓아오는 생활을 따돌리고
골목에서 뒷발로만 서 봅니다
창밖에선 내가 걸어가고 있고요
멀리 돌아갈 수 없는
직선이 없는 지도는
여기에서 발명 되었습니다
깨우지 마세요
난폭하진 않지만 겁이 많은 사람들이
불빛을 말고 숨어버릴지도 몰라요
쫑긋 세운 옥상들이 바람을 듣고 있습니다
23회 수상작
당선작-호른 부는 아침 / 강성원
붉은 바닷가의 집
녹색 커튼을 살며시 열어보는 아침 해
내려다보는 백사장엔 모시조개가 제 살을 비우고
날아오를 듯 흰나비로 앉아 있다
먼 길 가려는 바람은 물너울을 타고 온다
모래톱 위를 종종종 걷는 물떼새
안개는 빨판을 달고 배 한 척 붙들어 놓지를 않는다
길을 내려가 보면 바다가 보여주는 손바닥
잠든 바위를 깨우다 시퍼렇게 멍이 다 들었다
파도는 모래사장에 음표를 새겨두고
도레시 라솔미 오르내린다
바다가 들려주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음악
사랑이란 단어를 적어 넣으면
오선지 위에서 저토록 따뜻하게
꽃으로 피는 말이 있을까
바다를 향해 걸어가다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춘 해안선
메꽃이 피어 호른을 분다
맨 처음 입술을 열 때 첫사랑이 저랬을 것이다
한 잎 수줍은 입술이 파르르 떨다
천천히 입을 오므린다
22회 수상작
포플러 / 한진수
상처입은 찌르레기 지저귀고
별들은 울고 또 서럽게 울고
봄이 오면 불어오는 산들내음을 나는 사랑했네
비둘기와 따스한 햇살을, 꽃다발을
그러면 나는 해가 빛나는 호수처럼 너를 사랑해
너는 말없는 포플러 나무처럼 편안하지
밤이와 그 자리에 찌르레기 지저귀고
별들은 다시 아프고 서럽게 울고
순진했던 나는 믿었네
언젠가 아름다운 별빛은 삶을 구원하리라고
그래서 고요한 봄의 포플러와 같은 너를 사랑했네
싱그런 봄바람처럼
싱그런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너를 사랑했네
순진하게도 나는 믿었네
별빛이 삶을 구원하리라
내 가슴 속의 노래하던 새가 죽고
악기의 현이 끊어질 때까지
21회 수상작
죽변* / 배정훈
세죽細竹이 늘어선 마을 어귀
어린 백구가 강동거리며 뛰놀고
주인 모를 고깃배들
붉고 푸른 깃발이 비늘처럼 결을 타고 운다.
수족관마다 산호珊瑚 마냥 쌓인 게들
울긋한 소주 향내와 같이 타는 겨울 바다
더불어 붉어지는 한 세상을 지켜보며
술 취한 어부들
때로는 수줍었고 번잡했던
삶의 그물을 거둔다.
바다야 온전하겠지만
바람 많은 동네에 터 잡고 낚는 세월은 고래처럼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
부네 손등에는 손금이 놓이고
짓지 않아도 될 쓴 근심이 수의壽衣처럼 짜였더라.
창자처럼 이어진 골목들
일렁이는 불빛들
애 끓는 단장斷腸도 한 시절인데
창을 두드리는 주먹 쥔 해풍海風
부대끼는 댓닙 그 새로
바다의 눈시울이 붉다.
* 경북 울진군의 한 지방
20회 수상작
겨울, 미술관 / 이상은
로트렉의 말이 웃고 있다
샤갈의 닭이 울고 있다
칸딘스키는 알 수 없는 음악을 연주한다
마티스는 수줍음을 숨기고 강렬하다
바에서 만난 남자가 전시회 티켓을 주었다
친구에게 자랑하며 찾아간 덕수궁은 겨울 날씨에 치여 쓸쓸했다
내가 걸려있는 벽이 보이는가
사람들은 날 보지 않고 지나간다
봐주세요, 봐주세요, 나의 향기를 맡으세요!
단정한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한다
겨울, 미술관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엄마를 찾는다
엄마, 엄마가 늙는 게 싫어
더 이상 늙지 마세요
난 엄마에게 젊어 보이는 선글라스를 끼운다
엄마와 내가 손잡고 미술관에 걸어 들어간다
19회 수상작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 / 김광민
미안해요, 당신을 윤리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신발을 신발장에만 가두려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수학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모든 걸 계산하려고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지루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국어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을 그렇고 그런 이야기 속에 살게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심심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음악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눈에 들리지 않는 음표들만 늘어놓았으니
당신은 얼마나 짜증났을까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은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인데
당신은 책이 아닌 이렇게 내 앞에 서 있는데
나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죠
오, 정말 미안해요
또다시 당신에게서 답을 구하려 했네요
18회 수상작
쥐, 세입자들 / 민슬기
남의 집에 구멍을 빌려 지으면서 시작된 식탐이다
무엇이든 훔쳐야 직성이 풀리는 업보다
어둠을 갉아먹으며 사람들의 은밀한 말소리를 귀담아 듣는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으므로 속절없이 칸칸이 들어찬 어둠을 헤맨다
침묵이 답이라 믿으며 썩은 음식물 냄새로 묵묵히 이동할 뿐이다
이따금씩 고양이 소리에 눈을 번뜩이며 살기를 맛본다
눈알은 갖고 있으나 몽유하는 혼령처럼 스스로를 볼 수 없다
끊임없이 헤매도 변하지 않는 역마살
어디서 시작되고 끝은 어디쯤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풀벌레가 뱉어내는 소리는 비명 같다
가느다란 수염은 한껏 거추장스러운 자존심이다
진술실의 조명처럼 가로등은 꺼질 줄 모르고
쥐가 가는 길을 탐색한다
달이 한 겹씩 탈피를 해도 여전히 같은 곳을 뒹굴 듯
보이지 않는 틀 속에서 질주한다
치부를 드러낸 채 무방비 상태로 널브러진 쓰레기봉투 위에
까닭 없이 올라서 보기도 하며 허무를 베어 먹는다
어쩌면 도사리고 있는 덫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도는
시한부 목숨일지도 긴 꼬리로 지나온 길을 곱씹으며
막다른 길로 질주한다 막다른 길이 집이다
17회 수상작
청주역 / 박재근
누구는 기차가 아침 여덟시에 떠난다는데,
우리가 탄 기차는 자정에 떠납니다.
부다페스트행 기차는 지금쯤 어디를
덜커덩덜커덩 달리고 있을까요.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하는 기차는
지금 막 울란우데역을 통과합니다.
낭만이 연인의 적이라고 말하면
유머일까요, 아니면 실언일까요.
기차는 방랑자만을 태우는 고독한
궤도라는데 그걸 누가 말리겠어요.
집시, 세계 집시들이 별자리를 보며
이동하는 시각에 우리가 탄 기차는
청주역을 떠나 우주로 향합니다.
아, 보세요. 우주에는 신의 전설이
깃든 은하수가 푸르게 범람합니다.
우리는 두 마리 양이 되어 그까짓
태양은 누구에게 가지라고 함부로
줘 버리고 메에메에…… 울음인지,
대화인지, 함성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우주를 달립니다.
그 사이 지상에서는 함께 떠나지
못한 역마살이 등대로 명멸합니다.
기차가 우주를 가르는 동안 철새가
고단한 날개를 접고 잠을 청합니다.
그때 우리의 기차도 삶은 계란 같은
보름달을 돌아 금성으로 치닫습니다.
들뜬 마음이 고즈넉해지는 순간,
이제 우리는 일상의 흔적을 지웁니다.
참, 당신의 기차는 몇 시에 떠납니까.
당신의 가슴 속에는 레일이 있습니까.
당신에게는 어깨를 기대고 싶은,
베텔기우스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장 짐을 챙겨 떠나십시오.
기차는 매일 자정에 청주역을 떠납니다.
*베텔기우스: 오리온자리 알파별로 ‘거인의 어깨’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유래.
16회 수상작
내일은 맑음 / 이기호
모시등걸에 찬바람이 일면 수수알도 붉어갔다
텅 빈 들녘은 눈이 해맑고 빈 볏단들은 막사처럼 서 있었다
우렁이들은 논두렁 진흙 속에서 둥싯거렸다
상지냇가 소금쟁이 긴 다리 밑으로 새털구름이 빠져나갈 때
고무신 뒤축은 오포소리 따라 자꾸 벗겨지고
점심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와 물주전자 든 나의 그림자가
삽다리를 따라 빠르게 흘렀다
새참이 나간 부엌은 매캐한 연기에 휩싸이고
양재기에 굴 무나물을 볶던 아궁이는
잔뜩 쓸어 넣은 왕겨에 속이 더부룩해졌다
할아버지는 눈이 매워 장죽에 불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 나오고
몽당 수수비와 부지깽이는 모처럼 화상(火傷)의 몸을 쉬고 있었다
노른 들녘의 해는 일찍 져서 홀연 귀뚜리의 노래 들리고
먼 하늘에서는 별들의 점등이 시작되었다
용수 안으로 밥알이 동동 뜨는 마을에서는 술처럼 시간이 익어
밤은 점점 까매지자 어머니는 우렁이와 양재기를 앞세우고
아버지별을 찾아 은하로 떠났다
문득 낯설어지는 풀벌레소리에 창가로 다가가는 마음
오래 묵은 가을밤이 가라앉았다
내 별이 다 보였다
15회 수상작
개심사 애기똥풀 / 황인산
개심사 들머리 애기똥풀은 모두 옷을 벗고 산다.
솔밭에서 내려온 멧돼지 일가 헤집는 바람에 설사병이 났다.
개중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얼굴 마주보며 괴춤만 내리고 쉬를 하고도 있지만
무리무리 옷을 훌렁 벗어젖히고 부끄러움도 모른 채 물찌똥을 누고 있다.
사천왕문 추녀 밑에서도 노스님 쉬어 가던 너른 바위 옆에서도
산길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노란 똥물을 갈기고 있다.
부글부글 끓는 배를 옷 속에 감추고 산문을 두드린다.
이 문만 들어서면 아침까지 찌들었던 마음도 애기똥풀 되어 모두 해소될 것 같다.
산 아래서부터 진달래가 산불을 놓아 젊은 비구니 얼굴을 붉게 물들인 지가 언제인데
절집 위 옹달샘 풀숲까지 노란 산불에 타들어 가고 있다.
개심사 해우소는 천 길이나 깊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요동치는 배를 잡고 허리띠를 풀며 뛰어 들어갔지만 이런 낭패가 있나, 깊이가 몇 길은 되어 보이는데 얼기설기 판자로 바닥만 엮어 놓고 군데군데 구멍만 뚫어 놓았지 칸막이가 없다.
엉거주춤 볼일 보던 사람, 앉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 것도 아닌 자세로 오줌을 누는 사람들의 시선이 참 어정쩡하다.
몇몇의 눈길이 동지애를 느끼며 같은 자세를 취하길 원하였지만 안사부인 볼일 보는 화장실을 열어본 것처럼 놀라 아랫배를 내밀고 엉덩이에 댄 두 손에 힘을 주고 나왔다.
천 년 전 처음 이곳에 볼일을 본 스님은 자꾸 다시 들어오라 하는 것 같은데
보잘 것 없는 내 아랫도리 하나로 하늘도, 가냘픈 애기똥에 기댄 마음도 옷을 벗지 못한다.
개심사를 감싸고 있는 상왕산은 노란 산불에 타들어 가고 옆 칸에서 나오다 눈길 마주친 젊은 비구니의 얼굴엔 진달래 산불이 다시 옮아 붙고 있다.
14회 수상작
4월 / 정영애
사랑을 한 적 있었네
수세기 전에 일어났던 연애가 부활되었네
꽃이 지듯 나를 버릴 결심을
그때 했네
모자란 나이를 이어가며
서둘러 늙고 싶었네
사랑은 황폐했지만
죄 짓는 스무 살은 아름다웠네
자주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곤 했었네
활활 불 지르고 싶었네
나를 엎지르고 싶었네
불쏘시개로 희박해져가는 이름
일으켜 세우고 싶었네
그을린 머리채로 맹세하고 싶었네
나이를 먹지 않는 그리움이
지루한 생에 그림을 그리네
기억은 핏줄처럼 돌아
길 밖에 있는 스무 살, 아직 풋풋하네
길어진 나이를 끊어내며
청년처럼 걸어가면
다시
필사적인 사랑이 시작될까 두근거리네
습지 속 억새처럼
우리 끝내 늙지 못하네
13회 수상작
왜 그랬나요? / 이수진
길바닥에 누워버린 들꽃처럼
바람에 지쳐버린 나무처럼
짐도 없지. 짐도 없지.
그 저 그저 살아온 거지.
버릴 것도 없고
이룰 것도 없고
배 따뜻하면 만족하지.
더 딘 더딘 아이처럼
발끝마다 가시가 솟아나도
울면 그만이지. 울면 그만이지.
얼음 속에 눈 녹아 들어가듯
추운 마음 익숙하여
울 수도 없었지.
그저 흉내 낸 거겠지.
시계바늘 돌아가듯
익숙한 하루태엽들
버젓이 내게 감기며
하루하루 노래하며 지내는
베짱이 신세였지.
그래 그게 나였지.
12회 수상작
우리집에 왜 왔니 / 이향미
어둠을 파고 시궁쥐 눈깔 같은 봉숭아 씨앗을 심을래요 모르는 집 창문에 애절히 피어나 모르는 그들을 울게 할래요 봉숭앗빛 뺨을 가진 어린 손톱에 고운 핏물을 묻힐래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서둘러야 해요 나를 통과해 가는 그대의 눈을 볼래요 너무 오래 견딘 상처는 아물지 않아요 몹시 처량해진 나는 모르는 집 창문 밑에서 울 거예요 당신을 부르며 울 때 사람들은 어두워져요
문이 닫혀요
이렇게 부질없는 이야기는 처음 해봐요 나는 늘 술래이고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해요 가위바위보가 문제에요 나는 주먹만 쥐고 있거든요 아무도 내게 악수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요 당신도 곧잘 숨는다는 걸 알아요 이제는 내가 숨을래요 꽃 피지 않는 계절에 오래도록 갇혀있을 거예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봉숭아꽃이 만발했어요 보세요 정말 내가 모르는 집이에요 창문 밑에 피어난 저 붉은 봉숭아! 무슨 꽃은 봉숭아꽃이어야 해요 당신은 봉숭아꽃을 찾으러 온 거예요 나는, 나는 꽃 피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찾지 못해요 문은 열리지 않아요
11회 수상작
대작 / 현택훈
국밥에 소주를 마시니
새별별이 떴다야
택실 기다리는 저 사람들도
노래 소리가 작아졌군
가로등은 너무 밝아서
고갤 숙이고 있는 것 같아
달리는 새벽바람이
아침신문을 스치네
너는 날 다시
새벽으로 데리고 왔어야
등 굽은 청소미화원은
수도승처럼 거룩하지 않은가
국밥집 유리창 앞에 앉은
새벽 거리가 내게
눈물 같은
소주를 또 붓고,
10회 수상작
나무는 / 김정순
나뭇잎이 흔들릴 때
가만히 그 속으로 따라가 본다
이파리가 흔들리기까지
먼저 가지가, 줄기가
뿌리를 묻고 있는 저 땅이
얼마나 많은 날을 삭아내려야 했는지
가볍게 흔들리는 것 뒤에는 언제나
아프게 견딘 세월이 감춰저 있는 것을
푸르게 날을 세우고 있다고
외로움이 없었겠는가
허풍으로 길 하나 내기 위해
초승달 돌은 하늘에 가슴을 풀어 놓고
얼마나 몸서리를 쳤는지
돌아앉아 숨 고르는 소리에
발 아래가 술렁거리고, 서쪽 하늘로
수만 마리의 새가 한꺼번에 날아오른다
그러면 나무는
제 한숨을
나이테 속에 꼭꼭 태워 넣고 섰을 뿐
9회 수상작
생의 철학 / 김은정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
.
.
오늘 갑자기 이 시가 계속 되뇌어졌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나는 겨울의 한 가운데서......그리고 인생의 반토막 쯤 되는 곳에서 시를 쓴다.
살고 죽고, 싸우고 웃고 하는 것들이 다 남의 일만 같고, 나는 영악하지도 무르지도 못한 채
세상을 애초에 던져진 모습 그대로 살아내고 있다.
어떤 날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따스한 날이거나,
구름 그득 끼어 흐린 날이거나, 비나 눈이 마른 뜰 앞으로 훵 지나가는 날이면은
이대로 살아주자, 그냥 이대로 살아주자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별도 쨍하게 차가운 날 저녁이나 밤, 따뜻한 이불을 펴고 누워 말없는 천장을 보며
‘나는 나의 주인인가’하고 묻는 때도 있다. 그런가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 쯤,
묵묵히 벽을 지나가던 무늬들이 "아니야"라고 진실같은 소리를 내곤 하는데
그만 나는 울컥해져서 혼자 울기도 그렇고, 가만히 있기도 겸연쩍어져서는 그냥 잠을 청한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나는 검은 밤의 한가운데서.......그리고 내 생의 마지막 날 같이 느껴지는 어둠 속에서
잠을 잃은 두 눈을 껌뻑거린다.
지나간 날들은 다 용서하고 잊어주고 하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예예 고개를 조아리다가도,
나는 아직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또 혼자 시큰둥한 마음인데,
조그만 방 안 나만 홀로 누워, 보는 사람도 없는데 울기도 그렇고 하여 맥없이 다시 잠을 청해 본다.
새벽은 길고도 멀리 있고, 나는 아무 할 말 없이, 밤이 외로운 신발을 신고 떠도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8회 수상작
낙타가 있는 육교2 / 김미영
그 육교 위에는 손수건만한 사막 하나 있다 하모니카 부는 늙은
낙타와 눈먼 여자 혼자 온종일 노래 부르는 사막이 있다 다 낡은
스피커 한대와 동전 담긴 찌그러진 양은 냄비 하나와 냄새 나는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검은 선글라스 낀 여자와 등 굽은
낙타 한마리 있다 이미지의 <열풍>이 휘몰아 치는 그 사막을
온종일 걸어가는 카라반 행렬들은 이따금 우그러진 냄비에
어린 빗물을 오아시스처럼 들여다 보고 지나간다 높은 빌딩들
선인장처럼 우거진 육교 위, 공중 높이 매달린 전광판 사막 속으로
벤츠 한대 사라지는 오후 즈음이면 온종일 사막을 걸어온 지친
두사람을 황사바람 날리는 육교에서 사라지고
길 건너편 타클라마칸 노래방 속으로 비틀거리는 두 사내가
등굽은 낙타처럼 어두운 지하 階段(계단)속으로 사라진다
7회 수상작
이농 / 박옥실
한낮이 기울도록
트럭은 오지 않았습니다.
벌써 몇 시간 째
흩날리는 흙먼지 속에 서 있습니다.
하르르, 하르르 몸 눕히는
복사꽃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 떠나도 될까요?
아프게 버린 세월이
묵정발 숙대궁처럼 흔들립니다.
견디지 못한 세월 너머
바람은 다시 흙먼지를 뿌리고
춘양, 꼬치비재, 새발, 복상터, ....
버려야 할 이름들이 마음을 붙듭니다.
그러나, 이젠 떠나야겠지요.
내 가야할 그 곳에도
느티나무는 큰 숲을 이루고
저녁이면 성냥감 만한 집들이
환히 불 켜고 있을 테니까요
6회 수상작
만춘 / 장재성
아무 때나 오지 마세요.
찬바람으로
성급히 다가서지 마세요.
당신이 좀 한가로워진다면
부드러운 바람으로
푸르른 보리 물결치는
밭둑을 타고 오세요.
그리고 기분이 좋으면 휘파람을 부세요.
언덕바지 황금빛 나는
누런 황소를 보셨나요.
그런 몸짓으로 그런 눈빛으로
곤륜산을 바라보듯 천천히
세상이 밝은 날 큰 빛으로 오세요.
당신이 정하신 날 꼭 오세요.
활짝 핀 노란 꽃잎으로
아무도 모르게
곤룡포 한 벌 펼쳐 놓지요.
5회 수상작
구들방에서의 마지막 밤 / 김남용
행낭으로 건너왔다
군고구마 냄새가 자욱하다
아버지가 군불을 때시나보다
"춥지야? 기다리그라"
구들을 등지고 있으려니
참나무숯 같은 졸음이 밀려온다
방바닥은 황토빛깔로 달아오르고
갑자기 오줌이 마려운 나는
마당에 서서
뚝뚝 떨어져 내리는 새벽별을 센다
밤새 사령리를 품은 안개가
무지개빛을 띠기 전 나는
행랑을 비우고
약속처럼 더나야 한다
머지않아 아버지는
이백년 묵은 구들을 들어내리라
"이제 니들도 다 컸은께 입식 해야제"
내년 고향길
구들방에 살 익을 걱정은
비오는 날 하늘을 나는 가오리연처럼
한가롭기만 하다
4회 수상작
가래 / 최금진
저녁이면 가래가 그득해진 목이 아프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희망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내 속에 뭉쳐진 욕망의
노폐물 같은 것이다 갈수록 말은 적어지고
퇴근길 혼자 걸어오다 생각하는 하루도
즐겁거나 고단하거나 결국 가래로만 남는다
아내의 부쩍 줄어든 말수도 그렇다
목에 관한 한 우리는 나눌 수 없는 제 몫의 아픔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뿌옇게 눈을 가리고 저녁이 오고 저 황사바람은
잠든 후에도 우리의 이부자리와 옷의 식탁에
수북히 먼지를 쌓아놓고 갈 것이다
보이지 않게 조금씩 파고 들어와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인간의 인정이란 것도
침묵 앞에선 속수무책
아내가 화장실에서 인상을 쓰며 가래를 뱉는다
잠결에 깬 아이의 기침소리가 깊다
저 어두운 공중 위에는 뿌연 황사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잔뜩 그을은 밤의 램프를
털어 내고 있다
3회 수상작
쓰레기를 태우며 / 김순영
집안 가득한 먼지를 싸들고 둑 너머 냇가에서 불을 붙인다
등에 업은 찬 기운이 불꽃속에서 이글거리며 타고 있다
꿈틀거리는 짙은 어둠을 본다
명퇴한 아버지도 처진 어깨도
어쩔수 없는지.......
우려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진다
밀폐된 공간에서 소리를 지른다
남 부끄러워 사방을 본다
이지메를 당한 기분이다
당당하게 얘기하던 목소리가 부드러워진다
설익는 감자의 서걱거림이 빠진 어금니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작아지는 눈동자 속으로 불꽃이 톡톡 튀어 들어오고 있다
검은 망또 두른 사내가 가끔씩 경적만이 방황하는 가로등 앞에서
취한 듯 비틀거리며 길을 찾고 있다
사과상자 하나가 모습을 잃어가는데 안스럽기만 하다
별똥별 하나가 동쪽으로 길게 고리를 떨어뜨리고 있다.
2회 수상작
퍽 오래된 집 / 윤승범
동학난도 대동여지도도, 그런 것들도 지나쳐 간 집
습기없는 이엉에는 이제 구렁이도 참새 떼도 들지 않는다.
삭고 삭아 저절로 부서져 내리는 흙담
돌아서면 키 낮춘 뒷간, 항아리 엎어 놓은 굴뚝
허리 굽히고 살았던 작은 방 두칸
양철 깡통을 주워 만든 화로
말라붙은 담쟁이 넝쿨 밑에
피골이 상접한 노파가 오래된 풍경으로 어울려 있다
보이는 것 없는 눈에 진물이 흘러 다섯걸음만 걸어도
숨을 헐떡거리는 할멈 물기 한 방울 없어 오뉴월 땡볕을
잘도 견뎠다 싶은, 그래서 훅 불면 할멈이나 옹기 모두 묻혀 흙이 될 그런, 한내 북쪽 작은 집 한 채
1회 수상작
가뭄 / 김철순
애처가로 소문난 김씨가
상처한 지 한달도 안돼 새장가 가던 날 하늘이 화를 냈다
오랜 가뭄이다
냇가는 이미 물이 마른지 오래고
밑바닥은 쩍쩍 갈라져
허연 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데 어느샌가
들풀들이 밤의 여자처럼 달라붙어
냇가는 이미 들풀들만 무성할 뿐이다
물이 떠난 자리에
재빨리 들풀을 키울 수 있는
발빠른 김씨가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