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올이 본 숭산스님]
현각스님의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거기서 읽었던 도올 김용옥 선생의 회고(『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발췌). 현각스님 표현에 의하면 "그의 말은 격해서 때로 제자인 내 입장에서 볼 때 숭산 큰스님에 대한 표현이 무례하다고까지 느껴지지만 솔직한 고백이라 생각되어 독자 여러분께 소개한다.
... (생략) 내가 숭산 스님을 만나 뵈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분은 그리 널리 알려진 분이 아니었다. 선교 개척의 초창기는 이미 지난 시점이었다 하더라도 그리 융성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의 명성은 뉴잉글랜드 지역, 특히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권 내에서는 좀 시끌시끌한 것이었다. 내가 숭산의 이름을 들은 것은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들의 대강(代講)을 하고 있을 때 내 학생 중에 한국 불교 전공을 지망하는 어느 참하고 예쁘장한 미국 여학생으로부터였다.
내 기억으로 그 여학생의 이름은 베키라 했고, 그녀는 하버드 대학 학부를 졸업할 때 하버드 대학 통틀어 전체 수석을 했으니까 무지하게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다.
그런데 베키는 당시 한국불교사를 가르치고 있던 나를 만날 때마다 ‘쑹싼쓰님’ 운운하는 것이었다. 베키의 ‘쑹싼쓰님’에 대한 존경은 가히 절대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러면서 베키는 나보고 자기가 존경하는 학자인 당신이야말로 꼭 한번 ‘쑹싼쓰님’을 만나보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당신과 같은 훌륭한 한국의 학인이 쑹싼스님을 안 뵙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베키가 아무리 나에게 쑹싼스님을 만나보라고 권고했어도 나는 그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데 어느 날 케임브리지 젠센터(하버드대와 MIT 사이에 숭산스님이 세운 절)에 오셔서 달마 토크(Dharma talk, 법문을 이렇게 영역)를 하시니깐 그때 꼭 한번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쑹싼쓰님’의 달마 토크 때는 하버드 주변의 학·박사들이 수백명 줄줄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내가 사실 불교계의 인맥을 파악한 것은 최근의 일이므로 그때만 해도 누가 누군지를 전혀 몰랐다.
실상 속마음을 고백하자면 나는 ‘쑹싼쓰님’을 순 사기꾼 땡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인즉슨 나에겐 다음의 명료한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하나는 저 베키를 쳐다보건대, 저 계집아이를 저토록 미치게 만든 놈, 즉 저 계집아이가 숭산이라는 개인에게 저토록 절대적 신앙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사교(邪敎)적 권위의식을 좋아하는 절대론자일 것이고 따라서 해탈한 인간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자기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타인에게 절대적 복속과 부자유를 안겨주는 놈은 분명 사기꾼일 것이다.
또 하나는 '달마 토크'의 사기성에 있었다. 숭산이 다 늙어서 미국엘 건너온 사람인데 무슨 영어를 할 것이냐? 도대체 기껏 지껄여봐야 콩글리시 몇 마딜 텐데, 영어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에 무적인 도사 김용옥도 하버드에 와선 벌벌 기고 있는데, 지가 무슨 달마토크냐 달마토크는?(ㅋㅋㅋㅋ;;;) 하버드 양코배기 학박사들을 놓고 달마 토크를 한다니 아마도 그놈은 분명 뭔가 언어 외적 사술(邪術)을 부리는 어떤 사기성이 농후한 인물일 것이다. 정도(正道)는 언어(言語) 속에 내재할 뿐이다.
그런데 베키의 간청에 못 이겨 케임브리지 젠센터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숭산의 달마 토크를 듣는 순간, 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나의 식(識)의 작용 속에서 집적해 왔던 '객기'(客氣)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 인간이 수도를 통해 쌓아올린 경지는 말과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몸과 몸으로 전달될 뿐이다. 몸과 몸의 만남은 언어가 없는 것이기에 거짓이 끼여들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그가 해탈인이었음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에는 위압적인 석굴암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땅꼬마’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몸의 해탈의 최상의 경지는 바로 어린애 마음이요, 어린애 얼굴이다. 동안(童顔)의 밝은 미소, 그 이상의 해탈, 그 이상의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숭산은 거구는 아니라 해도 결코 작은 덩치도 아니다. 당시 오순 중반에 접어든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 얼굴 그대로였다. 그의 달마 토크는 정말 가관이었다. 방망이를 하나 들고 앉아서 가끔 톡톡 치며 내뱉는 꼬부랑 혀 끝에 매달리는 말들은 주어 동사 주어 술부가 마구 도치되는가 하면 형용사 명사 구분이 없고 전치사란 전치사는 다 빼먹는 정말 희한한 콩글리쉬였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영어의 도사인 이 도올이 앉아 들으면서 그 콩글리시가 너무 재미있어 딴전 볼 새 없이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의 콩글리쉬는 어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언어의 파워를 과시하고 있었다. 주부 술부가 제대로 틀어박힌, 유려한 접속사로 연결되는 어떠한 언어 형태도 모방할 수 없는 원초적인 마력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달마 토크가 다 끝나갈 즈음, 옆에 있던 금발의 여자가 큰스님께 질문을 했다. 내 기억으로 그 여자는 하버드 대학 박사반에 재학중인 30세 전후의 학생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왓 이즈 러브(What is love)?"
큰스님은 그 여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었다.
"아이 애스크 유, 왓 이즈 라부(I ask you, what is love)?"
그러니까 그 학생은 대답을 잃어버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 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디스 이즈 라부(This is love)."
그래도 그 여학생은 뭐라 할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학생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동안의 큰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 것이었다.
"유 애스크 미, 아이 애스크 유. 디스 이즈 라부 (You ask me, I ask you. This is love)."
인간에게 있어서 과연 이 이상의 언어가 있을 수 있는가? 아마 사랑 철학의 도사인 예수도 이 짧은 시간에 이 짧은 몇 마디 속에 이렇게 많은 말을 담기에는 재치가 부족했을 것이다. 나는 숭산 큰스님의 비범함을 직감했다. 그의 달마 토크는 이미 언어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국경도 초월하고 있었다. 오로지 인간, 그것뿐이었다.
나는 베키와 같이 이층 선사가 머무는 방으로 올라갔다. 케임브리지 젠센터라고 해봐야 뉴잉글랜드 전형의 목조 주택건물 좀 큰 놈을 개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층 한 방은 한국 온돌 안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냥 한식으로 넙죽 절을 했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맞절을 했다. 나를 하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때 나는 매우 신비롭게 생각했다. 그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하버드 대학 박사고, 이 도올 김용옥이래봐야 당시에는 매우 보잘것없는 초라한 박사반 학생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그가 나를 사전에 알았던 것도 아니다. 난 밝은 동안의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는 그 앞에서 멋쩍게 방안을 빙 둘러봤다. 이것이 바로 1981년 3월19일 밤 열 시 반경의 일이다…… (중략) …… 어느 날이었다. 나는 숭산 행원스님과 함께 앉아 이 얘기 저 얘기를 주고받다가, 도대체 어떻게 이 미국땅에 와서 보시를 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불법을 전파하여 이 방대한 조직을 그것도 미국의 지적 심장부인 동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정착시킬 수가 있었는가? 하는 이야기로 화제를 옮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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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뭐 미국에 와서 포교하구 뭐 그런? 생각 꿈에나 해봤나? 전혀 우연이여, 생각두 안 했든 거여. 내가 인연이 닿아 일본에 몇 년 있었는데 그때 뉴욕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차표를 보내주면서 한번 놀러 왔다 가라는 거여. 아 그때만 해도 미국 구경 한번 하기 힘드니께 얼씨구나 좋다 하고 동경에서 뉴욕 가는 비행기를 탔지. 그런데 그때만 해도 비행기 속에서 한국 사람 만나기가 참 힘들었거든. 내가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내 뒤켠에 창가에 있는 어느 중년 신사가 한국말로 한국 스님 아니시냐구 말을 거는 거여. 나두 깜짝 놀라 비행기칸에서 참선만 하구 앉었기두 지루하길래 그 사람 옆 빈 자리에 가 앉어 이 얘기 저얘기 하면서 미국 사정도 듣고 하며 갔질 않았겠나? 알구 보니께 그 사람이 로드아일랜드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던 교수였는데 거 동양 문화에 대한 향심이 보통이 아니더라구. 뉴욕에 가걸랑 로드아일랜드가 얼마 안 되니깐 꼭 놀러 오라면서 전화번호랑 주소를 적어 주는 거여. 뉴욕에 있는데 어느 날 그분 김교수님 생각이 나드라구. 그래서 전화하구 그 집엘 놀러 갔지. 그런데 그 집에 내가 온다 해서 김교수가 불러다 놨는지 불교에 관심 있는 미국 청년들이 서너 명 와 있더라구. 무슨 예일 대학 학생들이래나. 내가 그때만 해도 예일 대학이 뭔지나 알았어? 그런데 이 녀석들이 자꾸만 물어보는거여. 구찮게 자꾸만 불교에 대해서 물어오는 거여. 내가 뭘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지. 게다가 김교수 통역으로 어쩌구 저쩌구 얘기해봐야 개갈이 나야지.
그래서 내가 뭘 직접 보여줄 생각을 한 거여. 그런데 내가 최면술을 좀 하거든. 그래서 내가 너희들한테 최면을 걸겠다 하니깐, 이 예일 대학 학생 녀석들이 자기들은 그 따위 최면엔 절대 안 걸린다는 거여. 자기들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그런 덴 걸릴 수가 없다는 거여.
한번 맛 좀 봐라! 하구 내가 최면을 걸었지.
수리 수리 마수리 하고 주문을 외면서 이놈들 최면을 거니깐 아 이놈들이 최면이 어떻게 잘 걸리는지, 조금 있단 앉은 채로 천장까지 부웅붕 뜨는 거여. 이놈들이 번갈아 가면서 하늘 높이 붕붕 뜨는 거여, 아이 이 지랄을 하고 나니깐 이놈들이 엎드려 절하드라구, 그리구 내 소문이 쫘악 퍼진 거여. 그리군 계속 몰려들기 시작하는 거여. 그래서 그 길로 김교수도 붙잡구 그래서 미국을 뜨지 못하구 프라비던스에 절을 세우게 된 거여. 프라비던스엔 지금 아주 큰 절이 섰지. 그게 내 본터여. 그게 바루 최면에서부터 시작한 거라구…….
1972년 빈털터리 숭산의 체험을 털어놓는 이 아주 진솔한 어구들은 인류 종교의 발달사 그리고 선교 역사의 가장 보편적 패턴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고등·하등을 막론하고 고금을 통해서 이 숭산의 말은 가장 진실한 종교의 본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고구(考究)하고자 하는 '호국불교'의 본질도 바로 이 숭산의 체험 세계에서 내재하는 보편적 구조로부터 탐구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민중이나 이방의 대중에게 고등한 언어 체계나 고도의 사유 체계가 처음부터 먹혀 들어갈 수가 없다.
숭산스님에게는 언어(영어)가 없었고 재력이 없었으며 또 폭력(대사관 같은 것)의 뒷받침이 없었다. 그에게는 대중에게 과시할 일체의 권위라든가 위력이 없었다. 이러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숭산은 처음에 괴력난신(怪力亂神)을 행하는 괴승으로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는 영력을 소유한 선승으로 이미지가 순화되어갔고 지금은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터는' 것을 가르치는 젠 마스터 철인이 되어 있다.
2. 세계인이 만난 숭산스님
[1. 모든 것이 선(禪)이다 래리 로젠버그]
<케임브리지 인사이드 명상센터의 창건자이자, 숭산스님의 초기제자들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선원 창건에도 조력하였다.>
나는 선사님을 모시고 5년 동안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서양인 두 명과 함께 한국에서 선사님을 모시고 1년 동안 보냈습니다.
이곳 프라비던스 선원에 오니 링크가 구석구석 안내하여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 가지 감회가 떠오릅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먼저 선사님과 일본에 여행을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선사님이 아주 누렇게 변색되어 버린, 한국식 사찰의 청사진을 꺼내 놓았습니다. 나와 두 명의 서양인이 있었는데, 선사님은 우리 중 한 명인 무불에게 그 청사진을 건네주며, "만약 내가 죽게 되더라도, 꼭 이 절을 지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청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스님이 모든 건물과 각각의 건물 용도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청사진을 치웠습니다, 나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금강선사(金剛禪寺)가 바로 그 청사진에 있던 절과 똑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이런 절을 세울 계획을 일본에 머물던 시절부터, 그리고 이곳 미국에 온 이후에도 항상 간직해 왔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선사님을 아는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듯이, 스님에게는 관용어법이 된 의지적 표현이 있습니다.
"곧 바로 나아갈 뿐"
이 절에 와 보니 스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 매우 기쁩니다.
선사님에 대한 추억들은 언제나 가르침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웃을 것이고 그 이야기들은 재미있겠지만, 결국은 가르침에 관한 것입니다
선사님과 나, 그리고 다른 세 명이 케임브리지 선원을 개원하였습니다. 몇 달 동안 우리 너댓 명만 살았습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절을 하고 그 밖에 우리가 알던 모든 수행을 다 하였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냥 텅 비어 있던 셈이었습니다. 그저 우리 자신들의 수행을 할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원을 열고 대략 2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하기 위해 찾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때의 일입니다. 그때 우리는 정기적인 월례 수련법회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크리스마스가 임박해오자 나만 제외하고 모두 집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며칠 전에 선사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세요. 아무도 수련법회에 참가신청을 하지 않았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나만 빼고 모두 집에 갑니다. 선사님도 여기 계시지 않을 것이고요. 그러니 법회를 취소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렇지요?"
스님이 말했습니다.
"취소? 왜? 한 명이나 천 명이나 마찬가지! 그냥 법회를 하게!"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나 혼자서 법회를 다 했습니다. 혼자서 절도 하고, 염불도하고, 좌선도 하고, 경행(經行)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론 내가 나에게 독참(獨參)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래리,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가?"
하지만 둘째 날 오후부터는 참으로 좋았습니다. 매우 중요한 그 무엇인가를 배우고 깨달은 느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든 한 명도 오지 않든 우리의 할 바를 다하는 것이지요. 그때의 법회가 내가 하였던 수련법회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수련법회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시리즈로 된 것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처음 한국에 갔을 때, 나는 정말로 산에 가서 참선을 하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그런데 산에 가는 대신에 TV방송국에 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식 수행을 하러 온 첫 서양인이었고, 따라서 참으로 별난 사람들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신문에서도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나는 전직이 교수였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이나, 크고 작은 불교단체, 혹은 비불교 단체 등에 끊임없이 불려가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하루에 대여섯 끼를 대접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성의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인내의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선사님께 투덜거리고, 불평하였습니다.
"언제쯤이면 '진짜 참선'을 할 겁니까? 언제쯤 좌선을 하게 되죠?"
선사님은 한동안 참았습니다. 그렇지만 내 불평은 더욱 직접적이고 적나라해졌습니다.
"이게 뭡니까? 우리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 왔나요?"
심지어 나는 미국에서도 안 입던 정장을 입어야 했습니다. '교수스타일'로 보이도록 말입니다. 스님은 사람들이 모두 내가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참선을 한 일에 대해 궁금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자신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스님은 마침내 나의 불만스러운 태도에 답변을 하였습니다. 사실상 스님은 그날 나를 옴짝달싹할 수 없는 막다른 벽에 떠밀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너는 선(禪)이 단지 앉아서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모든 것이 선이야! 지금 네 일은 교수스타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 주 후에는 산에 갈 것이고, 그러면 그때는 오직 좌선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수 스타일일 때에는 100퍼센트 교수 스타일로! 그리고 산에 들어가면 100퍼센트 좌선하고 경행하고 좌선하고 경행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
미국식으로 비유하자면 이것은 할부금의 첫 달치였습니다. 둘째 달 할부금의 충격은 더 심했습니다.
우리는 음식 때문에 지독하게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음식 때문에 우리들은 병을 앓기도 했습니다. 그 병은 나을 만 하다가 또다시 기승을 부리곤 했는데, 그렇게 되자 무턱대고 한국음식이 싫어졌습니다. 내가 먹어야 할 그 모든 음식들이 단지 미국음식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나는 팬케이크가 먹고 싶었습니다! 한국에는 브랙퍼스트(미국식의 가벼운 아침 식사) 라든가 디저트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브랙퍼스트와 디저트를 너무나 좋아했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불평을 하면서, '햄버거'를 먹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지금 같은 때는 햄버거 세트 하나만 있어도 그것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요리일 거야."
이러한 말들을 선사님은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루는 드디어 따끔한 말씀의 회초리를 뽑아 드셨습니다.
"자네들 지금 어디에 있나?"
"물론, 한국이지요."
"알긴 아는군, 자네들이 한국에 있을 땐, 한국음식을 먹는 거야. 알겠나?"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떄, 나는 미국음식을 먹었지, 내가 그 음식을 좋아해서 먹었다고 생각하나? 나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어! 나도 싫었어! 하지만 미국에 있을 때에는 미국음식을 먹고, 한국에 있을 때에는 한국음식을 먹는 거야!"
그 말이 내 심금을 울렸습니다.
2. 선사님이 지닌 에너지의 비밀 - 자쿠쇼 퀑 노사 -
<1935년생. 1959년 스즈키 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1973년 소노마 마운틴 젠센터 건립하였다.>
서구 사회가 영적으로 무르익어 가던 60년대와 70년대 초, 미국에는 훌륭한 스승들이 많이 등장 하였습니다. 그 스승들 가운데 한 분인 선사님의 가르침을 담은 책에서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씀 한 구절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같으냐?, 다르냐? 같다고 하여도 나에게 방망이를 맞을 것이고, 다르다고 하여도 방망이를 맞을 것이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나의 온몸과 마음은 마치 방망이로 맞은 것 같았습니다.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사실 108배를 하는 일과 이 물음을 만나는 일은 내가 피했으면 하고 바라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 마음가짐이 아마도 선사님과 내가 다른 길을 걷는 정확한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사님이 처음 소노마 산(山)을 방문하였을 때였습니다. '달의 계곡' 에서 스님은 세 개의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노마산 정상에서 두 겹의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대었습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로군!"
전통적으로 불교의 스승들을 처음 만날 때 서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렇게 절을 마치자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은 모두 기쁨으로 빛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한 사람의 선사(禪師)에게 이러한 사랑을 경험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우리는 강한 선적(禪的)인 시선으로 마주 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깨에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서서 함께 한곳을 바라보며 걸어왔습니다.
내가 아주 소중히 여기는 무엇인가를 선사님에게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내가 선물하고자 하는 불교용품들을 모두 사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며칠 전부터 우리집 거실바닥에는 무지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아직 십대 소년인 내 아들 데미언이 시내 주차장에 있던 종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문득 그걸 보신 스님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걸 갖지"
우리 모두는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1983년, 우리 두 승가(僧伽)는 함께 수행하기로 결정하고 4일간의 정진법회를 소노마 산에서 열었습니다. 2일 동안은 조동종(曹洞宗)식으로 좌선을 하고, 나머지 2일 동안은 좌선 없이 기도를 하였습니다.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에서부터 움직이며 염불한 것까지 모두 수행한 것입니다. 커다란 소리를 내는 타악기를 두드리면 한시간 반 내지 두 시간 동안 관세음 보살(觀世音菩薩)을 염송하면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걸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자 나의 주시력은 내 목소리와 선당에 넘쳐 흐르는 다른 모든 참가자들의 소리에 힘입어 더욱 예리해 졌습니다. 이런 에너지와 맑은 주시력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잔물결이 미묘하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무한한 원을 확장하듯이 선당 가득히 퍼져 나갔습니다. 이 기도와 좌선 수행은 상대적인 것과 극단적인 것을 녹여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 하나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장미빛 뺨을 한 우리 모두였습니다. 겨울의 열기 속에서 목고 쉬지 않고 마음이 더욱 맑아진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수행함으로써 일본식도 한국식도 또는 미국식도 아닌 법(法)이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형식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릴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하는 수행을 통하여 많은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평화로 가는 길이로구나."
전에 말한 바와 같이, 108배는 내가 하고 싶지 않았던 것 중의 하나입니다. 나의 마음은 게을러서 108번이나 절을 하는 것은 너무 엄청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 생각에 극적인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오자이(Ojai) 재단에서 용맹정진을 함께 지도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산 속 이른 새벽의 어둠을 뚫고 나는 좌선을 하러 가기 위하여 선사님이 묵고 있던 몽고텐트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선사님이 절을 하고 있던 텐트는 호박 등불처럼 빛을 발하며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선사님은 우리들과 108배를 하기 전에 항상 108배를 다섯 번이나 하였습니다. '선사님의 지난 20년 동안 108배를 해왔으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선사님은 '오직 할 뿐' 이었습니다. 더욱 맑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이라는 이 엄청난 기적에 감사하고 보답하기 위해 절을 하였습니다. 그 해 봄부터 나는 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절은 아주 훌륭한 수행입니다. 에너지를 창출하고, 업(業)을 다스리며, 마음을 맑게 하여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해 줍니다
1984년 선사님의 초청으로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한국에서 나는 선사님의 가슴속 깊이 자리한 문화를 목격하였습니다. 그곳이야말로 사랑의 본고장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천성적으로 아주 다정하고 사교적이며 가족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선사님은 비구와 비구니뿐만 아니라 신도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선사님은 '나-나의-나를' 이라는, 심상(心象)을 초월하여 자재(自在) 하는 자신을 자유롭게 베풀었습니다. 선사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중심을 강하게 하여, 걸리지 말고, 깨달음을 얻어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것이 선사님이 끊임없이 무사무욕할 수 있는 에너지의 공개된 비밀입니다.
나는 선사님의 법(法)을 만나게 된 것을 커다란 행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선사님의 친절함과 자비로 인해 나의 어두운 눈이 조금은 밝아 졌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런 말들은 하나도 쓸모 없는 것이고 단지 한 무더기의 기억일 따름입니다. 그저 내 마음의 흔적에 불과한 것입니다. 선사님에게 드리는 나의 진정한 찬사는 선사님의 그 공개된 비밀을 계속 지니고 닦아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선사에 대한 선입견이 깨지다. - 앤 밴크로프트
<영국 태생의 비교 종교학자로 동양종교를 연구하고 있으며 방송출연과 작품활동 등을 통해 불교가 생활 속에 다가 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날마다 가슴에 새겨듣는 붓다의 말씀]이 있다.>
숭산스님은 나의 진실한 친구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친구라는 사실은 스님과 나 사이의 굳건한 연결 고리입니다. 스님이 이곳을 방문한 이후 시간은 흘러가지 않았고, 그래서 스님이 이곳에 다시금 도착하면 여느 때처럼 우리의 연결고리는 강해집니다.
스님이 영국을 방문하였던 때의 그 모든 일들이 내 마음속에 떠오릅니다. 스님의 첫 방문 때 공항에서 우리는 생전 처음 뵙는 스님을 첫 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반짝이는 눈과 '스승다운' 면모를 지닌 네모나고 단단한 모습을 한, 전적으로 선사(禪師)의 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공항에서 나오는 버스 속에서 스님은 그냥 잠을 자버렸고, 호텔 방에서는 룸서비스가 방 정리를 하고 있는 데도 잡지를 들고 툭툭 털어 내기도 하셨습니다.
'선사는 이렇게 하는 것인가?, 이 스님은 과연 확실히 깨달았을까?'
문득 의구심 섞인 생각이 일었습니다. 나는 스님이 어떻게 하는지 하나 하나도 빼놓지 않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선가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내 기대와 선입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스님은 나의 선입견에 들어맞지 않았고, 고맙게도 확실히 스님은 모든 면에서 스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스님이 중국음식점에서 여러 명의 친구들과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건내며 자리를 함께 하게 된 기쁨을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님은 느긋해 하며,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면서,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제자인 어떤법사(法師)가 주선한 영국에서의 첫 대중법회를 마치고 스님께서 질문에 답하는 현장도 나는 보았습니다. 장내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일순간에 깨어났고 스님의 답변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스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천중들은 내용을 이해하였고 더 듣기를 원하였습니다.
또 스님이 비속한 거리를 걷는 것도 보았습니다. 스님이 스트립클럽 앞을 지나갈 때 호객꾼들이 야유하면 소리를 쳤지요.
"가라테 하는 사람인가?"
스님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온 듯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렇소!"
그 말에 더 이상의 야유는 사라졌습니다!
선사님과 알게 된 이들은 모두 이러한 면들을 추억으로 소중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간직할 것입니다. 나 역시 스님과 함께 한 시간들이 나의 기쁨과 행복의 창고에 쌓여 있습니다. 스님은 스님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게 도와주었고, 더 맑게 듣게 하였고,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4. 미국에 첫 선원(禪院)을 열다- 성향선사 -
미국스님으로 본명은 바버라 로우즈. 선사님의 초기 손님 중의 한 명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승산 선사의 미국 초기 시정을 같이 보낸 제자 중의 한 명이다.
선사님이 처음 미국에서 선원(禪院)을 연 곳은 로드아일랜드 주 프라비던스의 한 작은 아파트였습니다. 그 아파트는 도일 애비뉴라는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선사님은 아마도 이 거리에서 일어나는 주정꾼들의 싸움 소동이나 칼부림 등 난폭하고 불쾌한 분위기는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선사님이 고려한 것은 비교적 큰 침실이 두 개 있는 집에 150불이라는 아주 적은 월세를 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선사님은 혼자 살림을 꾸려갔습니다. 다른 이들의 도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거미들과 도둑고양이(나중에 애비게일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만이 선사님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모습과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운 대학의 동양종교학 교수가 스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어. 그 교수의 호기심 많은 제자 몇 명이 찾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용기 있는 영혼은 가진 사람들 중에서 한두 명이 자기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 채 선사님과 함께 살기 위해 이사를 왔습니다. 아파트에는 말 그대로 아무런 가구도 없었습니다. 조그마한 식탁 하나와 제 멋대로인 나무의자 몇 개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선사님은 작은 전기밥솥과 사발 몇 개와 숟가락을 샀습니다. 아파트에는 낡은 알루미늄 냄비가 있어 그것으로 놀라울 정도로 맛있는 국을 끓여 먹었습니다.
어느 날 한국에서 불상(佛象)이 담긴 커다란 나무상자가 도착하였습니다. 불상은 적어도 15군데는 부서져 있었습니다. 선사님은 낙담하지 않고 새로 온 제자 중 한 명에게 접착제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꼼꼼하고 끈질기게 수리를 하였습니다.공(空)이 색(色)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시절 선사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직접 행동을 보임으로써 최고의 가르침을 펴 나갔습니다.
영어는 선사님에게 어색하고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영어에 능통하지 못했던 스님은 팬터마임과 본보기 행동의 달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스님의 열정은 우리를 유쾌하게 하였습니다.
초기 6개월 동안 그 아파트를 찾은 이들은 그저 30분만 앉아 있으면 스님이 말씀하시는 목적과 방향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찾아오는 이들이 늘어나자 선사님은 선원을 그 아파트에서 옮기고자 하였습니다. 불단(佛壇)이 중심이 된 더 넓고 깨끗한 법당에 더 많은 이들이 모여 함께 수행하며 자기의 마음을 알 수 있도록 하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스님은 부엌에서 제자들과 웃으며 농담도 하면서 그들이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때때로 스님은 온갖 야채를 다 모아 김치를 담기도 하였습니다. 언젠가는 몇 시간 동안 부엌에 앉아 한국에 있던 이들에게 편지를 쓰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옆에 있던 제자들을 쳐다보며 국수를 먹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대화에 필요한 영어 단어를 알기 위해 스님은 항상 곁에 두고 있던 한영사전을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국수! 누들(noodle) 누들을 먹고 싶나?"
물론, 모두들 활짝 웃으며 스님의 악센트와 열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곧 스님은 부엌을 온통 국수공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 시간도 안되어 지난번 만들었던 국물보다 훨씬 더 나은 국물에 손으로 만든 맛있는 칼국수를 가득 담아 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스님은 자꾸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국수를 먹지. 이것이 최고야! 이걸 먹고 건강해지고 힘을 얻어!응?"
그러면서 스님은 흐뭇하게 웃곤 하였습니다.
스님은 서서히 전통적인 방식이면서도 스님만의 독특한 선(禪)을 선보였습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새로 고친 불상의 불단에 밝은 빨강과 노란색 천을 두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원의 좌구(坐具)를 여러 가지 밝은 빛깔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가끔씩 한국에서 나무상자가 도착하였습니다. 불단에 놓을 물건이라든가. 회색 승복이나 향 또는 스님이 맛있는 국을 만드는데 필요한쓰는 석이(石珥)버섯 등이 왔습니다.
하루는 선사님이 제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략 일곱 명의 정규적인 '고객'이 있었습니다.(이것은 선사님의 농담인데, 선사님이 만든 국을 먹어 보았거나 일요일 밤의 법문에 참석하는 사람을 선사님은 고객이라고 불렀습니다.) 스님은 우리 선원도 정규적인 시간표를 가질 때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초기 시대가 마감되었습니다.
부엌에서 법당으로 수행 장소가 옮겨졌고 우리는 한국에서 온 잿빛 승복을 입었습니다. 염불문은 영어로 음역(音譯)되었고, 절도 횟수를 정해서 하였습니다. 개인별로 좌구도 할당되었고, 일요일 밤의 법문은 스님의 어학 실력과 비례하여 갈수록 좋아졌습니다. 처음에는 선사님이 일본어로 법문을 하면 브라운 대학교의 동양종교학 교수가 영어로 통역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가 되면서 선사님은 영어 어휘에 대하여 좀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스님이 만든 국처럼 따뜻하고 그득한 영양분의 법문을 영어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이때가 되면서 '손님'들의 수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스님은 영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야 했으므로 너무 바빴습니다. 그래서 부엌일은 공양주를 따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스님이 부엌에 오는 것은 스님이 무얼 쓰거나, 공부를 하거나, 자연발생적인 법문을 할 때뿐이었습니다. 스님은 언제나 어떤 질문에도 기꺼이 응답하였습니다. 가끔 엉뚱한 질문을 하면, 젓가락으로 질문을 한 제자의 머리를 톡 치면서 말했습니다.
"너무 생각이 많아! 내려놔, OK?"
도일 애비뉴에서 보낸 2년 동안 지금의 선원 색깔과 리듬이 만들어졌습니다. 선사님은 자신의 따뜻한 마음으로 이 모든 일을 시작하였고 수행을 인도하였습니다. 스님은 항상 '매일' 쉬지 않고 수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계(戒)를 받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니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가르쳤던 대로, 준비가 된 제자들에게는 오계(五戒)를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스님은 젊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세밀히 살펴보았습니다.
심하게 마음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바른 처방을 내리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형식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봄날에 돋아나는 풀잎처럼 스님은 신선하고 생기 있는 수행과 법에 대한 지혜를 가졌고 이를 다른 이에게 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보여 주었스니다. 어떤 특정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스님은 제자들에게 일일이 따뜻한 가르침을 펴서, 그들이 자기자신을 이해하고 본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끌어주었습니다.
5. 당신들은 어디로 가는가?- 우봉선사 -
폴란드를 담당하는 지도법사로 본명은 제이콥 펄. 관음선종회(숭산스님휘하의 선원회)에서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선사님의 삶에 있었던 재미있고 또 어느 정도는 기묘하기도 한 많은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의 개인적인 수행에 있어서 가장 강렬한 영향을 준 사건은 그런 재미나 기묘한 사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사님과 나의 첫만남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이미 불교 명상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버클리에 머물고 있던 티벳의 라마승인 타르탕 툴쿠(Tarthang Tulku)의 제자가 되어 버클리 대학 3학년 때 1년간 휴학을 하고 타르탕 툴쿠의 파드마림(Padma Limg)사원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나와 함께 미국을 가로지르는 히치하이킹을 하였고, 내가 파드마림 사원에 들어가 있는 동안 샌프란시스코 선원(禪院)에 머물었던 내 친구 마이크는 나보다 조금 먼저 동부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대학에서의 학업은 마치기 위하여 돌아왔을 때. 프라비던스에 한국의 승려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마이크와 함께 프라비던스 빈민가의 선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간단한 소개가 있고 나서 우리는 조그마한 법당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선사님이 짧게 염불을 한 뒤에 우리 모두는 함께 15분 동안 좌선(坐禪)을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선사님은 아주 맛있는 한국 죽을 요리해 주었습니다. 그 음식을 먹은 후 마이크와 나는 다시 한번 법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일을 통해서 나는 선사님의 따뜻함과 편안한 태도를 느꼈습니다. 스님의 영어는 서툴렀지만 온몸을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때 스님의 눈이 얼마나 초롱초롱하고 맑았는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이어진 것은 서투른 영어로 한 선사님의 선원(禪圓, 깨달음의 단계를 설명한 동그라미)에 관한 최초의 법문이었습니다.
그 법문, 단 한 차례의 그 법문에서 나는 불교 수행에 관한 많은 것들을 아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희미하기만 했던 문제들이 내게 쉽고도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이 활달하고 뚱뚱한 사람에게 매우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스님의 세탁기를 수리하는 직업에 대해서도 약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것 또한 나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선원에서 나올 때, 우리가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하자 선사님이 물었습니다.
"당신네들은 어디로 가는고?"
마이크와 내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을 때 스님의 얼굴에 떠오르는 커다란 미소를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대답이 떠오르긴 하였지만, 나는 그만 꽉 막혀 버렸습니다. 비록 이것이 '법거량'에 대한 나의 최초의 체험이라는 것을 알지는 못하였지만. 바로 그 순간 이 사람이야말로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분, 내 본성을 찾는 길로 인도해 줄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낚시바늘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그날 의식적인 결정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 다음날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짧은 저녁 수행을 하기 위해 프라비던스로 차를 몰았습니다.
6. 그대와 이 주장자가 같은가, 다른가 - 우광선사
<본명은 리처드 쉬로브이며, 화두선을 가르치는 지도법사, 뉴욕조계 국제선원에서.>
선사님을 처음 뵌 것은 1975년 여름이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약 8년 동안 명상 수행을 했었는데, 상당히 '진지'하고 꾸준한 노력을 하는 수행자였습니다.
두명의 친구가 케임브리지 선원에서 하는 주말 수련법회에 초대를 하였습니다. 수련법회 과정의 하나로 선사와 독참(獨參)을 해야 했는데 물론 그 선사는 숭산스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수련법회를 시작하는 법문 시간에 맞춰 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바로 나는 선사님의 활력 넘치는 모습과 유머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영어는 아주 짧았고 악센트도 심했지만, 나는 특별히 스님의 풍부한 감정과 극적인 방식으로 외치는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더 진행시키기 전에 이 점을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나는 스승으로서의 선사를 찾기 위하여 숭산 스님을 만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언테그럴 요가 연구소의 스와미 사치다난다의 지도로 명상을 공부하고 있었고, 당시에는 정신적인 길에 있어서 나 자신의 길을 찾는 데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명상 시간에 참가자들은 각기 독참을 하기 위하여 선사님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몇 해 동안 명상 수행을 하였다는 사실과 내가 해온 수행 형식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사님은 스님 자신의 '첫 번째 코스 '를 설명하였습니다.
"당신이 생각을 하면, 당신의 마음과 나의 마음은 다릅니다. 만약 당신이 생각을 끊어 버리고 '오직 모를 뿐'인 마음을 지키면, 당신은 온 우주와 하나가 되어 당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런 말은 나에게는 친숙한 것이었고 내가 전에 배운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선사님은 주장자를 쳐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와 이 주장자는 같은가, 다른가? 같다고 하여도 이 주장자로 그대를 때릴 것이고, 다르다고 하여도 때릴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선사님의 질문은 내가 한동안 씨름하여 왔던 문제의 핵심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명상수행을 하였던 지난 예닐곱 해 동안 나는 평화와 환희, 그리고 명료함과 통찰이라는 어떤 감각에의 훌륭한 경험을 많이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특히 다른 이들과의 분리된 듯한 느낌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충동적 억압과 조급스러움을 끊어 버릴 수가 없었고, 이러한 상태가 평소에 나를 미묘한 우울함과 불행한 감각으로 밀어 넣었던 것입니다. 나는 선사님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문제입니다. 나는 결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하나가 된 느낌을 참으로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선사님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똑같이 물어보게."
"스님과 저 주장자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에 대한
이 '가장 심오한 질문'에 대한 스님의 대답은 즉각적으로 주장자를 들어 바닥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나는 웃기 시작했습니다. 웃고, 웃고, 또 웃었습니다.
나의 온몸 특히 배가 파도쳤습니다. 끊임없이 7, 8분은 족히 웃었을 것입니다.
돌아보면, 선사님이 '탁'하고 바닥을 친 대답은 터무니없는 것임과 동시에 개념에 사로잡혔던 장애를 즉석에서 끊어버리는 단순성과 명료함, 그리고 해방을 주는 심오한 표현인 듯합니다. 물론 여러 해를 두고 선사님의 '탁' 하는 대답은 우리 종파의 기본적인 가르침의 표현 가운데 하나가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계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우려도 항상 있습니다.
하지만 1975년 그 날 아침 나에게 그토록 강렬하게 충격을 주었던 '탁'은 그런 기계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념으로부터의 자유와 명료함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선사님의 '탁'이 결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생생하고도 살아있는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7. 인간이 썩으면 중이 된다. - 무성스님 -
< 인도계 캐나다 스님으로 본명은 프라카쉬 쉬리비스타바. 금강선사(金剛禪寺)에서>
내가 믿는 바로, 선사님의 제자들은 모두 스님의 빛나는 성품의 영향 안에 있습니다. 스님은 한량없는 에너지와 태평한 웃음, 모든 것에 현실적으로 다가가는 능력, 그리고 카리스마적 분위기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몇 해를 두고 선사님을 알아 온 나에게 돋보였던 스님의 성품 중 하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리 여건이 어려워도 항상 '모든일을 척척 해결하시는' 능력입니다.
한가지 작은 사건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선사님과 함께 우리들 몇 명이 한국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였습니다. 이 여행은 정신없이 바쁘고 빡빡한 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루에 서너 군데의 사찰을 둘러보고 그 중 한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아침 7시에는 길을 나섰습니다. 이런 순회여행을 하면서 매일 아침 예불과 좌선을 한 후에 선사님이 주석하는 여느 북미(北美)의 선원에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안(公案) 읽기를 하였습니다. 공안 읽기를 마친 다음에는 선사님이 질문을 받고 답을 하곤 하였습니다. 나는 논스톱 여행의 피로 때문에 거의 모든 아침 좌선이나 예불 또는 선사님의 법문 시간에 졸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선사님이 법문을 하는 가운데 매우 근원적인 문제를 말씀하였는데 갑자기 그것이 내 마음을 쳤습니다. 질문에 대해 대답하면서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질문의 내용은 듣지 못했습니다.)
"채소가 썩으면 퇴비가 되고, 인간이 썩으면 중이 된다. 중이 썩으면 선승(禪僧)이 된다!"
이 말에 이어 스님은, '인간의 삶에는 의미도 없고, 이유도 없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가를 설명해 나갔습니다.
스님의 그 말(인간이 썩으면 중이 된다.)은 전에는 결코 들은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경이로울 만큼 근원적이고 심오한 가르침이 내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 가르침의 충격이 더 컸던 것은 이 말을 한 시간과 장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들 피곤하고 졸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님은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켜져 있었고', 생기 있었으며 엄청난 에너지를 가르침에 쏟아 부었습니다.
"당신의 견해와 조건, 그리고 상황을 내려놓아라. 언제나, 어디에서나 오로지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
내가 생각하기에 선사님 자신의 삶이야말로 이 가르침의 가장 훌륭한 표본일 것입니다.
8. 내일 그대가 죽는다면 - 도행스님 -
< 미국스님으로 본명은 토니 세이거. 프라비던스 선원에서
오랫동안 선사님과 함께 멋있고 흥미로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선사님이 나에게 주신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을 잘 나타내 주는 몇 가지 일이 떠오릅니다. 그 일들은 누군가의 도움과 지도가 내게 절실히 필요했던 때에 일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사님은 알맞은 때에 알맞은 말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매번 스님은 내가 떠났던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이 전보다 더 열리도록 하여 주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선사님에게 받았던 가르침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나는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나는 한때 진지하게, 선원에 살면서 수행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매우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대학원 과정에는 1년 동안의 인도 유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와 함께 인도를 가야 할지(1년 동안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내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꼈던 진실대로 선원에 가야할지를 놓고 나는 갈팡질팡하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고, 왔다갔다 하는 마음의 지독한 고통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어느날 우리는 선사님께서 우리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해서, 프라비던스 선원의 선사님을 찾아 나의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스님에게 나의 혼란, 친구와 함께 있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선원에 가지 않으면 나의 방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갑자기 선사님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방향은 무엇이지?"
스님의 질문에 내 마음은 멈추어 버렸습니다. 한동안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말이 내 입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에 앉아 스님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 마음만 지키도록 하게."
나는 즉각적으로 안정을 찾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내가 이 마음만 지킨다면(너무나 오랫동안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비단 이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내 삶의 다른 어떤 상황에서도 OK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다른 일은 몇 년 뒤에 있었습니다. 내 삶은 많이 바뀌었고, 아마도 언젠가는 스님이 될 씨앗이 내 안에 심어져 있었던가 봅니다. 스님이 되는 문제를 거의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한번 그런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면 스님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생각에 깊이 빠져 버리곤 하였습니다. 다시금 혼란스러웠고, 때로는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지독한 고통을 겪었으며, 한 가지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혀있기도 하였습니다. 또 당시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애써 풀려고 매달릴 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선사님이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나의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힘이 되어줄 이가 필요했습니다. 나는 다시금 스님을 찾아가 내 문제를 말씀 드렸습니다. 왜 내가 스님이되고 싶지 않은지,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고민들에 관하여 말하였습니다. 내 초라하고 뒤엉킨 머리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까지 스님은 묵묵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며 말했습니다.
"토니, 내일 자네가 죽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겠느냐?"
순간, 꽝!! 하고 내 머릿속의 커다란 소용돌이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스님께 감사의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매우 깊은 환희에 압도되었습니다. 나는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사님도 나와 함께 웃었습니다. 스님의 질문은 마치 고깃덩어리에서 쓸데없는 지방을 잘라내는 것처럼 내 머릿속의 잡다한 생각들을 한칼에, 완벽하게 잘라 버렸습니다. 나는 그러한 순간을 놓쳐 버림으로써 얼마나 많은 일들이 망쳐지는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머릿속으로 따져보고 재보고 억측하던 것들을 모두 놓아 버렸습니다.
스님이 항상 나에게 대했던 접근방법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주입시키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에게 조금도 얼룩이 묻지 않은 거울이 되어 주었습니다. 스님은 항상 나 자신을 반사하여 나에게 비춰 주었습니다. 테니스 공을 되받아쳐 다시 상대방의 코트로 보내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만일 내가 알아야 할 무슨 일이 있거나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으면, 내 스스로 그 문제를 알게 하고 해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열매는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그가 한 것은, 이것을 해야만 한다든가 저것을 해야 한다는 식이 아닌, 또한 물건을 사가듯이 나의 혼돈을 사가는 것이 아닌, 한 점의 얼룩이 없는 거울이 되어 줌으로써 나 자신을 그대로 반영하여, 되돌려주고, 나의 직관과 생각 이전의 나 자신과 연결하고 또다시 연결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선사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9. 히피를 감동시킨 선물- 성향 선사
<숭산선사의 미국 초기시절을 같이 보낸 제자 중의 한 명이다.>
숭산선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히피였습니다.
끈 모양의 긴머리에 더덕더덕 누빈 청바지를 입고 쌀과 콩만 먹는 배타적인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선원에서 몇 주일을 살았는데 스님이 나에게 줄 선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매우 오래된 것이어서 내가 무척 좋아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스님은 내가 오래된 것들(오래된 바지, 오래된 플란넬 셔츠 등)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내게 줄 선물을 찾느라 약 5분 정도 스님의 방에 가 있을 때 나는 그 방에서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방에서 나온 스님은 나에게 창호지에 싼 가늘고 긴 물건을 건네주었습니다. 종이에는 '미스 바비'라고 씌어있었습니다.
나는 부푼 마음으로 열어 보았습니다. 오래 된 아름다운 부채였습니다. 나무와 종이로 만든 부채였는데 종이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한문으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동양의 물건이었고 적어도 만든지 30년은 충분히 되어 보여 기뻤습니다.
그때 선사님이 말했습니다.
"아, 다른 선물이 또 있어. 그걸 더 좋아할 걸세. 그것은 훨씬 더 오래된 것이니까. 아주 오래 되었지."
그리고는 주먹을 내밀어 내 손 안에 조그맣고 하얀 둥근 돌을 떨어뜨렸습니다.
그 돌이 내 손 안으로 굴러 떨어질 때, 나는 시간에 대한 나의 인식이 얼마나 편협했었는지를 알았습니다. 또 선사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깊고 노련하며 유머러스한지를 알았습니다.
10. "총을 겨누게. 칼을 쓰게." - 데이비드 클린거 -
< 프라비던스 선원에서.>
선생님의 제자가 된 지난 10여 년을 생각할 때면, 두 가지의 생각이 인상깊게 떠오릅니다.
선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프라비던스 선원에서 한 달 정도 살았을 때였습니다. 그때 프라비던스 선원은 호프가(街)에 있었고 선사님과 루이즈, 그리고 데이비드 거버가 유럽 여행에서 막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스님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 처음으로 함께 아침 공양을 하였습니다. 발우(鉢盂)공양이었습니다. 공양이 끝나 죽비가 울리자 나는 발우를 치우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그때 선사님이 내 뒤로 다가와 내 말총머리를 잡아챘습니다. 머리채를 밑으로 잡아당겨 나는 별 수 없이 천장을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이 머리 곧 자를 거지?"
"언제 자를까요, 아버지?"
"오 그래! 됐어. 네가 머리를 자르든, 자르지 않든 문제가 아니야!"
내 머리채를 놓은 스님은 내 등을 두드렸고 우리 둘은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걸어가면서 이렇게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언젠가는 자르도록 해, OK?"
스님을 잘 아는 이들에겐 이것이 예삿일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선사님을 전에 만나 본 일도 없고 스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도 못하던 나에게 그 첫 경험은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스님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야 어떻든 공정하고 정직한 분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그런 분입니다.
스님은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아시는 분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겁니다.
또 다른 일화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호프 가에서의 일입니다. 일요일 밤의 법문에서 선사님이 질문에 답하고 있었습니다. 바비가 물었습니다.
"선사님, 저는 지금 독참(獨參)을 하고 있습니다만, 어떤 이들은 공안 수행에 대하여 별로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공안 인터뷰를 하러 와서는 자신들의 소소한 일상적 문제점들만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진지하고 참된 공안 인터뷰를 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선사님이 대답하였습니다.
"총을 겨누게."
"저는 총이 없는데요."
다시 선사님이 말했습니다.
"칼을 쓰게!"
11. 폴란드 이야기 - 명오스님 -
< 본명은 도로타 크리찌짜노프스카이며 폴란드 선원에서 지도법사로 있다.>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다른 이에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선사님이 어떻게 원점(原點, primary point)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지 가르치고 있었는데,
제자에게 방바닥을 세게 치라고 하였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예닐곱 번이나 물었습니다.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느냐?"
"너에게 불성(佛性)이 있느냐?"
마침내 마지막 차례인 제자의 앞에 스님이 손목시계를 풀어 놓으며 물었습니다.
"이 시계는 불성(佛性)이 있느냐?"
즉각적으로 그제자는 온힘을 다하여 시계를 내리쳤습니다.
꽝!
스님은 황급히 시계를 들어 아직도 가고 있는지 드려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시계를 옆으로 치웠습니다.
우리는 다음부터 예로 드는 물건은 압정을 쓰시도록 말씀드렸습니다.
선사님은 자주 "좀 쉬어야겠다."고 하시며 방에 가십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방에서 스님이 절하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퍽!퍽!퍽!
선사님이 바르샤바 공항에서 화장실에 갔습니다.
스님은 우리에게 화장실을 지키는 여자에게 돈을 좀 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주고 스님이 나올 때까지 그 여자와 잡담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자기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고, 우리는 약간의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고마워하였고 선사님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들의 참된 성품을 찾도록가르쳐 주는 선생님이고 스님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소리쳐 말했습니다.
"아! 예! 처음 볼 때부터 그 분이 신부님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리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한번은 유럽여행에서 제자가 선사님에게 많은 질문을 하였고,
선사님은 여러 가지 다양한 답을 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질려버린 제자가 말했습니다.
"선사님 저는 선사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원할 뿐입니다."
선사님이 대답하였습니다.
"아주 훌륭하군요. 하지만 나는 이해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모를 뿐인 것을 가르칠 뿐이지요."
유럽에서, 제자들은 가끔 오후에 선사님과 함께 영화를 보러가기 위하여 직장에 하루 휴가를 내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늘 무언가 흥미롭고 도움이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한번은 경찰영화를 관람하는 중에 생생한 섹스신이 나왔습니다. 제자 중 한 명이 마음이 흔들려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선사님은 염주를 꺼내더니 만트라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 제자가 자리로 돌아와 염주를 꺼내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습니다.
12. 호전적인 제자들 - 데이비드 모트 -
< 온타리오 선원에서 >
오랫동안 무술을 익혀온 입장에서
나는 사람들이 공격적인 위협에 직면하면 어떻게 반응하는 지 항상 흥미를 가지고 관찰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잊지 못할 두 가지의 사건에서
모든 것을 두루 포용하는 선사님의 중심과 확고한 의지력을 목격하는 특전을 누렸습니다.
그 두 사건은 오래 전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때 그대로의 상황에 대해서는 얼마간 나의 기억이 흐려져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위협과 도전에 대한 스님의 반응은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기억에는 결코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오차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스님의 중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습니다.
무술가로서 나는 두려움과 노여움이 인간의 가장 취약한 두 가지 감정이라는 것을 계속 의식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선사님에게서
인간은 공격적 위협 앞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뉴헤이븐 선원에서 선사님이 대중법회를 할 때 일어났습니다. 법문을 시작할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선원에 살던 한 제자가 오클라호마에서 온 일단의 젊은이들을 만나 참선을 하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들은 동부 해안지역을 돌아다니며 텍사스 산 감귤을 도매하는 청년들이었습니다. 텍사스 지역의 모험을 좋아하는 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어떠한 모험이라도 할 용기가 있었고 참선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태도로 접근하였습니다. 그런 자세는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의 사건은 그들이 자기들의 우두머리인 빌리 조를 데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빌리 조는 너무 취해 있어서 바닥에 앉은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했습니다.
분위기를 돋구기 위한 나의 법문에 이어
선사님이 질문에 응답하는 제1부가 진행되고 있던 도중에 부적절한 소음(노래를 하는 등의)이 법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의 가운데쯤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왔습니다. 물론 빌리 조가 내는 소리였습니다.
선사님이 마음의 문제와 우리의 집착이 어떻게 우리 모두를 미치게 하는지에 대하여 설명을 시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빌리 조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며 협박조로 소리쳤습니다.
"시팔 내 마음은 아무 문제도 없단 말이야!"
순간 선사님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조금은 방어적인 태도로 멍한 침묵에 빠졌습니다.
선사님이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호! 고봉(古峯)스님 스타일과 좀 닮았구먼! 괜찮아! OK!
그런데 (선사님이 나를 보며)당신의 도움이 조금 필요하겠군."
그래서 내가 빌리 조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알다시피 이 바닥은 불편하잖아요. 부엌에 편한 의자가 있으니 거기로 가지요."
나는 그 날의 취객을 스티브 코헨과 제프호어의 도움을 받아 부엌의자에 데려다 앉힐 수 있었습니다.
커피 한잔을 대접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 우리는 동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텍사스주 변경에서 자랐고 그 근처 오클라호마에서 빌리 조가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은 재미있던 일로 돌리고 빌리 조는 뉴헤이븐 선원을 위해 나에게 100불을 보시 하였습니다.
다른 한 사건은 토론토에 있는 요크 대학에서 대중법회를 할 때 일어났습니다.
그 법회에 괴상한 학생 한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학생은 불쾌한 검은 구름 같은? 분위기(흔히 말하는 나쁜 분위기)를 가진 친구로 여겨지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질문 시간에 그 학생이 아주 공격적인 어조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 제자 중에 깨달은 선사라도 있나요?"
선사님이 대답하였습니다.
"학생을 30방망이 때리겠네!"
그 학생이 응답하였습니다.
"오, 예? 당신이 나를 때리면 나는 당신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어!"
선사님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하! 나는 학생의 마음을 알겠어.
하지만 학생은 나의 방망이를 이해하지 못했군!
나의 방망이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인데,
학생의 방망이는 나를 날려 버리는 것이로군. 어우, 어우, 어우! 이제 무얼 할건가?"
그 학생은 잠시 멈칫하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하였습니다.
"당신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나를 때리면 당신을 날려 버리겠어!"
몇 차례 문답을 더 하면서 스님은 이 학생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질문이 다시 시작되었고 결국 그 호전적인 학생은 일어나 나가 버렸습니다.
13. 병 속의 닭을 꺼내라 - 대봉스님 -
< 미국스님으로 베트남 전쟁세대로서
반전운동을 하는 평화 단체에서 활동한 바 있다.
프라비던스젠센터에서 숭산 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 현재 계룡산 무상사 조실 스님으로 있다.>
한 제자가 처음으로 숭산 대선사와 함께 하는 수련법회의 마지막 3일째 독참에서 선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스님을 다시 만나게 되겠습니까?"
선사님이 즉시 그 제자의 다리를 주장자로 때렸습니다.
그 제자는 어리둥절하였고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선사님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온화하게 말했습니다.
"네가 '오직 모를 뿐'인 마음을 지키면, 너와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나서도 그 제자는 이일을 잊지 못했습니다.
파리에서 식사를 마치고 각자 그릇을 치우기 전에
선사님은 제자들에게 식탁을 치우라고 말하지 않고 그릇들을 쟁반 위에 쌓아 부엌으로 손수 날랐습니다.
한번은 선사님이 미리 계획되었던 스페인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참 제자 두 명에게 가서 대신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을 향해서 돌아서더니 "네가 그곳에 가면 모두에게 독참(獨參)을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제자는 깜짝 놀라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주장자를 건네며 선사님이 말했습니다.
"너에게 전한다."
그 제자는 자기가 전법(傳法)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기쁨으로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건 전(傳) 주장자야."
젊은 제자가 선사님과 함께 캘리포니아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카멜에 있는 한국 사찰인 삼보사(三寶寺)에서 법문을 마치고 선사님은 공양을 하기 위하여 다른 건물로 걸어갔습니다. 제자들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계단을 올라 선사님은 잠겨진 유리문 쪽으로 곧장 걸어 갔습니다. 유리가 너무나 투명했던지 스님은 그 유리문에 '쿵'하고 부딪혀 퉁겨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스님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문을 밀어 열어 걸어갔습니다. 그 젊은 제자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날부터 지나치게 완벽하려는 고통스런 미혹은 사라지고 바른 수행을 하는 마음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째 유럽여행을 마치고 프라비던스 선원으로 돌아온 선사님은 모두에게 작은 선물을 주었습니다.
어떤 제자들에게는 작은 쥐 인형을 주면 그들에게 쥐 공안을 물었습니다.
어떤 제자에게는 조그마한 유리병을 주었는데 그 안에는 닭 인형이 들어 있었습니다. 스님이 물었습니다.
"누군가가 병 안에 달걀을 넣었는데 그 달걀이 부화하여 병아리가 되었다. 그 병아리가 자라 닭이 되었는데 너무 커서 병에서 나올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그 병을 깨트리지 않고 닭을 꺼낼 수 있겠느냐?"
그 제자는 코르크 마개를 병에서 뺐습니다. 선사님은 "노오오!"라고 말하며 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그 제자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선사님을 불렀습니다. 선사님이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미소를 지으며 "오, 아주, 아주 좋아!"라고 말하며 방을 나갔습니다. 그 제자는 기분이 좋아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그런데 갑자기 선사님의 손바람이 등뒤에서 느껴졌습니다. 그 손은 제자의 머리를 때리고 문으로 사라졌습니다.
14. 모두 내려놓는 것이 열심히 수행하는 것 - 무심스님 -
<보스턴 대학 시절 숭산선사를 만난 후, 1984년에 출가.
현재 숭산선사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으며 화계사 국제선원지도법사로 있다. >
내가 선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케임브리지 선원이었고,
그 다음은 메사추세츠 주 알스톤에서였습니다. 그날 밤 스님은 청중들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선사님께서 여러 번 여러분은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고, 일체 중생을 구제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사실 스님과 스님의 강연에 별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물어보아야 좀 더 명확히 알수있을까?'
그래서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스님은 나를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내려놓게! 모두 내려놓게나! 이것이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오랫동안 좌선을 한다거나, 스님이 되기 위해 출가를 한다거나, 다른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대답을 예상했었는데, 바로 그런 대답을 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그 결과 나는 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비록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별로 확신은 없었지만, 나에게 선(禪)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참선을 지도해 줄 어떤 이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사 뜻하는 대로 원만하게 성취하시기를!
오랜 세월을 두고
나는 '내려놓아라!' 또, '
모를 뿐인 마음으로 곧바로 정진하라'
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15. 악몽을 쫓아낸 이야기- 무량스님 -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미국스님으며 미리 물려받은 부모님의 유산으로
캘리포니아의 깊은 산속에서 전혀 못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 한국식으로 절을 짓고 있다.>
무량 스님 어느 부유한 한국인 노신사가 선사님을 방문하여 꿈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꿈에서 그 신사는 어떤 사람이 긴 칼을 들고 자기를 쫓아 다녀 죽을 힘을 다하여 도망 다녔습니다.
그리고 쫓아오던 그 사람이 긴 칼로 자기 목을 치려 할 때마다 온몸이 땀에 젖어 깨어나곤 하였습니다.
같은 꿈을 반복하여 꾸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매 주마다, 매 달, 매 년, 항상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선사님이 물었습니다.
꿈에 나오는 그 사람을 아는가?
그 신사는 6.25전쟁 때의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전쟁 중에 그 신사와 다른 한 사람이 민가에 들어갔는데, 그 집에서 큰돈이 되는 재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자 신사는 재물을 독차지할 욕심으로 자기와 함께 그 집에 들어갔던 사람을 살해하였습니다. (신사는 그 재물로 지금 부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천도재(天度齋)를 아주 성대하게 지내도록 하게. 불전(佛錢)을 많이 내놓고 음식도 풍성하게 장만해야 하네. 또 매일 스스로 108배를 하고 관세음보살 염불을 해야만 하네."
그 신사는 선사님의 말을 따랐습니다. 꿈은 그 뒤에도 반복되었지만, 칼을 들고 쫓아오는 사람에 대해 그토록 무서워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똑 같은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칼을 든 사람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도망가던 그 신사는 갑자기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칼을 든 사람을 향하여 돌아서며 소리쳤습니다.
"나는 매일 108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매일 관세음보살님도 부르고 있어. 너는 나를 해치지 못해!"
"맞아, 나는 너를 해치지 못하지." 하며 칼을 든 사람이 힘없이 말했습니다. 그래. 그러면서 칼을 던지고 걸어가 버렸습니다.
그때 이후, 노신사는 그 꿈을 두 번 다시 꾸지 않았습니다.
16. 무슨 일이든 OK - 본성 선사 -
< 본명은 제프 킷츠, 무문 선원(無門禪院)에서.>
선사님은 나의 가장 좋은 점을 끌어내 줍니다. 스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환희와 유머 그리고 따뜻함과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감정이 솟아납니다. 스님 곁에 있을 때에는 자주 오랫동안 크게 웃곤 합니다. 스님은 돈환이 '조절된 우둔함'이라고 불렀던 그런 감각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스님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합니다. 동시에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집착을 하지 않는 듯합니다. 무문선원에서는 매년 수계식(授戒式)을 합니다. 선사님은 행사를 완전무결하게 치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실 스님은 일이 제 나름대로 되어가도록 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내가 선사님과 독참(獨參)을 하고 있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미친 중'이었습니다. 그는 워크맨을 차고 목에는 테디 베어 인형 두 개를 걸고 있었습니다. 선사님이 크고 단호하게 그 '미친 중'을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가 나가자 우리 둘은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그 '미친 중'이 조계종단에서는 축출되었지만 선사님은 기꺼이 그를 곁에 두었다는 점입니다. 선사님의 마음 쓰는 폭과 깊이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우리가 일본의 참선 단체와 함께 합동 용맹정진을 할 때였습니다. 두 개의 다른 참선 그룹이 함께 진행할 시간표를 만들어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내가 선사님께 공양을 하는 데 한 시간은 걸리고 공양시간에 해야 하는 염불도 많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공양은 따로 하지.'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10여분 동안 스님과 나는 왔다 갔다 하며 상의하였습니다. 나는 공양도 함께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선사님이 말했습니다.
"OK. 무슨 일이든 OK."
내가 감사하게 여기는 것은 스님이 기꺼이 내 의견에 귀를 기울여 스님의 결정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선사님과 함께 콜로라도에 있었을 때 산으로 하이킹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보통 때처럼 선사님은 항상 신던 하얀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바위를 잘 탈 수 있을 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한 마리의 산양처럼 민첩하게 산을 탔습니다. 스님은 두려움도 없이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잰걸음으로 걸으면서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17. 선사님의 차를 몰던 날 - 데이비드 레더모어-
1984년 동안거(冬安居)를 막 마치고 어떤 모임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무량 스님이 프라비던스에 온다기에 내가 자원하여 그를 데리러 가기로 하였습니다. 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때 마침 선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차는 선사님의 차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차를 몰고 시내로 갔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석 달 만에 처음으로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노래 '로잘리타' (락 애호가들 사이에 고전으로 인식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히트 곡)가 나왔고 나는 볼륨을 높였습니다. 교차로에 다가갔을 때 신호등이 바로 녹색으로 바뀌어 나는 그대로 차를 몰았고, 그 때 차는 무언가에 부딪치더니 획 돌아 소화전을 받아 버렸습니다. 프라비던스 소방서 앞에서 트럭과 충돌한 것입니다. 선사님의 차는 심하게 찌그러졌습니다.
맑은 마음, 맑은 마음 --- 오직 모를 뿐.
사고 보고서를 내고 무량 스님과 함께 차를 불러 타고 돌아와 잠을 잤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선사님이 월례 독참(獨參)을 하는 날입니다.
나는 아침 좌선을 시작하자마자 첫 번째로 독참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일러 아무도 스님에게 차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은 너무나 명백하였습니다.
차를 망가뜨린 나에게 얼마나 야단을 치실까? 나는 독참을 하러 방에 들어가 절을 하고 말했습니다.
선사님, 지난 밤에 제가 스님의 차를 몰다가 사고를 냈습니다.
오, 자네는 괜찮아?
예, 스님. 그런데 차가 부서졌습니다.
아, 곧 새차가 되어 나오겠군!
그것으로 그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독참을 진행하였습니다.
세계를 향해. 오직, 모를 뿐을 외치시고.
세계일화를 실천하신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번 글을 올리면서, 다시금 스님에 관한 일화를 읽는 연을 맺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