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사평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김현서
나는 기억을 산란하는 나비예요
해밀턴 호텔 옆 내리막길
그날의 비명소리는 아무리 뽑아도
풀뿌리처럼 계속 자라나고
한 겹 한 겹 용암처럼 굳어가는 주검 위를 맴도는
나는 기억을 수색하는 나비예요
압사된 알전구의 흰자위는
빨갛게
노랗게
퍼렇게
마지막 숨소리를 쥐어짜 입구를 밝히는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박동 소리는 가빠지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울음이 차례로 만개해요
산 제물이 마지막 힘을 모아 축조한
문명의 묘실에서
잠시 날갯짓을 멈추고
나는 죽음을 파묘하는 나비예요
나는 중심을 잃고 팔랑거리는 꽃 한 송이
먼 팽목항의 소금 바람이 떼 지어 날아오면
만장기 앞세운 꽃상여가 요령을 흔들며
사라진 발자국을 찾아 잿빛 하늘로 떠나고
나는 이제 망각의 문을 열고
나는 이생을 떠나야 하는 열아홉 나비예요
---애지 겨울호에서
약력
1996년『현대시사상』등단, 2007년『한국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나는 커서』『코르셋을 입은 거울』, 청소년시집 『숨겨 둔 말』『탐정동아리 사건일지』, 동시집 『짜! 짜! 짜!』『수탉 몬다의 여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