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 자본을 끌어들이려고 일제에 의해 추진되었던 만주 이스라엘 건국 프로젝트
유대인들을 복어처럼 맛있지만 위험한 존재라는 뜻에서 복어계획(fugu plan)이라 명명하였다.
이 계획이 성공되었으면 일본은 2차대전 승전국이 될 확률이 아주 높았고 한국은 수십년 이후에나 독립했을 가능성이 있었고 독립했다하더도 지금의 중국내 소수부족이나 주변 나라처럼 훨씬 일본의 종속적인 지배하의 독립이였을 수도 있다고 평한다.
복어계획 (河豚計劃)
복어 계획이란 이름은 1938년 7월에 이누즈카 고레시게가 한 연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당시 유대인의 경제력과 정치력을 높이 평가한 이누즈카는 유대인의 일본배치에 대해 매우 득이 되는 일이긴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거대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누즈카는 이 이면성을 고급요리이나 맹독을 가진 복어에 빗대어 유대인 이주계획은 복어요리와 같다라고 발언하였다.
후에 미국의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가 이 계획에 대한 연구서를 집필하면서 이 비유를 빌려 복어계획이란 명칭을 붙이면서 명칭이 정착되었다. 하지만 이 명칭은 당시에도 비공식적으로만 사용되었다고 한다. 복어계획의 핵심은 수천에서 수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만주국으로 정착케 하여 유대인의 자본을 만주국 건설에 사용하고 아울러 일본에 대한 자본유입을 실현하도록 미국(특히 유대계 미국인)을 설득하는 데 있었다.
입안자들은 유대인의 이주 및 투자획득의 방법에 관한 풍부한 안들을 제시하였다. <유력한 유대인을 이용하여 미대통령 및 그 측근의 아시아 정책을 일본제국에 유리한 쪽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에 대하여>라는 긴 제목을 가진 계획서가 그것이다. 1939년 6월에 제안된 이 보고서는 동년 7월에 <유대자본 도입에 관한 연구와 분석>이라고 개칭되어 정부에 제출된 후에 승인을 받았다.
계획서에서는 유대 사회와 미국, 이 쌍방의 환심을 사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즉, 미국으로 대표단을 파견하는 것과 유대교와 신도의 유사점을 미국의 랍비에게 소개하기 위해 또 유대인과 유대교를 일본인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랍비를 일본에 초빙하는 것 등이다. 동시에 이 계획은 미국의 신문 및 영화업계를 끌어들이는 것도 제안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서 내용의 대부분은 이주계획에 할애되었다. 상하이 근교의 여러지역이나 만주의 많은 지역이 이주 예정지로 제시되었다.
입안자들은 유대인 이민의 인구를 18,000명에서 600,000명에 이를 것이라 추측했다. 각각의 상정인구 규모에 맞춘 학교, 병원 등 인프라 정비, 거류지의 면적에 관한 상세한 대비자료도 제시되었다.
이러한 이주지에서 유대인에게 문화, 교육면의 자치에 더하여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기로 계획자등의 사이에 합의되었다.
일본인은 유대인에게 과도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의 자유는 그들의 호의와 경제적 혜택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유대인 거류지는 얼핏 자치국가와 같이 보이지만 유대인을 은밀하게 감시하기 위한 통제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하고 이 계획을 승인하도록 정부에 요청했다. 입안자들은 유대인이 <시온 의정서>에 의해 여러나라에서 실시한 것처럼 지배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정치, 경제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획은 결국 유대인 거주지에의 투자 및 이민의 송치를 세계의 유대인 커뮤니티에 일임하였다.
원래 이 계획은 일본 정부내에서도 소수의 인사 및 군 당국의 아이디어였다. 이 그룹의 주된 멤버는 <유대 전문가>로 알려진 육군대좌 야스에 노리히로와 해군대령 이누즈카 고레시게, 닛산의 총수였던 아이카와 요시스케 및 관동군의 대륙파(만주 진출을 요구한 군벌)등이었다.
아이카와는 1934년에 <독일계 유대인 5만명의 만주이주 계획에 대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5만명의 독일계 유대인을 만주에 받아들여 동시에 유대계 미국 자본을 유치함으로서, 만주개발을 촉진시킴과 동시에 만주를 소련에 대한 방벽으로 삼는 구상을 입안했다.
관동군 내에서 후원자를 얻은 그는 1937년에 니혼산업을 개편하여 만주중공업 개발회사를 설립하고 만주로의 본격적 진출을 완수했다. 만주국에 유대인을 이주시킨다는 그들의 구상은 유대인이 많은 자금이나 정치 권력, 및 그것들을 획득하는 초자연적이라고도 표현해야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독일계 유대인출신의 미국인 은행가 제이콥 쉬프(Jacob H. Schiff)를 기억하고 있었다. 30년 전에 쿤 로브 상사를 인솔하는 그가 일본정부에 제시한 거액의 투자(전비의 약 40%)로 인해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입안자들은 <시온 현자의정서>의 기술내용을 액면 그대로 신뢰하고 있었다.
1897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된 제 1회 유대 민족주의자 회의의 비밀회의록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유포된 이 반유대위서는 세계의 정치, 경제적 지배를 획책하는 국제적인 유대인의 음모의 존재를 나타내는 증거로 여겨져 위작의 의혹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계에 널리 영향을 주었다.
나치 독일의 이론적 지도자로 알려진 알프 로젠베르크도 1923년에 본 서의 해설서를 출판하였다. 일본정부의 핵심지도층에서도 유대인의 경제력이나 정치력, 국제적 정보망을 과대평가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에서 박해받고 있는 유대인을 구출하는 것으로 일본에 대한 재미유대인으로부터의 확실하고 영속적인 호의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당시 미국내 유대인 거부였던 제이콥 쉬프, 일본의 계획은 이들을 끌여들어 경제활성화 및 미국과의 관계개선이었다.
1918년에 일본은 러시아 혁명의 진압을 명목으로 시베리아 침공을 실시하고 적군(赤軍-볼셰비키)과 대치중이던 백군(白軍 - 멘셰비키)을 지원했다. 10만명의 병력과 9억엔의 경비를 투입했지만 3천명의 사망자만 냈을 뿐 성과도 없이 일본군은 1922년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백계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혁명은 유대인에 의한 음모이다라는 반유대주의 음모론이 퍼지고 있었다. 이 소문은 레닌을 트로츠키, 카메네프, 스베르드로프 등 많은 유대인 출신의 사상가들이 러시아 혁명지도층에 참여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백군은 <시온 의정서>의 사본을 병사들에게 배포하여 시베리아와 만주의 백계 러시아인은 가는 곳마다 반유대주의 사상을 선전했다.
이런 반유대주의 정보를 접한 사람중에는 야스에와 이누즈카 같은 복어계획의 핵심인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시베리아에서 <시온 의정서>의 존재를 알고 유대 음모론의 세례를 받았다. 1922년에 귀환한 그들은 유대인에 관하여 많은 보고서를 썼다. 야스에는 1924년에 저술한 <세계혁명지 이면>에서 시온 의정서의 전역을 게재했다.
또 1928년에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이주지를 방문하여 하임 바이트만(헤브리 대학의 창설자) 및 벤 구리온과 회담한 후 유대인 정착촌에서 그들의 근면함과 힘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일본 외무성이 유대인에게 관심을 갖게하는 데 성공하게 해 이후 일본의 모든 대사관 및 영사관 직원은 주재국의 유대인 동향을 외무성에 계속 보고할 것을 지시받았다.
방대한 보고서가 올려졌지만 국제적 음모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증명하지는 않았다. 유대전문가들은 그 후, 소위 대륙파와 어느정도 협력했다. 관동군의 육군대좌이던 이다가키 세이시로 및 중좌 이시하라 칸지가 주도하던 대륙파는 일본으로부터 식민개척자나 자본을 만주에 유치하려고 했지만 난항을 겪었다. 이것이 이주계획자들에게는 복어계획 실행의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1933년 8월, 만주의 하얼빈에서 발생한 유대인 피아니스트 시몬 카스페(Simon Kaspe)에 대한 일본측의 대응은 하얼빈 거주의 유대인에게 불신감만 심어주었다. 시몬은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부호 요제프 카스페(Josef Kaspe)의 아들로, 하얼빈에서 납치된 후 12월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카스페의 손톱은 벗겨지고 귀는 잘린 후 머리에 총탄을 맞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일본인이 용의자로 체포되었지만 관동군은 재판결과 이 용의자 일본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중국인 판사를 오히려 체포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시 일본인 판사에 의한 재심의 결과 피고에게는 10년~15년의 중형이 내려졌지만 다음주에 특사에 의해 석방되고 말았다.
일본군부를 신뢰할 수 없게 된 하얼빈 거주의 유대인들은 이 사건 발생 2년 후에는 대부분이 시외로 대피했다.
그들의 상당수는 다시 멀리 상하이로 이주하여 상하이의 유대인들에게 시몬 카스페 사건에 대해 전파하기 시작했다. 순조롭게 진행되리라 생각했던 복어계획은 의외의 문제로 인해 큰 벽에 부딫쳤다.
1937년에 야스에는 하얼빈에서 현지 유대지도자 아브라함 카우프만 등과 회담하고 <불공정한 재판에 대해 반성했다>라며 그들을 설득했다. 12월 26일에 제 1회 극동 유대인 대회가 요제프 카스페 소유의 모데룬 호텔에서 열렸다. 관동군의 인가 아래, 3일간의 예정으로 개최된 이 대회에서 일본육군은 야스에를 비롯하여 당시 하얼빈 육군 특무기관장을 맡고 있던 육군소장 히구치 기이치로를 파견했다.
이 자리에서 히구치는 독일의 반유대 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하여 참석한 유대인들로부터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이 사실을 안 독일외상 립벤트로프가 주일 독일 대사를 통해 강력히 항의했지만 상사였던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가 히구치를 옹호했기 때문에 독일측도 더 이상의 강경한 태도는 보이지 않는 선에서 일은 마무리되었다.
이듬해인 1938년 1월에 관동군은 <유대민족 시책요령>을 책정하고 세계각지의 유대인을 포용, 통합한다라고 하는 원대한 목표를 정했다. 또 하얼빈에서 유대인 자치구 건설에 관한 구상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제 2회, 제 3회 극동 유대인 대회가 개최되었다.
일본정부는 대 유대인 정책에 관한 일련의 지침을 1938년 12월에 개최된 5상 회의에서 논의했다.
◆ 당시 유대인 이주를 계획한 신칭(현 장춘) 관동군 사령부의 모습
당시 일본각료들은 중대한 양자택일을 강요당했다. 독일과 일본의 동맹관계는 해마다 돈독해져 가고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을 돕기위한 계획은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위태롭게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1월에 발생한 <수정의 밤>사건에 분노한 유대인에 의한 독일제품의 불매운동은 유대인의 경제력 및 세계적인 결속의 증거라고 생각되었다.
또 일본이 유대인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면 이것이 결정적 기회였다. 왜냐하면 많은 유대인이 유럽에서의 박해를 피해 망명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내각은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이날 회의는 한 밤중에 이를때까지 계속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진행되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내려진 합의에는 <유대인 대책요강>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 문서에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동맹관계를 존중하면서도 유대인 배척은 인종평등의 정신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리고 이하의 3개 조항을 방침으로 정했다.
1. 현재 일본, 만주, 중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타국민과 동등하게 대우하여 특별히 배척하거나 대우하지 않는다.
2. 일본, 만주, 중국에 입국하려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외국인 출입국관리규칙에 준하여 조치한다.
3. 유대인 이민을 적극적으로 일본, 만주, 중국에 유치하는 일은 피하는 대신 기술이민, 자본이민 등 특별한 이용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허용한다.
이 방침은 물론 인도적 정책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일본 및 만주국의 권익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치적 이유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미관계의 악화에 의한 물자부족과 기술혁신의 지체로 만주국 경제는 쇠퇴해 가고 있었다.
이것을 타파하기 위한 비장의 카드로서 일본은 유대자본의 도입을 도모했던 것이다.
일본정부는 계획의 진행을 일단 허가했지만 1936년에 독일-일본 방공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독일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할 행위는 특별히 실시하지 않았다. 이후 몇년간 계획자들과 유대인 커뮤니티의 멤버들이 참가한 회의가 빈번히 이루어졌으나 계획은 더 이상 제도적 수단에 의하여 진척되지 않았다.
1939년에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지원분산을 염려한 상하이의 유대인이 상하이로의 유대난민 유입을 더 이상 허가하지않게 일본당국에 요구했다. 극동 유대인회의 의장이었던 카우프만은 기자를 통해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풀도록 미국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의 측근인 세계 유대인회의 의장인 스티븐 사무엘 와이즈는 일본에 대한 협력은 매국행위라는 강한 견해를 나타냈다.
1940년에 재미 유대인 유력자와의 사이에 연줄을 가지는 MIT 출신의 재미파견직원인 타무라 히카루가 와이즈르 만나 복어계획에 대하여 설명했지만 역시 거절당하고 말았다. 또 1939년에 소련이 독일과 독소불가침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유럽의 유대인이 소련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이송하는 계획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같은 해에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단인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었다. 폴란드의 유대인은 피신하여 일부는 인접국인 리투아니아로 대피했다. 하지만 1940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소련은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 3국을 차례로 합병했고
이에 따라 탈출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9월에는 일본정부와 독일이 삼국방공 협정을 한층 더 발전시켜 독일,이탈리아와 일본은 삼국 군사동맹(삼국동맹)을 체결했다.
그 다음날, 도조 히데키는 야스에의 다렌 특무기관장직을 박탈하고 예비역에게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했으며 같은 해 12월에 개최예정이던 제 4회 극동 유대인 대회를 중지시켰다.
◆ 나가사키의 유대인 거주지였던 베이트 이스라엘 시나곤
1941년에는 미일간의 평화교섭이 결렬되어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유대자본 도입의 길은 완전히 막혀버려 내외정세의 악화에 따라 복어계획은 실질적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일본정부는 주요 도시나 항구 근처에 다수의 유대인 난민을 방치하는 것을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다.
이에 의해 1941년 8월에 고베의 유대인을 상하이에 재배치하기로 결정되었으며 난민 도착이전에 고베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만 정주권을 인정받았다. 6월에는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에 선전을 포고함에 따라 블라디보스톡과 쓰루가를 연결하는 배편은 운항이 중지되었다.
진주만 공격 직후 일본은 상하이 전역을 점령했다. 유대계 미국인으로부터의 자금원조 및 모든 연락은 영미 대적통상법에 따라 사실상 두절되었다. 법적으로 상하이에서의 유대난민에 대한 연락 및 원조에 관한 미국 재무성의 규제가 상당히 느슨했지만 미국의 유대인조직은 강한 애국심을 보이며 반역활동의 계기를 주지 않도록 주장했다.
1942년에 일본정부는 이미 유명무실화되었던 유대인 지원을 완전하게 중지하고 5상회의 결정인 <유대인 대책요강>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했다. 1942년 6월에 게슈타포의 아시아지구 사령관으로 주일독일 대사관 경찰담당관을 맡고 있던 통칭 바르샤바의 학살자로 불린 요제프 마이징거는 히믈러의 명령으로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그는 일본정부에 대해 상하이 유대난민의 처리를 강요하면서 아래의 3개안을 제시했다.
1. 황푸강에 있는 폐선박에 유대인을 실어 보낸후 동지나 해역에서 수장시킨다.
2. 암염탄광에서 강제노동에 종사시킨다.
3. 양쯔강 하구에 수용소를 건설하고 유대인을 생체실험의 도구로 사용한다.
마이징거는 히틀러 및 히믈러의 <최종해결계획>을 아시아에 반입했다. 이 안은 야스에를 경유해 외무상이던 마쓰오카 요스케에게 전달되었지만 일본정부는 이 계획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마이징거의 계획은 축소되어 상하이의 유대인은 특정지구에 거주하는 것을 강요당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을 금지되었다.
이후 종전 때까지 유대난민에게는 상황은 좋아지기는 커녕 악화되었다. 유대인 지도자 중에는 형무소로 보내진 사람도 많았다.
또 많은 유대인은 기아상태에 허덕였으며 연합군 기체에 의해 종전 수개월 전에 수용시설이 폭격을 당하기도 했지만 고난끝에 억압에서 해방되었다.
야스에, 이누즈카 등에 의해서 구상된 복어계획은 실패한 작전이었다. 일본(혹은 만주국)으로 이주할 수 있던 유대인은 그 수가 많지 않았으며 비자를 신청해도 도항할 수 있던 사람은 극소수였다. 또 고베나 상하이에 이주한 유대인은 밀 그대로 몸만 일본에 온 비천한 난민에 불과했다.
야스에나 이누즈카가 기대하고 있었던 유복하고 자비깊은 미국인 은행가나 기업의 지도자 등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로부터 일본에 호의나 원조를 얻어낼 영향력 등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복어계획은 일시적이나마 실시된 일본의 친유대 정책에 의해 수 천명의 유대인이 나치 독일의 박해에 의한 죽음을 피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