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하기 좋은 시조 1
1. 달아공원에서 / 이달균
어제 한 화가의 부음訃音을 들었습니다
코끼리 어금니를 닮았다는 바닷가
내 안의 나이테를 헤며 가만히 걸어봅니다
딱히 추억할 일도, 버려야 할 무엇도 없이
적막에 기대어 이름 불러보지만
세월은 너무 견고하여 몰입은 쉽지 않네요
안개인가 어스름인가 섬들 지워지고
둔탁한 생각들이 발끝으로 밀려날 때
태양은 시한부로 지는지 붉음을 더해가네요
바람의 반대편으로 이주하는 새들은
비진도 어느 깃 접을 숲이나 봐두었는지
선두의 힘찬 날갯짓이 이른 밤을 재촉합니다
해진 마음이야 이쯤에서 기워야겠지만
밀물의 거리를 재는 달빛이 밀려들어
일몰은 늘 하는 일인 양 어둠을 불러옵니다
*달아공원 : 경남 통영시 산양면에 있는 공원 .
―시조집 『달아공원에 달아는 없고 』 2024.5
2. 노인과 세 아들 / 김강호
아내 잃은 노인은 술독에 빠져들었고, 검은 안개 차올라 앞을 볼 수 없어서
눈물 반 고통 반으로 절망의 강 건너네
노인은 의사였고 아들 셋도 의사였는데, 아들 모두 앰뷸런스 바퀴보다 바빠서
잠시도 애비 보러 올 생각조차 못 한다네
요양원 구석 자리 어둠이 똬리 튼 날, 노인의 혀끝에서 언어가 오그라들고
답답한 가슴팍에는 더듬이만 켜 올랐네
노인이 마른 몸에서 맑은 영혼 일으켜, 그믐달 빈 배 삼아 하늘 여행 가신 뒤
덩그런 눈물자리엔 국화 그늘 깊었네
ㅡ반연간 《서정과 현실》(2024, 상반기호)
3. 액자를 걸며 / 조우리
애초에 물에 젖지 말아야 했었다고
뿌리가 적응하던 이하 빈칸 밤 귀 앞에
오래된 피라미드가 말을 걸고 있었다
투명한 장례식에 새들이 몰려왔고
가족 돌봄 하나뿐인 간병인 빈민의 삶
물 마른 산호초들이 짙은 까닭 되곤 했다
색깔이 참 예뻤던 농아인 홈스쿨링
두 등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 때문인가
거대한 잎이 되어버린 그림자란 벽의 근작
더운 비 피하려고 참 쉽게 저지르는
입춘 무렵 요양병원 우리 말 기다리며
장애인 작가의 구화 수평계를 재고 있다
ㅡ계간 《시조시학》(2024, 봄호)
4. 추분 / 박은영
가만히 있다 보면 온몸이 아파왔다
빈 젖과 고요 사이 돌고 도는 찬 기운,
아프다
목이 마르다
배고픔도 잊었다
한평생 이골이 난
모성의 후유증
자식들 보내고서 방안에 홀로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길어지는
밤의 궤도
시간아 세월아 어서 가라 어둠아
이 어둠, 내가 되고
나의 눈이 어두워
갈바람 소리를 따라 저려오는 뼈마디,
외롭다
고독하다
아무리 외쳐 봐도
귀 세워 들어주는 사람은 곁에 없고
통증만 오롯이 남아
긴긴밤을 건넌다
ㅡ계간 《가히》(2024, 봄호), 경계에서의 글쓰기
5. 물보라의 책 / 김보람
기억의 영토에 우기가 찾아왔다
요란한 모래바람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입김은 느낌표가 되어
구름을 통과한다
앞사람을 따라가면 다시 첫 장면이다
그것이 삶이라니
오늘의 오늘이
반복이 등을 맞대고
창문을 삼키는 밤
잊었지만 잊지 못한 누군가를 들인다
이 마음이 무엇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돌려 읽은 울컥,
ㅡ 격월간 《현대시학》(2023, 11-12월호)
6. 인동초 / 류현서
새순 하나 틔우려고 딛고 선 모진 겨울
죽은 듯 마른 줄기 생각만은 꼿꼿 살아
벼랑 끝 틈새 붙잡고서 금은화가 필 날을
하고픈 말 많았어도 꾹꾹 눌러 삼킨 눈물
참나무 등걸 같은 굵어진 손마디로
오로지 하늘만 섬겨 한 세월 갈아엎었다
정이란 내리사랑 넝쿨넝쿨 뻗어가서
저것 봐 눈빛 데울 등불을 밝히잖니
날 세운 칼바람 다시 귀에 윙윙거려도
산다는 건 아무래도 한 페이지 신문인 걸
때로는 고뇌하고 때로는 웃음 짓고
한 줄기 햇살 속으로 꽃향기가 퍼져간다
ㅡ시조선집 『현대시조 대표작』 알토란북스
7. 시골 수의사의 하루 / 김현장
1.
십수 년 소를 키워온 유 노인은 직감했어
산통은 초저녁부터 시작되었지 목쉰 성대에 걸려 전신을 가르는 신경 다발들 하루를 충전기에 풀어헤치던 휴대전화의 선을 타고 흐르는 송아지의 속울음이 환청처럼 들려왔어 길 위엔 여위어가는 새파란 보름 달빛
끈질긴 난산의 고통이 골반에 갇혀있었지
2.
송아지 첫울음은 담배 연기와 혈흔에 쌓인 채
고개 들고 몸 흔들어 머리받이 물 털어내고, 기관지에 걸린 이물질도 가쁜 호흡으로 뱉어내면 마침내, 빼꼼히 열린 문틈 사이로 초조하던 달이 찬란하게 눈을 맞추지 달빛이 구석구석 핥으며 심장박동 확인한 순간, 뜨거운 혀의 돌기들이 몸 일으켜 세우지
시간이 내려온 커튼을 반으로 접는 새벽
ㅡ계간 《시조시학》(2023, 가을호)
8. 못의 노래 / 신춘희
직선으로 태어나 직립으로 살다가
곡선으로 휘어져 세상에 버려졌다
증오와 적개심 속에 온갖 풍상 다 겪었다
쓰레기더미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면서
조금씩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녹들의 붉은 온기가 서슬 품는 풍화도 겪었다
계절의 순환이 바깥을 돌아갈 때
안타깝던 순간들을, 조금씩 밀어내며
귀천의 자유를 위해 나는 비상을 꿈꾸고 있다
ㅡ계간 《시조미학》(2023, 가을호)
9. 사실은 / 김의현
아세요? 하마는 헤엄을 못 친대요
동물원 홍수 때 괜찮다며 두고 갔는데
복구 후 돌아와 보니 모두 죽어 있더래요
그냥 둥둥 떠다니며 잘하는 척 했던 거죠
사실은 못한다고 더 이상은 무리라고
엎드려 운적도 많았다고 말하고 싶었지요
잘하는 척 괜찮은 척 태연한 척 무심한 척
사실 나도 척척 몇 개 등에 업고 끌어안고
빈약한 생의 손잡이를 간당간당 잡고 가요
ㅡ계간 《나래시조》(2023, 여름호)
10. 해오라비 난초꽃 / 장지성
한 점 티도 없이 속살까지 얼비치는
골바람 습지 찾아 뿌리 내린 누대의 삶
귀하고 어여쁜 것이 죄 될 리 하나 없을.
바라만 보는 것도 행여나 부정 탈까
뭇사람 손길 피해 철조망 펜스 속에
이제 막 둥지를 떠나 나래 펴는 첫 비행.
이 세상 모든 생명 누리는 제 몫이기
어쩌면 도감圖鑑에서나 볼 수 있을 절종으로
올해 또 철리 길 달려 열어보는 조리개.
먼 훗날 꽃말처럼 꿈에서 반겨 만나
저녁 놀 산그늘에 기약을 묻어두고
홀연히 깃털을 떨치며 바람 앞에 섰는가.
11. 클로버 / 김보람
오늘을 안다고 오늘만 살 순 없잖아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과 없음을
점칠 수는 없듯이
들판을 수색하던 무리들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아닌 곳을
아무것도 없는 곳을
말없이
가로지르다
점점 더
눈이 멀었어
가만히를 생각하다 예감에 휩싸인 초록
찾던 것이 무엇인지 차분하게 잊혔어
있잖아, 그런 거 있잖아
행운은 어디에나
12. 어긋난 처방 / 박희정
일상이 어긋나고 기분마저 놓쳤다
가벼운 감기였건만 골 깊은 환자처럼
두툼한 약봉지 들고
탈레탈레 돌아왔다
끼니마다 챙길 약이 예닐곱씩 빼곡하고
절망 또한 희망 같은 불안한 숨소리에
억지로 삼켜야 할 것들
동그마니 나앉았다
감기를 볼모삼아 덤터기 씌우는 건지
환자를 걱정하는 적절한 처방인지
뒤엉켜 더 까칠한 생각
어슬어슬 겉돈다
ㅡ계간시조전문지 《나래시조》 2023년 봄호.
13. 윤슬 농현 / 정수자
보았는가, 저 꼼질은 틀림없는 물이렷다
다가서면 스러지는 모래노래 아니라
사막 속 윤슬을 켜는 신의 미소 같은 것
무현無絃의 농현弄絃처럼 사물대는 물비늘들
가히 홀린 눈썹을 술대 삼는 신기루에
다저녁 물때를 놓치듯 버스도 지나칠 뻔!
잡아보려 다가서면 고만큼씩 멀어지던
시라는 술래 같은 아지랑이 멀미 속
줄 없는 거문고 타듯 물의 율에 떨었네
ㅡ계간 《가히》(2023, 봄/창간호)
14. 강에도 섬이 있다 / 옥영숙
실개천이 몸 섞어 큰 강에 안겨들 때
볕 좋은 모래밭을 몰래 키운 삼각주는
청류도 당근과 우엉을 기름지게 키워냈다
느닷없이 시행한 사대강 사업으로
멀뚱멀뚱 지켜보다 동강나는 물의 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창녕함안보에 갇혔다
선택의 여지없이 새로 쓰는 지적도에
굳세게 뿌리 내린 잎사귀도 시들고
공터의 메마름으로 덤불만 적나라하다
선버들 우듬지에 뭇별이 걸려있고
주변에 셋집 얻은 새들만 오고갈 뿐
스스로 무성해진 섬, 먼 산만 바라본다
ㅡ계간 《열린시학》(2023, 봄호)
15. 폐차장 생이별 / 이남순
어디에 병이 났나, 몸의 문 열었더니
번다한 생의 레일 저리게 건넜던가
살아온 소용돌이에 바퀴 이미 뽑혀있다
따박따박 돌아오는 사글세 무서워서
날품마저 놓칠세라 새벽길 허둥댈 때
잽싸게 눙치고 매친 브레이크 안 잡힌다
살림이 불어날 즘 하필이면 전세대란
이정표는 어디 있나 유턴인가 직진인가
떨리는 손잡아 달래던 핸들도 휘어졌다
내 삶의 비화들을 밀고 끌고 예까지 온
녹물 번진 마디마디 주저앉은 관절 위로
노을이 큰 품을 열어 너 가는 길 감싸준다
ㅡ연간지 『오늘의시조』(오늘의시조시인회의, 2023)
16. 쓸쓸한 사과 / 이태순
지상의 불빛들이 모퉁이에 몇 점 피는
살얼음 낀 오늘이 마지막 영업이라며
삼거리 마트 여자가
쓴웃음을 짓는다
귀띔 없이 넘겨버린 땅 주인 얘길 하며
시들하긴 하지만 먹을 만 하다고
한 봉지 묵은내 나는
사과를 건네준다
사과를 받지 못한 입을 막은 기침소리
모퉁이 남은 불빛 몇 점이 툭툭 지고
한 봉지 쓸쓸한 정을
사과를 안고 왔다
ㅡ연간지 『오늘의시조』(오늘의시조시인회의, 2023)
17. 인력 시장 / 김도솔
별조차 얼어붙은 칼바람 새벽 거리
오늘은 행여라도 이름이 불려질까
기나긴
하루를 팔러온
푸른 수의 푸른 손
하릴없는 연장들만 무게로 짊어진
톱 망치 대패 줄자 끌 타카 먹통이며
수평의 기울기마저
꼭짓점을 잃었다
햇볕에 언 몸 녹이는 담장에 기대서서
내뱉는 담배 연기보다 한숨이 더욱더 긴
내일은 나아지리라
스스로를 속이는
하루치 주린 목을 소주잔에 채우고
웅크려 처진 어깨가 대문 삐걱 들어서는
아버지,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가 된 사람들
ㅡ계간젊은시조전문지 《나래시조》 2023년, 봄호
18. 달빛과 새재를 동행하다 / 김도솔
거친 맞바람에 세월을 짊어지고
등 시린 그림자 하나 새재로 들어서면
옛길이 온 가슴 열어 시린 등을 끌어안는다
적막을 유영하던 개똥벌레 불 밝히며
반갑다 어서 오라 손짓하듯 반겨주고
흙길은 지친 두 발을 부드럽게 감싸준다
윤슬이 부려놓은 물그림자 들며 날며
어둠을 여미는 고즈넉한 계곡물소리
교귀정 말 없는 정이 쉬어가라 발 붙든다
새들은 잠을 청할 둥지를 찾아들고
계곡물 돌 틈에서 꾸구리도 잠이 들면
그림자 휘청이는 밤을 달빛이 도닥인다
한 모금 약수로 가쁜 숨을 축여가며
시오리 굽잇길 저미고 편 이 길에다
세월을 내려놓고서 처진 어깨 활짝 편다
ㅡ문경새재전국시낭송대회 지정시
19. 뿌리 깊은 잔상(殘像 )/ 김도솔
먼 길 출타했다 돌아오는 길이면
정류장 근처 딸네 집을
바람처럼 들려서
무심히
냉수 한 사발
목마르다 청하신다
단칸방 낮은 문턱 발 들이지 않으시고
손주 손에 쥐여주는 손때묻은 동전 몇 닢
지그시
내려다보시며
머리 한번 쓰다듬고
정류장을 향하여 바쁜 걸음 재촉하는
여백 속에 오롯한 아버지의 뒷모습
두고 간
마음 큰 자락이
가슴에 박힌 깊은 잔상
ㅡ계간 젊은시조전문지 《나래시조》 2023년 여름호, 5인 초대석.
20. 모란인력 식구 되기 / 정두섭
쫄딱
방을 더 줄일 수 없어 넓히려고 박는 못에
주렁주렁 걸리기 싫어 철없는 못은 운다
세상에 못에 철이 없다니, 잘못 박고 있는 걸까
인형 뽑기
공중의 크레인이 한 사내 뽑아 든다
가던 눈 멈칫하고 일대가 조용하다
추락과 안착 사이에 모란인력 문이 있다
왕년
공치고 답답한 속 전봇대 아래 한 사발
끝 간 데 없는 한줄 허공 낮술 취한 까치 까치
앞날이 노랗다 노래, 괜히 맞은 아이 울음
부의
이름 석 자 휘갈겼다가 나도 나를 잘 몰라서
'모란인력 잡부 정씨' 아닌 것만 같아서
'석남동 잡부 대머리 정씨'를 공손히 내밀었다
함바
일대의 땟국물들 그림자 벗고 앉아
목덜미 어루핥는 그늘을 여축한다
남기면 벌금 오천 원, 장식은 오직 저뿐
ㅡ계간 《정음시조》(2023, 5호)
21. 신발론論 / 김수엽
하나의 지구地球 위에 내 길을 만든 운명
더러는 유리 조각
때로는 돌멩이에
찢기고
형체 무너진 내 삶의 이력서
낮 동안 분주하게
발 냄새 저장하다
점심때 현관에서 밟히고 차여도
주인을 탓하지 않는
그 입이 무거운 당신
바쁘게 걸어온 삶 너덜너덜 피부마다
병원에 가 기우고
잘라내고
광도 내지만
이제는
정년퇴직 후
안식년에 든 그 사람
22. 기억하시나요? / 강영임
무성하게 자라는 그리움이야 말할 수 없지
무지랭이 거지처럼 두 다리 끌어안아
외롭게 누운 그림자가 내 안부를 묻습니다
당신은 칠월 땡볕 뒤주에 갇혀서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고 그믐처럼 야위어
죽어도 지워지지 않을 누런색이 떴습니다
눈 뜨면 멀어질까 눈 감으면 잊힐까
오므린 손금처럼 울음을 오므리고
흙물 져 아린 스물일곱에 내 곁을 떠났습니다
오래전 나눈 말들 화석이 되어가고
그해 여름의 말 가슴에 웅크렸습니다
언제쯤 아비와 아들로 또다시 만날까요
ㅡ오늘의시조시인회의 『물고을 꽃성』(가히, 2023)
23. 진눈깨비 / 박복영
해묵은 마늘내가 토방 가득 참 길다
누군가 머문다는 그 말처럼 환한데
낮아진 먹구름 아래 파닥이는 눈송이들
더 비린 싱싱한 생물이 되고 싶어
어물전 좌판이나 바닥을 헤엄치다
바람에 지느러미 세워 찾아드는 골목길
타관도 등을 뉘면 살아야 할 거처다
불빛 풀어 손짓하는 마늘내 걸음 따라
맨발로 마당에 서서 명패이름 불러본다
ㅡ계간 《정형시학》(2023, 겨울호)
24. 눈먼 날의 기도 / 이송희
눈앞은 어두웠지만
소리가 환했다
혼잣말 몇 마디가 두서없이 놓인 식탁
오늘은 와인 한 잔에
기침을 섞는다
그리고 또 그렸던 얼굴이 희미해지고
그 사람의 눈코입이 진흙처럼 뭉개졌다
머릿속 불타던 표정을
슬며시 따라 해본다
그날 이후 어둠이 내 안 가득 차올랐다
축축한 밤안개가 길 위로 깔릴 때
한동안 너를 읽느라
손가락이 짓물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득한 평원에서
눈을 잃고 그려낸 별과 달의 이야기
천년을 날아온 불새
울음이 환하다
ㅡ오늘의시조시인회의연간집 『오늘의 시조』(2024, Vol.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