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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 히타치 오디오에서 처음으로 들었던 KBS 제 2FM의 "황인용의 영팝스." 감미로운 오프닝 시그널과 함께 시작한 황인용 아저씨의 멘트. 그때부터 난 영국과 미국의 팝음악에 심취되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고... 추억과 세월... 불가분의 관계.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추억은 비단 세월의 흐름을 상기시켜주는 단순한 매게체가 아닌 "나"를 이루는 하나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황인용의 영팝스"도 그런 추억중의 하나. 안그래도 요즘 들어 갑자가 황인용 아저씨가 지금은 뭐하고 계시나 궁금했었는데 마침 3년전에 있었던 인터뷰 기사를 우연히 찾게 되어 참 반가왔다. 근데 정말 헤어스타일, 분위기, 이미지 등... 그대로 이신것 같다. 아마도 음악과 함께 하시는 인생이라 그럴까? 잠시나마 그때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다. 좋다... 이런 기분... 거대한, 회색빛 공간은 클래식음악과 커피향으로 가득했다. ‘황인용 선생을 뵈러 왔다’고 하니 직원이 한 쪽 구석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황인용(68)씨는 안경 너머로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치 세월이 붙들어 매어진 것 같았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들어보이지도, 덜 들어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서울은 아직도 덥습니까?” 황 씨는 날씨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서울에서 불과 자동차로 30여 분 거리에 살면서도, 그는 마치 만 리쯤 떨어져 사는 사람처럼 말했다. 헤이리로 들어온 지 4년. ‘만 리’는 물리적 거리가 아닌 세상과의 거리감일 터였다. 마이크를 떠난 그는 이제 자연인이자 예술인이다. 고향이 파주시죠? 이른바 귀향을 하신 것 아닙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군요, 흐흐. 고의성은 없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하면서 은퇴 이후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황 선생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만. “시각을 달리해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자신의 직업이 취미와 연결된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일 겁니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원하는 것을 얻겠지만 그래도 역시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는 건 좋은 거죠. 저는 본래 하루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 있어야 견디는 인간이었어요. 음악을 듣든, 친구들과 담론을 벌이든, 술을 마시든. 자기 자신을 위해 시간을 쏟다보면 거기서 뭔가 세계가 생기게 됩니다. 제게는 음악과 오디오였지요. 소리가 좋아서 쫓아다니다보니 노후에 하나의 동반자, 인생의 동반자로 발전됐다고나 할까요. ”황 씨는 오디오 마니아로 유명하다. 고전음악감상실 카메라타의 진짜 주인은 그런 점에서 황 씨가 아닌 오디오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카메라타의 전면 벽은 거대한 스피커 두개로 채워져 있다. 1930년대 무성영화시대에 미국 극장에서 사용하던 웨스턴 일렉트릭사의 빈티지 제품이다. - 오디오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신 겁니까?“ 70년대까지만 해도 스피커 두 개 달린 전축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지독하게 가난했죠. 74년인가 ? 대한민국 아나운서상을 탔어요.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시상식을 했죠. 아내와 같이 가서 상금 20만원을 받았습니다. 집에 오다가 그 돈을 가지고 금성사에서 나온 전축 (이라고 하기도 뭣하지만)을 샀지요. 한쪽은 스피커만 있고, 다른 한쪽은 스피커 밑에 튜너와 앰프가 달린 놈. 그게 제 개인 오디오의 시초입니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황 씨는 프리랜서 아나운서가 됐다. 프리랜서를 선언한 첫 달 수입이 200만원. 아나운서 한 달 월급이 50만원이 채 안 되었으니 무려 4배 이상을 번 것이다. 첫 수입에서 절반을 떼어 집에 가져다주고, 남은 100만원에 돈을 보태 세운상가로 달려갔다. 그 자리에서 탄노이 턴테이블과 쿼드 앰프를 샀다. 오디오 인생의 시작이었다. - 아나운서 월급이 그렇게 짰습니까 ? “말도 못하죠. TBC가 삼성계열이잖아요? 그런데 삼성그룹, 예를 들면 삼성종합상사같은 곳하고 비교할 수가 없었죠. 아나운서는 보너스도 없었어요. 중계방송을 죽어라고 해도 특근수당 400원인가 받았죠. ”사람들이 ‘황인용’ ‘황인용’하던 시절에도 그는 여전히 돈이 없었다. 70년대 후반 저명한 모 일간지 주필이 황 씨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는데 도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황 씨 집에 전화가 없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 주필이 동양방송 고위층에 전화를 걸어 “당신네 대표 아나운서가 아직 전화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레코드라는 걸 거의 사 보지 못했어요. 내가 40년생이니까 80년이면 마흔. 마흔 되도록 그랬어요. 아마 그 이후 행적을 보면, 30대 때의 빈궁함으로 맺힌 한풀이가 아닌가 싶어.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마음껏 가졌느냐 … 하면 그건 아니고. 지금 카메라타의 음향 시스템도 불완전해요. 소리 나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전원장치니 하는 것들이 오리지널이 아니거든. 그런 걸 다 갖추고 싶죠 .”- 돈도 많이 드셨죠 ? “뭐 일부 처분하기도 하고, 돈 더 보태서 바꾸기도 하고 … 1억은 넘겠죠, 아마 ? ”80년대 라디오세대에게 황씨는 ‘영원한 영팝스’이다. 오후 8시, 척 맨지오니의 ‘Give it all you got’ 트럼펫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황씨의 오프닝 멘트가 깔리고, 곧 이어 첫 곡이 흘러나오면 너나할 것 없이 우리들은 워크맨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덮어쓰고 지우고를 반복한 너덜너덜한 공테이프는 당시 10대들의 자랑스러운 훈장이었다. - 영팝스를 듣던 세대들은 황선생을 팝전문가로 여기고 있었는데, 언제 클래식으로 ‘전향’을 하신 겁니까 ? “방송에서 하도 팝을 듣다 보니까 반발심리가 생겼다랄까요, 하하하 ! 저는 사실 클래식에 대한 ‘펀더멘탈’이 매우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고전음악에 대한 본질적인 호기심이 아주 강했어요. 모르니까. ‘아, 이게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예술세계구나’하고 느꼈죠. 그렇다고 해서 팝을 싫어하거나 홀대하지 않습니다. 팝 중에도 예술차원에서 훌륭한 곡들이 부지기수죠 . 다만 클래식은 팝과는 전혀 다른 음악언어라고 할 수 있겠죠. 아마, 허영심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거예요. 클래식을 들으면 뭔가 … 하하하!”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움직이는, 그것도 크게 움직이는 사람이다. 초등학교 시절 여선생님의 풍금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중학교 때 새로 부임한 음악선생이 “얘들아, 이게 성악이란다”며 직접 불러준 가곡 ‘희망의 나라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평생 모은 LP판은 1만4000여 장에 이른다. 이 중에는 ‘김경원 박사 컬렉션’ ‘홍석현 회장 컬렉션’ 등 기증받은 것들도 있다. 한때 방송가에서 그는 ‘황육백’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누군가가 “황인용은 한 달에 600만원을 번다”고 말하고 다닌 것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90년대 얘기일 겁니다. 그땐 정말 프로그램을 많이 했어요. 아침에는 강부자 씨와 ‘황인용 강부자입니다’ 2시간, 밤에는 ‘영팝스’ 2시간. TV도 했지 … CF에도 가끔 등장하지 … 실제로 어느 해인가는 전체 연예인 중 세금 낸 순위가 6등인 적도 있었죠. 하여간 그 당시는 동료 아나운서들한테 ‘야, 황인용이가 큰 부자되겠구나’하는 이미지를 주지 않으려야 주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큰 부자’가 되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동료들보다 많이 번 것은 사실이지만 ‘돈은 그렇게 버는 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매니저를 두지 않았던 것이 후회가 된다. 그저 많이 뛰고 적게 받았다. 박리다매였지만 실속이 별로 없었다. - ‘황인용 강부자입니다’ 또한 간판 프로그램이었죠. 기억나는 에피소드 같은 것은 없으십니까 ? “‘황인용’이란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게 그 프로그램 덕이었죠. ‘황인용 강부자입니다’는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호텔에 가면 도어에서 일하시는 분, 음식점 가면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 이런 분들한테 절대적으로 인기가 있었죠. 그런데 이런 분들한테 인기 있으면 살기가 굉장히 편합니다 , 하하하! 그리고 그 효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푸하하!” 황 씨는 1980년 신군부 정권의 언론통폐합이 실시되던 당시 TBC 동양방송 소속의 아나운서였다. 그 해 11월 30일 밤12시. 그는 동양방송 최후의 방송을 한 아나운서로 기억된다 .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마지막으로 방송하며 울먹이던 그의 목소리는 당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가슴을 축축하게 적셨다. “남은 5분이 … 남은 5분이 너무 야속합니다. 10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5분이 10분이 될 수는 없습니까 ? 여러분의 가슴에 오래오래 동양방송의 기억을 소중히 묻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략) 아, 이제 동양방송은 3분입니다. 끝으로 동양방송의 호출번호를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는 … 육백 삼십 … 구 킬로헬츠 … ”황 씨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밤 11시부터 12시까지 1시간 동안 진행했다. 본래 새벽 1시까지지만 이날은 12시를 기점으로 동양방송의 전파 송출을 중단해야했기 때문이었다. “TV는 11시 30분쯤 끝났죠. 동양방송의 마지막 방송을 보기 위해 동료들과 PD들이 모두 스튜디오로 몰려왔습니다. 안에서는 나 혼자 방송을 하고, 유리창 밖에서는 수많은 직원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죠. 비장한 분위기였습니다. ”3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그날을 얘기하면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상처를 깁고 치유하는 유일한 신의 치료제이다. 준비해 온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왔습니다. 지금 눈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고, 전 국민이 황선생의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삶의 끝에서, 마지막 방송을 하신다면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인생은 뭐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지만 … 또 그렇다고 그렇게 쓴 것만도 아닙니다. 인생은 재미있는 하나의 드라마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살아볼 만 합니다 … 이 정도가 아닐까요 ?” 파주=양형모 기자 ---------------------------------------------------------------------------------------------------------------------------------------------
한국방송 해피에프엠(106.1㎒)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가 오는 9일로 방송 40돌을 맞는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틀어 한국의 현존하는 최장수 프로그램이다. 한국 라디오방송의 역사를 상징하는 이 프로그램은 1964년 5월9일 라디오전용 방송국인 라디오서울(RSB)에서 첫 방송을 시작한 뒤 이 방송국이 없어지면서 동양방송(TBC)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현재의 한국방송으로 옮겨진 것은 1980년 언론 통폐합 때였다. 이렇듯 우여곡절을 거친 40년이라는 방송역사는 최장수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한국방송 <전국노래자랑>의 2배에 이르고, 같은 시간대 경쟁 프로그램인 문화방송 표준에프엠 <별이 빛나는 밤에>보다는 다섯해가 앞선다. 지금은 은퇴한 이성화 아나운서가 첫 진행을 시작해, 70년대 양희은·서유석·황인용, 80년대 송승환·배한성·전영록·최수종·하희라, 90년대 변진섭·손무현·김정은에 이어 현재는 탤런트 신애라가 진행을 맡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을 거쳐간 당대의 스타들만해도 30여명에 이른다. 이 프로그램을 거치면서 대표적인 라디오 진행자로 전면에 나섰다. 프로그램 진행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는데요, 어느 애청자가 보내온 사진을 마이크에 붙여놓은 적이 있었죠. 마주보며 이야기하듯 진행하니 더 잘 되더군요. ‘오늘 하루도 잘 지내셨습니까… ’ 하면서요. 부담감이 줄고 자연스럽게 대화하듯 말이 나왔습니다. ” 라디오의 매력을 설명하며 이렇게 추억의 한 자락을 꺼내보인 황인용씨는 군사정권의 강압적인 언론 통폐합을 직접 겪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동양방송의 마지막 방송을 하던 1980년 11월30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70, 80년대 하루 수백통의 편지와 엽서로 보내지던 사연이 지금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들어온다는 것. 그러나 지난해 10월부터 이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신애라는 “애청자들의 훈훈하고 따뜻한 사연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정통 음악방송으로 잘 만들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신애라와 가수 변진섭이 공동 진행하는 특집 공개방송을 연다. 또 기념음반을 만들어 ‘아름다운 가게’에 1천장(1300만원 어치)을 기증하고, 9~15일을 <밤을 잊은 그대에게> 주간으로 정해 유명 연예인들과 신애라가 더블 디제이로 방송을 진행한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41살 ‘별이 빛나는 밤에’ 35살 동양방송(TBC)를 거쳐 지금까지 흘러왔다. 70년대 양희은·서유석·황인용, 변하지 않는 건 시작을 알리는 음악, 장 폴 보렐리의 ‘바다의 협주곡’이다. 이종만 선임피디는 “이 곡이 음울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3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는 듣기만 해도 추억을 떠올릴 만큼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음악평론가, 청취자 등이 함께 선곡한 40주년 기념 음반을 내놓기도 했던 이 프로그램은 하루 동안 지친 청취자의 어깨를 감싸안는, ‘세월을 잊은 그대’다. 이종환, 이문세, 이적, 이휘재, 박광현 등이 빛냈다. 그 가운데 전성기를 굳이 기필코 꼽아야 한다면, 이문세씨가 진행하던 1984~95년이 될 것이다. ‘별밤 가족’이란 낱말이 드러내듯 이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큰 몫을 한 건 ‘별밤 가족 마을’이라는 청소년 캠프와, ‘잼콘서트’, ‘정동 공개방송’이었다. 이문세씨는 “2박3일 정도 용평이나 양평에서 우리만의 공화국을 만들었던 캠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 잔디밭에 앉아 영화도 보고, 청소년들이 좋아하던 연예인들의 공연도 함께 즐겼다”고 말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를 반영해 디카, 문자 등을 이용한 꼭지들이 들어섰지만 장기자랑하는 마당인 ‘별밤 뽐내기’와 프랑크 포르셀의 <메르시 쉐리>라는 시그널 음악은 그대로다. 그 윗 세대의 벗이 돼 줬다. 비슷하게 편지쇼를 선보인 동양방송의 <황인용 강부자의 안녕하세요>가 추월해가자 1988년 이종환씨를 진행자로 내세워 프로그램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종환씨가 온 뒤 성생활 등도 솔직하게 이야기해 청취율이 올랐다”고 말했다. 이종환씨 이후엔 엠시를 두명을 내세웠고 이효춘·봉두완, 정한용·손숙 등이 거쳐 갔다. 연출을 맡았던 신권철 부장은 “아이엠에프 터지기 직전인 1996년 겨울부터 청취자들 편지에 ‘가내 공업을 하는데 수금이 안 된다’는 등 막막한 분위기가 묻어났다”며 “1997년 봄께에는 경제 분석 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프로그램 내용이 바뀌기도 했다”고 말했다. 흥을 돋구는 프로그램도 있다. 1991년 시작해 지난해 5천회를 맞은 한국방송2라디오 해피에프엠 <이호섭 임수민의 희망가요>다. 최초로 아마추어 전화노래자랑 꼭지를 마련한 이 프로그램에서 지난해까지만 계산해도 2만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노래솜씨를 뽐냈다. 하루에 6사람씩 참여하는 노래자랑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주장원전, 월장원전, 기장원전을 거쳐 결선무대에까지 오를 수 있다. 건반·기타·베이스·색소폰을 갖춘 4인조 전속밴드가 빵빵하게 반주해주고 작곡가 6명이 꼼꼼하게 평가도 해주니 폼 잡고 노래 부를 맛이 나는 프로그램이다. 박명규 피디는 “한이 맺힌 듯 이름을 바꿔가며 여러번 출연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들을 골라내는 데 애를 먹기도 한다”며 “어떻게 알았는지 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난 뒤엔 중복 출연을 고발하는 전화들이 잇따라 걸려온다”고 말했다. 라디오드라마나 다큐멘터리가 끝물이던 1988년 후발주자로 시작해 그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이영신씨부터 현재 이영미씨까지 여러 작가들이 흥미진진하게 사실을 재구성해왔다. 해설을 맡은 김종성씨는 변치 않고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처음 이 프로그램을 맡았던 정수열 엠비시프로덕션 이사는 “한번에 성우 10~15명이 출연하는데 이들에 적당한 배역을 맡기는 것도 힘들었다”며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탓에 전라도 사람에게 경상도 인물역을 줘 어색하게 돼 버린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성우들의 열의도 대단했다고 한다. 에피소드가 시간순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어서 배역이 비정기적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는데도 역을 맡기면 언제든 달려오는 성우들이 있었다. 이런 열의 덕에 이 프로그램은 여전히 중장년층의 귀와 호기심을 붙들어 두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