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서평
새로운 집과 두고 온 집
──나희덕 시집, 『야생사과』
이태희
등단 20년이 된 나희덕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을 펴냈다. 시집詩集이란 시들로 묶은 하나의 책이지만, 그것은 시詩로 세운 하나의 집[家]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녀는 여섯 채의 집을 마련한 부지런한 목수인 셈이다. 그녀의 첫 번째 집인 『뿌리에게』로부터 다섯 번째 집인 『사라진 손바닥』에 이르기까지 모두 개성적이고 다채로운 집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지만, 이번에 지은 집은 이전의 집들과는 상당히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새로운 집의 문패로 사용되고 있는 표제작 「야생사과」를 보기로 하자.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까만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지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누군가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야생사과」 전문
시인은 시집의 끝에 적은 ‘시인의 말’을 통해 야생사과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야생사과를 처음 맛본 것은 낯선 대륙에서였다. 시큼하고 떫은, 그 길들여지지 않은 맛은 과일가게나 농부의 바구니에 담긴 사과와는 아주 달랐다. 야생의 열매를 쪼는 새들처럼 그곳에서 나는 어눌한 듯 자유로웠다. 익숙한 삶과 언어를 떠나 이방인이 되어 보는 경험은 영혼의 입자를 새롭게 만들어 다른 삶으로 스며들게 해주었다.” 사실 이 ‘시인의 말’은 표제작에 대한 가장 성실한 해석인 동시에 새로 지은 집에 대한 가장 충실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나희덕 시인이 예전의 집들과 다른 새로운 집을 짓게 된 계기는 2007년 말, 미국 아이오와대 국제 창작 프로그램에 넉 달간 참가한 일이라고 한다. 위의 시에 등장하는 ‘어떤 영혼’들이란 아마도 그 창작 프로그램에 함께 참가한 세계의 여러 시인들일 것이다. 그들은 ‘붉은 절벽’을 넘나드는 존재다. 여기서 ‘붉은 절벽’이란 시인에게 새롭게 다가온 어떤 거대한 세계와도 같이 생각된다. 그 세계에 나왔다가 그 세계로 돌아가는 영혼들이 따서 준 ‘야생사과’는 시인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한다.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내 등 뒤에 서 있는 나’는 ‘과거의 나’이다. 곧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눈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위의 시에서는 ‘과거의 나’ 즉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고 진술할 뿐, 그것이 어떠하다는 진술은 생략되어 있다. 다만, ‘시인의 말’에 서술된 “기억의 되새김질보다는 생성의 순간에 몸을 맡기고 싶다”는 문장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시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과거가 미래를 만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녀가 새로운 생성의 시간을 꿈꾸며, 떠나고자 한 ‘과거’, 곧, ‘내 등 뒤에 서 있는 나’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그것은 그녀의 첫 번째 집인 『뿌리에게』의 발문을 쓴 정현종 시인이 언명한 이후 그녀의 시세계를 지시하는 대표적 수식어가 된 “모성적 따뜻함”의 세계이며, 세 번째 집인 『그곳이 멀지 않다』의 해설을 맡은 황현산 교수가 언급한 바 “단정한 기억”의 세계다. 문단의 주목과 찬사를 받으며 지켜온 그 세계로부터 시인은 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일까?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시인은 “이제 야생으로 가려고 한다. 제발 나를 ‘범생이’라 부르지 말아 달라”고 주문한 바 있다.(<중앙일보>, 2009. 5. 15) 또한 나희덕 시인은 이미 자신의 다섯 번째 시집 『사라진 손바닥』의 ‘시인의 말’을 통해 “도덕적인 갑각류”라는 말의 충격을 고백하면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딱딱하게 굳어버린 도덕적 관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새 시집은 그 동안의 절제된 언어와 균정한 시학으로 다듬어진 세계로부터 자기 탈출의 시도인 셈이다. 시인이 여섯 채의 집을 지었지만, 그 집에 항상 깃들여 살 수는 없는 법. 새로운 집을 짓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비움’과 ‘채움’의 통과의례를 겪어야 한다.
―나를 좀 지워주렴.
거리를 향해 창을 열고
안개를 방 안으로 불러들였다
안개는 창을 넘는 순간 증발해버렸다
―나를 좀 지워주렴.
짙은 안개를 들이켜고도
사물들은 여전히 건조한 눈을 비비고 있었다
―나를 좀 채워주렴.
바다를 향해 열린 창으로
안개가 밀물처럼 스며들었다
안개는 창을 넘는 순간 몸 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를 좀 채워주렴.
의자가 젖고 거울이 젖고
사물들은 어느새 안개의 일부가 되었다
심장 속에 나란히 붙은 두 방은
서로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두 방을 오가는 것은
소리 없이 출렁거리는 안개뿐
──「심장 속의 두 방」 전문
새로운 것을 향한 갈망은 나를 새로운 것으로 채우고자 함이다. 새로운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나를 비워야만 가능하다. 「심장 속의 두 방」에서 시인은 직설적 화법으로 그것을 주문한다. “―나를 좀 지워주렴.” “―나를 좀 채워주렴.”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인이 자신을 지우기 위해 “방 안으로 불러들”인 것이나 자신을 채우기 위해 “밀물처럼 스며들”게 한 것 역시 “안개”라는 점이다. 다르다면 지우기 위한 안개는 ‘거리’의 안개이고, 채우기 위한 안개는 ‘바다’의 안개라는 점이다. 아니다. 이 두 안개는 같은 안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안개다. 즉, ‘거리의 안개’의 경우, 창을 넘는 순간 증발할 뿐만 아니라, 그 짙은 안개를 들이킨 사물들은 여전히 건조하다. 반면, ‘바다의 안개’의 경우, 창을 넘는 순간 몸 속으로 흘러들 뿐 아니라, 사물들은 어느새 그 안개의 일부가 된다. 이 비움과 채움의 대립적 욕망은 그러나, 심장의 두 심방이 나란히 붙어있듯, 서로를 침범하지 않듯, 생명의 두 원리인 셈이다.
이 안개의 이미지는 또 다른 시에서 변주된다. 「안개」를 제목으로 하는 시에서 시인은 안개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안개는 바늘도 되고 종이도 되고 갈매기도 되고 가로등, 좌석버스, 자전거도 된다. 그러나 무엇이든 되지만 “나는 이미 지워져”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심장 속의 두 방」이 ‘비움→채움’의 구조라면, 「안개」는 ‘채움→비움’의 구조이다. 우리의 심장에서 끊임없이 생명의 피가 들고 나는 것과 같이 ‘비움’과 ‘채움’의 반복은 멈출 수 없는 역동적 삶의 구조이다.
그런데 이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꽃만 따먹으며 왔다”(「말의 꽃」)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의 종래 시적 경향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구절은 공교롭게도 김수영의 「서시」의 한 구절을 연상시킨다.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尖端의 노래만을 불러왔다/나는 정지停止의 미美에 너무나 등한等閑하였다”는 김수영의 고백과는 다른 방향에서 ‘꽃’으로 표상된 ‘잘 다듬어진 서정적 언어’만을 취하여 왔다는 고백인 셈이다. 그 꽃의 향기는 ‘사흘도 가지 못할 향기’였다는 것이 반성의 단초이다.
이 새 시집의 전반부가 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갈망과 야생적 세계에 대한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가득하다면, 후반부는 세계와의 화해를 꿈꾸는 정감어린 눈빛으로 그려낸 세계가 주를 이룬다. 특히 후반부의 경우 “새벽녘 아이 오줌 누는 소리에라도 기대어/ 보이지 않는 강을 건너”(「물소리를 듣다」) 가려는 태도나, “다친 발목을 끌고” “절, 뚝, 절, 뚝” 걸어가면서도 “흰 발자국처럼 산딸나무 꽃이 피”(「절,뚝,절,뚝,」)는 긍적적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오래 너에게 가지 못했어.
네가 춥겠다, 생각하니 나도 추워.
문풍지를 뜯지 말걸 그랬어.
나의 여름은 너의 겨울을 헤아리지 못해.
속수무책 너는 바람을 맞고 있겠지.
자아, 받아!
싸늘하게 식었을 아궁이에
땔감을 던져넣을 테니.
지금이라도 불을 지필 테니.
아궁이에서 잠자던 나방이 놀라 날아오르고
눅눅한 땔감에선 연기가 피어올라.
그런데 왜 자꾸 불이 꺼지지?
아궁이 속처럼 네가 어둡겠다, 생각하니
나도 어두워져.
전깃불이라도 켜놓고 올걸 그랬어.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해.
불을 지펴도 녹지 않는 얼음조각처럼
나는 오늘 너를 품고 있어.
봄꿩이 밝은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두고 온 집」 전문
새 시집의 끝자리에 배치한 작품이다. 새로 지은 집의 맨 끝자락 ‘뒷문’이 ‘두고 온 집’을 향해 열려있는 것이다. 한 서평자로서 새 시집의 전반부에 배치한 새로운 모색의 시들이 반갑지만, 한 독자로서 후반부의 ‘정감어린’ 시편들에 마음이 끌리는 것도 사실이다. 위의 시는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에 실린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라는 작품을 연상시키는데 그것은 두 작품의 화자의 어조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인용한 시의 화자는 새로운 집으로 옮겨간 후 돌보지 못한 집을 회상하고 있다. 두고 온 집은 문풍지도 뜯겨나가고 전깃불도 꺼져있다. 화자는 그 두고 온 집을 생각하며, 춥겠다고 땔감을 받으라고 한다. 그런데, 두고 온 집에 이미 몸과 마음이 와 있다.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넘어선다. 마음으로 땔감을 던지는 순간 땔감은 아궁이에서 연기를 피워 올린다. 그러나 불이 잘 지펴지지 않는다. 땔감이 눅눅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아궁이 속을 생각하면 내 마음도 어두워진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불을 지펴도 녹지 않는 얼음조각처럼/ 나는 오늘 너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의 기다림은 “봄꿩이 밝은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나희덕 시인이 새로 짓는 집이 야생의 ‘달고 시고 쓰디쓴’ 세계를 역동적으로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그러면서 그곳이 먼 곳이 아니라, “봄꿩이 밝은 곳으로 날아가”는 풍경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기를 또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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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희 / 196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오래 익은 사랑』이 있고 현재 인천대 국문과 객원교수로 있다.
출처: 시와산문 그리고 시와녹색 원문보기 글쓴이: 김명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