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내가 늘 지니고 싶은 마음은 관대한 마음의 태도이다.
하느님 앞에서 지녀야 하는 가장 중요한 마음의 태도가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일 것이기 때문이다.
관대한 마음의 출발점은 하느님께서 우리 희망의 근원이심을 고백하는 것,
우리가 마음 속에서 지니는 모든 희망은 오직 하느님께만 그 근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데 있다.
성경 안에서도 끊임없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이라는 고백이 계속된다.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이다.
이사야 43장의 첫머리는 모든 것의 근원이 창조주 하느님께 있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잘났거나 힘세고 가장 문화적이고 성공적인 민족이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이 약하고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민족이라고 고백한다.
그 고백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만 그들의 완성과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시면서 오직 당신께만 희망을 두라고 요구하시면서 건네시는 첫마디는
“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건져 주지 않았느냐?” 이다.
우리는 성서 곳곳에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접한다.
하느님께서 왜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실까?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결코 위험이나 폭력 앞에서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심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크고 놀라우신 하느님을 향해 가지게 되는 매혹적인 두려움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계속 말씀하신다.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주님께서 나를 지명하여 불러주신 이름, 우리가 받은 근본적인 소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참다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참다운 자신이 된다는 것은 우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있다고 한다.
자기 자신과 올바르고 건강한 관계를 맺음을 의미하고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타인과도 건강하고 진정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한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면
우리는 서로 밀접히 연관된 네 가지 다른 양상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주위 사물과의 관계 라는 4중 관계 맥락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로 타인을 대하고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도 똑같은 모습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자신의 약점을 가리고 위한 허망한 이상을 만들어 타인에게 투영시키며,
자신의 열등감을 은폐시키기 위해 지나치게 자기 자랑을 늘어 놓는다거나 자기 과시에 빠지기도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해 주시고 받아들여 주시며 사랑해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귀염둥이, 내 사랑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앎은 머리에서만 아는 것일 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그것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못한다.
그 머리로 아는 것을 마음속에 흘러 내려오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 묵상하고 성찰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 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 가지 못하리라.
네가 불 속을 걸어가더라도 그 불길에 너는 그을리지도 타버리지도 아니하리라.” 고 계속 말씀하신다.
성서에는 물결, 강물, 불길 등의 상징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러한 상징들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좌절, 걱정, 위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끊임없이 우리를 좌절시키고 못견디게 만드는 여러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을 없애 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 안에서 나와 함께 걸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아프게 하고 좌절시키는 것들은 너무나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것들이다.
너그럽지 못하고 좁아터진 마음의 태도, 관대하지 못한 마음의 태도가 이러한 작은 문제들을 심각하고
거대하게 만들어 신경을 거스르게 만들고 오히려 나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느끼게 한다.
참으로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은 커다란 그 무엇이 아니라
삶의 자질구레함 속에서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기에 신앙의 근본적인 태도,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태도는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인간적 재능과 능력에 더 많은 신뢰를 둔다. 효율과 생산성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현대세계에서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만 하는 가치관일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 제기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근본생명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는 과감한 투신, 삶의 모험과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넘어지고 부서지더라도 그분의 도우심에 힘입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신앙의 확고한 투신이다.
우리의 희망, 진리이신 하느님 2 (시편95.1-3, 6-8)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여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진리에 대한 그릇된 편견이다.
진리에 대한 그릇된 편견은 불신앙의 원천으로서 우리의 마음속에 걱정과 두려움을 몰아 넣는다.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참다우신 하느님을 서서히 깨달아 가는 신앙의 내적 여정이 담겨 있다.
특히 시편은 사랑 많으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뢰와 고뇌를 담고 있는 기도서이다. 그러기에 교회의 기도서인 성무일도와 응송을 비롯한 다양한 기도양식에서 시편기도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기도가 된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안식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고 그분만이 실로 우리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시리라고 고백하도록 촉구한다. 내가 이루어 온 그 어떠한 명예나 업적도 결코 나를 편안하게 해주거나 모든 안정의 기반이 되어 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느님께서는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고 내 셩명의 숨결보다 더 깊이 나와 더불어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더불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하느님과의 친밀감에 익숙해지고 그러한 친밀감 속에서
인격적 사랑이 움터 나온다.
신앙은 단순히 무엇을 믿는다는 것이기 보다는 그 믿는 내용에 담긴 가치관을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행동양식 혹은 생활양식을 반영한다.
기도는 하느님을 기리는 마음으로 내면에서 울리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자세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마음이 될 때야 비로소 기도할 수 있게 된다.
마음 속에 미움이 자리잡기 시작하면 기도하기가 어려워지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기도는 사랑의 샘이며, 삶의 구체적 상황은 바로 그 사랑의 물줄기 되어 흐르는 곳이어야 한다.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열망3 (시편 121편)
늘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의 마음은 늘 그 무엇인가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마음 속의 아주 작은 갈망이라도 채워지지 않을 때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우리를 사로 잡아 버리듯이, 마음 속 깊이 심어진 하느님을 향한 순수하고 고상한 갈망이 채워지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쉴 새 없이 방황과 혼돈 속에 머무르게 된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면, 엄청난 포근함 속에서 안도의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누군가 나를 포근히 안아주면 그 포근한 사랑의 숨결이 내 안에 깃들여 있는 두려움 뿐 아니라
이기적인 마음까지도 서서히 녹여 버린다.
창세기는 첫 시작에 “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고 한다.
하느님의 기운이 혼돈이라는 어둠을 감싸면서 창조의 질서와 생명이 살아나는 표상이 이 안에 담겨있다.
성모님을 방문한 천사의 말씀도 이와 비슷한 표상을 담고 있다.
“성령이 당신에게 내려 오실터이니,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감싸 안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힘이다.
순례자의 노래라고 불리는 시편 121편은 예루살렘 성전 순례를 마치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순례자와
그 여행길을 축복하는 사제가 나누는 대화를 기도로 담고 있다.
우리 인생길이 평탄한 고속도로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험한 산을 오르내려야 하며, 물결 센 강물을 건너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결코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풍겨나는 감상적인 소리만은 아니다.
오히려 걱정과 무서움에 사로잡힌 마음에서 움켜 잡을 것은 단지 하느님뿐인 가난한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황량하고 메마른 마음의 상태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신뢰하기는 더없이 어렵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삶의 어려움 속에서 우리와 더욱 밀접히 현존해 주신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순례자들이다. 하느님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다.
* 우리는 하느님의 비밀4 (시편 139.1-3, 13-14, 17-18)
성숙하다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도 기적이나 신기한 종교체험의 이야기 앞에선 맥없이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기 십상이다. 손금을 읽고 관상을 복, 점을 치거나 하는 행위들이 막연하게나마 앞날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에서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견디기 힘든 상황들을 하느님의 섭리나 운명의 조화로 받아들이며 살 때, 쓸데없이 힘과 정열을 낭비하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하느님이 아닌 것에 하느님의 이름을 부여하면 그것은 또 다른 우상이며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신적인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 어러저러한 삶의 체험들은 때로 우리를 가두거나 묶어 혼돈 속으로 끌어가기도 한다. 혼돈의 무 속에 빛읓 비추시며 질서를 지어내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모습을 담은 창세기 1장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무질서로 이끄는 신적인 것에 사로잡힌 인간의 내부 습성을 해방시켜 질서와 정돈 속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엿보게 해 준다.
세상을 늘 새롭게 일구시고 다스리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도록 불림받은 인간의 역할을 그리는 창세기 2장의 이야기 역시 인간 내면 속에 질서를 일구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해 주기도 한다.
우리가 삶에서 만나 겪게 되는 여러 어려움들은 성서에서 거센 물결, 홍수, 저승 등의 이미지와 더불어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는 악마화된 힘으로 묘사된다.
때로는 삶에 대해 통달하고 매사에 있어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양 남을 격려하고 떠들어 대지만, 그럴때면 마치 내가 어떤 그물에 걸린 듯한 느낌을 지니게 된다.
욥에게 다가간 친구들처럼, 아니 다가온 친구들과 인생의 알 수 없는 신비들에 대해 고뇌하며 답변하는 욥처럼 어떤 그물에 걸려 있는 듯한 인상에 사로 잡히는 때가 많다.
기막한 삶의 불행 앞에서 하느님께 울부짖으로 탄원하는 욥에게 다가서며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분 역시 창조주 하느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욥에게 그 어떠한 논리적 해명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따지신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대장부답게 허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 어디에 있었느냐? 삶의 주인은 역시 하느님이심을 인정하라는 도전이다.
인정하기 매우 어렵지만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고 승복해야만 한다.
내 삶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을 때 내 삶은 한없이 흐터러져 어지럽게 되고
그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을 때 내 삶은 제대로 방향 잡혀 질서 안에서 당신의 모상대로 빚어진다.
그래서 성서는 인간 실존의 양면적 모습을 옹기장이의 손에서 빚어지는 진흙에 비유한다.
바오로 사도는 “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하시듯이
진흙으로 빚어진 우리 안에는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비밀을 지닌 존재들이다.
성서는 하느님의 법이 우리 마음 깊숙이 새겨져 있고, 하느님의 두 손바닥에 우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고백한다. “당신의 비밀이 간직된 우리 존재의 심층을 하느님께서는 환히 아신다.
하느님의 비밀이 우리 안에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비밀 또한 하느님 안에 담겨 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뼈 마디 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시편 139)
우리는 하느님의 비밀이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비밀이시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비밀을 담고 있고, 하느님의 기억 속에 기억되는 존엄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비참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느님을 떠나 오히려 허황된 망상을 그분의 자리에 놓게 되면
우리의 삶은 금방 방향과 길을 잃고 헤매는 삶이 된다.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삶은 오히려 인간의 마음 속에 불안과 걱정을 몰아넣고
결국에는 상처투성이의 가련한 신세로 전락시켜 버린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새롭게 지어주시는 분이시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하시며 새로운 창조를 약속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는 내 앞에 벌어지는 모든 인간 현상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간의 실존 전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신앙이다.
겸허한 태도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펼치면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내 안에 감추어진 그분의 비밀이 당신을 향한 나의 기도 속에서 나를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5. 사랑과 현실 ( 시편 126편)
삶에서 만나는 여러 어려움들을 직면해서 때로는 잘 적응하고 대처해 가지만 때론 지극한 좌절과 실망을 겪기도 한다. 인생여정에서 성공의 기준은 어디에 있으며 그러한 성공에 이르는 비결은 무엇인가?
멋들어진 삶의 이상이 낭만적으로 나를 사로 잡아버리지만
삶의 현실은 늘 그것과 상반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인간인 이상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결혼한 이들은 결혼한 이들이기에 어려움을 겪고, 독신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은 독신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나름의 어려움을 겪는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셨다.” (요한1.14)
그분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돼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 조건 안에서 살아가셨다.
이스라엘 인들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신앙의 눈으로 알아보았듯,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된다.
내일의 기쁨은 현재의 슬픔으로부터 피어난다.
“눈물을 흘리며 씨 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 들이리라. 씨를 담아들고 울며 나가는 자,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
이것이 시편의 핵심 가르침이다.
내가 현재 겪는 여러 어려움에서 내일의 기쁨이 피어난다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래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좌절과 변덕들이 오히려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조금이나마 기역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오히려 이러한 어려움과 모험들을 없애거나 피하려 들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나의 투신을 깊게 하는 기회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무엇이 일어날지 도무지 모른다.
우리중 그 누구도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성장해 가는지,
다가오는 체험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 도무지 모른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시편 저자처럼 내가 걸어온 지난 과거의 삶을 돌아켜 보는 것이다.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닌 이는 아무도 없다.
설사 앞날에 무엇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별견하게 될 그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할 수는 있다.
내가 만나 겪게 될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신실하게 견디어 내도록 은혜를 청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슬픔에서 내일의 기쁨이 움텨 나온다는 신앙의 확인인 것이다.
신앙의 태도는 진실로 내가 발견하고 당면하는 그 모든 것을 사랑하는 태도이다.
개방된 마음으로 삶의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 신앙의 길인 것이다.
6. 죄 앞에 선 인간의 비참한 모습 (창세 3.1-8)
죄란 창조된 실존으로서의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모든 것을 새롭게 지어내시는 하느님 창조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죄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창세기 3장의 이야기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죄의 시발점은 과장이며, 유혹자가 결정적으로 공격해 오는 부분은 영원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갈망의 영역이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과 참다운 진리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
인간은 참다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한 없는 갈망을 지니고 있고, 이 갈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불만을 품게 된다.
인간의 갈망이 채워지는 체험을 눈이 열리는 과정, 무엇을 새로이 인식하고 파악하는 과정, 지혜를 소유하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참다운 지혜란 결코 눈의 밝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눈의 맑음을 통해서 얻어지고 소유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성서와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에서는 늘 이기심에서의 정화를 강조하며, 마음을 깨끗하고 순수하게 지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께 이르는 길임을 강조해 왔다.
또 다른 왜곡은 하느님을 질투하는 분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낌없이 자신을 모두 내주시는 분이시지, 결코 인간이 지혜를 소유하는 것을 질투해서 그들에게서 무엇을 숨기시는 분이 아니시다.
결국 죄는 참다움에 대한 순수한 갈망이 아니라 이기적인 사욕에 사로잡히게 하여 모든 것을 왜곡된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죄의 생태 안에는 물귀신 근성과 비슷한 것이 있다.
남을 죄로 끌어들이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죄는 늘 동조자를 구해 연대적인 힘을 형성하지만, 그 연대감은 결국 서로 단절되고 소외되는 현상으로
우리 인간을 끌고 가기 위한 잠정적인 것일 분이다. 죄의 궁극적인 결과가 하느님과의 단절임이 드러난다.
죄가 저질러 놓은 결정적 결과는 하느님에게서 인간을 떼어 놓고 소외시킨 것이다.
죄의 결과는 부끄러움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어 자신을 스스로 숨겨야 하는 존재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다.
죄는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 엄청난 벽을 쌓고, 스스로 배신자라는 인산에 사로잡혀 자신을 단죄하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파괴적인 힘이다.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고 결국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자신을 단죄하면서 죄의 기세는 점점 더해 간다.
죄란 결코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데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스스로 죄의 굴레를 뒤집에 쓴다. 죄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저질러진 죄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을 혐오하고 저주하게 된다.
하지만 죄의 굴레보다 더 큰 것이 하느님 사랑의 신비이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결코 내가 버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받을만한 일을 했거나 어떤 원대한 업적을 이루었기에 하느님께서 내게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것보다 훨씬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조건없이 사랑해 주셨다.
하느님 앞에서 펼쳐지는 죄의 신비는
나를 겸손하게 만들지, 결코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지 않는다.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듯이 죄란 생명과 진리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하는 힘이다. “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요한8.44)
우리는 이러한 죄의 신비를 하느님의 커다란 사랑이라는 맥락에서 살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이 체험 안에서 죄의 신비를 이해해야 한다.
7. 용서는 새로운 창조의 손길 (호세6.1-3.6)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하시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회심이야말로 모든 변화와 쇄신의 근본임을 가르치셨다.
진정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
진정한 회심과 내적 쇄신은 실제적인 결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끄시는 하느님 사랑의 힘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구체적인 삶의 결단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 자신이 해야 할 몫이 있다.
회심을 근본으로 하는 자기 쇄신의 여정은 죄에 대한 묵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죄 묵상은 오히려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기도이기에 그분께 되돌아가기 위한 기도이며,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 주는 기도이다.
마음 속에 응어리진 죄스러운 상처를 바라보며 기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우리가 당신께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지니고 죄 묵상을 진행한다면 오히려 이 모든 것은 희망과 격려를 심는 기도가 된다.
시에나 가타리는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다섯종류로 구분하면서 특별히 4종류가 생명을 부여하는 회심의 여정과 연관되어 있음을 설명하였다.
1.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받게 될 지옥불의 두려움에서 흘리는 공포의 눈물이 눈물은 이무런 영성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2.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아픔에서 오는 눈물로서 회개의 눈물이라고 부른다.
인간 영혼이 죄와 인간 조건의 비참함을 의식할 때 자기 중심적인 영혼의 상태가 그 내부로부터 찢겨지는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게 된다. 영혼은 아직 자기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고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감각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 있지만 회심은 시작된다.
3. 지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에 감동되어 흐르는 감사의 눈물
4. 깨끗한 마음 속에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의해 얻게 되는 영적인 깨달음이 가져오는 눈물로서 조명의 눈물이다.
5. 지복의 눈물로서 영혼 깊숙한 곳에서 흘러 나오는 기쁨을 가져오는 일치의 눈물이다.
인간의 죄스러움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감싸이면 마치 한겨울에도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는 차디찬 얼음덩이도 녹아내리듯, 죄로 인해 응어리진 마음의 상처는 서서히 녹아내린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 태울 때 우리 내부의 죄스러움이 정화되어 소멸되면서, 결렬했던 여러 느낌들의 요동이 차츰차츰 가라앉게 되고 고요와 평화의 상태로 전환되어 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스러움에 대하여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자비하심 앞에서 죄인으로서 회개의 눈물뿐 아니라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깊이 감사드리는 눈물을 흘리길 원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께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어드려 그분을 본받는 조명과 일치의 눈물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죄인의 처지를 포로가 되어 먼 고장으로 유배되었거나 절망 속에서 외지를 떠도는 고향 잃은 알거지 신세로 묘사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비참한 처지를 상징적으로는 깊은 구렁 속에서 울부짖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성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바로 깊은 구렁이야말로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장소임을 잊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용서를 베풀고 희망을 심어주시는 하느님 은총이 지니는 신비이다.
용서란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의 손길이 이 구렁 속에서 이루시는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다.
그렇기에 가장 원천적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언제나 이 깊은 구렁 속에서 일어난다.
용서의 깊은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새롭게 보도록 이끈다.
그래서 용서받은 죄인은 감사와 희망의 기운으로 가득 차 늘 경쾌하다.
8. 세상을 준비하시는 하느님 ( 요한 16.20-24)
하느님께서는 높은 옥좌에 앉아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인간의 굴레를 짊어지시고 우리와 더불어 나누시고자 오신 겸손한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겸손이다.
성서에 펼쳐지는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배반이 엮어 나가는 역사이다.
영성생활의 여정은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 점점 더 깊이 우리 각자의 존재의 신비, 즉, 온 우주 전체가 하느님의 사랑에 기초되었음을,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은 가리고 숨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 앞에 펼쳐야 하는 것임을,
타인 안에 현존하는 죄스러움 역시 부드럽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함을, 죄인들의 모임인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 새로운 창조, 새로운 관계를 희망하고 이를 위해 애써야 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그리고 죽음과 부활 안에서 결정적으로 우리의 희망이 완성됨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느님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신앙, 이것이 바로 은총 안에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닫혀진 마음 속에서 어둠은 지독한 혼돈으로 남아 있지만 개방되고 자유로운 마음 속에서 어둠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태어나시는 곳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예수님을 탄생시켜 세상에 구세주를 전해 주시는 마리아의 자구(自救)는 그분께서 지닌 관대하고 완전한 개방성을 의미하기에, 우리 안에 또 다시 새롭게 태어나셔야 하실 분을 예고한다.
당신의 몸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엘리사벳에게 가져가시는 마리아의 모습은 또 다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타인에게 전하는 사명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서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체험의 원천이며 동시에 그 체험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척도임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체험은 성서로부터 출발해야 하고, 성서의 객관적인 계시 진리를 통해 변화되어야 하며, 성서와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뜨거운 사랑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와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만나게 되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세상을 위해 일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촉구하고, 세상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해 헌신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성서를 매일 조금씩 읽어 나가며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생활 속에서 영성생활은 진정으로 성숙해 간다. 한번 마음먹어 삶 자체를 변화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그 자그마한 일에서 삶의 변화는 시작된다.
9.강생은 아픔 속에서 새로 자라나는 희망의 상징 ( 요한1.1-5.9.14.16-18)
좁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넓은 마음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히 다르다. 강생의 신비에는 자비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 희망이라는 언어를 통하여 묵상하는 강생의 신비는 놀라우신 하느님의 겸손을 드러내 준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으로, 서로 다른 양상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화해하며,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며, 어떤 이는 새로 태어나고 또 어떤 이는 이제 죽는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의 의지를 다지시며 영원 속에서 인간이 되시기를 작정하신다.
세상의 어두움은 단지 그저 어두움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 의해서 희망이 심겨져야만 하는 자리이다.
이것은 마치 진흙 구덩이의 썩은 물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는 연꽃이 지니는 희망의 상징과 같다. 희망은 늘 아픔 속에서만 그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아픔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희망도 희망으로서의 본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희망에 거름 역할을 해주고 밑바탕이 되어 주는 것은 인간의 상처입은 실존이며 죄스런 인간 공동체의 실존이다.
죄스럽고 어둡고 절망적인 인간의 실존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그 안에 하느님의 구원의 절대적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마음이다.
요한 복음의 말씀대로 온 우주 만물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이야말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기에 그분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여러분은 내 안에 머무르시오.... 나 없이 여러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한 15.4-5)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다. 성서의 이야기에서 접하게 되는 수많은 인물들은 하느님 말씀의 자리를 세상에 마련토록 하느님께서 구체적으로 부르시는 말씀의 봉사자들이다.
말씀의 자리란 정의와 성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희망이 심어지는 자리로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자리를 의미한다.
구원이란 바로 희망을 발견하는 체험이며, 궁극적으로 그 희망의 의미를 알려준 대상을 향하여 전폭적으로 투신하도록 이끌어 준다.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공동체를 향하여 우리 삶 전부를 투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태는 바로 용서와 사랑이 베풀어지는 자리이다. 용서와 사랑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발생하게 된다.
10. 희망의 탄생 ( 필립2.5-11)
루가복음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어 있는 모습이 바로 구세주를 알아보는 표라고 선언한다.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 위해 인간이 되어 오시는 하느님께 우리 인간은 따뜻한 방 한 구석조차 마련해 드리지 못했다. 하느님께 아무런 자리도 내어 드리지 못한 우리의 비좁은 마음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때때로 나의 마음 속에 감도는 냉랭한 기운을 감지하고 스스로 놀라는 때가 많다. ]
지극히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아무 힘없는 아기로서 포대기에 싸여 누워 계시니 내가 그분의 수족이 되어드려 자비를 행하고 사랑을 행하고 정의를 행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손과 발이 있어도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는 부자유 속에서 묶여 있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의 손이 되어 주고 발이 되어 주며 입이 되어주는 것이 포대기에 싸여 누워계신 아기 예수를 보살펴 드리는 일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집 없는 이가 되셨기에, 그분을 내 집에, 우리의 깊은 마음 속에 모셔 드려야 할 것이다. 루가복음은 “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라고 말한다.
말 못하는 이, 말발이 없는 이, 힘없는 이, 자유가 없는 이, 약한 이, 병자, 고생하는 이, 가난한 이, 지독히 고생하는 이, 바로 이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으로서 주님께서는 그들 안에 당신 자신을 숨기고 계신다.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그분은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희망을 심고 사랑을 실천하며 정의를 행할 때, 주님께서는 바로 거기에서 희망의 모습으로 태어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을 잉태하시어 세상에 내어주신 성모님의 자궁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을 의미하며, 그곳은 바로 희망을 잉태하는 자궁이 되어야 한다.
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 마르1.1-5,9-11)
마치 누구를 알기 위해서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듯,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고,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복음서를 천천히 읽으며 기도하고 관상하는 것이다.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듯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알게 된다.
복음서와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만나게 되는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세상을 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뵙고 그분과 함께 세상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해 헌신하도록 우리를 초대할 것이다.
12. 그리스도교 영성의 샘 - 광야 ( 마태4.1-11)
전통적으로 광야는 내적 정화라는 영성적 의미를 지닌 장소로서 그 한적하고 메라르고 거친 환경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과 유혹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화를 의미한다.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홀로 외로이 있을 때면 이제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서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에 대한 애착이든 영적인 애착이든 간에 수없이 많은 애착들, 이기적인 욕심들, 한없이 부풀어 있는 꿈들, 혹은 절망에 둘러 싸여 도무지 가누기 힘든 자기 내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자유로움을 향해 발돋움하려는 갈구를 눈치채며 서서히 정화가 이루어진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관계들의 현장 속에서 오히려 일그러지고 모난 자신의 모습이 더욱더 잘 드러나고, 사람들이 이루는 관계의 다양한 양식들은 그만큼 더 강하게 나의 모난 구석들을 다듬어 정화시킨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해 눈뜨게 해줄 뿐 아니라 , 내 안에 깃든 이기적인 욕심과 세속적인 경향들을 향해서도 눈뜨게 한다.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이기적인 욕심을 거슬러 사랑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더 합당하게 응답하도록 촉구하는 현장일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구체적인 행동양식을 택하도록 단도직입적으로 촉구하는 결단을 대면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인간 경험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중의 하나가 굶주림과 갈증이다.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갈증을 느끼고 접할 때 우리는 일시적인 만족을 가져다 주는 방편을 택하게 된다.
주위의 사람들과 올바르고 건전한 관계를 누리고 싶어하는 바람은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갈망이다. 우리는 보다 더 근본적인 영역에 자리잡고 있는 자신 내부의 갈등과 굶주림을 알아야 한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좌절들, 걱정들, 위험들 앞에서 우리는 때로 그릇된 의미에서의 하느님의 섭리나 뜻을 이야기하면서 고독하고 어려운 인생길을 거부하도록 유혹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바쳐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봉사에 투신하도록 촉구하신다.
이 투신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유혹을 당하게 된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뿐 아니라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예수의 마음과 죄스런 원수의 마음이 대립하는 갈등을 체험하고, 또 어느 경우에는 자신이 택한 입장에 의해서 동료들로부터 고립당하거나 오해를 받는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세상도, 또한 그 안에 있는 것도 사랑하지 마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 육의 욕정과 눈의 욕정과 재산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그 욕정은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1요한2.15-17)
13. 기도와 활동의 기점 ( 필립1.9-11)
나는 어떤 꿈을 지니고 있었는가?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 나에게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해주고 생동감으로 나를 되살려 주는 꿈들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닌 지난 날의 잊혀진 꿈을 되살려 키울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며 부르신다.
마음 깊은 곳에서 움터 나오는 진정한 영적 열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묵상하는 기도를 통해 더 깊은 구원의 신비를 향해 눈을 뜨게 해 주고,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다시 이 열망은 당신의 구원 계획을 향해 더욱 더 개방되도록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나간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꿈이 좌절되는 체험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도 한다.
이러한 일상적인 삶 안에서 그 한복판에 서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그분께 보이는 반응은, 마치 베드로 사도가 그분을 만나는 순간에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하고 말씀드리는 것처럼 , 그분께 대한 경외하는 사랑의 마음 일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하다고 느끼는 죄인의 심정에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신다.
“ 보아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 하시며
“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에제37.14)” 하신다.
주님과 함께 나눈 꿈이 태어나고 자라난 내 마음이 있는 곳이 바로 나의 본향(≒고국)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을 따라 오라시며 우리를 늘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초대하신다. 그리고 그 초대 안에는 “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시는 당신의 약속이 담겨있다.
응답된 삶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따라나선 삶이고, 이 응답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을 배우는 일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점점 더 풍성해져서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필립1.9-10) 하시며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필립3.8)
참된 지식이란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어 행하는 덕을 의미한다.
14.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5.1-12)
삶의 의미를 자기 중심에 두면 점차적으로 외톨이가 되어가며, 결국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불행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삶은 이웃 동료와 함께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추구하기에 결국 교회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안심이 있다.
기도가 하기 싫어지고 메말라지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부족이 그 근본원인이고 용서와 화해는 한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구 조건이며 전제이기도 한 것이다.
한 가지 상기할만한 것은 성서에서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있는 대목 전,후에는 반드시 용서와 화해에 대한 요청과 가르침이 있다는 사실이다.
기도는 나 자신이 하느님께 의존된 존재임을 끊임없이 재확인시켜 주며, 이러한 재인식은 당신께 구하는 것을 반드시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신뢰를 우리 마음 속 깊이 심어준다.
그리고 이 신뢰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이며 자매임을 상깃기켜 준다. 나에겐 내 형제와 자매를 판단하거나 단죄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고, 없는 이에게 자선을 베풀고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한 자신을 채우도록 기도해야 하며, 내 안에 담겨진 하느님의 사랑이 나의 이기적 욕심에 사로 잡히지 않고 오히려 바르게 실천되고 표현될 수 있도록 극기하고 절제해야 한다.
15. 사랑의 혁명 (루가4.14-21)
교회를 사랑한 이들은 교회 때문에 아파했고, 그들의 아픔을 통해서 교회 안에는 쇄신의 기운이 불어왓다. 아니 그들이 바로 교회였기에, 교회인 그들이 아픔 안에서 쇄신의 기운이 이 세상에 불어오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마음이 쇄신을 부른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지극한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으며, 그 사랑을 통해서 이 세상에 구원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그분이 바라보고 이해하시는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분이 사신 모습대로 세상에서 살아가겠다는 구체적인 투신을 뜻한다.
우리 인간 모두는 각자 나름대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상징하는 그 무엇의 도래를 갈망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미래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실체로서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눈으로 우리 주변의 사건들을 바라보도록 촉구하셨다.
하느님 나라의 현존은 우리의 눈을 새롭게 바꾸면서 삶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을 바꾸어야 한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회심은 자신의 이기적 욕심으로부터 벗어나 남을 위하고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영위하도록 이끌어 간다. 이것이 치유이고 화해이다.
예수님을 독차지 하려는 마음은 타인이 예수님과 가까이 됨을 질투하게 만든다. 타인의 신앙 성숙에 대해 질투를 느끼고, 자신이 누리는 관계가 원하는대로 안될 때 결국 물귀신 근성이 드러나면서 너 죽고 나 죽자! 는 식의 파괴적인 태도를 지니게 된다.
우리 각자는 일상적 삶의 평범한 경험 안에서 자기에게 고유한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어 나간다. 우리가 성서에서 만나는 이들은 바로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이들이며 그분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발견한 이들이다. 그분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고 사랑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이들이다.
사랑은 혁명을 부른다. 비워야 채워질 수 있기에 다 찬 사람은 채워질 수가 없다.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오직 하나, 지금 현재의 생활을 전폭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사랑은 주고 받는 쌍방통행의 길이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에게 응답하는 사랑을 요구하시고, 세상을 아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세상을 향해 투신하도록 끊임없이 이끌어 가신다.
16. 우리를 변화시키는 구원 (요한 2.1-11)
우리는 무언가 모르게 울긋불긋한 것을 좋아한다. 물론 고전적 감각을 그리워해서 흑백 영화를 즐겨 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흑백영화보다는 총천연색 영화를 더 좋아한다.
미지근한 그 무엇보다는 화끈한 그 무엇을 더 좋아하기에 폭력이나 성적 묘사가 더 적나라하게 등장하는 영화나 연속극을 더 좋아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찌릿하고 자극적이고 강력한 그 무엇을 늘 찾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늘 이상야릇하고 신기한 그 무엇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하기에 기도하는 가운데서도 늘 그러한 신비적 체험만을 염두에 둔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무언가 신기하고 이상야릇하고 강력한 그 무엇을 좋아하면서도, 반면에 자신의 삶에서는 어떤 전폭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때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기도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보다는 기적을 믿는다.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키기에, 이 변화가 두려워 예수님을 믿기 보다는 오히려 신기한 기적과 같은 이상한 현상들에 정신이 팔려 자기 내면의 실상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와 늘 함께 하고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의 신비이다.
하느님께서는 기적과 같은 시기한 현상이나 기이한 사건 속에 , 특별히 유별난 장소에 현존해 계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가운데 우리와 함께 가장 밀접히 현존해 계시는 분이시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 삶에서 얼머나 자주 마치 포도주가 다 떨어진 잔치집처럼, 흥이 없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는가?
그저 매일 매일 되풀이되어 가는 삶 속에서 아무런 활력도 생기도 느끼지 못하면서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당신의 말씀에 의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예수님의 기적은 바로 물과 같이 맹숭맹숭한 우리의 평범한 일상사를 당신의 현존에 의해 흥과 생기가 넘치는 삶의 모습으로 바꾸어 주시는 기적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당신의 현존에 의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되풀이되는 단조롭고 활력없이 메마른 생활이 축축하고 생기있는 삶으로 변화되는 기적이 바로 가나의 혼인잔치가 담고 있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진정 누군가 변화되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 누구를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사랑은 변화를 강요하지 않고 다만 변화시킬 따름이기 때문이다.
17. 사랑이 넘치시는 예수님 ( 요한 8.2-11)
창조설화-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3.19)
흙은 모든 것을 받아들여 수용하는 자질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 생명을 움트게 한다. 그래서 성서는 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시자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되어 숨을 쉬었다.“(창세2.7) 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흙과 연결시킨다.
우리 인간들은 아주 다양한 동기와 이유들에 의해서 함께 모여 일치하기도 하고 싸우며 흩어지기도 한다. 죄를 저지르기 위해서 함께 모이기도 하지만, 또 그 죄스러운 요소에 의해서 갈라져 싸우고 죽이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싱징 역시 때로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지만 사랑이 요구하는 엄청난 투신과 희생은 오히려 공동체를 흩뜨려 버릴 것 같은 인상을 보여 주기도 한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의 이야기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 누군가를 흉보고 단죄하기 위하여 함께 모여 쑥덕거리며 열을 올리고 있는가?
죄인이 오히려 남을 더 사랑할 줄 안다는 말이 있다. “ 이 여자는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많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적게 용서받는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루가7.47)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용서받는 체험에서 길러지는 것이다.
내가 정말로 부끄러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하며 살겠다고 그 분 앞에 또 다시 나설 수 있는 것은 그분은 늘 진정으로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체험으로 깊이 알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서는 함께 간다.
|
첫댓글 이미지와 에제37.14 및 일부 단어를 보완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