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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 육사12기 장교출신이 쓴 회한의 육필수기
조동흡 추천 0 조회 930 10.02.14 22:5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 육사12기 장교출신이 쓴 회한의 육필수기


    
    내가 겪은 전두환 노태우와 박태준
     
    이글은 육사12기 출신 이영진씨(66·예비역 대위)가 미국 LA에서 
    신동아 편집실에 보내온 수기를 발췌한 것이다.
    이씨는 전두환·노태우 씨 등 육사 11기생들이 1961년 5·16을 전후한 청년장교 시절
    어떻게 행동했으며 어떤 성품의 소유자들이었는지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군 선배인 이한림장군, 박태준 자민련총재 등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도 실려있다.
    이영진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 LA화랑친목회 부회장>
     
    1959 년 8월 말의 어느 날, 미국 워싱턴의 대한민국 대사관. 우리 일행 5명은 대사관 내 무관실에서 
    당시 무관인 유양수(柳楊洙) 준장에게 인사를 드린 뒤 막 방을 나오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육군 중장의 정장 차림을 한 풍채 좋은 장군이 부관실에 앉아 있다가 우리 일행과 마주쳤다.
     
    당시 육사 출신 장교들에게 유명했던 이한림(李翰林) 장군이었다. 과연 직접 만나보니 늠름한 패기가 
    몸 전체에서 풍겨나오는 듯하였고, 소문대로 잘생기고 균형 잡힌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싸늘한 안경 너머로는 예지가 깃들인 듯한 두 눈동자가 반짝거렸고 우렁찬 목소리가 실내를 꽉 채웠다.
    깔끔하고 단정한 장군 정복에는 너무나 낯익은 육사 마크가 찍혀 있고, 양쪽 어깨 위에는 3개씩의 별들이
    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숨도 크게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까지의 군생활 중 적잖은 장군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느낌을 주는 장군은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당시 육사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한림 중장은 하버드대를 시찰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가 
    우리와 만나게 된 것이다. 이장군도 외국에 나와서 뜻밖에 젊은 유학장교들을 만난 것이 반가웠던지,
    우리 일행과 잠시 환담을 나누었다. 우리 일행의 자동차 운전을 맡고 있던 나에게는
    운전을 조심하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전두환(全斗煥·육사 11기) 대위, 노태우(盧泰愚·육사 11기) 대위, 
    필자인 이영진(李瑛珍·육사12기) 중위, 육완식(陸完植·육사 13기) 중위, 그리고
    신규환(통역장교 출신) 중위 등 5명이었다.
     
    우리는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에 있는 미육군 특수전 본거지인 
    포트 브래그(Fort Bragg)에 유학중이었다. 이곳은 전기(前期)과정인
    ‘미육군 심리전학교(U.S. Army Psychological Warfare School)’와 후기(後期)과정인
    ‘미육군 특수전학교(U.S. Army Special Warfare School)’ 두 개의 교육과정으로 짜여 있었다.
    우리는 이미 전기 과정을 끝내고 후기 과정이 시작되는 사이에 워싱턴을 방문했다가
    이한림 장군과 만나게 됐던 것이다.
     
    
    나는 이전부터 이장군에 대해서는 들은 얘기가 많아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으로 이한림 장군을 첫 대면하고 얼굴을 익힐 기회를 얻게 돼 속으로 무척 기뻤다. 그러나 전·노 두 사람은 무관심한 듯이 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운명의 신’은 그때 이미 우리의 앞날을 암시해주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2년 후에 불어닥친 5·16이라는, 최대의 정치적 회오리를 맞아 우리 운명은 제각기 갈라졌기 때문이다. 내가 호감을 느꼈던 이한림 장군은 군을 떠나야 했고 그 여파는 결국 나의 운명까지 뒤바꾸어 놓았다. 반면에 전·노 양씨는 이한림 장군과 만주 신경(新京)군관학교는 물론 일본 육사까지 동기생인 박정희(朴正熙) 장군의 비호하에 승승장구, 모두 일국의 대통령직에까지 올랐으니 말이다. 진시황 별명 붙은 이한림 장군 겨우 육군 대위 출신에 불과한 내가 군의 대선배인 이한림 장군에게 주목하고 관심을 가졌다는 말이 얼핏 상식에서 벗어나는 소리같이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장군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당시 육사교장이란 직위는 일종의 명예직으로 임기가 끝나면 전방 군단장으로 영전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이장군은 전방 6군단장을 마치자마자 자진해서 육사교장으로 부임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장군은 부임하기가 무섭게 그 넓은 ‘화랑 연병장(육사의 주 연병장)’ 맨땅에 푸른 잔디를 말끔히 깔아놓았고, 연병장 주변에는 지금도 볼 수 있듯이 화강석을 다듬어 성벽 같은 석축을 쌓아 만국기를 펄럭이게 함으로써 마치 고대 로마 경기장을 연상케 했다. 그 공사에 필요한 잔디와 화강석 운반을 위해 동원된 군용 트럭만도 수천대에 이르고, 이 때문에 육군본부가 온통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다는 뒷얘기가 육사 졸업생들간에 무성했다. 그래서 이장군에게는 본래 가지고 있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 외에, 진시황(秦始皇)이라는 또 다른 별명이 생겼다. 어디 그뿐인가! 이장군은 육군 고급 지휘관들이 참석하는 공식회의석상에서 남의 이목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규 육사 출신들을 빨리 진급시켜 요직을 맡겨야 우리 군대가 하루라도 빨리 강한 군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당당하게 펼치기도 했다. 그러니 육사 출신들(4년제 정규육사 졸업생들을 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하겠음)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시 우리 육사 출신들 중에서는 이장군의 발언과 행동이 인기를 의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1952년에 13 대 1의 경쟁을 뚫고 육사 12기생으로 입교했다. 우리 12기생(입교 당시에는 2기생, 졸업 때는 56년도 졸업생이라 불렸고, 12기생으로 불리게 된 것은 5·16 이후부터였음)은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만큼 벼랑 끝에 몰린 경제 상황 속에서 혹독한 기초군사 훈련을 받았다. 육사의 교육제도는 미국육군사관학교(West Point)의 제도를 근간으로 한 것으로 그 대표적인 것 하나가 생도자치근무제다. 우리가 공부하던 시점에는 그 위로 상급반이 없었으므로 11기생들이 활개를 쳤다. 11기생들은 철저한 생도자치제도 속에서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구대장 생도는 물론 분대장 생도까지 맡았다. 원래 ‘간부생도(근무생도라 불림)’는 공부와 운동을 잘하면서 통솔력이나 인품이 남보다 출중한 사람들이 학기마다 교대로 맡기 마련인데, 11기생 간부생도들 중에는 간혹 후배들을 괴롭히는 것이 생도생활의 목표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약하고 못난 선배도 있었다. 그러나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똑똑하고 특출한 사람이 많았다. 이승만 양아들 이강석 소위 우리 12기생 일동은 1956년 6월12일, 졸업식을 치른 뒤 곧바로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나는 보병장교가 돼 전방에서 1년여간 소대장 생활을 한 뒤, 서울에 있는 육군본부 의장대로 전속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서울로 부임한 그 해(58년) 10월 어느 날, 의장대장 송용익(宋鏞翼·호국군 출신) 소령이 찾는다기에 가보았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李康石)군이 육군소위로 임관해 우리 육군본부의장대로 곧 오게 된다. 웃분들의 뜻도 그렇고 하니, 이중위(필자)가 맡고 있는 제1소대를 그에게 맡기기로 하고 이중위에게는 제3소대를 맡길 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 의장대장의 말은 은근하고 사정하는 듯하였으나, 이 말을 듣는 나로서는 일시에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했다. ‘아니, 대통령의 양자면 양자지, 까마득한 선배의 보직을 밀고 들어오다니 괘씸한 놈 아닌가!’ 어느 지방 경찰서장이 가짜 이강석에게 망신을 당했다느니, 어느 도백(道伯)은 ‘귀하신 몸’이라 아첨했다느니 해서 한때 전국에 유행어가 되다시피한 화제의 주인공이 바로 이강석 소위였다. 그는 육사에 16기로 입교했다가 관절염 때문에 중도에 탈락, 육군보병학교로 가 속성 장교양성과정인 갑종간부후보생으로 임관해 온 터였다. 그의 육사 동기생들은 아직도 3학년에 재학중인데, 그 대열에서 낙오한 사람이 먼저 소위로 임관해 내 자리를 밀고 들어오겠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내 생애 정치수난 제1호로 기록된 셈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랴. 상대방은 권력의 핵심에 있는 것을! 나는 자리를 비워줄 수밖에 없었다. 이강석 소위는 누가 갖다 바쳤는지, 특수정보 부대장들이나 타고 다니는 무전기 안테나가 달린 지프를 몰고 서울 시내를 잘도 돌아다녔다.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는 고참 상사들이 아들뻘 되는 이강석 소위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혼쭐나는 광경도 여기저기에서 목격됐다. 이소위는 육사 생활에 어느 정도 길들어 있었던 탓인지, 어쩌다가 육군본부의 넓은 광장에서 나를 발견하면 몇십미터건 뛰어와서 빳빳한 부동자세로 경례를 올려붙이곤 했다. 육사에서 배운, 반가운 선배에 대한 인사법인 것이다. 육사를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다녀본 적은 있으니 후배 대접을 받고 싶다는 무언의 시위가 담긴 듯한 그를 보면서 나는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그가 군인정신이 무엇인지 그 사이에 터득했을 리야 없겠지만, 군인다움을 좋아하고 군인이 되고 싶어한다는 마음쯤은 감지할 수 있었다. 내 성격상 남에게 나의 어려운 사정을 부탁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단 한번 이강석 소위에게 부탁한 일이 있다. 언젠가 내 고향친구가 토지 문제 때문에 억울하니 어쩌니 하면서 이강석 소위를 만나게 해달라고 밤낮없이 찾아와서 졸라대기에 주선해준 적이 있다. 그때 이소위가 내뱉은 한마디는 지금도 내 귀에 선하다. “저는 아버님(당시 이기붕 국회의장) 하시는 일은 잘 알지도 못하지만,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얘기도 듣지 않습니다. 들어보면 딱해서 도와주고 싶어지는데, 군인인 제가 도울 길이 없으니까요.” 내 친구가 이소위를 만나기는 했던 모양인데,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강석 입막음용’ 돈 봉투 여하간 이강석 소위의 처지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지만, 기분은 역시 좋지 않았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머리를 짜내고 있는데, 마침 도미(渡美) 유학시험 소식이 내 귀에 들려왔다. 나는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고, 전두환·노태우 두 선배와 유학길에 오른다. 나는 유학 준비를 하기 위해 하루 8시간 꼬박 영어만 공부하는 육군부관학교(陸軍副官學校)의 군사영어반 46기로 들어갔다. 학교가 위치한 대구로 떠나기 며칠 전 직속상관인 이근양(李根陽·육사 3기) 대령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참모총장 백선엽(白善燁) 대장께서 이중위를 보자고 하시는데, 이강석 소위에 대한 얘기를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글쎄, 무슨 말씀이 계실지 몰라도 솔직하게, 제가 느끼고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나왔다. ‘솔직하게’라는 말은 총장이 물으면 후배에게 내 자리를 빼앗겨서 기분이 나쁘다는 말을 그대로 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다음날 오전, 총장의 호출을 받았다. 나는 할 말을 머릿속에 정리하면서 조심스럽게 총장실 문을 노크했다. 창가의 집무 책상에 앉아 있던 총장은 의자에서 일어나는가 싶더니 곧장 문 쪽으로 걸어나오면서 말했다. “응, 그래 그래, 그동안 수고가 많았어! 뭐, 미국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그래, 가거든 공부 열심히 잘해!” 그저 그 말 한 마디뿐이었다. 이강석 소위에 대한 말도 없었고 내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백선엽 총장은 준비해두었던 ‘공로 표창장’을 내 손에 쥐어주고 부관의 낭독이 끝나는가 싶더니, 옆방에서 대기중인 나의 직속상관들인 본부사령 이근양 대령과 의장대 대장 송용익 소령을 불러 기념사진을 찍고는 잘 가라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육군참모총장과 악수 한 번 하고 그 방을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걸린 시간이 채 10분도 되지 않았다. 총장실에서 물러나오자 밖에 서 있던 부관(소령)이 흰 봉투를 하나 건네주기에 엉겁결에 받아들고 나왔다. 부대로 돌아와서 봉투를 꺼내봤더니 돈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육군 중위 한 달치 봉급의 2~3배 되는 액수였던 것 같다. 나는 그날 밤 돈의 출처를 설명하고, 동기생인 전병일(田炳日) 중위와 또 한 사람의 방문객 동기생 등 셋이서 함께 서울 시내의 ‘비어 홀’을 닥치는 대로 순례했다. 봉투 속의 돈이 바닥날 때까지 전부 마셔버렸다. ‘말썽을 부리지 않아서 고맙네만 육사라도 나왔으니까 너 그래도 이만한 대접을 받는 줄 알아!’ 그날 밤 맥주잔마다 떠올랐던 백총장의 환상이었다. 이 때문에 마음에 받은 상처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이강석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일의 자초지종이다. 전두환·노태우와의 인연 그 해(1958년) 말 대구로 내려가 4개월 남짓 영어공부를 했다. 그때의 클래스메이트로 육사 1기 선배인 전두환 대위도 끼어 있었다. 나는 육사 4년 동안 수요일 오후 전체 운동시간에 축구 키퍼로 활약하는 전선배를 먼 발치에서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서로 중대가 다르고 해서 마주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접촉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동안 처음 보는 다른 육사 선배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무덤덤하게 대했다. 그런데 전선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밉게는 안 보였던지 나에 대한 관심을 높여갔다. 채점이 끝난 영어시험 답안지를 돌려받는 날이면, 내 점수가 몇 점이나 되는지 다른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기도 하는 등 경쟁의식을 가진 듯한 인상을 풍기기도 하였다. 학과가 끝나면 곧바로 하숙집으로 가는 것이 나의 일과였으나, 전선배가 당구라도 치러 가자고 청하면 종종 어울리기도 했다.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당시 전선배는 서울 계동의 처가에서 신혼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집에서 밥상을 마주하면서 가까이 지낸 일도 있었다. 역시 그의 숫기는 알아줄 만했다. 자신이 좋아하기만 하면, 여자든 후배든 간에 상대방 역시 자신을 좋아하게 되리라고 단정해버리는 그 자신감은, 바로 사내다운 숫기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대구에서의 교육을 마친 우리들은 한동안 부산하게 유학 수속을 밟은 다음, 1959년 6월 말에 유학길에 올랐다. 서울 시내에서 김포비행장까지 갈 차편이 없어서 애를 태우고 있는데, 노태우 선배가 당시 육군본부 과장급(대령급) 이상이 즐겨 타던 탑차(지프를 승용차처럼 개조한 차) 한 대를 구해왔다. 노선배가 앞좌석에 타고 그와 결혼한 지 몇 달밖에 안 된 부인(김옥숙 여사)과 내가 뒷좌석에 타고는 비행장까지 갔다. 노선배는 비행장까지 가는 동안 혼자서 노래를 부르는 등 부인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기색을 나에게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나는 육사 11기 선배인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과 유학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학 시절의 어느 날, 내가 먼저 미국 운전면허를 취득해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전선배가 운전을 해보고 싶었던지 자동차 키를 달라기에 건네주었다. 그런데 두어 시간이 지난 다음에 전선배가 내게 와서는 “배터리가 나갔는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가서 확인해봤더니 차는 연병장 한가운데에 서 있고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전두환의 특이한 성격 할 수 없이 차를 서비스센터로 끌고 가서 충전을 시키고 고쳐 놓았는데, 며칠이 지나서 또 차 키를 달라기에 주었더니 이번에도 같은 소리를 하지 않는가! 차를 끌고가 배터리를 충전시키는 데 돈이 많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불필요하게 돈과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게 하고는 그게 마치 내 책임인 양 해서 울화가 치밀곤 했다. 한번은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밖에서 전선배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전선배가 예전에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미고문관을 만나 옛 부대장인 모소장을 돈만 아는 친구라고 욕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부아가 치밀어 뒤따라오던 노태우 선배에게 “뭐 저런 얘기를 미국 친구들에게 하는 겁니까” 하고 말을 하자 노선배가 “그러게 말이야” 하고 대꾸하는 순간 어느새 전선배가 뒤따라왔는지 “이 새끼들 등 뒤에서 남의 욕이나 하고” 하며 성을 냈다. 원인은 자신이 만들어놓고 그걸 입에 올린다고 남에게 추궁하는 성격, 이것은 타고나지 않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선배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 우리가 전기 교육과정을 마치고 빈 시간을 이용해 뉴욕시를 구경하러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뉴욕시에 거의 다 와서 차선이 많아지고 지나가는 차도 많아졌는데도, 전선배가 운전을 하겠다기에 (그때는 운전 면허를 땄음) 운전대를 넘겨주었다. 불안해진 노선배가 뒷좌석에서 말렸지만 전선배는 막무가내였다. 그러나 전선배는 그만 길을 잘못 들어 맨해튼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고속도로로 다시 나오는가 하면, 맨해튼의 북쪽 할렘으로 들어가 ‘가스 스테이션’에서 가스를 넣고 나오다가 흑인 차와 충돌해서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이것은 잘잘못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을 벌이기만 했지 뒷감당을 못해 남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그의 성품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전선배와 가까워질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그와 함께 있노라면 예측하기 어려운 그의 행동 때문에 내 마음이 불안했고, 학구적이고 논리적인 이론의 뒷받침없이 후배는 선배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프라이드와 자신감이 그를 꺼리게 만들었다. 싫든 좋든 사생활을 함께하지 않을 수 없는 미국에서 우리는 서로 애써 피하려고는 했지만,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충돌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귀국할 때쯤에는 나와 전선배의 사이가 상당히 나빠져 있었다. 도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육군본부 특전감 이지형(李贄衡) 장군에게 전입 신고를 마치고 큰길 쪽을 향해 언덕을 내려오면서 그가 내게 뱉었던 한마디도 잊을 수 없다. 전선배와 함께 걸어 내려오던 노태우 선배도 옆에서 듣고 있었다. “이영진(李瑛珍), 너 동창회 명단에서 제명시켜버릴 거야!”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제명이라니! 아마도 후배인 내가 선배를 제쳐놓고 혼자 육군본부 특전감실로 명령이 난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이런 때 아무 말 하지 않으면 그대로 뒤집어쓰게 된다. “전선배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일은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승만대통령의 눈물 1959년 12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서울에서 육군본부 특전감실 운영과의 편집장교로 보직을 받아 근무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신문사 편집국 같은 일을 하는 곳이었다. 이때 나는 육군 대위로 진급돼 있었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 보직을 맡고 있고 있는 동안 4·19혁명을 목격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과 이기붕·이강석 일가의 자살사건도 보았다. 당시 이기붕 일가의 시신은 수도육군병원(옛 중앙청 동쪽)에 안치돼 있었는데, 때마침 그곳을 찾아온 이승만 대통령이 내 눈에 들어왔다. 넓은 병원 마룻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4구의 관 중에서 이강석의 관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다가간 이대통령은 왼쪽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관을 쓰다듬으면서 두 줄기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 눈물은 먼발치에 있던 나에게도 보일 정도로 굵은 줄기였다. 4·19학생의거로 들어선 민주당 정부는 익히 알다시피 데모로 날이 새고 데모로 날이 저무는 판이었다. 신파니 구파니 갈라져서 국정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국민에게 실망만 안겨주다가 결국 이듬해에 5·16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당시 용산 삼각지 육군참모총장관사 뒤쪽에 있던 독신장교숙소(BOQ)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관급 장교들과도 식탁에 마주앉아 시국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중에는 그후 5·16 주체가 된 사람도 있었고, 정반대로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사람도 있었다. 인간의 운명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그 당시 육군본부의 작전참모부(G-3)에는 5·16을 주도한 김종필(金鍾泌) 중령이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5사단 36연대 소대장을 할 때 함께 소대장 생활을 한 동기생 김광현(金光炫) 대위가 마침 김중령과 같은 과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그 방에 종종 들렀으면서도 김중령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내가 만약 그때 김종필씨를 만나 한마디 말이라도 교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나의 운명은 지금과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유학을 다녀온 나는 이미 그 전의 내가 아니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최남선의 ‘역사를 통해 본 조선’ 등에 깊이 공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집트의 나셀이나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등이 애국애족의 표본으로 여겨지던 것이 1960년 전후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때 단 한 번만이라도 김종필씨를 만날 기회가 있었더라면 혁명 동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기에 지금도 못내 아쉬운 감이 남아 있다. 공격 직전의 독사처럼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나는 60년 12월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신문조차도 읽기가 역겨워진 내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다름아닌 이한림 장군이었다. 당시 이한림 장군은 육사교장에서 1군사령관으로 영전돼 있었다. 나는 ‘이분이라면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장교를 수용해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이보다 몇 달 앞선 60년 8월 말 나는 미국 워싱턴에서 헤어진 이후 1년여 만에 이장군을 다시 만난 적이 있다. 이장군이 육사교장으로 있을 때였다. 한번은 육사에 들렀는데 마침 테니스를 치고 있는 ‘교장 선생님’이 눈에 띄었다. 나는 뛰어가서 인사를 드렸고 이장군 역시 나를 알아보고 매우 반가워했다. 이장군은 그 날 퇴근 때 나를 후암동 자택으로 데리고 가서 뒤뜰에 놓여 있던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자고 했다. 탁구 상대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시국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젊은 장교들은 현 시국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일부 국회의원들이 육사 출신들을 가리켜 ‘가공할 단결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등 잠시 동안이긴 하였으나 꽤 정치적인 얘기를 한 것으로 기억된다. “쿠데타 합시다” 하여튼 이장군한테 가기로 결심이 서자 내 생각을 정리한 편지를 이장군에게 띄웠고, 1960년이 다 저문 12월20일경에 1군사령부 전속 명령을 받게 됐다. 나는 가끔씩 문안인사를 드리던 송석하(宋錫夏·육사 2기로 박정희 장군과 동기생) 소장을 찾아가 “1군으로 가게 됐다”고 말했다. 그런데 송소장은 대뜸 “너 이한림 장군이 제일인 줄 아는 모양인데, 제일은 박정희 장군이야!” 라는 게 아닌가. 사전에 송장군에게 아무 의논도 하지 않아 내가 못마땅해서 그러는가보다 하고 생각했으나, 이미 마음을 정한 터여서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박정희 장군이 제일인지는 몰라도 우리 정규육사 출신들에게는 이한림 장군이 제일입니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반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을 끝으로 송장군을 만날 기회는 오지 않았으나, 송장군이 처음으로 입에 담은 ‘박정희’라는 이름 석 자는 내 귀에 남았다. 그가 누구이기에 송장군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일까? 적어도 그때는 몰랐었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원주에 있는 1군 사령부로 가 비서실의 회의담당 장교로 보직을 받았다. 부임한 지 몇 주 지난 어느날, 이한림 사령관의 전속부관이자 육사 동기생인 정상문(鄭相文) 대위가 “사령관님이 아침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관사로 들어오라고 하신다”고 연락해왔다. 나는 이 기회에 할 말을 해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이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젊은이를 젊은이답게 대해주지 않는 서울이 싫다, 그래서 1군으로 가고 싶다고 밝히지 않았던가. 사령관과 함께 아침 식탁에 마주앉게 된 나는 동기생 정대위도 합석한 자리에서 군이 정치 일선에 나서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입에 올렸다. 야전군사령관을 앞에 두고 겁도 없이 쿠데타를 하자고 했던 것이다.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령관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식탁 위의 계란 프라이에는 손도 안 대고 옆방 의자로 가 앉더니 신문을 펴들었다. 방 안의 공기가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혔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던 나는 인사를 할 경황도 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앞이 캄캄했으나, 사령관은 그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넘겨주었다. 게다가 사령관은 이후 내가 9사단으로 간다고 하니까 1군 예하 막료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 나를 불러서는 “자, 우리 참모들, 이번에 이대위가 9사단으로 가게 됐으니 잘들 도와주시오” 하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식당을 가득 메우고 있던 눈동자들이 일제히 내게로 집중됐다. 최소 대령급 이상의 군 선배들이 내게 시선을 주니 몸둘 바를 몰랐다. 평생을 두고 그런 광영의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후에 내가 치른 고통은 엄청났다. 운명의 9사단 나는 곧 61년 3월8일 1군 예하 9사단 28연대 수색중대장으로 명을 받았다. 이것 역시 내가 자원한 일이었다. 나는 당시 군의 동요로 보건대 언제, 어디서, 무슨 변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서울에서 가까운 사단에서 일하고 싶었다. 9사단은 서울에서 가까운 양평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감지하고 있던 운명의 날은 곧 닥쳐왔다. 1961년 5월16일 새벽 4시. 우리 중대에서 불과 100m 정도 떨어진 하숙집에서 잠자고 있던 나를 깨운 것은 주번사관 정규준 소위의 목소리였다. 라디오를 켜보라고 하기에 스위치를 눌렀더니, 행진곡에 이어 장도영(張都暎) 참모총장의 목소리가 나왔다. “드디어 우리 군은 돌격을 개시했습니다. 우리 군은… 혁명공약 1, 우리는….”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어나서 불을 밝히고 라디오 스위치를 이리저리 맞추어 보았으나 방송 내용은 한 가지뿐, 혁명이었다. 올 것이 온 것이었다. 나는 다혈질은 아니지만 일시에 온몸의 피가 끓었다. 아침 8시에 중대에 출근함과 동시에 전 중대원을 집합시켜놓고 열을 올렸다. “이제부터 너희들이 먹어야 할 쌀을 훔쳐가는 놈들은 없을 것이다…, 너희들의 피복을 훔쳐다가 팔아먹는 놈들도 없을 것이다…, 썩어빠진 정치인들을 모두 물갈이해서 새순이 돋아나게 해야 한다…, 새 역사를 창조하자! 우리 군이 맡는 것이다….” 다음날인 5월17일 아침 9시, 연대참모회의가 있으니 수색중대장도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연대장을 위시하여 부연대장, 인사장교(S-1), 정보장교(S-2), 작전주임장교(S-3), 군수장교(S-4), 그리고 연대 예하 1, 2, 3대대장 3명과 연대 직할 중대장인 나, 이렇게 주요 간부들만 참석하는 작전회의였다. 우선 연대장이 말문을 열었다. 지금 기억나는 그날 아침 발언의 골자는 대략 이렇다. “서울시내 요소(要所)는 이 시간 현재 혁명군이 모두 장악하고 있으며, 중앙청으로부터 육군본부에 이르는 도로변에는 혁명군이 거의 1m 간격으로 도열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우리 9사단은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나 출동을 준비하고 있다. 언제 출동 명령이 하달될지 그 누구도 모르며, 또 무엇 때문에 출동하려는지 나 자신도 모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혁명군으로서 혁명에 가담하려고 출동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압군으로서 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려는 것인지를 나 자신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연대장인 내 명령하에 연대가 일사불란하게 단일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연대장은 부하들을 직접 지휘하게 될 각 대대장에게 한 사람씩 지명해서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1대대장! 자네는 연대가 출동할 경우 여하한 상황에서도 내 명령에 절대복종하겠는가?” “네, 연대장님! 연대장님께서 상황을 잘 판단하셔서 그때그때 적절한 명령만 내려주시면 연대장님께 절대복종하겠습니다.” “2대대장! 자네는 어떤가?” “네, 저도 마찬가집니다.” “3대대장! 자네는?” “네, 저도 마찬가집니다. 연대장님께서 상황만 잘….” 이번에는 내 차례가 왔다. “어때, 수색중대장! 자네는 어쩔 텐가?” 연대장의 시선이 내게 똑바로 다가왔다. 나는 연대장과 각 대대장 간에 오가는 우문(愚問)과 우답(愚答)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돼지나 기르고 있는 너희 주제에 혁명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느냐! 내가 이 9사단까지 무엇 때문에 내려왔는지 알기나 하는가?’ 하고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연대장 H대령(이미 타계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당사자와 가족들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본명을 숨기겠음)은 아주 드러내놓고 돼지들을 막사에서 기르고 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먹일 쌀을 빼돌려 돼지가 먹을 잔반을 만들었고, 성장한 돼지를 팔아 치부를 하고 있었다. 돼지를 잡아 병사들에게 회식이라도 시켜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돼지를 잘 키우라는 연대장의 지시를 받은 각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업무보고할 때 돼지에 관한 보고부터 우선적으로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건 보병 연대가 아니라 ‘돼지 연대’였던 것이다. 나는 H대령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는 만약에 우리 사단이 출동한다면 제 눈으로 똑똑히 보고,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겠습니다.” 서울에 출동하기만 하면 혁명군에 가담하겠다는 공언이었던 것이다. 나의 말에 H대령은 나를 뚫어지게 쏘아보았고, 나 역시 그의 시선이 옆으로 비켜날 때까지 계속 쏘아보고 있었다. 참모회의가 끝나고 중대로 돌아왔다. 5월18일 오전 10시쯤이었을까, 연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중대장이 1개 분대의 병력을 직접 인솔해서 단독 군장으로 이천(경기도 광주군)으로 통하는 남한강 건널목(현재 천서리와 이포리 사이에 이포대교가 놓여 있으나 당시에는 없었음)에서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실탄도 휴대하고 연대와 교신할 수 있도록 무전기도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연대장과 친하지도 않은 사이라서 무엇을 경계하라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남한강변까지 1개분대를 이끌고 가서 철수해도 좋다는 무전 연락을 받을 때까지 서너 시간을 강변에서 할 일 없이 서성대다가 중대로 돌아왔다. 이한림 서울호송 비화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날 아침 1군사령부가 있는 원주에서 사령부 몇몇 장교들이 사령관 이한림 장군을 숙소에서 체포한 다음 지프에 태워서 서울로 호송하기 위해 길을 떠났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연대장 H대령이 머리를 짜낸 끝에 다른 사람 아닌 나를 지명해 이래저래 공을 한번 세워보려던 속셈이었다. 이장군을 호송한 차가 어느 길을 택할지 몰랐겠지만 자기 예상대로 내가 경계하고 있는 지역을 통과할 경우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도 궁금했을 것이다. 그 차를 정지시켜 내가 이장군을 구출이라도 하는 과격한 행동으로 나간다면 나 역시 반혁명 분자로 몰아 감옥으로 보내는 공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멍청하게 바라보면서 차를 보내더라도 이장군의 호송을 방해할 기도가 있을지도 몰라서 경계병을 파견했던 것이라고 혁명군에게 둘러대면 그만인 것이다. 뒷날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연대장의 치졸한 행동에 얼마나 분개했던지 모른다. 오후 2시가 좀 지나 철수하게 된 나는 병사들에게 중대로 돌아가라고 지시하고 연대본부로 들어갔다. 연대장은 나를 보더니 오른손 인지로 내 배를 쿡 찌르면서 “이한림이가 붙들려 갔단 말이야!” 하고 말했다. 그 한마디는 확실히 충격이었다. 어제(5월17일) 밤 늦게 1군 사령관 명의로 중대로 배포된, ‘1군장병에 고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나는 수십번도 더 읽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친애하는 1군 장병 여러분!! 이미 여러분은 신문, 방송을 통하여 바야흐로 격동하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주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긴박한 국가정세에 임하여 군은 국가의 장래와 민족의 보위를 위하여 다음 몇 가지를 우국 청년장병 여러분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바입니다. 1. 여하한 국내정치 정세하에서도 우리의 적은 공산도당임에 변함이 없으며 이 적과 대치하여 조국을 방위함이 또한 우리의 기본사명임을 재삼 명심하여 전 장병은 현 위치를 고수하고 추호의 동요도 없이 대적(對敵) 경계를 엄중히 하고 교육 훈련을 철저히 할 것. 2. 예하 각급 지휘관은 여하한 정치적 변동에도 엄격히 중립을 견지하여 군 본연의 임무인 국토 방위에 전심 전력할 것. 단기(檀紀) 4294년 5월 17일 제1군 사령관 육군중장 이한림’ 아무리 읽어봐도 자구 하나 이상한 곳이 없었다. 2항에 있는 ‘중립’이란 말만 빼놓는다면…. 이래도 되는 것일까? 남들은 생명을 걸고 혁명을 하는 판인데 중립이라니…. 나는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에 몸이 떨렸다. 그런데 이장군이 붙들려갔다는 것이 아닌가. 중대로 돌아온 나는 안절부절 못하였다. 육사생도들은 혁명축하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는데, 육사 출신들을 그렇게도 아껴주던 이장군은 잡혀가고…, 이건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부대를 무단 이탈하다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5시가 가까웠다. 나는 중대 인사계에 “서울행 마지막 버스가 몇 시에 있지?” 하고 물어보았다. “5시 조금 지나서 한 대 있습니다.” “그래? 김상사? 내 말 잘 들어요! 내가 마지막 버스로 서울엘 좀 다녀와야겠으니 연대장께는 보고하지 않는 게 좋겠다. 내가 출발한 다음 혹시 연대장이 먼저 아시게 되거나 나를 찾는 일이 생기면, 급히 서울 갔다가 내일 이맘 때까지는 귀대할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아무 말 없으면 그대로 가만 있어! 내가 다녀와서 직접 보고드리도록 할 테니까, 알겠지?” 나는 그날 저녁 서울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흔들리면서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박정희 장군을 만나 탄원을 하는 거다, 육사 출신들이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하겠으니 이한림 장군을 석방시켜달라고 하면 어떨까? 거절할 것인가? 그분을 어디 가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이장군은 도대체 어디로 끌고 갔을까…? 내 말을 무시하시더니…? 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곧 후암동에 있는 이장군 댁으로 가 보았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만나지 못한 나는 좀 망설였으나 동기생인 송한호(宋漢虎) 대위를 만나면 무슨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그도 집에 없었다. 그의 노모는 아들이 이틀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면서 걱정스러워했다. 그 날 서울 시내 일원의 통행금지 시간은 저녁 7시. 시계는 이미 7시를 지나고 있어 나는 노모께서 차려주신 저녁밥을 먹고 주인도 없는 방에서 혼자 자야 했다. 다음날 아침, 곧바로 육사로 들어간 나는 송대위 등 친구들로부터 그간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낙심천만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박정희 장군을 만나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 그 허탈감과 좌절감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친구들로부터 들었던 중요한 얘기는 이렇다. 후배들이 믿고 따르는 11기 선배들 중 서우인, 김성진, 한건희 선배 등 몇 사람이 5월16일 바로 그날 1군사령부로 이한림 장군을 찾아가 5·16에 대한 의견과 조언을 구하고 돌아오다가 혁명주체세력에 구금당했다는 것이었다. 또 전두환 선배가 박창암(朴蒼岩) 대령과 함께 육사에 들어와서 한바탕 소동을 치른 끝에 생도들을 이끌고 혁명축하 시가행진에 나서게 하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5월19일 오후에 중대에 도착한 나는 우선 연대장에게 가보았다. 내가 서울로 출발한 뒤 바로 나를 찾았던 그는 내가 서울로 갔다는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사단장에게 보고했고, 또 서울의 혁명주체들에 의해 새로운 사단장이 발령을 받는 등 사단 자체가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연대장은 내 동기생인 헌병 중대장에게 명해서 사단 영역을 벗어나기 전에 나를 체포하도록 조치했던 모양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미 그 시각에는 사단의 서쪽 끝인 양수리 헌병초소를 벗어나 체포를 면했던 것이다. 이한림의 심복으로 체포당해 나는 사단장에게 가서 그간 서울에서 들었던 내용을 보고한 다음 중대로 돌아왔다. 군생활에 절망감을 느낀 나는 하숙집 방으로 소대장들을 불러놓고 대낮부터 막걸리를 마셔대고 있는데, 사단 헌병중대의 낯익은 소위 한 사람이 백차를 몰고와서는 “중대장님을 모셔오라기에 제가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그 길로 사단 헌병중대에 수감됐다. 수감돼 있는 동안 취조를 한답시고 헌병 중사 하나가 감방을 들락거리면서 내 신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이한림 장군이 혁명군에 연금당했다면 반혁명분자인데, 그 반혁명분자를 동정해서 서울까지 갔다면 너도 반혁명분자 아닌가 하는 식이었다. 울화통이 터져버린 나는 “너하고는 입씨름하고 싶지 않으니 취조를 하려거든 장교가 와서 하라”고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단사령부에는 헌병 참모가 따로 있는데 그가 직접 나설 수도 없고, 헌병 중대장은 나와 동기생이라 그에게 시킬 수도 없어서 하사관을 대신 보냈던 것이다. 나는 원주에 있는 1군 헌병중대 감방으로 이송돼 2주일 정도 수감돼 있었다. 감방에는 1군 예하 각 군단과 사단에서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대령들도 몇 사람 있었는데 거기서 특별히 심한 낭패는 당하지 않은 듯했다. 무슨 일로 감방에 수감됐는지는 모르나 며칠 동안 고생하다 나가면서 자기가 쓰려고 가져 온 세면도구 일체를 내게 건네준 1군 감찰참모 박영석(朴榮錫, 5기생·소장 예편·보안사령관 역임) 대령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약 2주일 후에 개정된 군법회의에서 나는 파면, 전급료 몰수, 징역 6일, 미통 6일 등의 선고를 받았다. 선고가 끝난 다음 낯익은 육군 중위 하나가 다가와서는 내게 군사령관을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하기에 나도 응낙, 낯익은 그 방으로 갔다. 이한림 장군이 군사령관이었을 당시 5군단장이었던 박임항(朴林恒) 장군이 군사령관으로 부임해 있었고, 낯익은 그 중위는 전속부관인 송석근(宋錫根) 중위였다. 갑종출신인 그는 내가 육군본부 의장대 소대장 시절 이강석 소위 방에 출입하면서 나와 낯이 익었던 것이다. 뜻밖의 호의로 만나게 된 박임항 중장은 “당신이 이영진 대위요?” 하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내가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전형(全刑) 집행정지뿐이오” 하기에, “감사합니다” 하고 그 방을 물러나왔다. 그후 나는 나대로 재심 청구와 새로운 보직 문제 때문에 바빠서 박장군에게 인사를 치를 정신도 겨를도 없었다. 그후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박임항 장군이 이한림 장군이나 박정희 장군보다 만주 신경군관학교와 일본육사 1년 선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장군이 처음 보는 나에게 왜 잘해줬는지 짐작이 갔다. 답답한 놈이 우물을 판다고, 나는 그 서슬퍼런 혁명검찰부(革命檢察部)로 박창암 혁검부장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동기생인 최필규(崔弼圭) 대위가 수행부관을 하고 있기도 했지만 비서실에 와 있던 다른 동기생인 김영건(金永鍵) 대위(98년 작고)가 한번 만나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권유했기 때문이다. 나는 박창암 부장과 안면이 있었지만, 그와 이한림 장군의 사이가 나쁜 것을 알고 있어서 별로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니 박부장을 만나서도 내 입에서 살려달라는 소리는 안 나오고 이장군을 두둔하는 듯한 말이 나오자, 그는 역정을 내면서 “네가 그런 태도를 취하니까 의심받지 않는가” 하는 통에 그만 면담도 끝이 나고 말았다. 박태준 대령과의 인연 박태준(朴泰俊) 대령을 찾아가자 그에게 찾아가 내 행동의 전말을 설명드리고 내가 잘못 생각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이 판에 창피스러울 것도 주저할 것도 없었다. 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로 박태준 비서실장을 찾아갔다. 사실 박태준 대령과 나의 사연 또한 간단치 않다. 내가 처음으로 그를 만난 것은 1950년 9월 하순이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18살짜리 애띤 중학생이었던 나는 학도병으로 1군단 정훈부에 들어가 일했다. 그때 1군단 인사처 보좌관이던 박태준대위를 만났다. 나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미남형의 얼굴 생김새에 이지적인 새까만 눈썹 그리고 정겨운 인상인데다가 인사처 일은 보좌관이 다 맡아 한다는 것이었다. 삭막한 영내 분위기 속에서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하고 정이 그리웠던 나로서는, 나를 알아보는 장교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행운이었고 마음의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다. 내가 육사에 지원하기 위해 추천장을 써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육군본부인사국 보임과장 육군중령 박태준’이라고 당당하게 써주었다. 내가 5.16이 일어나기 전에 박태준 대령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육군 본부 본청 건너편에 있던 한 제과점에서였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치다 박대령을 보고 제과점 안으로 들어갔는데, 내가 1군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하자 그는 단 한 마디만 말했다. “나는 그분(이한림장군)은 잘 몰라.” 그는 내가 왜 1군으로 갈 생각을 하게 됐는지 묻지도 않았고, 가지 말라고 말리지도 않았다. 그때 박대령이 자신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피력해줬다면 나는 마음이 흔들렸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박대령을 원망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박대령은 이미 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해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선 부대를 무단 이탈했다는 이유로 군법회의에 낸 연대장의 기소를 취하해달라는 서신을 연대장 H대령에게 써주었다. 박대령이 25사단에서 연대장으로 있을 때 H대령이 부연대장을 지냈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육군본부 법무감실의 심사과장으로 있는 이응한(李應漢) 중령에게 나의 재심문제를 잘 처리해주도록 요청하는 서신도 함께 써줬다. 박대령은 5·16 직전까지 군수기지 사령부 인사참모로 재직했는데 그 당시 법무참모가 이중령이어서 잘 안다고 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는 이 일련의 인연들과 박대령에게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두 통의 서신을 받아들고 박대령의 방을 나오려는데, 박정희 의장의 전속 부관인 손영길(孫永吉) 선배가 나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고향이 울산인 그와 경주가 고향인 나는 휴가 때면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기도 했고 생도 시절에는 우리 부대의 선임하사관 생도였던 관계로 다른 선배들보다는 좀더 가까운 사이였다. 나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간 손선배는 편지를 한 통 꺼내더니 펼쳐놓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각하(國家再建最高會議議長閣下)’라는 한문 제목으로 이한림 장군이 감방에서 쓴 편지 같았다. 나는 편지 내용을 보고 싶지도 않았고 또 볼 필요도 없었다. 보나마나 동기생이긴 하지만 입장이 달라져버린 친구간의 탄원서인 것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방은 확실히 재심 청구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나에게는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나만 생각을 고쳐먹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혁명의 대열 속에 끼어들 수 있고, 군인으로서 장래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고, 내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 방에서 손선배와 작별하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이번에는 전두환 소령과 최성택(崔性澤) 소령이 마주보고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못본 척 지나쳐버릴 수는 없었다. 최선배와는 별인연이 없었지만 전두환 선배와는 말이 시작만 되면 하루이틀 가지고는 끝나지 않을 많은 얘깃거리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전선배와는 특전감실에서 헤어진 지 만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대하게 된 셈이다. 그것도 5·16이라는 정치적 격동을 치르고 나서 서로가 반대 입장에서 딱 마주쳤으니 말 보따리를 풀자면 한없이 많을 것이었다. 옆으로 다가가서 바둑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서 있는 나를 힐끔 쳐다본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박태준 대령이 이영진이를 잘 알더군!” 딱 그 말 한 마디뿐이었다. ‘잘 알다마다. 잘 알기만 해?’ 그러나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때의 말을 가만히 음미해보면 ‘박대령님도 잘 아는 처지인데 우리 다시 잘 지내자’라는 뜻이 내포돼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그의 성품에 내가 좋아하는 점이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정의감이 있었고 부하를 사랑할 줄도 알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없는 것, 예를 들어서 이지적인 성품을 지닌 사람을 몹시 좋아하고 그에게서 배우려고 하는 면도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 날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분수를 모르던 그의 행적이 생각나서 그만 말문이 닫혀버린 것이다. 나는 박태준 대령이 써준 두 통의 편지를 들고 양평과 서울을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 편지를 받아본 28연대장 H대령은 박태준 대령만 꽉 잡고 매달리라고 했다. 재심과 선고 유예 1962년 4월12일 오후 드디어 내 문제를 다룰 중앙계엄 고등군법회의가 육군본부 법정에서 열렸다. 나는 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중위 계급장을 달고 법조문만 따지려 드는 젊은 검찰관과 입씨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혁명을 하는 판에 무슨 놈의 무단 이탈이야, 무단 이탈이…?’ 이 재판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재판 다음날인 4월13일자 조선일보 3면에 실렸던 기사 제목은 ‘희귀한 구형, 3일간 미역(懲役)’ ‘군재(軍裁), 10분 만에 선고유예판결’이었다. 선고유예로 육군 대위의 신분을 되찾게 된 나는 1962년 4월13일 강원도 인제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6사단으로 보직을 받았다. 사단에서는 예하 7연대 2중대장으로 보직되었다. 그 해 10월 말에는 나의 미국 유학 경력이 참작되었던지 육군보병학교의 교관 요원으로 차출돼 광주의 상무대로 전출됐다. 그후 나는 보병학교의 교관에서 육군정보학교의 학생으로 있는 사이에 폐가 나빠져서 육군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정보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아주과에 파견나가서 월남 정치담당 장교로 근무했다. 나는 사이공에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창설된다고 해서 자원했다. 친구들은 만류했지만 내 군법회의 기록 때문에 소령 진급에 번번이 누락되는 것을 만회해볼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낯선 월남 땅을 밟은 보람도 없이 네 번째 진급에서 누락되자(4년 연속 누락) 나는 군대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이미 육사 1년 후배들이 소령으로 진급한 마당에 더 이상 군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1966년 7월에 월남에서 귀국한 다음해인 1967년 7월에 예비역에 편입됐다. 전역 후 회사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창설을 서두르던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에 3급 사원으로 취직했다. 그때가 1969년 3월의 일이다. 나를 취직시켜준 박태준 사장은 나를 불러다 앉혀놓고 제철회사에서 경험을 쌓아나갈 수 있도록 몇 달에 한 번씩 일터를 바꿔줄 테니 마음잡고 일해보라고 당부도 했다. 나는 이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생각하듯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5·16으로 인해서 신분상의 전락과 손해를 본 사람들과 어떻게든지 혁명과업 수행을 방해하려는 구정치인들 측에서 나를 가만두려 하지 않았고, 하마터면 원충연(元忠淵) 사건에 나 역시 연루될 뻔한 일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네가 5·16 주체세력들에게 정규육사 출신들의 이미지를 망쳐 놓았으니 책임을 지라”고 협박하는 육사 선배도 있었다. 최고회의니 정보부니 해서 초창기 혁명정부에 협조하고 있던 소수 동창들의 축에도 끼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을 괴롭혀서 그 사람들에게 환심이나 사보려는 수작이었다. 결국 나는 취직한 지 꼭 1년이 되는 1970년 3월, 포철에 사표를 내고 두 달 후 미국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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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2.16 15:13

    첫댓글 좋은글 잘 보고감니다. 감사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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