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쇼인(万松院)
반쇼인은 에도시대 쓰시마번의 관청이 위치해 있었던 이즈하라의 서쪽 아리아케(有明)의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 낙엽수림이 뒤덮힌 일대를 포함해「쓰시마번주 소가묘소」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 3대 묘지 중 한곳이다. 사원은 초대 번주(宗가 19대) 요시토시(義智)의 보리사로써 제2대 번주 요시나리(義成)가 아버지를 기리며 1615년에 창건한 쇼온지(松音寺)를 1622년 요시토시의 법호를 따라 반쇼인으로 개칭한 곳으로, 이곳에 역대 쓰시마번주와 그 일족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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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주 원찰인 이곳에는 고려에서 증여하였다는 불사공구(佛事供具)인 삼구족(三具足 : 향로, 촛대, 고배)과 고려불(관세음보살반가사유상), 고려판경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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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원 오르는 길 가로수인 벛나무에 기생하는 식물 : 무슨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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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오르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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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도주의 묘지)
묘지는 햐쿠간기(百雁木)로 불리는 132개의 돌계단을 오른 곳에 마련되어 있다. 이즈하라에 처음으로 관청을 둔 宗가 제10대 사다쿠니와 요시토시 이하 32대까지의 번주와 그 가족의 묘가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상단에는 요시토시 이래의 번주와 그 정부인, 중단에는 측실과 아동, 하단에는 일족 및 소가(宗家)에서 출가한 사람 등이 모셔져 있다. 그 중에서도 대조선무역이 활발하였던 시기의 번주 요시나리(義成)와 요시마사의 묘는 다른 묘에 비해 훨씬 커 쓰시마와 조선의 무역이 얼마나 활발하였던가를 짐작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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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와 결혼한 종무지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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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도주 종의성의묘 : 조선신사로 조선에 가장 많은 5차례나 다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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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쓰시마번은 십만석의 영지를 가진 번(藩)이었으나 웅대한 묘지의 규모는 수십만석의 영지를 가진 번에 버금간다고 한다. 본당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현존하는 절문은 쓰시마에서 가장 오래된 모모야마(桃山:1568∼1600)양식으로 창건 당시 그대로이며, 도쿠가와(德川) 역대 장군들의 위패 및 조선통신사 관련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햐쿠간키(돌계단)를 오르면 석단과 묘지 옆에 하늘을 찌를 듯한 3그루의 삼나무가 서 있다. 원래는 20그루 이상 있었다고 전해진는데, 이 3그루의 삼나무가 깊고 한적한 숲속을 제압하고 있다. 수령은 분명하지 않으며, 나무 둘레는 약 5.2m~7m, 높이는 35m~40m에 달한다. 1966년에 나가사키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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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삼나무 아래서 단체로.......)
하치만구신사(八幡宮 神社)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신사로 대마도의 대표격인 신사다. 연중무휴에 입장료는 없으나 보물전 관람은 따로 돈(300엔)을 내야 한다.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상의 인물인 신공황후를 받들고 있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의 증거를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보물관에는 三十六歌仙 두루마리 그림이 장관(1644~1672년경에 제작)이며 소서행장의 딸로서 19대 대마도주 소 요시모토(宗義智)와 결혼한 마리아를 참배하는 신사가 있다.
쯔즈자키 해상공원
대마도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대마도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장엄한 광경은 보는 이의 탄성이 절로 나게 한다. 특히 걸어가며 한국 휴대폰으로 전화를 할 수 있어 여기저기로 전화하는 한국 관광객의 모습을 보는것도 이채롭다. 해안을 따라 돌아가면 2차 대전 당시 화약고로 이용했던 시설물이 아직 남아 있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은어가 돌아 온다는 계곡으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린 공원이다. 강 전체가 천연 화강암으로 덮혀진 일본 전국에서도 진귀한 곳이며 구름다리, 산책로, 놀이기구, 캠프장 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세이잔지(西山寺)와 겐소(玄蘇) 석상, 김성일 선생 시비
서산사는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들렀을 때 유하던 장소로서 지금도 그것이 인연이 되어 특이하게도 유스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다. 대마도 유일의 유스호스텔을 사찰이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서산사를 찾아가면 3군데의 볼거리가 있는데 사진에 있는 이태안의 건축물과 김성일 선생의 시비(詩碑),그리고 현소스님의 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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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사 표지석)
이떼이안(以酊庵 : 1611~ )
현재의 건축물은 화재로 손실 된 것을 복구한것이나 입구부분의 구조물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조선통신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옛 대조선 외교기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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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정면의 지붕끝에 있는 산 모양의 구조물은 당파풍(唐破風)으로 일본 고유의 건축 양식이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에서는 박공이라 하는 것으로 에도(江后)시대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전해져 일본 고유의 양식으로 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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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존불은 문화재로 지정된 동조 고려불(대일여래)이고 본당에는 겐소와 그 후계자 겐뽀오(玄方)의 목조상이 있고 겐소가 명나라에서 일본국광선사의 법호를 받으며 하사된 가사가 보존돼있다)
학봉 김성일 선생 시비 (鶴奉 金誠一 先生 詩碑)
김성일 선생 1538(중증 33)∼1593 (선조 26) 본관은 의성이며 영남의 대 유학자라 일컬어진다.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다.
조선 선조 대왕이 왜국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황윤길과 함께 통신사로 파견하였다.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기를 필히 왜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황윤길의 의견과 반대의견을 보고하여 당시 동인과 서인의 세력 갈등의 상황에서 우위였던 동인 세력인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같은 동인이었던 유성룡 선생과의 교분이 깊어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대왕의 처벌의지에도 유성룡 선생이 적극 변호하였다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로 종군하다 병사하셨다. 서산사 뒤 산 기슭에 원래의 시비가 현소 스님의 부도탑과 함께 나란히 서 있으며 경내에 있는 시비는 의성 김씨 문중에서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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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소 스님 석탑
현소 스님은 하카다(博多) 세이후쿠사(聖福寺)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하였다.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름을 받고 그의 수하 승려가 되어 1588년(선조21년)부터 조선에 드나들며 자국의 내부사정을 설명하고, 일본과 수호관계를 맺고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요청하였다.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許筬)등의 통신사 일행이 풍신수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일본으로 갈 때 동행했으며 , 이듬해 다시 입국하여 조선의 국정을 살피고 토요토미의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섭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159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國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이후 임진강을 사이에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고니시(소서행장)의 제의로 이루어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 이덕형 등과 강화회담에 <야나가와 초신>과 함께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서산사 뒤 산기슭에 스님의 부도탑이 안치되어 있고 김성일 선생의 시비도 나란히 서있다.
카미자까전망대(上見坂公園)
표고 385m의 전망대로, 일본을 대표하는 리아스식 해안(육지의 침강으로 생성된 해안)인 아소만이 눈 아래에 펼쳐지며, 멀리 규슈 본토와 한국의 산들이 보이는 국경의 섬 대마도에서만 볼 수 있는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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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자까 공원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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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내 덕혜옹주와 결혼한 소 다케유키(宗武志)의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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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의 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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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의 국민체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