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함
행 26:24-32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행 26:24-32 / 갑자기 베스도가 소리를 질렀다. `바울, 당신은 미쳤구려! 너무 학문에 깊이 빠져서 정신이 돌아 버렸구려!' 25) 그러자 바울이 대답하였다. `저는 미친 것이 아닙니다. 베스도 총독 각하, 저는 다만 진리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26) 아그립바 전하께서도 이미 이런 일들을 잘 알고 계시므로 제가 전하께 거리낌없이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전하께서 모르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7) 아그립바 전하, 예언자들을 믿으십니까? 물론 믿으실 것입니다.' 28) 아그립바왕이 바울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그런 하찮은 증거를 가지고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하오?' 29) 바울이 대답하였다. `제가 말씀드린 것이 하찮게 들리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전하와 여기 있는 청중이 모두 다 저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물론 이 쇠사슬에 묶인 것만은 제외하고 말씀입니다.'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31) 그들은 `저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사형에 처하거나 감옥에 가두어 두어야 한단 말인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32) 아그립바도 베스도에게 `그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지만 않았더라면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 걸 그랬소' 하고 말하였다.
바울의 복음의 변론을 들은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은 바울이 미쳤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합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바울의 구령의 열정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24-28) 부활의 복음을 들은 베스도는 바울의 많은 학식이 그를 미치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식 사고에 갇혀 있는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바울은 대신 아그립바 왕에게 집중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바울의 말을 알아듣는 듯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그리바 1세는 매년 성전에서 신명기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성장배경에는 유대교적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선지자를 비롯한 유대교의 전승들과 종교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바울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유도합니다. 변론을 빙자하여 자신에게 전도하는 것을 알아챈 아그립바는 바울의 권유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맙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의 말씀처럼 그는 사망의 냄새를 풍겼습니다(고후 2:15, 16).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9) 비록 그가 한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라 할지라도 바울은 기죽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깁니다. 지금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고, 반면 바울은 죄수에 불과한 몸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담대히 모두가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30-32) 바울에 대한 모든 재판과 심문이 끝났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결론은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입장은 바울에게 종교적 망상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법적인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이사에게 상소하지만 않았더라면 즉시 석방될 수 있었것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간밤에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할 것을 염두에 두고 벌인 일입니다(행 23:11). 비록 죄수의 신분이라도 로마에 갈 수만 있다면 그곳의 법정에서도 복음을 증거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적용: 본문 29절의 말씀에서 ‘나와 같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며,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강렬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복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긴 시간 논해야 하는 철학이 아닙니다. 복음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이신 구원의 길로서 확실하고 단순하여 듣는 자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도(道)입니다.
< 설 교 >
살아있는 순교자
행 26:24-29 / 김상수 목사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미친 XX”, “미친 X”같은 욕설을 들었는데, 기분이 좋고 가슴이 찡했던 적이 있는가? 만약 누가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면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마음이 상당히 불편해 진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실제로 “미친 년”이라는 말 때문에 가슴이 뭉클 했던 일이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욕설 때문에 가슴이 찡한 은혜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충남 논산시 성동면에 가면 병촌성결교회가 있다. 병촌교회는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게 전체교인 74명 중에 66명(남27명, 여39명)의 성도들이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순교를 당했던 교회다(1950.9.27-28). 그 당시에 이 교회 신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8명(어린이 3명 포함) 뿐이었다. 순교를 당하신 분들 중에는 집사님이 한 분이고, 나머지 65명은 아무 직분도 없는 성도들이다.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 수도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들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스데반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그런데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진지 불과 2년 후인 1955년에 병촌교회는 새로운 교회건물을 건축하였다. 새로 지은 교회건물은 그 당시 성동면 일대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교인의 대부분이 순교를 당했고 장년성도가 불과 5명밖에 남지 않았던 교회에서 어떻게 이렇게 교회를 건축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이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했던 현재 병촌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윤영수목사님은 1955년 사무총회록을 검토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것은 전쟁 통에 66명이 순교를 당했고, 어른은 단지 5명만이 남았던 교회가 불과 2-3년 만에 131명으로 부흥한 것 이었다. 그래서 건축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짧은 기간에 부흥이 되었을까? 그래서 그 당시 살아남았던 분들 중의 한 분이신 고령의 권사님에게 문의할 결과, 순교사건이 있은 후에 살아남은 성도들은 목숨을 걸고 전도했다고 한다. 그들은 순교의 현장에서 피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애통해 하면서 비록 순교는 당하지 못했지만, 순교자적인 각오로 성동면 일대에 밤낮으로 전도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서 돌을 던지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죽는가?’라고 하면서 ‘미친년들’이라고 욕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짧은 기간에 5명의 성도가 131명이 된 것이다. 그들은 멀리 금강 하구에 있는 장항 제련소에서 나온 폐철가루들을 긁어서 나룻배에 싣고 강경포구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손수레에 싣고 와서 일일이 손으로 벽돌을 만들어서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병촌교회 순교이야기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순교자적인 일화를 들으면서 마음이 찡하면서 감동이 밀려왔다. 병촌교회 순교 이야기는 이 시대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잘 말해준다. 생전에 살아있는 순교자라는 말을 들었던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 안이숙 여사는 이런 말을 했다.
“순교보다 순교자적인 삶을 사는 것이 더 어렵다. 왜냐하면 순교는 단 한 번으로 죽지만, 순교자적인 삶은 매일 매 순간마다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순교보다 어려운 것이 순교자적인 삶이다. 순교자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살아있는 순교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순교를 당한 성도들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미처 순교를 당하지 못했던 성도들에게도 그들의 순교자적인 삶을 통해서 교회를 재건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던 것이다.
병촌교회에서 살아남았던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들이 앞으로 지향해야할 아주 중요한 삶의 지침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순교자적인 삶이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사명)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만약 극한 질병에서 나를 살려주셨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만약 나에게 극한 고난 중에도 피할 길을 주시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숨을 쉬고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면, 그 또한 그 속에는 분명히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그 뜻이 바로 남은 생애 동안, 나를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나에게 주신 사명”이다. 이것을 위해 목숨 걸고 달려가는 것이 바로 순교자적인 삶이다. 우리들이 죽은 순교자는 되지 못한다 해도, 순교자적인 삶을 통해서 살아있는 순교자는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남은 평생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순교자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사도 바울이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대적 자들에게 “전염병 같은 자라”는 말까지 들었고,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26장에서는 총독에게 ‘미쳤다’는 말까지 들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Pest)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행24:5)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You are out of your mind, Paul!)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26:24)
여기서 사용된 “전염병”이라는 말은 흑사병(黑死病:Black Death, Pest)을 말한다. 흑사병을 일으키는 페스트균은 19세기 말에 파스퇴르가 페스트균을 발견하기까지 인류를 위협하던 가장 강력한 전염병 중의 하나였다. 실제로 1347년부터 1351년까지 5년 동안 서유럽 인구의 30~50%인 7500만 명이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그 당시에 고려의 인구가 210만 명 정도). 그런데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런 “전염병(페스트균) 같은 자”, "소요하게 하는 자",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네가 미쳤도다”라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자신을 심문하던 자리에서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에게까지 전도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자신에게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언했고,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는 십자가 외에는 아예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사도 바울이나 130여 년 전에 이 땅에 왔던 선교사님들 그리고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는 지금 무엇에 미쳐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미쳤다는 말과 가장 유사한 것이 “중독”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와 교회는 각종 중독으로 너무 심각하다. 지금 한국사회는 돈과 쾌락에 미쳐있다. 상당수의 성도들이 예수가 아닌 다른 것들에 미쳐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미치려면 제대로 미쳐야 한다. 진정으로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미쳐야 한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바로 십자가다. 이것을 위해 사는 것이 바로 순교자적인 삶이다.
그래서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 리빙스턴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그처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희생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 우리가 결코 상환할 수 없는 그 큰 빚의 아주 작은 일부를 갚아 드린 것뿐인데 그것을 희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코 희생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것을 특권이라고 말해주기 바랍니다."(1857.12.4,캠브리지 대학 설교)
그렇다! 성도가 성도답게 살고, 순교자적인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눈물로 중보기도하고, 복음전하고, 지역을 섬기고, 충성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특권이다.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이여, 지금 여러분은 무엇에 미쳐있는가?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목숨을 걸지 말고, 영원한 진리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걸자.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예수님 때문에 미쳤다는 소리가 겁나는가? 오히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안타깝게 여기라.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의 권능을 받아 사도 바울처럼 순교자들처럼 예수를 전염시키는 강력한 복음 바이러스가 되자. 그래서 살아있는 순교자가 되고,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가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나처럼 되십시오
챙 26:24-29 / 마경훈 목사
저는 사도 바울이 부럽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말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이 자녀들에게 유언을 하면서 "너희들 나처럼 살아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정말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잡히게 되었고 영어의 몸으로 아그립바왕과 총독 베스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볼 때는 바울의 몰골이 한심스러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로마시민권자며, 세도를 누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지가 벌써 2년이 지났기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해 몰골도 말이 아닙니다. 그런 바울을 보고 베스도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바울이 자신은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한다고 하면서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감옥에 갇힌 것 외에는 자기처럼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과연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자기처럼 되기를 원했을까요?
1.자기처럼 예수 믿으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예수 믿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은 은혜와 축복 중에 가장 큰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를 자신 속에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생명이나 능력, 돈이나 권력을 얻는 것 보다 예수를 얻는 것이 더 값진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경멸했으며,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오의 빛 보다 더 밝은 하늘의 빛에 눈이 멀고 삼일을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다가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를 만나고 보니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복된지 질그릇에 담긴 보화로 표현을 합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가치 없는 그릇입니다. 예수 없는 인생은 그렇게 가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게 되면 질그릇에 보화를 담은 것처럼 가치 있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에수님께서 신자 안에 들어가시고 신자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면 예수님과 공동운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죄와 사망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됩니다. 그래서 부활의 첫 열매 되시는 주님처럼 새 생명 가운데서 살며 영생을 보장받게 됩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됩니다. 요1:12에 보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의 영혼의 친 아버지가 되셔서 그의 생사를 간섭하시고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말은 생명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모의 생명이 자녀에게 생명을 주듯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부모의 집이 자녀의 집이 되듯이 믿는 자에게 천국이 주어집니다.
2. 자기처럼 예수 닮으라는 말입니다.
고전 11:1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그 말은 예수 닮으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예수 믿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예수 믿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를 믿었으면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 닮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것은 그분의 피를 힘입어 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부모의 피가 흐르는 것을 속일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자식을 보면 부모의 어떠함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신자를 보면 그리스도를 본듯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닮는 것은 공부해서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많이 닮으려면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많이 가지면 됩니다. 어떤 부부는 처음에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 한솥밥을 먹다보니 점점 닮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사용하는 단어 심지어 얼굴까지도 닮아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함께 살다보니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느끼는 감정이 같고, 감정이 같으니 표정도 같아지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그 사람이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구별이 안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이 신자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그에게서 예수님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의 향기가 물신 풍겨나야 정상인 것입니다.
저는 가끔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혹시 목사님 아니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 때 기분이 참 좋습니다. 아! 내게서는 목사 냄새가 나는 구나! 하지만 거기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목사님을 보니 예수님을 본듯합니다"라고 할 정도로 예수 닮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3. 자기처럼 예수를 위하여 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을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방해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만나고 난 후 정말로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롬14:8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후에 자신의 주인이 에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전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했으나 사실은 자신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자신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줄 알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창조의 목적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에 영광이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자신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계는 시계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자신을 팔목에 차는 주인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 구속의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를 만나게 되자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죄인인 자신은 죄의 삯으로 죽어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예수님은 아무 흠도 없는 분인데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피 값 주고 사셔서 자신의 구주가 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신은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자유합니다. 죄로부터 자유한 반면에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종은 주인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종은 자신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구속의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주님만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과 같은 피조물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주고 구속받은 예수님의 종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입니다.
4. 자기처럼 예수를 전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생애 목표는 로마 복음화 였습니다. 그는 로마를 복음화 하여 온 세계로 복음이 수출되는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처음 주님을 만나고 눈이 멀었을 때 아나니아를 통해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을 깨달았으며, 그 일에 전적인 헌신을 했습니다. 그는 생활의 모든 것을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사명을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알고 그 일에 헌신했습니다.
사실 신자는 누구든지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성령이 신자에게 임하신 목적은 예수 증거를 위함입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복음을 증거해야 하고, 교사는 교사로서, 공무원은 공무원으로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도, 사업을 하는 사람도 그리고 직장인들도 자신의 일터를 복음 증거를 위한 방편으로 주셨다고 믿고 그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세상의 무엇보다 영혼이 중요하다면 그 영혼을 살리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교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방 숫자보다 교회수가 많다며 교회를 더 세우는 일을 중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에 5만 교회가 있는데 12백만이 믿는다면 45백만의 구원을 위해서는 교회는 4배 이상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여러분은 다방 숫자 보다 교회 숫자가 더 많은 것이 나쁘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교회숫자가 더 많은 것이 오히려 복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외쳤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피 값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찾습니다. 그런데 만약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 피 값을 선지자에게서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과 우리 소망교회에 복음 증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로 알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예수를 증거 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5. 자기처럼 내세를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마감한 후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을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후의 세계가 존재하며 그 세계에서 되어지는 것은 이 땅에서 이미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던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 후에 상급이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딤후4:7-8).
저는 어제 장례식 설교를 했습니다. 장례예배를 집례 하면서도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시체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고, 내세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기쁨과 소망이 충만했습니다. 고인이 예수를 믿는 분이었기 때문이며, 저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제주도가 좋기는 하지만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좋지만 그곳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써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계속 생활할 곳은 그곳이 아니고 서울이기 때문입니다. 현세와 내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현세가 아무리 좋아도 우리는 현세에 모든 것을 투자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잠시 지나가는 곳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해 가는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헌신하고 충성하며 수고의 땀을 흘리는 것은 이 곳이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수고가 영원한 세계에 대한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 중에 하나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영원한 세계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준비되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