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하기 좋은 시조 모음 2
1. 운명 / 추창호
손금으로 펼쳐놓은 길들이 눈을 뜬다
풀꽃의 웃음이 남은 길의 들머리도 보이고
위대한 천재가 되고픈 치기 어린 날도 보인다
꿈이 꿈을 불러 한껏 부풀던 열정 사이
초코렛 같은 길이 불쑥불쑥 일어서고
그 향취 취해서 걷던 파노라마 같은 길
수많은 결별의 아픔 감내하고 떠난 후에야
나를 만들고 끝내 내 길이 되고만
거슬러 오르려해도 거스르지 못한 그 길
ㅡ 시조집 『풀꽃은 또 저리 피어』, 시와소금, 2022.06, 51쪽
2. 도동 측백수림* / 리강룡
천 살을 묵었다 카네
저 빼빼한 나무들이
험한 바우 틈서리 비집고 틀어 앉아
안즉도 청청한 웃음 웃고 있다 아이가
서거정 큰 선생도 저들을 봤다 카제
북벽향림北壁香林이라
참한 이름도 지어주고
달구벌 십경 중에서 으뜸이라 카시다
나무도 천 년쯤은 비바람을 맞고 나면
안으로 뼈를 녹여 은은한 향을 짓는갑다
두둥실 달뜨는 밤이면
한 채 피리로 사는갑다
* 도동 측백수림 : 대구시 도동 소재, 대한민국천연기념물 제1호.
ㅡ 시집 『신지리』, 고요아침, 2014.11, 69쪽
3. 독도(獨島) / 황봉학
태고에 한반도라는 아름다운 어머니가
수많은 섬이라는 자식을 낳으시고
막내로 푸른 동해에 옥동자를 낳으셨네
너무도 출중하여 탐을 내는 왜놈들이
자기들 자식이라 생떼를 부리지만
제 자식 몰라볼 어미 이 세상에 있다더냐
억만년 이어져갈 어미와 자식사랑
넓은 동해 마르도록 독도야 푸르거라
한반도 수문장 되어 역사 앞에 우뚝 서라.
ㅡ제5회전국독도사랑 작품공모대회 당선작.
4. 퇴행성 / 김선호
돌아보면 아득히 참 멀리도 흘러왔다
뱃속에서 열 달
아니, 전생은 좀 길었나
지나온 길목, 길목마다 새록새록 돋는 별
때로는 금성처럼 새벽을 깨우다가
혹은 화성으로 갖은 애를 태우다가
무작정
주변을 맴도는 어지러운 토성이다가
아, 정녕
더는 갈 수 없는 이승의 막바지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수백 광년 강가에서
마지막 사력을 다해 제 몸 태워 빛나는 별
ㅡ 시조집 『섬마섬마』, 알토란북스, 2017, 14쪽
5. 연鳶을 띄우다 / 권갑하
연을 날린다 광활한 발해의 하늘 위로
장백의 안개 헤치고 압록 두만도 훌쩍 넘어
적층된 연대 속으로
연을 띄워 올린다
여기가 어디인가 굽어보고 돌아보며
주름진 오욕의 역사 해진 상흔도 다독이며
가끔은 천둥 번개 불러
곤한 잠도 깨워가며
너무 높게는 말고 낮게는 더욱 말고
연바람 멈추면 노래도 멎고 말 것이니
당겨라, 팽팽히 얼레를
풀었다 다시 당겨라
오래 떠나 있어 낯설고 물설겠지만
내 어버이 온몸으로 일군 모토母土 아니던가
다물多勿* 그, 돛을 올리듯
꼬리 긴 연을 띄운다
*다물多勿은 '되찾다', '회복하다'라는 뜻으로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연호이자 건국이념이다. 『삼국사기』권13 고구려 본기 동명성왕편에 다물을 '麗語謂復舊土'로 표현했는데 이는 고구려어로 고토회복을 뜻한다.
ㅡ시조집 『겨울발해』, 알토란북스, 2017.04, 13쪽
6.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종연
ㅡ솥발산 공원묘지
당신께서 덮었던 책장의 마지막을 펼쳐
뒷이야기를 씁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시점이 자꾸 흐려져 글들이 흩어지네요
더 이상 건너올 수 없는 그 편의 언어들은
몇 번의 번역기를 돌려야 닿을까요
대답을 기다립니다 답신 빨리 주소서
둥글고 단단해진 수천 개 동음이의어
다 잊은 듯 다 버린 듯 그렇게 누웠지만
골짜기 가득 서린 고요 압축파일 같습니다
세필 궁체로 알알이 그렇게 써 내려간
당신의 생애가 여전히 진행형이길
한나절 바람에 기대 바람을 소지합니다
*김환기 그림에서 차용
ㅡ 시조동인지 《운문시대》18권『소금꽃 다녀간 뒤』, 동학사, 2022, 30쪽
7. 입속의 캐스터네츠 / 임영숙
아버지의 틀니가 입속에서 움직이면
스물여덟 이빨은 고통의 캐스터네츠
직조된
윗니와 아랫니
음악은 살아있다
누대에 이어져 온 저작의 노동으로
하나 된 잇몸과 이빨은 말을 한다
달그락
살아있는 동안
씹고 또 씹어야지
음식을 거부하고 컵 속에 잠긴 시간
가만히 내려놓은 틀니를 바라볼 때
이제는
제 소명 다한 듯
기포 피워 올린다
ㅡ 시집 『풀잎의 흔들림이 내게 건너왔으니』, 문학의전당, 2020.09, 27쪽
8. 샘 / 손증호
선생님 줄인 말로 아이들은 샘이란다
남도 억양으로 쌤이라고도 하는데
버릇은 없어 보여도 샘이란 말 참 좋다
그렇지 선생님은 샘이라야 마땅하지
깊디깊은 산골짝에 샘물로 퐁퐁 솟아
어둠을 길닦이하며 흘러가는 푸른 노래
눈 비비고 찾아온 어린 짐승 목축이고
메마른 봄 들판을 푸릇푸릇 적시는
샘 같은 선생이라야 아이들 가슴 살아나지 .
ㅡ 시조집 『달빛의자』, 고요아침, 2017.10, 61쪽
9. 힘 / 박희정
산다는 건 어떤 불의에도 굴하지 않는 건지
산이 무너지고 터널이 지나가도
천성산 도롱뇽 부부 헤어지지 않았다
무성한 탁상공론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맥을 이어주는 무량한 저 생명들
에둘러 제 터를 찾아와 목숨 끈을 잇는다
짝을 짓는다는 건 천상의 기도같은 일
통설을 깨트려서 세상의 귀 열어놓고
대성늪 봄볕 가득한 유백의 알을 보라
ㅡ 시집 『들꽃사전』, 책만드는집, 2011.08, 16쪽
10. 붉은 결기 / 박희정
변산에서 보았다, 격렬했던 청춘 무렵
그대, 읽지 못한 날이 거북등처럼 거칠어져
격포항 언저리마다 골이 패이고 물이 고이고
그 흔적 짚어 읽다 고꾸라지고 싶었다
바래고 찢긴 기억 조개무지로 쌓아놓고
스스로 닿고 싶은 곳, 노을 닮아 은은한 곳
거룩한 고서처럼, 잘 부푼 식빵처럼
절벽을 타고 내리는 유장한 빗물처럼
내 생애 붉은 결기여, 또 다시 청춘이여
ㅡ 시집 『들꽃사전』, 책만드는집, 2011.08,
11. 당신을 쓰고 싶다 / 박희정
언젠가는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오로지 갇혀
자작자작 흔들렸던 내 심지 뾰족이 깎아
진종일 당신을 쓰고 싶다, 거침없이 그리고 싶다
청청한 나무들이 어깨 겯고 솟는 이유와
묵묵히 겨울을 견뎌 하얗게 터진 껍질 읽고
내 몸에 실핏줄처럼 파고든 오랜 기억과 눈 맞추며
나무보다 더 흔들리며 오매불망 해바라기하다
돋을새김 자화상 같은 증표 하나 품어 안고
원시림, 꼿꼿한 결 따라 휘갈기며 쓰고 싶다
ㅡ 시집 『들꽃사전』, 책만드는집, 2011.08,
12. 新 어부사시사 / 김진길
그물코 다 기웠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샛바람 잦아드니 갈앉은 배꾼 근심
잔 너울 가볍게 살랑 봄 햇살을 싣고 가자.
바닷길은 한길이라 고향으로 나 있다며
비릿한 향수병에 배를 탄 이국 청년
저녁답 찬 노을빛에 서툰 말은 얼붙고
몸덩이만 성하다면 노동요는 만국 공용
이어라 이어라 지국총 어사와 ⃰
저 깊은 바닷속으로 꿈을 얽어 던진다.
돛 디여라 돛 디여라 ⃰ ⃰ 저 큰 달 어찌 싣나
그물은 숭숭하여 다 흘러도 만선이니
별빛을 총총 알 박은 이 바다는 두고 가자
닫 디여라 닫 디여라 ⃰ ⃰ ⃰ 하마 날이 밝는다
간밤에 미끄덩 빠진 그달은 그만 잊고
파다닥 튀는 활어의 짧은 해를 묵상하자.
어창 문 어서 닫자 물의 근심 숨어들라
마중나온 소주잔에 알큰하게 오른 취기
입 풀린 안남 청년 ⃰ ⃰ ⃰ ⃰이 제 바다를 한 짐 푼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에서 차용. 노 젓는 소리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베트남 청년
ㅡ계간 시조전문지 『나래시조 』 (2023 년 가을호 ) P88.
13. 맨발 / 천숙녀
버리지 못하는 집착의 길 한 짐씩 덜어내자
맞물린 톱니에 갇혀 견뎌야 했던 급류쯤
역류로 흐르는 소문은 참아온 내열耐熱이다
봄볕이 몰고 온 사연 소름으로 돋았다
꼿꼿이 서서 버티었던 발길 뚝 끊긴 사월
한바탕 춤사위였다 칼 집 내어 버무리던
한여름 출렁이던 서녘 하늘에 노을이 탄다
땅을 치며 쏟은 눈물 목청 풀고 울었던 날
지독한 눈물이 있어 꽃으로 피는 거다
생生의 순간 오늘 하루는 한 편의 드라마다
수맥水脈으로 흐르면서 꿈틀거리는 목숨 줄
우주의 맑은 길 여는 가뿐한 맨발이다
ㅡ출처 천숙녀시조집 『비움 』 (건강신문사 , 2020) P.19
14. 오월 / 이광
ㅡ장목수
여보, 날 참 조타 저 산빛 보거래이
내 인자사 말한다만 당신도 오월으 신부 아이가, 갱상도 문디가 절라도 순디를 만나 세상 다 가진 거 같았제 , 호강시키줄라 해꾸마는 고생만 시키싸아 내 억수로 미안핸능 거 아나? 빼아픈 후회를 해바봐야 철이란 기 드는 깅가 고마 그노무 노름판은 생각도 하기 실타카이, 욕심 부릴 일도 걱정 싸매 댕길 일도 인자는 엄따, 빚도 얼쭈 가파붓꼬 애들도 다 컸다 아이가. 몬난 애비지만 애들 뒷바라진 웬마이 해준 거 같은데 글쎄 머스마야 글타치고 딸자슥은 지 엄마 손이 가얄 데도 있능 기라..... 아이쿠, 내 정신 쫌 보거래이 당신 따라줄라꼬 가온 술 홀짝홀짝 다 마실 뿐핸네 자, 쪼매라도 부우주께 그라고 추석엔 애들 데꼬 오꾸마, 그 단새 생각나믄 아무 때고 또 올 텡께
실없이 자꾸 온다꼬 머라카진 마래이
ㅡ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 (고요아침 .2016 년 8 월 27 일 ) 79 쪽
15. 이불에 대한 소고小考 / 곽종희
빨강 초록 비단결이 켜켜이 잠을 자도
정작엔 사십 년 된 낡은 이불 덮는 엄마
기실은 지난날들을 버리기 싫은 거다
아부지 미운 정을 촘촘히 누벼 넣고
자식들 보고픔도 땀땀이 바느질한
숨 죽은 그리움 한 채 덮고 사는 것일 게다
낡은 이불 한 채에 삐져나온 발이 열 개
흩어진 그 발들을 다독이는 꿈속에는
옥양목 시린 홑청이 서걱이고 있겠다
ㅡ시조집 『외로 선 작은 돌탑 』 (책만드는집 , 2022) P13.
16. 고목 / 나순옥
나이를 묻지 마라 자랑할 수 없게 됐다
물관부 체관부 심장 멎은 지 이미 오래
나이테 다 삭아내려 속이 텅 비었다
외롭냐고 묻지 마라 서러워서가 아니다
버겁질 사이사이 묻어있는 기억들
그 마저 지워져 버릴까 숨소리도 조심한다
무엇이 고통이냐 그것도 묻지 마라
고통이 있다는 것 그것은 곧 희망이다
꽉 막힌 길목에 갇히면 새로운 눈 트였지
희망이 끊겼느냐 물어보고 싶은 게냐
초록빛 꿈 아니어도 어둠을 뚫고나갈
별자리 마음에 앉혀 접신에 들고 있다
ㅡ『현대시조 대표작』 알토란 북스, 2018년. P190.
17. 득음 得音 / 이달균
소리는 날고 싶다 들바람 둠벙 건너듯
휘몰이로 돌아서 강물의 정수리까지
아름찬 직소폭포의 북벽에 닿고 싶다
적벽강 채석강을 품어 안은 변산반도
북두성 견우성이 어우러져 통정하고
윤슬의 만경창파는 진양조로 잦아든다
결 고운 그대는 국창 國唱 이 되어라
깨진 툭바리처럼 설운 난 바람이 되어
한바탕 쑥대머리나 부르며 놀다 가리니
그날은 찾아올까 우화등선 羽化登仙 은 이뤄질까
가을빛 스러지면 어느새 입동 무렵
노래는 구만리 가고 기러기는 장천 간다
ㅡ 『현대시조 대표작 』 알토란 북스 , 2018 년 . P366.
18. 그날 / 이승은
ㅡ매헌梅軒 윤봉길
누가 제국의 춤 멈추게 할 것인가
어둠 더 짙어오고 들풀마저 외면하는 곳,
깃발 속 핏빛을 찢어 눈 못 뜨게 할 것인가
등불 밝혀 둘러봐도 모두 잠든 한밤중에
먹구름에 감추어진 새날을 안고 오리
나 이제 달려올 시간, 별이지는 그곳으로
안개로 자욱했던, 겨울새벽 옥중편지
모토에 돌아가면 종소리나 될 것이니
그 절로 산천이 울리고 살얼음도 깨치게
거기 너희들아, 섬은 섬으로 남아
더 이상 검붉은 눈 숨기지 말지어다
그날이 다시 돌아와 더운 흙을 움켜쥐리
ㅡ『현대시조 대표작』 알토란 북스, 2018년. P406
19. 남사당별곡男寺黨別曲 / 지성찬
여름날 황혼 빛을 끌고 오던 짚세기여
돌부리에 채이는 얼얼한 그 징소리
성황당 어깨 너머로 쩔뚝이며 오더니.
이 저녁 어느 골에 그 깃발을 올릴거나
봇도랑 물 흐르듯이 울컥 울컥 목이 메는
어머니 그 한 세월이 눈물처럼 무너질 때.
몇 번을 더 돌아야 그 매듭이 풀릴거나
몇 번을 두드려야 그 응어리 삭일거나
징 소리 청산을 때리면 산새들만 아팠다.
자주빛 실타래가 바람으로 풀려가는
남사당男寺黨 한 마당이 황톳재를 울고 넘던
동짓달 꺾인 달빛이 몸져 누워 있구나.
ㅡ『현대시조 대표작』 알트록 북스, 2018년. P.527
20. 백두산에 올라 / 황봉학
내 조국 내 겨레가 이렇게 따뜻한 것은
비바람 막아 주는 네가 있기 때문이구나
하얗게 우뚝 솟아오른 네 모습이 늠름하다
내 산야 내 동포가 이렇게 풍요로운 것은
푸른 물 곱게 모아 젖줄을 만들어서
꿋꿋한 우리의 땅에 피를 돌게 함이구나
우리의 마음들이 티 없이 맑은 것은
네 허리 감돌아서 정갈해진 바람들이
하루도 변하지 않고 불어주기 때문이다
나, 오늘 여기 올라 고백할게 하나 있다
네 사랑은 변함없이 수천 년을 이었는데
철부지 우리 민족은 두 갈래로 갈렸단다
오가지 아니하는 원수처럼 갈라서서
네 얼굴 보는 것도 남의 땅을 빌려 오고
그나마 아름다운 너를 절반밖에 못 본단다
이렇게 널 찾아온 내 모습이 부끄럽다
다음에 찾아올 땐 우리 민족 철들어서
웃으며 평양(平壤) 땅 거쳐 당당하게 찾아오마
나, 오늘 널 만나고 이렇게 돌아가면
어느 때 다시 올지 그 날이 기약 없다
살아서 다시 못 만나면 죽어서도 널 찾으마
석양이 붉게 울며 이별을 재촉한다
장군봉(將軍峰) 맴을 도는 까막까치 함께 울고
아득히 푸른 천지(天地)가 내 눈물처럼 시리다
ㅡ《 백두산 문학》 2022년 제39호. 101~102쪽.
21. 한 수 위 / 이두의
혓바닥 서리 칼이 수시로 날름대며
제 속살 비틀어서 쏟아내는 말과 말들
그 곁을
지나던 바람
듣기에도 민망한
겉과 속이 너무 다른 고단수 뒷담화가
줄기를 길게 뻗어 내 귓전에 딱 걸렸다
빠르게
그 속을 읽은
바람이 한 수 위다
새빨간 네 도리질 눈 감아 속아줄까
겹치는 울음 사이 숨어드는 푸른 서슬
호박씨
까지 말아라
덩굴째 걷어질라
ㅡ 우리 시대 현대시조 선집 『그네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