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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 : 46.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47.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48. 온전하라
마 5 : 46.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롬 5: 10).
그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의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1]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공관복음에 나오는 세리들은 로마 정부의 직접 임명을 받은 조세 징수 청부 계약의 주계약자가 아니다(라틴어 Publicani). 그들은 통상적으로 외국인이다.
세리는 그 밑에서 일하며 한 지방을 맡아서 징수하는 본토인이다(라틴어 Portitores). 이들은 멸시받는 존재로 조세 청부 제도가 부정부패를 낳게 할 뿐 아니라 엄격한 유대인의 눈에는 세리들이 그들을 지배하는 외세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매국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이었다.
세리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럽혀져서 부정하게 되었을 우려가 있었다. 본문의 상황은 조세 징수의 계약자가 이방인 상급자들과 거래를 해야 하는 상위 계급의 세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세리들은 창녀와 다른 죄인들과 함께 취급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런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 즉 모친이나 동료들은 사랑한다(D. A. Carson). 그것은 너무도 인간적이요 본능적인 사랑이다.
2] 무슨 상이 있으리요?
하나님께서 개인의 삶을 세밀히 평가하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 고후 5: 10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신령한 일에는 세상의 보상보다 공정하고 영화로운 상급이 주어진다(1-12절).
마 5 : 47.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친한 사람과만 인사하고 대화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
우리가 교회에 나온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
도적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친하며 서로 위하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보다 나아야 한다.
1]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 이같이 아니하느냐?
적절한 인사를 하는 것은 예의와 존경의 표시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형제들', 즉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제자들끼리만 인사를 한다면 '이방인'(*, 에드니코이)과 다를 바가 없다.
'에드니코이'는 선민 이스라엘에 반하는 이방 민족들을 가리킨다. 대부분 이방인이 이교도이므로, 이 말은 결국 인종적 의미 이상의 영적인 조롱의 뜻을 갖게 되었다.
"사람이 친구를 사랑할 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친구 사랑은 일종의 확장된 이기심이다"(Broadus).
예수는 이기적 사랑과 예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타락한 옛 인간의 삶은, 손해는 복수하고 유익은 돌려주는 소박한 정의에 입각한 삶이다. 그러나 구속받은 새 사람의 삶은 복수를 거부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삶이다"(Scott).
친한 사람들과 인사하고 말하는 것은 세상 사람이나 악인들도 할 수 있다. 헤롯과 빌라도도 예수님 죽이는 일에서는 서로 친해졌다. 도적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친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교회를 나온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악인들보다 나은 것이 없는 자들이다. 주께서는 성도 상호 간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 친절과 선을 베풀라고 가르치신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시간에 못 박은 자들을 향하여 이 태도를 보이셨다.
* 눅 23: 34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행 7: 60에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돌로 치는 무리들 앞에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우리도 주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행할 수 있다.
2] 원수를 사랑하라. ( 마 5: 43-47 )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보편적인 박애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다. 또한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들을 공정하게 존경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분의 진정한 의도는 하나님의 법의 완성을 주장한다. 즉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폐기하려는 것이다. 그분은 서로 미워하는 것을 금하셨으며, 그럴 아무런 권리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1) 사랑은 자비이다.
사랑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자기 만족적인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자비한 사랑이다. 자기 만족적인 사랑이란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에게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있고, 싫은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끌리지마는 어떤 사람은 배척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우리는 어떤 사람보다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더 끌리는 사람이 있고 덜 끌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와는 달리 자비의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은 사람에게 항상 호의의 친절을 베푸는 것이며, 대상이나 때를 가리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악 세상에 베푸신 사랑이다. 그분은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선물을 내리신다. 그분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의 독생자를 주셨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의 본질은 저주하면 축복해 주고 미워하면 선대하고, 핍박하면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다.
(2) 사랑만이 증오감을 이겨낸다.
사랑은 능력을 되살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압에는 그런 힘이 없다. 미움은 결코 미움을 가라앉힐 수 없다.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은 강압과 미움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사랑의 부드러운 설득력은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다. 참되고 영원한 승리는 원수로 하여금 그의 증오를 내려놓게 하고 그와 친구가 되어준다. 사랑에 의해서 그의 증오는 사라지며, 부드러운 방법에 의해서 그의 마음을 녹게 한다.
(3)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늘의 능력이 필요하다. 사랑은 하나님의 은사다. 인간의 빈약한 선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 인간의 인내는 얼마 안 가서 바닥이 드러나게 된다. 원수가 성내는 것을 참아 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죄악 세상에 대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요청하셨다.
예수님은 그분이 친히 인내의 사랑과 용서의 본을 보이셨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부탁하셨다. 그분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른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계는 생수를 갈망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미움과 공포로 가득 차 있으며, 모두가 사랑으로 인해 새로와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항상 끊임없이 사랑의 영을 깊이 마셔야 한다. 사랑은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듯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그리하여 증오로 불타는 마음이 식어져야 하며, 선지자가 말했듯이 사막이 변하여 물이 되어야 하듯 이 세상도 기쁨과 환희에 넘쳐나야 한다.
(4) 남보다 더 하는 것
본문 47절에 있는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귀절은 대단히 강하고 날카로운 질문이다. 복음은 본질상 단순히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하는 것'이다. 우리가 단순히 하기만 한다면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남보다 더 잘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지키기에 힘든 명령이다. 여기에 도달한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일보다 더 고귀한 일이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도 원수 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한다.
마 5: 48. 온전하라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이 말씀은 하나님처럼 완전자가 되라는 뜻은 아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자이시고, 피조물인 우리는 유한하고 시작이 있고 불완전한 존재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는 혼동될 수 없고 없앨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피조물인 사람은 아무리 영적으로 성장해도 신이 될 수 없다.
본문의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은 도덕적 완전을 의미한다. 그것은 친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친하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도 선을 베푸는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창 1: 26-27)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선하고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1]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일부 학자들(Allen, Hendriksen)은 이 절을 마지막 대립 명제(43-47절)의 결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온전'이란 '사랑의 온전'이다. 그러나 '온전함'에는 훨씬 더 넓은 의미가 들어 있으며, 48절은 본장 전체 대립 명제에 대한 결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온전'(*, 텔레이오스)은 구약성경의 '탐밈'(*, 온전한)이라는 말을 반영하고 있다. '탐밈'은 희생 동물이 흠이 없는, 즉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말하기도 한다.
* 출 12: 5 -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여호와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 곧 의로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 창 9: 6 -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 신 18: 13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 삼하 22: 26 -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이와 연결되는 헬라어 단어는 '성숙한' 또는 '다 성장한'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 고전 14: 20 -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 엡 4: 13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히 5: 14 -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 히 6: 1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율법이 지향하는 것도 하나님의 온전하심 그 자체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진정으로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신 분(17절)을 따르는 제자라면 본받아야할 것이 온전함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야와 신자들에 관계되는 맥락 안에서만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의 제자들의 아버지이신 것이다(H. F. D. Sparks). 따라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선민으로서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그들의 독특한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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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 11: 44-45 –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레 19: 2 –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레 20: 7, 26 – 7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메시야 공동체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진정한 곳으로서 이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France).
* 벧전 1: 16 –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라는 말은 존재적 온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에 이를 수 없으므로 존재적으론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참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리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무한자, 완전자시요 우리는 유한자, 불완전자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는 혼동될 수 없는 질적 차이가 있다.
피조물은 아무리 영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해져도 신이 될 수 없다. 여기에 '온전하심'이라는 말은 가까이는 친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원수들에게까지 선을 베푸는 온전을 의미하며 조금 더 확장시켜 이해한다면 도덕적 온전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속성을 본받아야 한다. 특히 그 속성은 그의 도덕적 속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과 같은 온전함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자. 교우들에게는 물론이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러하자.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 그러하자. 이것이 주께서 강조하여 가르치신 내용이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의 의미이다. 이 일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본받자.
2] 온전한 신앙생활
모든 행위에는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가 있다. 그러므로 목표가 없는 행위는 무의미하며 무가치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성도의 신앙생활에도 목표가 있다.
(1) 너희도 온전하라.
① 성도가 온전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성도의 신앙생활의 표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온전한 생활을 강조하셨다. 모든 계명을 지키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셨다.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고 자부하는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마 19: 21)고 하셨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고로 근심을 하면서 돌아갔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온전한 생활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러한 신앙생활의 최고의 표준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온전한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명령이며, 중요하기 때문이다. 구약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 1)고 요구하셨다. 그러므로 온전한 생활은 성도의 의무이며 책임이라 할 수 있다.
② 우리는 온전함에 대한 의미를 바로 알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우리들도 온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온전함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거룩하심에 비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온전해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우리를 상대적인 의미로써 온전해진다는 말씀이다. 즉 우리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처럼 온전해질 수는 없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온전함은 소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도대로 온전해야 한다. 이것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의 참된 의미라 하겠다.
(2) 온전한 신앙생활이란?
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신앙이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롬 3: 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이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신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은 죄인일지라도 예수를 믿어 그의 보혈로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음을 받게 된다면 그는 의롭다고 함을 얻을 수가 있다. 의롭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모든 죄를 낱낱이 회개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온전한 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칭의의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이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성도의 신앙생활의 최고 표준이 되는 성결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②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이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이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을 사랑하기보다는 남이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기대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이 세상에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오셨다. 그는 세상의 일반적인 사랑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이기적인 사랑을 이타적으로, 받기만을 고집하던 사랑을 주는 사랑으로, 조건적인 사랑을 무조건적인 희생의 사랑으로 우리에 가르치고 직접 행하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는 희생의 사랑이다. 그가 베풀어주신 사랑은 온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케 하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성도는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 34)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시고 우리가 지켜 주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자.
(3) 성도의 본분을 다하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책임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전 인류는 마땅히 죄책의 대가를 받아야 했다. 우리는 자기가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권리는 지나치리만큼 철저하게 행사하지만, 그에 따른 의무나 책임은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적절한 사명과 직분을 주셨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일군'이라 하였으며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가르쳤으며 성도의 본분을 다할 것을 촉구하셨다. (고전 4: 2)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에게 맡겨진 직분에 충성함으로 맡은 바 본분을 다하는 온전한 성도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3] 네 이웃을 사랑하라 ( 마 5: 43-48 )
중국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잠시 영국에 귀국하여 선교에 함께 할 동역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지원자들이 사명감이 있는지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하십니까?" 여러 답변들이 있었다. 중국인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 되려고 등등의 대답이 있었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테일러는 이들의 객관에 머문 대답에 미흡한 표정이었다. 그때 지원자 가운데 한 사람이 테일러에게 되물었다. "그러면 선교사님은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셨습니까?"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예, 저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객관과 아울러 주관 즉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이다.
그런데 사랑해야 할 때 사랑의 대상, 사랑의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저런 사람도 사랑해야 하는가? 저 사람은 예외야, 그런데 많은 사람이 성경을 알면서도 사랑할 수 없다고 여겨지면 자기 생각을 적당히 타서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가령 “하나님은 모르실거야?” 하면서 딴짓을 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그러했다. 성경을 자기 편리할 때로 변조시켜서 해석하고 가르쳤다.
(1) 그럼 이웃 사랑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할까?
구약 레 19: 18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분명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다. 신약에서도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말씀은 여러 번 인용되었다. 레 19: 18의 이웃 사랑의 말씀에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① 사랑의 대상에 제한이 없다.
이웃은 물론 우리를 미워하고 해한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다. 레 19: 18 뿐만 아니라 출 23: 4-5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사사로이 원수를 갚을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고, 동포를 원망할 권리도 주어져 있지 않다. 누구든지 사랑할 책임만 주어졌다.
② 사랑은 구체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사랑은 단순한 사상이나 감정이나 느낌이나 구호가 아니다. 사랑은 말과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래서 레 19: 18에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몸을 돌보듯이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 몸이 주리고 목말라 할 때는 먹이고 마시우고, 우리 몸이 추울 때 옷을 입히고, 우리 몸이 피곤할 때 재우고 쉬듯, 이웃에 대한 사랑도 구체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잠 25: 21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사랑이란 이웃이 필요한 것을 주는 실천이다. 이런 실천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구체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2)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을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웃 사랑의 원리를 모두 무시해 버렸다. 자기들이 편리한대로 왜곡했다. 어떻게 가르쳤나? 43절에 보면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다.
① 그들은 사랑의 대상을 제한시켰다.
그들은 원수는 미워하고 이웃만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그들에게는 이방인 로마인 혼혈의 사마리아인 세리 창기 등 미워해야 할 대상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성경을 자기 편리에 맞게 해석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움이 자리 잡고 심히 강퍅해졌다.
② 그들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를 않았다.
그들은 말로만 사랑했다. 분명히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빼버리고 그저 단순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만 가르쳤다.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은 그렇게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지 못하고 다 피해서 지나갔다.
③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말씀하셨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자녀는 아버지를 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46-47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본문에 이웃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 세 가지가 나온다. 기도, 선행, 문안, 이 세 가지다. 사랑에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기도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젼 목사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Prayer is the forerunner of mercy(기도는 긍휼의 선봉이다)." 이처럼 이웃 사랑의 첫걸음은 기도부터 시작한다. 기도하다 보면 성령께서 어떻게 할 것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신다.
선행할 뿐 아니라 문안하라. 이웃에게 반가운 얼굴로 내가 먼저 인사하라는 말씀이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서 화해의 악수를 청하고 밝은 얼굴로 인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나를 미워한다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못 본 척하면 하나님 자녀의 모습이 아니다. 이웃 사랑은 기도와 선행과 문안으로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한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주님은 원수보다 더 악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용서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주셨다.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들도 사랑합시다. 유대인들처럼 자기 욕심이나 자기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성경을 적당히 자기 욕망에 맞게 해석에서 피해가려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리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예수 믿고 하나님 잘 경외하여 성령 충만 받아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기도하며 선행하며 문안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자.
주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보복하려 하지 않으셨다.
공의의 보복 자체는 악이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악한 자에게도 선을 베푼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긍휼과 선을 베풀 때 악인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선하게 대해야 한다.
둘째, 우리의 대적자를 사랑하자.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고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 34).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돌로 치는 무리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 60)라고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우리도 주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대면하는 모두에게 친절하자.
우리는 악인들에 대해서는 두고라도 우선 교우들 중에 낯선 자들에게 친절히 인사하고 따뜻하게 대하고 좁은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그 교회에 처음 나온 자들에게 온화한 태도로 대함으로 그들이 편안함을 느끼게 해야 한다.
우리는 아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끼리만 인사하지 말고 교회에 처음 나왔거나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에게도 인사하며 친절히 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원수에게까지도 친절해야 한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온전함같이 온전하라고 말씀하신 뜻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선하고 너그럽고 친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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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상급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설교 감사합니다.
성령 충만 은혜충만한 주일 되세요.
주님의 상급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주님의 상급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