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목 표지석
심도직물 생산품이 국내외로 인기를 얻으면서 강화의 경제는 활기가 띄었지만 반면 어두운 면도 생겨났다. 노동력이 부족해진 회사는 어린 소녀들과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요구했으며 이에 천주교 강화성당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일어났고, 노동자와 직물회사 간에 ‘심도직물 사건(1965~1968년)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한국 천주교가 노동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첫 사건으로 가톨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표지석은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성당에 위치하고 있다.
조양방직
강화도는 일제 시대부터 직물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해 1970년대까지 방직산업이 번성했던 곳이다. 1916년 강화직물조합이 설치됐고, 수공업 형태였던 강화의 직물산업은 강화도에서 최초로 신식 기계를 도입한 조양방직이 들어서며 근대적 기틀을 갖추기 시작한다.
조양방직은 1933년 일제강점기에 강화도 대지주였던 홍재묵·재용 형제가 12만5천원의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방직공장이다. 초기에는 면방직과 마방직을 했고, 나중에는 주로 여름용 옷감으로 많이 쓰이는 마직물을 염색하는 데 치중했다.
조양방직은 1937년 700여 평의 2층 건물과 50 여대의 직조기를 갖추고 인견과 마직물 염색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설립 이후 착공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공장 가동 후 1년여가 되는 1939년에 큰 화재가 나서 소실되고 말았고 피해액은 40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조양방직은 원래 강화 섬유산업을 이끌던 방직공장이다.
설립 초기에 사장은 형인 홍세묵이 맡고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동생 홍재용이 부사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하지만 1942년 미쓰비시 산업에서 일하던 이세현에게 공장을 매각하였으며, 이세현은 아들 이현일과 함께 조양방직을 운영하다가 한국전쟁을 거쳐 1958년에 폐업한다.
강화지역은 서울과 인접한 섬으로 예로부터 농업과 수산업이 발달하여 제조업은 그다지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화문석과 더불어 강화비단이 강화 특산물로 이름을 높일 만큼 직물제조업은 활발하게 성장하였다. 강화비단은 ‘인견’이나 ‘인조견’이 아닌 ‘강화인조’라는 고유명사로 전국에 팔려나갔다. 각 가정에서 전통방식으로 생산되던 인조는 1910년대에 하점면 김동식이 직기를 개량하여 생산의 증가와 강화인조의 질을 향상시켰고, 1916년에는 강화직물조합이 설치되어 직물의 품종개량에 주력하는 한편 국고보조금을 얻어 공동작업장을 설치하였다. 1931년 다시 도 평의원 황우천에 의해 강화산업조합이 확대․창설되어 조합원들에게 원료를 공급하고 직접 공장 형태로 직물을 생산하여 강화인조생산을 활성화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후 거대 자본으로 근대적 직기와 시설을 갖춘 조양방직이 생겨나 본격적인 대량 직물생산이 이루졌다. 한국전쟁 직후 생필품의 필요성이 극대화되면서 ‘강화인조’는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강화읍에 한 두 개씩 생겨난 직물공장은 어느새 40~50개 정도로 늘어났다. 이 시기 직물공장은 강화경제를 움직이는 대표적인 산업이었다. 조양방직 설립자 중 한 사람인 홍재용이 제2대 강화군수가 되고 심도직물의 사장 김재소가 제7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것도 직물산업의 영향력을 추정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그러나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직물 뿐 아니라 전체 섬유산업이 점차 대구의 대규모산업단지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장시간노동과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섬유산업과 강인한 생활력을 자랑하는 ‘섬’여성, 특히 손재주가 남달랐던 강화 여성들은 그렇게 필연적으로 직물생산의 노동자가 되어 가정 및 강화의 경제를 움직였다.
해방 이전의 근대공업 도입기에 직물공업이 여타 산업보다 비교적 빨리 근대적인 공업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요인은 풍부한 원료공급, 용수, 동력 등의 유리한 공업용지, 중국․만주 등 대량 수요지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등을 들 수가 있으며, 당시 일본의 공업정책과 식민지 정책이 일본의 면방직 및 견방직 부문의 산업자본을 한국에 투자하도록 유도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어서 해방이후 섬유산업은 미국의 지원자본에 의해 수입대체 및 자급체제의 기반을 구축한 시기라 할 수 있고, 1950년대에는 면방직공업 등 일부에서 이미 공급과잉의 상태에 직면하여 노후시설의 교체, 섬유제품의 질적 개선 등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1980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섬유공업 근대화 촉진법’에 따라 섬유산업 구조의 고도화, 제품고급화와 다양화, 기술도입과 개발촉진, 정보기능의 강화, 수출시장의 강화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해방 전의 강화도의 직물공업은 다른 여타 지방과 마찬가지로 주로 가내수공업에 의한 것이었다. 거의 모든 가구에서 수직기를 갖추고 주로 면직물을 생산하여 5일에 한 번 서는 장날에 판매하였다. 일제 말기에 조양견직회사, 십자당직물, 강화산업조합 등 근대적 직물공장이 세워짐에 따라 인견직 생산이 주를 이루었다. 해방 직후에는 심도직물이 가세하여 생산량이 늘어났으나 수요에 미치지 못하였다.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강화직물공업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생필품에 대한 수요의 급증으로 직물공장은 호황을 누렸고, 전국적으로 강화인조에 대한 명성이 높아졌다. 직물공업의 활성화에 힘입어 이 시기에는 특히 인견직을 생산하는 공장수가 30개 정도로 급격히 늘어났고, 대표적으로는 남화직물, 상호직물, 평화직물, 심도직물 등이 있다.
1960년대 이 시기에 강화직물공업은 절정을 이루었다. 근대적 직기를 갖춘 군소공장의 수가 1950년대 비해 두 배에 달했고 업체들의 급성장은 1960년대 중반이 되자 포화상태에 이르렀으며 1960년대 말에는 생산량이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업체가 과잉경쟁과 경제개발5개년 계획 수립 후 수출주도 정책에 따라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일대 등 타 지방으로 직물공업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 시기 주된 생산품인 면직, 인견은 주로 옷감, 이불감으로 사용되었고, 대표적인 직물공장은 동광직물, 무림직물, 상호직물, 심도직물 등이 있다.
1970년 강화대교의 개통으로 생산품 수송이 용이해졌으나 1973년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강화직물공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경제적 압박감, 특히 임금상승으로 인한 어려움과, 좁은 내수 시장에서의 과다경쟁에 따른 후유증으로 1973년과 1974년에 걸쳐 많은 공장이 폐업하였고, 남은 공장들도 인견직 생산에서 화학섬유 생산체제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 시기 주된 생산품은 커텐지, 카바지 등이며 동광직물, 경도직물 등이 있다. 한편 강화읍에 대형직물공장 형태로 생산했던 견직물은 쇠퇴하였으나 소창 등 면직물은 강화읍 뿐 아니라 송해면, 하점면, 양사면 등 여러 지역에 걸쳐 오히려 번성하였다.
1980년대까지 ‘강화인조’의 명맥을 이어온 공장은 심도직물, 동진직물, 남화직물, (주)두올 등 4개의 법인과 소규모의 개인 기업 등이 있었고, 강화를 대표하는 굴지의 직물공장이었던 ‘심도직물’이 2003년 폐업하면서 현재 이렇다 할 인견직 직물공장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면직물의 경우 강화 전 지역에 걸쳐 직조기 수가 5~10대인 소규모의 공장에서 소창을 생산하고 있고, 2018년에는 강화읍에 ‘소창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직공장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세워진 조선방직이다. 2년 뒤인 1919년에 조선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것이 경성방직이다. 또한 조양방직이 생기면서 강화도에 전기와 전화 시설도 들어왔다. 이후 평화직물, 심도직물, 이화직물 공장들이 잇달아 들어섰다. 직물공업 활성화로 1950년대 들어서면서 직물공장 수는 급격하게 늘어나 30여개에 이르렀고 6.25 이후 생활필수품 수요가 폭증하면서 직물수요도 급증했고 강화도는 당시 섬유산업의 메카라고 하던 대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번성해 197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생산지로 자리매김 했다. 당시 강화도의 구도심 거리는 하루 두 번 직물공장 교대시간에 맞춰 공장으로 출퇴근하는 여성 근로자들로 거리가 넘쳤다.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 형편에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여성들이 강화 방직공장에서 2교대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와 남자 형제의 학비 등을 책임졌다. 그때 그 어린 여성 근로자들이 섬유에서 실을 뽑고 천을 짜내는 방직에서 염색까지 다 맡아 일하면서 우리 수출의 선도역인 섬유산업의 기틀을 다졌다. 강화도에는 크고 작은 직물공장이 60여 곳 있었고 방직산업 종사자만 4천이 넘었다. 천주교 ‘노동운동’ 첫 사건, 심도직물 노사분규 강화도는 직물산업의 메카가 되면서 한편으로 노사분규가 잦아지면서 가톨릭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국회의원 김재소가 운영하는 심도직물이 4일 섬유노조 심도직물 분회장을 근무 태만으로 해임하자 노조원 350명이 구성당 구내에 모여 해임 경위를 듣고 있었다. 경찰관 20여명이 이들을 불법 집회로 몰아 주모자 4명을 연행해갔는데 회사 측에서 제시한 4명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그리하여 주모자 배후에 전(田) 신부(JOC 강화본당 지도)가 있다는 구실을 잡아 주일미사를 드리고 있는 전 신부에게 김재소 의원, 경찰서장, 정보계장, 기자 2명이 몰려갔다. 그날 오후 4시 심도직물은 ‘천주교 전미카엘 신부의 부당한 간섭으로 공장운영 관리가 마비되었으므로 무기 휴업함’이라는 쪽지를 굳게 닫힌 정문에 붙여놓았다. 강화도에서 가장 잘나가던 방직업체였던 심도직물은 1,200여 종업원 중 4분의 3이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다. 심도직물에서 일하던 소녀들은 노동 관련 기본권은커녕 인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기침을 하면서 일해야 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강화성당의 전 미카엘 신부가 1965년 11월 심도직물 여성 종업원들을 모아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만들었고, 1967년 5월 14일에는 300명이 참여하는 심도직물노조가 결성됐다. 회사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노조 활동을 방해했고, 1968년 1월 노동자 16명을 해고했다. 해고자는 모두 천주교 신자였고 김 사장과 직물협의회 임원들은 전 신부를 찾아가 노조활동에 간섭한다고 항의하며 함께 반공법으로 구속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강화도 내 21개 직물회사들은 전 신부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중앙일간지에 발표했다. 당시 JOC 총재이던 김수환 신부는 주교단 명의로 ‘교회는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심도직물 사주 김재소 공화당 의원은 이에 맞서겠다고 공언하고, 신민당 김은하 의원은 ‘진실규명을 위해 자료 수집에 착수하겠다’는 등 정치권의 문제로 비화했다. 천주교 측은 심도직물 사건을 천주교 박해 행위로 규정하며 공개 사과를 요구했고, 강화직물협의회는 1월 22일 해명서를 제출하며 JOC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철회하고 해고 노동자 대부분을 복직시켰다. 김 신부는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에 개입해 주교단 공동교서를 발표한 것은 한국 교회의 첫 ‘사회적 발언’으로 기록돼 있다. 강화도 직물산업은 1970년 중반에 사양길로 접어든다. 1960년대 후반부터 좁은 내수시장에서 과다경쟁 조짐을 보이던 상황에서 1973년 석유파동 이후 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쇠퇴기에 이르게 된다.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화학섬유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직물이 대량생산되면서 강화도 직물공장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가내수공업만 일부 명맥을 잇고 있다. 강화도 최초의 근대식 방직공장 조양방직은 강화도 직물산업이 쇠락하기 훨씬 전 문을 닫았다. 조양방직은 다른 직물업체보다 단명했는데, 복잡한 자본구조도 문제였지만 사업 초기 발생한 화재가 치명타였다. 설립 10여년 뒤 경영이 어려워져 다른 사람에게 경영권이 넘어가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 오다 1958년 문을 닫았다. 1990년대에 문을 닫고 오래도록 방치된 건물은 1년 남짓 보수공사를 거쳐 조양방직 카페로 다시 태어났다.
문을 닫고 버려진 직물공장은 이제 카페로 변신해 강화의 핫플(핫플레이스)이 됐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설립된 직물공장인 조양방직. 강화읍 신문리에 있는 이 공장은 지난 20~30년 정도 폐공장으로 방치되다가 미술관 카페로 변신했다. 낡은 공장에 미술품, 고가구, 골동품 등으로 꾸며 ‘신문리 미술관’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강화의 관광명소이자 이색카페로 유명하다. 엠제트(MZ)세대의 ‘뉴트로(새로움과 복고를 합친 신조어) 성지’로도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