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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츠미신사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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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도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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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쪽 도리이)
일본 황실의 족보를 보면, 고사기(古事記)의 신화에서 보았듯이 많은 신들을 조상신으로 해서 황실의 계보가 이어져 내려왔는데, 이것이 소위 건국신화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결국엔 신화적 영역에서 현세적 영역으로 변신하면서 맥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까미무스비(高皇産靈)’의 외증손으로 지상에 강림한 ‘니니기(彌微藝)’의 아들 ‘히고호호데미(彦火火出見)’가 잃어버린 형의 낚시 바늘을 찾아 헤매다가 용궁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용왕의 딸 ‘도요다마히메(豊玉姬)’와 결혼하여 3년을 보낸 후 낚시 바늘을 찾아가지고 나왔는데, 그 때는 아내가 아기를 배어 만삭이 되었으므로 같이 뭍으로 나오지를 못하였다. 며칠 뒤 풍랑이 심한 어느 날 풍랑을 타고 여동생 ‘다마요리히메(玉依姬)’를 데리고 남편을 찾아 뭍으로 나왔다. 해변에 손수 산옥을 짓고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남편에게 당부를 하였으나 이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결국 큰 뱀이 괴로워 나뒹구는 꼴을 엿보임 당했다고 화가 난 ‘도요다마히메’는 낳은 아이를 해변에 그대로 버려 둔 채 ‘우나사까(海坂, 용궁으로 드나드는 문으로 이곳을 헤집으면 나타나고, 이곳을 메우면 사라진다는 곳)를 다시 메워서 용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고사기에 써 있다. 이 때 낳아서 버린 아이가 별명을 ’이소라(磯良)‘라고 하는 ‘우가야후기아에즈(鵜茅葺不合)’신이고, 그 신이 다시 용궁의 차녀, 즉 이모인 ‘다마요리히메’신과 결혼하여 처음으로 인격화 된 천황 ‘진무덴노(神武天皇)’을 낳으니, 이 사람이 바로 사람으로서의 초대 천황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지금의 황실계보는 천신의 부계와 해신의 모계로 된 혈통이라는 것으로 이것이 해양국가 일본의 국가상이다. 이 국가상의 발원지가 본토가 아닌 대마도 ‘니이’지역의 해변 ‘와다즈미(和宮)’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니이’지역이야말로 세형동검, 말방울, 팔찌 등의 청동기와 철기 그리고 경질토기까지 다른 곳에서는 그 예가 없을 만큼 많은 우리 조상들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와다즈미’의 ‘와다’는 우리말의 바다에서 비롯된 말이다. 대마도에서는 지금도 바다의 후미진 곳을 ‘와다(わざ)’라 부르고, 일본의 옛말에서도 바다를 ‘와다(わざ)’라고 했다. ‘쓰미(つみ)’의 ‘つ ’는 조사이고, ‘み’는 신성한 뱀을 뜻한다고 ‘나가도메’선생이 말하고 있다. 이에 따른다면 ‘와다쓰미’란 다름 아닌 바다의 용궁이란 뜻이다.
<인재환의 『대마도 우리역사 답사기』에서 발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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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다마히메(豊玉姬) 무덤 입구 : 오른쪽 기둥에 平成7년건립이라는 글로 보아 1995년에 건립한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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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다마히메(豊玉姬)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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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다마히메(豊玉姬) 무덤)
"도요다마히메지분모(豊玉姬之墳墓)"라 새겨 놓은 지름이 40Cm는 족히 될 둥글넓적한 돌비석을, 약 30Cm 높이가 될 만하고 펑퍼짐한 네모꼴이 세로나 가로의 길이가 1.5m 쯤 되는 돌무지 위에, 아주 단정히 올려놓았다. 큰 금줄을 친 고목과 바로 그 옆에 대략 우리 키만한 검고 둥근 큰 바위가 배경처럼 뒤에 서 있다.
아이만 낳고 용궁으로 돌아갔다던 ‘도요다마히메’의 무덤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좀 더 살펴보면, 우선 ‘도요다마히메’의 분묘라고 새겨 놓은 비석이 다른 것들과 비교하여 너무도 이질감이 든다. 특히 반석처럼 깔고 앉은 돌무지와 그것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검은 바위나 고목들의 고색창연한 풍모에 비하여 너무도 새것스럽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근래에 ‘도리이’와 함께 첨가 설치해 놓은 것 같아 보인다(위 사진의 도리이 건립이 평성7년으로 쓰여있다). 그 형태로 보아 ‘이와구라(盤座, 신령이 머물고 있는 곳)’로서, 신사가 이곳에 있기 이전에는 이 ‘이와구라’가 제를 지내는 제장(祭場)이였을 것이다. 따라서 돌무지가 바로 ‘이와구라’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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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츠미신사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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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라에베스"라고 불리는 전면에 비늘 같은 구열(龜裂))
폭이 넓은 연못 가운데에, 위에서 보면 세모꼴이 되게 ‘도리이’ 세 개가 서로 모서리를 맞물고 서 있고, ‘이소라에비스(磯良惠比須)’라고 써 놓은 안내문이 옆에 있다. 이곳이 바로 ‘이소라에비스’가 놓여 있는 곳이다. ‘이소라’는 용궁의 장녀 ‘도요다마히메’의 아들 ‘우가야후기아에즈’의 별명이다. 기록에 보면 이 신사에는 ‘이소라에베스’라고 불리는 전면에 비늘 같은 구열(龜裂)이 있는 바위가 있다는데, 예로부터 금줄을 쳐서 신성하게 모셔왔다고 했다.
에보시타케 전망대
상대마 일대 관광의 일미. 아소 만을 360도로 둘러볼 수 있는 유일한 전망대이며 깎아지른 듯한 산과 푸른 바다가 절묘하게 펼쳐진 익곡의 조화는 그야말로 최고의 비경이다. 이곳에서 운이 좋으면 한국 휴대폰이 터지기도 하는데 차에서 내려 60M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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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시타케 등산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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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시타케 전망대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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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시타케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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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시타케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가이진신사(海神神社)
가이진신사는 중세에서 근세시대에 이즈하라의 시모쓰하치만구(下津八幡宮)신사에 대비해 가미쓰하치만구(上津八幡宮)신사로 불리었으며, 쓰시마 제일의 신사로 칭해 지기도 하였다.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신사를 관사( 官社 )라고 하는데, 1871년 5월 관사의 여러 등급 중 하나인 국폐중사( 國弊中社 )로 지정되어 변함없이 쓰시마 제일신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다의 수호신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豊玉?命)를 주신으로 모신 해신(海神)신사로, 영산 이즈야마(伊豆山)에 위치하고 있다. 큰 도리이를 지나 높은 돌계단을 오르면 쓰시마 제일의 장대한 본전을 볼 수 있다. 가을 대제는 매년 음력 8월 5일에 봉안되며, 쓰시마 전역에서 참배객들이 모인다. 신사에는 통일신라 초기,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청자 10여점이 남아 있으며, 보물관에는 중요문화재인 통일신라시대 동조여래입상(국가지정중요문화재)을 비롯하여, 동검, 거울, 토기 등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신사를 둘러싸고 있는 숲( 社叢 )은 나가사키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구실잣밤나무, 참가시나무 등의 낙엽수를 주목으로 느티나무 등 거목의 울창한 자연림 경관은 신이 거처하는 쓰시마 제일의 궁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 삼광조(참새목 까마귀과, 한국에는 흔하지 않지만 제주도, 거제도 등의 섬 지방에는 비교적 흔하다.), 노랑딱새, 산솔새 등 야생 조류도 많이 서식하고 있어 1974년「야생 조류의 숲」으로써 조류 관측을 위한 오두막과 산책로 등을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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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진신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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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진신사 보물관 전시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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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동조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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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경덕왕 때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에 석굴암조각이 완성되고 성덕대왕의 십이지신상, 굴불사지 사방불 등 명품이 줄을 이었다. 이 불상의 얼굴은 신라 불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스투파 모양을 닮은 높은 육계에 지그시 눈을 감은 듯한 표정에는 곡선미의 눈매가 시원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불상에서 우리의 마음을 끄는 부분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몸매다. 탄력적인 몸매가 몸에 짝 달라붙은 얇은 가사 속에 드러나 있다. 그야말로 젊은 청년기의 물오른 몸매에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이처럼 긴장감 넘치는 탄력성이 통일신라 절정기 조각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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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