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 백암에서
모처럼 느긋이 쉬나 했는데
백암산에 가자고 한다. 날씨도 따뜻하고 그 동안 운동도 부족하고 게다가 좋은 추억도 있고 어쩌면 그간의
피로가 도리여 움직여서 풀릴 수도 있겠지. 보슬비보다 더 적은 양의 비가 오고 있었다. 콘도에서 우산을 빌려 나섰다. 등산로 입구의 안내인이 꼭대기까지
가면 4시간 이상 걸리며 바람이 강하고 미끄러워 위험하다며 1킬로
거리에 있는 백암폭포를 추천했다.
이번이 세 번째이나 한겨울
산행은 처음이다. 길은 얼어있지도 젖어있지도 않았다. 소나무
숲 사이 길이 온통 붉은 빛이 도는 적갈색이었다. 마른 잎들이 등산로 양옆에 몰려있었다. 상록수 소나무에서 수명이 다해 떨어져나간 바늘잎들이었다. 무척이나
새로웠다. 봄날의 연분홍 벗꽃길처럼, 늦가을 노란 은행잎, 갈색 낙엽, 빨간 단풍길처럼, 한겨울의
하얀 눈길처럼 아름다웠다. 차가운 겨울공기를 녹인 듯 죽죽 뻗은 소나무 숲길은 운치를 더하여 아늑하고
고요하고 푸근했다. 금강소나무란다. 상록의 바늘잎, 곧게 뻗는 붉은 갈색의 줄기, 큰 키가 특징인 이 금강소나무는 강원도와
경상북도 산 사면과 능선에서 자라는 햇빛과 배수가 잘 되는 곳을 선호하는 우리나라 토박이나무란다. 그러고
보니 소나무가 있는 곳에선 언제나 따뜻한 햇볕과 모래 같은 토양이었다.
30미터 높이의 얼음덩어리 폭포는 주변의 잎망울이 알리는 봄소식은 들리지
않는지 나름대로 웅장한 자태를 영원할듯이 뽐내고 있었다.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아주 한적한 길을1시간 반쯤 걸으니 시장기가 돌았다. 점심은 라면으로 하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뜨거운 김을 후후 불며 후루룩 먹는 라면 광고가 떠오르며 오랜만에 맛있는 라면의 진가를
즐길 것 같았다. 그러나 흑과 적의 강렬한 색채에 현혹되어 그만 처음 보는 신 라면을 산 것이 잘못이었다. 달걀도 넣었지만, 설렁탕 맛이 평소의 칼칼한 맛을 죽여 니글거렸다. 최적의 상황에서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린 실망은 짜증이 날 정도였다.
식곤증이 오기도 전에, 이번 여행엔 방콕은 없는지 관동팔경 중 하나인 월송정(越松亭)을 가자고 했다. 오후에는 갠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자에 이르는 길 옆에 평해 황씨의 사유지가 있었다. 정이
가는 낮은 돌담이 들어오라 속삭였다. 연못 위에 다리도 있는 넓고 잘 가꾸어진 정원이 오전에 본 금강소나무로
꽉 차 있었다. 숭모문 현판이 걸려 있는 안 쪽은 훌륭한 조상을 기리는 대리석 비석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평해 황씨가 대단한 유교 양반가문인가보다.
인적이 전혀 없는 비에
젖은 솔숲을 통과 정자에 올랐다. 갖고 있던 우산도 두고 온 터라 나는 까만 비닐을 모자대용으로 썼고
그는 작은 담요로 머리와 어깨를 감쌌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깔깔대며 젊은이들을 흉내냈다. 셀카를 시도한 것이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별안간 환해졌다. 그것도 잠시, 궂은 날씨에 정자에서
들리는 파도소리는 태초의 정적처럼 고요하고 적적한 주위를 을씨년스럽게 했다. 바닷가로 내려갔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물결 뒤 물결이 무너지는 해변은 우주 속 나홀로 고독의 절대성을 깨우쳐주려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추워서 차 속으로 도망와버렸다.
이른 저녁을 먹으러 후포
어시장으로 갔다. 잠시 둘러보고 영덕게를 먹기로 했다. 먼저
나온 반찬과 게를 먹는 동안, 나는 옆 상에서 먹고 있는 어떤 회사 열 명쯤 되는 직원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술의 효과로 높아지는 음성이 누가 사장인지 누가 감초인지 누가 잘난 척하는지 누가 주부사원인지 알려주었다. 재미가 솔솔 했다. 청일점 젊은 남자직원을 대하는 여자상사의 반말은 놀랍기도 했다. 그렇고
그런 회식자리였는데 이제는 저런 회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씁쓸한 냉소를 막을 수 없었다. 게는
싱싱했지만 전념하지 않아서인지 미국에서 재경이네랑 먹었을 때가 더 맛있었다.
백암산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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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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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 황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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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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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탱님은 담요 쓰고 너는 검은 비닐봉지 쓰고 찍은 셀카 ~~~ 재미나다 ㅎㅎㅎ
파도치는 겨울바다도 참 좋네 ~
사진이좋은건가? 멋진 풍경들이..넘 유혹하는것같아 글도좋고 ...
라면? 이민초기 이곳엔 "이찌 방" 이라는 밍밍한 보드란 라면만 구할수있던시절... 요샌 "너구리 " 김치 사발면 등 들어와 입맛을 ..., 돗구는데..
사진 찍는 솜씨가 엽서 사진인줄 알았네. 글솜씨는 시인의 경지로소이다. 블랙라면 먹었을 때의 잡친 입맛을 잘도 표현했네요
소나무와 적황색의 .땅의 조화가 환상이구나. 고맙다 . 방에 앉아 너무 즐기고 있으니. 내가 간 것보다 더 실감나게 읽고 있다.
성조 표현이.., 나도 실은 방에서 한국경치 를 즐겨요
참 좋아 보인다~
우리 친구들이 묘사를 잘 해서, 나도 나도, ~~~
근사 합니다~~~~
계속 즐기 시기를~~~~
웃느라 제대로 볼수가 없네.. ㅎㅎㅎ
앞으로 우리 홈피의 코메디 부분을 책임질거 같네..ㅎㅎㅎ
저 소나무 숲은 색다르네... 나머지 절들의 모습은 다른 사팔과 비슷한거 같고...그래도 다 다르겠지?
경위야, 이곳도 금강송에 너희부부가 즐겨찾는 멋진 커피집도 있는데 안 들려줘서 쪼끔 아쉽네. 다음엔 꼭 넣어주기를...
와~ 겨울바닷 풍경이 참 좋네. 파도소리와 바람 소리~ 겨울 바닷가에 서있는거 같애.
그 밑의 게도 참 맛있겠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