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서울탐史’ Ⅱ [ 14회~26회]
14. 지금의 남대문로는 ‘센긴마에 히로바’
1902년의 서울 남대문로. 멀리 명동성당이 보이고 널찍한 길 한쪽에 전차 궤도가 놓여 있다. 가까이에 있는 길가 집들은 옛 시전 행랑(行廊)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현재의 한국은행에 인접한 곳에는 간간이 일본식 지붕도 눈에 띈다. 당시 일본인의 중심 상권은 현재의 신세계백화점에서 롯데백화점에 이르는 거리였다. <꼬레아 꼬레아니>(카를로 로제티 지음)
1892년 봄, 일본영사관은 조선 정부를 압박해 동의를 얻은 뒤 자국 거류민을 대상으로 ‘노점영업규칙’을 발표했다. 이로써 일본인에게도 남대문로 양쪽에 늘어선 가가(假家)들 사이에서 조선인과 함께 노점을 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일본인들이 소소한 잡화들을 들고 큰길가로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해는 임진년, 임진왜란 5주갑(周甲), 300년이 되는 해였다.
무력, 배일의식 극복할 유일 수단
예수 탄생 시점을 기준으로 AD(Anno Domini)와 BC(Before Christ)를 나누는 기독교 세계의 시간 운행은 누적적·직선적이지만 천자(天子)의 재위 연호(年號)와 간지(干支)를 병용하는 동양의 시간 운행은 반복적·순환적이다. 게다가 100년은 사람의 일생이 감당할 수 없는 시간대였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100년 단위가 아니라 60년 단위의 환갑(環甲) 또는 주갑(周甲)을 기념했다.
기념은 기억을 소환하는 의례다. 이 무렵에는 일본의 압력이 각 방면에서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은 모두에게 각별했다. 왕조정부는 두드러지지 않은 방식으로 여러 곳에서 임진왜란 5주갑 기념식을 치렀고, 백성들도 옛날 강산이 유린당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철천지원수인 일본인들이 서울 한구석에 들어와 몰려 사는 것만도 아니꼬운 일인데, 그들이 ‘감히’ 남대문 안 큰길까지 나와 호객(呼客)하는 꼴을 참고 보기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일본인 노점상을 함부로 때려 쫓아낼 수는 없었지만, 그들과 흥정하는 조선인은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었다.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남대문로의 일본인 노점상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해 가을, 일본 거류민단장은 ‘시끄럽고 분란하여 마음 편히 영업할 수 없었던 것’이 사태의 근인(近因)이라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다소의 원인’도 있다고 보았다. 그가 얼버무린 원인이 ‘조선인들의 뿌리 깊은 배일(排日) 의식’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조선인의 배일 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무력(武力).
일본 거류민단은 본국 정부에 특별 보호 순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거류민단 비용으로 낭인 몇 사람을 고용해 순사 업무를 맡겼다. 일본인들은 남대문로에 견고한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청국 상인과의 상전(商戰)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1893년 봄, 일본인 순사와 함께 노점상과 질옥(質屋)들이 다시 남대문로 좌우에 나타났다. 이들은 큰길가와 그에 인접한 곳의 집들을 집중적으로 사들이거나 담보로 잡았다. 이듬해 늦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남대문로에 있던 청국 상인들 대다수가 귀국하자 일본인들은 그들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허름한 가가를 헐고 일본식 새 건물을 짓는 자도 많았다.
1895년 4월16일, 한성부윤 류정수(柳正秀)는 ‘도로를 범하여 가옥을 건축하는 일’을 일절 금한다는 훈령을 내리고 일본인들에게도 이 뜻에 따라달라고 요청했다. 가가들 때문에 좁아진 대로의 원래 폭을 회복하고 수도의 면모를 일신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 금령을 이렇게 해석했다.
한국 금융 중심지의 역사적 기원
“이 금령은 경성시가 전체를 개량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당시 본방(本邦) 상인 중에는 남대문통 한인(韓人)의 가옥을 매입하여 철거한 후 그 자리에 길을 침범하여 일본식 새 가옥을 짓는 자가 자못 많았다. 본방인(本邦人)이 지은 가옥은 한인의 가가와 달리 국왕 폐하의 행행(行幸) 때도 철거할 수 없었으므로, 그 건축을 제지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조선인들보다는 도로와 부동산 가격 사이의 상관관계를 잘 알았던 일본인들이 이해득실을 따져본 뒤, 한성부의 요청을 수락하는 대신 남대문로 좌우에 있는 가가들을 신속히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일본 상인에게 손해를 끼칠 의도가 아니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던 개화파 내각이 이 명분을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정부는 가가 주인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모두 철거했다. 철거한 뒤 보니 큰길가 집들은 거의 전부 일본인 소유인 상태였다.
진고개 입구에서 구리개에 이르는 큰길 주변이 일본인 소유의 건물로 채워지자 1897년 일본영사관, 일본 거류민 총대역장(總代役場·거류민단 사무소), 일본인 상업회의소가 모두 남대문로와 진고개가 만나는 지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주변으로 이전했다.
청일전쟁 이전의 중화회관은 거류 일본인들을 위한 우편국이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북쪽으로 종로에 이르는 길가에는 일본인 회사들의 지점과 일본인 상점, 질옥들이 늘어섰다. 후일 남대문로가 한국 금융의 중심지가 되는 공간적 전제가 마련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07년 11월,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이 일본영사관 맞은쪽에 새 사옥을 짓기 시작했다. 일본 민간 은행의 영향력이 확대되면 식민지 경제 정책을 집행하는 데 차질이 생길지 모른다고 판단한 일제는, 따로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공사 중인 건물을 인수해 1912년 조선은행으로 준공했다.
그 직후 경성우편국도 새 건물을 짓기 시작해 1915년에 준공했다. 1906년 일본공사관을 한국통감부로 개편할 때, 일본영사관은 경성 이사청이 되었다가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점과 동시에 다시 경성부청이 되었다.
이제 남대문로와 진고개가 만나는 ‘광장’은 경성부청, 조선은행, 경성우편국의 3대 시설로 둘러싸인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 광장을 ‘센긴마에 히로바’(鮮銀前 廣場)라고 불렀다. 조선인들에게 서울의 중심은 종각 앞이었으나, 일본인들에게는 이곳이 중심이었다. 서울이 양극(兩極)을 가진 이원적 도시가 된 것이다.
이순신 동상이 충무로에 없는 이유
여담이지만, 1968년 발족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애초 선열들의 동상을 가급적 ‘연고지’에 세울 계획을 세웠다. 세종로에는 세종대왕, 충무로에는 충무공, 을지로에는 을지문덕 등. 당대 권력이 ‘군사주의’를 고취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지금 한국은행 앞 분수대 자리에는 충무공 동상이 서 있을 터이다.
[출처]: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서울 탐사> / 한겨레 21
15.마포가 아닌 용산이 일본인 거류지된 까닭
1900년께의 용산나루. 지금의 한강철교 동쪽으로 추정된다. 돛이 두 개인 배와 한 개인 배가 섞여 정박해 있다. 위쪽으로 서양식 건물이 보인다. 엿목판을 들고 있는 소년과 서양식 셔츠에 한복 바지를 입고 짚신을 신은 소년이 눈길을 끈다. <사진으로 본 한국백년>
1866년 8월, 프랑스 군함 두 척이 강화해협을 통해 한강 하구로 들어왔다. 수심을 측량하며 강을 거슬러 오르던 이 배들은 양화진 앞에 닻을 내린 뒤 더 전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상류 쪽으로는 큰 기선이 운항할 수 없다고 판단해 강화해협을 봉쇄하는 전술을 택했다.
프랑스 함대가 퇴각한 직후, 조선 정부는 일본 막부에 사건의 경위를 알리는 서신을 보냈다. 당시 일본은 막부를 타도하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으로 어수선했으나, 한강에 관한 정보는 허투루 넘기지 않았던 듯하다.
일본, 마포는 이미 살림집 많아 부적절 판단
1882년 7월17일, 일본은 임오군란 사후 처리의 일환으로 ‘조일수호조규속약’을 강요하며 “조약 체결 1년 후에 양화진을 개시장(開市場)으로 한다”는 조항을 집어넣었다. 그 다음달 조선 정부와 청국 사이에 체결된 ‘상민수륙무역장정’도 한성 외에 양화진을 개시장으로 정했다.
조선 정부로서는 한강변 포구 1곳을 개방해야 한다면, 프랑스 함대가 들어와도 막지 못했던 곳이자 일본에 이미 개방하기로 약속한 곳을 내주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양화진은 1883년 영국·독일과 잇따라 체결한 통상조약에서도 개시장으로 규정됐다.
그런데 양화진 공식 개시일을 6개월쯤 앞둔 1883년 2월, 조선 정부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가 개시장을 옮기자고 제안했다. 통상 확대를 위해서는 궁벽한 한촌(閑村)인 양화진보다는 경강(京江) 상업의 중심인 서울 마포가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조선 정부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동의했으나, 일본 정부는 더 나은 포구가 없는지 직접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마포가 여러 면에서 양화진보다 유리하기는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인가(人家)가 들어차 있어 일본인 거류지를 따로 설정하기 어려운 것이 결정적 약점이었다. 일본 공사관은 한강변 일대를 면밀히 조사하고 거류지를 확보하는 것이나 교통의 편리성에서 용산이 최적지라고 보고했다. 일본 외무성은 인천에 정박 중이던 해군 함정으로 하여금 양화진, 마포, 용산 일대의 수심을 여러 차례 측량하게 했다.
조선시대 한강의 중심 기능은 수로(水路)였다. 그런데 이 물길은 하나로 이어진 길이 아니었다. 상류 쪽, 남한강변 충주 가흥창에서 서울 앞까지 왕래하는 배와 바다를 항해하다가 한강 하구로 들어오는 배는 모양부터 달랐다. 강 상류 쪽을 왕래하는 배를 강상선(江上船), 강과 바다를 오가는 배를 강하선(江下船)이라 했다.
충주에서 세곡(稅穀)을 실은 강상선은 흐르는 물살에 올라탄 채 편하게 서울까지 왔다. 그러나 올 때 편했던 만큼 갈 때는 고달팠다. 뱃사람들은 물살을 거슬러 노를 젓다가 급류를 만나면 내려서 배를 끌어야 했다. 배는 되도록 가벼워야 했고, 돛은 배의 방향을 잡는 데만 필요했다.
그래서 강상선은 돛대가 하나였다. 반면 바다에서는 바람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기에 강하선은 돛을 2개씩 달았다.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 앞바다까지 온 강하선들은 만조 때를 기다려 역류하는 바닷물을 타고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10m에 달하는 서해안 조수 간만의 차가 이 배들의 운항을 도왔다. 강상선과 강하선은 바닷물이 역류하는 상한(上限)에서 서로 만났으니, 이 지점이 자연 ‘수륙 물산의 집결지’가 되었다. 그런 곳이 용산과 마포 사이였다.
용산 쪽엔 일인들이, 마포 쪽엔 청국인
물론 동력기를 장착한 기선에 바닷물의 역류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수심이었는데, 한강의 수심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컸다. 한두 차례 측량으로는 한강 수심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일본 해군은 1년 넘는 기간에 여러 차례 측량을 거듭한 뒤 용산을 개시장으로 정해도 무방하다고 판단했다. 1
884년 6월4일, 일본 공사는 이 측량 결과를 각국 외교관들에게 알린 뒤 그들과 함께 양화진에서 용산까지 강변 마을들을 답사했다. 8월18일, 미국 공사 루셔스 하우드 푸트는 각국 외교관을 대표해 개시장을 용산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뒤이어 일본 대리공사 시마무라도 공문으로 개시장 이전을 요구했다. 10월6일, 조선 정부는 그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고 용산 강안에서 마포나루까지를 각국인 공동 거류지로 지정했다.
그러나 일본인도 청국인도, 당장은 용산에 자리잡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도성 안이 훨씬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게다가 경강 객주(客主)들의 세력이 녹록지 않았다. 객주라는 말 자체가 ‘여객(旅客)의 주인(主人)’이라는 뜻이었으니, 경강으로 들어오는 상선들에는 모두 지정된 주인이 있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면 사전 정지작업(整地作業)이 필요했다. 일본 상인들이 자국인 순사들의 힘을 빌려 남대문로에 진출하자, 남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한강변 마을인 용산의 상업적 가치가 높아졌다. 1888년에는 기기국(機器局) 위원으로 중국 상해에 다녀온 조희연이 삼산회사(三山會社)라는 기선회사를 설립해 용산호(龍山號)와 삼호호(三湖號) 두 척의 기선을 인천∼용산 항로에 투입했다.
이듬해에는 독일 세창양행의 제강호(濟江號)가, 1891년에는 미국인 타운젠드의 순명호(順明號)가 각각 한강에 모습을 드러냈다. 1889년께 일본 상인들이 용산 옛 군자감 주변에 나타나 상주할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큰 기선을 위한 접안 시설도 따로 만들었다. 물론 청국인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인 거류지 서쪽, 마포에 가까운 쪽을 차지했다.
일본인들의 커져가는 욕심
청일전쟁 이후 도성 안에서 일어났던 상권 이동은 용산에서도 일어났다. 일본군 혼성여단 사령부가 효창원 일대에 설치됐고, 주변 일본인 거류지는 병참부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군이 돌아간 뒤에도 용산 거류 일본인들에게는 ‘좋은 일’이 거듭 생겼다.
1898년 대한제국 정부는 인천에 있던 전환국(典환?局) 공장을 용산으로 옮겼다. 돈을 찍어내는 데 필요한 동(銅)은 일본에서 수입했고, 제작은 일본인 기술자들에게 의존했다. 1900년에는 전차선로가 용산까지 이어졌고 한강철교도 완공돼 경인 간 기차 운행이 시작됐다.
이로써 용산은 수륙 교통이 중첩되는 요지 중의 요지가 되었다. 이어 군부 총기제조소, 궁내부 양잠소와 정미소, 피복제조소 등 대한제국의 관영 공장도 속속 건설됐다. 용산의 가치는 계속 높아졌고, 더불어 용산에 대한 일본인들의 욕심도 커졌다.
[출처]: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서울 탐사> / 한겨레 21
16.‘모토마치’가 된 지금의 신용산
‘그들’의 땅, 용산②- 20세기초 묘지 강제 이전으로 300만평 수용한 일본
여기에 거대한 병영과 철도 관련 시설 지었으나 해방 이후 미군에 넘어가
1920년대 초의 신용산. 현재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주변이다. 오른쪽 건물은 용산우체국이다. 이 길의 동쪽은 군사기지, 서쪽은 철도기지였다. 일제는 신용산을 만든 직후 남대문에서 갈월동·남영동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대대적으로 확장했는데, 이 도로의 주된 목적은 ‘유사시’ 대규모 일본군 병력을 신속히 도성 안으로 진입시키는 것이었다. 전우용 제공
1904년 2월4일, 러시아에 국교 단절과 개전(開戰)을 선언한 일본은, 그해 2월8일 새벽 인천항에 육군 선발대를 상륙시켰다. 일본군은 곧바로 서울을 점령하고 한국 군사시설과 정부기관 등을 임의로 ‘수용’해 주둔하는 한편, 대한제국 정부를 협박해 2월23일 이른바 ‘한일의정서’라는 군사협정을 체결했다.
동양 평화 확립,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 등 의례적인 미사여구로 포장된 이 군사협정의 핵심 조항은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할 것이며,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군략상(軍略上) 필요한 지점을 상황을 보아 편리한 대로 수용할 수 있다”였다.
용산·평양·의주서 모두 1천만 평 요구
러일전쟁의 주 무대는 만주였다. 일본도 러시아도, 군대의 주력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는 어느 편이 더 빨리, 더 많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전선에 보낼 수 있느냐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일본군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경부철도와 경의철도를 속성으로 완공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경부철도는 일본의 경부철도주식회사가 맡아 공사 중이었고, 경의철도는 대한제국 철도원 주관하에 공사를 막 개시한 상태였다. 군사협정 체결 이틀 전인 2월21일 육군임시철도감부를 조직한 일본군은 두 철도 부설권을 임의로 수용하고, 공사 현장 인근 농민들을 강제 동원해 완공을 서둘렀다.
3월11일에는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총사령부로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설치됐다. 사령부 건물은 처음 일본 공사관 옆에 마련됐으나 차제에 한반도를 확실히 점령하기로 작정한 일본군은 영구 주둔 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들의 눈에 띈 것이 남산의 남사면(南斜面)에서 한강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마침 한강변에는 몇 해 전부터 일본인 거류민들이 적잖이 모여 살고 있었다. 8월15일,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군사협정 제4조의 규정에 따라 한국 정부에 군용지와 철도용지 수용을 통보했다. 그들이 요구한 땅은 서울 용산에서 300만 평, 평양에서 393만 평, 의주에서 280만 평 등 모두 1천만 평에 달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산에 묻었다. 무덤과 산소(山所)가 동의어인 연유다. 그런데 서울 도성 안의 산지는 죽은 이들에게 배당되지 않았다. 도성 안에서는 벌목(伐木), 채석(採石), 투장(偸葬) 행위 일체가 금지됐다. 하늘이 왕에게 내려준 것을 사람이 함부로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구나 궁성을 굽어보는 곳에 죽은 이들의 유택(幽宅)을 짓는 것은 왕에 대한 불경이자 불충이기도 했다.
며칠 사이 분묘 이전 강요한 일본
조선 초기 도성 안에는 10만 명 정도가 모여 살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뒤에는 그 수가 2배로 늘었다. 도성 안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도성 안에서 죽는 사람도 늘어났다. 고향에 선산이 있는 양반들은 천릿길을 마다 않고 고향에 돌아가 묻혔지만, 서울 주민 중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러 대에 걸쳐 서울에서만 살아온 서리(胥吏), 직업 군인, 장사꾼, 노비들은 먼 곳에 장지를 마련할 연고도 능력도 이유도 없었다. 수많은 주검들이 광희문(일명 시구문)을 빠져나가서는 서쪽으로 돌아 남산 기슭에 묻혔다. 산은 남산이되, 서울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북망산’이었다.
서울의 북망산을 수용하겠다는 일본군의 요구 앞에 한국 정부는 그저 아연할 따름이었다. 조상의 묏자리가 후손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이 깊은 나라, 민사소송의 반 이상이 묏자리 다툼인 나라에서, 그 엄청난 수의 무덤을 다 옮기라는 것은 무리(無理)를 넘어 무도(無道)한 짓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대책을 마련하는 척하며 일본군 눈치나 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만주와 대한해협의 전선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일본군도 심하게 독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05년 5월, 대한해협 전투가 끝나자마자 바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다음달 일본 정부는 하세가와에게 군용지 수용을 신속히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하세가와는 한국 내부대신 이지용에게 7월26일자로 수용하되, 한국 정부의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특별히 20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한 평당 2전으로 계산한 셈이다. 이 터무니없는 호의를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 받아들인 이지용은 당해 지역 지방관들에게 토지 이용 현황을 조사하고 보상 가액을 산정하라고 지시했다. 한성부는 해당 구역 내에 분묘 111만7308기, 사유 전답 3118일경(日耕·소 한 마리로 하루에 갈 수 있는 면적), 가옥 1176호가 있으며, 보상액은 89만7534원으로 추산된다고 보고했다.
분묘 1기당 이장비는 50전으로 쳤는데, 당시 장정 하루 일당도 안 되는 액수였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보상금은 오히려 작은 문제였다. 며칠 내로 분묘를 옮기고 집을 비우라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사람들은 내부로 몰려가 사정을 봐달라고 호소했으나 이미 한국 정부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흥분한 군중 일부가 폭동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일본 헌병이 출동해 ‘가볍게’ 진압했다.
해방 이후 지금의 원효로로 불려
일본군은 이렇게 약탈한 광대한 땅 위에 거대한 병영과 철도 관련 시설을 지었고, 남은 땅은 일본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땅에는 ‘신용산’이라는 새 이름이 붙었다. 이 중 군용지로 편입된 땅은 해방 이후 그대로 미군에 넘어갔다. 민간인 구역에 새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도성 안의 혼마치(本町·본정)에 상대해 자기들 동네 이름을 모토마치(元町·원정)라 붙였다. 일본인들의 ‘으뜸가는 동네’라는 뜻이다.
1946년 10월 가로명제정위원회는 모토마치를 ‘원효로’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충무로·을지로 등이 나름의 분명한 작명 이유가 있었던 데 비해, 이 이름은 원정의 ‘원’과 인근 효창원의 ‘효’를 그냥 나열해서 성의 없게 붙인 이름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가로명제정위원회 회의록을 뒤져보았지만 이 의혹을 풀어줄 수 있는 내용은 찾지 못했다. 일본 불교가 원효대사를 높이 평가한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거나, 혹은 가로명 제정위원 중에 독실한 불교 신자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나 혼자만의 추정일 뿐이다.
[출처]: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서울 탐사> / 한겨레 21
17. 집창촌에 포위된 신성한 ‘현충원’
1920년대의 신마치(新町) 유곽. 현재의 동국대 후문에서 제일병원에 이르는 일대에 있었다. 유곽은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의 수치심을 자극한 ‘에도(江湖) 문화의 부정적 정수’였지만, 러일전쟁 직후 한국 주요 도시에 이식되었고, 매우 빠른 속도로 뿌리내리고 번성했다. 이 ‘추잡한’ 시설에 치를 떤 매천 황현 같은 지식인도 있었으나, 이를 ‘선진 문화’로 착각한 넋 나간 근대 지식인도 많았다. 전우용 제공
바쿠후(幕府) 시대 일본에는 산킨코타이(參勤交待)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 만든 것으로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들로 하여금 바쿠후 소재지인 에도(江湖·현재의 도쿄)와 자기 영지 사이를 정기적으로 왕래하게 한 것이다.
다이묘들을 쇼군(將軍)의 인질로 삼아 감시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었는데, 부수적으로는 다이묘들에게 과도한 경비를 부담시켜 군비 저축을 방해하는 효과도 있었다. 다이묘들은 휘하의 가신(家臣)과 사무라이들을 거느리고 에도와 자기 영지 사이를 왕래하느라 매년 엄청난 지출을 해야 했다.
그런데 다이묘들에게 번거로움과 낭비성 지출을 강요한 이 제도는, 에도와 다른 지역 사이의 도로망 정비를 촉진했고, 도로 연변의 상업 활동을 자극했다. 누군가가 길에 돈을 뿌리면, 그 돈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일 막부정권 치하에서 탄생한 ‘유가쿠’
다른 무엇보다도 숙박업이 융성했고, 다이묘 일행의 대다수가 남성이었기에 숙박업소의 부대시설 또는 유관시설로서 ‘유가쿠’(遊廓)도 번창했다. 유가쿠란 공인된 집창촌인데, 이를 처음 만든 것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유가쿠는 처자를 고향에 두고 매년 일정 기간 에도에 머물러야 했던 다이묘의 가신과 사무라이들을 위한 필수 시설이었다.
유가쿠의 번성에는 바쿠후 시대 일본의 수공업 발달도 한몫했다. 중세 유럽의 길드와 유사한 동직자 조합은 조선과 중국에도 있었으나, 일본의 장인 조직은 특히 유럽 길드와 흡사했다. 일본의 도제들은 10년 내지 20년 정도의 수련을 거친 뒤에야 독립할 수 있었으며, 독립하기 전에는 결혼하기 어려웠다. 그 탓에 이 직종 남성들의 초혼 연령은 30살이 넘었다.
물론 유가쿠를 번성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일본의 성문화가 아시아의 이웃 국가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개방적’이었다는 점이다. 도쿄에서 ‘남녀 혼욕’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은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이었지만, 이 풍습은 금세 사라지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남녀 혼욕과 유가쿠는 서양인들의 일본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 핵심 요소였으며, 일본 지식인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한 자기 표상이었다. <도쿄 이야기>를 쓴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유가쿠를 가부키와 함께 에도 문화의 두 정수로 꼽았다.
한성 개시(開市) 직후 서울에 들어온 일본인 ‘남성’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서울에 유가쿠 비슷한 시설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익숙한 문화’에서 벗어날 각오를 하고 오기는 했으나, 이 ‘문화’는 그들의 ‘본능’에 직결돼 있었다. 물론 서울에도 성매매 여성은 있었지만 ‘여성의 성’만을 독립적으로 판매하는 ‘시설’은 없었다.
조선에서 여성의 성은 술이나 기예와 결합된 ‘상품’으로만 구입할 수 있었는데, 일본인이 그 상품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는 서울 거주 일본인 사회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들어온 모험적 이주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민자 사회’는 어느 곳에서나 심한 ‘남초(男超) 양상’을 보이기 마련인바, 서울 거주 일본인 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들어오는 일본인이 급증하자, 서울과 개항장 도시들에는 일본에서 유녀(遊女)를 불러들여 은밀히 ‘영업’하는 여관과 식당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일본영사관은 ‘제국의 체모’에 관계된다는 이유로 일부 ‘밀매음녀’들을 적발해 귀국시켰으나, 이런 종류의 영업을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영사관은 이들을 철저히 뿌리 뽑는 것도 ‘풍속상’ 다른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일본인 남성들의 출입이 유난히 잦은 식당과 술집들이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하기도 했다.
“이주자 성욕 해소는 일본 ‘공익’ 위해 절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수십만 명의 일본군이 한반도를 거쳐 만주로 향했다. 서울에는 아예 사단 규모의 병력이 점령군으로 상주했다. 일확천금의 기회를 찾는 민간인이 일본군의 뒤를 따랐다. 1903년 3865명이던 서울 거주 일본인은 1904년 6673명, 1905년 9377명, 1906년 1만4303명으로 급증했다.
물론 군인은 제외한 수다. 경성 일본인 거류민단은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 독신 남성의 ‘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기들의 ‘공익’을 위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새로운 ‘공익시설’의 적격지로 찾아낸 곳은 ‘공교롭게도’ 장충단 바로 옆이었다.
장충단은 1901년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일본 낭인배들에게 희생된 장졸들을 추모하려고 만든 시설이었다. 1902년부터는 여기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희생된 사람들을 추가로 배향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립 현충 시설’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배향된 인물들은 모두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이었고, 매년 봄과 가을에 장충단에서 거행된 추모의식은 일본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일본인들에게는 이 시설, 이 행사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자국인 남성들의 성욕을 해소하는 것도, 자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를 조롱하는 것도, 모두 ‘공익’에 합치하는 일이었다.
1904년 6월 경성 일본 거류민단은 일본군의 힘을 배경으로 쌍림동 일대에서 7천여 평의 땅을 헐값에 사들였다. 그들은 이 땅을 일본인 ‘유곽업자’들에게 임대해 유곽지대로 만들고는 스스로 ‘거류민단 최초의 공익시설’이라고 자랑했다.
임대료 수입은 이후 경성 일본인 거류민단의 주요 재원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유곽 지대에 신마치(新町)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신마치 또는 신지(新地)는 일본에서도 유곽 동네에 관행적으로 붙이던 이름이었다.
일본인 유곽업자들은 일본에서 유녀들을 불러들이는 한편 한국인 여성들도 ‘고용’했다. 노름빚에 몰린 패륜 아비가 딸을 팔아넘기기도 했고, 구박을 견디지 못해 시집에서 탈출한 새색시가 속임수에 넘어가 흘러 들어오기도 했다. 한국인 여성들이 유곽 한구석에 자리잡자 한국인 남성들도 모여들었다. 신성한 현충(顯忠)의 장소는 이렇게 가장 방종하고 타락한 장소로 전복되었다.
확산되는 유곽 문화, 조선인 성문화도 바꿔
서울뿐 아니라 다른 도시들에서도 유곽은 일본군을 위한 준군사시설이자 공익시설이었다. 이 시설은 한국에 자리잡자마자 강력한 힘으로 한국인들의 성문화 전반을 일본식으로 바꿔나갔다. 유곽 출입을 시작한 한국인 남성들은 자기 문화의 심층에서 일어난 중대한 변화를 명료히 인지하지 못했고, 해방 이후 일제 잔재 청산의 목소리가 높을 때조차 일제 잔재의 핵심 중의 핵심이 이 영역에 있다는 사실을 성찰하지 못했다.
[출처]: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서울 탐사> / 한겨레 21
18.도쿄의 ‘번민 청년’ 게이조 ‘귀족’ 되다
부(富)는 어느 것보다 먼저 땅에 표시된다. 러일전쟁 이후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자, 서울의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물론 그들의 한국인 ‘보호’는 한국인들에게서 재산과 기회를 탈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자기들만의 ‘성공신화’를 썼고, 그 신화의 가시적 증거물을 자기 ‘땅’ 위에 만들어 세웠다. 서울 최초의 일본인 거류지였던 남산 아랫동네는 ‘신화적 인물’들이 모여 사는 새로운 성지가 되었다. 위쪽으로 조선총독부(옛 통감부) 건물, 왼쪽에는 총독 관저(옛 일본공사관)가 보인다. 사진 전우용 제공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막대한 전비(戰費)를 쏟아부었지만 얻은 것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뿐이었다. 그 지배권은 일본에 즉각적인 수익을 안겨줄 수 없었다. 오히려 일본 경제는 과도한 재정 지출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았고, 일본 사회는 전쟁터에서 죽은 젊은이들의 망령에 시달렸다.
메이지유신 직후, 모든 분야가 급속히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본 젊은이들에게는 ‘기회의 공간’이 활짝 열렸다. ‘신교육’은 그 기회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러나 40년 정도 시간이 흐르자 교육받은 젊은이들 사이의 경쟁 압력이 높아졌고, 그 경쟁에서 어렵게 이겨 좋은 학교에 입학해도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졸업생 취업 정보란에 ‘한국’ 항목 설정
희망이 줄어든 자리를 절망이 차지했다. 전쟁터에서 죽은 10만여 명의 젊은이들에 대한 ‘추모의 염(念)’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불투명한 미래와 힘겨운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다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급증했다. 이른바 ‘번민(煩悶) 청년’ 문제가 일본 사회의 핵심 문제 중 하나로 떠올랐다. 일본의 기성세대는 ‘나약한 젊은이’들을 나무라는 한편, 그들에게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곳에서 ‘기회’를 찾으라고 권유했다.
왜 굳이 경쟁이 치열한 도쿄에서 ‘입신출세’의 길을 찾으려다 좌절하느냐? 젊은이들의 꿈을 펼칠 공간은 많다. 조선과 만주로 눈을 돌려라. 이것이 일본 기성세대들, 한반도에 대한 장기적 ‘지배권’을 즉각적인 ‘사회적 수익 기반’으로 전환시키려 했던 식민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겪어온 문제, 특히 젊은이들의 좌절과 그들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살펴보면 이 무렵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쉽게 알 수 있다.
‘어른들’의 ‘호의적’인 권유 앞에서, 고향과 가까운 일본 지방 도시와 한국 경성 사이에서 고민하던 일부 지식 청년들이 부산행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모두 마음속에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대가리가 되자’는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그들이 ‘게이조’(京城)라고 부르는 도시에는 이미 적잖은 일본인이 있었으나, 그들 중 ‘지식인’ 출신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일본에서 온 지식 청년들을 기다리는 일자리는 많았다. 통감부와 산하 기관, 한국 정부, 일본 금융기관과 회사, 상점들이 그들을 기꺼이 고용했다. 그들은 ‘완전한 일본인’의 자격을 일부 포기하는 대신 한국 내 ‘귀족’의 지위를 얻었다. 한국에서 쉽게 ‘고급’ 일자리를 구한 선배들의 ‘성공담’은 학교 후배들의 불안감을 덜어주었다. 이 무렵 일본 중등학교 중에는 졸업생의 취업 정보란에 ‘한국’ 항목을 따로 설정하는 학교들도 생겼다.
지식 청년들이 도쿄 대신 게이조를 선택하는 판국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행을 꺼리는 것은 사치였다. 러일전쟁 직후 장사꾼, 농사꾼, 노동자, 유녀(遊女), 사기꾼, 폭력배 등 각양각색의 일본인들이 한국에 들어왔고, 상당수는 게이조에 정착했다.
1903년 3865명이던 서울과 용산 거주 일본인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급증해 1910년에는 사단 병력의 군인을 제외하고도 4만7148명으로 10배 이상 늘어났다. 일본인이 급증하는 만큼 그들의 거류 지역도 급팽창했다. 일본의 한국 강점 무렵 일본인 거류지는 북쪽으로는 구리개(을지로)까지, 동쪽으로는 신마치(쌍림동) 일대까지 확장됐다. 일본군 기지가 자리잡은 신용산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도로 좌우의 동네도 모두 일본인 차지가 되었다.
이름만 빌려주고도 돈 번 일본인들
일찌감치 서울에 터를 잡은 일본인들에게는 일본이 종주국이 되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늘어나는 일본인 인구도 엄청난 ‘호재’였다. 그들 대다수가 일본군과 통감부의 정치적 비호와 재경(在京) 일본인 사회의 인적·물적 뒷받침에 힘입어 눈부신 ‘성공신화’를 써 내려갔다.
그들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당장 한국 정부의 ‘조달처’와 ‘발주 대상’이 일본 상인들로 바뀌었다. 군사시설, 관청 등의 관급 공사와 새로 이주해온 일본인들을 위한 주택 공사로 서울은 매일 ‘공사 중’이었다. 이 공사비는 모두 일본인 청부업자들 몫이었다. 통
감부 감독하의 ‘한국 정부’도 관복, 집기, 사무용품 일체를 일본인에게서 구입했다. 1910년 가와하시 겐타로라는 자는 <게이조와 내지인>이라는 책을 내서 게이조에서 특히 ‘성공한’ 몇몇 사람의 성공신화를 소개했다.
생선장수 출신 세키 한타로는 청일전쟁 때 군대 용달을 맡아 기반을 다졌고, 그 뒤에는 한국 정부의 전매품인 인삼을 불법 재배·가공해 큰 부자가 되었다. 서양 가구를 취급한 마쓰다 미쓰호는 한국 관청의 사무용 가구를 독점 공급했고, 긴토 사고로는 서울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낙향하는 한국인 부자들에게서 골동(骨董), 서화(書畵)를 헐값에 사들여 일본인에게 팔아넘기는 방식으로 거부가 되었다.
인력거업으로 치부한 이토추 도모마쓰는 인력거꾼들을 동원해 노동자 파업이나 군대가 직접 나서기에 ‘민망한’ 한국인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폭력청부업’도 겸했다.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었든, 이들의 성공 배경에는 일제 권력이 있었다.
통감부가 한국 정부의 재정을 장악한 덕에, 일본군이 한국인의 저항을 진압해준 덕에, 어떻게든 일본인과 연줄을 만들어보려는 한국인 모리배들이 ‘알아서’ 귀찮은 일들을 처리해준 덕에 그들은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심지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일본인의 ‘배경’을 필요로 하는 한국인들에게 이름만 빌려주고도 돈을 벌 수 있었다. 미쓰코 쇼니, 노사키 게이타로 등은 돈 한 푼 없이도 한국인들이 설립한 여러 회사의 취체역(取締役·지금의 이사) 자리를 차지했다.
고스란히 한국인 몫 된 그들의 ‘번민’
성공한 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성공을 불굴의 의지와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라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성공신화가 ‘신화’인 것은, 그 배후에 합리성을 넘어서는 ‘신비한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한국 ‘지배권’을 장악한 일본 국가가 신(神)이었다.
한국인과 한국인의 재산은 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밥’이었고, 그들은 그 밥을 본국에서 건너와 관공리나 회사원이 된 ‘번민 청년’들에게 흔쾌히 나눠주었다. 일본에서 번민하던 청년들은 곧 자기 영토가 될 한국에서 번민을 털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털어낸 번민은 고스란히 한국인들의 몫이 되었다.
[출처]: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서울 탐사> / 한겨레 21
19, 혜민서 옆 한성병원 서양화한 일본 문명 상징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다. 1543년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운동에 관하여>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인체 해부에 대하여>가 거의 동시에 출판되었다. 15세기 끝 무렵부터 불과 반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이 세 사람의 업적은 땅과 하늘과 사람에 관한 오래된 통념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신호탄이었다.
러일전쟁 무렵의 한성병원. 지금의 명동성당 입구 서편에 있었다. 남대문 밖 도동(桃洞·현 서울역 맞은편 세브란스 빌딩 자리)에 세브란스 병원이 신축될 때까지는 한반도 내 최대 규모, 최고 수준의 병원이었다. 전우용 제공
‘보편의학’이 된 서양 근대의학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이 신호를 인지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이론이 치료의학에 이용되기까지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오직 콜럼버스의 발견만이 즉시 ‘실용화’했다.
유럽 각지의 수많은 배들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미지의 세계를 찾아냈다. 그들은 이 발견의 성과를 토대로 과거 자기들이 만들었던 지도를 수정해 새 지도를 만들었다. 같은 방식으로, 유럽인들의 세계에 관한 지식 목록도 크게 확장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새로 발견한 땅에서 신기하고 이상한 것을 모두 수집해 자기 땅에 가져갔고, 그것을 조사·연구한 뒤 기존 지식에 통합해 새로운 지식의 종합 목록을 만들었다.
이른바 ‘서양 근대의학’도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유럽 의학자들은 지구 전역의 질병과 치료법, 약물에 관한 지식을 모아 기존 의학 지식에 첨부·통합했다. 이런 지식의 확장은 ‘보편적 인류’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유럽인들은 지구 도처에서 사람을 ‘수집’했고, 그 일부를 ‘해부’했으며, 인류는 ‘해부학적으로 단일한 종(種)’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모든 인간에게 통용되는 ‘치료법’들을 찾아냈다.
전세계를 무대로 한 유럽인들의 이동은 권역별로 ‘균형 상태’에 있던 인간과 세균 사이의 관계도 뒤흔들었다. 유럽인들은 자기들에게 특유한 질병을 비유럽 세계에 옮겼고, 자기들이 첫발을 디뎠던 곳의 질병을 고향으로 가져갔다. 세계가 유럽 중심으로 통합되는 만큼, 질병도 통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 근대의학은 지리적·문화적 배경에서 독립한 ‘보편의학’의 지위를 얻었다.
보편의학은 정립 과정에서부터 유럽인의 세계 진출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유럽인의 활동 무대를 전세계로 확장하려면 유럽과 다른 지리·풍토 조건에서 만들어진 질병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유럽인들에게는 낯선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도 그 땅에 사는 세균들이 더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자기들의 의학과 함께 낯선 세계에 발을 디뎠다. 그들에게 보편의학은 그들 스스로 ‘야만인’ 또는 ‘미개인’이라 정의한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자애로운 문명의 징표’이기도 했다.
한국인을 치료할 유일한 ‘권위’
도쿠가와 시대 네덜란드로부터 서양의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 서양 근대의학만을 ‘유일한 의학’으로 공인했다. 그들은 의학뿐 아니라 의학을 이용하는 방법까지도 유럽인들에게서 배웠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자국민의 조선 ‘진출’을 지원하려고, 그리고 조선인들 사이에서 일본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조장하려고 의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먼저 개항장에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병원을 세웠다. 1877년 이 땅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생의원이 부산에서 개원했으며, 이후 원산·인천에도 일본인 병원이 생겼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 근대의학 학습의 성과를 군대에 우선적으로 배치했는데, 그 때문에 조선에서 문을 연 일본식 병원에도 대개 군의(軍醫)들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자국 거류민과 조선인을 치료하는 일 외에, 조선인에 관한 ‘생체정보’도 수집해 자기 나라에 보냈다.
조선에 있는 일본 병원은, 일본의 문명을 표상하고 조선인을 회유하며 조선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외교기관이자 정보기관이었다. 서울에 들어온 최초의 ‘양의’(洋醫)도 미국인 선교의사 앨런이 아니라 일본 공사관 의사 가이로세 도시코였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몇 달 전, 그가 수술 중 여자아이를 죽이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면 앨런의 민영익 치료 신화는 없었을지 모른다.
1894년 갑오개혁이 진행되자 보건의료 부문에도 세와키 도시오라는 일본인 의사가 고문으로 초빙되었다. 그는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이어(移御)로 일본인 고문들이 다 해고된 뒤에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한성병원을 개원했다. 장소는 공교롭게도 구리개 옛 혜민서 인근, 제중원 남쪽이었다. 조선 후기 이래 ‘의약(醫藥)의 거리’였던 곳이 서양인 선교의사와 일본인 의사가 경쟁하는 ‘신의학의 거리’가 된 셈이다.
러시아와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던 일본 정부는, 이 병원을 대한제국 정부 고관을 회유하는 데 이용하려 했다. 1897년 일본 해군은 이 병원을 인수해 군의 스즈키 유조에게 맡겼다. 스즈키는 ‘야스다 조오’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속이고 민간인 의사처럼 행세했다.
1900년, 한성병원은 서울에 있는 모든 서양식 병원을 압도할 정도의 새 건물을 지었다. 일본은 이 병원 건물을 통해 오직 일본만이 한국인과 한국의 병을 ‘치료’할 권위를 가졌음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1903년 고종의 최측근 이용익이 단독(丹毒)에 걸리자, 러시아 공사관과 한성병원 사이에 ‘환자 쟁탈전’이 벌어졌고, 우월한 시설을 가진 한성병원이 이겼다. 일본 공사는 친러파의 거두를 일본인 병원에 유치한 것을 ‘외교적 승리’라고 자평했다.
한국인의 정신에도 영향 끼치려
을사늑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 주도로 광제원, 의학교 부속병원, 대한제국 적십자병원을 통합한 대한의원이 설립될 때까지, 한성병원은 세브란스병원과 더불어 한국 최고의 근대적 병원으로 군림했다. 한성병원 말고도 일본인 거류지에는 여러 개의 개인병원이 생겼다.
애국심에 불타는 일본인 의사들은 한국인의 몸을 치료하며 정신에도 영향을 끼치려 했고,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 이 점에서는 선교의사들이 설립한 서양식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고대로부터 도시의 핵심 시설 중 하나였던 병원은, 이렇게 서울 공간을 ‘서양 문명’과 ‘서양화한 일본 문명’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출처]: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서울 탐사> / 한겨레 21
20. 인사동과 관훈동 유래를 아시나요
도사특히 수도(首都)는 권력이 자신을 표현하는 공간이다. 인간적 척도를 훌쩍 넘어서는 기념비적 건조물들, 수많은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을 수 있는 거대한 광장, 그리고 도시 주민들의 일상적인 동선(動線)과 시선(視線)을 통제하는 도로는 권력이 자신을 표현하려고 만드는 핵심 요소다.
1900년께의 서울 빨래터. 이 작은 물길을 중심으로 그 양안(兩岸)의 집들이 하나의 도시 마을 공동체를 이루었다. ‘물’을 중심으로 한 마을 공동체는 ‘골목 공동체’보다 컸지만 일상을 공유하는 실질적인 공동체였다.
인위의 길 vs 시간의 길
한자의 도(道)와 노(路)는 모두 ‘길’을 뜻하는 글자지만, 글자 모양만 보아도 두 ‘길’의 생성 경위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도’는 우두머리(머리 수(首))가 무리를 거느리고 천천히 행진(천천히 걸을 착(?))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다. 이 ‘길’은 권력이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려고 인위적으로 닦은 길이다.
‘도’는 돌을 치우고 풀을 베어내고 언덕을 무너뜨리고 움푹 파인 곳을 메꾸고 때로는 그 위에 돌이나 아스팔트를 까는 고된 노동 과정을 거쳐야 ‘완공’되는 인공 시설물이다. 고대 로마의 노예 노동력은 대부분 도로 건설 공사에 사용되었다. ‘도’는 곧고 넓으며 평탄하다. 이것은 또 길이와 너비, 방향을 갖는 공간 구성물로서, 권력의 속성과 의지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도’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기초적 행위다.
반면 ‘노’는 사람들이 발길(발 족(足)) 닿는 대로 땅을 밟고 다닌 결과 저절로 생긴 길이다. 이런 길은 다른 동물들도 만든다. ‘노’는 인간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인위적인 길이되 저절로 생겼다는 점에서 자연적인 길이다. ‘노’를 만드는 것 역시 ‘집단’으로서의 인간이지만, 이 경우 개인을 집단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하늘의 힘’, 즉 시간이다.
‘노’는 같은 장소에서 상당한 시차를 두고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개별적인 행위들을 시간을 압축해 묶어낸 결과다. ‘노’는 구불구불하고 오르락내리락하며 울퉁불퉁한 길로서,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을 표상한다.
권력이 그 자신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공간인 도시의 길은 대개 ‘도’다. ‘도’는 사람들의 통행을 위한 시설일 뿐 아니라 도시 공간을 구획하는 선이기도 하다. 권력은 도시 주민을 조직적·집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이 ‘선’을 활용하며, 도시 주민들도 대체로 이를 ‘우리’와 ‘타자’(他者)를 나누는 경계선으로 승인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서울에서는 이런 도시 길의 일반성에서 비켜난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조선 초기 서울의 행정구역은 부(部)-방(坊)-이(里)의 위계로 편제되었다. 이(里)는 큰길에서 갈라져나간 작은 길과 그 작은 길 좌우에 배치된 필지들을 형상화한 글자다. 최소 행정단위인 이(里)는 도로로 구획된 공간이었다. 그러나 서울 사람들은 도로로 구획된 공간을 ‘공동체’의 공간으로 승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권력이 구획한 경계선보다는 자연이 만든 경계선에 더 친근감을 느꼈다.
명칭만 인정하고 실체를 무시한 일본
사실은 서울 공간 자체가 다른 나라 수도들과는 달랐다. 조선왕조 권력은, 이전 권력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일방적으로 ‘정복’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하늘이 만든 선, 즉 자연의 선을 인간이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오래된 관념을 버리지 않았다. 서울이 자연에 순응하는 형상을 갖춘 것은 이런 태도의 결과였다. 권력이 있건 없건, 자연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같았다.
도시 주민들의 자발적·사적 네트워크가 행정단위인 이(里)와 괴리되자, 정부는 공동체적 요역(?役) 단위를 행정단위로 추인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중엽부터 이(里) 대신 계(契)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계(契)도 얼마 뒤 동(洞)으로 바뀌었다. 동은 문자 그대로 물(물 수(水))을 함께(같을 동(同)) 쓰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에는 곳곳에 계곡이 있었고 계곡마다 물이 흘렀다.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길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길이었다. 같은 계곡 안에서, 하나의 물길을 가운데 두고 형성된 생활공동체가 동(洞)이었다. 우리말 ‘마을’은 ‘물’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里)나 동(洞)이나 우리말로는 모두 ‘마을’이지만, 마을의 원뜻에 부합하는 것은 물 공동체인 동(洞)이다.
러일전쟁 이후 서울의 실질적 주인이 된 일본인들은 본래의 지명과 구획선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일본식 이름을 붙였다. 혼마치(本町)니 모토마치(元町)니 아사히마치(旭町)니 해서 일본 도시의 지명을 그대로 옮겨 붙이기도 했고, 후루시마치(古市町)니 다케조에마치(竹添町)니 하세가와초(長谷川町)니 오지마초(大島町)니 해서 한국 침략에 ‘공’을 세운 일본인들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으며, 호야마초(芳山町)니 미즈시메초(水標町)니 해서 원지명을 살짝 변경하거나 그대로 둔 채 동을 마치(또는 초)로 바꾸기도 했다.
공동체 소멸과 근대적 공간 등장
한 장소가 한국식과 일본식의 두 이름으로 불리는 시기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1914년, 경성부는 이 혼선을 제거했다. 청계천을 경계로 그 이북,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의 지명은 동(洞)으로 놓아두고, 그 이남, 일본인이 많이 사는 지역의 지명은 마치(町)로 통일했다. 지명의 형태로만 보자면 청계천 이북 지역에 대해서는 조선인의 공간관을 인정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동의 명칭만 인정했을 뿐, 그 실체는 철저히 무시했다. 그들은 물길을 중심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서울의 오래된 마을 공동체들을 자기들 공간관에 따라 해체하고 재편했다. 훈동과 전동 등을 쪼개 붙인 뒤 관인방의 관자와 합쳐 관훈동을 새로 만들고 대사동과 승동 등을 쪼개 붙인 뒤 관인방의 인자와 합쳐 인사동을 새로 만드는 식이었다.
이것은 자연의 ‘물길’을 중심으로 하는 동(洞)을 인위적 도로를 중심으로 하는 이(里)로 되돌리는 일이었다. 한국인들이 써온 이(里)와 일본인들의 마치(町)는 ‘田’의 위치만 다를 뿐 사실 같은 글자다.
마을 공동체와 행정단위가 다시 괴리된 뒤, 물길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마을 공동체의 ‘유제’(遺制)들을 쓸어버렸다. 도시 공간의 각 장소들을 고유한 경관적 특색과 문화적 특질로 수놓았던 마을 공동체들의 소멸과 균질적인 필지와 가로의 병렬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도시 공간’의 등장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새로운 권력, 즉 이민족(異民族)이 장악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게는 공동체가 해체된 공간이 다스리기에 편했다.
[출처]: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서울 탐사> / 한겨레 21
21. 묄렌도르프 저택은 최초의 ‘퓨전’ 가옥
서울 땅에 합법적으로 첫발을 디딘 백인은 독일인 묄렌도르프(한국 이름 목린덕)였다. 물론 그보다 먼저 서울 땅을 밟은 백인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박연)와 하멜은 어쩌다 표류해서 서울로 압송되었고, 프랑스인 신부들은 몰래 들어왔다.
1882년 5월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조선 정부는, 청(淸)에 외교 통상 전문가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부하 마건상과 톈진 독일영사관에 있던 묄렌도르프를 추천했다. 그런데 그 직후 서울에서 군인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묄렌도르프는 톈진에 영선사로 가 있던 김윤식 일행과 함께 그해 12월에야 입경했다.
서울 박동(수송동) 묄렌도르프의 저택. 1884년께 통리아문 및 해관 관리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넓은 정원을 서양식으로 꾸미고 테니스장까지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진 하단의 직각으로 굽은 선이 테니스장 선으로 보인다. 전우용 제공
귀신을 ‘양귀’가 쫓을 수 있을까
묄렌도르프는 입경한 지 열흘이 넘어서야 고종을 알현했다. 그때까지 그는 아마 동행한 마건상과 함께 청군 군영에서 지냈을 것이다. 조선 정부는 그에게 참의통리아문사무 벼슬을 주었다가 곧 협판교섭통상사무로 승진시켰다.
신설 아문인 통리아문의 협판은 참판과 같은 직급이었기 때문에 이후 그는 ‘목참판’으로 불렸다. 조선 정부는 그가 거처할 집도 마련해주었다. 당대의 척신(戚臣) 민겸호가 살던 저택으로 지금의 조계사와 수송공원 일대에 걸쳐 있었다.
민겸호는 선혜청 당상 자리에 있으며 구식 군인에게 줄 급료를 횡령한다는 원성을 듣다가 군인폭동 때 살해당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집은 그가 죽은 뒤 몇 달 동안 비어 있었는데, 워낙 큰 저택이 빈 채로 있다 보니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 시절 사람들의 정서로는, 집주인 민겸호의 원혼이든 군인폭동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든, 이 집에 붙어 있어야 ‘정상’이었다. 참판에게 주기에는 큰 집이었으나, 조선 정부는 이 부담스런 집을 ‘양귀’(洋鬼)에게 주는 게 여러모로 편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이 집에 들러붙은 귀신을 양귀가 쫓아낼 수 있을지 두고 보자는 심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묄렌도르프에게는 이 집에 붙은 귀신이 아니라 집 자체가 문제였다. 그는 톈진에 있으며 이미 ‘중국식 주거 생활’에 익숙했고 조선도 중국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겠지만, 조선의 집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의 뒤를 이어 서울에 들어온 구미인(歐美人)들이 불평을 늘어놓은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집이었다.
그들은 천장이 낮고 비좁은데다 어두우며 냄새까지 나는 집에 진저리를 쳤다. 그들은 조선의 집에서 살려면 자기 몸에 밴 행동 양식을 바꿔야 했다. 신발은 항상 신고 모자만 썼다 벗었다 하는 것이 그들의 예법이었으나, 조선 사람들은 모자는 항상 쓰고 신발만 신었다 벗었다 했다.
조선의 집은 그들에게 실내에 들어오려면 신발을 벗으라고 강요했다. 밥을 먹으려면 식탁이 놓인 식당으로 가는 것이 그들의 생활문화였으나, 조선의 집에서는 식탁이 자기 앞으로 걸어 들어왔다.
천장과 문지방만 불편하다고 한 묄렌도르프
온돌방도 집중적인 불평 대상이었다. 본래 한옥의 마루는 남방식 건축 요소고, 온돌은 북방식 건축 요소였다. 남방과 북방의 상반되는 건축 요소를 한 집에 결합시킨 것은, 한국의 기후가 그만큼 ‘극단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한여름과 한겨울의 기온차가 50℃ 이상 나는 기후에 쉬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시베리아의 찬바람을 동반한 한겨울의 추위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절절 끓는’ 온돌방 아랫목을 더 괴로워했다. ‘엉덩이가 익는 것 같아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거나 ‘바닥에 두꺼운 요를 두 겹이나 깔았지만 뜨거워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유럽인 공통의 한옥 체험담이었다. 창도 문제였다.
지금은 아름다움과 기능성을 고루 갖춘 한옥 창을 찬미하는 사람이 많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햇볕의 대부분을 차단하는데다 쉬 뚫어지는 한옥 창에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묄렌도르프는 의외로 자기가 받은 집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독일에 있는 아내에게 자기가 새로 얻은 집을 상찬하는 편지를 보냈다.
“집은 순 조선식이지만 큼직하고 편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도배는 전부 새로 하고 바닥은 카펫 대신 녹색 털 천을 깔았어요. 사방 기둥마다 붉은 종이에 금박을 입힌 주련(柱聯)이 붙어 있습니다. 벽에는 큼직한 조선 그림이 붙어 있고 내부 장식은 우리 관점에서 보더라도 놀라울 정도여서 서양식 가구를 들여놓아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다만 천장이 너무 낮고 문지방이 너무 높아서 올라서든지 뛰어넘어야 할 판입니다.” 하지만 이 편지 내용이 그의 본심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타향살이를 하며 고향에 남아 있는 아내에게 집 때문에 고생스럽다는 말을 전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남편의 도리가 아니다. 그는 아주 사소한 것, 천장과 문지방만 거론함으로써 정말 아무 불편 없이 산다는 확신을 주려 했을 것이다.
묄렌도르프 집터 표석은 없어
아내에게는 집이 아주 만족스럽다는 투로 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가능한 한 집을 서양식으로 개조하려 했다. 마당을 서양식으로 꾸몄고, 행랑채는 서재와 사무실, 외빈(外賓)을 위한 서양식 객실로 개조했다. 그러나 조선 목수들과 조선 재료만으로 개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울 생활에 그럭저럭 익숙해지자 그는 조선 정부를 위해 독일인 메르텐스를, 그리고 아마도 자기 자신을 위해 독일계 미국인 로젠봄을 불러들였다. 메르텐스는 서양식 생사(生絲) 생산 시설인 잠상공사 설립을, 로젠봄은 유리공장 건설을 각각 맡았다. 그런데 잠상공사는 설립되었으나 유리공장은 그렇지 못했다. 설혹 로젠봄이 유리 생산에 성공했더라도 묄렌도르프의 집 창이 유리창으로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1885년 여름, 한-러 밀약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청으로 돌아갔다.
묄렌도르프가 떠난 뒤 그의 집은 한동안 독일공사관으로 쓰이다가 육영공원의 두 번째 교사가 되었고,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새 황궁이 된 뒤에는 정동에 있던 용동궁(명종의 세자로 요절한 순희세자가 살던 집)이 이 집으로 옮겨왔다. 용동궁은 왕후가 관할하던 궁집이었는데, 1906년 황귀비 엄씨는 이 궁에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세웠다.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이 주변에 보성학교·중동학교 등 신식 교육기관이 들어섰고, 1910년에는 조계사의 전신인 각황사가 자리를 잡았다. 서울 최초의 한양(韓洋) 절충 가옥이던 묄렌도르프의 저택은 이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터는 한국 근대 교육의 발상지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 수송공원은 학교 터 표석이 가장 많은 곳이다. 묄렌도르프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없는 것은 유감이지만.
[출처]: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서울 탐사> / 한겨레 21
22. 미국 대사관저가 정동에 들어선 까닭
1866년 제너럴셔먼호가 조선 주변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 해군 와추셋호의 함장 로버트 슈펠트 대령은 황해도 장연현 목동포에 상륙해 지방관에게 그 배의 행방을 문의하는 서신을 전달하고 며칠간 기다리다 회답이 없자 본국으로 귀환했다.
16년 뒤인 1882년 음력 4월, 제독이 된 그는 미국의 전권대신 자격으로 다시 조선 땅에 발을 디뎠다. 청(淸) 북양대신 이홍장의 막료 마건충 등이 그와 동행했다.
1900년께의 미국 공사관. 1897년 주한 미국 공사가 된 앨런은 다른 나라 공관에 비해 한참 초라한 미국 공사관에 대해 불평을 토로했지만, 을사늑약 이후에는 “공관에 돈을 허비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전우용 제공
미국을 선의의 나라로 본 조선인들
1853년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 정부는 조선 개항에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1871년 ‘조선 원정’이 실패한 뒤에도 미국 정부는 계속 조선의 동향을 주시했다. 1874년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는 본국에 대원군의 실각을 알리며 국왕이 문호 개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1878년 애런 사전트 상원의원은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에게 조선 개방을 위해 특사를 파견하라고 건의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1879년, 미국 정부는 일본으로 향하던 슈펠트 제독에게 문호 개방을 요구하는 서한을 조선 정부에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슈펠트는 먼저 일본 정부에 중개를 요청했으나, 일본은 ‘현재의 구도’가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조선에서 향유하던 ‘독점적 이익’이 줄어드는 것도, 조선이 제2의 일본처럼 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도 모두 탐탁지 않았다. 슈펠트는 방향을 틀어 청의 이홍장에게 중재를 의뢰했다.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던 이홍장에게는 반가운 제안이었다.
그는 즉각 조선 정부에 미국과 수교하라고 권유했다. 이홍장에게는 이참에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으려는 속셈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에서 청과 동등한 지위와 기회를 가지려 했다. 한동안 외교적 실랑이 끝에, 조약에는 청의 종주권을 명문화하지 않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조일수호조규 당시 조선 쪽 전권대신이던 신헌과 조선에 최초의 ‘외교 서한’을 전달한바 있던 슈펠트 사이에 체결된 조약문 제1관은 “이 조약 체결 이후로 대미국 백리사천덕(伯理璽天德·프레지던트)과 대조선국 군주 및 그 인민은 각각 모두 영원히 화평우호를 지키되, 만약 다른 나라가 불공정하게 업신 여기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일단 통지한 뒤에 반드시 서로 도와 중간에서 잘 조처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한다”였다.
외교적 수사의 함정에 익숙지 않았던 조선 국왕과 정부 관리들은 이 조약문을 미국이 준 큰 선물로 받아들였다. 미국인들이 보기에, 조선을 ‘불공정하게 업신여길 다른 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고집하는 청이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이를 모든 다른 나라로 확대해석했다.
조선인들에게 미국은 ‘다른 나라의 영토에 욕심이 없는 선의로 가득 찬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고종을 비롯한 많은 조선인들이 미국 정부에 ‘선처’를 호소했던 것도, 이 조약문을 ‘담보’ 삼은 것이었다. 물론 조약문이 ‘의지와 신뢰’의 유일한 근거는 아니었다. 이후 조선에 들어온 미국인들 중에는 그런 ‘의지와 신뢰’를 얻을 만한 미덕을 실천한 사람이 많았다.
궁궐과 종묘사직 있는 개천 안쪽 지키려
조약 체결 한 해 뒤인 1883년 음력 4월, 초대 주조선 미국 공사 루셔스 하우드 푸트가 서울에 들어와 고종을 알현하고 국서(國書)를 봉정(奉呈)했다. 당시 푸트의 나이는 58살, 연륜을 중시하던 조선인들에게 그의 나이는 미국이 조선에 표시한 성의로 보였을 것이다.
성의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 무렵 미국 정부가 조선을 ‘경시’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캘리포니아주 재판장과 칠레 영사를 역임한 푸트의 경력은 뉴욕 교육국장을 지내고 초대 주일 미국공사가 된 타운젠드 해리스의 경력에 뒤지지 않았다. 공사로 부임했을 때의 나이는 푸트가 해리스보다 3살 더 많았다.
푸트가 상주(常駐) 공사로 서울에 들어오자, 조선 정부는 당장 그의 공관과 사택 자리를 지정해주어야 했다. 당시 일본 공사관은 예장동에, 청 상무공서는 남별궁에, 서울에 상주하는 유일한 서양인이던 묄렌도르프의 저택은 수송동에 있었다. 푸트는 미국 공사관과 사택을 정동 경운궁 옆, 지금 미국대사관 관저인 하비브하우스가 있는 자리에 마련했다. 당시에는 강원도 관찰사 민치상의 아들 민계호의 집이었다.
푸트는 자기에게 이 집을 알선해준 이가 묄렌도르프였다고 했지만, 조선 정부 외아문 협판인데다 아직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도 않은 그가 순전히 독자적인 판단으로 이 집을 알선했다고 볼 수는 없다. 묄렌도르프의 뜻이 조선 정부의 뜻이었다. 조정의 눈치를 살피며 집 팔기를 주저하던 민계호를 안심시킨 것도 조선 정부였다.
주한 미국인 130년 역사의 중심
1879년 일본 공사관이 처음 설치된 곳은 서대문 밖 경기중영 자리였다. 이때만 해도 조선 정부는 외국 공관을 도성 안에 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임오 군인 폭동 이후 청국과 일본 공관이 도성 안에 들어온 뒤에는 새 경계선을 개천에 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과 종묘사직이 있는 개천 안쪽(북쪽)만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조선 정부는 개천 바깥쪽에 있으며 궁궐(경복궁)에 가까운 곳으로는 정동만 한 곳이 없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미국 공사를 일본공사나 청국 상무위원과 떨어뜨려놓으려 했을 수도 있다.
물론 묄렌도르프가 자기 집 가까운 곳을 강력히 추천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묄렌도르프도 푸트를 그리 반기지는 않았던 듯하다. 후일 앨런은 자기 일기에 ‘묄렌도르프는 조선인보다 더 반(反)선교적 행동을 한 사람’이라고 적었다. 같은 개신교 신자였지만 묄렌도르프는 미국식 기독교에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푸트가 자기보다 20살 이상 연상이었다는 점도 마뜩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보다는 독일 공사관을 자기 집 옆에 두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푸트는 결국 경운궁 옆에 집을 구했고, 이 집이 이후 주한 미국인 130년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출처]: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서울 탐사> / 한겨레 21
23. 정동 하비브하우스가 한옥으로 남은 이유
미국대사관 관저 하비브하우스. 1972년 옛 대사관저가 붕괴 위험에 직면하자 미국 정부는 역대 미국 대사들의 100년 동안의 숙원이던 ‘서양식 건물’을 새로 지어주겠다고 했으나, 1971년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한 필립 하비브는 ‘한옥 양식’을 고집했다. 그것이 한옥을 사랑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에서 펼쳐진 미국의 ‘역사’를 사랑한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이 건물은 미국의 재외 대사관저 중 주재국의 전통 양식을 취한 유일한 건물로 알려져 있다. 전우용 제공
조선 왕조가 한양에 전도(奠都)한 지 2년 뒤, 태조 이성계의 부인 현비 강씨가 죽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 생명체의 본능에 속하지만, 연애결혼이 일반화하기 전에는 사랑이 부부 사이에 자리잡는 일이 흔치 않았다.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정략적 결합이었고, 이성계와 강씨의 결합 역시 이 중세적 일반성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둘은 아주 운이 좋은 부부였다. 이성계와 강씨는 부부이며 연인이자 동지였다. 강씨가 죽자 62살의 이성계는 ‘통곡하고 슬퍼하기를 마지아니했고, 조회와 저자를 10일간 정지했다’.
서울 중구 정동과 성북구 정릉동 유래
강씨의 능호(陵號)는 정릉(貞陵)으로, 능침(陵寢)은 성벽 안, 서대문과 서소문 사이로 정해졌다. 도성 안에는 능을 둘 수 없다는 원칙을 무시한 처사였다. 이성계가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씨의 능을 도성 안에 마련한 것은, 그의 혼령이라도 가까운 곳에 두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그 일대가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貞洞)이다.
강씨와 정적 관계였던 태종 이방원은 그 소생의 이복동생들을 죽였을 뿐 아니라 죽은 계모조차 가만두지 않았다. 이성계가 죽자마자 이방원은 강씨의 능을 북쪽 성 밖,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정동과 정릉동 모두 신덕왕후 강씨의 능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능역에 남아 있던 석물들은 광교 초석으로 삼아 뭇 백성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이 처사에 대한 비난을 의식했음인지, 후일 그는 대신들에게 “정릉이 나의 계모가 되는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의 속뜻을 바로 짚어낼 눈치가 없는 사람이 출세하는 경우는 고금에 없었다.
좌의정 류정현은 “그때(이성계가 강씨를 처로 맞았을 때)에 신의왕후(이방원의 생모)가 승하하지 않았으니, 어찌 계모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이방원이 원하던 대답이었다. 그는 “정릉은 내게 조금도 은의(恩義)가 없었다”며 자기 행위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계모를 조금의 은의도 없이 대했던 일은 두고두고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정릉이 옮겨간 뒤, 그 자리는 주택지가 되었다. 후일 세조는 아들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가 죽자, 이곳에 며느리와 두 손자가 함께 살 집을 마련해주었다. 예종이 죽은 뒤 의경세자의 작은아들 잘산군이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위를 계승했으니, 그가 성종이다.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던 성종은 이 집을 장안에서 제일 큰 집으로 넓혀주었다. 그로부터 100년쯤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의주로 피란했던 선조가 서울로 돌아왔을 때, 궁궐은 모두 불타버린 상태였다. 그는 부득이 장안에서 제일 큰 이 집을 15년간 행궁으로 쓰며 여러 건물을 새로 짓고 경계도 넓혔다.
이 행궁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3년간 더 머물다가 창덕궁 중건 공역이 끝나자 그리로 옮기며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를 붙였다.
그 얼마 뒤 인목대비가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인조반정 때는 인조가 이곳에 와서 인목대비에게 즉위를 인정받는 의식을 치렀다. 그 뒤 경운궁은 이름만 궁인 채로 퇴락해갔고, 궁역에 편입된 땅도 원주인에게 되돌아갔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궁역은 경계조차 불명확해졌다.
앨런 “초라해 불만, 돈 안 쓴 건 잘할 일”
조선 정부가 루셔스 하우드 푸트에게 알선한 집은 경운궁 서쪽에 바로 붙은 민계호와 민영교의 집이었다. 민계호의 집은 건물 125간, 공대(空垈) 300간, 민영교의 집은 건물 140간, 공대 150간으로 둘 모두 당당한 저택이었다. 푸트는 이 집들을 2200달러에 구입했고, 주변 집도 몇 채 더 사들였다. 그가 이렇게 넓은 집을 만든 것은 묄렌도르프의 저택을 의식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을 구한 푸트는 본국 정부에 미국식 건물을 지을 돈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하필이면 ‘모자가 천장에 닿는다’는 이유를 댔다. 국무장관은 ‘조선에서는 실내에서 모자를 쓰지 않는 것으로 안다’고 답신했다. 조선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푸트는 ‘쓸 만한’ 건물들을 조금 수리해서 그대로 쓰는 수밖에 없었다. 큰 건물 한 채는 공사관이 되었고, 다른 한 채는 공사관저가 되었다.
이듬해 미국 정부가 주조선 공사의 지위를 전권공사에서 변리공사 겸 총영사로 강등시키자 푸트는 이에 반발해 사직하고 귀국했다. 1887년 미국 정부는 집값과 수리비로 푸트에게 4400달러를 지급했다. 푸트의 뒤를 이어 조지 클레이턴 포크, 휴 A. 딘스모어, 오거스틴 허드 주니어, 존 M. B. 실이 이 집에서 공사 업무를 수행했다.
영국·러시아·프랑스 등 열강이 잇달아 유럽식 공관을 짓는 동안에도 미국 공사관과 관저는 한옥 건물을 그대로 유지했다. 선교사로 서울에 왔다가 미국 공사가 된 호러스 뉴턴 앨런은 을사늑약 이후 ‘미국 공사관이 다른 나라 공사관에 비해 초라한 것이 불만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건물에 돈을 쓰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술회했다.
가장 오랜 역사와 풍부한 스토리의 건물
을사늑약 이후 미국공사관은 영사관이 되어 1940년까지 미국인들과 미국에 유학하려는 조선인들을 지원했다. 1940년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조선 내 미국인들을 다 쫓아내고 이 집을 압수했다. 해방 뒤 이 집은 다시 미국 총영사관이 되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대사관이 되었는데, 1952년 을지로에 새 미국대사관이 준공된 뒤로는 대사관저로만 사용했다. 이후 역대 미국 대사들은 한국인들도 불편하다고 헐어버리는 한옥 건물을 수시로 개·보수해가며 꿋꿋이 버텼다.
1972년, 관저 건물이 붕괴될 조짐이 나타났다. 당시 미국 대사 필립 찰스 하비브는 끝까지 건물을 살려보려 했으나 이미 대들보가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비브는 새 관저도 한옥 양식으로 짓기로 결정했다. 1976년, 목재는 미국산 더글러스소나무를 쓰고 외관은 한옥, 내부는 양식으로 한 절충형 한옥 대사관저가 완공되었다.
하비브하우스 경내에는 공사관으로 썼던 한옥도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친 상태로나마 남아 있는데, 이 건물은 미국 재외 공관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관저 경내에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옛 정릉의 석물도 남아 있다. 지금 서울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풍부한 스토리를 간직한 건물은, 한국인의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것이다
[출처]: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서울 탐사> / 한겨레 21
24. 사절단 ‘보빙사’가 부른 ‘미 감리교 선교 척후대’
서울에 상주 공관을 마련한 미국 정부는 조선 정부도 상응하는 조처를 취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외국에 상주 대표를 파견한 적이 없던 조선 정부에는 이 기대가 오히려 의아한 일이었다. 일본이 서울에 공사관, 각 개항장에 영사관을 설치한 뒤에도 조선 정부는 일본에 상주 공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루셔스 하우드 푸트에게 여러 차례 독촉을 받고 나서야, 조선 정부는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사절단의 이름은 ‘먼저 방문해주신 데 감사드리는 사절’이라는 뜻의 ‘보빙사’(報聘使)였다.
보빙사 일행. 미국으로 출발하기 직전 일본에서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앞줄 앉은 이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우리탕, 뒷줄 선 이는 왼쪽부터 현흥택, 미야오카(일본인 통역),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조선의 보빙사는 당시 미국 정계에는 한갓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남겼을 뿐이지만, 미국 개신교계에는 조선 선교 붐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전우용 제공
최초로 어진과 서울 경관 촬영한 로웰
전권대신(全權大臣)은 왕후의 인척이자 국왕의 총신(寵臣)인 24살의 민영익이었고, 부대신(副大臣)은 그보다 5살 많은 홍영식, 종사관은 1살 많은 서광범이었다. 이 밖에 수원(隨員)으로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덕, 최경석 등이 동행했다. 약관의 젊은이들로만 구성된 사절단이었다. 묄렌도르프가 해관을 설치하려고 불러들인 청국인 우리탕(吳禮堂)이 통역으로 합류했다.
1883년 7월 인천을 출발한 일행은 기항지 일본에서 주일 미국 공사의 소개로 미국인 안내자를 구했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와 있던 퍼시벌 로웰(1855∼1916)이었다. 후일 애리조나주 플래그스태프에 로웰천문대를 세우고 명왕성의 위치를 최초로 예측한 바로 그 로웰인데, 명왕성의 천문 기호는 그의 이름을 딴 PL로 정해졌다.
통역 임무를 마치고 고국에 남았던 그는 귀국한 보빙사의 주청에 따라 국빈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해 3개월간 머물며 최초로 어진(御眞)을 촬영했고, 서울의 몇몇 지점을 카메라에 담았다. 1885년에는 조선 체류 기간 중 견문한 것들을 정리해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가 ‘최초’로 존재를 예측한 명왕성은 2006년 국제천문연맹에 의해 행성 지위를 박탈당했으나, 그가 남긴 고종의 어진과 서울 경관 사진이 ‘최초’의 지위를 잃을 가능성은 없다.
보빙사 일행은 고종과 서울에 관한 최초의 사진 기록자를 얻었을 뿐 아니라, 개신교의 한국 전래도 인도했다. 한 달이 넘는 긴 항해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들은 대륙 횡단 열차로 갈아타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닮은 외모에 통이 좁고 속이 비치는 이상한 모자를 쓴 그들은 다른 승객들의 구경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기차 안에서 보낸 일주일 내내, 미국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그들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중에는 미국 감리교의 거물급 목사 존 가우처(1845∼1922)도 있었다. 가우처는 민영익 일행과 대화를 시도했다. 한국어·중국어·영어가 뒤섞인 이 대화를 통해, 그는 미국이 조선이라는 나라와 새로 수교했고 ‘놀랍게도’ 조선에는 아직 개신교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 불쌍하고 미개한 사람들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는 독실한 기독교도다운 선의가 타올랐다. 때는 마침 미국 기독교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의 마지막 국면이었다.
가우처는 주변 사람들을 설득해 2천달러의 조선 선교기금을 확보했고, 미국 감리교 기관지 편집자를 움직여 조선 선교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연재 기사를 싣게 했다. 뉴욕의 감리교 선교부에는 즉각 조선 선교를 개시하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일본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 로버트 매클레이(1824∼1907)에게는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해달라는 서한을 각각 발송했다.
김옥균과 윤치호의 영어 선생 달랐을까?
마침 매클레이는 미국인으로서는 드문, 어쩌면 당시로는 유일한 ‘조선통’이었다. 그는 중국 선교사로 있던 1840년대 말에 조선인 난파선 선원들을 통해 조선을 처음 알았다. 조선을 중국의 일부로 잘못 알고 있는 서양인이 많던 시점에, 그는 양자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인지했다.
신미양요 이듬해인 1872년, 잠시 뉴욕에 머물던 매클레이는 ‘조선 원정대’의 귀환 소식을 접하고 미국 감리교회에 조선 선교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1882년에는 그의 부인이 조선에서 온 조사시찰단 단원 몇 명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이때 김옥균이 사의(謝意)를 표하려고 이 부부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매클레이 부인이 요코하마에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는 사실은 국내 자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조사시찰단원으로 요코하마에서 영어를 배운 것으로 확인되는 사람은 윤치호인데, 그가 후일 자신의 영어 학습 경위에 대해 밝힌 바는 매클레이의 증언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처음 제국대학 영어교사 어니스트 페넬로사의 부인한테서 알파벳 등 기초만 배우고 그만두었다가 나중에 동남제도개척사로 일본에 온 김옥균의 권유에 따라 요코하마 주재 네덜란드 영사관 서기관 레온 폴데르를 찾아가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에 산 지 16년 된 폴데르의 ‘미국인’ 아내와 대화한 내용을 소개했다.
같은 요코하마에서 ‘조선인 학생들’이 서로 다른 교사를 구해서 영어를 배웠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윤치호가 영어 교사를 구하는 데 애먹었다고 밝힌 점, 윤치호의 증언과 매클레이의 증언 모두에 김옥균이 등장하는 점으로 보아서는 그 가능성이 높다고 하기도 어렵다.
이 의문을 풀어줄 열쇠는 어쩌면 매클레이 부인에게 조선인 학생들의 영어 교사가 돼달라고 부탁한 ‘일본인 개종자’가 쥐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가 ‘조선인 학생’들에게 영어 교사의 ‘진정한 신분’을 숨긴 것은 아니었을까? 아직은 이 의문에 답할 수 없다. 어쨌거나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조선에 오면서 ‘조선인 양반 통역’, 그것도 반(反)개화파인 사람을 대동했다. 이 조선인 통역이 윤치호가 아님은 분명하지만 아직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청하지는 않았으나 본디 바라던 바
얘기가 잠시 빗나갔지만, 1884년 초 가우처의 편지를 받은 매클레이는 미국 감리교 선교본부의 의향을 타진했다. 미국 선교본부로서야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던 터라,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승인했다. 그는 다시 주일 미국 공사 존 빙엄과 주조선 공사 푸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둘 다 긍정적 답변을 보내왔다. 1884년 6월8일 매클레이 부부와 ‘조선인 통역’, 아마도 중국인이었을 요리사의 4명으로 구성된 ‘미국 감리교 조선 선교 척후대’ 일행은 요코하마에서 영국 기선 테헤란호에 올랐다.
[출처]: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서울 탐사> / 한겨레 21
25. 서구식 학교와 병원 ‘복음화’ 위한 수단
선교사 로버트 매클레이 일행은 나가사키와 부산항을 거치는 보름 남짓의 항해 끝에 1884년 6월23일 오후 1시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배 안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하선한 그들은, 아마도 루셔스 하우드 푸트 공사가 미리 안배했을 가마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제물포에서 미국공사관이 있는 서울 정동까지 거리는 대략 40km. 가마꾼들이 그들을 미국공사관 앞에 내려놓은 시각은 초저녁 무렵이었다. 점심시간과 한강을 건너려고 배를 기다린 시간을 고려하면 가마꾼들은 무거운 가마를 든 채 얼추 시속 5km 이상의 속도로 ‘달린’ 셈이다.
그들은 도중에 말을 타고 서울로 향하는 일단의 미국인들을 만났다. 미국에서 귀환하는 보빙사 일행을 태우고 온 트렌턴호의 선원들이었다. 선원들과 매클레이 일행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다시 각자 출발했는데, 미국공사관에 도착한 시각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조선 가마꾼의 걸음은 보통 사람보다 빨랐고, 조선 말의 속도는 다른 나라 말보다 느렸다.
미국공사관에서 서울의 첫 밤을 보낸 매클레이 일행은, 다음날 푸트 공사가 미리 세내둔 공사관 바로 옆집에 짐을 풀었다. 매클레이는 일주일가량 서울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소일한 뒤, 6월30일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왕에게 자기 뜻을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편지의 상세를 알 수는 없으나, 요지는 서울에 서양식 학교와 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 덧붙었을 것이다.
대궐로 행차하는 푸트 공사 부인. 가마꾼 4명과 겸인 2명, 구종 2명, 도합 8명이 수행했다. 불쌍한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자임한 매클레이는, 자기를 가마에 태우고 시속 5km 이상의 속도로 달린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도 표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조선인의 ‘불쌍한 영혼’이었지 ‘고통스런 육체’가 아니었다. 전우용 제공
십자군 시대 유럽 기사들처럼
19세기 기독교(개신교)의 세계 진출은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예수회의 동방 진출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였던 이교도의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자국 국기를 꽂는 일을 신의 섭리에 따른 것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신이 자기들에게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특권’과 함께 전 인류에게 복음을 전파할 ‘의무’를 부여했다고 믿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백인 문명의 정수로서 모든 문명적 시설과 행위에 스며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군함과 대포가 ‘정복’을 위한 수단이라면, 학교와 병원은 ‘복음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신의 섭리는 본래 하나였기에, 둘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대 미국 기독교도들의 세계 복음화를 위한 열정은 십자군 시대 유럽 기사들의 그것과 흡사했다.
조선 지식인들도 ‘서양인’들이 학교와 병원만 가지고 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다. 도끼를 들고 궐 앞에 엎드려 서양과 통상을 하려거든 자기 목을 먼저 치라고 소리친 최익현 같은 기개를 가진 인물은 많지 않았으나,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조야(朝野)에 차고 넘쳤다.
하지만 서양 학문을 배우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기회마저 사라진다는 절박감을 느낀 사람도 많았다. 김옥균은 그런 사람들의 리더였다. 고종도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각국 사정과 영어를 아는 인재를 키우고 서양의학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당시 서양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은 다름 아닌 고종이었다.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과 중국에 보낸 영선사의 보고서가 그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공식 승인도 전면 금지도 아닌
이런 상황에서 <한성순보>는 누차 서양 학문과 기술, 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서양의학에 대해서는 “서양은 의술이 탁월하여 군사들이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운다”며 ‘군사적 실용성’을 강조했다. 서양식 학교와 병원은 ‘부국강병’을 위해 꼭 갖춰야 할 필수 시설이었다.
하물며 바다를 격해 수만 리 떨어져 있는데다 조선이 남의 능모를 받으면 힘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한 미국의 신민(臣民)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학교와 병원을 세워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7월3일 아침, 초조하게 회신을 기다리던 매클레이는 더 참지 못하고 김옥균의 집을 방문했다. 김옥균은 그에게 지난밤 왕이 그의 ‘사업 계획’을 신중히 검토한 뒤 승인했다고 통보했다. 아마도 그 ‘신중함’은 ‘기독교 포교’ 문제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고종과 김옥균 사이의 대화 내용을 알 도리는 없지만, 기독교 포교를 공식 승인하지는 않되 전면 금지하지도 않겠다는 ‘방침’이 정해졌던 듯하다. 갑신정변 이후에도 조선 정부의 기독교 포교에 대한 태도는 이 ‘방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날 오후 김옥균이 다시 매클레이의 숙소에 찾아와 학교와 병원을 지어주려 먼 길을 온 데 사의를 표하고, 그의 사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힘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했다. 매클레이는 ‘하나님의 신성한 섭리’를 느꼈다.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 9명과 수천 명의 조선인 신도가 목숨을 잃은 지 20년도 안 된 때였다.
그는 자신의 ‘대성공’을 자축하고 조선인들에게 내려질 ‘축복’에 미리 감사했다. 7월8일, 그는 서울을 떠나며 푸트 공사에게 곧 돌아올 테니 지금 자기가 머물고 있는 집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한국 기독교 역사 시원에는 민영익이
일본으로 돌아간 매클레이는 본국의 감리교 해외선교부에 조선에서 교육과 의료 사업을 담당할 선교사를 파송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일본에 있던 조선인 기독교도 이수정과 함께 조선 선교를 위한 성서 번역에 착수했다. 9월8일 푸트 공사로부터 다시 고무적인 편지가 도착했다.
조선 국왕이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학교와 병원 사업을 ‘암암리’에 지원하겠다는 뜻을 재차 밝혔다는 내용이었다. 매클레이에게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의 섭리’는 대개 사람의 범상한 예측을 허용하지 않는 법이다.
9월22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 호러스 앨런이 ‘비정규적’ 절차를 거쳐 서울에 들어왔다. 그는 미국공사관 소속 무급 의사로 임명되었으며 매클레이가 선교 기지로 점찍어둔 집을 차지했다. 12월4일에는 조선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사흘 만에 진압되었고, 매클레이가 파트너로 생각했던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조선 정부의 지원 아래 학교와 병원을 만들어 선교 기지로 삼으려 했던 매클레이의 구상은 뒤틀려버렸다. 그 구상을 실현한 이는 북장로회의 앨런이었다. 미국 감리회의 존 가우처는 기차 안에서 민영익을 만나 조선 선교 계획을 세웠지만, 그 계획을 실현할 수단을 먼저 확보한 것은 민영익을 치료한 북장로회의 앨런이었다. 한국 기독교 역사의 시원에는 민영익이 있었다. ‘신의 섭리’를 사람이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절단 보빙사가 부른 미 감리교 선교 척후대’에서 중국인으로 추정했던 매클레이의 요리사는 일본인이었습니다.
[출처]: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서울 탐사> / 한겨레 21
26. 풋내기 의사가 얻어낸 최초 서양식 국립병원(끝)
로버트 매클레이의 조선 답사 결과를 보고받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가 선교사를 파견하려고 분주히 움직일 즈음, 북장로회도 여러 경로로 조선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를 따라 일본에 갔던 이수정이 자진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 계기였다.
이수정의 세례에 입회했던 북장로회의 G. W. 녹스는 이 경이로운 소식을 본국 선교부에 알리며, 선교부가 경비를 대준다면 자신이 직접 조선을 방문해 선교길을 열겠다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교파’에 한국 선교의 주도권을 빼앗길 것이라는 위협과 함께.
의학 공부 1년6개월에 임상 경험도 없어
1883년 7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먼저 농학자 쓰다 센을 포함한 일본인 신자 두 명을 조선에 파견했다. 그러나 쓰다의 친구이기도 한 이수정이 일본인을 통한 조선 선교에 강경히 반대했을뿐더러, 쓰다도 조선 선교는 시기상조라고 보고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상호 간의 뿌리 깊은 ‘반감’을 확인한 선교본부는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게다가 그들은 조선어가 일본어보다 중국어에 훨씬 더 가깝다고 착각했다.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F. F. 엘린우드는 중국 산둥 지부에 편지를 보내 조선 선교 방안에 대해 숙고해달라고 요청했다. 바로 자원자가 나섰으나 산둥 지부의 일치된 의견은 아니었다.
산둥 지부 선교사들 다수는 ‘조선 선교에 나서는 것보다는 산둥 지부를 튼실하게 꾸리는 일이 더 긴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 선교부는 애써 중국어를 습득한 선교사들을 다시 조선에 보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1884년 2월, 조선 선교 자금을 기부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두 달 뒤, 북장로회는 테네시의 젊은 의사 존 W. 헤런을 조선 선교사로 지명했다. 그러나 헤런은 더 완벽한 ‘의료 선교사’가 되려고 조선행을 미뤘다. 그러는 사이에 예상 밖의 일이 생겼다. 1883년 4월 중국 의료 선교사로 임명된 호러스 뉴턴 앨런이 임지를 변경해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앨런은 오하이오의 웨슬리언대학 신학과와 신시내티의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했지만, 의학을 공부한 기간은 1년6개월에 불과했고 임상 경험도 없었다. 그는 산둥 지부에서 물러날 S. A. D. 헌터의 자리를 채우고 일하며 더 배울 예정이었다. 1883년 10월 앨런이 상하이에 도착한 직후, 그의 아내가 병에 걸렸다. 상하이에 있던 ‘동료 의사’는 따뜻한 상하이에서 겨울을 나는 편이 환자에게 좋을 것이라고 권고했다.
앨런은 그 말에 따랐지만, 이미 선교사들이 충분히 많은 국제도시 상하이에서 풋내기 의료 선교사가 할 일은 없었다.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일자리를 준 것은 마침 상하이에 와 있던 난징 지부 선교사들이었다. 앨런은 아내와 함께 난징으로 이동해 그곳 지부의 일을 도우며 산둥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헌터는 자리를 비워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그에게 상하이에서 사귄 동료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권유했다. 외아문 협판 겸 총세무사 묄렌도르프와 인천 해관 세무사 A. B. 스트리플링에게 전달할 추천서까지 써주었다.
과거 매클레이 안보다 후퇴한 안 제시
복원된 중명전. 미국 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바로 옆에 있다. 이 건물이 들어선 대지가 바로 매클레이가 점찍어둔 곳이자 앨런의 집터였다. 호러스 G. 언더우드, 존 W. 헤런, 찰스 C. 빈턴 등 앨런의 뒤를 이어 서울에 들어온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모두 이 집 주위에 모여 살았다. 전우용 제공
앨런은 본국 선교부에 조선으로 가겠다는 뜻을 밝혔고, 선교부는 그의 임지 변경을 승인했다. 1884년 9월22일, 서울에 들어온 앨런은 먼저 일자리를 찾았다. 미국 공사 루셔스 하우드 푸트는 공사관 ‘무급 의사’ 자리를 주었고, 묄렌도르프는 해관 촉탁 의사 자리를 약속했다.
서울에 서양인 의사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안 이 풋내기 의사가 자신감을 느꼈을지 두려움을 느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중국에는 그의 자리가 없었다. 그는 매클레이가 푸트 공사에게 사달라고 부탁해두었던 바로 그 집을 차지하고 매클레이에게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푸트 공사도 매클레이에게 편지를 보내 이 일 때문에 감리교의 조선 선교 계획에 차질은 없을 것이라고 변명했다. 푸트 자신이 장로교 신자였던데다 이때에는 이미 조선을 떠날 결심을 굳힌 상태여서 선교본부 구입 문제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를 데려오려고 상하이로 돌아갔던 앨런이 서울에 다시 온 것은 양력 10월27일이었고, 한 달쯤 뒤인 12월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서울과 제물포를 오가며 소일하던 앨런은 그날 밤 묄렌도르프에게서 급히 자기 집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국왕의 총신이자 왕후의 조카인 민영익이 사경을 헤매는 중에 몇몇 한의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우정국 낙성식에 참석했던 묄렌도르프가 칼에 맞은 민영익을 자기 집으로 데려온 뒤 부른 한의들이었으나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 풋내기 젊은 의사가 아는 치료법도 많지 않았으나, 한의학에는 아예 외과가 없었다.
다행인지 요행인지 민영익은 소생했고, 그는 일약 신의(神醫)가 되었다. 민영익은 ‘우정의 표시’로 그에게 10만냥을 주었다. 푸트가 미국 공사관을 설치하려고 지급한 돈이 2만냥이었으니, 당당한 저택 10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민영익이 나았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은 앨런을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물론 고종은 몇 달 전에 매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해 제안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비록 ‘역적질’을 하다 일본으로 도망쳤지만, ‘무료로’ 서울에서 학교와 병원 사업을 하겠다던 매클레이의 제안은 고종에게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더구나 서양의학의 신통함은 민영익이 나음으로써 이미 입증된 바였다. 미국의 의술과 의료 사정에 대한 의례적인 질의응답이 오간 뒤, 앨런은 과거 매클레이가 했던 제안보다 후퇴한 안을 제시했다. 국왕이 병원을 지어주면 자기는 무료로 진료할 것이며 함께 일할 동료들을 더 데려올 수 있다고.
미국 개신교 선교기지 만들어져
상황을 분명히 정리하면, 고종은 ‘부탁’하지 않았다. 왕은 지시하고 허락할 뿐 누구에게도 부탁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앨런이 병원을 ‘지어주면’ 무료로 봉사하겠다고 부탁했고, 고종은 절차를 밟아 정식으로 신청하라는 단서를 붙여 허락했다.
‘역적’ 홍영식의 집이 병원으로 개조됐고, 뒤이어 이 병원에 미국 감리회와 북장로회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조선의 서양식 국립병원이자 미국의 개신교 선교기지인 제중원이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