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의 신작 <해안선>을 보며 다소 혼란된 마음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어줍잖은 결론은 나왔는데, 우선 김기덕의 과잉으로 넘치는 뚝심의 세계는 그 자체로 존경을 받을 만 하다는 것. 따져보면 영화는 황당한 설정과 비논리성으로 점철되지만, 이 모든 문제점을 간단하게 정면돌파하는 김기덕의 강력한 에너지는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여전히 플롯이나 영상 언어의 표현 방식은 거칠고 때로는 서툴지만, 따져보면 나름대로 주제 의식과 문제 제기 능력도 출중한 편이다. 데이빗 린치(David Lynch)의 '린치 월드'에 대해 이제는 뭐라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듯, 김기덕에 대해서도 머지않아 그런 순간이 올 줄로 믿는다. 리얼리티의 틀을 슬쩍 빌려 결국엔 그 틀을 엽기적으로 뛰어넘는 김기덕 감독의 재능은, 세계 어디서도 보기 드문 희한한 능력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섬>과 <수취인 불명>을 적절히 섞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해안선>의 '방점'은 뭐니뭐니 해도 장동건이다. 이는 꼭 <해안선>에서 장동건의 연기가 탁월했다기 보다는(오히려, 그동안 반듯하고 건실한 역할을 주로 맡았던 김정학과 코믹 양아치 연기의 달인 유해진의 일대 변신이 훨씬 더 흥미로왔다. '김기덕 걸(girl)'의 새로운 경지를 구축한 박지아의 연기도 인상적이고), 그의 존재 자체가 <해안선>을 놓고 보았을 때 특기할 만했다는 뜻이다. 장동건 같은 아쉬울 것 없는 대스타가 저예산 엽기 영화의 간판 주자 김기덕과 함께 작업을 했다는 것은, 어떤 '전략'의 산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실은 상당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고착된 이미지'의 함정에 빠질 우려가 높은 것이다.
실제로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중 현재 꾸준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그동안 김기덕 감독의 고정 파트너였던 조재현은 요행히 TV 드라마 <피아노>의 성공으로 스타의 위치에 올랐고, <수취인 불명>에 등장했던 양동근이 요즘 연기파로 명성을 얻고 있는 정도다(현재 애매모호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주진모의 경우는 논외로 치자). 이는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출연 배우들이 무명/신인내지는 조연급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일차적으로 작용하지만, 아무래도 고약한 악취미로 점철된 김기덕의 영화에 등장한 이후 '선입견'이라는 굴레를 얻게 된 탓이 크다.
'김기덕 걸'들의 경우는 보다 상황이 심각하다. 온갖 변태적인 연기를 도맡아야 했던 김기덕 영화의 주연급 여배우들은 영화의 개봉과 동시에 스포트라이트를 조금 받는 듯 하다가 즉시 약발이 다한 존재로 몰락했다.
이러한 배경 탓인가? <해안선>을 유심히 보면 장동건의 연기로부터 '조심스러움'이 묻어나옴을 알 수 있다. 물론 맡은 배역이야 광기로 범벅이 된 막가는 역할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곱게 미친' 연기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정신이 돌아도 폼이 나게 돌았다. 같은 정신병자 역할이라도 <뷰티풀 마인드(A Beautiful Mind)>의 러셀 크로우(Russel Crowe)와 <레드 드래곤(Red Dragon)>의 랄프 파인스(Ralph Fiennes)가 보여주었던 그런 연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복합성'의 유무다. 자신이 맡은 인물에 캐릭터에 대한 다층적이고도 심도 있는 분석을 토대로 나오는 연기가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감독이 시키는 대로, 또는 그저 본인이 원래부터 갖고있는 감(感)에 따라 표현하는 '일차원적인' 연기인 것이다.
물론 김기덕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부분 단선적인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장동건은 김기덕 영화의 다른 배우들이 자신의 경력에 먹구름을 드리우면서까지 해냈던 '망가짐의 몰두'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장동건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른바 '스타 이미지'가 단단히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장동건은 미남 스타로서의 '자의식'이 거의 없는 편으로 사료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장동건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 배우다. 배우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배우는 연기에 일차적인 존재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존재다. 배우가 자신의 인기에 연연하여 연기의 세계를 소홀히 하면, 그것은 단점이 된다. 그렇다면 장점은 단점의 반대 의미, 즉 '연기'에 일차적인 존재 의의를 두는 경우를 말한다. 불행히도, 현재 우리에게 잘 알려진(즉 '인기'가 있는) 배우들 중 대다수가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욱 두드러진 듯 싶다. 즉 주요 관심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신의 연기 혼을 발휘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저 CF에 출연하며 얼마를 받아낼 것인가에 더욱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장동건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물론 그는 CF 출연도 잦고, 그 아름다운 용모로부터 형성된 이미지로 말미암아 '핀업 보이'로서의 가치로 훨씬 강력한 평가를 받고있지만, 통상적인 '스타'의 길과는 다소 어긋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즉, 그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연기'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심은하와 더불어 장동건은 여느 스타들과는 달리 인기와 여론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않는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렇다고 심은하처럼 고도의 전략이 엿보이지도 않고, 나름대로 순수한 의도로 보이는 것이다.
이는 장동건의 성품이 상당히 선하다는 점에 기인한다. 잘 생긴 외모를 커다란 밑천으로 연예계에 뛰어들긴 했는데, 다른 동료들처럼 영악하게 처신하기에는 자신이 가진 기질에 잘 맞지 않다 보니, 결국 택하고 걸어가야 할 길은 '연기' 쪽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장동건이 연기의 길을 올곧게 걷기에는 몇가지 장애가 존재한다. 으뜸가는 문제점으로는 아무래도 그는 '미남 배우'라는 것이다. 이 세상엔 꽃미남과 꽃미녀에 대한 칭송으로 가득하지만, 사실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는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일종의 '장애'내지는 '저주'로 작용하는 법이다. 그 이유를 심도 있게 논하기엔 이 지면이 너무 짧으니, 영화 쪽으로 범위를 한정시켜보자.
단적으로 말해서, 최근 몇 년간 커다란 흥행 성공을 거둔 한국 영화들 중에서 '꽃미남'이 단독 주연으로 등장한 영화가 과연 몇 편이나 되는가? 정우성의 <비트>와 <태양은 없다>, 이병헌이 주연한 <번지 점프를 하다> 정도? 특히 <번지 점프…>의 경우는, 이병헌의 매력 때문이라기 보다는(그렇다면 <중독>도 성공을 거두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시나리오의 탁월함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한석규가 있다고? 한석규의 위대함은, 결코 그의 외모가 미남과는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미남 스타의 전형적인 행로를 걷고 있다는 점이다(한석규가 발휘하는 전략은 할리우드의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와 톰 크루즈(Tom Cruise)로부터나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는 최고난도의 처세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미남 배우는 왜 영화에서 성공을 거둘 수 없는가? 기본적으로 미남 배우들은 연기가 안되기 때문이다. 물론 왕년에 신성일처럼 별다른 연기 테크닉을 보이지 않고도 신화적인 성공을 거둔 행복한 시절이 있기는 했다. 그때는 '민도'의 문제도 있었고, 영화가 유일한 오락매체였던 시대환경도 있었고, 또 그 당시에도 진정으로 위대한 배우들은 김승호나 허장강처럼 '연기파'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미남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만방에 과시할 수단이 꼭 영화 뿐인 시대가 아닌 것이다. CF가 있고, TV 드라마가 있다. CF가 엔터테인먼트계의 '리틀 리그'라면 TV 드라마나 쇼프로그램은 '마이너리그', 영화는 단연 '메이저리그'다. 즉 아무나 영화판에서 성가를 높일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이유가 뭘까? 아무리 산업화가 되었다 해도 영화는 기본적으로 '예술'이며, 더구나 돈을 지불하고 감상하는 예술 작품이기 때문이다. 비록 7,000원이 오늘날 물가 수준으로 보았을 때 결코 큰 액수는 아니지만, 아무튼 관객이 입장료를 지불함으로써 시간과 돈의 소비라는 '경제 활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영화는 희소 가치의 산물인 것이다. 즉 '본전을 최대한 뽑으려는' 태도가 관객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객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영화는 재미있거나 감동을 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된다. 의무를 결여하게 되면 영화는 당연히 '실패'라는 수순을 밟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미와 감동은 어디서 나오는가? 당연히 스토리(시나리오)와 연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감독의 연출력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설정한 "미남들은 연기를 못한다"가 사실일 경우, 당연히 미남이 출연하는 영화는 성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짜로 얼마든지 TV나 잡지, 옥외 광고판에서 꽃미남들을 실컷 감상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영화에서까지 그들을 보아야 하는가?
그럼 왜 미남 배우들은 연기를 못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애당초 그들의 기본 자세가 글렀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얼굴과 몸매를 밑천으로 연예계에 등장한 것이지, '연기' 그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상정한 게 아니다. 그런 목표를 설정한 이들은 대학로를 중심으로 너저분한 연극 무대에서 곤궁에 떨며 굴러먹고 있다. 헝그리 정신도 없고, 더구나 연기에 대한 열정도 미미한 상태에서 무슨 '자세'가 나오겠는가? 그저 '그림'만 나올 뿐이다.
그렇다면 '미녀 배우'의 경우는? 그건 상황이 좀 다르다. 지금까지 수많은 경우를 보았듯, 미녀 스타로 열렬한 사랑을 받은 여배우들이 나중에는 훌륭한 연기도 펼치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남성과 여성의 기본적인 속성의 차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감정이 풍부하고 섬세하나, 남성은 그렇지가 못하다. 더구나 여성의 기본적인 관심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내면적'인 영역이며(미용과 패션이 여성의 주된 영역임을 상기하라), 남성의 경우는 바깥 세계로 향한 외부 영역인 것이다. 어느 쪽이 연기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실 웬만한 여성은 일정 훈련을 받으면 거의 다 그럭저럭 쓸만한 연기자가 될 수 있지만, 남성은 재능과 열의를 타고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본다.
단적으로, 결혼 직전에 찍는 예비 부부의 야외 사진에서 신랑과 신부 중 어느 쪽의 표정이 자연스러운가를 따져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자의 연기력'이란, 여자를 꼬실 때 혹은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릴 때나 마지못해 발휘되는 것이다. 단 요리 분야와 마찬가지로, 일단 '대가(大家)'의 경지에 들어가면 남자 배우가 여배우를 압도하는 면이 있기는 하다. 즉 일단 남자 배우가 연기파라는 평판을 얻어내면 그때 형성된 선입견은 향후 어지간해서는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배우의 경우는 명연기자라는 상찬을 얻더라도 그 기복이 심하다.
위에서 말한 대전제를 바탕으로, 이제부턴 논의를 장동건으로 한정시켜보자. 영화의 경우를 보았을 때, 장동건의 '가능성'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였다. 그 전에 찍은 영화들(<패자부활전>(1997)과 <홀리데이 인 서울>(1997))로부터 장동건의 영화배우로서의 자질을 발견한 이는 없었다. 영화를 자신의 경력의 화려한 꽃바구니 정도로 여겼던 미남 스타에게,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이룬 미학적 성취와 작품성은 예기치 못한 기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즉 CF와 드라마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안방극장의 찰나적인 쾌락보다는, '영속적인 예술성'이 최대 강점인 영화 매체가 주는 의의가 훨씬 커다란 비중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연기자'로서 장동건의 성가는 엄청난 히트작 <친구>(2001)로 만개 되었다. "이제 장동건이 진정한 연기자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찬사를 얻은 <친구>로, 장동건은 여타 꽃미남 배우들과는 구분되는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아닌게 아니라 <친구>에서 보여준 장동건의 연기 패턴은 통상적으로 미남 배우들이 보여주는 고정적인 스타일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즉 장동건이 맡은 동수는 결코 멜로적인 인물이 아니며(유독 사랑 연기에 눈에 띄는 어색함을 보여주는 게 장동건의 특징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인물 관계에 있어 균열과 갈등을 몰고 오는 '악역'이다. 즉 <친구> 전체에 드리워져 있는 '숙명론'적인 세계관을 고착화시키는 장본인으로 활약하는 것이다. 동수의 부릅뜬 눈(장동건의 눈이 워낙 큰 탓에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과 약간 비스듬한 각도의 얼굴은 이러한 주제 의식을 부각시키는 아이콘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친구>라는 영화 자체가 장동건의 상황과 처지에 대해 언급하는 일종의 우화가 아닐까. 장동건의 연기가 이전 출연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게 사실이지만, <친구> 영화 전체, 즉 다른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놓고 보았을 때는 '탑 클래스'에 속한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유오성은 말할 것도 없고 등장하는 배우들 모두가 자신이 지닌 능력 이상의 연기력을 발휘하는 <친구>에서(배우들의 연기력과 문학적 감수성 풍부하고 호소력 강한 각본이 <친구>를 역사 상 최고의 흥행작으로 등극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기량'만을 따져봤을 때 장동건의 연기는 앞서 <해안선>의 경우처럼 '단선적'이다. '부릅뜬 눈과 약간 비스듬한 각도의 얼굴'이 워낙 강렬한 이미지를 발산하기에 판단을 흐리게 해서 그렇지, 여기서 장동건의 연기는 그게 전부인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비유가 탄생한다. 즉 <친구>의 타이틀 롤을 맡은 네 명의 인물은 각각 오늘날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배우들의 주요 유형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유오성(준석)은 '연기파 주연 배우'의 상징으로, 장동건(동수)은 '미남 배우'의 간판으로, 정운택(중호)은 '코믹 감초 조연 배우'의 대표로, 서태화(상택)는 '관찰자적 서포터'로서 각각의 역할을 부여 받았다. 그 결과는? '미남 배우'가 아무리 용을 써봤자, '연기파 배우'의 위압적인 그늘에 가려 2등(시다바리) 밖에 할 수 없다는 결론인 것이다.
그럼 '시다바리'가 어쩔 수 없는 여건으로 말미암아 '짱' 노릇을 해야 한다면? <2009 로스트 메모리즈>(2002)에 그 해답이 있다. 어떻게 같은 배우가 이렇게 다른 연기를 보일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의 장동건은 밋밋함 그 자체로 영화를 이끌어 간다. 줄거리 상 복잡 미묘한 갈등의 연기를 보여줄 부분도 꽤 많았을 텐데, 그런 고난도의 연기는 커녕 블록버스터급 액션 영화에서 요구되는 카리스마적 에너지도 제로다. <친구>에서 보여준 강렬함은 단발로 그친 이벤트였던 것일까? 영화를 찍을 때 장동건의 컨디션이 안 좋았을까? 하지만 그의 필르모그래피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러한 밋밋한 연기가 사실은 장동건에게 있어 '정상'의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의구심은 다음 작품인 <해안선>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긴 했다.
장동건이 연기자로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호평을 얻어낸 영화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친구>, 그리고 <해안선>은 모두 '감독의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즉 이 세 영화는 작심하고 돈을 벌어보겠다는 기획성 이벤트가 아니라, 감독의 개성과 미학관이 충실히 반영된 '작가 영화'인 것이다(<친구>의 경우는 이러한 시각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영화의 첫 발상과 최종 각본 모두 곽경택 감독 자신에게서 나왔으며 한창 제작 중일 때만 해도 이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리라 예상한 이가 적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어찌 보면 장동건은 '백지'의 상태에 있는 배우다. 그의 내면에 있는 하얀 종이는 그려넣는 연출자의 역량에 따라 실로 다채로운 결과를 낳는다. 감독의 재능에 따라 영화 전체의 성공 요인으로 귀결 짓기도 하고, 변명할 길이 없는 졸작의 핵심 포인트로 작용하기도 한다. 장동건이라는 캐릭터 자체는 사실 평범하고 맨숭맨숭하기까지 하지만, 다행히 그 밋밋함의 농도는 순한 편이다. 앞으로 본인의 노력이 좀더 배가된다면 훨씬 나은 연기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아직은 감독의 역량에 대부분이 달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동건이 곧 촬영에 들어갈 강제규 감독의 대작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해서는 걱정이 앞선다. 원빈이라는 꽃미남 스타와 함께 이룬 '투 톱 시스템'은 앞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론에 비추어 볼 때, 명백한 패착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쉬리>를 능가하겠다는 물량공세적 야심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가운데, 과연 강제규 감독에게 배우들을 세심하게 연기 지도할 시간이 충분히 있겠는가?
<쉬리>의 주요 배우들은 모두 다('위장 미남'인 한석규를 포함하여) 연기파였다는데 유의하자. 앞으로 무슨 대가를 치루더라도 연기파의 타이틀을 확실히 써보겠다고 진심으로 작정했다면, 장동건은 다음 출연 작품의 감독으로 이창동이나 홍상수를 초빙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