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윤씨 남원윤씨 신령윤씨 의성윤씨 파평윤씨.. 모두 파평윤씨로 합본되었다 한다.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폐비 윤씨 (廢妃 尹氏, 1445년? ~ 1482년)는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로,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계비이자, 제10대 왕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본관은 함안이다.
[편집] 생애
폐비 윤씨는 성종보다 12살 위였고, 시어머니인 소혜왕후와는 8살 차이가 난다고 하나, 그 생년은 정확하지 않다. 처음에 입궐하고 성종의 후궁이 되었을 때,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왕대비 인수대비(소혜왕후)를 잘 봉양하여 두 사람의 총애를 받았고 1474년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숙의의 위치에 있던 그녀가 왕비가 되었다. 2년 뒤인 1476년에 연산군을 낳아 중전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 성종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또한,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왕대비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사 1479년 6월 2일에 폐비가 되고 말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비가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두고저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엄숙의, 정숙용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8월 16일, 결국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로인해 한명회 ,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 되거나 유배보내진다. 하지만 실제 역사속의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에 추숭되고, 그녀의 묘는 회릉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어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내린 관작은 모두 폐위되어 원상복귀되었고, 회릉 역시 폐비윤씨지묘(회묘)로 격하되었다.
※폐비윤씨지묘 (회묘)의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元新洞)의 서삼릉 경내에 위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