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연(朱笑燕, 1968- ) 주소연 명창은 전남 고흥군에 본적을 두었고,
1968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으며 지금은 광주에 살면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지역의 젊은 국악인이다. 주명창이 판소리에 처음 국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초등학교 4학년때 가야금을 배우면서부터인데, 박정례 명인으로부터 산조와 가야금 병창을 익혔다고 한다. 산조는 판소리의 한
갈래나 다름없는 기악적 표현이요, 가야금병창은 판소리의 한 갈래이니, 주명창은 산조와 가야금 병창을 통해서 일찌기 판소리의 기본음율을 익혔던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를 시작할 결심을 하게되었는데, 아무래도 예로부터 성악을 최고로 쳐 왔고, 또 성악에
자신이 있었던 주명창은 판소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중학교 1학년 때부터서는 순천에서 서울로 오가면서 남해성 명창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우게 되었으며, 또한 중학교 3학년 즈음에 광주로 옮아오기전까지 성창렬 명창으로부터도 판소리를 익혔다. 일찍부터 판소리를
익히고 점점 매료된 주 명창은 광주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판소리뿐 아니라 다양한 예능을 익혔다. 명창 한애순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으며 김영옥
명인으로부터는 민요를 배웠다. 이때 한애순 명창으로부터 흥보가 한바탕을 거의 다 공부하였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보성 소리의 명창 조상현 선생에게 심청가를 사사하였다고 한다. 대학은 스승을 따라 전남대학교 국악과에 진학하였다. 스승 조상현
명창은 전남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었고, 어려서부터 스승으로 모시고 판소리 배우고 익혔던 스승을 바야흐로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다시 만나 본격적인
소리 수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93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 조상현 명창의 소리를 이어받아 그 이수자가 되었다.
심청가뿐만 아니라 수궁가 춘향가 등의 보성소리도 전 바탕을 완전하게 전수받았다고 한다. 오직 판소리 한길로 매진하며 줄곧 자신의 소리
세계를 넓혀온 주명창은 일본 대사관 초청 순회공연(동경 외 7개소) 및 미국 샌안토니오 공연 등의 수많은 공연들과, 다수의 강사활동 등 판소리
보급활동에 있어서 다양한 활동경력을 보여주었으며 화려한 수상경력은 이와같은 정열적인 활동의 수확물들이었다. 몇 가지만 들어본다면,
광주전국판소리경연대회 일반부 최우수상 수상, 해남전국판소리경연대회 특장부 대상(문화부장관상), 보성 전국판소리경연대회 명창부 우수상, 고흥
전국판소리경연대회 명창부 우수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4년에는 2004년 광주 임방울 국악대제전 명창부 대상을 수상함으로서 명창의 대열에
올라섰다. 주소연 명창이 고창에 온 것은 2003년이었다. 고창에 오게 된 동기는 아무래도 고창이 전북과 전남을 잇는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 동리국악당 담당 조용호 계장은 “신재효 선생 시절 이후로 동렐┝資�아우르는 고창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일이며, 이로서
고창은 전주의 서편제와 보성소리를 아우르는 의미심장한 판소리적 양상을 갖게 되었다고” 역설한다. 주명창은 개인적인 문제와 여러 사정으로
2005년 고창을 떠나게 되기까지 5-60여명에 이르는 수강생들을 지도하며 보성소리를 고창에 불어 넣었다. 그녀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늘 중점을
두는 부분은 국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자신의 소리 속에 불어 넣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도 아직 정복하지 못한 보성소리 적벽가와
김수연제 흥보가를 배우며 이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그녀는 한번 소리의 세계를 진정으로 맛본 사람이라면 소리의 세계를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며,
천부적인 재능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앞으로도 이러한 열정으로 고창을 왕래하면서
기회있을 때마다 판소리 지원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코리아신문 06.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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