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기
구서기
임선생
한씨
처녀
솔매집 남
솔매집 여
한의원
노인
청년
황석구
아이
감나무집
머슴
당숙
망령
# 면사무소
윤서기와 구서기
윤서기: 자네 결근계 하나 만들어 줄 텐가.
구서기: 뭘 만들어?
윤서기: (결근계 초안을 읽는다) 이거, 내 결근계 초안이네.
길가에 암장된 처녀가 야밤에 길가는 사람 불러잡는 바람에
절도, 이후 경끼로 눕게 되어 42일간 출근이 불가하였기로
결근을 제출하나이다.
구서기: 그거 제출할 셈인가?
윤서기: 꾸며서라도 달리 만들기 전에는 도리없네. 실지가
그렇구만.
그렁게 도와줘야겄어, 자네.
구서기: 어떻게 된 일이여. 자초지종을 들어나 보드라고.
윤서기: (잠시) 그날 일진이 좀 사납드만. 간호병 제대
돌팔이가 사람 배를 째대니 더 놔둘 수 없드만그려. 그
사람 농고 동창인디, 고발조치했구만. 고발장 읍내서로
보내고, 담배나 한대 피우고 퇴근하지 하고 있는데 열너덧
살이 난 계집애가 앞에 와 서드만, 도립병원 진단서
내밀더니 즈이 언니 사망신고하러 왔디야. 호적계 자리는
비었고 어디서 왔냔게 문장리여. 멀리서 왔다고 처리해
줬지. 열 아홉 살 페렴이드만. 내 참.
구서기: 그 처년가? 자네 이름을 불러대드라면서.
윤서기: (고개를 젓는다) 뭔 소리가 들렸던가도 모르겠어,
정신 없드란게. 물속에 처박힌 것모양 멍먹하고.
구서기: 아니여, 그러구 건너 뛰었다간 뭔 소린지 모르네.
그래서, 사망신고 처리해 주고 나서.
윤서기: 내산 집서 술 좀 했구만. 이래저래 심난하데, 넘
고자질 첨해본 것이고 그것으로 몇 사람 다치겠고, 술 좀
했어. 나중에 내산댁이 짐되니 자전거 두고 가라고
그래쌓드만. 그것 없으면 호젓한게 끌고 나섰지. 밤새
걸었나 싶더만 경우 넉배재 올라섰데. (곁에 세웠던 자전거
끌고 나선다. 구서기 쫓는다)
# 넉배재
(국민학교 임선생이 자전거 끌고 마주 나타난다. 임선생은
손전등을 들었다. 구서기는 옆으로 비켜선다. 윤서기와 임선생
자전거 양켠에 세우고)
임선생: 이제 가나, 늦었네야.
윤서기: 숙직이라우?
임선생: 큰집이 제사라, 거기두 오늘 제지내겄구만.
윤서기: 오늘이 여드레라우, 깜박했네.
임선생: (담배에 불당기고 쭈그려 앉는다) 읍내 등기소 자리,
돌 실어다 놨다드만, 홍성이서 구했다던가, 여하간
꺼멓디야.
윤서기: 꺼매라우, 오석인가 보네. 그럼, 대리석으로 말들 해
쌓드만.
임선생: 돌이 좋디야. 꺼믄 것이 추모비로 무단도 하고.
윤서기: 해 넘기기 전에는 스겄구만요.
임선생: 돌 고르는디 3년 걸렸는디. (담배 물고 자전거 끌고
나선다) 서릴 내릴란가 안개가 심헌디, 저 아래, 돌다리
겟막에 붙은 켜 있드만. 밤길 조심허소.
윤서기: 예, 내려가시유. (임선생 나간다)
구서기: 등기소에다 뭘 세우나?
윤서기: 추모비 있잖은가, 모르던가? 잉, 인공 때 읍내
등기소, 거기가 전이도 등기소 건물이 있었다네. 그 등기소
건물에 반동분자라고, 이 군에서 이름 알려진 어른들 백
스무 일곱 분 갇혀 있었디야. 헌디 국군이 밀고 올라온게
쫓겨가는 마당에, 막판에 다급한게. 그 쳐죽일 놈들이
불싸질러 버렸디야. 그런게 오늘밤 제사 지내는 집이 백
가구가 넘느만. 아니, 오늘밤이 아니구먼, 그날 밤이지.
아이고 이러다가는 날짜 때문에 정신 없겠구만, 이렇게
하세. 내 그날 헌 대로 헐 팅게 날짜는 따지지 마소.
오늘밤에 사고났다고 여기소.
구서기: 그려, 오늘밤이 사고났어. 그래서?
윤서기: 묘관이서 한숨 자볼까도 했구만, 예산서 당숙되는
어른 내려와갖고 사금피리로 얼굴 그어대고 집안 뒤집어놀
생각한게 그도 안돼겠네. (고개 젓는다) 등기소 불타던 날,
이 양반도 거기 끼었었구만. 거기서 꼭 두 양반
살아났다는디, 이 양반이 그 하나여. 근게 내 부친이 이
양반 형님 뻘되느만. 형님 같이 못 끄집어내고 혼자 살아
나왔다고 면목없다고 제삿날이면 내려와서 사랑방 차지하고
사금파리로 얼굴을 긋네. (이마 주름따라 가로 긋는다)
밭고랑 파듯이 층층이 그어. 그러니 피가 얼굴에. (고개
젓고 자전거 밀고 나선다) 여기서 내려가면 저쪽
신틀매고개까지 오리가 좀 먼디, 집이 두어 채밖에 없구만.
솔매 쪽으로 깊에 들어가서 문둥이 집이 한 채 있고 생배로
넘어가는 삼거리 채 못 가서, 거위를 기른다고
거위집이라고 하는디. 한씨여, 사람은 생불이구만,
안사람이 간질이 심해갖고, 그래 남뵈기 사납다고 외채로
지낸 것이 이십 년 돼가지, 아마. 집뒤로 뭘 좀 심어
보겠다고, 그래 개간 허가내는 일 좀 거들어 줬구만. 내가
토지를 어디서 떠다준 줄 아는 모양이여. 나보고 절하는
것이 이 사람 일과요, 저보소. 야밤인디 목 빼물고 섰어.
# 거위집
(탱자 울타리 너머로 상체를 내놓고 서있던 한씨가 울타리를
돌아나온다. 도시락만한 꾸러미를 들었다. 그것을 윤서기의
자전거 뒷편에 묶는다. 구서기 한켠으로 비켜 선다.)
윤서기: 뭐라우?
한씨: 더덕 좀 캐봤구만. 잘아서 젯상에 오르지도 못하겠네.
윤서기: 어허 뇌물받았다고 나 쫓겨나.
한씨: (소매끝에 접어두었던 쪽지 건넨다) 아께 집애들일
읽어는 주드만, 시상이 엄두가 나야지. 어린 것이. (성냥불
당겨 준다. 윤서기 훑어본다)
소녀 소리: 날씨 맑음. 감자 두 개 썰어 지영이 공작숙제
만들어 줬다. 오후반 애들이 지나갔다. 읍내 쪽에서
기척소리가 들려온다. 올라가는 기차? 나는 어느 기차를
타게 되나? 모른다.
한씨: 두째여. 열 네 살 먹은 것인디.
윤서기: 언제 나갔나?
한씨: 점심 지나구서 안 뵈드래. 지 말대로 찰 탔으면 대처로
간 모양이구만, 시상이 이것이, 이것이 먼 변이여.
윤서기: 대처에 누가 있나?
한씨: 누가 있어. 읍내 장이도 한번 안 가본 애여.
윤서기: 이거 큰애가 줍디여? 뭘 말 없고?
한씨: 질질 짜기만 하지.
윤서기: 내가 좀 보드라고.
한씨: (담너머로) 야어, 거깄냐? (울안으로 들어간다)
윤서기: 일단 합의해 줘야 할 게 있네. 큰애하고 하는 소리는
넘한테 건내지 마세. 그냥 참고만 해주게.
(구서기 끄덕인다. 갑자기 거위 우는 소리 울안에서 한참
소란하다. 거위를 모느라고 두런거리는 한씨 소리와 함께
뒤안으로 멀어져 간 스무살 넘어 보이는 처녀가 나온다. 궁색한
차림새보다 얼굴을 돌리거나 숙이지 않는 거동이 먼저 눈에
띤다. 글개서 저능한 부류들에게서 감지되는 무감, 고집을 지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처녀의 말은 때로 윤서기를 개의치
않고 하는 혼잣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처녀: (잠시) 동생은 지가 내보냈이유.
윤서기: 내보내다니?
처녀: 작년에 갓난애가 들어왔구만유. 앞집에서.
윤서기: 앞집 문둥이한티서?
처녀: 그애가 막내동생으로 입적되는 걸 보고, 동생이 여간
아니게 놀랬던 모양이라우. 지난달에, 하루는 자기도
앞집이서 왔냐고 내게 묻더만유.
윤서기: 앞집에서 온 애가 또 있나?
처녀: (잠시, 끄덕인다) 머슴애, 올해 학교 들어갔구만요.
머슴애 입적할 땐 동생도 어렸은게 몰랐지유. 입적이 뭔지.
윤서기: 어쨌나? 저도 앞집에서 온 애로 여기는 눈치던가?
처녀: 앞집이 여기서 보기보단 솔찬히 멀어라우. 그런디, 뭐가
그 집문밖에 힐끔 비치기만 해도 애가 사시나무 떨듯
하는디, 영낙 엄니 간질하듯 그래라우. 밤에 자다 보면 내
얼굴 자꾸 더듬어라우. 지 얼굴 만져보고, 나 노려 볼 때
보믄 무서워서. (흠칫 몸을 떤다) 내가 무서워서
내쫓았구만요. 그애도 그렇게도 못 살 것이고. 못
살아라우.
윤서기: 내쫓으면 어디로 가는가? 어디 가라고 내쫓아, 앞집에
가라고?
처녀: (흠칫 놀랜다. 상체를 쓸어잡고 쪼그려 앉는다. 사레가
걸린 듯 몇 번 헛구역질을 한다) 야가 앞집에 갔을라나?
한번은 거위목을 비틀고 있어라 원. 꿈에 앞집이서 즈이
엄니가 왔는디 거위가 손가락을 문게 쑥 빠지더래요. 그거
내노라고. 엄니 갖다 준다고, 거위 목 잡고.
윤서기: 그애도 앞집서 들여왔나?
처녀: 그애가 나 여섯 살 때 생겼구만유. 모르겄어라우. (문득
빤히 본다) 걔도 데려왔다우?
윤서기: 내가 물어본게.
처녀: 내가유, 꿈이 저 집 불질렀어라우. 꿈이.
윤서기: 얘가 정신이 있나, 지금.
처녀: 빨래를 널 수가 없어라우. 그것이 바람에 날려도 앞집
사람들 본 것모냥 속이 울렁거려서. 불 때다 삭정이만
부러져도 손가락 세어 본다우. 손가락 분질러 땐 줄 알고.
지가 이럴 바에 그 어린 것이 오죽이나 죽겄을 것이요.
불쌍한 것이. 내 저 죽으라고 내쫓은거 아니라우. 저라도
살라고, 멀리 가라고 엄니고 언니고 다 잊으라고.
윤서기: 낫살이 그만하면 세상 물정 알 것이구만 그 어린 것이
어찌 살 것이라고 내쫓아. 한디서 밥이나 빌어먹을 줄
아냐, 밥도 못 먹어.
처녀: 지 팔자가 그런게요.
윤서기: 이 사람 말하는 거 좀 보소. 자네 아버지는 뭘 받고
애들 맡아 기르는가?
처녀: (분해서 몸을 떤다) 집 나간 애는 그런 소리
안했어라우. 애 업어 재우고 씻기고, 지 동생들 끔찍히
알았어라우. 그저 무섭다고 무섬 타다 나간 것이라우.
무서서. (몸을 돌려 들어간다. 거위 우는 소리 두세 번
치솟고 잠잠해진다. 적막)
윤서기: 내친 김에 어쩐다고 솔매쪽으로 들어섰네.
구서기: 문둥이 집으로? 야밤에 거길 가서 어쩐다고?
윤서기: 답답하더만. 애는 어디론가 멀리 가고 있고. (자전거
움직인다. 바퀴 방울소리가 두세 번 튕긴다. 화답하듯 거위
울음소리가 극성맞다가 급히 사그라든다) 알겠나. 요새
부쩍 흔한 것이 가출이여. 보따리 싸갖고 집 나갔다, 그래
버리면 까짓거 고만이구만. 헌디 이 애는 그렇게 안 되데.
쥐뿔도 모르면서 남 배를 쨌다, 그건 고발해 버리면
고만이여. 그런디 이건 달라. 뭐가 이 애를 내쫓았느냐
이거여. 애는 뉘 집 애냐. 이것부터 알아야 쓰것데. 그래
솔매길로 들어섰구만. 마중하듯 워서 내려오드만 그려.
(어둠 속에서, 흔히 어부들이 그렇게 차리듯 허름한 옷위를
비치는 비닐로 푸대처럼 뒤집어쓰고, 허리 묶고, 수건 두른
후에 밀짚모자 눌러쓰고, 감발을 한 솔매 사람이 나타난다.
빨간색 김장용 장갑을 낀 손에 양초 두 갑을 쥐어내민다)
솔매: 오늘 지사란 말 들었시유.
윤서기: (양초 받아 자전거 뒤판에 꽂는다) 요새 지내기가
어떻다우?
솔매: 올이는 겨 주고 겨 바꾸게 생겼구만유. 꼬추는 제법
따겄구만. 배차가 씨가 나빴던가 싹 누래갖고 넘들같지
않을 모양이유. 살펴 가시유. (어둠속으로 비닐옷의
바스락거리를 소리 끌며 사라진다)
구서기: 자네 세도가 정승보다 나 뵈네. 이 야밤에 정승이
지나가기로서니 그 먼디서 초 들고 나오겠는가.
윤서기: 사람이 외로운게.
구서기: 그애 뉘집 애냐 묻는 거 빠쳐먹었네, 자네.
윤서기: 느닷없이 앞에 나선게 말이 안되더만. 좀 엉뚱하다
싶고.
구서기: 맞어. 일은 거위집에서 벌어진 것인데. (자전거
구르며 바퀴방울 튕긴다)
윤서기: 저기 삼거리 칙간에 생배 한의원이 허옇게 앉아
있더만 그려. 등기소 불싸지른 날 돌아가신 어른이여.
구서기: 뭐여?
윤서기: 처음엔 타관사람이 술주정하나 보다 했지. (자전거
뒷받침대 받쳐 세우고 올라 앉는다)
# 삼거리
(왕골 돗자리로 하체만 가릴 수 있게 '디긋'자로 만든 농군들의
간이 뒷간이 보인다. 허연 두루마기 걸친 생전의 한의원이 목만
위 내놓고 앉아 있다. 내리까린 안개로 해서, 언뜻 보면 봇물에
들어앉아 머리만 내놓고 몸 씻는 듯이도 보인다.)
한의원: 불 있는가?
윤서기: (사방 둘러보며 자전거에서 내린다. 기 기울인다. 이
장면에서 윤서기의 움직임에 약간 혼란이 온다. 거리와
방향에서 그러하다)
한의원: 불 있는가?
윤서기: 예?
한의원: 날세, 나.
윤서기: 뉘시유?
한의원: 불 좀 댕기소.
윤서기: 예? 시방 찾느만유. (잔성냥 덜그럭거리며 그어댄다.
담배 물지 않은 한의원 얼굴이 드러나는가 한의원이 훅
불어서 불 끈다. 윤서기 다시 그어 불 켠다. 한의원, 다시
불어 끈다)
윤서기: 아 따궈. 이 양반이 취했나. (손바닥을 문질러댄다)
한의원: 아, 잔성냥을 왜 자꾸 그어대는가. 자네 요새 술이
과하구만. 그러다 나중에 나이들면 애먹네.
윤서기: 불 댕기셨시유? 그럼?
한의원: 자네가 한갱이 세환이 손자 맞는가?
윤서기: 예. 뉘신가유?
한의원: 자전거 타고 앉은게 영낙없구만. 똑같어.
윤서기: 할아버님을 어찌 아신데유?
한의원: 자네 춘부장하고 좀 전에 갈렸네. 그 양반 벌써 집에
갔겄구만. 부지런히 가소. 늦었네야.
윤서기: 두 분께서 어디 댕겨오신다우?
한의원: 읍내장에 칡뿌리 나온게 좀 있는가하고 나갔구만.
칡이라고 손가락 두께가 되는 거 두어 무더기 싸놨는데,
어디 쓰겄드라고. 아, 저 사람 뭐하고 섰디야, 싸게 가소.
윤서기: 예 먼저 가느만유. 살펴 가시유.
한의원: 어이 가. 나도 끝났네.
(윤서기는 자전거 받침 풀고, 마치 개울이라도 건너듯 자전거
들어 어깨에 메고 뒷걸음친다. 한의원은 상체를 세우더니, 바지
올리고 허리디 매고, 두루마기 끝 접어 허리에 묶었던 새끼줄
풀고 제 모습 갖추는데 노인의 깐깐한 성미 잃지 않는다.
뒷간에서 나오더니 곁에 뉘어 있던 몽당 빗자루 세월 왕돗자리
틈새에 꽂고서 반대쪽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윤서기는 자전거
둘러맨 채 이 모양을 보고 서 있다. 안개 속에 묻혀 있던
구서기 모습을 보인다. 이 장면에서 구서기 눈에는 한의원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된다. 윤서기의 기이한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어떤 헛것하고 윤서기가 만났던가보다 짐작할 뿐이다.)
구서기: 내둥 그러고 있었나?
윤서기: (자전거 받쳐 세우고) 그 어른 봤지. 여기서 뒤를
보고. (구서기 고개 젓는다) 말소리도 못 들었나?
구서기: 들었지. 자네 소리만 들리데. 뉘시유, 예. 시방
찾어유. 불댕기셨유. 저쪽은 뭐라시던가?
윤서기: 벌써 가셨어.
구서기: (불길에 손을 쬐보듯, 손 펴서 몽당 빗살에 대본다)
자네 조부님은 왜 나오셨던가? 그 소리도 하드만.
윤서기: 생배벌 건너오려면 이쪽으로 여수뱀이 있잖은가.
할아버님이 읍내 소실집서 밤늦게 오시다가 거기 빠져
돌아가셨구만, 그 얘기 끄내시드만 그려.
구서기: 여수뱀이 그렇게 깊던가?
윤서기: 물차야 가슴 높이여, 그런디 할아버님이 거기 올라
앉아 있고, 물 위로 몸을 세우고서.
구서기: 물 위에 자전거가 서?
윤서기: (자전거 뒷받침대 받쳐 세운다. 받침대를 차고서)
이러구 세워 놨드랴.
구서기: 누가?
윤서기: 모르지. 그저 넘 손에 돌아가신 걸로 짐작만 했고,
흐지부지 됐다드만. 할아버님이 해방 전에 주재소 순검을
지내셨은게 넘 손에 잘못될 수도 있다, 그런 모양이여.
내가 밤에 잘 다닌게 종종 여수뱀을 지나느만, 한번도 뵌
적이 없어. 그런디 이 한의원 말씀은 나 자전거 탄 모양이
생전 할아버님 꼭 닮았디야.
구서기: 자네 종종 헛것을 보나?
윤서기: 오늘이 귀신들 바쁜 날이네야.
구서기: 염소 고아먹게. 한 마리로 그치지 말고 네다섯 마리
축낼 작정하고 대드소.
윤서기: 내가 불댕기고 따겁다고 하던 소리 들었나. 성냥골이
손바닥에 붙여서 그랬거니 했지. 헌데 나중에 본게 할킨
자국이여 그게. (손바닥 펴보인다) 여기, 다 아물었구만.
이것이 그 자국이여.
구서기: 직효네, 염소밖에 없어.
윤서기: 손바닥에 피가 한웅큼 빨갛더란게.
구서기: 헛것이 자주 뵈는 건 안 좋단 말이여. 그런데 큰
봉변하기 전에 염소 잡아. 아, 한밤에 원두막 지키다 헛것
잡는다고 쫒아가서는 저수지에 떠 있드란게. 일렬이 형님이
그러고 죽었어.
윤서기: 어허 실지로 그랬단 말이여. (자전거 끌고 나서니
바퀴 방울이 튕기며 소리낸다)
구서기: 풍류여 저 양반, 요새 누가 저러고 앉았어.
윤서기: 저 양반이 작년 판교장에서 오다가 강도당하고서
그길로 포목점 거뒀구만, 구장 말이는 그 강도놈 언젠가
저기서 저 양반 손에 잡힐 것인게 두고 보라는 거여.
# 돌다리 겟막
(돌다리라고 길이 열 척, 폭 네 척을 넘지 않으나 돌의 부피는
매우 실해서 마치 단일석으로 된 귀부를 어디서 떠다 놓은 듯
고색창연하다. 돌다리 밑에 한켠으로 볏짚으로 엮은, 깔대기
엎어 놓은 것 모냥의 겟막이 있다. 불빛 좇아 논물 거슬러 발로
기어오르는 참게를 주어 담는 식의 게잡이다. 노인은 포목상
행상으로 논마지기나 장만하고 들어낮은 대처물 먹은 촌노
겟막에 나앉는 버릇은 집에 못 붙어 지내는 역마살 탓이겠다.
윤서기는 자전거 세우고 겟막으로 구서기는 돌다리 위에
앉는다.)
(어둠속에서 다리 저는 양조장 황씨가 마치 달구지를 끌 듯
배달용 흰색 플라스틱제 대두 한말들이 술통 두 개를 뒷바퀴
양쪽에 달아 맨 자전거 끌고 씨근거리며 나타난다.)
황씨: 양조장 황석구가 소에 받쳐 똥물에 멱감더라고, 누가
믿겠나. 면이서 이 말 믿을 사람은 나 황석구
빼고는 없을 거구만.네밀헐.
노인: 이거 뭔 냄새여. 아이 어쩌자고 내려온단가. 그냥 가소.
황씨: 뭔 인심이여. 이 모양으로 양조장 가믄 술독 죄 썩어.
노인: 게가 한참 오르는디 갖다 똥물 튀긴단가.
황씨: 저그 선동리 감나무집이 외양간 낀 칙간 안 있습디여.
거그 뒤를 본다고 들어가 앉았구만. 이쪽 왼쪽 발밀이
널판니가 좀 기울었단가 간닥간닥하고 놀드만그려. 그래
바로잡는다고 이러고 엎드리는디 네밀헐, 외양간이 소란
것이 내 궁뎅이가 여물통으로 보였던가 콧등으로 쿡
밀어번져 내 참. 널판지 밑이 저승이라고 까딱했더라면
꺼꾸로 박혀 죽었지. 황석구 건드렸은게 저는 죽었지.
끌어내서는 배지에 대고 냅다 발길질한게 천정 모르고
뛰어오르더만 디립다 내빼데. 소 뛴다고 소리친게. 안채서
우루루 쏟아져 나가더만.
윤서기: 야밤에 날벼락났구만 거그.
황씨: 누구여, 이 사람 여그서 뭘 하고 있디야. 난리는 그집서
옳게 났구만.
윤서기: 우리 소도 뜁디여?
황씨: 그 양반 얼굴이 하이고, 피가 영낙 뭐 껍질 벗겨논 거
모양 시뻘게 가지고 근게 눈구녕 콧구녕 간 데 없이 뻘게
갖고.
(윤서기가 돌다 위 구서기 쪽으로 오르면서 황씨와 노인의
거동은 정지한다)
윤서기: 여기 말이여. 소가 뛰었다는 대목 염두에 둬 두소.
내가 저 소 뛰는 소리 들은 것도 같은게.
구서기: 야밤에 소기 뛰어?
윤서기: 저쪽이 좀 더 가서, 신틀매 골챙이서 그랬구만.
구서기: 저 사람 말이 그냥 풍은 아니네, 그럼.
윤서기: 그게 확실치 않당게.
구서기: 아까 저 노인도 소 얘기를 하데.
윤서기: 잉?
구서기: 저쪽 골챙이서 소를 잡는가 웅성거리더라고 그러더만.
윤서기: 저 사람이 오면서 본 게 산소 떼를 입히는가 몇이서
삽질을 하더랴. 이게 몇일 뒤에 본게. 그 문장리 처녀
암장이라. 이따가 이 사람들 만나네.
(내려서니 황씨 여전한 기세로 말을 잇는다)
황씨: 시상이, 그래 갖고서는 그 앞이 동선네 자당하고 대판
쌈이 벌어졌어. 동선네가 자네 부친 산소 위쪽이다 밭을
일궜다믄서.
윤서기: 올봄이 손바닥만하게 고르더만요.
황씨: 거그 내둥 거름 져냈던 모양이라. 넘 어른 산소
머리맡이다. 뭔 경우냐 이거여. 누구여 그게 자네?
윤서기: 예산 당숙이라우. 아버님 제삿날이면 와서 사금파리로
얼굴 그어라우.
황씨: 그러구 본게 오늘이 등기소 제사네.
노인: 가만 들어보소.
황씨: 뭐라우?
노인: 저쪽 골챙이서 웅성거리잖은가?
황씨: 오면서 본게 떼 입히더만 몇이서.
윤서기: 떼라우? 야밤이.
노인: 도살꾼인 줄 알았네. 영낙.
황씨: 내가 잡을 틴게, 두고 보시요, 잉.
노인: 그 다리 갖고.
황씨: 어허, 이 다리가 수복하믄서 이 면이 첫찌로 들어온
국방군 다리여. 자전거다 태극기 꽂고 들이닥쳤구만.
윤서기: 자전거다 태극기 꽂았어라우.
황씨: 잉. 길산면 면장이 우덜 환영한다고 꽂고 나오셨드만.
내가 우리 성님 무사한냔게 자전거 내주면서 어서 가보란
게여. 앗다 그것 밟고 생배벌 건너 오는디 나락은 막 괘기
시작했지. 저만치 집은 보이지 아이고 죽겠네. 엉엉
울었구만. 나 온다고, 나 살아 온다고 소리 벅벅
질러가면서 울었어. 동네 사람들 몰려 나오고 들어서면서
자전거 막 내렸구만. 아, 뭐가 뜨끔하데. 본게 죽창이라고
통이 한뼘이 넘어. 이만 것이 소뿔모냥 여기 콱
박혔더란게. 아이고, 그거 보면서 기함해 버렸네. (왼쪽
바지 걷어 상처를 보여준다)
윤서기: 첨 듣네. 여태 상이용산 줄 알았구만. 누가 그랬다우?
황씨: 지환이 어른, 그 얼마 뒤 돌아가셨구만.
노인: 야학당 했다고 그놈들헌티 맞어갖고 머릴 상했어. 그때.
황씨: 앗다. 그 양반 돌아가신게 서럽더만. (코를 푼다) 이
사람 뭐 하고 섰디여. 어이 가보소. 잠잠해지는 것 같더만,
모르지 또.
(윤서기 자전거 끌고 나선다. 바퀴 방울 소리)
# 신틀매 골챙이
구서기: 자네 부친이 기억에 있나?
윤서기: 어디가. 그때 내가 돌 조금 넘겼구만.
구서기: 통없네.
윤서기: 그렁게 엄니짝 났어. 예산 당숙보면 그 어른이
부친이거니 헌당게.
구서기: 뭘 하셨던가?
윤서기: 학교 교감 지내셨다더만. 학교 감나무서 떨어져 등
다쳐갖고 학교 댕겨오면 소피통에 발 담그는 게
일과였디야. 왼쪽 등이 오른쪽이 접히셨다더만. 이렇게.
엄니가 흉내는 잘 내시느만 나는 잘 안되네야.
(이때 맞은편 어둠속에 이장꾼들 모습을 보인다. 관 하나에 두
사람, 한 사람은 지게에 관 지었고, 한 사람은 빈 지게다. 뒤에
건만 쓴 청년 뒤따른다. 한켠으로 비켜서 길을 내준다)
윤서기: 저러고 지나간게, 이장꾼인가 보다 했지.
구서기: 저 관은 뭔가?
윤서기: 그렁게, 누구 만나면 둘러칠려고 그랬던거라. 요
모퉁이 돈게, 다 왔어. 자네가 이걸 끌고 가소, 그래야
설명이 쉬워.
(구서기가 자전거 넘겨 받는다)
요 모퉁이 돈게 꼭 여우가 지나가는 줄 알았구만. 앞이
저만치서 뭐가 얼른거리더니 없어졌어. 그러구서 채 숨이나
돌렸나. 뒷판에 거위집 애가 올라 앉어란게.
(어둠 속에서 거위집 둘째 딸애가 나타나 자전거 뒤판에
올라탄다)
구서기: 아이고, 이것이 뭐여? 이 애가 여기서 나타나나?
윤서기: 내가 겨우 정신이 들어갖고 물어본게,
해떨어지면서부터 저 위 묘판에 숨어 있었디야. 누가
찾더라도 거기는 무서워 못올 줄로 알고 내둥 거기
있었디야.
(아이는 마치 현장설명을 위한 소품처럼, 남의 일 대신해 주는
아이처럼 미동도 않고 앉아 있다. 경악의 상태에서 굳어 버린
얼굴이다. 이 아이에게서 말을 듣기까지 윤서기로서는 대단한
인내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구서기: 역에는 안 가고?
윤서기: 겁나서.
구서기: 집으로 가지.
윤서기: 거기는 무섭고.
구서기: 어쩌겠다던가?
윤서기: 저러구 떨구만 있어. 어린 것이 혼자서 묘판에
있었단게 어련했을라고. 자전거 소리가 난게, 즈이
선생이나 면서기겠거니 하고 뛰어내려온 거라. 무턱대고
굴러내린 것이여. 달랬지. 달래갖고 집에 가자고 자전거
돌렸네. 돌리소.
(구서기는 아이를 뒷판에 태운 채로 자전거 돌려 세운다.
아이에게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똑바로 주시한다)
윤서기: 맘을 놓게 하느라고 촛불을 켜서 앞바퀴에 매달았지.
불 켜소. 두 개.
(구서기는 자전거 뒷받침대를 받쳐 세워놓고 솔매 문둥이에게서
받은 양초갑에서 초를 꺼낸다. 윤서기가 빈닐가방에서 꺼낸
종이로 겉을 말아 불 당긴다. 두 개 초를 앞바퀴의 양쪽
가늠대에 초 몸통을 앞쪽으로 해서 지푸라기로 미끄러맨다.
불꽃이 매우 선정적으로 흔들린다. 아이가 불꽃에 넋을 잃은 듯
보고 있다)
윤서기: 내가 윤서기라고 알겠느냔게 끄덕이더만. 그래
아버지한테는 내가 나서서 잘 말해줄 것인게 맘놓으라고.
그러구 애 맘 돌린다고 그 태극기 꽂은 자전거 얘기를
했네.
옛날에 커다란 싸움이 있었는데 국방군 아저씨가 한 분
싸움터에서 이기고 돌아오는데, 양쪽에 태극기 꽂고
휘날리면서 생배벌 달려왔단다. 그러고 소리쳤다더라. 나
왔어라우. 나 살아왔이유. 태극기 없은게 너는 지금 촛불
켜고 달리는구나. 소리질러 보거라. 나 왔어라우. 나
왔어라우.
(이때 아이가 외마디 소리 지르면서 자전거에서 뛰어내리더니
자전거 뒷판을 잡고 줄당기듯이 뒤로 잡아끈다. 앞을 가리키며
겁에 질린 외마디 소리 지른다. 구서기와 자전거가 꼬여서
쓰러진다. 아이는 급히 어둠속으로 내뺀다)
구서기: 어딜 가나? 저 애가 왜 저러나?
윤서기: 애가 내 허리를 잡더니 거기서 누가 온다는 거여.
들어보니 아무 기척도 없어. 그런디 애는 자꾸 온디야.
그런게 자전거 돌려서 내빼자는 거여. 그래 잡고 달래는디
내 손 물어 풀고 내빼는 거여. 그래 거기 서라고 자전거
돌리는데 저 사람이 앞에 나서.
(아이가 나간 반대쪽에서 비닐옷 소리내며 솔매의 문둥이가
전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윤서기: 직감으로 짚히는 데가 있데. 그래 어딜 가느냐고
막아섰지. 막아서게.
(한켠으로 비켜선다. 구서기, 막아서며 윤서기 대신을 한다)
구서기: 어디 가신데유?
솔매: 애가 나갔다느만유.
윤서기: 당신 애가 어딨냐고 떠봤네.
구서기: 애라니, 당신 애가 어딨소?
솔매: 거윗집 애가 나갔데유.
윤서기: 거윗집 애가 아니다. 내 다 알고서 하는
소리다.윽박질렀지.
구서기: 거윗집 애가 아니지. 나서 거윗집에 입적시킨거
아니여. 내
다 안게.
(마치 발에 채이기라도 한 듯, 솔매 사람은 그 자리에 몸을
꺾더니 땅짚고 두 번 절하고, 김장용 비닐 장갑 낀 두 손 모아
비벼대면서 울음을 우는지 말을 하는지 웅얼거린다)
솔매: 잘못했어라우. 그애 하나 넘같이 살라고, 넘같이 사는
거 볼라고 벌받은 놈이 하늘 무선 줄 모르고 잘못했어라우.
윤서기: 하나가 아니다. 애들이 다 그 모냥이라고 얼러댔네.
애들이 넘같이 사는 꼴 보려거든 찾지 말고 집 불싸지르고
없어지라고 애들 눈앞에서 없어지라고 소리질렀네.
구서기: 애들은 놔둬. 놔둬야 넘같이 살어. 내 말 듣소.
불싸지르고 오늘밤으로 여길 떠나소.
윤서기: 그러는데 저기 솔매쪽에 불길이 벌겋게 오르더만.
(멀리 밤하늘이 붉게 물든다)
구서기: 저게 무슨 불이여? 자네 집 아닌가?
솔매: 아이구 마누래. 거기서 나오소. 거기 나와.
잘못했어라우.
어허, 일을 어쩌.
(허우적거리며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구서기: 저 불은 어찌 된건가. 누가 질렀어.
윤서기: 이 틈에 애를 잡아야 될 것 같데. 자전거 돌렸지.
구서기: 저 불 누가 질렀냔게.
윤서기: 애 그냥 놔뒀다간 영 다시 잡지 못할 것 같데. 그래
자전거 올라타고 자전거 돌려.
구서기: 그 처녀, 거위집 처녀가 질렀나?
윤서기: 자전거 돌려 탔어. 그랬더니 저쪽에서 여자가 불러.
(윤서기는 바퀴 가늠대에서 두 개 양초 뽑아 밟아서 끈다.
솔매쪽 하늘이 노을처럼 붉다. 무엇에 채인 듯 외마디 소리를
내면서 몸을 꺾어 쓰러진다. 솔매쪽 하늘에 비친 불꽂이 갑자기
사그라든다. 칡흙같은 어둠속에 소방울 소리 소 발굽소리
이어지다가 돌 구르는 듯한 소리되어 멀리 사라진다. 침묵,
구서기가 성냥불을 그어 양초갑에서 초를 꺼내 불당긴다.
윤서기 몸을 세운다)
구서기: 그 다음, 어찌 됐나?
윤서기: 나는 정신을 잃었고, 이 자전거는 갖다 저 아래
솔가지 위에 얹혀 있더랴. 이쪽으로 잔성냥 켜다 버린 것이
한 각이나 되게 거미줄 모냥 널렸고, 여기 줄 끊긴 데 내가
너부러져 있더냐. 그래, 뭐 집히는 데가 있는가?
구서기: (잠시) 소가, 아무래도 소가 지나간 거 아닌가?
윤서기: 소던가?
구서기: 방울 소리에 발굽 소리가 지나갔어. 소에 받쳤다
그러면 구체적인 사건이 되네. 암매장한 처녀가 불러
세우더라는 말하고는 틀려.
윤서기: 그려. 나도 그랬은게. 뭐 받쳤다는 거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어. 그런게 소에 받쳤다 싶더만. 그게
말이여, 받친 거라면 2,3일 그러다 말 일 아닌가.
멀쩡하다가 숨이 가쁘고 잠이 든 것모냥 정신이 멍해 갖고
앉았단게. 그런게 꼭 뭐한테 흘린 것모냥 그려.
구서기: 자네 여기 다시 누어 볼텐가.
윤서기: 누어?
구서기: 그날 그대로 재현해 보자고. 어쩌면 다른 말 해주는
사람 나타날지도 모르네.
윤서기: 누구?
구서기: 아께 자네도 들었지. 저 애찾는 여자 소리가 들렸어.
그 소리에 자네는 본능적으로 촛불을 껐지. 누가 오는가
볼려고. 그러구 나서 자네는 받친 것이고, 자네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에 그 여자가 여기 와 봤을 것이다. 그렇게
추리해 보자고.
윤서기: 맞어. 그 여자가 와 볼 수도 있지. 촛불 보구 내 소에
알았을 거구만.
구서기: 눕게. 정신을 잃은 것이네.
(윤서기 눕는다. 마치 정지됐던 필름을 이전으로 되짚어 놓고
다시 돌리기라도 하듯, 촛불 끄기 전의 상황이 되풀이된다......)
(멀리 밤 하늘이 붉게 물든다)
윤서기: 저게 무슨 불이냐? 자네 집 아닌가?
솔매: 아이고 마누래. 거기서 나오소. 거기 나와.
잘못했어라우. 어허 이를 어찌.
(허우적 거리며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윤서기 자전거 돌려 세우고 올라탄다. 멀리서 여자 소리가
가냘프게 들려온다)
소리: 연지야, 야이 어딨냐 냐여. 연지야. 야이 어딨냐 나여.
(윤서기 촛대를 뽑아 불을 끈다. 어둠속에서 돌 구르는 듯한
소리 들려온다. 차츰 소발굽소리로 변한다. 소방울 소리
들린다. 한참 뒤에 이쪽의 반응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불러
솔가지 부러뜨리는 소리 들려온다. 몇 번 되풀이되고 나서,
삭정까지 밟으며 발소리 다가온다. 솔매집 아낙이 모습을
보인다. 솔매집 사내와 비슷한 차림이다. 더 심하게 부식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움직임이 굼뜨고 체구가 몹시 외잡해서
거위집 둘째 딸애하고 비슷해 보인다. 윤서기를 지켜본다.
흔들어본다. 성냥불 켜서 발밑을 더듬어 본다. 밟아 끈
촛동강을 줏어 불 당긴다. 주위를 살피기보다 자기 소재를
일러주듯이 사방으로 불꽃을 옮겨 본다. 멀리 들리게 혼잣말을
한다)
아낙: 연지야. 집이 가거라. 뵈지야 저 불. 엄니 집 불탔어.
엄니는 떠난다. 여기서 못 살아. 근게 연지야, 널랑 제발
집이 가거라. 잉 아가. 너는 못써. 집 떠나면 너 죽어.
뵈지야 저 불, 엄니 다시 못 와. 제발 널랑 집이 가거라.
아가 내 말 들리지야. 집 떠나면 너 엄니가 찾는다. 말여
집이 가거라. 연지야 행여 동생들 소훌히 말고 내 말 말여.
죽더라도 말어.엄니 병 얼마 안 남았어. 엄니 다시 못 와.
걱정 말고 집이 가거라. 아가 말아.
(아낙은 마치 소지라도 하듯 사처에 대고 불길을 올려 잡다가
절하듯 엎드려 촛불 끄고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비닐옷
구겨대는 소리가 주위를 맴도는 듯 한참 이어지다가 뚝 멎는다.
침묵, 솔매쪽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급히 어두워진다. 구서기
나오고 윤서기 일어나 앉는다)
윤서기: 저 여자 그날 밤 읍내 병원 가서 죽었어. 화상이
심했다네.
구서기: 쉬, 누가 오네. 자넨 눕더라고.
(윤서기 눕고 구서기는 몸을 숨긴다. 아낙이 나간 쪽에서
두런거리는 남정네 소리 들려오더니 감나무집 주인과 머슴이
어둠속에서 불쑥 나온다. 머슴이 윤서기 몸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머슴: 어이쿠 이게 뭐여?
(감나무집 주인이 성냥불 그어댄다)
윤서기 아니라우. 어매 소에 받쳤던갑만.
주인: 뭔 소리여. 택도 없는 소리. 취했어. 술 못이겨
누었구만.
머슴: (성냥불 긋고 땅에 패인 소 발자국 더듬는다) 이쪽으로
뛰었구만. 맞어.
주인: 밤새 뛸 모양이여, 어이 가세.
머슴: 이 양반 어쩐데유.
주인: 나중에 깨나면 어련히 알아서 갈라구. (두 사람 바삐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구서기: 누군가?
윤서기: 감나무집 사람들이여. (잠시) 소에 받쳐갖고 42일간
누웠다. 그럴라면 말이여, 외상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거. 골절을 했다거나 어디 크게 째졌다거나,
말짱한게 말이여. 답답하구만. (상체를 저며 잡는다)
구서기: 기절해 갖고 자넨 언제 깼는가?
윤서기: 이튿날 집이서, 양조장 황석구가 나중에 보구 실어
날렀디야.
구서기: 자네, 뭐 빠쳐먹은 데는 없는가?
윤서기: (잠시) 없어. 없구만.
구서기: 그 처녀 소리는 어디로 갔는가?
윤서기: 처녀?
구서기: 처음부터 처녀가 자네를 따라왔네. 내가 알기로는 저
솔매집 불길이 보일 때까지만 해도 자네는 주위에 처녀를
느낀 것처럼 여겨지는데, 갑자기 이 처녀가 없어졌다, 이
말이네. 처음부터 되짚어 보세. 차근차근 내가 처음부터
짚어볼 테니, 빠진 데가 있거나 달리 생각나는 것이 있거던
중단시키게. (결근게 초안 쪽지를 꺼내서 편다) 이거 자네
결근계 초안이네. 길가에 암장된 처녀가 야밤에 길가는
사람 불러잡는 바람에 절도. 길가에 암장된 처녀. 결근계
첫머리에 처녀가 등장하고 있네. 그리고 자네는 두번째
처녀를 만나지. 거위집 처녀.
# 거위집
(갑자기 거위 우는 소리 울안에서 한참 소란하다. 처녀의 모습)
처녀: 동생은 지가 내보냈이유.
윤서기: 내보내다니?
처녀: 작년에 갓난애 들어왔구만유. 앞집이서.
윤서기: 앞집, 문둥이한티?
구서기: 집 나간 애도 앞집서 데려왔더냐고 자네가 묻네.
그러자 처녀는 되려 자네게 물어보네.
처녀: 그애가 나 여섯 살 때 생겼구만요. 모르겠어라우.
(문득) 걔도 데려왔다우?
윤서기: 내가 물어본게.
처녀: 내가유. 꿈이 저 집 불질렀어라우. 꿈이.
윤서기: 얘가 정신이 있나 지금.
구서기: 솔매집에서 불길이 올랐다. 그 불길 보면서 이 처녀를
연상하는 게 자연스럽잖은가.
# 신틀매 골챙이
구서기: 신틀매 골챙이에서 또 한 여자 소리가 자네를
따라오네. 나중에 솔매집 여자로 밝혀지지만 그 전에
소리만 들렸을 땐, 그 소리로 거위집 처녀를 연상할 수도
있었네. 거기, 아이 자전거 뒷판에 싣고, 달래느라고 촛불
켜대는 데부터 가보세.
(윤서기 자전거 바퀴에 촛불 당긴다. 뒷판에 아이가
매달렸다)
윤서기: 옛날에 국방군 아저씨 한분이 싸움터에서 이기고
돌아오는데, 태극기 휘날리면서 이러고 소리쳤다더라. 나
살아왔이유. 나 살아왔이유. 태극기 없은게 너는 촛불켜고
달리자. 집에 가거든 소리질르거라. 나 왔어라우. 나
왔어라우.
(아이가 외마디 소리 지르면서...... 자전거 내려 뒷판을 잡고 줄
당기듯 뒤로 잡아 끈다. 솔매 사람 나타난다)
윤서기: 어디 가신데유.
솔매: 애가 나갔다느만유.
윤서기: 당신 애가 어딨어.
솔매: 거위집 애가 나갔데유.
윤서기: 거윗집 애가 아니여. 내가 다 안게. 애들 다 갖다
입적시켰지. 큰애 갓난애 다 갖다가.
솔매: 잘못했어라우. 그애 하나 넘같이 살라고.
윤서기: 넘같이 사는 거 볼라거든 없어져. 집이 불싸지르고
없어져. 애들 눈 앞이서 없어져.
(솔매집 쪽에서 불길이 오른다)
솔매: 허어. 마누래 거기서 나오소. (솔매집 나간다)
윤서기: (문득) 내가 갔어. 불싸지르고 없어지란게 불이 나서.
구서기: 가다니?
윤서기: 저기 솔매.
구서기: 언제 갔나. 저 사람 뒤따라갔나?
윤서기: 아니.
구서기: 소에 받친 다음인가?
윤서기: 모르겠어. 갔구만.
구서기: 가서?
윤서기: 처녀가 거기, 거기 있더만.
# 솔매집
(지붕이 낮아 땅에 끌릴 듯이 보이는 외양간 크기 초가가 타고
있다. 처녀가 가면서 불길을 잡으려고 달려들다가 물러나기
반복하면서 울며 소리친다)
처녀: 엄니, 아이고 엄니 불났어. 나와요. 뭘 한다우. 엄니
거기서 나와. 아이고 우리 엄니 타 죽네. 왜 소리도 없어.
엄니. 아이고 내가 엄니 죽이네. 내가 불질렀어라우. 그려,
엄니 꼬슬라 버리라고. 엄니 병 낫으라고. 태워 번지고
낫으라고 아이고 엄니, 내가 무서서 그랬어. 뭘 한다우.
엄니 거기서 나오시오. 나하고 삽시다. 내가 모실 팅게
어서 나오시오. 뭘하고 있디야. 타죽어. 아이고 우리 엄니
죽네. 어서 나오시오. 그러다 죽어. 어쩐디야. 엄니 죽네.
내가 불질렀어. 아이고 엄니, 아이고 엄니. 울 엄니 내가
죽였네. 일을 어쪄. 엄니 아이고 엄니.
(처녀 거동 정지한다. 불길 정지한다. 환청처럼 호면 소리
들린다. 불길 속에 등기소에서 불타 죽은 무리의 모습이
인화지의 영상모양 모습은 보인다)
호명: 박병훈, 성기만, 유석준, 최회복, 조준걸, 김영섭,
김재일, 이방희, 이원백, 이방진, 장동수, 김천의, 박상석,
유순헌, 이병준, 이영환, 조정도, 박중원, 신성우, 허성석,
최창환, 임홍순, 박성곤, 김명학, 김영균, 이수웅, 정차량,
정차룡, 이정일, 임대철, 송홍구, 이건철, 이시복, 정광일,
천두석, 현창욱, 윤정필, 이종백, 이상대, 이내원, 김인관,
정진걸, 정진영, 허광문, 심근석, 환혼연, 정광수, 정광이,
이상래, 엄정원, 백문기, 박정원, 문백현, 장금용, 윤정태,
윤정목.
윤정목 불 지르고 짐 지고 따라와
(한켠에 앉아 있던 당숙이 보시기를 내리쳐 조각을 낸다.
조각을 집어 이마로부터 얼굴을 긋는다.)
당숙: 내가 불질렀다. 그려, 산 사람이나 살자.
호명: 김중길, 박상순, 소남순, 조영호, 최영빈, 이성균,
심희준, 장금용, 장금엽, 최정연, 허광구, 성홍경, 김학수,
유의환, 김원만, 김동철, 유경석, 이방재, 변영환, 김준희,
김인식, 박재환, 신규정, 이남희, 이우경, 김준기, 안종철,
조양일, 홍종욱, 주종근, 이용김, 소기영, 노정윤, 변영훈,
이반복, 정영일, 김원평, 허 혁, 최태화, 이준남, 이인재,
원정국, 소관호, 불지르고 짐 지고 따라와.
(한켠에 앉았던 소관호 보시기를 내리쳐 조각을 낸다.
조각을 집어 이마로부터 긋는다)
관호: 내가 불질렀다. 그려, 산 사람이나 살자.
호명: 김위성, 김수황, 권태무, 강시진, 안영삼, 천길번,
조경수, 정우복, 이재근, 양태오, 신용길, 배수병, 고성진,
안의경, 신종국, 조보근, 이진호, 문백선.
(일시에 정지한다. 모두 잿빛으로 변한다)
# 면사무소
(윤서기와 구서기)
구서기: (결근계 초안 읽는다) 지난달 8일 야근 후 귀가 도중,
신틀매 골챙이에서 야반 질주해 온 3년생 한우에 받쳐
의식불명. 익일 의식은 되찾았으나 이후 고열과 의식이
흐려지는 심한 두통으로 인하여 출근이 불가하였기
결근계를 제출하나이다.
본인 윤 진.